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소승불교 一考/권오민

실론섬 2016. 2. 4. 23:13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31집 2003․제1권

소승불교 一考

권  오  민(경상대)

 

[한글 요약]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교법)이 그의 자내증(自內證)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그의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른바 ‘소승’으로 일컬어지는 아비달마에서였다. 

 

불타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학)는 결국 인간이성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고 종합하기도 하였으며, 지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중의 어떤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겨지기도 하였고, 어떤 것은 이제 세월에 씻겨 형해만이 남았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소승이다.

 

소승 성문에 의해 작성된 아비달마는 불교학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경전을 결집하였고, 그것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대승’을 자처한 보살승들은 그 같은 해석을 부정하였을 뿐더러 소승의 경전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서 새로운 경전을 결집하였다. 그것은 길고 긴 대립과 항쟁의 예고였다.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불교사상사나 불교학개론서에서는 이 불교에 대해서는 언제나 침묵하든지 혹은 ‘실유론의 입장에서 오로지 자리(自利)만을 주장하는, 불타정법을 왜곡한 이기적인 불교’, 그리하여 ‘마땅히 버려야 할 불교’로 매도하고 있다. 그들이 왜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던가에 대한 교학적 반성도 없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만 원시불교의 연장일 뿐이라고 인식한 까닭에서인가, 혹은 타기해야 할 ‘소승’이기 때문인가? 불교는 결코 ‘구호(口號)’의 이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왜 무상의 찰나멸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실유를 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 혹 제법의 실유를 소박한 실재론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무상의 이치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또한 그들은 왜 한편으로는 3아승지겁에 걸친 보살의 이타행을 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문의 열반을 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 혹 그들이 추구한 열반 자체를 이기주의(egotism)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부 아비달마에 있어 열반이란 제법분별의 예지에 의해 ‘자기’ 혹은 ‘자아’가 해체된 상태로서, 바로 무아의 증득과 더불어 획득되는 것이다.

 

소승이라 일컬어진, 지금도 그렇게 일컬어지고 있는 아비달마불교는 불교철학의 최초의 전개로서, 불교학 상의 거의 모든 문제를 노정시키고 있다. 그것은 대승공관에서 항상 말하듯이 그 자체로서는 열등하지도 않으며, 방편설도 아니다. 그것은 대승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진리설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불타 자내증을 엿보기에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저 불교(佛敎)란 무엇인가? 엄격히 말한다면 그것은 불타의 말씀(Buddha vacana) 즉 불타 교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의 말과 마찬가지로 단어 문장 등을 본질로 하는 그의 말씀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깨달음(自內證)이었다. 결국 불교란 불타의 깨달음을 근거로 하여 이룩된 경․율․논의 삼장을 말하며, 불교학이란 삼장을 소재로 한 전체적이고도 체계적인 학적 이해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불교’와 ‘불교학’은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타의 말씀은 그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서 거기에 일정한 이론적 체계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불타의 깨달음은 말 자체의 의미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시되거나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밑에 감추어진 밀의(密意)는 은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불타가 입멸함에 따라 그것은 더욱 더 은밀해졌고, 그것은 또한 항상 새로운 시대의 언어로 이야기되어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 생동할 수 없으며, 다만 옛 사람이 남긴 말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카슈미르의 정통 유부(有部) 논사인 중현(衆賢, Samghabhadra)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항상 새롭게 해석 간택(簡擇)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지 않는 한 그것은 진정한 불교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불교의 학적 체계는 이미 불타 재세 시 마트리카(matrka,論母)라고 하는 형식으로 시작하여 불타입멸 후 산출된 수많은 아비달마(abhidharma)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시대와 지역에 따른 이론적 반(反)․합(合)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밀교로까지, 혹은 천태 화엄 내지 선종으로까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우리는 대개 그러한 제 체계를 시대적 구분에 따라 원시(초기)불교-아비달마(부파, 혹은 소승)불교-초기대승-중기대승-후기대승의 밀교로 나누기도 하고, 혹은 그 중의 두드러진 각각의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유부 아비달마(바이바시카)․경량부․중관학파․유가행파로, 혹은 중국의 교판가(敎判家)에 따라 소승교․대승시교(始敎)․대승종교(終敎)․대승돈교(頓敎)․대승원교(圓敎)로, 혹은 화엄․아함․방등․반야․법화 열반 따위로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제 체계는 다시 세부적 체계로 나누어져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혹은 종합을 꾀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모두가 불타 깨달음을 근거로 한 그의 말씀의 학적 이해체계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교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지극히 도식적이고 개념적이다. 물론 그것이 학의 대상이 되는 한 어쨌든 ‘차별의 개념’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그 같은 개념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위대한 불교사상가들에 의해 규정되고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학적이해가 종파적이라고 할 경우, 여기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인류역사상 종교집단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해서 중국이나 해동의 불교가들은 ‘원융(圓融)’이라는 또 다른 불교의 이해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학에서 우리의 도식적 이해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대승과 소승의 구분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대개 이러한 것이다. (1) 부파불교는 아라한을 이상으로 삼는 성문승이며, 대승은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승이다. (2) 부파불교는 3계 6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을 여의고자 하는 업보사상이며, 대승불교는 원행사상이다. (3) 부파불교는 자리(自利)의 가르침이며, 대승불교는 자리이타의 가르침이다. (4) 부파불교는 삼세실유 법체항유의 유(有)의 입장이며, 대승불교는 반야지혜에 의한 일체개공의 입장이다. (5) 부파불교는 지극히 형식적이며 번쇄한 철학과 이론을 위한 이론이 많지만, 초기대승에서는 신앙과 실천을 중시하였다. (6) 소승불교는 학문과 이론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 경지는 저속한 것이었고 출가중심의 불교였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고차원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입장에 서며, 나아가 재가불교를 표방하고 평이한 교설을 설하는 가운데 불교의 근본을 잃지 않음을 추구한다.1) 이는 대개의 불교학개론서 내지 대승불교개론서에서 한결같이 진술되고 있는 바이며, 우리가 상투적으로 되뇌이고 있는 대.소승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1) 金岡秀友(안중철 역), 「大乘佛敎總說」(서울: 불교시대사 1992), pp. 153-4.

