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제3결집과 남방 테라와다(Theravada) 불교/황순일

실론섬 2016. 2. 2. 12:10

제3결집과 남방 테라와다(Theravada) 불교

* 이 논문은 2011년도 동국대학교 연구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졌음.

황순일/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 목 차>

I. 서언

II. 제3결집의 원인

III. 목깔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와 불교전파

IV.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제3결집의 위치

V. 결어

 

<한글요약>

불교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불교적 군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아쇼까(Aśoka)왕에 관해서 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다. 사실상 인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아쇼까왕 비문․석주에 나타나는 아쇼까왕과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전통에 나타나는 

아쇼까왕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붓다고샤(Buddhaghosa)의 까타왓투

(Kathāvatthu) 주석서(Aṭṭhakathā)의 서문에 나타난 제3결집과 관련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제3결집에 관한 제반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남방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담마라자(dhammarāja)

로 나타나는 아쇼까왕의 위상과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에서 제3결집에 가지는 사상적 

위치를 살펴보도록 한다.

 

Ⅰ. 서언

 

남방불교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서 제3결집의 중요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제3결집이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쇼까(Aśoka)왕의 후원 아래 목갈리뿟따띳샤

(Moggaliputtaissa)의 주제로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에서 행해졌으며 이때 정설로 채택된 

분별설(Vibhajyavāda)이 스리랑카로 전해져서 현재 남방불교의 교리적인 토대를 이루었다고 

보고 있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이러한 이야기는 주로 테라와다(Theravāda)로 지칭되는 

남방불교의 빨리어 논서와 주석서에 나타나는 내용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점은 제3결집과 아쇼까(aśoka)왕에 관한 내용들이 남방불교 

문헌들에 한정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1) 아쇼까아와다나(Aśoka-avadana)2)와 같은 북방불교 

문헌들과 법현 현장 등 중국 구법승들이 전하는 아쇼까왕의 이야기에서 제3결집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쇼까왕의 스승 또한 아쇼까아와다나에서 우빠굽따(Upagupta)로 

나타나며 그가 목갈리뿟따띳샤(Moggaliputtatissa)와 동일인인지 아닌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3) 

또한 아쇼까왕의 비문․석주에서는 이웃나라에 불교를 전파한 것이 일종의 국가적 사업으로서 

아쇼까왕 자신의 업적으로 나타나는데 반해서, 남방불교의 빨리어 논서와 주석서들은 불교의 

전파를 전적으로 목갈리뿟따띳샤의 업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4)

1)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29. 
2) 아쇼까아와다나(Aśoka-avadana)에 대한 체계적 연구서로 John S. Strong의 The Legend 
   of King Aśka (Delhi:Motilal Banarsidass, 1983)이 있다. 
3) John S. Strong, The Legend and Cult of Upagupta (Delhi:Motilal Banarsidass, 
    1994), p. 147.
4)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p. 135-136.

 

본 논문에서는 붓다고사(Buddhaghosa)의 카따왓투 주석서(Kathāvatthu aṭṭhakathā)를 중심으로 

제3결집과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다각도로 검토하면서 다양한 쟁점들에 관한 남방 테라와다

(Theravada) 교단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제3결집이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 가지는 위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II. 제3결집의 원인

 

앙드레 바로(André Bareau)는 기원전 244년에서 243년 경 아쇼까(Aśoka)왕 시대에 있었던 

제3결집에서 미래와 과거가 현재와 동일하게 있다는 삼세실유설(sarvāstivāda)이 거부되면서 

인도 북방불교의 대표적인 부파인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가 상좌부(Sthavira)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본다.5) 갠지즈강 중하류 마가다(Magadha) 지역으로 밀려난 설일체유부는 먼저 

갠지즈강 중상류 마투라(Mathurā) 지역으로 이동했고, 계속해서 까쉬미르(Kashmir)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약 1,000년 이상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파로 자리 잡았다.6) 한편 이 결집을 

통해서 마가다 지역에 정설로 자리 잡은 부파를 일반적으로 분별설부(Vibhajyavādins)라 한다. 

