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구법승의 기록/대당서역기

대당서역기 제7권

실론섬 2016. 2. 9. 21:13

대당서역기 제 7 권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8. 중인도와 북인도[5개국]

 

1) 바라닐사국(婆羅斯國)

바라닐사국1)의 둘레는 4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2)은 서쪽으로 긍가하에 접해 있는데, 길이는 18∼19리이고 너비는 5∼6리이다. 마을이 즐비하게 서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으며 집마다 엄청난 부가 넘쳐나고 방마다 신기한 재화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세속에서는 학문을 익히는 데 힘쓰고 있다. 외도를 믿는 자들이 많고 불법을 따르는 자는 적다. 기후는 온화하여 곡식이 풍성하다. 과실수들은 가지가 무성하고 우거진 풀들은 바람에 부드럽게 하늘거리고 있다. 

1) 범어로는 b r as , v r as 이며 오늘날의 베나레스(Benares)이다. 이 지역의 옛 이름인 

   K 는 오늘날에도 독자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는 K -Banaras로 불리고 있다.

   『법현전』에도 '가시국(迦尸國) 파라내성(波羅▩城)'이라고 하고 있다. 고대 인도의

   16대국 가운데 하나로서 중인도에서 수륙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상업무역의 중심지였다.
2) 나라의 도성은 서쪽으로는 긍가하에 임해 있으며, 지금의 베나레스는 갠지스강을 

    동쪽에 두고 그 서안(西岸)에 위치해 있다.

 

가람의 수는 30여 곳이며 승도는 3천여 명 있는데, 모두들 소승(小乘) 정량부(正量部)의 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天祠)는 백여 곳이나 있으며 외도들의 수는 만여 명이다. 그들은 대부분 대자재천을 섬기며 받들고 있는데, 어떤 이는 머리카락을 잘랐고 어떤 이는 상투를 틀었다. 옷을 입지 않고 온몸을 다 드러내었으며 회반죽을 몸에 바르며 정진 고행하면서 생사를 벗어나기를 구하고 있다.

 

큰 성 안에는 천사가 20여 곳 있는데3)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누각과 사당은 조각된 돌과 나무로 장식되어 이다. 무성한 숲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맑은 물이 이리저리로 흐르고 있다. 유석(鍮石)으로 만들어진 천상(天像)은 크기가 백 척이 조금 못 되는데 위엄 있고 숙연하며 늠름한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다.

3) 『석가방지(釋迦方志)』에서 이 나라의 외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천사는 백여 곳, 

   외도는 만여 명 있는데 대부분이 대자재천(大自在天)의 근(根)을 섬기고 있다. 큰 성

   안에는 천사(天祠)가 20군데 있으며 천근(天根)의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한다"라고 하고

   있다. 현장이 말하는 대자재천(시바신)의 근이란 남근(男根)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힌두교도들은 이 지역을 오늘날에도 7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으며

   참배객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큰 성의 동북쪽에 파라닐하(婆羅河)가 있는데, 그 강의 서쪽에 솔도파가 있다.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으로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한다. 앞에 돌기둥을 세워 놓았는데4) 짙푸르러 마치 투명한 청동거울과도 같고 매끄러우면서도 섬세하며, 그 속에는 언제나 여래의 그림자가 나타나곤 한다.

4) 지금의 베나레스시 동북쪽의 Lat Bhairon에 단편(斷片)이 된 돌기둥이 있다. 지금은 

   붉게 칠해져서 이슬람교도의 예배소(禮拜所) 가운데에 있지만 이것이 아육왕 석주라는

   것은 V.A. Smith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1908년 폭동에 의해 파괴되었다.

 

파라닐강의 동북쪽으로 10여 리 가다 보면 녹야(鹿野)가람5)이 있다. 가람은 8등분으로 경계가 나뉘어 있는데 울타리가 연이어 빙 둘러쳐져 있다. 겹겹이 연이은 처마와 드높은 누각은 그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승도는 1천5백여 명 있는데, 그들은 모두 소승 정량부의 법을 배우고 있다. 큰 울 안에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에 달한다. 위에는 황금으로 암몰라(菴沒羅) 열매를 조각해 넣었다. 기단과 계단은 돌로 만들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감실[層龕]은 벽돌로 만들었다. 감실은 건물의 4방을 빙 둘러싸고 있으며 그 계단은 백을 헤아린다. 계단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새겨져 있다. 정사 안에는 유석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는데 크기가 여래의 몸과 똑같으며 법륜을 굴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5) 지금의 베나레스 북쪽 약 4마일 떨어진 지점, 사르나트(S rn th)이다. 옛날 니구율타(尼拘律陀)가 

    사슴을 위해 보시한 곳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Dh mekh탑 외에는

    눈에 뜨이는 커다란 유적지는 없지만 현장이 기술한 2백여 척이나 되는 거대한 정사의 터나 불전·

   탑·승원 등의 유적과 빼어난 조각이 아주 많이 발견되었다. 굽타시기 불교미술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현장이 다녀갈 당시 가장 성황을 이루었으나 13세기 무렵 외교도의 침입이래 폐허가 되었다.

 

정사의 서남쪽에는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6)이다. 기단이 허물어지긴 하였지만 그래도 백 척이 넘는다. 앞에 세워 높은 돌기둥7)은 높이가 70여 척에 달한다. 돌은 윤기를 머금고 있으며 거울처럼 사물을 맑게 비춘다. 이곳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온갖 영상들을 볼 수 있는데 이따금 선악의 상(相)을 보는 자도 있다. 여기는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에 초전법륜하신 곳이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아야교진여 등이 보살이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보살 모시기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와서 스스로 선정을 익힌 곳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5백 명의 독각(獨覺)8)들이 똑같이 열반에 든 곳이다. 또한 솔도파가 세 개 있는데 과거 세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6) 오늘날 Dharmar jika St pa이며 1794년에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 아육왕이 세웠던 것을 

   여섯 차례에 걸쳐서 수리한 것이며 벽돌로 만들어졌다.
7) 정사의 서쪽에는 현재 18.5미터, 직경 80센티미터의 잘려진 기둥이 있다. 본래는 높이 45.7미터의 

   것이었다. 기둥 머리 부분의 4두(頭)사자의 장식은 산치와 같은 형태이며 좀더 완전한 것이다. 현재

   사르나트 박물관에 있다.
8) 범어로 pratyeka-buddha라고 한다. 홀로 수행해서 깨달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이다. 벽지불(辟支佛)

   이라고도 하고 또는 다른 인연에 의해서 깨닫기 때문에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세 분의 부처님께서 거니시던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매달려야(梅呾麗耶)9)[당나라 말로는 자(慈), 즉 성(姓)이다. 구역에서는 미륵(彌勒)이라고 하는데 잘못되었다]보살이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곳이다. 옛날 여래께서 왕사성 취봉산(鷲峯山)에 계실 때 여러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미래에 이 섬부주의 땅이 평화로워지고 사람들의 수명은 8만 세가 될 때, 바라문 가운데 자씨(慈氏)라는 아들이 나올 것이다. 그의 몸은 순금색이며 눈부시게 빛날 것이다. 그는 출가하여 정각을 이룰 것이며 널리 중생을 위하여 세 번의 법회10)에서 설법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제도 받는 자들은 모두 다 지금 나의 유법(遺法)에서 복을 심은 중생들이다. 그들은 3보에 대해서 깊이 일심으로 존경하며,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났거나 계율을 지녔거나 범하였거나 모두 다 교화되고 인도될 것이며 해탈과(解脫果)를 얻을 것이다. 3회설법(會說法) 가운데 나의 유법의 무리들이 먼저 제도될 것이며, 그 후에 곧 같은 연이 있는 착한 벗들이 교화될 것이다."

이 때 자씨보살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디 제가 그 자씨세존(慈氏世尊)이게 하소서."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말과 같이 마땅히 이런 과보를 증득하게 되리니 위에서 설한 바는 모두 그대가 교화하는 모습이다."

9) 범어로는 maitreya이며 미륵을 말한다.
10)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 화림원(華林園) 안에 있는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차례의 

    법회를 열어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자씨보살이 수기 받은 곳11)에서 서쪽으로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석가보살이 수기 받은 곳이다. 현겁(賢劫) 중에 인간의 수명이 2만 세일 때 가섭파불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미묘한 법륜을 굴리셔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인도하셨는데, 이 때 호명(護明)보살에게 수기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미래에 중생의 수명이 백 세일 때 성불하게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할 것이다."