 

그리고 이같은 도식적 논의의 이면에는 이미 좋고 나쁘다는 판단이 개입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는 적어도 어떤 한 종파적 이념가의 발언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학자의 발언은 될 수 없다. 아비달마의 교학은 중.고등학교 수준으로 대학이나 대학원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식의 논의는 더더욱 그러하다.2) 이같은 논의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던 것인가?

2) 같은 책, p. 154.

 

2.

주지하듯이 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부파(아비달마)불교에 반동으로 생겨난 이른바 대승(Mahayana)에 의해 폄하되어 불려진 명칭이다. 역어로서는 ‘작다’이지만 그 원어 hina(ksulla, 혹은 ksudraka가 아니다)는 ‘마땅히 버려야 할’ ‘저열한’ ‘천한’의 뜻을 지닌 것(그래서 下乘, 下劣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으로, 제불(諸佛) 보살의 어머니라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통해 불과(佛果)를 추구하며 6바라밀을 실천하든 일단의 보살승들이 『소품(小品)』 계통의 반야경전을 작성하면서 스스로의 도를 대승이라 칭하고, 기성의 불교 특히 유부 비바사(毘婆沙)를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불교를 멸시하여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소승인가? 초기대승 교학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따르면 그 이유는 다만 두 가지로서, 첫째는 자신의 이익(열반)만을 설할 뿐 중생을 위한 대 자비심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개아(중생)의 공만을 설하고 일체법의 공을 설하지 않기 때문으로, 그 협소함이 소 발자국에 괴인 물과 같기 때문에 소승이라는 것이다.3)

3)「大智度論」권 제4(大正藏25, p. 85중-86상); 권제31(동 p. 287중); 권제79(동 p. 619하).

 