이들은 점차적으로 그 영역을 서쪽으로 남쪽으로 넓히게 된다. 그리고 이 분별설부의 지말 

부파로서 화지부(Mahīśāsaka)에 아주 가까운 승려들7)이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Anurādhapura)의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에 자리 잡게 되면서 오늘날 테라와다

(Theravāda)로 불리는 남방불교의 주류로 성장하게 된다.

5) André Bareau, Les Sectes Bouddhiques de Petit Véhicule (Paries:EFEO, 1955), 
   p. 131. 
6) 아쇼까왕 시대 까쉬미르(Kashmir)로 파견된 전도사는 남방 역사서에서 마드얀띠까
   (Madhyāntika) 로 나타나고 있다. 마드얀띠까가 원래 아난다(Ānanda)의 재자로서 
   마투라(Mathurā) 지역의 불교교단을 이끌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불교가 마투라으
   로부터 까쉬미르로 이동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앙드레 바로는 
   보고 있다(André Bareau, Les Sectes Bouddhiques de Petit Véhicule, Paries:EFEO, 
   1955, p. 131). 
7) 바로는 초창기에 이들이 화지부(Mahīśāsaka)와 거의 구별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André Bareau, Les Sectes Bouddhiques de Petit Véhicule, Paries:EFEO, 
   1955, pp. 206-207).

 

이상의 제3결집에 관한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보면 제3결집의 원인은 철저하게 불교부파들 

사이의 교리적인 문제가 된다.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와 분별설부(Vibhajyavādins)의 차이는 

와수반두(Vasubandhu)의 아비달마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 5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8)

8) Abhidharmakośabhāṣya(Akb p. 296): ye hi sarvam astīti vadanti, atītam anāgataṃ 
   pratyu tpannaṃ ca, te sarvāstivādāḥ; ye tu kiṃ cid asti, yat pratyutpanna adattaphalaṃ 
   cātītaṃ karma, kiṃ cin nāsti, yad dattaphalam atītam anāgataṃ ceti vibhajya vadanti,
   te vibhajyavādinaḥ.

 

"설일체유부는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 모두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한편 분별설부는 

현재와 아직 결과를 실현하지 않은 과거의 업은 있고 결과를 실현한 과거의 업과 미래는 

없다고 분별해서 말하는 사람들이다."

 

와수반두의 언급을 통해보면 과거의 업이 어떻게 현재나 미래에 그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 하는

교리적 문제로 두 부파가 크게 대립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의 

빨리어 문헌들은 살펴보면 제3결집의 원인은, 비록 교리적 대립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카따왓투 주석서

(Kathāvatthu aṭṭhakathā)에서 결집과 관련된 불교교단의 분열을 디빠왐사(Dīpavaṃṣa)를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오스카 본 히누버(Oskar von Hinüber)는 디빠왐사가 기원후 35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아마도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빨리어 문헌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9) 이 문헌은 비록 작자미상이지만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의 

마하위하라(Mahāvihāra) 교단 내부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들의 보수적인 경향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10)

9) Oskar von Hinüber, A Handbook of Pāli Literature (Berlin:Water de Gruyter, 1996), 
   p. 89. 
10) Kva p. 5: nigrodho va mahārukkho Theravādānam uttamo. anūnaṃ andhikañ ca 
    kevalaṃ jinasāsanaṃ. kaṇṭakā viya rukkhamhi nibbattā vādasesakā. 