11) 이 탑이 현재 있는 Dh mekh탑이라고 한다. 높이는 백여 척, 평면은 원형이고 탑신(塔身)의 

   상층은 벽돌로 만들었고 하층은 돌로 만들었다. 주벽(周壁)에는 곱고 화려한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지역에 현존하는 유적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석가보살이 수기를 받은 곳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다. 길이는 50여 걸음이고 높이는 7척은 됨직하다. 푸른 돌을 쌓아 올린 뒤에 여래께서 거니시는 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형상이 매우 특이하고 빼어나며 위엄 있고 숙연하다. 육계(肉髻) 위로 머리카락이 나왔는데 신령스러운 그 모습은 숨김이 없고 신이한 기적이 은밀하게 나타난다. 그 담 안에는 성스러운 유적지가 매우 많아서 정사(精舍)들과 솔도파의 수가 백여 곳을 헤아리는데, 자세하게 기술하기가 매우 곤란하므로 간략하게 두세 가지만 들어서 설명하기로 한다.

 

가람의 담 서쪽에 맑은 못이 하나 있다. 둘레는 2백여 걸음이 된다. 여래께서 예전에 그곳에서 목욕하셨다. 그 서쪽에 큰 못이 또 하나 있는데 둘레는 1백 80걸음이며 여래께서 예전에 그곳에서 발우를 씻으셨다. 그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또 하나의 못이 있는데 둘레가 1백 50걸음이며 여래께서 예전에 그곳에서 옷을 세탁하셨다. 이 세 연못12)에는 한결같이 용이 살고 있는데 그 물이 매우 깊고 맛 또한 달다. 맑고 깨끗하기 그지없으며 언제나 그 수위가 한결같아서 불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마음으로 이 못에서 세탁을 하려 하면 대부분의 경우 금비라수(金毘羅獸)13)가 해를 입히는 일이 많다. 만일 깊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 물을 마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여래께서 옷을 빤 못 옆에 크고 반듯한 돌이 있는데, 그 위에는 여래의 가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무늬가 선명하여 마치 조각을 해놓은 것과도 같다. 깨끗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언제나 이곳으로 와서 공양을 올리고 있으며, 외도나 흉폭한 사람들이 이 돌을 경멸하여 발로 밟으면 못 속에 사는 용왕이 이내 비바람을 일으킨다.

12) 석가모니부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연못은 아마 오늘날의 Naya, Sarang, Candra의 

    세 곳으로 추측된다.
13) 범어로는 kumbh ra이며, 『현응음의(玄應音義)』 5권에는 "교룡(蛟龍)을 범어로 궁비라(宮毗羅)

    라고 말한다. 음(音)은 교(交)이다. 비늘이 있는 것을 교룡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금비라마갈어야차대장(金毘羅摩竭魚夜叉大將)'이라는 말도 있으므로 어쩌면 악어를

    신격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연못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 상아를 여섯 개 가진 코끼리왕의 몸으로 태어나셨다. 그런데 사냥꾼이 이 상아를 탐내어 몰래 가사를 입고 활시위를 당기고서 사로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곳은 코끼리가 그의 가사를 보고 존경하는 마음에 결국은 상아를 뽑아서 그에게 준 곳이다.

 

상아를 뽑아준 곳 옆으로 멀지 안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에 이 세상에 예(禮)가 없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새의 몸으로 나타나서 원숭이와 코끼리와 함께 문답을 주고받던 곳이다. 그들은 누가 제일 먼저 이 니구율 나무를 보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각자 그 동안 자신이 살아온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른과 아이의 순서가 정해졌고, 그 교화는 모든 곳에 미치게 되어 사람들은 위아래를 알게 되었고 출가한 이나 집에 있는 이들이 귀의하게 되었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숲 안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 제바달다와 함께 사슴왕이 되어 어떤 일을 결정하던 곳이다. 옛날 이 큰 숲 속에는 각기 5백여 마리로 이루어진 두 무리의 사슴떼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나라의 왕이 그곳으로 사냥을 하러 나왔다. 보살인 사슴왕이 앞으로 나아가 왕에게 청하였다.

"대왕께서 들판에 울타리를 치고 사냥하시면서 불을 놓고 화살을 비처럼 쏟아 부으시니 우리 사슴떼의 목숨은 오늘로 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루도 못되어 썩어버리고 말 것이요, 결국은 대왕의 음식으로 쓰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차례를 정하여 날마다 사슴 한 마리씩을 보내 드린다면 왕께서도 신선한 고기를 잡숫게 될 것이고 우리들도 이 짧은 목숨이나마 연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서 가마를 돌려 돌아갔다. 그리하여 두 무리의 사슴들은 정해진 차례대로 왕에게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제바의 사슴떼 중에 새끼를 밴 암사슴이 한 마리 있었다. 이 암사슴은 자기가 죽을 차례가 되자 왕인 제바에게 가서 말하였다.

"나는 죽어도 좋으나 뱃속의 새끼는 아직 차례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슴왕이 분노하여 말하였다.

"누구는 목숨이 소중하지 않단 말인가?"

이 암사슴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왕은 어질지 못하니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죽고 말겠구나."

그리하여 황급히 보살인 사슴왕에게 가서 이 사정을 말하였다. 그러자 사슴왕이 말하였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이 참으로 가련하도다. 그 사랑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도 못한 새끼에게까지 미치는구나. 그러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왕에게 나가겠다."

그리하여 보살 사슴왕이 궁궐 문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길가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하였다.

"저 위대한 사슴왕이 지금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도시에 사는 신분이 높고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누구 하나 달려 나와 구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도 이 소식을 들었으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문지기가 왕에게 보고하자 그제야 왕은 그 소식을 믿고서 사슴왕에게 나가 물었다.

"사슴왕이 무슨 일로 왔는가?"

사슴왕이 말하였다.

"암사슴이 죽을 차례였으나 뱃속의 새끼를 아직 낳지 않았으므로 그 일을 불쌍히 여겨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경탄하며 말하였다.

"나는 인간의 몸을 한 사슴이고, 그대는 사슴의 몸을 한 인간이로구나."

이에 모든 사슴들을 다 놓아주고 다시는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곳을 사슴들의 숲으로 만들어 주니, 이로 인하여 그 숲을 시록림(施鹿林)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녹야(鹿野)라는 이름은 이 때부터 생기게 된 것이다.

 

가람의 서남쪽으로 2∼3리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3백여 척이 된다. 그 기단의 터는 매우 넓고 우뚝 솟아있는데 온갖 진귀한 장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는 층감(層龕)이 없고 복발(覆鉢)이 놓여있다. 표주(表柱)가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윤탁(輪鐸)이 없다. 그 옆에는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아야교진여 등 다섯 사람이 스스로 다짐했던 약속을 어기고 부처님을 맞이했던 곳이다.

 

처음 살파갈랄타실타(薩婆曷剌他悉陀)[당나라 말로는 일체의성(一切義成)이라고 하며, 구역(舊譯)에서는 실달다(悉達多)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태자가 성을 나온 뒤 산과 계곡에 은거하면서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법을 얻고자 애썼다. 그러자 정반왕은 가족 세 사람과 외숙 두 사람에게 명하였다.

"내 아들 일체의성이 출가해 수학하고 있다. 그는 깊은 숲 속에서 홀로 노닐며 그 속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따라가서 태자가 머무는 곳을 파악하도록 하라. 그대들은 사적으로는 숙부와 백부지간이지만 공적으로는 군신지간이다. 태자에 관한 모든 동정과 행동거지에 대해서 알아야 하리라."

다섯 사람이 명을 받들어 태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모셨다. 그로 인하여 부지런히 도를 구하며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 말하였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괴롭게 증득하는 것일까, 즐겁게 증득하는 것일까?"

두 사람이 말하다.

"안락한 것이 도(道)이다."

세 사람이 말하였다.

"애써 고행하는 것이 도이다."

이렇게 두세 사람이 짝을 지어서 서로 다투었지만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이에 태자가 지극한 이치를 사유하면서 고행외도를 따르기 위해 참깨[麻米]의 양을 줄여가며 그것으로 몸을 겨우 유지하였다. 이 모습을 본 두 사람이 말하였다.