이처럼 ‘소승’이라는 폄칭의 멸시는 대 사회적 실천구도자인 보살의 이타행과 아(我)․법(法)의 일체개공(一切皆空)이 전제가 되었던 것이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당연시하지만, 그 이면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양자의 관계에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자리이타를 지향하는 그들 보살의 불교는 분명 새로운 불교였지만, 그것은 기존의 상식과 가치에서 벗어난 불교였다. 처음부터 그들은 기존의 불교와는 논의의 출발점을 달리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불타가 남긴 교법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불타를 해석하였으며, 그렇게 해석되어진 불타 즉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지금 여기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하려는 이상을 능동적으로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통해 볼 때 세존 고타마가 남긴 교법, 이를테면 5온․12처․18계의 제법분별도, 12연기의 유전과 환멸도, 나아가 세속의 고(苦)와 열반의 고멸(苦滅)을 설한 4성제도, 그에 관한 지혜[智]도 지혜의 획득도 ‘허망한 것’일 따름으로, 이는 바로 우리가 주문과도 같이 외우는 270자 『반야심경』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반야바라밀다에 대해 당시 성문승들은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대승공관의 일차적 타켓은 기존 성문승, 특히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였으나 그들에게 있어 대승은 애당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대승흥기 이전의 논서인 「6족론」이나 「발지론」은 시기적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대승이 흥기하여 왕성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시기에 작성된 세친이나 중현의 저술 어디에도 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 어떤 논에 의하면 소승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승을 배운 이와는 물조차 다른 강에서 길러다 마셨다고 한다.4)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히라까와(平川彰)은 그 이유를 부파불교의 교리적 결백성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5) 요시모또(吉元信行)는 교학의 전제가 달랐기 때문에 대승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6), 신흥(新興)의 대승은 다만 소수 신출내기의 아마추어였을 뿐이었다. 

4) 吉藏,「三論玄義」(대정장45, p. 3상).
5) 平川彰,「初期大乘佛敎의 硏究」(東京: 春秋社 1968), p. 754.
6) 吉元信行,「阿毘達磨의 思想」(京都: 法藏館,1982), p. 371.

 

현장(玄奘)이 인도에 체재할 무렵(AD.630-644), 이 시기는 이미 대승이 흥기한지 70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도 땅에는 이른바 소승이 압도적이었다. 그가 방문한 불교사원의 수는 총1,196곳으로, 대승(사원116개소에 승려 수 19,400명)보다 소승(638개소에 승려 수 130,130명)이 월등히 많았으며, 대. 소승을 겸학한 곳(139개소, 승려 수 22,900명)도 상당수 있었다.7) 그러하였기에 그들은 아비달마논서 그 어디에서도 대승을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비판한 적이 없었음에도 자신의 학설이 불설임을 누누이 강조하면서,8) 기성의 성문승을 비판이 아닌 부정의 대상(魔)으로 취급하였으며,9) 이에 따라 생겨난 명칭이 바로 ‘소승’이었던 것이다. 

7) Cf. N. Dutt, Buddhist Sects in India(Montilal Banarsidass, 1978), pp. 284-7.
8) 이를테면 無着(Asanga)의「大乘莊嚴經論」권제1(대정장31, p. 591중하)이나
  「顯揚聖敎論」권제20(동 p. 581중)에서는 8가지 혹은 10가지의 이유에서 대승이 
   佛說임을 밝히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하나같이 객관적인 설득력인 결여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1) 만약 대승이 불설(正法)이 아니라 異說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다른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예언하지 않았을 것[不記]
   인가? (2) 대승과 소승(성문승)은 어느 것이 먼저라 할 수 없고 동시에 존재하였던
   것[同行]인데, 어찌 대승만을 불설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3) 대승은 깊고 넓어 
   분별(忖度)을 위주로 하는 이들은 능히 믿을 수 없는 것인데, 그들이 행할 수 없는 
   것[不行]이라 해서 어찌 불설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4) 부처가 아닌 깨달음을 얻
   은 다른 어떤 이가 설한 것이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대승과 부합
   하는 뜻이니, 깨달음을 획득한 자[成就]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5) 만약 그러
   한 부처는 대승을 본질[體]로 삼고, 석가모니불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대승의 
   본질은 단일하기 때문에 깨달음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즉 어떠한 부처도 대승
   을 본질로 한다. (6) 만약 석가모니불은 대승을 본질로 삼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
   문승 역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非體]. 즉 성문승은 불설이기 때문에 진실이며 
   대승은 불설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고 할 경우 이는 크나큰 오류이니, 
   만약 대승(佛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부처가 출현하였을 것이며, 부처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어찌 성문승을 설할 수 있었을 것인가? (7) 대승의 법에 의해
   서만 無分別智를 얻을 수 있고, 무분별지에 의해서만 능히 온갖 번뇌를 깨트릴 수 
   있다[能治]. 이 같은 이유에서 볼 때 대승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8) 
   대승은 뜻이 매우 깊기 때문에 글자 뜻대로만 그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文異]. 
   그러니 글자 뜻에 따라 그것을 불설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대승장엄경론」
   권제1) 이는 요컨대 ‘대승이 최고의 법이며, 부처는 바로 최고의 법을 깨달은 이’
   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논증이기 때문에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대외적으로 표방된 논증이 아니라 ‘대승은 비불설이 
   아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내부용’으로 생각된다.
9) 이를테면「大品般若經」권제16(대정장8, p. 340중)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악마가 법복을 입고 비구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살이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보살
   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일찍이 듣고서 닦고 있는 6바라밀이나 아뇩다라삼막
   삼보리(위없이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를 하루 속히 버려야 할 것이니, 그것
   들은 모두 불법이 아니며 불타의 교법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문장을 꾸며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나아가 대승의 논사들은 그들의 대승경론을 용궁이나 도솔천에서 배워온 것이라고 과장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게도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주장하여 성문 독각은 끝내 불과(佛果)를 이룰 수 없는 종성(種姓)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이 성문이 지향하는 열반에 들지 않으려 하였듯이, 성문은 애당초 불과를 엿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이론상 불과의 증득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즉 부처가 되기를 서원한 보살은 유정의 이익을 본회(本懷,목적)로 삼았기 때문에 유정을 교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악취로 가야하지만, 성문의 경우 순결택분인 4선근의 인위(忍位)에 이르면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는 일이 없어 보살로의 전향이 불가능한 것이다.10) 그런데 보다 우스운 사실은 유식학자이면서도 오성각별설을 부정하고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한 원측(圓測)의 논의이다.