 

"테라와다는 거대한 니그로다 나무와 같이 가장 뛰어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최고의 승리자의 가르침이다. 마치 나무에 있는 가시와 같이 나머지 [17]부파들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붓다고샤는 까타왓투 주석서 (Kathāvatthu aṭṭhakathā) 서문에서 디빠왐샤(Dīpavaṃsa)를 

인용하면서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보수적인 태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아쇼까왕의 불교귀의를 시작으로 제3결집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의하면 제3결집은 불교교단 

내부의 교리적 분쟁을 원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에 

의해 생겨난 혼란 때문에 생긴 것이 된다. 즉 아쇼까왕의 불교귀의 이후 왕가의 후원이 

불교에 집중되자 많은 외도들이 왕가의 후원을 얻기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교단에 

내부적으로 교리적 계율적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11)

11) Kva p. 6: titthiyā hatalābhasakkārā antamaso ghāsacchādanamattam pi alabhantā
    lābha sakkāraṃ patthayamānā bhikkhūsu pabbajitvā sakāni sakāni diṭṭhigatāni: 
    ayaṃ dhammo ayaṃ vinayo idaṃ satthusāsanan ti dīpenti. pabbajjaṃ alabhamāna 
    pi sayam eva kes chinditvā kāsāyāni vatthāni acchādetvā vihāresu vicarantā 
    uposathakammādikaraṇakāle saṅghamajjhaṃ pavisanti.

 

더 이상 [왕가의] 후원을 얻지 못하고 음식과 의복조차도 얻지 못한 외도들은 [왕가의] 후원을 
얻기 위하여 승려로 출가한 후에 자기 스스로의 그릇된 견해들을 가지면서 ‘이것은 올바르다. 
이것은 규범이다.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정식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지도 않은 체,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가사와 승복을 입고 나서 불교 사찰들에 왔다 
갔다 하면서 포살의식 등을 행할 때 승단의 한가운데 [승려인 척 하면서] 들어왔다.

비구 승려들이 승려인 척 행동하는 외도들과 함께 포살․결제를 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7년 동안 
수도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 외곽에 있는 아쇼까라마(Asokārāma) 사원에서 포살이 중단
되었다. 그리고 이 분쟁을 물리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아쇼까 왕의 노력은 몇몇 비구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아쇼까 왕은 당대의 고승인 목갈리뿟따띳샤
(Moggaliputtatissa)를 초빙하게 되고 그와 함께 아쇼까라마(Asokārāma) 사원으로 가서 
불교교단의 내부적 분쟁을 해결하게 된다. 교리적인 질문을 통해 목갈리뿟따띳샤
(Moggaliputtatissa)의 견해 즉 분별설(Vibhajjavāda)을 따르는 승려들과 그렇지 않은 승려들을 
구분한 후 아쇼까왕은 분별설을 따르지 않는 승려들을 교단에서 축출하게 된다.12)
12) Kva p. 7: rājā paṭhamam eva samayassa uggahitattā: na yime bhikkhū aññatitthiyā 
    ime ti ñatvā tesaṃ setakāni vatthāni datvā uppabbājesi.

바로 이전에 스스로 [지혜를] 얻은 왕은 ‘이들은 비구가 아니다. 이들은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알아차린 후에 그들에게 흰옷을 주고 승단을 떠나게 했다. 제3결집의 원인을 
외도들의 분란에 의한 것으로 보는 점은 스리랑카의 중요한 역사서인 마하왐사(Mahāvaṃsa)
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13)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는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Anurādhapura)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보수적인 견해14)와 다른 부파에 대한 편견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13) Wilhelm Geiger, The Mahāvaṃsa or The Great Chronicle of Ceylon (London:PTS, 
    1980) p. 46. 
14) 마하왐사(Mahāvaṃsa)는 외도들의 횡포로 아쇼까라마(Asokārāma)사원뿐만 아니라 
    인도 (Jambudīpa) 전역에서 7년 동안 승려들이 포살을 할 수 없었다고 사건을 확대
    하고 있다 (Richar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p. 133-134). 