"지금 태자가 하는 행위는 진실한 법이 아니다. 무릇 도라는 것은 즐겁게 증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고행하는 태자는 우리편이 아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태자를 버리고 멀리 피해 숨어서 과증(果證)을 사유하였다. 태자는 6년의 고행을 하였지만 보리를 증득하지 못하였고 고행을 시험해 보았지만 그것은 참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유죽을 받아 마시고 증과(證果)하였다. 그러자 앞서의 세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 공이 이루어지려 하였는데 여기서 물러서고 말았구나 6년 고행이 하루아침에 헛수고가 되었구나."

 

이에 앞서 두 사람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서로 만나서 자리를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날에 일체의성(一切義成)14) 태자를 보았을 때에는 왕궁을 나와 거친 계곡으로 들어가 진귀한 옷을 버리고 사슴가죽 옷을 입고서 정진 고행한 사람이었소. 태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고생하면서 깊고 미묘한 법을 구하며 위없는 과보[無上果]를 기약하였소. 그런데 이제 소치는 여자로부터 우유죽을 받아먹었으니 도를 망쳤고 그 뜻도 일그러졌소. 이제 우리는 그가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소."

그러자 다른 두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렇게 늦게야 그런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오? 그는 미친 사람이오. 깊은 궁궐에서 존귀하고 훌륭한 신분에 있었을 때에도 마음을 고요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산림으로 멀리 도망쳐서 전륜왕의 자리를 버리고서 비천한 사람의 행동을 하면서 그가 무얼 생각할 수 있었겠소? 말해봐야 근심과 슬픔만 더할 뿐이오."

14) 일체의성취(一切義成就)를 말하며, 싣달다태자를 번역한 말이다. 

 

한편 보살은 니련하(尼連河)15)에서 목욕하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등정각(等正覺)16)을 이루시어 천상과 인간의 스승으로 불리게 되었다. 보살은 조용히 선정에 잠기셔서 제도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시며 말씀하셨다.

"저 울두람자(鬱頭藍子)17)는 비상정(非想定)을 증득하였으니 미묘한 법을 감수할 수 있겠구나."

이 때 공중에서 천신들이 태자의 말에 이렇게 답하였다.

"울두람자는 숨을 거둔 지 이미 7일이 지났습니다."

여래께서 애석하게 여기며 탄식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만나 미묘한 법을 듣지 못하고서 황황히 세상을 떠났는가?"

그리고 나서 다시 세상을 두루 관찰하시며 찾아다니시다가 아람(阿藍)가람18)이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얻은 것을 아시고 그러면 지극한 이치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다. 이 때 다시 천신들이 말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일이 되었습니다."

여래께서는 다시 탄식하시며 그의 박복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나서 또다시 누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인지를 자세하게 관찰하시다가 시록림(施鹿林)에 있는 다섯 사람이 먼저 교화를 받아야 함을 아셨다. 그리하여 여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나 녹야원으로 나가셨다. 여래의 위의는 고요하였고 몸의 광채는 찬란하게 빛났으며 몸의 털은 영롱한 빛을 머금었고 온몸은 황금색이었다. 여래는 저 다섯 사람을 인도하기 위하여 안온하고 미묘하게 앞으로 나아가셨다.

이 때 다섯 사람은 멀리서 여래께서 다가오시는 것을 보고 함께 말하였다.

"일체의성이 저기에서 오고 있다. 세월이 속절없이 빨리 지나갔는데도 성과(聖果)를 얻지 못해 마음속으로 물러나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침묵으로 대할 뿐 일어나서 정중하게 맞아들이지 말기로 하자."

여래께서 차츰 다가오시자 여래의 위신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다섯 사람은 서로 약속한 것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그 동안의 안부를 여쭈며 예의에 맞추어 모시고 따랐다. 여래께서는 점차로 그들을 이끄시며 미묘한 이치를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두 번의 안거가 끝날 때가 되자 그들은 모두 과증(果證)을 얻었다.

15) 범어로는 nir njana이며 니련선나하(尼連禪那河)이다. 불타가야 부근을 흘러서 Phalgu

    강으로 흘러든다.
16) 범어로 samyaksa buddha이다. 부처님 10호(號)의 하나이다. 삼먁삼불타라고 음역하고 

    정등각(正等覺)·정변각(正遍覺)·정변지(正遍智)라고도 번역한다. 부처님께서는 평등하고

    바른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이같이 이름한다.
17) 범어로는 udrakar maputra이며 부처님께서 출가한 후 한때 이 사람에게 나아가서 수행하였다.
18) 육사 외도 가운데 한 사람인 r a-k l ma이며 부처님의 도를 구하기 위해 제일 처음 나아가서 

    수행하였던 외도의 선인(仙人)이다.

 

시록림에서 동쪽으로 2∼3리 가다 보면 솔도파에 이르는데 곁에는 말라 버린 못이 하나 있다. 둘레는 80여 걸음 정도 되며, 일부에서는 그 못을 구명(救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열사(烈士)라고도 부른다. 여러 선현의 말에 의하면, 수백 년 전에 어떤 은사(隱士)가 이 못 옆에서 암자를 짓고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는 기예를 두루 익혔으며 신묘한 이치를 꿰뚫었다. 그리하여 기와나 자갈을 보석으로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었다. 다만 아직 바람이나 구름을 부려서 신선이 수레를 타듯이 올라타는 일은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책을 샅샅이 찾아보고 옛 것을 자세하게 고찰하면서 신선의 기술을 더욱 추구하였다. 그 서적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릇 신선이란 것은 장생술(長生術)이다. 이 장생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그 뜻을 고요히 하여 둘레가 한 자 남짓한 단장(壇場)19)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신념과 용기가 뛰어난 열사(烈士) 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긴 칼을 들고 단의 한쪽에 서있게 하라. 그리하여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숨을 죽이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신선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그 단 중앙에 앉아서 손에 긴 칼을 잡고 입으로는 신주(神呪)를 외워야 하는데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면 동틀 무렵에는 신선이 된다. 이 때 손에 든 예리한 칼은 보검[寶劍]으로 변하게 되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허공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신선들을 거느리게 되나니 칼을 들고 지휘하면 원하는 대로 모두가 따라온다. 그리고 쇠약해지거나 늙지 않으며 병들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

19) 제사를 지내기 위해 땅을 높게 돋운 곳, 혹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곳이다.

 

이 사람이 이 같은 신선이 되는 방법을 얻은 뒤에 여러 열사(烈士)들을 찾아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성 안에서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슬피 울부짖으며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 은사(隱士)가 그 모습을 보고 몹시 기뻐하여 즉시 그를 따라 가서 위로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괴로워합니까?"

그가 말하였다.

"저는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며 입에 풀칠을 해왔습니다. 주인은 저의 이런 사정을 알고서 특히 저를 신용하면서 5년 동안 일을 하면 두둑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온갖 고생을 참고 힘든 줄도 모르며 일하였습니다. 마침내 5년을 채워 약속한 날이 돌아왔을 즈음 어느 날 아침, 제가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고 모욕을 당한 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비통한 마음에 이렇게 슬퍼하고 있지만 그 누가 이런 나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은사가 함께 가자고 말하고 오두막으로 데리고 와서 신선의 도술로 아주 진귀한 음식들을 만들어낸 뒤 그것을 먹게 하고 못에 들어가 목욕을 시킨 뒤에 새옷으로 갈아 입혔다. 게다가 5백 금전을 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이 돈을 다 쓰면 또 와서 가져가시오. 그렇다고 미안해하지는 마시오."

 

이날 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더욱 많은 재물을 그에게 주며 몰래 음덕(陰德)을 베풀어 그 사람을 감격하게 하였다. 열사는 여러 차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진실한 친구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은사가 말하였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열사를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되었소. 당신의 기묘한 생김새는 책에 나와 있는 모습 그대로이오. 내게 달리 바램이 있었던 것은 아니오. 그저 하룻밤 동안 소리를 내지 않기만 하면 되오."

그러자 열사가 말하였다.

"나보고 죽으라고 하여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저 숨을 죽이고 있는 일이야 대수이겠습니까?"

이에 단장을 쌓아 마련하고 선법(仙法)을 받았다. 그리고 방술에 의거해 하나하나 준비하면서 앉아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해가 지고 난 뒤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하였다. 은사는 신주를 외었고 열사는 예리한 칼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막 새벽이 되려 할 때 느닷없이 열사가 고함을 질렀다. 이 때 공중에서 불이 내려오고 연기와 불길이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은사는 재빨리 그 사람을 끌어당겨서 못 속으로 들어가 난을 피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그토록 소리내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는데 어찌하여 고함을 질렀는가?"

열사가 말하였다.

