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서역기 제 8 권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9. 중인도[1개국]
1) 마게타국(摩揭陀國) ①
마게타국1)의 둘레는 5천여 리에 달한다. 성에는 살고 있는 사람이 적고 성 밖의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처마를 잇대고 살고 있다. 토지는 비옥하고 곡식이 풍성하다. 특이한 벼 품종이 있는데 낱알이 아주 크고 향기와 맛은 뛰어나며 광택과 색이 매우 특이하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이 쌀을 가리켜서 '대인에게 공양 올리는 쌀[供大人米]'2)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늪지이며 마을은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 한여름부터 중추(仲秋) 전까지는 평지에 물이 흘러 배를 띄울 수 있다. 풍속은 순박하고 질박하며 기후는 온화하고 덥다. 학문을 높이 숭상하고 불법을 존경하고 있다. 절은 50여 곳 있으며 승도들은 1만여 명 남짓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천사(天祠)는 수십 곳 있으며 이교도들도 매우 많다.
1) 범어로는 mag dha이며 마갈(摩竭)·마게(摩揭)·마가타(摩訶陀)·묵갈타(默竭陀) 등으로도 음사하며,
무해(無害)·무뇌해(無惱害)·불악처(不惡處)·치감로처(致甘露處)·선승(善勝)·총혜(聰惠)·천라(天羅)
등으로 번역한다. 고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대체로 지금의 비하르(Bih r)주의 가야(Gay )현과
파트나(Patna)현을 중심으로 하는 갠지스강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i un ga왕조(기원전 600∼기원전
360)의 빈비사라왕과 그 아들인 아사세왕은 불교와 쟈이나교의 개조와 동시대 인물이며 이 두 종교는
그 왕조의 보호 아래에서 발전하였다.
2) 이 쌀은 오직 국왕이나 대덕에게만 바치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파트나 지방의 쌀은 현재 인도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여겨지고 있다.
긍가하 남쪽에 옛 성이 있는데 둘레는 70여 리이다. 황폐해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있다. 옛날 사람들의 수명이 무량세(無量歲)이었을 때 이 성은 구소마보라성(拘蘇摩補羅城)3)[당나라 말로는 향화궁성(香化宮城)이라고 한다]이라고 불렀다. 왕궁에 꽃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로부터 인간의 수명이 수천 세가 되었을 때에 이 성은 다시 파타리자성(波吒釐子城)4)[구역에서는 파련불읍(巴連弗邑)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라고 불렸다.
3) 본문 권5에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4) 범어로는 p ali이며 원래는 나무 이름이다. 파라리불다라(波羅利弗多羅), 파라리불(巴羅利弗),
파린(巴隣), 파라리(波羅梨) 등으로도 음사한다. 이 도시 이름은 서방 문헌에 Palibothra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 도시의 유적은 지금의 파트나로부터 서북쪽의 Dinapore에 이르는 길에 있다.
옛날에 어떤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박학한 사람이었다. 수천 명의 문인들이 그에게서 배우고 있었으며 여러 학도들이 함께 와서 노닐고 배웠다. 이 때 서생(書生) 한 사람이 온종일 서성이며 근심에 사로잡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동료들이 물었다.
"무엇을 그리 근심하는가?"
그가 답하였다.
"아직 한창의 나이에 멀리 유학 와서 혼자 고민하여 왔네.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학업과 기예에서 이룬 것이 없어 이것을 생각해보고 말을 하자니 울적한 마음이 더욱 심해질 뿐이네."
그러자 학도들이 장난삼아 그에게 말하였다.
"이제 보니 그대는 배우자를 찾고 있었구나."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장난삼아 세 사람을 세워서 남자쪽 부모로 삼고, 두 사람을 세워 여자쪽 부모로 삼은 뒤 그를 타리수(吒釐樹) 아래에 앉혀 놓고는 '너는 이제 이 나무의 사위가 됐어'라고 하면서 과일을 따오고 맑은 물을 떠서 혼인의 순서를 말하고 짝을 맺을 시기를 청하였다. 이 때 거짓으로 꾸민 여자의 아버지가 꽃가지를 잡고 서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아름다운 배필이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라."
서생은 몹시 기뻐하여 스스로 만족하였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학도들이 돌아가자고 말하였지만 서생은 연정을 품고서 꼼짝하지 않았다. 학도들이 말하였다.
"앞서 한 말은 장난이었으니 부디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숲 속에 맹수들이 있어 해를 당할지도 모르네."
그러나 서생은 끝내 남아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덧 석양이 졌고 문득 기이한 빛이 들판을 비추더니 청아한 음악소리가 울리면서 휘장이 길게 펼쳐졌다. 그리고 홀연히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위로의 말을 던졌으며 또다시 노파가 소녀를 데리고 왔다. 길을 가득 메운 하객들은 화려한 성장을 하였으며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 때 노인이 소녀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그대의 나이 어린 아내이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즐기는 가운데 연회가 7일이나 계속되었다.
한편 학도들은 서생이 맹수에게 해를 당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그 나무 아래로 와서 그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서생은 홀로 나무 그늘에 앉아서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 학도들은 함께 돌아가자고 말하였지만 서생은 거절하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후 스스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친척들을 찾아가 이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숲 속으로 가보았다. 그들은 모두 다 꽃나무가 하나의 큰 집으로 변하고 하인과 몸종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가운데 그 노인이 조용히 접대하며 음식들을 내어놓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는 광경을 보았다. 친구들은 성으로 돌아가서 4방에 이 일을 낱낱이 알렸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사내아이를 낳은 뒤 그 서생은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돌아가고 싶지만 그대와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소. 그러나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 있다 해도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방랑하게 될 것이오."
그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자신의 아버지인 노인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노인이 서생에게 말하였다.
"인생의 즐거움이 어찌 고향에만 있겠는가? 이제 집을 지어줄 것이니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완성되었다. 나아가 예전의 향화성(香花城)을 이 마을로 옮겼고, 그 아이로 말미암아 신(神)이 성을 지었다고 하여 이후로는 파타리자성(波吒釐子城)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옛 왕궁의 북쪽에 돌기둥이 있는데 높이는 수십 척에 달한다. 이것은 무우왕이 지옥을 만든 곳이다. 석가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백년 째 되던 해에 아수가(阿輸迦)5)[당나라에서는 무우(無憂)라 하고 구역에서는 아육(阿育)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왕이 나왔는데 그는 빈비사라(頻毘娑羅)[당나라에서는 영견(影堅)이라 하고 구역에서는 빈바사라(頻婆娑羅)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왕의 증손(曾孫)6)이다.
5) 본서 권1의 무우왕 주 160) 참고.
6) 무우왕은 빈두사라(頻頭娑羅)의 아들이며, 왕조의 시조인 찬드라굽타의 자손이므로 현장의
이러한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빈비사라왕은 i un ga왕조 제5세이며 불교와 쟈이나교의 조사들과
동시대인이고 그 아들인 아사세왕에게 살해되었다.
아수가왕은 왕사성에서 파타리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외곽을 쌓아서 옛 성을 에워쌌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다만 옛 성의 터만 남았다. 가람과 천사와 솔도파의 남아있는 터는 수백 개이지만 지금 현존하고 있는 것은 두세 개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옛 궁의 북쪽, 긍가하에 임해 있는 곳의 작은 성 안에 천여 채의 집이 있다.
처음에 무우왕이 왕위를 이은 뒤 그 행동거지가 매우 잔혹하여, 곧 지옥을 세워서 온갖 중생들의 목숨을 해쳤다. 지옥의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는 몹시 높고 험하며 망루가 불쑥 솟아있는 가운데 그 속에는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는 커다란 화로와 쟁기, 날카로운 칼 등 온갖 고문하는 기구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저승처럼 꾸며 놓고서 흉악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지옥을 담당하도록 맡겼다. 처음에 나라의 법을 어긴 죄인들은 그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도탄에 빠뜨렸다. 그 후 옥에서 고통을 겪도록 하고서 다시 구금한 뒤에 살육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번 이곳에 온 자는 모두 죽여 버렸으니, 그들은 그대로 입을 다물게 된 거나 마찬가지여서 옥의 상황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 어떤 사문이 불법을 따르는 승가 대중[法衆]에 들어온 지 오래지 않아서 마을을 다니며 걸식을 하다가 우연히 옥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흉악한 옥리가 그를 붙잡아다가 잔혹하게 죽이려고 하였다. 사문은 놀라 두려움에 떨면서 부처님께 예경하고 참회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그러다 문득 어떤 사람이 묶인 채로 옥에 끌려와서 손발이 잘리고 사지가 찢겨 순식간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사문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나서 깊은 슬픔과 애도하는 마음이 일어 무상관(無常觀)을 이루고 무학과(無學果)를 증득하였다.
이 때 옥졸이 말하였다.
"이젠 네놈이 죽을 차례다."
사문은 성과(聖果)를 증득한 뒤라 마음이 삶과 죽음에 대해 평온해졌으므로 끓어오르는 가마 속에 들어가도 마치 맑은 못 속에 있는 커다란 연꽃 위에 앉은 듯하였다. 이 모습을 본 감옥의 주인이 크게 놀라 심부름꾼을 보내어 이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왕도 몸소 그 모습을 보려고 달려와서 신령스러운 조화를 깊이 찬탄하였다. 이 때 감옥의 주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도 이제 죽으셔야 합니다."
왕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왕께서 일찍이 형옥(刑獄)을 감독하게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감옥의 담 안으로 들어온 자는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설사 왕이 들어오셨다고 하여도 홀로 죽음을 벗어나는 일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법이란 일단 한번 정해졌으면 다시 고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일찍이 내린 영이 어찌 너라고 거기서 벗어나겠느냐? 너는 오래 전부터 생명을 마구 다루었으니, 그것은 도리어 나의 허물이다."
그리고 나서 옥졸에게 명하여 그를 커다란 화로 속으로 던져 넣게 하였다. 옥의 책임자가 죽자 왕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에 울타리를 허물고 구덩이를 메웠으며 감옥을 폐쇄하고 형벌을 관대하게 적용시켰다.
감옥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그 기단은 기울고 허물어졌으며 오직 복발(覆鉢)의 형세만이 남았다. 옆의 장식은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난간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8만 4천 7) 탑 가운데 하나이다. 무우왕이 사람들을 시켜서 궁을 만들고서 그 속에 여래 사리 1말[斗]을 안치하였는데 신령스러운 기적이 이따금 일어났으며 신비한 빛이 간간이 비쳤다. 무우왕은 감옥을 폐쇄한 뒤 근호(近護)대아라한을 만났다. 아라한은 왕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잘 이끌었다. 왕이 나한에게 말하였다.
"다행히 지난 세상의 복업으로 인하여 인간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이처럼 장애에 얽혀서 부처님의 교화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러 탑들을 중수하여 여래의 유신(遺身) 사리를 모시고자 합니다."
나한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복덕의 힘으로 보이지 않은 수많은 정령들을 부리고 널리 바라는 마음으로 3보를 두루 보호하려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바였으며, 이제 바야흐로 그 때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이로 인하여 널리 헌토(獻土)의 인연과 여래께서 무우왕이 크게 불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별하신 일 등을 설하였다. 무우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귀신들을 불러 모아서 영을 내렸다.