10) 世親(권오민 역),「俱舍論」권제23(서울: 동국역경원 2002), p. 1051-2.

 

"소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지근(未知根) 등의 3무루근을 획득하였거나 인위(忍位)에 이른 자는 이미 성법(聖法)을 획득하였거나 4악도(惡道)를 면하였기 때문에 대승으로의 전향이 불가능하지만 신(信) 등의 5근을 획득하였거나 정위(頂位)에 이른 자는 근기와 종성이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대승으로 전향할 수 있다. 그러나 대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직 보살도를 닦지 않은 한 종성과 근기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성문은 모두 대승으로 전향할 수 있다고 《섭대승론석》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로 볼 때 결정코 [대승으로 전향 발심하지 못할] 무성(無性)의 유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성(定性)의 성문 독각 또한 필시 성불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11)

11) 圓測,「解深密經疏」권제4(한국불교전서1, p. 256하-257상).

 

소승 성문 스스로 인위에 이르러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는 일이 없는 순결택분의 현자나 견도위의 무루지인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 등을 획득하여 이미 성자의 단계(具知根의 경우 아라한과)에 이른 성문은 근기와 종성이 결정되어 있어 결코 다른 종성으로 전향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는데, 대승에서는 아직 자신들의 보살도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적 종성이 아니며, 그래서 전향이 가능하다니, 이 무슨 독선적인 발언인가? 이는 마치 불교도는 어떠한 수행을 하였든 아직 결정된 바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3.

대승은 분명 새로운 불교였다. 그것도 기존의 불교와는 타협점을 갖지 않는, 진보도 발전도 아닌 새로운 혁신이었다. 그들은 불타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타의 말씀(경전)을 결집하였다. 기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불교라고 할 수도 없는, 그리고 그 결함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반야바라밀다의 공관은 주석가들의 피나는 헌신에 의해 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그것은 동점(東漸)하면서 보다 강화되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에 이르러 성문의 아비달마불교는 불교학에서 아예 배제되고 말았으며, 나아가 오늘날에서조차 그 전통이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는 스리랑카 등 남방의 제 불교를 ‘소승불교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역사와 전통의 권위에서 벗어날 경우 - 이는 바로 대승의 특성이기도 하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일체의 세속적 가치는 공이었던 것이다 - 우리의 <세속적> 가치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대승을 다만 역사와 전통의 권위를 전제로 하여 하나의 절대적 이념 내지 추상적 관념으로서 받아드리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들은 관념이 아닌 즉세속적(卽世俗的)인 현실성의 진리체계라고 말하지만, 다시 말해 중관학파에서 말하는 승의제인 공성(空性)은 차별적 세속언설을 초월한 불가설(不可說)의 공성이지만, 그러한 공성은 세속세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세속 그 자체이며, 유가행파에서 말하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은 변계소집으로 전화(轉化)되었던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여 성취되는 세계로서, 그것은 다름아닌 의타기(依他起)의 현실성이라고 말하지만, 원효에 의하는 한 양자는 적극적으로 현실(俗法)과 진실(無爲)을 설명하지 못하며,12) 그가 모든 논(論)의 으뜸이며 모든 논쟁을 평정시킨 주체로 인식한 「대승기신론」 역시 생멸과 진여의 근원으로서 일심(一心)의 실재성을 전제로 하고 그것에 대한 신뢰를 결코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세월의 거리만큼이나 초기불교의 모습에서 일탈한 것일 뿐 아니라 도리어 석존이 비판대상으로 삼았던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13) 

12) 高翊晉,「韓國의 佛敎思想」(동국대 출판부 1988), p. 173-179 참조.
13) 松本史郞(혜원 역),「緣起와 空」(서울: 운주사 1994), p. 25참조.