 

사실상 이들은 제3결집의 원인을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의 횡포와 불교교단의 교리적 

분열이란 두가지 요소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들이 전자를 

불교교단의 혼란의 원인으로 이야기하고 후자를 아쇼까왕이 개입하면서 혼란을 수습하는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교단에서 승려들을 축출하는 기준이 목갈리뿟따띳샤

(Moggaliputtatissa)의 견해인 분별설(Vibhajjavāda)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 하는 점이 

되면서 이들이 정식 승려인지 원래 외도인지 하는 점은 부수적으로 취급되어 버렸다. 따라서 

아쇼까왕이 분별설을 따르지 않는 승려들에게 흰옷을 주고 승단을 떠나게 했다는 점은 

자신들의 분별설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승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승려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스스로를 분별설(Vibhajjavāda)을 따르는 사람들

이라고 자평하는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 만이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이고 나머지는 

정한 불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리랑카 불교가 동남아시아에 전해진 후 제3결집의 설명에서 불교교단의 

복잡한 분열은 점차적으로 잊히게 된다. 동남아시아 불교의 성립에 관한 중요한 금석문인 

미얀마 남부 몬(Mon) 왕국 담마체띠(Dhammaceti)왕의 깔야니시마(Kalyāṇī sīmā)비문에서 

제3결집이 설명될 때, 교단의 교리적 분열에 관한 내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의 횡포만이 집중적으로 부각된다.15) 즉, 불교교단 내부의 교리적 문제란 진지한 

원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에 의해 과장된 편협한 견해만이 남아버린 것이다.16)

15) Kal pp. 1-2. 
16) 아쇼까왕의 제3결집이 벽화로 묘사된 태국 방콕근교의 프라파톰체디(Phra Pathom 
    Chidi)의 경우 외도들의 불교전향과 횡포가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다(Phra Sri 
    Sudhamvedhi, The Mural Paintings of Phra Pathom Chedi, Bangkok:Attita Printing, 
    2010, pp. 49-50)

 

III. 목갈리뿟따띳샤(Moggaliputtatissa)와 불교전파

 

제3결집을 주도한 인물로서 남방불교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은 목갈리뿟따띳

(Moggaliputtatissa)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제3결집에서 까타왓투(Kathāvatthu)를

설하여 미래에 교단 내부에 교리적 문제가 생겨날 경우에 대비했을 뿐만 아니라 결

집이 끝난 후 계속해서 주변 국가들에 불교전도사를 파견하는 일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아쇼까(Aśoka)왕 시대에 있었던 불교를 주변국가 전파가 왕의

직접적인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아쇼까 비문․석주의 언급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

고 있다.17)

17)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p. 135-136.

 

사실상 아쇼까아와다나(Aśoka-avadana)에서는 아쇼까왕의 스승으로 목갈리뿟따 띳샤가 

아니라 우빠굽따(Upagupta)를 언급하고 있다. 우빠굽따는 여기에서 아쇼까 왕을 위해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84,000 불탑을 건설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점은 유명한 네팔 

룸비니 아쇼까왕 석주의 비문이 아쇼까아와다나(Aśoka-avadana)에서 우빠굽따가 아쇼까왕에게 

룸비니를 소개하면서 “실로 여기가 샤키야족의 성인 붓다가 태어난 곳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고 있다18) 는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18) Vincent A. Smith, Asoka the Buddhist Emperor of India (Delhi:Low Prince Publication, 
    1993) pp. 221-223: hida Budhe jāte Sakyamunī ti

 

스트롱(Strong)은 아쇼까아와다나에 나타난 우빠굽따와 남방 테라와다 역사서 및

주석전통에 나타난 목갈리뿟따띳사의 사이 4가지 유사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

다.19) 먼저 양자 모두는 겐지즈강 중상류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우빠굽따의 거주지로서 우루문다(Urumuṇḍa)를 언급하고 있고 후자는 아호강가

(Ahogangā)20)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루문다는 마투라(Mathurā) 주변의 산에 있는

유명한 사찰로서 샤나까와신(Śāṇakavāsin)이 거주했던 곳21)으로 알려져 있다. 아호

강가가 갠지즈강의 북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양자를 동일한 곳으로 보고 있다. 둘

째 양자 모두 아쇼까왕의 초청을 받지만 곧장 수락하지 않고 한참 고민한 후에 수락

한다.22) 셋째 양자 모두 수도인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로 이동할 때 갠지즈 강을

따라서 보트로 이동했다.23) 마지막으로 양자 모두는 아쇼까왕이 강가에 직접 나와서

환영을 받고 왕의 도움으로 육지에 오르게 된다.24) 물론 아쇼까왕에게 다수의 불교

의 스승들이 있을 수 있지만, 초창기 영국 식민지관료 출신 인도학자였던 와델(L.A.