"당신의 명을 받고 난 뒤 한밤중이 되자 어슴푸레하게 변괴가 일어나는 악몽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가 섬기던 주인이 나타나 저에게 와서 위로하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의 두터운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 주인에게 차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몹시 화를 내더니 급기야 저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중음신(中陰身)을 받아서 저의 시신을 돌아보며 애석해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세생생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남인도의 대바라문 집안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온갖 고통과 재난을 겪었어도 저는 당신의 은덕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업을 받고 관례(冠禮)와 혼례 때에도 그리고 부모의 상을 당하였거나 자식을 낳았을 때에도 언제나 전생의 은덕을 기억하며 참고 견디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친들과 모든 피붙이들은 이런 저를 괴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의 아내가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말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만일 말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자식을 죽이고 말겠습니다.' 저는 이 때 이미 많은 생이 흘렀고 내 자신도 늙고 쇠하였으며 오직 이 어린 자식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음을 생각하고서 아내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끝내 소리를 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은사가 말하였다.

"나의 잘못이로다. 이것은 악마의 장난이구나."

열사는 은사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분노하다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화재의 난을 면하였기 때문에 이 못을 구명(救命)이라고 불렀으며 은혜에 감사하면서 죽었기 때문에 열사의 못[烈士池]이라고도 부른다.

 

열사의 못에서 서쪽으로는 세 개의 동물의 솔도파가 있다. 이것은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 몸을 태운 곳이다. 겁초(劫初)에 이 임야에는 여우와 토끼와 원숭이가 서로 종류는 달랐지만 사이좋게 지내며 살고 있었다. 이 때 제석천이 보살행을 닦는 자가 누구인지 시험해 보고자 지상으로 내려와서 노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나서 세 마리 동물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느냐? 두렵거나 놀라는 일은 없는가?"

그들이 답하였다.

"풍요로운 풀들과 우거진 숲 속을 마음대로 노닐고 돌아다니며, 서로 다른 동물들이지만 함께 기뻐하면서 편안하게 즐기고 있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듣자하니 너희들은 정이 두텁고 마음이 잘 맞는다고 하기에 늙은 몸을 이끌고 이렇게 먼 길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배고프고 목이 마른데 뭔가 먹을 것이 없겠느냐?"

그들이 말하였다.

"부디 조금만 기다려 주시다면 우리들이 나아가서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심을 없애고 한마음으로 각자 길을 나누어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녔다. 여우는 물가를 따라 내려가다가 신선한 잉어 한 마리를 잡았다. 원숭이는 숲 속에서 진귀한 꽃과 열매를 따와서 함께 노인에게 올렸다. 그런데 토끼만은 빈손으로 돌아와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노인이 말하였다.

"내가 보니 너희들은 아직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여우와 원숭이는 뜻을 합하여 각각 능히 찾아왔지만 오직 토끼만은 빈손으로 돌아와서 내게 줄 음식을 갖고 오지 못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나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토끼는 이렇게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원숭이와 여우에게 말하였다.

"장작과 풀을 많이 베어서 모아 온다면 그 때 뭔가 만들어 내겠다."

원숭이와 여우는 앞다투어 달려가서 풀을 모으고 나무를 끌어왔다. 이렇게 해서 장작이 높이 쌓였으며 불을 붙이자 맹렬한 기세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 때 토끼가 말하였다.

"인자하신 어르신, 내 몸은 천하여서 아무것도 찾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감히 미약한 이 몸이나마 그대의 한 끼 식사로 대접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 이내 죽고 말았다. 이 때 노인은 제석천의 몸으로 다시 돌아와서 재를 헤치고 유해를 수습하여 한동안 토끼의 행동을 가상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 그리고 여우와 원숭이에게 말하였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나는 토끼의 마음에 참으로 감동하였다. 이 자취가 사라지지 않도록 토끼를 달에 보내어서 후세에 전하게 하리라."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달 속의 토끼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하며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 솔도파를 지었다. 이곳에서 긍가하의 물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3백여 리 가다 보면 전주국(戰主國)[중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2) 전주국(戰主國)

전주국20)의 둘레는 2천여 리이며 도성은 긍가하를 접해 있는데 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풍요롭고 마을들이 서로 잇닿아 있다. 토지는 비옥하고 곡식은 시기에 잘 맞추어 파종하고 있다. 기후는 화창하고 풍속도 질박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맹렬하며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고 있다. 가람은 10여 곳 있으며 승도들은 천 명에서 조금 모자란다. 그들은 모두 소승의 가르침을 익히고 따르고 있다. 천사(天祠)는 20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20) 이 나라 이름은 의역(意譯)한 것이다. 베나레스 동쪽 50마일 지점에 있는 지금의 Gh zipur가 

    주도(主都)에 해당한다. 현재 이름은 '전(戰)'이라는 뜻을 갖는 Garjan에서 유래하는 이슬람화한

    명칭이다.

 

큰 성의 서북쪽에 가람이 있는데 그 안에 솔도파가 있다.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인도기(印度記)』에서는 "이곳에 여래의 사리가 한 되[斗] 들어 있다. 옛날 세존께서 이곳에서 7일 동안 하늘과 인간 대중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널리 설하셨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 옆에는 과거 세 분의 부처님께서 앉으시거나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다.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자씨보살상이 있는데 그 상의 크기는 비록 작지만 위신(威神)이 뛰어나며 신령스러운 조짐이 은밀히 흐르는 곳으로서 기적이 간간이 일어나고 있다.

 

큰 성의 동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아피타갈랄나(阿避陀羯剌拏)[당나라에서는 불천이(不穿耳)라고 한다]승가람21)이 있다. 주위를 에워싼 담은 넓지 않지만 그 조각과 장식은 참으로 빼어나다. 꽃이 만발한 못은 그림자를 서로 비추고 대각(臺閣)의 용마루들이 서로 잇닿아 있다. 승도들은 온화하고 조용하게 수도하고 있으며 장유(長幼)의 질서들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21) 거리와 방향으로 보아 이 가람의 소재지를 현재의 갠지스 강가의 Baliya, Ballia(G zipur에서 

    동쪽으로 약 33마일 지점에 위치)의 부근이라고 볼 수 있으며, Ballia의 동쪽 1마일 떨어진

    지점의 작은 마을인 Bikapur가 이에 해당한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대설산(大雪山)의 북쪽 도화라국(覩貨邏國)에 학문을 즐기던 사문이 있었다. 이들은 두세 사람이 뜻을 함께 하여 경을 외우고 나머지 시간은 유유자적하게 보냈는데 언제나 이렇게 말하였다.

"미묘하고 그윽한 이치는 말이나 토론으로 탐구할 대상이 아니다. 성인의 자취가 드러나는 곳은 두루 찾아가 발로 밟으며 다녀보아야 마땅하다. 모름지기 막역한 친구들끼리 서로 물어가면서 성인의 유적을 직접 돌아보기로 하자."

이에 두세 사람의 친구들은 지팡이를 짚고 함께 유람하러 나섰다. 그리하여 인도에 도착해서 가람에 묵으려 할 때 사람들은 그들이 변방에서 온 비루한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경멸하며 이들에게 잠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람과 이슬에 젖은 데다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에 안색이 초췌하였고 몰골이 초라하였다. 이 때 이 나라의 왕이 근교로 노닐러 나갔다가 여러 객승들을 보고 괴이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온 걸사(乞士)들이며,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오셨소? 귀도 뚫지 않았고 옷도 해지고 남루하지 않소?"

사문들이 답하였다.

"우리는 도화라국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의 유교(遺敎)를 받들어 속세의 번뇌를 멀리하고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부처님의 유적지를 순례하고자 왔습니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우리가 박복한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다 우리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인도의 사문들은 여행자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순례를 미처 다 끝내지 못하였으니 비록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먼 훗날에는 반드시 끝낼 것을 다짐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들에 대해 가여운 마음이 크게 일었다. 그리하여 곧 바로 풍광이 빼어난 그곳에 가람을 세우고 흰 천에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알렸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나의 존귀함은 세상 사람들의 으뜸이고, 귀함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극하나니 이것은 모두 3보께서 돌보신 바이다. 내가 이미 사람들의 왕이 되어 부처님의 부촉을 받았다. 모든 스님들에게 내가 마땅히 공양을 베풀어 돕고자 하나니 이제 이 가람을 지어서 나그네를 불러 모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귀를 뚫은[穿耳] 모든 승려들은 나의 이 가람에서 머물 수 없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그와 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아피타갈랄나 가람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남쪽으로 긍가하를 건너서 마하사라읍(摩訶娑羅邑)22)에 도착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가 바라문 종족들이며 불법을 존숭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문을 보고 먼저 학식을 확인하고 나서 상대방이 지식이 뛰어난 사람임을 알면 그 때는 바야흐로 깊이 예경한다.