 

그들은 다같이 현실을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아침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고 여기며, 궁극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분별의 개념이 사라진 언망여절(言忘慮絶), 불가지(不可知)의 집수(執受), 혹은 유무(有無)를 떠난 독정(獨淨)의 세계를 추구하여 현실을 그러한 세계로 여과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과된 세계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무차별 속의 차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일체가 공인 이상 공으로서의 순수동일성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적어도 인도 베단타의 철학자 라마누자가 말한 ‘차별 가운데 동일성(bhedabheda)’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는 없으며, 그러하기에 동체(同體)로서의 대 자비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상의 차별이 배제된 그러한 순수동일성이란 추상의 세계, 이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를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유마거사가 말한 보살의 대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윤리적으로 절대적 가치중립이라 할 수 있는 ‘공’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것은 불가득(不可得)이고 불가설(不可說)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른바 대보살의 원력(願力)은 의지(믿음)의 대상인가, 실행의 대상인가? 대승의 첫걸음은 믿음이고, 그 믿음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대승의 이념인 반야바라밀다였으며, 그것이 바야흐로 보살의 육도(六度) 만행(萬行)의 원천이 되지 않았던가? 대승경전으로서는 비교적 짧다고 할 수 있는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외치고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신명을 바치더라도,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한 칠보를 보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반야바라밀다경』이나 그 핵심인 4구게를 수지 독송하거나 남에게 일러주는 것에 비해 백 분의 일, 백천 만억 분의 일에도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14) 대승에 있어 반야바라밀다란 그야말로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해주는 신령스러운 주문이며, 광명의 주문이며, 위없이 높은 주문이며, 더 이상 이와 동등한 것이 없는 위대한 주문(眞言)인 것이다.

14) 반대로 ‘한 찰나의 마음으로라도 그것을 비방하는 경우, 그 죄는 5역죄보다 무거워 
    천겁동안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하드라도 그것을 능히 다 갚을 수 없다.’(원효, 
    「大慧度經宗要」, 한국불교전서1, p. 480중)

 

4.

반야바라밀다는 제불(諸佛) 보살의 어머니였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중국 삼론종의 대성자 길장(吉藏)은 그의 「삼론현의」에서 유부 아비달마를 비판하면서 ‘소승 근본2부와 18부파는 대승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라는 『문수사리문경』의 경설(왜 이 같은 경설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에 따라 “아비달마는 대승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근본은 대승이다. 그럼에도 말류의 소승은 대승을 듣고도 믿지 않기에 용수보살이 「중론」 등을 지어 이를 타파하였던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15) 이는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니지만, 불타 교법의 근본이 대승이라고 보는 한, 경설에 근거한 이 같은 논의는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승이 소승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이 같은 시각은 그러한 경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오늘날에조차 암암리 승인되고 있으며, 이는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 있어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던 「삼론현의」와 같은 논서에 크게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15) 吉藏,「삼론현의」(대정장45, p. 3상).

 

그렇다면 오늘날 ‘대승이 소승의 근본이 된다’는 논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주지하듯이 근대에 이르러 문헌학에 기초한 실증적인 불교연구가 학계에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원시(혹은 초기)불교․부파(혹은 아비달마, 혹은 소승)불교․대승불교․밀교라는 인도불교의 시대적 구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종래 교상판석(敎相判釋)에서 소승교 혹은 아함시로 일컬어지든 것이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로 나누어짐에 따라 원시불교 연구자는 그것의 발전된 형태인, 혹은 대승으로부터 타기의 대상이 되었던 부파불교 즉 아비달마불교와는 다른 그 자체만의 정체성을 추구하게 되었고(이 같은 생각을 더욱 밀고 나가 ‘근본불교’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을 특히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전통에 빛났든 대승불교에서 찾기도 하였다. 그래서 원시불교에서의 연기를 시대를 뛰어넘어 대승 공관에 기초하여 해석하기도 하였고,16) 급기야 혹자는 원시(근본)불교는 대승불교와 그 근본에 있어 차이가 없다고도 하였다. 