Waddell)은 주장한 것과 같이 양자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25) 그는 목갈리뿟따

띳사를 우빠굽다의 다른 호칭으로 보고 있는데 Śāriputra가 때때로 Upatiṣya로 불린

다는 점에서 붓다의 상수제자였던 목갈리뿟따와 사리뿟따의 합성어로서 목갈리뿟따

띳사가 일종의 타이틀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빈센트 스미스(Vincent

Smith)와 알렉스 웨이먼(Alex Wayman) 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 John S. Strong, The Legend and Cult of Upagupta (Delhi:Motilal Banarsidass, 
    1994), p. 147. 
20) ‘겐지즈강 북쪽에 있는 산으로부터’(Ahogaṅgāpabbatato) 라고 Kva(p. 6)는 언급
    하고 있다. 
21) John S. Strong, The Legend and Cult of Upagupta (Delhi:Motilal Banarsidass, 1994), 
    pp. 147-148. 
22) John S. Strong, The Legend and Cult of Upagupta (Delhi:Motilal Banarsidass, 1994), 
    pp. 148 -149. 
23) John S. Strong, The Legend and Cult of Upagupta (Delhi:Motilal Banarsidass, 1994), 
    pp. 149-153. 24) John S. Strong, The Legend and Cult of Upagupta (Delhi:Motilal 
    Banarsidass, 1994), pp. 153 -154. 
25) John S. Strong, The Legend and Cult of Upagupta (Delhi:Motilal Banarsidass, 1994), 
    p. 147.

 

그렇다면 우빠굽따 또는 목갈리뿟따띳사로 알려진 아쇼까왕의 불교 스승이 제3결집이후 

포교사를 이웃나라로 전파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쇼까왕의 비문․석주는 아쇼까왕이 자신의 통치영역을 벗어난 이웃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담마를 통한 승리(dhammavijaya)를 얻었음을 언급하고 있다.26) 우리는 아쇼까왕의 국가 대 

국가간의 사업이 불교전파 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기본적으로 비문․석주에 나타난 아쇼까 왕는 모든 종교에 관대했으며27), 그의 담마(dhamma)는 

불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28) 자이나교의 불살생 등과 같은 보편적인 윤리덕목들을 광범위

하게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곰브리치(Gombrich)는 아쇼까왕의 국가적 포교사업을 위해 

파견된 신하들 중에 불교 승려들이 포함된 경우가 있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서 이 시기에 불교가 

주변 국가들로 확장되는 토대가 만들어졌을 것이란 견해를 조심스럽게 제출하고 있다.29)

26) E. Frauwallner,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Rome: Serie Orientale Roma VIII, 1956), p. 15. 이 이야기는 아쇼까 마애비문 
    13번(XIII Rack Edict) 으로 다른 비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길며 칼링가 전쟁
    으로부터 자신의 후회와 비폭력의 다짐 그리고 올바름으로 이해되는 아쇼까의 
    담마에 의한 승리에 관한 내용들이 나타나고 있 다(Vincent A. Smith, Asoka the 
    Buddhist Emperor of India, Delhi:Low Prince Publication, 1993, pp. 184-187). 
27) Étienn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sm, tr. by Sara Webb-Boin, (Louvain:
    Peeters Press, 1988)'p. 253. 1837년 제임스 프린셉(James Princep)에 의해서 
    아쇼까 비문․석주에 사용된 브리미 문자가 해독되면서 아쇼까(Aśoka)왕은 남방 
    역사서와 주석전통에서 나타나 는 것과 같은 가장 이상적인 불교 군주가 아니라는 
    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인도 각지에서 아쇼까왕 비문․석주가 추가적
    으로 발견되면서 아쇼까왕은 단순히 불교만을 옹 호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관대하고 모든 생명들을 존중했으며 모든 백성들을 포용하려 했던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28)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0.
29)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6.