22) 갠지스강의 남쪽, Patna의 서쪽 약 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Arrah의 서쪽 6마일 지점에 

    위치한 지금의 Mas r마을로 추정된다.

 

긍가하의 북쪽에 나라연천사(那羅延天祠)23) 천사가 있는데 중각과 층대는 그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여러 천신들의 상은 돌을 새겨서 만들었는데 그 솜씨가 매우 교묘하며 신령스러운 감응은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23) 비슈누신, 크리슈나신과 동일시되며 또한 비슈누신의 권화(權化)로 여겨지는 신이다. 

    이 천사(天祠)의 위치에 대해서 현장은 명기하고 있지 않지만 Mas r의 북쪽 16마일

    떨어진 지점은 Gogra강이 갠지스강에 합류하는 Revelganj이며, 힌두교의 성지이고

    수많은 힌두사원 건축이 있는 곳이다. 아마 이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라연천사에서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세운 것으로 반 이상이 땅에 묻혔다. 앞에 세워 놓은 돌기둥은 높이가 두 자[丈] 남짓하다. 위에 사자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귀신을 항복시킨 일이 기록으로 새겨져 있다. 옛날 이곳에 광야귀(曠野鬼)24)가 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엄청난 위력을 믿고서 사람들의 피와 살을 먹고 살았으며 중생들을 해치고 요사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 극에 달하였다. 그러자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그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게 하려고 신통력으로 귀신들을 교화하셔서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불살생(不殺生)의 계로 제도하시니 모든 귀신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널리 보시하였다. 

24) 16야차신의 하나이다. 

 

이에 돌을 들어서 부처님의 자리로 만들어 앉기를 청한 뒤에 정법을 듣고 나서 보살피고 지켜내기를 원하였다. 뒤에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자들이 앞다투어 몰려와서 귀신이 놓은 돌자리를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천 명의 사람들이 힘을 써도 돌을 옮길 수 없었다. 그 돌 주위로 숲이 무성하고 맑은 못이 흐르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그 옆에 가면 마음으로 삼가지 않을 수 없다.

 

귀신을 항복시킨 곳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몇 개의 가람이 있다. 많이 기울고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승도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모두 대승의 교법을 익히고 준수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도 기단은 이미 기울어졌지만 그래도 몇 자 높이는 남아있다. 옛날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에 여덟 나라의 왕이 사리를 나누었다. 사리를 헤아려서 바라문이 병 안에 꿀을 발라 여러 왕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바라문이 병을 가지고 돌아가 보니 사리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었으므로 그대로 솔도파를 세워 경건한 마음으로 그 병을 안에 안치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무우왕이 이 솔도파를 열어서 사리 병을 꺼내 다시 거대한 솔도파를 세웠다. 재일(齋日)이 되면 이따금 광명을 발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긍가하를 건너 140∼150리를 가다 보면 폐사리국(吠舍釐國)[구역에서는 비사리국(毘舍離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3) 폐사리국(毘舍離國)

폐사리국25)의 둘레는 5천여 리이다. 토지는 비옥하며 꽃과 열매가 무성하다. 암몰라과(菴沒羅菓)와 무차과(茂遮菓)는 많이 나면서도 귀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풍속은 질박하다. 복을 짓는 일을 좋아하고 학문을 중히 여기며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는다. 가람의 수는 수백 개 있으나 대부분이 무너졌고 남아있는 것은 서너 곳에 불과하며, 승도들은 매우 적다. 천사(天祠)는 수십 개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는데 벌거벗은 외도들이 많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25) 범어로는 vai l 이며 벽사리(薜舍離)·유야리(維耶離) 등으로도 음사하며, 광박(廣博)·

    광엄(廣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지역은 고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발기

    (跋祇, V ji)종족의 일종인 이차(離車, Licchavi)족이 공화정치를 펼쳤던 곳이다. 부처님

    재세시에는 굉장히 번영하여 일찍이 석가모니 자신도 몇 번이나 이 나라의 수도에서

    유행하면서 인민들을 교화하였다. 또한 쟈이나교의 개조(開祖)인 마하비라의 탄생지로도

    유명하다.

 

폐사리성26)은 심하게 허물어져 있는데 그 옛 터의 둘레는 60∼70리 정도 된다. 궁성의 둘레는 4∼5리인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적다. 궁성의 서북쪽으로 5∼6리 가다 보면 어떤 가람에 이르게 되는데 승도들은 매우 적고 그들은 소승 정량부의 법을 익히고 있다. 그 곁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옛날 여래께서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27)을 설하시자 장자의 아들인 보적 등이 보개(寶蓋)를 바치던 곳이다. 그 동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사리자 등이 이곳에서 무학(無學)의 과위를 증득하였다.

26) 이 위치는 현재의 Gandak강 좌안(左岸) H jipur의 북쪽으로 18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Muzzaffarpur 지방의 Bas h이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Raja-Bisal-ka-garh (Visala왕의 요새)라

    불리는 다 허물어진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27)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을 말한다.

 

사리자가 무학의 과위를 증득한 곳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솔도파가 있는데 폐사리왕이 세운 것으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이 나라의 선왕이 사리를 나누어 얻어 가지고 와서 세운 것이다. 『인도기(印度記)』에는 "이 속에는 예로부터 여래사리 10말[1斛]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무우왕이 9말[斗]을 가져가서 이 속에는 1말만이 남아있었다. 후에 국왕이 다시 솔도파를 열어서 가져가려고 억지로 불탑을 건드리려 하자, 그 때 지진이 일어나 왕이 감히 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곁에는 돌기둥이 있는데 높이는 50∼60척으로 위에는 사자의 상을 조각해 놓았다.28) 돌기둥의 남쪽에 못이 있는데 이곳은 원숭이떼들이 부처님을 위하여 파놓은 곳으로,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 머무르셨다. 못의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원숭이들이 여래의 발우를 가져다가 나무 위에 올려놓고 꿀을 따던 곳이다. 그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 솔도파도 원숭이떼들이 부처님께 꿀을 바치던 곳이다.29) 못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지금도 원숭이 조각상이 있다.

28) 이 아육왕 석주는 사자상이 달려 있는 원형 그대로 오직 하반부만 땅 속에 매장된 상태로 

    현존하고 있다. 이 사자상은 현존하는 사자주두(獅子柱頭) 가운데 가장 오래된 양식의

    것이라고 한다.
29) 팔리경율에는 부처님이 폐사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대부분 대림(大林, Mah vana)의 중각강당에 

    머물고 계셨다고 한다. 한역 『잡아함경』 권3에는 중각강당을 미후지반(獼候池畔)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숭이들이 꿀을 가져다가 바쳤다는 설화는, 부처님께서 비구들과 함께 유행하는 가운데

    비구들이 각자의 발우를 노지에 두었다. 부처님께서도 자신의 발우를 그 한가운데에 두었는데

    원숭이는 수많은 발우 중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가려내어 사라나무 위로 올라가서 꿀을 채취하여

    가득 담아서 부처님께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가람의 동북쪽으로 3리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비마라힐(毘摩羅詰)30)[당나라 말로는 무구칭(無垢稱)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정명(淨名)이라고 한다. 정(淨)은 무구(無垢)이고 명(名)은 바로 칭(稱)이니 뜻은 같지만 이름은 다르다. 구역에서는 유마힐(維摩詰)이라고 하는데 잘못되었다]의 옛 저택이 있던 터이다. 이곳에는 신령스러운 기적이 많이 일어난다. 

30) 범어로는 vimalak rti이며 '더러움이 없는, 순수한'이라는 뜻이며 유마힐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사(神舍)가 하나 있다. 그 형상이 흡사 벽돌을 쌓아 놓은 듯한데 전하는 말로는 돌을 쌓았다고들 한다. 즉, 무구칭 장자가 병을 핑계삼고서 설법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장자의 아들인 보적의 옛 집터이다. 또다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암몰라(菴沒羅)여인31)의 옛 집이다. 부처님의 이모 등 여러 필추니들은 이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31) 폐사리성의 창부(娼婦)로 매우 아름다웠다. 석존에게 귀의하여 자신이 소유하던 

    암몰라동산을 헌납하였다. 뒤에 스스로 비구니가 되었다. 