"법왕께서 공덕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시고 인도하심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나는 지난 세상의 선업으로 인하여 인간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여래의 유신 사리(遺身)를 거듭 공양하고자 한다. 이제 너희 귀신들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섬부주의 끝까지 수많은 사람[拘胝]으로 집을 채운 곳에는 부처님의 사리로써 탑을 세워야 한다. 그러니 나와 함께 마음을 다하여 이 일을 이룬다면 그 공은 너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뛰어난 복의 이익을 어찌 혼자 갖고자 하겠느냐? 따라서 각각 일을 한 후에 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귀신들이 명을 받고서 자신들의 거처에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불사를 끝낸 뒤에 모두 와서 왕의 명을 청하였다. 무우왕은 이미 여덟 나라에서 세워진 솔도파들을 열고서 그 속에 들어있는 사리를 나누어 귀신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한에게 말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 곳에 동시에 사리를 안장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바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일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나한이 말하였다.
"왕께서 귀신에게 명하신 기약한 날이 되면 해가 가려지는데, 마치 그 모습이 손바닥과 같을 것입니다. 이 때 사리를 안치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왕이 이 뜻을 받들어서 귀신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그 날이 되자 무우왕은 해가 비치는 광경을 자세하게 관찰하였다. 정오가 되자 나한이 신통력으로 손을 뻗쳐 해를 가렸다. 그러자 귀신들이 불사를 이룬 곳에서 모두 우러러본 뒤에 동시에 일을 마쳤다.
7) 실제로 팔만 사천 가지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수를 나타내는 인도의 표현법이다.
솔도파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큰 돌이 있다.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두 발자국은 또렷이 남아있는데 그 길이는 1척 8촌, 너비는 6촌 남짓하다. 두 발자국에는 모두 바퀴무늬가 있으며 열 개의 발가락에는 모두 꽃무늬가 들어있다. 물고기 모양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으며 광명이 이따금 비춘다.
옛날 여래께서 적멸에 드시고자 북쪽 구시나성으로 가시면서 남쪽으로 마게타국을 돌아보셨는데, 이 돌을 밟고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이 발자국을 남긴다. 적멸을 앞두고 마게타를 돌아보는 것이니라. 백 년 뒤에 무우왕이라는 이가 있어서 세상을 다스리며 군림할 터인데 이 땅에 도읍을 세울 것이다. 그는 3보를 널리 보호하며 수많은 귀신을 부릴 것이다."
무우왕이 왕위를 계승한 뒤 도읍을 옮기고 마을을 축조하여 부처님께서 족적(足迹)을 남기신 바위를 에워쌌다. 그리고 궁성과 가까운 위치였으므로 언제나 가까이하며 공양을 올렸다. 후에 여러 나라의 왕들이 앞다투어 이 돌을 가지고 가려고 하였는데, 비록 크지 않은 돌이었지만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였다. 근래에는 설상가왕이 불법을 파괴하면서 마침내 돌이 있는 곳까지 와서 성스러운 족적을 파괴하고자 구멍을 뚫었다. 그러나 돌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무늬도 예전 그대로를 띠고 있었다. 이에 이 돌을 긍가하 에 던져버렸지만 이내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왔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부처님께서 족적을 남기신 정사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돌기둥이 있는데 높이는 30여 척이고, 그곳에 쓰여진 기록들은 이지러져서 내용이 많이 빠져있다. 대충 살펴보면 "무우왕의 믿음의 뿌리는 굳고 올곧아서 섬부주를 세 번이나 불·법·승에게 보시하였고, 세 번 온갖 진귀한 보배로 값을 치른 뒤에 다시 스스로 되샀다"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대략은 이와 같다.
옛 궁의 북쪽에 커다란 석실이 있는데 외부는 마치 숭산(崇山)과 같고 안의 너비는 수 길[丈]에 달한다. 이것은 무우왕이 출가한 동생을 위해 귀신을 시켜서 세운 것이다. 본래 무우왕에게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마혜인타라(摩醯因陀羅)8)[당나라 말로는 대제(大帝)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귀족 출신이면서 건방지게 왕의 격식에 맞추어 옷을 입었고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방자하고 난폭하였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 국사를 보필하는 원로들과 신하들은 왕에게 나아가 이 일을 간하였다.
"왕의 교만한 동생이 위엄을 부리는 것이 매우 극심합니다. 무릇 평등하게 다스리면 곧 국가는 통치되고 사람들이 화합하면 곧 군주가 평안합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밝은 가르침으로 그 유래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국법에 의거하여 법을 집행하여 주소서."
그러자 무우왕이 울면서 동생에게 말하였다.
"나는 선조의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모든 중생들을 보살피고 있다. 하물며 너는 나와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인데 어찌 은혜를 잊겠느냐? 일찍이 너를 바로 이끌지 않아서 이제 형법의 나락으로 너를 빠뜨리게 되었구나. 위로는 조상의 영혼에게 송구한 일이요, 아래로는 대중들의 뜻에 쫓기고 있다."
그러자 마혜인타라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제 스스로 근신하여 행동하지 않은 까닭에 감히 나라의 법을 어겼습니다. 부디 재생의 기회를 베풀어 앞으로 7일간 여유를 주소서."
이에 깊은 방에 안치시키고 엄중하게 그를 지키게 하고 맛좋고 진귀한 음식을 넣어주고 그를 받드는 일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그를 지키는 사람은 큰소리로 왕의 동생에게 일러주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제 6일이 남았습니다."
엿새째가 되자 마혜인타라는 깊은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듭 온몸과 마음을 쏟아 마침내 과증(果證)을 얻었다. 그리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라 신령스러운 자취를 나타내며 이내 세속을 벗어나 멀리 깊은 계곡에 은거하였다. 그러자 무우왕이 몸소 그곳으로 찾아가서 말하였다.
"예전에는 나라의 법을 어겨서 엄한 형벌에 처하고자 하였는데, 이렇게 그 마음을 맑게 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라 성과(聖果)를 증득하였구나. 이제 죄 지은 것도 없어졌으니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동생이 말하였다.
"예전에는 애욕의 그물에 끌려 다니고 마음은 풍류와 여색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태로운 성을 나오게 되었으니, 마음은 산의 계곡에서 즐겁게 노닐고 있습니다. 원하오니 인간 세상을 버리고 오래도록 골짜기에서 지내게 하여 주소서."
왕이 말하였다.
"마음의 근심을 가라앉히는 것이 어찌 반드시 깊은 바위에서만 가능하겠느냐? 나는 너의 뜻에 따라 너를 위해 네 거처를 지어주리라."
그리고 나서 여러 귀신들에게 명을 내렸다.
"나는 훗날 널리 진귀한 음식을 준비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모두 함께 내가 베푸는 잔치에 오도록 하라. 그 때 각자 음식을 받을 상과 자리로 삼을 큰 돌을 가지고 와야 한다."
명을 받은 여러 신들은 약속한 날이 되자 모두 몰려들었다. 대중들이 모인 뒤에 왕이 신들에게 말하였다.
"석좌(石座)를 종횡으로 쌓아올려라. 그러면 이 일로 말미암아 힘들이지 않고도 석실을 만들 수 있으리라."
이에 신들이 명을 받들었는데 하루도 되지 않아 일을 모두 마쳤다. 그러자 무우왕이 몸소 그곳으로 나아가 맞이하여 마혜인타라를 이 산 암자에 머물도록 청하였다.
8) 범어로는 mah ndra이며 남전(南傳)에서는 마힌다(mahinda)라고 하며 아육왕의 동생으로서
세일론섬에 불교를 전한 인물이다.
옛 궁의 북쪽, 지옥의 남쪽에는 커다란 석조(石槽)가 있다. 이것은 무우왕이 귀신들을 시켜서 만들어 놓은 그릇인데 승가 대중에게 밥을 보시할 때 음식을 넣었던 것이다.
옛 궁의 서남쪽에 작은 돌산이 있는데 바위 계곡 주위로 수십 개의 석실이 있다. 이것은 무우왕의 근호 등 여러 아라한들을 위하여 귀신들을 시켜서 지었다. 곁에는 오래된 대(臺)가 있는데 돌을 쌓아서 만든 기단이 지금도 남아있다. 찰랑거리는 연못의 물은 드맑고 눈부시며 거울처럼 깨끗하다. 이웃하는 나라나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물을 성수(聖水)로 여기고 있어서 만일 이 물을 마시거나 이 물에 몸을 씻으면 죄와 번뇌가 사라진다고 한다.
산의 서남쪽에 다섯 개의 솔도파가 있다. 기단은 이미 무너졌지만 남은 터는 여전히 높다. 멀리서 이것을 바라보면 우뚝 솟은 것이 마치 구릉과도 같다. 한 면(面)이 각각 수백 보(步)에 달하며 훗날의 사람은 이 위에 다시 작은 솔도파를 세웠다.
『인도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 무우왕이 8만 4천 기의 솔도파를 세운 뒤에도 닷 되[斗]의 여래 사리가 남았으므로 따로 다섯 기의 솔도파를 세웠다. 그 모양은 다른 불솔도파에 비해 특이한데 신이한 기적이 간간이 일어나며 이 불솔도파는 여래의 오분법신(五分法身)9)을 상징한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무리들이 그것을 훔치려고 서로 의논하며 말하였다.
"옛날에 난타왕(難陀王)10)이 이 다섯 개의 보물 창고를 세워 7보를 저장해두었다."
그 후 어떤 왕이 있었는데 그도 역시 돈독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가 앞서 사람들이 의논하는 말을 듣고서 욕심이 극에 달하여 군사들을 일으켜서 몸소 그곳으로 가서 발굴하고자 하였다. 이 때 지진이 일어나 산이 기울고 구름이 뒤덮여 해를 가렸다. 그리고 솔도파 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뇌성처럼 울렸다. 그러자 병졸들은 쓰러졌고 코끼리와 말들은 놀라서 달아나 버렸다. 이후부터 함부로 훔치려고 덤벼드는 일이 없어졌다.
9) 부처와 아라한이 갖추는 다섯 가지 공덕, 즉 계신(戒身)·정신(定身)·혜신(慧身)·해탈신(解脫身)·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이다.
10) 마우리야왕조 이전의 난타(Nanda)왕조의 군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난타왕조는 거대한 군사력과
그것을 유지하기에 족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아직 확실하게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옛날에 기록된 것에 의거하면 그 진실한 점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옛 성의 동남쪽에 굴타아람마(屈居勿反吒阿濫摩)[당나라 말로는 계원(鷄園)이라고 한다]승가람11)이 있는데 이것도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무우왕이 처음 불법을 믿으면서 모든 법도에 맞추어 이 절을 건립하고 선(善)의 종자를 심기 위해 천 명의 승려를 불러 모으고 성속(聖俗)의 두 무리에게 네 가지 물건을 널리 공양하고 생활도구들을 두루 베풀었다고 한다. 기울고 훼손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기단의 터는 여전히 남아있다.
11) 범어로는 kurku a- r ma이며 계원(鷄園)·계림원(鷄林園)·계림정사(鷄林精舍) 등으로 번역한다.
『잡아함경』 권23에 의하면 아육왕이 우파굴다(優波崛多)를 이 절로 맞아들여서 공양 예배하며
불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 절을 건립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권2 등의 상좌부 계통의 남전(南傳)에서는 아육승가람(阿育僧伽藍)에서 아육왕의 관정(灌頂) 즉위
16년째에 제3결집을 행하였다고 하지만 대중부 계통의 북전(北傳)에서는 이 결집을 전하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 역사적으로도 이 결집을 부정하고 있다.
절 옆에 커다란 솔도파가 있는데 이름은 아마락가(阿摩落伽)라고 하며 이것은 인도에서 나는 약과(藥果)의 이름이다. 무우왕이 병에 걸린 지 오래되어 이제 더 이상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움을 알고서 진귀한 재보를 널리 베풀어 복전을 닦고자 하였다. 그런데 정치를 맡은 권신들이 경계하면서 왕의 뜻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 후 식사를 할 때 아마락과(阿摩落果)를 먹지 않고 남겨두고서 이것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다 보니 반쯤 물러 터졌다. 왕은 그 열매를 손에 쥐고 길게 탄식하면서 신하들에게 물었다.