 

프라우발너(Frauwallner)는 아쇼까왕 비문․석주에 나타나는 사신파견 지역과 스리랑카 역사서 

및 주석전통에 나타나는 전도사 파견지역이 비록 사용된 용어들은 다르지만 지역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또한 지적하고 있다.30) 그리고 이러한 전도사의 파견이 아쇼까왕으로 

상징되는 왕가의 후원 하에 당시 불교교단의 지도자였던 목갈리뿟따띳사에 의해 진행되었고, 

왕가의 기록에서는 왕의 업적임이 강조된 반면,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마하위하라

(Mahāvihāra) 교단에서는 자신들에 속한 교단의 출발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최고 지도자의 

업적임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겨난 것으로 본다.31) 그는 적어도 스리랑카와 

히말라야 지역으로 포교사를 파견한 출발점을 아쇼까왕의 수도가 있는 마가다 지역의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가 아니라 오늘날 산치(Sanchi) 대탑으로 잘 알려는 인도 중서부의 

위디사(Vidiśā)로 보고 있다.32)

30) E. Frauwallner,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Rome:Serie Orientale Roma VIII, 1956), p. 17. 
31) E. Frauwallner,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Rome:Serie Orientale Roma VIII, 1956), pp. 17-18. 
32)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5; E. Frauwallner,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Rome:Serie Orientale 
    Roma VIII, 1956), p. 18.

 

흥미로운 점은 산치대탑 주변의 유적에서33) 스리랑카 역사서 및 주석전통에서 히말라야  지역

으로 파견된 것으로 나타나는 Dundubhisara, Majjhima, Kāsapagota의 이름이 언급된 사리함이 

견되었다는 점이다.34) 스리랑카 역사서 마하왐사(Mahāvaṃsa와 디빠왐사(Dīpavaṃsa)는 마힌다

(Mahinda)가 스리랑카로 파견되기 전에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위디샤(Vidiśā)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35) 이러한 점들은 이 당시 이웃나라로의 불교

전파에 위디샤(Vidiśā) 지역의 불교교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3) Étienn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sm, tr. by Sara Webb-Boin, (Louvain:
    Peeters Press, 1988), pp. 304-305; Susan L. Huntington, The Art of Ancient India, 
    Buddhist, Hindu, Jain (NewYork:WeaterHill, 1999), p. 62. 
34) E. Frauwallner,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Rome: Serie Orientale Roma VIII, 1956), p. 19;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p. 135. 
35) E. Frauwallner,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Rome: Serie Orientale Roma VIII, 1956), p. 18 note 3, 4. 

 

스리랑카로의 불교전파가 위디샤(Vidiśā)를 출발점으로 했을 것이란 점을 받아들인다면,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보존하고 있는 경전의 언어인 빨리어의 언어적인 특성에 

관해서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남방불교에서 빨리어는 종종 마가디(Māgadhī)로 간주되면서 

붓다 당시 마가다 지역에서 사용된 언어이자 붓다의 언어라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아쇼까 

비문․석주를 통해서 인도 여러 지역의 Prakrit어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특성들을 살펴보면, 

빨리어는 마가다 지역이 있는 동부지역의 언어적 특성보다 웃자이니(Ujjāyīnī)로 알려진 

서부지역의 언어적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남방불교의 빨리경전이 마가다지역의 

불교교단에서 스리랑카로 전파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문제점은 스리랑카 불교전파가 인도 

중서부 웃자이니와 인접한 위디사(Vidiśā)지역에서 출발되었다는 점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즉 이 지역의 서부방언(Estern Prakrit)을 사용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승하던 승려들이