 

가람의 북쪽으로 3∼4리를 가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구시나국으로 가셔서 열반에 드시고자 할 때 인간과 비인(非人) 등이 세존을 따라 이곳에 와서 머물러 서있던 곳이다.32) 다시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폐사리성을 돌아보신 곳이다. 그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정사가 있는데 앞에는 솔도파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암몰라 여인이 부처님께 동산을 보시한 곳이다.

32)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법현(法顯)이 번역한 『대반열반경』 상(上)의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과 건다 마을로 가시는데 비야리성(毗耶離城)을 지나셨다. 이 때 세존께서 뒤를

    돌아보시며 성을 향하여 웃으셨다. 아난이 곧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대고 절을 올리고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위없는 스승께서 까닭 없이 허망하게 웃는 일은 없으십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내가 지금 성을 향하여 웃는 까닭은 바로 마지막으로 이 성을 보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홀연히 허공에서는 구름도 끼지 않은 채 비가 내렸다.

    이에 아난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허공이 청정하여

    조금도 흐린 기색이 없는데 홀연히 이처럼 자욱하게 비가 내립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알아야 한다. 허공의 여러 천신들이 내가 마지막으로 비야리성을

    본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슬퍼하고 흐느끼면서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니, 이 비는 바로 천신들의 눈물이지 비가 아닌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암몰라동산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열반을 고하셨던 곳이다.

옛날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4신족(神足)을 얻은 자는 1겁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현재의 여래는 장차 그 수명이 몇 년이겠느냐?"

이와 같이 거듭 물었지만 아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천마(天魔)들이 그를 미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숲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며 머물렀다. 이 때 악마들이 와서 부처님에게 청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에 머무시며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생사의 세계를 떠도는 중생들을 일깨우고 제도하신 수도 모래알이나 티끌만큼 많습니다. 적멸의 즐거움을 누릴 시간이 이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흙을 조금 손톱 위에 올려놓고 악마에게 물으셨다.

"대지의 흙이 많은가, 손톱 위의 흙이 많은가?"

악마가 대답하였다.

"대지의 흙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제도 받은 자는 손톱 위의 흙처럼 적고,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자는 대지의 흙처럼 많다. 지금부터 3개월 뒤에 나는 열반에 들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서 악마는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물러갔다.

한편 아난은 숲 속에 있다가 홀연히 기이한 꿈을 꾸고서 부처님께 와서 여쭈었다.

"저는 숲 속에 있다가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가지와 잎이 아주 무성하고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거대한 나무가 있었는데 난데없이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남김없이 가지를 부러뜨리고 잎을 떨어뜨렸습니다. 저는 장차 세존께서 적멸에 드시려는 것이 아닐까 두려운 마음에 이렇게 세존을 찾아와 여쭙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전에 너에게 말해 준 적이 있었는데 너는 악마의 방해를 받아 제때에 나에게 머물러 주기를 청하지 않았다. 마왕이 나에게 빨리 열반에 들기를 권하고서 나는 그 시기를 대답해 주었다. 너의 꿈은 바로 그것을 암시한 것이다."

 

열반의 시기를 알려 주신 곳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천 명의 아이가 부모를 만난 곳이다. 옛날 선인이 바위 계곡 사이에 은거하며 지냈다. 음력 2월[仲春月]에 맑은 물에 멱을 감고 있었는데, 이 때 암사슴이 그 물을 마시다가 감응하여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의 생김새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아름다웠는데 다리만큼은 사슴을 닮았다. 선인(仙人)이 이 아이를 보고서 데려다가 길렀다.

 

그 후 선인은 딸에게 불씨를 구해오라고 명하였다. 딸이 다른 선인의 암자에 이르렀을 때 땅을 밟을 때마다 그 발자국에는 연꽃이 피어났다. 그 선인이 이런 광경을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하고서 자신의 암자를 돌게 한 뒤에 불씨를 구해 주었다. 사슴여인은 그의 명에 의해서 불씨를 얻어서 돌아왔다. 이 때 사냥을 하러 나온 범예왕(梵豫王)이 꽃을 보고서 그 길을 따라갔다가 그 선인이 목격한 괴이한 일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인을 수레에 태우고 함께 돌아왔다. 점성가[相師]는 점을 치며 말하였다.

"장차 천 명의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왕의 다른 부인들은 이 소리를 듣고 모두들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사슴여인은 잉태를 하였고 시기가 다 차자 연꽃을 하나 낳았다. 그 꽃에는 천 개의 잎이 달려 있었는데 잎마다 아이가 한 명씩 앉아있었다. 다른 부인들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천 명의 아이를 긍가하에 모두 다 던져버리자 아이들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 때 오기연왕(烏耆延王)이 강 하류에서 노닐고 있다가 누런 구름과 같은 덮개가 파도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을 주워서 열어보니 그 속에는 천 명의 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은 이 아이들에게 젖을 먹여 키웠는데, 성인이 되자 모두들 엄청난 힘을 지닌 장사로 자라났다. 그리하여 천 명의 아들이 있는 것을 으스대며 4방의 국경을 개척하였다. 그 세력은 승승장구하여 장차 범예왕의 나라에까지 뻗치게 되었다.

 

한편 범예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며 근심에 사로잡혔다. 그 병력에 대적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뾰족한 계책이 나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사슴여인은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임을 알고서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오랑캐들이 국경을 쳐들어와 민심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못난 저의 우직한 충성심으로 저 강적들을 패퇴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믿지 않았으며 근심과 두려움은 더욱 깊어갔다. 사슴여인은 이에 곧 성의 누각으로 올라가서 적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 명의 아들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성을 에워싸자 사슴여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반역을 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의 어미이며 너희들은 나의 아들들이다."

천 명의 아들이 말하였다.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 게냐?"

이 때 사슴여인이 손으로 두 젖가슴을 어루만지자 천 갈래의 젖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모자간의 자연스러운 감응으로 말미암아 그 천 줄기의 젖은 모두 천 명의 아들의 입에 들어갔다. 그러자 아들들은 갑옷을 벗고 자신들의 종족으로 돌아왔으며 군사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두 나라는 우호를 나누었으며 백성들은 안락하였다.

 

천 명의 아들들이 종족으로 돌아온 곳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거니시던 옛 터이다. 여래께서는 대중들에게 이곳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옛날 내가 이곳에서 종족에게 돌아가 친족들을 만났다. 천 명의 아들들이 누군지 알고 싶은가? 그들은 바로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시다."

 

본생을 말씀하신 곳에서 동쪽으로 오래된 기단이 있는데 위에는 솔도파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밝은 빛이 이따금 환히 비치는데 이곳으로 와서 기도하고 청하면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보문다라니(普門陀羅尼)』33)등의 경을 설하신 중각강당(重閣講堂)의 터이다.

33) 범어로는 Samantamukha-dh ra i일 것으로 추측되나 어떤 경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강당의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그 속에는 아난의 반신사리(半身舍利)가 들어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수백 개 있는데 정확하게 그 숫자를 세어 보려고 하였지만 끝내 다 세지 못하였다. 이곳은 천 명의 독각인(獨覺人)이 적멸에 든 곳이다. 폐사리성의 안팎으로 해자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성현의 유적은 매우 많아서 낱낱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세가 뛰어나고 경치 좋았던 곳들도 이제는 폐허가 되었고 빼곡하게 줄지어 들어섰던 것들도 이제는 드문드문 솟아있을 뿐이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계절은 빠르게 바뀌어 가니 숲은 황폐하게 되었고 연못도 말라 버리고 말았다. 썩은 그루터기와 폐허가 된 자취만이 그곳이 유적지임을 자세하게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큰 성의 서북쪽으로 50∼60리를 가다 보면 커다란 솔도파에 이르는데 율첩파자(栗呫昌葉反婆子)[구역에서는 이차자(離車子)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여래와 헤어진 곳이다. 여래께서는 폐사리성으로부터 구시나국으로 향하여 가시는 길이었는데 여러 율첩파자들이 부처님께서 장차 입멸하시리라는 소식을 듣고 서로 따라 나와서 슬피 울며 배웅하였다. 세존께서 그들의 슬픔과 애도가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한 것을 보시고서 신통력으로 큰 강을 만들어 내셨다. 천길 낭떠러지와 깊은 절벽 아래로 급류가 파도를 일으키며 흐르자 율첩파들은 슬피 울면서도 세존을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여래께서는 발우를 남기시어 그것으로 여래를 기억하게 하셨다.