16) 이를테면 일본의 우이 하쿠쥬(宇井伯壽)가 초기불교의 연기를 대승의 상의상관의 관계로
    해석한 최초의 인물이다.(「印度哲學硏究」2, 東京: 岩波書店1965재간, pp. 318-324)

 

한편 불교학의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짐으로써 ‘대승 비불설(非佛說)’이 본격적으로 제기됨에 따라 대승의 연원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을 부파불교 중의 진보적 성향의 부파, 나아가 원시불교에서 찾기도 하였다.17) 그리하여 혹자는 급기야 대승을 원시불교의 이론적 귀결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이론적 귀결이라면 대승경전은 무엇 때문에 결집하였을 것인가? 그것은 논서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닌가?) 이렇듯 원시불교는 대승에서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며, 대승불교는 원시불교에서 그 뿌리를 구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잘 짜여진 한편의 각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17) ‘근본불교’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일본의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治)는 그의 
    「근본불교」에서『반야경』의 空觀은 원시불교에서의 수보리의 공관을 계승한 것이
     고,『법화경』의 諸法實相과 開示悟入의 사상은 근본불교의 法사상 또는 석존의 인격
     에 연유하였으며, 아미타불이나 미륵신앙은 석존의 인격과 법사상 또는 生天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朴京俊, 「大乘經典觀 定立을 위한 試論」, 「한국불교학」
     제21집, 한국불교학회 1996, p. 169)

 

그런데 이 같은 노력이 도대체 왜 필요하였던 것인가? 불타 깨달음의 진실을 밝혀내고자 함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필경 ‘소승 아비달마’라고 하는 사상적 족쇄와 시대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것이리라. 이 불교는 그들 불교사상사에 있어 마구니(魔)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든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장의 이해처럼 근본에서 말류가 나오는 법이므로 대승으로부터 소승 제 부파가 출현하였더라면 얼마나 용이하였을 것인가? 그렇지만 대승의 뿌리는 원시불교이며, 원시불교는 대승과 근본적으로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한다면, 결국 근본에서 말류가 출현하는 것이라는 길장의 이해는 정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습지 않는가?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부파불교 내의 상좌부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종교이며, 설일체유부의 경우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연구는 차치하더라도 인도에서만 거의 천년의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18) 남방 상좌부의 경론(經論)은 그만두더라도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한역본(漢譯本)의 비담부(毘曇部) 논서만도 신구(新舊) 28부, 『대정신수대장경』으로 4천여 페이지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앞뒤 거두절미한 채 부파불교를 다만 근본불교의 왜곡으로 치부하는 만용을 서슴지 않는다. 무엇을 왜곡하였다는 것인가? 대승불교를 왜곡하였다는 것인가, 불타 깨달음의 근본을 왜곡하였다는 것인가? 불타 깨달음의 근본이 대승이므로 그게 그거란 말인가? 이제 대답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왜곡하였는지를, 왜곡의 구체적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18) 대승이 흥기한 이후에도 부파불교는 여전히 존속하였다. 차마 말하기도 구차스러운 
    이 불교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 중의 하나는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는 소멸
    해버린 것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승의 강력한 도전 속에서
    도 그들은 여전히 존속하였으며, 그것도 압도적이었다. 이른바 소승은 다수였고 대승
    은 소수였으며, 소승은 기성의 전문가들이었고 대승은 신출의 아마추어였다.

 

제법의 실유(實有)를 주장하였기 때문인가? 그리고 자리(自利)의 열반을 설하였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그들은 무상의 찰나멸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실유를 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19) 혹 제법의 실유를 소박한 실재론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무상의 이치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19) 졸고, 「아비달마불교의 새로운 인식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 제27집(한국불교학회 
    2000), pp. 139-142참조. ‘찰나멸’이란 무상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유부의 法相 용어이다. 
    그들에게 있어 시간이란 다만 유위 제법의 유전변천을 가설한 개념으로, 사실상 ‘법(존재)’
    과 ‘찰나’는 동의어였다.(Th. 체르바스키,「소승불교개론」권오민역, 서울: 경서원 1986, 
    p. 96)

 