"섬부주의 주인은 지금 누구인가?"
신하들이 답하였다.
"오직 대왕뿐이십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나는 이제 군주가 아니다. 오직 이 반만 남은 과일 정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아아, 세간의 부귀는 무너지기 쉬우니 마치 바람 앞의 등불보다도 더 위태롭다. 나의 지위가 온 세상의 위에 있고 높은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여도 이렇게 목숨을 마칠 때가 되니 가난해지고 세력 있는 신하들의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천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이 반쪽의 열매만이 내게 남아있구나."
그리고 나서 곧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 반쪽 열매를 저 계원(鷄園)으로 가지고 가서 여러 승가 대중에게 보시하여라. 그리고 '옛날에는 섬부주의 주인이었지만 지금은 반쪽 아마락의 왕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대덕 스님들에게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나이다. 부디 최후의 보시를 받아주십시오. 제가 가졌던 모든 것은 이미 잃어버렸고 오직 이 열매 반만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가난함을 가엾게 여기시어 복의 종자를 널리 증장시켜 주소서'라고 말씀 올려라."
사신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자 스님들 가운데 상좌 스님이 말하였다.
"무우대왕은 과거에 널리 제도할 것을 기약하였지만 학질에 걸리게 되었다. 간악한 신하들은 제멋대로 명을 주무르고, 쌓아두었던 보배도 이제 더 이상 왕의 소유가 아니다. 그리하여 반만 남은 과일을 보시하였으니 왕의 명을 받들어 널리 승가 대중에게 보시하여라."
그리하여 왕이 말한 대로 말하며 곧바로 전사(典事)를 불러서 국을 끓일 때 그 속에 넣어 끓이도록 시켰다. 그리고 그 열매의 씨를 거두어서 솔도파를 세웠다. 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로써 왕의 유언을 널리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아마락가 솔도파의 서북쪽으로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솔도파는 건건치성(建揵稚聲)이라고 한다. 처음에 이 성 안에는 가람이 백여 곳 있었고 승도들은 온화하고 고요하였으며 학업이 맑고 높아 외도 학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후에 승도들이 차츰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잇는 후진들은 선배들의 수행을 잇지 못하였다. 반면에 외도들의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는 잘 이어졌고 수행도 잘 이루어졌다. 이에 외도들 수천 수만 명이 승방으로 몰려가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건치(揵稚)를 두드려서 학인들을 불러 모으시오."
그러나 승방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외도의 말을 듣고 그릇되게 건치를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었다.
"우열을 가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외도들의 스승들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업도 정통해 있었다. 반면 승려들은 비록 무리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들의 말과 논리는 볼품없고 천박하였다. 그러자 외도들이 말하였다.
"우리의 이론이 뛰어나다. 그러니 지금부터 모든 승가람에서는 대중들을 불러모을 때 건치를 두드려서는 안 된다."
왕은 앞의 논변규칙에 의거하여 그들의 청을 허락하였다. 승도들은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감수하면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12년 동안 건치를 울리지 않았다.
그러다 당시 남인도 나가알랄수나(那伽閼剌樹那)보살[당나라 말로는 용맹(龍猛)이라고 하고 구역에서는 용수(龍樹)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2)이 있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을 날렸으며 자라서도 고명(高名)을 널리 날렸다. 애욕을 떨치고 출가하여 수학하다가 미묘한 이치를 깊이 논구하여 초지(初地)에 올랐다. 그에게 큰 제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제바(提婆)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지혜롭고 명민하였으며 기지가 있고 총명하여 그 사물에 대한 깨달음이 뛰어났다. 그가 자신의 스승에게 말하였다.
"파타리성의 여러 학인들은 외도들과의 논쟁에서 패하여 건치를 두드리지 못한 지 1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제가 감히 삿된 견해의 산을 쳐부수고 정법의 횃불을 밝히고자 합니다."
그러자 용맹이 말하였다.
"파타리성의 외도들은 박학하니 네가 그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가겠다."
제바가 말하였다.
"썩은 풀을 베어내는데 어찌 산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 이학(異學)들을 몰아내겠습니다. 이제 스승께서 외도의 논리를 내세워 보신다면 제가 한 구절을 한 문장마다 낱낱이 논파하고 분석하여 그 우열을 가린 후에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용맹이 이에 외도들의 뜻을 내세우자 제바는 그 이치를 차례로 논파하였다. 그러기를 7일이 지나자 용맹은 더 내세울 외도의 이론의 근본을 잃어버렸으며 이에 감탄하며 말하였다.
"그릇된 말은 쉽게 잃게 되며, 삿된 이치는 버티기 어렵도다. 너는 그곳으로 가라. 반드시 그들을 논파할 것이다."
제바보살은 일찍부터 고명(高名)을 날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파타리성의 외도들도 그에 관한 명성은 익히 들어왔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옛날에 굽어살피시어 사문들에게 건치를 울리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부디 다시 명을 내리셔서 모든 문지기들에게 주변 국가의 낯선 승려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도록 하여주소서. 그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서 앞서 제정하셨던 법을 함부로 고칠까 두렵습니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허락하여 더욱 엄중하게 수비를 보도록 하였다. 제바가 도착하였으나 성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왕이 영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옷을 바꿔 입었다. 승가지(僧加胝)를 개어서 풀로 덮어 가리고서 어깨에 짊어진 뒤에 아랫도리를 걷고서 재빨리 뛰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성 안에 도착한 뒤에 풀을 털어 버리고 옷을 입었다. 가람에 도착한 그는 잠시 숨을 돌리고자 하였으나 가람에는 그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묵을 방을 얻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건치가 걸려 있는 대(臺) 위에서 묵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문득 건치가 크게 울렸다. 승가 대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살펴보니 낯선 비구가 있었다. 다른 승가람도 이 소리에 답하여 건치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왕이 이 소리를 듣고 조사하고 물어보았지만 가장 먼저 소리를 울린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가람에 도착하여 보니 그곳에는 제바가 있었다. 제바가 말하였다.
"무릇 건치의 역할은 그것을 울려서 대중들을 모으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걸어둔들 무엇하겠습니까?"
왕의 사신이 이에 답하였다.
"예전에 승가 대중들이 논쟁에서 패배한 뒤로 법으로 정하여 건치를 울리지 못하게 한 지 이미 12년이나 지났습니다."
제바가 말하였다.
"그랬었군요. 내가 오늘 다시 법고(法鼓)를 울리겠습니다."
사신이 이 일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낯선 사문이 예전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합니다."
왕은 이에 학인들을 불러 모아서 다음과 같이 규정을 내세웠다.
"논쟁에서 자신의 종지를 잃게 되면 목숨을 걸고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
이에 외도들이 앞다투어 논쟁에 가서 자신들의 온갖 논리를 늘어놓으며 각자 사변(辭辯)의 창을 번득이자 제바보살은 곧바로 논좌(論座)에 올라 그들의 논리의 앞머리만을 듣고도 그들의 이치에 따라 이것을 논파하였다. 그리하여 12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든 외도들을 물리쳤다. 국왕과 대신들 모두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령스러운 솔도파를 세워서 그 지극한 덕을 널리 알렸다.
12) 범어로는 n ga-arjuna이며 2∼3세기에 생존하였던 남인도 바라문 종족으로 대승불교를 인도에
성행시킨 인물이다. 인도에서는 중관파(中觀派)의 조사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부법장(付法藏)
제13조이다.
건치를 두드렸던 솔도파의 북쪽에 오래된 기단이 있다. 옛날 귀변(鬼辯)바라문이 살던 곳이다. 처음에 이 성 안에 살고 있던 바라문이 깊은 숲 속에 집을 짓고 세속의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는 귀신을 모시고 복을 구하면서 도깨비들과 의지하며 살았다. 사람들과 드높은 논의와 빼어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훌륭한 말이 메아리에 응하여 입에서 나왔다. 이것에 대해 논란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장막을 드리우고 상대를 대하였다. 기존의 학문이 높고 비범한 재주를 지닌 자들도 그보다 더 뛰어날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세속에서는 이 바라문을 한결같이 성인인양 우러러보았다.
한편 당시에는 아습박구사(阿濕縛窶沙)13)[당나라 말로는 마명(馬鳴)이라고 한다]보살이 있었는데, 그의 지혜로움은 만물에 두루 정통하였고 그의 도(道)는 3승에 고루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바라문의 학업은 스승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의 기예는 뿌리도 없는 것이다. 깊고 한적한 곳에 머물면서도 홀로 높은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귀신들과 서로 의지하거나 요괴들이 도와주지 않고서야 이와 같은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무릇 그런 말솜씨는 귀신의 전수를 받은 것이어서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설(辭說)이라면 한 번은 들을 수 있지만 반복해서는 능히 다시 말하지 못한다. 나는 이제 그에게로 가서 그의 행동거지를 관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암자에 도착하여 말하였다.
"그대의 성스러운 덕을 우러르고 흠모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휘장을 걷어 올려주소서.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저의 뜻을 감히 아뢰고 싶습니다."
그러나 바라문은 여전히 오만을 부리며 휘장을 드리운 채 그를 대하였을 뿐 결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명은 마음속으로 귀신이나 도깨비들이 대단히 거만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마친 뒤에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알았으니 반드시 그를 논파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왕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부디 저 거사와 더불어 논전을 벌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그러자 왕이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만일 3명(明)을 증득하지 못하고 6통(通)을 얻지 못한 자라면 어찌 그를 상대해 논쟁을 벌일 수 있겠느냐?"
그리고 나서 가마를 준비하도록 명하고 몸소 그곳으로 가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자세하게 보았다. 이 때 마명은 3장(藏)의 미묘한 말을 논하고 5명대의(明大義)를 설하였는데 그의 미묘한 말솜씨는 종횡으로 거침없었고 고론(高論)은 맑고 이치가 깊었다. 그런데 그 바라문이 자신의 논리를 펼치며 말을 끝내자 마명이 다시 말하였다.
"그대는 내 말의 본지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소. 다시 한번 그것을 말해주시오."
그러자 바라문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마명은 질책하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의 논란에 대해 해명하지 않는가? 그대가 섬기는 귀신과 도깨비들이 그대에게 어서 빨리 대답을 내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재빨리 휘장을 걷어올리고 그 괴이한 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바라문은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멈추시오, 멈추시오."
마명이 물러나면서 말하였다.
"이 자의 명성은 이제부터 땅에 떨어질 것이다. 거짓 명성은 오래가지 못한다더니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왕이 말하였다.
"무릇 높은 덕을 지니지 않고서야 누가 삿된 가르침을 감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알아보는 철인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라에는 항상된 법도가 있으니 모름지기 그 높은 덕을 표창해야 할 것이다."
13) 범어로는 a vagho a이며 마명(馬鳴) 또는 공승(功勝)이라고도 불린다. 가니색가왕과 동시대인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불멸 후 약 6백 년, 즉 2세기 무렵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사위국의 keta성(城) 사람이며
처음에는 외도와 교유하며 논의를 하였지만 협 존자에게 논파당하자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두루 3장을 익혀서 대중의 공격을 받았다.