 

폐사리성의 서북쪽으로 2백 리를 채 못 가면 옛 성34)이 하나 있는데 이미 오래 전에 폐허가 되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도 매우 적다. 그 성 안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옛날 여러 보살과 인간과 하늘의 무리들을 위하여 보살행을 수행하던 본생담을 설해 주신 곳이다. 부처님께서는 옛날 이 성에서 전륜왕으로 태어났는데 마하제바(摩訶提婆)35)[당나라 말로는 대천(大天)이라고 한다]라고 불리셨다. 마하제바는 7보(寶)의 감응하는 바가 있었으며 온 천하를 다스렸다. 그런데 노쇠하고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서 무상(無常)의 이치를 체득하게 되었다. 마침 세속을 멀리 떠날 뜻을 품게 되었고 제왕의 자리마저 잊었다. 드디어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여 물들인 옷을 입고 수학하였다.

34) 지명을 기록하지 않은 이 옛 성은 폐사리성으로 추정되는 Bisal의 북북서쪽 30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폐허 Kesariya로 생각된다. 이 폐허가 된 유적지에는 높은 탑이

    있으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R ja Vena Cakravati와 관계를 짓고 있다. 이 Kesariya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35) 앞서 본서 제3권에서도 이 이름이 나왔지만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이 이야기는 

    바르후트(Bharhut)불탑의 조각에서 볼 수 있다.

 

성의 동남쪽으로 14∼15리를 가다 보면 커다란 솔도파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7백 명의 현성(賢聖)들이 다시 한번 모여서 결집한 곳36)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백십 년째 되던 해 폐사리성에 살고 있던 필추들은 부처님의 법을 멀리 떠나 계율을 그릇되게 행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 때 장로(長老) 야사타(耶舍陀)37)는 교살라국에 살고 있었고, 장로 삼보가(三菩伽)38)는 말토라국(枺兎羅國)에서 살고 있었고, 장로 리파다(釐波多)39)는 한약국(韓若國)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장로 사라(沙羅)40)는 폐사리국(吠舍釐國)에서 살고 있었고, 장로 부사소미라(富闍蘇彌羅)41)는 사라리불국(娑羅梨弗國)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아라한들로서 자재로움을 얻었고 3장(藏)을 지녔으며, 3명(明)을 얻어서 위대한 명칭을 지니고 있었고 대중들이 모두 그 명성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존자 아난(阿難)의 제자들이었다.

36) 불멸 직후의 제1결집 이후 백 년(또는 백십 년) 뒤에 벌어진 제2결집을 말한다.
37) 범어로는 ya oda이며 명칭(名稱)·명문(名聞)으로 번역한다. 바라문 종족으로서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6신통을 얻었다. 열 가지

    일이 비법(非法)이라고 주장하였던 까닭에 내쫓겼는데 서인도 리파다(釐波多)로

    가서 마침내 제2결집을 여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다.
38) 범어로는 sambhoga이다. 보통 제2결집에 참여한 사람으로서는 삼부타

    (三浮陀:商那和修)를 들고 있다. 왕사성의 장자로서 부처님 입멸 후 아난에게 나아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발기(跋耆) 비구가 열 가지 일의 비법을 자행한다는

    소식을 야사타로부터 듣고 리파다와 함께 결집에 참가하였다.
39) 범어로는 revata이며 리파다(離婆多)·리파다(梨婆多), 예발다(隸跋多)라고도 음사하며 

    번역하여 금(金)이라고 한다. 구시나게라국의 파파성(波婆城, P v )의 상좌였다. 한약국

    (韓若國)은 본서 외에 다른 서적에서는 보이지 않아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40) 사류(沙留)·차루(遮樓)·사란(沙蘭)이라고도 하고, 사하사저(沙訶闍底, Sah jati)에 사는 

    장로이다.
41) 범어로는 khubja-sohita이며, 급사소미라(級闍蘇彌羅)·불사소마(不闍蘇摩)·불사종

    (不闍宗)이라고도 음사하고, 곡안(曲安)으로 번역한다. 바라문 종족 사람이며 화자성

    (華字子城:波吒釐子城, P aliputra)에서 태어났다. 곱사등이고, Sobhita가 그 이름인

    까닭에 Khujja-Sobhita라고 불렸다. 불멸 후 아난에 의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어느 때 야사타가 심부름꾼을 보내어 여러 현성(賢聖)들에게 모두 폐사리성으로 모이도록 알렸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모자라서 7백 명을 채우지 못하였다. 이 때 부사소미라가 천안(天眼)으로 여러 현성들이 법사(法事)를 의논하기 위해 모인 것을 보고 신족통으로 법회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삼보가가 대중 가운데에 있다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무릎을 꿇고 소리내어 말하였다.

"대중들은 조용히 하시오. 삼가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 대성(大聖) 법왕(法王)께서 선교 방편으로 적멸에 드신 지 세월은 비록 한참이 지났지만 말씀과 가르침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폐사리성의 게으른 필추들이 계율을 잘못 받아들여서 10사(事)의 잘못된 행동을 하며 10력(力)의 가르침에 어긋나 있습니다. 이제 여러 현자들께서는 깊이 그 행위의 지범(持犯)을 밝혀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들은 모두 대덕 아난의 가르침을 이어받았으나,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으로 거듭 성지(聖旨)를 널리 펼치시기 바랍니다."

이에 여러 성현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슬퍼하며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필추들을 불러 모아서 비나야에 의거하여 질책하며 제재를 가하였고, 잘못된 법을 없애고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천명하였다.

 

7백 명의 성현들이 결집한 곳에서 남쪽으로 80∼90리 가다 보면 습폐다보라(濕吠多補羅)승가람에 이르게 된다. 까마득한 누대[層臺]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드높은 누각[重閣]은 날듯이 치솟아 장엄하기까지 하다. 승가 대중들은 청정하고 엄숙하며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다. 그 곁에는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다. 그 옆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여래께서 옛날 남쪽 마갈타국으로 향해 가시면서 북쪽의 페사리성을 돌아보시면서 도중에 쉬시던 유적지이다.

 

습폐다보라가람의 동남쪽으로 30여 리 가다 보면 긍가하의 남북 양안(兩岸)에 각각 솔도파가 하나씩 있다. 이곳은 존자 아난타가 몸을 나누어 두 나라에게 주었던 곳이다. 아난타는 여래의 종형제로서 다문총지(多聞總持)하여 사물에 박학다식하고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대가섭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맡아 지켜나갔고 학인들을 이끌면서 마갈타국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난이 숲 속을 거닐던 중에 사미 한 사람이 불경을 외는 것을 들었는데, 구절은 앞뒤가 뒤섞이고 문자도 제멋대로였다. 아난이 그 소리를 듣고서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솟아 그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나아가서 그에게 가르침을 내리고자 하였다. 그러자 사미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대덕께서는 연세가 드시더니 하시는 말씀도 잘못되었군요. 저의 스승은 고명하시고 나이도 아직 한창이십니다. 그분께 친히 가르침을 받았으니 잘못된 부분은 없습니다."

아난이 묵묵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비록 나이는 많이 들었지만 중생들을 위하여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면서 정법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중생들의 번뇌가 무거워 가르치고 이끌기가 몹시 어렵다.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러도 이로움이 없으니 빨리 멸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에 마갈타국을 떠나 폐사리성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긍가하를 건너 배를 타고 강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마갈타왕은 아난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 깊이 아난의 덕을 연모하여 곧바로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재빨리 뒤따라갔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대중들이 강의 남쪽 기슭에 진을 쳤다. 한편 폐사리왕은 아난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희비가 엇갈리면서 마음이 벅차 오르자 그도 군대에게 명하여 서둘러 달려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대중들이 강의 북쪽 기슭에 진을 쳤다. 두 나라의 군사들이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 그들의 깃발은 해를 가릴 정도였다. 아난은 그 병사들이 서로 전쟁을 벌려 무모한 살생을 범할 것을 염려하여 배에서 몸을 일으켜 허공으로 날아올라 신통변화를 보여준 뒤에 이내 적멸에 들었다. 그러자 불이 일어나 유해를 태웠으며 유해는 다시 가운데가 나뉘어져 하나는 남쪽으로 떨어지고 하나는 북쪽으로 떨어졌다. 이에 두 왕은 각각 한 부분씩 얻게 되었으며, 이것을 본 병사들은 모두 슬피 울며 통곡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본국으로 돌아가 솔도파를 세우고 공양을 올렸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불률시국(弗栗恃國)[북방의 사람들은 삼벌시국(三伐恃國)이라고 하는데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4) 불률시국(弗栗恃國)

불률시국42)의 둘레는 4천여 리인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토지는 비옥하며 꽃과 과실이 무성하다. 기후는 비교적 서늘하고 사람들의 성품은 조급하다. 많은 이들이 외도를 모시고 있으며 부처님의 법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적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으며, 승도들은 천 명에서 조금 모자라는데 그들은 대승과 소승을 겸하여 함께 수행하고 있다. 천사(天祠)는 수십 곳이 있고 외도들은 매우 많다. 나라의 큰 도성을 점수나(占戍拏)43)라 부르고 있으며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옛 궁성 안에 여전히 3천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마을이나 읍을 이루고 있다.