나아가 열반이란 무엇인가? 아니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세속과 열반 사이에 가로놓인, 우리로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그 강을 무슨 수로 건너갈 것인가?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은 결국 세속적인 것밖에 없지 않는가?(세속도 공이고 열반도 공이며, 따라서 ‘건너간다’고 하는 생각자체가 허망된 분별이라고 한다면, 혹은 저편에서 누군가가 손을 잡아준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또한 그것은 자력에 의해서인가, 타력에 의해서인가? 괴로움은 주체적인 것이다. 남의 실연은 일상이지만 나의 실연은 우주의 무게로 다가온다. 남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나의 죽음은 종말의 비극이다. 그것은 나만이 느끼는, 나만의 고통이다. 그 실연을, 그 죽음을 누가 대신 감내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또한 나의 몫이다. 그러기에 자리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혹 그들이 추구한 열반 자체를 이기주의(egotism)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집착 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모든 속박을 끊고 괴로움과 욕망이 없는 사람, 미움과 잡념과 번뇌를 벗어 던지고 맑게 살아가는 사람, 거짓도 없고 자만심도 없고 어떤 것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 이미 강을 건너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떤 세상에 있어서도 삶과 죽음에 집착함이 없는 사람,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다니며 다섯 가지 감각을 안정시켜 달이 월식에서 벗어나듯이 붙들리지 않는 사람, 모든 의심을 넘어선 사람,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사람, 이것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사람,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생각이 깊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사람,”20) 이러한 이를 이기주의자라 해야 할 것인가? 

20)『숫타니파타』490-503; 법정 옮김, 같은 책(서울: 이레1999)의 표제어.

 

유부 아비달마에 있어 열반이란 제법분별의 예지에 의해 ‘자기’ 혹은 ‘자아’가 해체된 상태로서, 바로 무아의 증득과 더불어 획득되는 것이다.21) 우리는 현실적으로 끊임없는 욕망을 통해 ‘자기’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함에 일체의 욕망이 끊어진 자의 삶을 두고서 이기주의 혹은 개인주의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혹여 그 같은 현상적 자아를 초월하는 선험적인 또 다른 자아가 있으며, 아비달마불교는 중생의 고통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그러한 존재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지극히 대승적인 발상일 따름이다. 유여든 무여든 열반은 가장 뛰어난 승의(勝義)의 법으로서, 그것의 증득 자체가 바로 진리의 시현 즉 법시(法施)이기 때문에 결코 중생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21) 제 부파 중 어떠한 경우라도 ‘지속’의 관념, ‘자아’에 상응하는 관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일체유부 뿐이다. 예컨대 존재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자아에 비견할만한 개
    념으로 정량부에서는 부실법(不失法)을, 대중부에서는 섭식(攝識,일체의 심․심소를 
    낳는 근본식)을, 상좌부에서는 유분식(有分識,존재의 근거가 되는 식)을, 독자부에서
    는 비즉온비리온(非卽蘊非離蘊)의 보특가라(補特伽羅)를, 설전부에서는 일미온(一
    味蘊)을, 경량부에서는 종자설(種子說)의 이론을 제출하였으며, 그밖에도 수계(隨界) 
    훈습(熏習) 공능(功能) 증장(增長)과 같은 개념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몇몇은 대승유식의 선구로 알려지지만, 전통적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무아설에 정면으
    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워하는 자들 속에서 자애로운 자, 폭력의 무리들 속에서 평화로운 자, 집착하는 자들 속에서 집착하지 않는 자, 나는 그를 바라문(성자)이라고 부른다. 상냥하고 교훈적이며 진실된 말만을 하는 자, 자신의 말로 아무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는 자, 나는 그를 바라문(성자)이라고 부른다."

22) 《법구경》 제26장 406․408송.

 

초기경전 상에서는 열반을 성취한 이 같은 성자를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이’로서 인류의 영원한 사표(師表)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비달마불교에서는 그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그들은 한편으로는 3아승지겁에 걸친 보살의 이타행을 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문의 열반을 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 불타와 아라한은 동일한 지혜를 획득하였음에도 어째서 그 공덕이 다른 것인가?

 

우리는 2천년 전 대승이 일어날 무렵 대승의 논사들이 던졌던 비판을 중국의 대승교가(大乘敎家)를 거쳐 지금도 마냥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소승은 자리(自利)를 주장하지만 대승은 자리이타를 설하며, 소승은 실유를 주장하지만 대승은 일체개공을 설한다.” 앞뒤의 전모는 생각하지 않은 채, 설법에서도, 개론서에서도, 논문에서도. 그 당시로서는 이른바 ‘소승’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같은 소승의 성문승도 존재하지 않는데 누구를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이를 동남아시아 제국의 불교에 적용시킬 것인가? 대상이 없는 비판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과 같다. 불교는 결코 도식적인 구호의 종교가 아니다. 