성의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가람의 유적지가 있는데 그 곁에는 솔도파가 있다. 신비로운 빛이 이따금 비치고 상서로운 징후들이 간간이 일어났다. 그래서 4방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기도하고 소원을 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곳은 바로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옛 가람의 서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제라택가(鞮羅擇迦)가람14)에 이른다. 뜰을 갖춘 건물이 4채이며. 관각(觀閣)은 3층이다. 높은 누대는 몇 인(仞)이나 되고, 몇 겹으로 된 문은 환히 열려있다. 빈비사라왕의 먼 후대 자손이 세운 곳이다. 뛰어난 재주와 빼어난 덕을 지닌 이를 두루 불러 모으자 이역(異域)의 학인들과 먼 곳에 사는 인재들이 함께 무리를 지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몰려들었다. 승도들은 천여 명을 헤아리는데, 그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다. 중문(中門)에서 길에 이르는 곳 사이에 정사가 셋 있는데 위로는 윤상(輪相)을 설치해두고 풍경은 허공에 매달려 있으며 아래로는 몇 층의 기단을 세우고 난간이 둘레에 줄지어 있다. 문과 창문, 용마루와 기둥, 울타리, 계단은 모두 금과 구리를 새겨서 화려한 장식을 섞어 넣었다. 가운데 정사에는 부처님의 입상(立像)이 있는데 높이는 3장(丈)이다. 왼쪽에는 다라(多羅)보살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관자재(觀自在)보살상이 있다. 이 세 개의 불보살상은 모두 유석으로 주조되어 있는데, 위엄이 있고 신비로우며 엄숙한 느낌이 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호가 멀리까지 미친다. 정사 속에는 각각 사리가 한 되 들어 있는데 신령스러운 광채가 이따금 비치며 기적이 간간이 일어난다.15)
14) 범어로는 tel d aka이며 나란타에서 서쪽으로 21마일 떨어진, 현재 Till ra라 불리는 땅이 이곳에
해당하며 이 지명도 이 절의 이름이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15) 『자은전』 3·4권에 의하면 현장은 가고 오는 길에 모두 이 절에 들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2개월간
머물면서 반야발타라(Prajna-bhadra)에게 나아가 유부(有部)의 3장과 성명(聲明)·인명(因明) 등을
배웠다고 한다.
제라택가가람의 서남쪽으로 9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산16)에 도착한다. 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암석이 늘어선 것이 마치 신선들이 기거한 곳과 같다. 독사와 포악한 용이 덤불 속 굴에 살고 있으며 사납고 거친 금수들이 그 숲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
16) 이 산은 붓다가야의 북쪽 15∼16마일의 Bar bar Hill(범어로는 pravaragiri)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산에는 굴원(窟院)이 있고 아육왕의 비문이 발견되고 있다.
산 정상에는 커다란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 솔도파가 세워져 있다. 그 솔도파의 높이는 10여 척에 달하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신 곳이다. 옛날 여래께서 아래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이곳에 머무셨는데 이 반석에 앉으셔서 멸진정(滅盡定)에 드셨다. 그리하여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천신들과 신선들과 성현들이 여래를 공양하여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고 하늘의 꽃을 비처럼 뿌렸다 그리고 여래께서 선정에서 나오시자 모든 천신들은 감동하고 이를 기려서 금은 보화로 솔도파를 세웠다.
부처님께서 떠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나자 보석은 변하여 돌이 되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온 사람들이 없으며, 높은 산에 올라 아득하게 바라보면 곧 이류(異類)들이 보인다. 구렁이나 맹수들이 무리를 지어서 오른쪽으로 돌고 하늘과 신선들과 성현들이 서로서로 이 솔도파를 찬미하고 예경한다.
산의 동쪽 구릉에 솔도파가 있는데 옛날 여래께서 마게타국을 돌아보시기 위해 이곳에 멈춰 서서 밟으신 곳이다. 산의 서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산기슭에 가람이 있는데 산봉우리를 등지고 기초를 높이 세웠고 벼랑을 깎아 갈라서 전각들을 우뚝 세웠다. 승도들은 50여 명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이곳은 구나말저(瞿那末底)17)[당나라 말로는 덕혜(德慧)이다]보살이 외도를 항복시킨 곳이다. 본래 이 산 속에는 마답파(摩沓婆)라는 외도가 살고 있었는데 승거(僧佉)의 법18)을 섬기면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의 학문은 불법과 외도에 두루 통하였고 공유(空有)의 이치를 환히 꿰뚫었다. 그의 명성은 선대의 사람들보다 높았고 그의 덕은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있었다. 군왕도 그를 극진하게 공경하면서 그를 가리켜서 나라의 보배라고 말하였다. 신하들과 백성들도 높이 우러르면서 모두들 집안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주변 국가의 학인들도 그의 학풍을 이어받고 덕을 우러르면서 그를 선배처럼 따랐으니 실로 그는 박학다식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두 성(城)을 식읍(食邑)으로 내려주었고 그는 나라로부터 받은 토지를 두루 다니며 지냈다.
17) 범어로는 gu a-mati이며 구나말저(窶拏末底)·구나마저(求那摩底)로도 음사한다. 남인도인이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후에 나란타사에 살면서 그 높은 명성을 날렸다.
당시 남인도의 덕혜보살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슬기로웠으며 일찍이 이치를 꿰뚫는 예리한 눈을 지녀 학업은 3장에 정통하였고 4제(諦)의 이치를 환히 이해하였다. 그는 마답파의 논리가 심원한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예기(銳氣)를 꺾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문하의 사람에게 명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삼가 여쭙나니 마답파께서는 평안히 잘 지내시는지요? 이제 귀하께서는 마땅히 피로함을 잊고 옛적에 배웠던 학문을 정성을 다해 익히시기를 바라옵니다. 3년이 지난 후에 제가 그대의 높은 명성을 꺾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다음해와 그 다음해에 언제나 심부름꾼을 보내어 알렸으며 마침내 3년이 되어 출발하려 할 때 다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기한이 다 되었습니다. 그 동안의 학업은 어떠하십니까? 내가 이제 그곳에 가려고 하니 그대에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마답파는 매우 당황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문하의 사람들과 자기 영지의 사람들에게 당부하여 지금부터 사문 이도(異道)를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널리 알려서 실수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를 하였다.
마침내 덕혜보살이 지팡이를 짚고 마답파의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느라 머물 곳을 내주지 않았다. 모든 바라문들이 덕혜보살을 욕하였다.
"머리를 자르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니 이 무슨 괴이한 사람이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덕혜보살은 이교도를 꺾기 위하여 그 마을에 머물기를 바랐으므로 자비로운 마음과 겸손한 말씨로 그들에게 인사하며 말하였다.
"그대들은 세제(世諦)19)의 정행(淨行:수행자)이고 나는 또한 승의제(勝義諦)20)의 정행입니다. 정행인 점에서 서로 같은데 어찌하여 거부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바라문들은 상대하지 않고 오직 그를 내쫓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보살은 마침내 마을에서 쫓겨나 커다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에는 맹수들이 무리지어 포악한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이 때 믿음을 지닌 자가 덕혜보살이 맹수들의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횃불을 들고 지팡이를 짚고서 보살을 찾아와 말하였다.
"남인도에 덕혜보살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의 명성에 관해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찾아와서 논쟁을 벌이고자 하시니, 그런 까닭에 이 마을의 주인은 자신의 명성이 실추될 것이 두려워 사문을 머물게 하지 못하도록 거듭 엄중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짐승들의 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도와드리려고 이렇게 왔으니 어서 가십시오. 그리고 안심하시고 다른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덕혜가 말하였다.
"신심이 있는 그대에게 진실을 알리겠으니 바로 내가 덕혜요."
그 사람은 이 말을 듣자 더욱 깊이 공경심을 내면서 덕혜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어서 빨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곧 깊은 숲을 빠져 나와 툭 트인 풀밭에 이르러서야 숨을 돌렸다. 재가신자가 불을 피우고 활을 들고서 보살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밤이 다 지나자 덕혜에게 말하였다.
"이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알고 쫓아와서 해를 입힐까 두렵습니다."
덕혜가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에 그대로 길을 떠나 왕궁에 도착하였다. 보살은 문지기에게 말하였다.
"지금 사문이 먼 곳에서 와 있으니 부디 왕께서는 마답파와 논쟁을 벌일 것을 허락해주소서."
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무슨 방자한 사람인가?"
그리하여 사신에게 명하여 마답파의 처소로 가서 왕의 뜻을 전하게 하였다.
"낯선 사문이 와서 그대와 변론하기를 청하고 있소. 이미 논의를 벌일 곳을 청소하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렸소. 그대가 오기를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이곳으로 왕림해주기를 바라오."
마답파가 왕의 사신에게 물었다.
"혹시 남인도의 덕혜논사가 아니던가?"
사신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마답파의 마음은 매우 어지러워졌다. 그는 더 이상 사양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결국 논쟁을 벌일 장소로 나아갔다. 그 자리에는 국왕과 대신, 백성들이나 호족들이 모두 다 몰려와 그들의 불꽃 튀길 논쟁을 듣고자 하였다. 덕혜가 먼저 자신의 종지를 내세우기 시작하였는데 해가 저물도록 그의 논리는 이어졌다. 이어서 마답파가 자신은 나이 들고 지혜도 어두워져 민첩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에 돌아가서 고요히 사유한 뒤에 와서 그의 의문에 해답을 주겠노라고 청하였다. 매번 돌아가서 생각해보고 답하겠다고 말하였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어 논좌(論座)에 오르면 언제나 별다른 논리를 펴지 못하였다. 그렇게 엿새째가 되자 그는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아내에게 명하였다.
"그대는 재주가 뛰어나니 내가 받은 치욕을 잊어서는 안 되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답파는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가 죽은 사실을 숨기고 상을 치르지 않았다. 도리어 화려한 옷을 입고서 논쟁을 벌이는 곳에 왔다. 이것을 본 대중들은 모두 다 소란을 피우며 떠들썩하게 말하였다.
"마답파는 제 스스로 높은 재주를 자랑하더니 덕혜에게 치욕을 당하고서 아내를 보내어 우열을 가리게 하는구나."
덕혜보살이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자를 나는 이미 제압하였소."
마답파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고서 물러났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어떤 비밀스러운 말을 하였기에 마답파의 아내가 묵묵부답이오?"
덕혜가 말하였다.
"애석하게도 마답파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와서 저와 논쟁을 벌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주겠소?"
그러자 그가 답하였다.
"그의 부인이 왔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상을 당한 기색이 역력하고 음성에는 원한의 기운을 띠었습니다. 이로써 마답파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그대를 제압할 수 있는 자'란 바로 그의 남편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왕이 사신에게 명하여 가서 보게 하니 과연 덕혜의 말과 같았다. 이에 왕이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부처님의 법은 깊고도 미묘하며 빼어난 현자(賢者)들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무위(無爲)로써 도(道)를 지키고 중생은 그 교화에 몸을 적셨습니다. 이전의 국법에 의거하면 이런 분의 덕을 기리는 것이 상례입니다."
덕혜가 말하였다.
"우매한 저는 도를 체득하여 뜻을 굽히지 않으며 만족하면서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중생을 인도하고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하여 먼저 오만한 자를 꺾었던 것입니다. 방편으로 거두어 교화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의 일을 말합니다. 원하옵건대 대왕이시여, 마답파의 읍호와 자손들을 영원토록 승가람의 사람에게 충당하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후세에까지 그 훈계가 드리워지며 아름다운 일이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다만 저를 보호하여 주었던 그 재가신자만큼은 천 년의 세월 동안 복을 누리게 해주시며 그에게 음식과 일용품들을 승려들과 똑같이 제공해 주십시오. 이로써 사람들에게 깨끗한 믿음을 권하며 또한 그로써 두터운 덕을 기리고자 합니다."