리랑카로 파견되었음으로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남방 불교권에서 보존되어온 빨리경전이 

서부방언의 특성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많은 불교학자들은 제3결집과 관련된 스리랑카 역사서와 주석전통의 이야기들은 믿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36) 많은 부분에서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의 제3결집 이야기는 

자신들의 부파적 입장에서 증폭되고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또한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남방 테라와다

(Theravāda) 전통에서 증폭되고 과장된 이야기들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 동일하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36) Étienn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sm, tr. by Sara Webb-Boin, (Louvain:
    Peeters Press, 1988), p. 273

 

1837년 제임스 프린셉(James Princep)에 의해서 아쇼까 비문․석주에 사용된 브리미 문자가 

해독되지 전까지 아쇼까(Aśoka)는 인도역사에서 잊혀진 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쇼까 

비문․석주에 나타난 아쇼까왕의 생명존중 사상은 적어도 5명의 스리랑카 왕들에 의해서 

동물살생금지가 공표되면서 실천되었다.37) 그리고 모든 백성들을 포용하려 했던 아쇼까왕의 

이념은 크메르 왕가의 자야와르만 7세에 의해서 백성들의 정신적 물질적 복지를 위해서 병원을 

만들었다는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한시라도 나태하거나 태만하지 않겠다는 아쇼까왕의 정신은 

태국중부 수코타이(Sukhothai)의 랑캄행왕(Ram Khamhaeng)의 비문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38) 이러한 점들은 간접적으로 스리랑카로의 불교전파에 있어서 아쇼까왕의 

역할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7)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4. 38)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4.
38)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4. 

 

또한 아쇼까왕 후원하에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주도로 스리랑카의 포교가 위디사

(Vidiśā) 지역을 출발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제3결집에 관한 이야기가 남방 테라와다 교단의 

부파적 입장을 반영하면서 증폭되고 과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현 근거 없는 이야기로 보기 

어렵다. 많은 정황들이 사실상 이러한 포교사업이 실제로 있었음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남방불교 역사서와 주석전통의 이야기들이 역사적 

진실성을 가지느냐 하는 점이 아니라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제3결집이 어떤 

위치를 가지고 중요하게 다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IV. 남방 테라와다(Theravada) 전통에서 제3결집의 위치

 

곰브리치(Gombrich)는 남방불교 역사서와 주석전통에 나타난 제3결집의 이야기에서 아쇼까

왕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승단의 내부적 교리적 문제에 개입한 왕의 역할을 

왕이란 직책이 가지는 일종의 직업적 위험으로 보면서, 일반신자인 왕이 승려들의 교리적 

문제를 시험하고 판단하고 추방하고 했다는 기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39)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쇼까왕은 왕권이 불교교단의 내부적 문제에 심각하게 개입한 최초의 

왕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제3결집에 관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판단해보면 아쇼까왕의 왕권이란

세속적인 권력을 통해서 가능한 일은 승려들의 사상적 문제를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외도이면서

승복을 입교 승려인 척 하는 사람들을 추려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39)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4

 

사실상 아쇼까왕의 이러한 역할은 남방 불교권에서 이상적인 불교군주의 모습으로 이야기 되는 

담마라자(dhammarāja) 개념과 연결된다. 스웨어러(Swearer)는 아쇼까왕이 일종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이후 동남아시아의 많은 왕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40) 담마라자

에서 담마(dhamma)란 불교를 뜻하며 불교를 보호하고 진흥하는 군주를 뜻한다. 즉 ‘승단을 정화

하여 잘못된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서 [불교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활동을’41) 아쇼까왕 이후의 

불교군주들은 자신들의 의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따라서 제3결집은 남방 불교권에서 왕가와 

불교교단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면서 왕가와 불교교단 사이의 독특한 

호의존관계가 성립되게 된다. 즉 불교교단은 왕가로부터 교단을 유지하기 위한 보시를 

받으면서 왕가에 의존하고, 왕가는 불교의 수호자로서 붓다의 치아와 같은 중요한 사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통해서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다.42) 물론 아쇼까왕의 이야기에서 