 

5.

우리는 과연 어떠한 프리즘도 통하지 않고서 진실 그 자체(불타의 깨달음)로서 불교를 해석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프리즘을 통해 불교를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불교를 보고 있을 따름이다. 원효의 말대로 우리는 결국 우리가 익혀온 바에 따라 불교를 해석한다. 그리고 고집한다. 정녕 허심탄회하게 불교를 탐구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다원화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또 다른 역사와 전통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종교간의 대화를 말하면서도 이 불교에 대해서만은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있다. 이 불교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대승을 논의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 불타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학)는 다만 탐구와 해석, 그리고 그에 따른 깨침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깨달음’으로 여길 경우 수많은 종파적 독선을 낳게 될 것이며, 이는 도리어 불교에 반(反)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대승의 가장 위대한 논사로서 제2의 부처로까지 불려지기도 하는 용수(龍樹)가 원측에 의해 서원 발심의 단계인 초지(初地)의 보살(極喜大菩薩 즉 極歡喜住菩薩)로 일컬어졌다는23)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2천 5백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다만 탐구과 해석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절실히 요청되는 바로서, 적어도 그것만은 진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3) 圓測,「解深密經疏」(앞의 책, pp. 217하-218상).

 

초기(혹은 아비달마)불교에 의하면, 세계란 단일하고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찰나찰나 간단없이 일어나는 연속적인 경험들의 인과적 연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계를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또한 믿는(집착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그러한 특성의 사유와 언어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장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불교에서의 언어란 그것에 의해 의미되는 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화자의 의도와 관계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방편(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간과한 채 영속 단일 보편의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 또한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와 세계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란 한편으로 세계를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지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중관과 유식에 이르러 더욱 철저하게 논의되기도 하지만, 불교(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책상은 다양한 부품의 집합이며 변화하지만,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책상’은 그 자체로서 단일하고도 영속적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라고 하면 부동 단일의 실체, 뭔가 하나의 통일적 체계로 생각되지만, 불교(학)는 결코 단일 보편의 그 어떤 체계가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 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교법)이 그의 자내증(自內證)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그의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같은 2500년의 도정을 무시하고 불교를 ‘하나’로 묶어서 바라보려고 한다. 자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 무자성의 공을 논의하고 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언망여절(言忘慮絶) 불입문자(不入文字)를 외치기도 한다. 이는 불교를 전체적으로 하나로 보려는 동아시아불교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이 점이 불교를 어렵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불교(Buddhism)’는 존재하였던가?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religion이 ‘종교’로 번역되기 이전에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학(佛學) 혹은 불도(佛道)만이 존재하였을 따름이다. 혹여 불교라는 말이 존재하였다면 그것은 다만 ‘불타의 말씀(Buddha vacana)’ 정도의 의미였다. 

 

불교가 ‘대승’이라는 이름하의 보편체계로 해석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전후의 사정은 다르지만 유교가 한때 주자학으로만 해석될 때에도 그러하였다. 무엇이 대승불교인가? 고정된 실체로서의 대승불교는 과연 존재하는가? 아비달마불교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 역시 불타 깨달음을 탐구하고 해석한 하나의 갈래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갈래 또한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그것에 의해 폄칭되었던 소승 역시 그러하다. 

 

부파불교라고 함은 다수의 부파를 전제로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일미(一味)의 교단이 대중부와 상좌부로 나누어진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며, 상좌부로부터 다시 설일체유부가,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독자부가 분파되고, 계속하여 화지부가, 음광부가, 경량부가 분파된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오늘날 다시금 ‘무아윤회’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2천년 전 그들 부파 사이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부파분열을 초래하게 하였던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는 그것을 간과한 채 자의에 따른 또 다른 아비달마를 산출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왕의 아비달마를 ‘왜곡’이라고 외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왜곡한 것일까?

 

아무튼 소승이라 일컬어진, 지금도 그렇게 일컬어지고 있는 아비달마불교는 불교철학의 최초의 전개로서, 불교학 상의 거의 모든 문제를 노정시키고 있다. 그것은 대승공관에서 항상 말하듯이 그 자체로서는 열등하지도 않으며, 방편설도 아니다. 그것은 대승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진리설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불타 자내증을 엿보기에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