이에 이 가람을 세워서 보살의 훌륭한 업적을 기렸다. 처음 마답파가 논쟁에서 패한 후 십수 명의 정행(淨行)들이 난을 피하여 이웃 나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여러 외도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일을 알리고 빼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서 앞서 당하였던 치욕을 갚고자 몰려왔다.
한편 왕은 이미 덕혜를 극진하게 공경하고 있었으므로 직접 덕혜의 처소로 와서 청하였다.
"지금 외도들이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리들을 결성하여 떼지어 몰려와서 감히 논고(論鼓)를 울리고 있습니다. 원하오니 대사께서는 여러 이교도들을 물리쳐 주소서."
덕혜가 말하였다.
"논쟁하려는 자를 불러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외도 학인들은 기뻐하며 서로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리하여 외도들이 뜻과 이치를 널리 펼치고 나자 덕혜보살이 말하였다.
"지금 외도들은 난을 피하여 멀리 달아났다. 왕이 앞서 제정한 법률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가 천인(賤人)들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어떻게 그런 자들과 논쟁할 수 있겠는가?"
덕혜에게는 자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평소 덕혜의 여러 논의를 듣고서 자못 그 미묘한 논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덕혜를 곁에서 모시고 서서 온갖 난해한 논쟁들을 두루 들었기 때문에 덕혜가 논석(論席)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자리에 앉아서 네가 논해보아라."
대중들은 모두 다 덕혜의 심상치 않은 명령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리를 짊어지고 다니던 아이가 곧바로 논란을 시작하자 깊은 이치가 용솟음쳤으며 맑은 말솜씨가 널리 메아리쳤다. 세 번 반복한 후에 외도들은 자신의 본지를 잃고 말았다. 그들은 거듭 그 예기가 꺾였고 다시금 날개가 부러진 꼴이었다. 그리하여 논쟁에서 패배한 이래 이곳은 가람의 읍호가 되었다.
18) 범어로는 s khya이며 승기야(僧企野)라고도 하며 상키야학파를 말한다.
19) 진제(眞諦)의 반대어이다. 속제(俗諦)·세속제(世俗諦)·복속제(覆俗諦)라고도 한다.
20) 진제(眞諦)·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한다. 승의란 뛰어난 지혜의 대경(對鏡), 제는 변함이
없는 진리, 진실한 것, 있는 그대로의 진상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덕혜의 가람에서 서남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외딴 산에 이른다. 이곳에 가람이 있는데, 시라발타라(尸羅跋陀羅)[당나라 말로는 계현(戒賢)이라고 한다]논사21)가 논쟁에서 이긴 뒤에 마을의 보시를 받아서 세운 곳이다.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솔도파 같으며 그 속에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해두고 있다.
21) 범어로는 ila-bhadra이며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이 인도를 방문하였을 때 이 논사는 나란타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106세의 고령이었으며 대중들이 정법장(正法藏)이라고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장은 이 논사로부터 나란타에서 『유가론』을 수학하였는데 현장이 인도를 떠나자 곧 입적하였다.
논사는 삼마달타국(三摩呾吒國)의 왕족으로 바라문에 속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높은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인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지혜로운 이들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이 나라의 나란타승가람에 이르러 호법보살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법을 듣고 믿음을 일으켰으며 깨달음을 열게 되자 간절히 청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 후 궁극의 이치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물었으며 마침내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고 또한 미묘한 언사를 두루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당시에 널리 퍼졌고 이역만리에까지 높이 드날렸다.
한편, 당시 남인도에는 어떤 외도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심오하고도 난해한 이치를 구하여 깊이 파고들어 그윽하고 미세한 경지에 통달하여 있었다. 그런 외도가 호법의 높은 명성을 듣자 오만한 마음과 질투심이 일었다. 그리하여 산천이 가로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가 북을 두드리면서 논쟁 벌이기를 청하였다.
외도가 말하였다.
"나는 남인도 사람입니다. 왕의 나라에 위대한 논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내가 영리하지 못하여도 그와 더불어 자세하게 논의를 벌이고 싶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논사가 있으니, 그대의 말과 같다."
그리고 나서 사신에게 명하여 호법을 청하도록 하였다.
"남인도의 외도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와서 논쟁을 벌일 것을 청하고 있으니 원하옵건대 토론장으로 발길을 옮겨주소서."
호법이 이 말을 듣고 채비를 차리고 그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 때 제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계현이 앞으로 나아가 호법에게 여쭈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려 하십니까?"
호법이 말하였다.
"지혜의 태양이 그 빛을 감춘 이래로 법을 전하는 등불의 빛이 약해지자 외도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고 이학(異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들의 논리를 깨부수고자 한다."
계현이 말하였다.
"삼가 지금껏 선생님의 강론을 들어왔으니 제가 이교도들을 논파해 보고자 합니다."
호법은 그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으므로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때 계현의 나이가 겨우 30세였으므로 대중은 그가 나이 어리다고 가볍게 보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우려하였다. 그러자 호법은 대중들이 마음속으로 계현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이것을 해소하고자 말하였다.
"덕이 높고 밝은 것을 존중한다면 나이를 논하지 말라. 이제 그를 보건대 틀림없이 외도들을 논파할 수 있을 것이다."
논쟁을 벌일 날이 다가오자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남녀노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외도들은 자신들의 대강의 논지를 널리 천명하고 그 깊고 세밀한 이치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계현은 논리에 따라서 진실을 규명하였는데 깊고 그윽한 경계를 다하였다. 외도들은 말이 막히자 수치심을 무릅쓰고 물러났다. 왕은 이로써 그의 덕에 상응하는 대가로 이 읍성(邑城)을 내려주었다 논사가 그것을 사양하며 말하였다.
"물든 옷을 입은 선비는 지족(知足)을 행하며 청정하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마을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법왕(法王)께서 자취를 감춘 뒤 지혜의 배도 뒤따라 침몰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덕을 널리 드러내어 표창하지 않으면 후학들을 격려할 수 없습니다. 정법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부디 가엾게 여기셔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논사가 거절하다가 하는 수없이 이 마을을 받았다. 그리하여 곧 가람을 세웠는데 모든 법도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그는 마을에서 걷는 세금을 가람에 모두 바쳐 법식에 맞게 공양을 올렸다.
계현의 가람에서 서남쪽으로 40∼50리를 가다 보면 니련선하를 건너서 가야성(伽耶城)22)에 이르게 된다. 성은 몹시 험하고도 견고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적다. 바라문들만이 천여 가구 살고 있는데 이들은 대선인(大仙人)의 자손들로서, 왕은 그들을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도 왕에게 상당한 존경을 표할 뿐이다. 성의 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맑은 샘[淸泉]이 있다. 인도에서는 이곳을 성수(聖水)라고 부른다. 이 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으면 죄와 번뇌가 소멸된다고 한다.
22) 오늘날에는 가야성을 브라흐마가야(Brahma-Gay )라고 부르며 붓다가야(Buddha- Gay )와
구분하고 있다. 『중허마하제경(衆許摩訶帝經)』 권6에 의하면, 이 지명의 유래는 대선인(大仙人)
가야(伽耶)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마하바라타와 여러 Pur a에서는 '성스러운 도시'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성지이다.
성의 서남쪽으로 5∼6리를 가면 가야산에 이른다. 계곡이 깊고 그윽하여 산봉우리와 바위가 험하게 솟아있다. 인도에서는 이 산을 일컬어 영산(靈山)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군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천하를 통치하고 덕화(德化)가 먼 곳의 사람들에게까지 두루 미치며 전대의 왕들보다 덕을 더 높이기 위해 이 산에 올라 봉사(封祀)23)하며 자신들이 이룩한 공업을 고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산 정상에는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눈에 보이지 않게 흐르고 신비한 빛이 이따금 비추는데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보운경(寶雲經)』 등을 설하셨다.
23) 높은 꼭대기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으로 천자(天子)가 즉위할 때에
행한다.
가야산의 동남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가섭파가 태어난 마을이다. 그 남쪽에 솔도파 두 기가 있는데 이것은 가야가섭파(伽耶迦葉波)와 날지가섭파(捺地迦葉波)[구역에서는 나제가섭(那提迦葉)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가섭(迦葉)에 파(波)라는 글자가 없는데 이것은 생략된 것이다]가 불을 섬기던 곳이다. 가야가섭파가 불을 섬기던 곳에서 동쪽으로 큰 강을 건너면 발라급보리산(鉢羅笈菩提山)24)[당나라 말로는 전정각산(前正覺山)이라고 한다. 여래께서 장차 정각(正覺)을 증득하시려 할 때 먼저 이 산에 올랐으므로 전정각(前正覺)이라고 한다]에 도착한다.
24) 범어로는 pr g-bodhi이며 붓다가야의 동북쪽 약 3마일 떨어진 지점인 니련선하의 동안(東岸)에
위치한 Mora산이라고 한다.
여래께서 정진하시며 6년 동안 깨달음을 구하셨지만 정각을 이루지 못하시자 그 뒤로 고행을 버리고 우유죽을 받아서 마셨다. 그리고 나서 동북쪽으로부터 올라가서 이 산을 두루 관찰하니 고요하고 그윽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정각을 증득할 자리를 찾기 위해 동북쪽 언덕으로부터 산을 올라 정상에 이르자 대지가 진동하고 산도 기울고 흔들렸다.
산신이 놀라고 당황하여 보살에게 고하였다.
"이 산은 정각을 이룰 만한 복 있는 땅이 아닙니다. 만일 이곳에 머물면서 금강정(金剛定)에 드신다면 땅이 진동하고 함몰하며 산도 기울어지고 말 것입니다."
보살이 서남쪽으로 내려가 산 중턱의 낭떠러지에서 바위를 등지고 깊은 계곡을 바라보니 거대한 석실이 있었다. 보살이 이곳에 머물면서 가부좌하시니 땅이 다시 진동하고 산이 기울어졌다.
이 때 정거천(淨居天)이 공중에서 소리 높여 말하였다.
"이곳은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실 곳이 못 됩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4∼15리를 가시면 고행처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비발라수(卑鉢羅樹)가 있는데, 그 아래에 금강좌(金剛座)가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정각을 이루셨습니다. 부디 그곳으로 나아가소서."
보살이 막 일어나려 하자 석실에 있던 용이 말하였다.
"이 방은 청정하고 훌륭해서 성인의 경지를 증득할 만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이곳을 버리지 말아주소서."
보살은 이미 그곳이 정각을 얻을 곳이 아님을 아셨으나 용의 마음을 헤아려 그림자를 남겨두시고 떠나가셨다[그림자는 옛날에는 남아있어서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간에 누구라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어쩌다 볼 수 있을 뿐이다]. 보살은 여러 천신들이 앞에서 인도하는 가운데 보리수로 나아가셨다.
무우왕은 왕위에 오르자 보살이 산을 오르내린 유적지에는 모두 표식을 세워 두고서 솔도파를 건립하였다. 솔도파의 크기는 비록 달랐지만 신령스러운 감응에는 차이가 없었다. 어떤 때는 하늘의 꽃이 공중에서 비처럼 쏟아졌고 어떤 때는 광명이 깊은 계곡을 비추었다. 해마다 안거를 마치는 날에는 4방에서 출가인과 재가인이 이곳에 올라 공양을 올렸으며 이틀 밤을 묵은 뒤에 돌아갔다.
전정각산의 서남쪽으로 14∼15리를 가다 보면 보리수에 이른다. 둘레는 벽돌을 쌓아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높고도 견고하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둘레는 5백여 걸음에 달하는데 기묘한 나무와 빼어난 꽃들이 그늘을 연이어 만들고 있으며 그림자가 서로 잇닿아 있다. 고운 모래가 깔려 있고 기이한 낯선 풀과, 녹음으로 덮여있다.