42) 범어로는 v ji이며 불률씨(佛栗氏)·비리기(毘梨祇)·발기(跋耆) 등으로도 음사한다. 멀리 

    북방 네팔에 근접한 지방으로서 지금의 Darbhanga 지역의 북부에 해당한다.
43) 정확한 호칭은 알 수 없다. 범어로는 이 원음을 Can una와 같은 것으로 여겨서 

    이 지방이 Janakapura일 것이라는 설도 있고, 근래에는 Madhubani의 북쪽 약

    16마일에 위치한 B ligar의 허물어진 터라는 설이 강력하다.

 

큰 강의 동북쪽에 가람이 있는데 승도들은 매우 적으며 그들의 학업은 맑 고 높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강기슭을 따라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세 길[丈] 남짓하다. 남쪽으로 긴 강이 흐르고 있는데, 대자대비하신 세존께서 어부를 제도하신 곳이다.

 

부처님 재세시에 5백 명의 어부들이 이곳에서 무리를 지어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강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머리가 열여덟 개 있고 머리마다 각각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부들이 이 물고기를 막 죽이려 할 때 여래께서 폐사리국에 계시다가 천안(天眼)으로 이것을 보시고 자비심을 일으키시어 바로 지금이 어부들을 교화하고 인도하며 깨달음을 얻게 할 적절한 때임을 아시고 대중들에게 고하였다.

"불률시국에 커다란 물고기가 있는데 내가 이를 인도하여 이로써 어부들을 깨우치고자 한다. 너희들은 이제 바로 그 때가 되었음을 알아라."

이에 대중들에게 둘러싸이신 채 신족통으로 허공을 타고 이 강가에 도착하셨다. 그리하여 평상시와 같이 자리를 펴시고 여러 어부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물고기를 죽이지 말라."

그리고 나서 신통력으로 방편문(方便門)을 여시고 그 위력을 큰 물고기에게 내리시자 물고기는 과거 세상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사람의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여래께서 이미 물고기의 사정을 아시면서도 짐짓 물으셨다.

"너는 일찍이 전생의 몸이었을 때 어떤 죄를 저질렀기에 악취(惡趣)를 흘러다니다가 이런 초라한 모습을 받게 되었느냐?"

물고기가 말하였다.

"옛날 복을 받아서 부유한 대바라문 집안에 태어나게 되었는데, 겁비타(劫比他)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 귀한 족성(族姓)만을 믿고서 인간의 도리를 능멸하였고, 해박한 지식을 으스대며 경법(經法)을 업신여겼습니다. 거만한 마음으로 부처님들을 비방하였고 추악한 말로 승가 대중에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의 생김새를 빗대어 낙타 같다느니, 당나귀 같다느니, 코끼리나 말 같다느니 하는 등 온갖 추한 생김새에 갖다 붙여 빈정거렸습니다. 그런 악업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추한 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난 세상의 선업의 도움으로 이렇게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게 되어 성스러운 교화를 직접 뵙고 몸소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전에 지었던 업을 참회하였다. 여래께서 근기에 맞추어 교화하시자 물고기도 그에 응하여 진리를 깨닫고 인도되었다. 그 후 물고기는 법을 듣고 나서 이에 목숨을 마쳤으며, 이 복력으로 하늘의 궁전에 태어나게 되었다. 이에 스스로 그 몸을 관하여서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나게 되었는지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난 세상의 일을 알고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여러 하늘의 무리들과 함께 나란히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 서서 예를 올린 뒤에 오른쪽으로 돌고 나서 물러나 섰다. 하늘의 보배와 향과 꽃으로 공양을 올리니 세존께서는 어부들에게 이것을 일러 주시며 미묘한 법을 설하셨다. 마침내 어부들도 그 자리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지극한 참회와 예를 올리고 그물을 찢고 배를 불태웠으며 참다운 세계로 귀의하고 법을 받들었다. 그리하여 물든 옷을 입고 또다시 지극한 가르침을 듣고서 모두가 마음의 번뇌에서 벗어나 다 함께 성스러운 과보를 얻었다.

 

어부들을 제도한 곳에서 동북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옛 성이 있는데 이 성의 서쪽에 솔도파가 있으며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던 때에 이곳에서 6개월간 법을 설하시어 여러 하늘과 인간을 제도하신 곳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140∼150여 걸음 가다 보면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옛날 이곳에서 여러 필추들을 위하여 계를 제정하신 곳이다. 

 

이어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여래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안치한 솔도파가 있다. 여래께서 옛날 이곳에 머무셨는데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다 구름처럼 몰려들어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등을 내거는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천 400∼1천 500리를 가다가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면 니파라국(尼波羅國)[중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5) 니파라국(尼波羅國)

니파라국44)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 설산 속에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산과 강이 연이어 있으며 토지는 곡식을 경작하기에 좋고 꽃과 과일이 많이 난다. 적동(赤銅)과 야크[犛牛]와 명명조(命命鳥)45)가 난다. 화폐로는 적동전(赤銅錢)을 사용하며 기후는 매섭게 춥다. 풍속은 음흉한 데다 사람들의 성품은 사납고 난폭하며 신의를 하찮게 여긴다. 학문과 기예를 익히지 않고 손재주를 이용하는 일에 밝다. 생김새는 비루하고 초라하며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고 있다.

44) 범어로는 nep la이며 니파라(泥婆羅)·니파라(儞波羅)·니팔라(尼八剌)라고도 음사한다. 

    『자은전』에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현장이 직접 방문한 나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당시

    니파라국은 토번(吐蕃:西藏)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토번과 함께 중국에서 온 사절(使節)

    왕현책(王玄策)을 도와서 마게타를 정벌한 일이 있다.
45) 범어로는 j vaj vaka이며 생생조(生生鳥)·공명조(共命鳥)라고도 하며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절과 천사가 서로 붙어 있고 승도들은 2천여 명 있으며, 대소승을 함께 익히고 있다. 외도들과 이학(異學)들의 숫자는 자세하지 않다. 왕은 찰제리율첩바종(刹帝利栗呫婆種)으로서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며 그 마음이 고결하며 맑고 불법을 돈독하게 믿고 있다. 근래에는 앙수벌마(鴦輸伐摩)46)[당나라 말로는 광주(光胄)라고 한다]라는 이름의 왕이 나왔다. 그도 역시 영리하고 총명하여 스스로 『성명론(聲明論)』을 지었다. 학문을 숭상하고 덕 있는 이를 존경하였으며 그 명성이 멀거나 가까운 곳에 널리 퍼졌다.

46) 범어로는 a u-varman이다. 7세기 초엽에 나온 영주이며 642년 무렵에 사망하였다. 

    Th kuri왕조의 시조이다. 그의 재위 중에 서장(西藏)에 접근하여 자신의 딸 Bh ku i를

    서장국의 왕 Sro -b san sgam-po의 왕비로 보내어서 왕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였다.

    중국으로부터 641년에 서장으로 들어간 문성공주(文成公主)는 제2비(妃)이다.

 

 

도성의 동남쪽으로 작은 못47)이 있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불을 못 속으로 던지면 물에서는 이내 불길이 솟아오르며, 다른 물건을 던져 넣어도 역시 불이 붙어 타버리고 만다. 

47) 『당서(唐書)』에는 아기파니지(阿耆婆濔池)라고 하며 범어로 aj va, 즉 '죽음'을 

    의미하므로 사지(死池)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곳에서 다시 폐사리국으로 돌아가서 남쪽으로 긍가하를 건너면 마게타국(摩揭陀國)[구역에서는 마가타(摩伽陀) 또는 마갈제(摩竭提)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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