그가 불교로 전향하기 이전에 잔인한 아쇼까(Canda Aśoka)왕에서 불교로 전향한 이후에 담마 

아쇼까(Dhamma Aśoka)왕이 되었다는 것은 남방 불교권에서 복잡한 권력의 암투 및 외부의 

투쟁을 통해 왕위에 오른 왕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로서 자신도 아쇼까왕처럼 승단을 정화하고 

승단에 보시하고 불탑을 만들면 이상적인 불교군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43)

40) Donald K. Swearer Buddhist World of Southeast Asia (ChiangMai:Silkworm Books, 
    1995), pp. 72-74; Stephen C. Berkwitz, South Asian Buddhism A Survey, (London:
    Routledge, 2010), pp. 144-145. 
41)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Second Ed. (London:Routledge, 2006), p. 134. 
42) Stephen C. Berkwitz, South Asian Buddhism A Survey, (London:Routledge, 2010), 
    p. 144.
43) Donald K. Swearer Buddhist World of Southeast Asia (ChiangMai:Silkworm Books, 
    1995), p. 75

 

한편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에서 제3결집이 가지는 교리적 위치는 제3결집에서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에 의해서 설해진 카타왓투(Kathāvatthu)를 정점으로 

아누라다푸라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사상적 입장이 최종적으로 정리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카타왓투(Kathāvatthu)는 아쇼까왕 시대에 

북인도에서 만들어진 논서로 보기 어렵다. 노만이 지적하고 있듯이44), 카타왓투에서 논의된 

내용은 붓다고사(Buddhashosa)의 주석서를 통해서 상대학파와 사상이 드러나게 되는데 종종 

여기에 나타나는 내용들은 아쇼까왕으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시대에 마가다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성립된 교리들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44) K.R. Norman, Pāli Literature, A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Vol.VII, (Viesbaden: 
    Harrassowitz, 1983) p. 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은 상카샤(Sāṃkāśya) 전설을 동원하고 

빨리삼장 전체가 불설임을 주장하고 있으며45), 까타왓투 또한 비록 저자가 목갈리뿟따띳사

(Moggaliputtatissa)로 나타나지만 그는 미래에 당시와 같은 복잡한 교리적 혼란이 올 것을 미리 

예측한 붓다가 만들어놓은 순서와 틀에 따라서 설명했을 뿐임으로46) 제3결집에서 설해진 

카타왓투(Kathāvatthu) 또한 불설이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마하위하라

(Mahāvihāra) 교단이 제3결집의 내용을 증폭시키고 과장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숨

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 빨리 삼장의 권위를 확립하고 중요성을 부각하려 했던 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45) Étienn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sm, tr. by Sara Webb-Boin, (Louvain:
    Peeters Press, 1988), p. 183. 
46) Kva pp. 1-2.

 

V. 결어

 

많은 역사학자들은 아쇼까왕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아쇼까왕 비문․석주에 나타난 내용들은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실로서 인정하고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의 역사서와 주석전통에 

나타난 내용들은 당파적이고 비현실적이란 이유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있다. 물론 

마우리야 왕조라는 거대한 제국의 왕이 자신의 이름으로 인도전역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했던 아쇼까왕 비문․석주의 내용은 그 역사성과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방불교의 입김이 잔뜩 들어가 있는 마하왐사(Mahāvaṃsa)와 디빠왐사

(Dīpavaṃsa)의 기술들과 까타왓투(Kathāvatthu) 주석서 등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 또한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임에 틀림없다. 본 논문에서 살펴봤듯이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제3결집에 대한 기술에는 많은 광장과 증폭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을 

현존하는 다양한 자료들과 스리랑카 및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통해서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 이야기들이 전혀 없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조금은 과장되고 조금은 증폭된 이야기의 

이를 분석함으로서 우리는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에서 제3결집이 가지는 위치와 

중요성에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