정문은 동쪽을 향해 열려 니련선하를 대하고 있으며 남문은 대화지(大花池)에 접하고 있고 서쪽은 좁고 험하며 견고하고 북문은 대가람으로 통하고 있다. 울타리 안쪽의 땅에는 성스러운 유적이 서로 이웃하고 있는데 솔도파나 또 다른 정사가 있어서 이들은 모두 섬부주 여러 나라의 군왕과 대신과 호족들이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우러르고 흠모하여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리수로 둘러친 울타리 한 가운데에 금강좌(金剛座)가 있다. 이 금강좌는 옛날 현겁(賢劫)이 처음으로 열릴 때 대지와 함께 솟아난 것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중간에 거처하고 있는데 아래로는 금륜(金輪)에 닿아있고 위로는 지면으로 솟아있으며, 금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는 백여 걸음에 달한다. 현겁의 천 분의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앉으셔서 금강정(金剛定)에 드셨으므로 금강좌라고 한다. 또한 성도(聖道)를 증득하신 곳이므로 도량(道場)이라고도 부른다.
대지가 진동하였지만 이 자리만이 홀로 흔들리거나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장차 정각을 증득하시려 할 때 이 네 귀퉁이를 두루 밟으셨는데 땅이 모두 기울었지만 그런 뒤에 이 자리에 이르시자 안정되었고 기울지 않았다. 말겁(末劫)에 들고서부터 정법이 차츰 가라앉고 힘을 잃어 가면서 모래와 흙이 가득 덮여서 다시는 볼 수 없어졌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여러 나라의 군왕들이 부처님께서 금강좌의 크기를 설하셨다는 것을 전해 듣고 2구(軀)의 관자재보살상을 남북으로 나누어서 동쪽을 향해 앉도록 모셨다. 여러 장로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이 보살상의 몸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으면 부처님의 법도 다 사라질 것이다."
지금은 남쪽 보살의 가슴 부분 위까지 가라앉아 있다.
금강좌 위의 보리수는 바로 필발라(畢鉢羅)나무이다. 옛날 부처님 재세시에는 이 나무의 높이가 수백 척에 달하였는데 여러 차례 베어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높이는 4∼5길[丈]이다. 부처님께서 그 아래에 앉으셔서 등정각을 이루셨으므로 이 나무를 보리수라고 부른다. 줄기는 황백색이고 가지와 잎은 짙푸른 녹색이다. 겨울과 여름에도 시들지 않으며 빛깔은 변함없이 선명하다. 매년 여래의 열반일이 되면 잎은 모두 시들어 떨어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 날에는 여러 나라의 군왕들과 4방의 출가 승려와 재가 속인들 수천 수만 명이 부르지 않아도 몰려와서 향수와 향기 나는 우유를 나무에 붓고 씻긴다. 이 때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줄지어 향과 꽃과 등불과 횃불을 올리는데 이렇게 연일 앞다투어 공양 올린다.
여래께서 입적하신 뒤 무우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삿된 도를 믿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의 유적을 훼손하였다. 그는 병사들을 일으켜서 몸소 이 보리수를 베어버리려고 나섰다. 그리하여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을 베어낸 뒤에 서쪽으로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쌓아두고서 불을 섬기는 바라문에게 명하여 이 가지들을 불태워 하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연기와 불꽃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홀연히 두 그루의 나무가 생겨났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무성한 잎은 푸른 비취색을 머금었는데 이 일로 인해 이 나무를 회보리수(灰菩提樹)라고 부른다. 무우왕은 이 같은 신기한 일을 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향기 나는 우유를 남은 뿌리에 부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나무는 본래대로 되살아났다. 왕은 이 같은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을 보고는 더욱 크게 기뻐하여 몸소 공양을 올렸으며 즐거움에 취한 나머지 돌아가기를 잊었다.
한편 평소 외도를 믿고 있었던 왕비는 은밀히 사람을 시켜서 한밤중에 다시 이 나무를 베어버리게 하였다. 무우왕이 아침에 예경을 드리려고 하다가 잘려진 그루터기만 보였기 때문에 크게 슬퍼하고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향기 나는 우유를 부었더니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살아났다. 왕은 더욱 경이로운 일이라고 여기며 돌을 쌓아서 울타리를 쳤다. 그 울타리의 높이는 10여 척에 달하며 지금도 남아있다.
근래의 설상가왕도 외도를 신봉하던 사람으로서 부처님 법을 질투하여 훼손하고 승가람을 파괴하였는데 그도 이 보리수를 베어버렸다. 그리하여 밑동을 파 내려가 샘물에 이르자 그 물이 뿌리에 닿지 못하게 한 뒤에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그리고 사탕수수 즙을 부어서 그 나무를 말라죽게 만들어서 남아있는 싹마저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몇 개월이 지난 뒤 무우왕의 후대 자손인 마게타국의 보랄나벌마왕(補剌拏伐摩王)25)[당나라 말로는 만주(滿胄)라고 한다]이 소식을 듣고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혜일(慧日)이 숨은 뒤에 오직 이 불수(佛樹)만이 남았거늘 이제 다시 잔혹하게 베어버렸으니 조상들을 어찌 뵐 수 있으랴."
그러면서 자신의 몸을 땅에 내던지며 슬퍼하니 그의 애통함이 천지를 감동시켰다. 그가 수천 마리 소의 우유를 짜서 그 나무에 부으니, 그 날 밤이 지나 나무는 다시 살아났는데 높이는 1장 남짓하였다. 그 후 다시 누가 벨까 두려워하여 주변에 높이 돌담을 쌓았는데 담의 높이는 2장 4척에 달하였다. 지금의 보리수는 석벽에 가려져 있으며 1장 남짓 밖으로 나와 있다.
25) 범어로는 p r a-varman이며 아육왕의 마우리야왕조는 기원전 2세기에 멸하였는데 그 후예들은
서부인도와 마게타 지방에 미약하게나마 존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설상가왕의 폐불은 7세기
초엽의 일이므로, 이 왕의 연대도 그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보리수의 동쪽에 정사26)가 있는데 높이는 160∼170여 척에 달한다. 아래 기단의 너비와 면적은 20여 걸음에 달한다. 푸른 벽돌을 쌓았고 석회를 발랐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감실에는 모두 금상(金像)이 있고 4면의 벽은 빼어난 솜씨로 조각되어 있는데 구슬의 형상이 잇따라 새겨져 있거나 천인과 선인(仙人)의 상이 있다. 위에는 금동으로 만들어진 아마락가과(阿摩落迦果)[또는 보병(寶甁)이라고 하거나 보호(寶壺)라고 한다]가 놓여있다. 동쪽으로 높다란 누각이 이어져 있고 처마는 특별히 3층으로 솟아있고, 서까래·기둥·마룻대·들보·문과 문짝·창문 등에는 금은을 새겨서 장식했으며, 진주와 보배구슬 등이 서로 뒤섞여 그것을 메우고 있다. 내부의 방은 매우 깊고 그 문은 3중으로 되어있다. 바깥문의 좌우에는 각각 감실(龕室)이 있는데, 왼쪽에는 관자재보살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자씨보살상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백은(白銀)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10여 척이다.
26) 이것이 붓다가야 대솔도파[大塔]인데 사리를 넣은 솔도파가 아니라 불전(佛殿)이다. 외관은
9층의 높은 솔도파인데 내부는 2층이다.
본래 이 정사가 있던 땅에는 무우왕이 먼저 작은 정사를 세웠는데, 후에 어떤 바라문이 이것을 더 넓혀서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 바라문은 부처님의 법을 믿지 않고 대자재천을 섬기고 있었다. 그는 천신이 설산에 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침내 동생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자기의 소원을 빌었다. 그러자 천신이 말하였다.
"원하고 구하는 모든 것들은 복을 닦으면 결국 이루어진다. 네가 기도한다고 해서 얻어질 것도 아니고 내가 능히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라문이 물었다.
"어떤 복을 닦아야 소원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말하였다.
"선(善)의 씨앗을 뿌려서 뛰어난 복전을 구하고자 한다면 보리수가 바로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곳이니, 어서 빨리 그곳으로 가서 큰 정사를 짓고 커다란 못을 파라. 그리하여 온갖 공양을 성대하게 올린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마땅히 이루어지리라."
바라문은 하늘의 명을 받고 크게 믿음을 일으켜서 동생과 함께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형은 정사를 세우고 동생은 못을 팠으며 이에 널리 공양을 베풀고 마음속 소원을 열심히 구하였다. 이후에 마침내 과보가 이루어졌으니, 이 바라문은 왕의 대신이 되었고 자신이 얻은 모든 복록을 전부 보시하였다.
정사가 완성되자 바라문은 장인(匠人)을 불러 모아 여래께서 처음으로 성불하는 모습을 그리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무도 그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한참을 지난 뒤 어떤 바라문이 와서 승가 대중에게 고하였다.
"내가 능히 여래의 미묘한 모습을 그려낼 수 있소."
그러자 승가 대중이 말하였다.
"불상을 만들려면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가 말하였다.
"향기 나는 진흙만 있으면 되오. 그것을 정사 안에 넣어 두고 등불 하나를 비추시오. 내가 정사 안에 들어간 뒤에 문을 단단히 폐쇄해야 하오. 6개월이 지나면 그 때는 열어도 좋소."
그러자 여러 승가 대중은 모두 그의 명을 따랐다.
6개월이 4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대중들은 모두가 괴이한 느낌이 들어서 문을 열고 안을 바라보았다. 정사 안에는 불상이 엄숙하게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상은 오른발을 위로 올리고 왼손을 안으로 거두고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렸으며 동쪽을 향하여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숙연하였다. 좌대의 높이는 4척 2촌, 너비는 1장 2척 5촌, 불상의 높이는 1장 1척 5촌이고 양 무릎 사이는 8척 8촌 떨어져 있으며 양어깨는 6척 2촌이었다. 상호를 모두 갖춘 자애로운 얼굴은 진짜로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오른쪽 가슴 윗부분만이 미처 다 완성되지 못한 채, 작업을 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신령스러운 조짐만이 감돌고 있었다. 대중들은 모두 다 슬퍼하면서 간절하게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자 하였다. 이 때 이전부터 마음이 순박하고 곧은 사문 한 사람이 그의 꿈에 예전의 그 바라문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바로 자씨보살이다. 그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 하여도 부처님의 위용을 가늠하지 못할 것 같아 그것을 우려하여 내가 몸소 이곳으로 와서 불상을 그려내었던 것이다. 오른손을 늘어뜨린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옛날 여래께서 장차 불과(佛果)를 증득하시려 할 때 천마(天魔)들이 와서 훼방을 놓으려 하자 지신(地神)이 와서 이 일을 고하며 그 중 한 명이 앞장서 나아가 부처님을 도와 악마를 항복시키고자 하였다.
이 때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인욕의 힘으로 저들을 틀림없이 항복받을 것이다.'
마왕이 말하였다.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습니까?'
이 때 여래께서 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 땅이 증명할 것이다.'
이 때 두 번째 지신이 땅에서 솟아 나와서 증인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불상의 손은 그 때 아래로 내려뜨렸던 모습을 본뜬 것이다."
대중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한결같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가슴 부분이 채 마무리되지 않았으므로 그곳을 온갖 보배들로 메웠는데, 진주와 보배 구슬 등이 박힌 보석 왕관 등 진귀한 보석들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한편 설상가왕은 보리수를 베고 난 뒤에 이 불상까지도 훼손하려 하였지만 그 자비한 상호를 보자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마를 돌려 돌아가면서 재상들에게 명하였다.
"이 불상을 없애고 대자재천의 형상을 안치하라."
재상들은 왕의 명을 받자 두려워하며 탄식하였다.
"불상을 훼손하자니 여러 겁에 걸친 재앙을 불러올까 두렵고, 왕의 명을 거역하자니 이 몸을 다치고 가문마저 멸할까 두렵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들은 궁리하다가 마침내 믿음이 깊은 자를 고용하여 불상 앞에 벽돌을 가로질러 쌓아 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불상이 어둠 속에 있게 될까 염려하여 등불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그 벽 앞에 대자재천을 그린 뒤에 공사가 끝났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이 보고를 받았지만 몹시 두려웠다. 과연 온몸이 짓무르고 피부가 터지더니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재상과 대신들은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가서 불상 앞을 가로막았던 벽을 허물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났지만 등불은 여전히 꺼져 있지 않았다. 불상은 지금도 남아있으며 빼어난 조각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불상은 깊은 방에 안치되어 있어 등불을 잇달아 켜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뵙고자 하여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 커다란 거울을 가지고 가서 햇빛을 받아 안을 비추면 그제야 상서로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부처님의 상호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저절로 감격해 마지않는다.
여래께서는 인도의 달력으로 폐사거월(吠舍佉月) 후반 8일에 등정각을 이루셨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3월 8일에 해당한다. 상좌부측에서는 폐사거월 후반 15일에 등정각을 이루셨다고 하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 이 때 여래의 나이 30세이셨는데 어떤 이는 35세라고 한다.
보리수의 북쪽에 부처님께서 거니셨던 곳이 있다.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7일 동안 고요히 선정에 들어 계셨다. 그리고 나서 일어나신 뒤 보리수의 북쪽에 도착하시어 7일 동안 거니셨는데, 동·서쪽 방향으로 다니셨다. 그런데 걸으신 10여 걸음에는 기이한 꽃들이 발자국마다 18송이씩 피어났다.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벽돌을 쌓아서 기단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3척 남짓하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성스러운 유적지의 기단은 사람들의 수명의 길고 짧은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먼저 정성스럽게 기원한 뒤에 그 크기를 헤아리면 수명이 길고 짧은 사람에 따라 그 수치에 증감이 있다.
거니셨던 기단의 북쪽 길 왼편에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 커다란 정사를 지었으며 그 속에는 불상이 있다. 불상은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7일 동안 보리수를 바라보셨는데 잠시도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나무의 은혜를 보답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계신다.
보리수의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큰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유석(鍮石)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다. 매우 진귀한 보배로 장식되어 있으며 동쪽을 향하여 서 계신다. 앞에는 푸른 돌이 있는데 그 무늬가 매우 기이하고 이채롭다. 이것은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자 범왕(梵王)이 7보당(寶堂)을 일으키고 제석이 7보좌(寶座)를 세웠는데 부처님께서 그 위에서 7일 동산 사유하신 곳이다. 이 때 기이한 광명으로 보리수를 비추셨다고 한다. 성현께서 떠나가신 지 세월이 오래 지나자 보석은 변하여 돌이 되었다.
보리수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보살이 니련하(尼連河)에서 목욕하신 뒤에 보리수로 나아가시다가 잠시 무엇으로 자리를 삼아야 할지 홀로 생각에 잠기셨다. 그러다가 깨끗한 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이 때 제석천이 풀 베는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풀을 짊어지고 길을 걸어갔다. 보살이 말하였다.
"짊어지고 있는 풀을 베풀어주지 않겠소?"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제석천은 보살의 명을 듣고 공손히 풀을 바치니, 보살은 풀을 받아 들고 앞으로 나아가셨다.
풀을 받아 든 곳에서 동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보살께서 장차 불과(佛果)를 증득하려 하시자 푸른 공작과 사슴떼들이 나타나 상서로운 징조를 띠던 곳이다. 인도에서 길조를 상징할 때 이런 경사스러운 징조가 일어난다. 따라서 정거천(淨居天)27)은 세간의 풍속에 따라 무리지어 다니거나 날거나 맴돌며 신령스럽고 미묘하게 신성함을 나타내었다.
27) 무번천(無煩天)·무열천(無熱天)·선현천(善現天)·선견천(善見天)·색구경천(色究竟天)의 5천을 5정거천(淨居天)이라 한다. 곧 색계(色界)의 제4선천(禪天)을 가리키며,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한 성인이 이 하늘에 난다고 한다.
보리수 동쪽 큰 길의 좌우에는 각각 솔도파가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마왕이 보살을 훼방 놓던 곳이다. 보살이 장차 불과를 증득하려 하자 마왕은 보살을 찾아가서 전륜성왕의 자리를 이어받도록 청하며 달래고 권하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크게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이번에는 마왕의 딸들이 스스로 나서서 보살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보살의 신령스런 위엄으로 예쁜 얼굴이 노쇠한 모습으로 변하자 쇠약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로 부축하고 떠나갔다.
보리수의 서북쪽에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는 가섭파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영묘하고 신성한 불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따금 광명을 비춘다. 옛 기록[先記]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기도하며 이 불상을 일곱 바퀴 돌면 태어나는 곳마다 숙명지(宿命智)28)를 얻는다고 한다.
28) 숙명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가섭파불 정사의 서북쪽에는 벽돌로 지어진 방[室]이 두 개 있는데, 이곳에는 각각 지신(地神)의 상이 있다. 옛날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려 하실 때에 지신 한 명은 마왕이 오고 있음을 알렸고, 또 다른 지신은 부처님을 위하여 증인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이 공덕을 기리기 위해 상을 세우고 그 덕을
높이 세웠다.
보리수 울타리의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른바 울금향(鬱金香)이라고 한다. 높이는 40여 척에 달하며, 조구타국(漕矩吒國)에 사는 장사치가 세웠다.
옛날 조구타국에 아주 세력이 큰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천신(天神)을 모시고 복과 이익을 기도하고 구하였으며, 부처님의 법을 멸시하고 인과의 이치를 믿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상인들과 함께 교역을 하기 위해 남해(南海)로 배를 띄웠는데 우연히 거센 바람을 만나 항로를 잃어버리고 풍랑에 떠다니며 3년의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가지고 있던 식량은 모두 바닥이 나버려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은 아침이면 그 날 저녁의 일을 기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힘을 모으고 뜻을 합하여 자신들이 섬기던 하늘에 염원하였지만 마음은 이미 고달파졌고 신의 도움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 때 문득 큰 산이 보였는데 몹시 가파르고 험준한 봉우리가 솟아있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인들은 저마다 서로 위로하며 말하였다.
"우리는 복이 있어서 큰 산을 만나게 되었소. 이제 저 가운데 배를 멈추고 쉴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상인의 우두머리가 말하였다.
"저것은 산이 아니라 마갈어(摩竭魚)일 뿐이오. 매우 가파르고 높이 치솟은 봉우리로 보이는 것은 물고기의 수염과 옆 지느러미이고.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빛을 내뿜는 것은 바로 물고기의 눈빛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의 돛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자 상인의 우두머리가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관자재보살이 위험과 재난에 빠진 중생에게 능히 안락함을 베풀어주신다고 들었소. 그러니 각자 지성껏 보살님을 부르는 것이 좋겠소."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들 한 목소리로 관자재보살에 의지해 그 이름을 부르며 계속 되뇌었다. 그러자 높은 산이 사라지고 두 개의 해도 사라졌다. 그런데 홀연히 몸가짐이 반듯하고 위엄에 넘치는 어떤 사문이 나타났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허공을 타고 와서 물에 빠질 뻔한 그들을 건져준 뒤에 순식간에 본국으로 데려다 주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믿음은 굳고 곧아졌으며 복을 구하게 되었고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솔도파를 세우고 법답게 공양을 올렸는데 울금향 진흙으로 솔도파의 위아래를 두루 발랐다. 그리고 믿음을 일으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몸소 부처님의 유적지를 참배하고 보리수를 둘러보았는데, 돌아가자고 말할 틈도 없이 어느새 몇 개월이 지났다. 상인들은 함께 다니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산천은 아득하게 떨어졌고 고국도 멀리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 있으니 옛날에 세워진 솔도파를 누가 청소하고 소제해줄 것인가?"
그들이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돌면서 이곳에 이르자 홀연히 솔도파가 나타났다. 난데없이 솟아난 솔도파에 다들 놀라면서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나라에 세웠던 솔도파였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인도에서는 이 솔도파를 울금(鬱金)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보리수의 울타리에서 동남쪽에 있는 니구율수(尼拘律樹)의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그 곁에 정사가 있으며 정사 안에는 부처님의 좌상(坐像)이 있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불과를 증득하시자 대범천왕이 이곳에서 부처님께 미묘한 법의 바퀴를 굴리시도록 권하고 청하였던 곳이다.
보리수 울타리 안의 네 귀퉁이에는 각각 커다란 솔도파가 있다. 옛날 여래께서 길상초(吉祥草)를 받아 들고 보리수로 나아가셔서 먼저 네 귀퉁이를 차례로 거치셨다. 이 때 대지가 진동하였지만 여래께서 금강좌에 이르자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나무의 울타리 안에는 부처님의 유적이 연이어 너무도 많은데 일일이 모두 들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보리수 울타리 밖의 서남쪽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우유죽을 바쳤던 소 치던 두 여인의 옛 집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소 치던 여인이 이곳에서 죽을 끓인 다음 이 솔도파에서 여래께 우유죽을 바쳤던 곳이다.
보리수 울타리의 남문 밖에는 큰 못이 있는데 둘레가 7백여 걸음이 된다. 맑은 물결이 일렁이고 거울같이 맑으며, 용과 물고기들이 숨어 살고 있는 이 못은 바라문 형제들이 대자재천의 명을 받아서 판 것이다. 이어서 남쪽에 있는 또 다른 못은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신 뒤 옷을 빨려고 하시자 제석천이 부처님을 위하여 못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서쪽에 커다란 돌은 부처님께서 옷을 빠신 뒤 말리려 하시자 제석천이 대설산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이곳에서 낡은 옷을 입으셨다. 이어서 남쪽의 숲 속에도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가난한 늙은 아낙이 보시한 낡은 옷을 받으셨던 곳이다.
제석천이 못을 만든 곳으로부터 동쪽의 숲 속에는 목지린타용지(目支隣陀龍池)가 있다. 그 물은 검푸른데 물맛이 감미롭다. 못의 서쪽 기슭에는 작은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불상이 있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신 뒤 이곳에서 좌선하시며 7일 동안 선정에 잠기신 채 지내셨다. 이 때 용왕이 여래를 호위하였는데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을 일곱 겹 감고 여러 개의 머리를 만들어 아래로 숙여서 덮개를 만들어드렸다. 옛 못의 동쪽 기슭에는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셨던 방이 있다.
목지린타용지에서 동쪽 숲 속에 정사가 있는데 이곳에는 야위고 지친 모습의 불상이 있다. 그 옆에 거니시던 곳이 있는데 길이는 70여 걸음이다. 남북에는 각각 필발라수(畢鉢羅樹)가 있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풍속으로는 병에 걸린 사람 누구나 향유를 불상에 바르면 대부분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보살이 고행을 닦던 곳이다. 여래께서 외도를 항복시키기 위해 그리고 악마의 청을 받아들여 이곳에서 6년간 고행을 하셨다. 하루에 한 톨의 참깨와 한 톨의 보리를 잡수셨으므로 그 모습은 초췌하고 피부와 온몸이 야위고 수척해지셨다. 거니시거나 오가실 때에는 나뭇가지를 잡은 뒤에야 일어나셨다.
보살이 고행하던 필발라수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아야교진여 등의 다섯 사람이 머물던 곳이다. 처음에 태자가 출가해 산과 들을 방황하며 숲이나 연못가에서 기거하시자 정반왕이 다섯 사람에게 명하여 태자를 모시고 보살피며 시중들게 하였다. 태자가 고행을 닦자 교진여 등도 정진하였다. 교진여 등 다섯 사람이 머물던 곳에서 동남쪽으로 솔도파가 있다. 보살이 니련선나하(尼連禪那河)에 들어가셔서 목욕하시던 곳이다. 강 옆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보살이 우유죽을 받아 드셨다.
그 옆에 있는 솔도파는 두 명의 장자가 부처님께 꿀에 탄 보릿가루를 바쳤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나무 아래에서 결가부좌하시고 고요히 선정에 잠기셔서 7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신 뒤에 비로소 선정에서 일어나셨다. 이 때 상인의 우두머리 두 사람이 숲 밖으로 행차하였는데, 그 숲의 신이 이들에게 일러주었다.
"석가 종족의 태자가 지금 막 불과(佛果)를 증득하시어 마음이 적정(寂定)에 머물고 계신다. 49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셨으니, 너희들이 가진 것을 받들어 올리면 크고 좋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자 두 사람이 각자 지니고 있던 꾸러미에서 꿀을 섞은 보릿가루를 꺼내어 부처님께 올리자 세존께서 그것을 받으셨다.
장자가 보릿가루를 바친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사천왕이 발우를 바친 곳이다. 상인의 우두머리가 꿀을 섞은 보릿가루를 바치자 세존께서는 어떤 그릇에 이것을 받아야 할까를 생각하셨다. 이 때 사천왕이 4방에서 다가와 각자 지니고 있던 금발우를 올렸다. 세존께서 묵묵히 계시면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금발우는 출가한 자에게 적당하지 않은 그릇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천왕이 금발우를 버려두고 은발우를 올렸다. 이어서 파지·유리·마노·차거·진주 등으로 만든 발우를 올렸으나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하나도 받지 않으셨다. 마침내 사천왕은 각자 궁으로 돌아가서 돌로 만든 발우를 가지고 왔다. 이 발우는 감청색이 영롱하게 비치는 것으로 사천왕이 다시 이것을 가지고 와서 바치니, 세존께서는 그들의 것을 사양하지 않고 모두 받으셨다. 그리고 차례로 포개니 그것은 하나의 발우가 되었다. 따라서 바깥쪽에서 보면 네 개의 테두리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천왕이 발우를 바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어머니를 위하여 법을 설하셨던 곳이다.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천상과 인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자 그 어머니인 마야가 천궁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마야의 근기에 따라서 법을 가르치고 보여주며 이익되게 하고 기쁨을 주었다. 그 옆에는 말라버린 못이 있는데 언덕에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여러 신통변화를 보이면서 인연이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시던 곳이다. 신통변화를 나타내셨던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우루빈라가섭파(優樓頻螺迦葉波) 세 형제와 그들의 천 명의 문도들을 제도하셨던 곳이다.
여래께서는 바야흐로 진리를 베푸시고 근기에 따라서 중생들을 제도하시고 계실 때였다. 이 때 우루빈라가섭파의 문도 5백 명이 가섭파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나 또한 그대들과 함께 미혹된 길을 되풀이하였소."
이에 서로 격려하면서 부처님 계신 곳에 도착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사슴가죽 옷을 벗고 불을 제사지내던 도구들을 버려라."
그러자 범지들은 공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입고 있던 옷과 도구들을 니련하에 버렸다. 한편 날지가섭파(捺地迦葉波)는 여러 제기(祭器)들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기 문도들과 함께 형의 동정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형이 이전의 사상을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실을 알고 자신도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가야가섭파(伽耶迦葉波)와 그의 문도 2백 명도 자신의 형들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사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부처님의 처소에 가서 범행(梵行)을 닦기를 청하였다.
가섭파 형제를 제도한 곳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가섭파가 섬기던 화룡(火龍)을 제도하신 곳이다. 여래께서 그 사람들을 교화하실 즈음 먼저 그들이 섬기던 대상을 항복시키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범지가 섬기던 화룡이 사는 방에 들어가 머무셨다. 밤이 깊어지자 용은 화염을 내뿜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선정에 드셔서 불빛을 일으키시니 그 방은 불빛으로 환해졌으며 불꽃이 맹렬하게 솟아올랐다. 범지들은 부처님께서 해를 당하실까 두려워하였으나 감히 달려 들어가지 못하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을 가엾게 여기고 애석해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우루빈라가섭파가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분명히 불에 타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 사문은 화룡을 항복시키셨을 것이다."
과연 여래께서는 화룡을 발우 속에 담아들고 다음날 아침 외도의 문인들에게 가지고 와서 보여주셨다. 그 옆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5백 명의 독각(獨覺)이 함께 열반에 든 곳이다.
목지린타용지에서 남쪽으로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가섭파가 여래께서 물에 빠질 것을 염려해 구하려 했던 곳이다. 가섭 형제들은 당시 신통력을 지녔으므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의 덕을 우러르고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한편 세존께서는 바야흐로 미망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시고 위대한 방편으로 그들을 거두고 교화하시고자 하여 짙은 구름들을 모아서 하늘에 가득 펼치시고 폭우가 쏟아지게 하셨다. 비는 부처님의 주위를 에워싸고 내렸지만 부처님 계신 곳은 전혀 비에 젖지 않았다. 이 때 가섭이 멀리서 이 구름과 비를 보고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사문께서 계시는 곳이 물에 떠내려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서 배를 타고 부처님을 구하러 나섰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마치 대지를 밟고 계신 것처럼 물 위를 밟고 계셨으며, 강의 한복판을 밟자 물이 나뉘어져 모래가 드러났다. 가섭이 이런 광경을 보고 마음으로 깊이 감복하고서 물러갔다.
보리수 울타리의 동문 밖으로 2∼3리를 가다 보면 앞 못 보는 용의 방이 있다. 이 용은 지난 세상에 쌓은 악업으로 인하여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다. 여래께서 전정각산으로부터 보리수를 향하여 차츰 나아가시다가 이 방 옆에 도착하시자 용의 눈이 홀연히 광명을 찾았다. 이에 용은 불수(佛樹)29)로 가려하시는 보살의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오래지 않아 정각을 이루실 것입니다. 저의 눈은 앞을 못본 지 이미 오래였으나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시게 되니, 저의 눈이 문득 광명을 찾았습니다. 현겁 중에 과거 세 분의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을 때도 밝은 시력을 회복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대가 이곳에 이르시자 저의 눈이 갑자기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대가 장차 성불하실 것을 저는 압니다."
29) 보리수를 말한다. 석가모니께서 이 나무 아래서 성도하셨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도수(道樹)라고도 한다.
보리수 울타리의 동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마왕이 보살을 두려워하던 곳이다. 처음에 마왕은 보살이 장차 정각을 이룰 것을 알고 그를 유혹하고 어지럽히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득을 얻지 못하여 근심하고 당황하다가 여러 신들을 불러 모으고 마군(魔軍)을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마군들을 이끌고 세력을 휘두르며 보살을 위협하고자 바람과 비를 퍼부었고 어둠 속에서 천둥과 번개를 일으켰다. 불을 놓고 연기를 피우며 모래를 일으키고 돌을 뿌렸으며 창과 방패들을 갖추고 온갖 활과 화살을 모조리 동원하였다. 그러나 보살이 대자정(大慈定)30)에 들어가자 모든 병기와 무기들이 연꽃으로 변하였으며, 이 광경을 본 마군이 크게 놀라 황망하게 달아났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두 기의 솔도파가 있는데 제석천과 범왕이 세운 것이다.
30) 자정은 범어로 maitri라고 하며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비의 생각에 머물도록 하는 선정을 말한다.
보리수의 북문 밖에는 마하보리(摩訶菩提)승가람이 있다. 이것은 본래 승가라(僧伽羅) 국왕이 세운 것이다. 뜻을 갖춘 건축물 6원(院)이 이어져 있고 관각(觀閣)은 3층이며, 둘레에 쳐진 울타리는 높이가 3∼4길[丈]에 달한다. 장인의 미묘한 솜씨는 극에 달하였고 단청의 장식도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불상은 금은으로 주조하였고 진귀한 보배를 함께 어울려 장엄하게 만들었다. 모든 솔도파는 높고 넓으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여래의 사리가 들어있다. 골사리(骨舍利)의 크기는 손가락 마디 만한데 빛이 나고 윤기가 돌며 선명한 흰색이고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육사리(肉舍利)는 커다란 진주와도 같은 크기인데 색은 붉은 색과 담청색을 띠고 있다. 해마다 여래대신변월만(如來大神變月滿)의 날31)[이 날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12월 30일이며, 중국 당나라의 정월 15일에 해당한다]이 되면 이것을 꺼내어 대중들에게 보여준다. 이 때에는 이따금 빛을 발하거나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승도들은 1천 명이 채 못 되는데 그들은 모두 대승 상좌부(上座部)의 법을 익히고 있다. 율의(律儀)는 엄숙하고 청정하게 지키고 있으며 계행(戒行)이 곧고 밝다.
31) 신변월(神變月)은 신족월(神足月)이라고도 하며 정월·5월·9월의 삼장재월(三長齋月:특히 1개월의
긴 시간에 걸쳐서 제를 지내는 달이라는 뜻)을 말한다. 이 달에는 제불(諸佛)과 제천(諸天)이 신족(神足)으로
사천하를 다니면서 선악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한다.
옛날 남해(南海) 승가라국의 왕은 부처님의 법을 독실하게 믿고 있었는데, 그 마음이 천성적으로 그러하였다. 그에게 출가한 종족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출가한 동생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생각하며 멀리 인도를 유람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람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곳 사람들은 그가 변방에서 왔다고 하여 천시하고 경멸하였다. 마침내 그는 본국으로 돌아왔고, 왕은 몸소 먼 곳까지 나가서 그를 맞아들였다. 사문은 왕을 보자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왕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하였기에 이토록 슬퍼하시오?"
사문이 말하였다.
"나라의 위력을 믿고 의지하며 4방을 돌아다니면서 도를 묻고 이역의 땅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추위와 더위에 고생하였고 몸을 움직이면 업신여김을 당하였고 말을 하면 나무람과 꾸짖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같은 고생과 수치를 당하였거늘 어찌 마음이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물었다.
"어찌하여 그와 같은 일을 당하였단 말이오?"
그가 말하였다.
"간절히 바라오니 대왕께서는 복전이 되실 것을 마음에 두시고 인도에 가람을 세워주소서. 그렇게 하면 부처님의 유적을 드날리는 일이 될 것이고 또한 대왕의 덕 높은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선왕들의 복을 빌어주는 일도 되며 후손들에게까지 그 은혜가 미칠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오. 이런 좋은 충고를 듣고 어찌 머뭇거릴 수 있겠소?"
이에 왕은 나라에 있는 보배를 인도의 왕에게 바쳤다. 인도의 왕은 그 공물을 받아들이고서 먼 곳에 있는 왕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신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어떤 것으로 귀국(貴國)에 보답해야겠는가?"
사신이 말하였다.
"승가라왕은 인도의 대길상왕(大吉祥王)에게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나이다. 대왕의 위덕은 먼 곳까지 두루 미치고 대왕의 은혜는 아득한 곳에까지 두루 미칩니다. 저의 나라의 사문이 대왕의 나라의 풍속을 흠모하고 덕화를 사모하여 감히 귀국을 두루 다니며 부처님의 유적을 유람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람에서 머물렀을 때 그곳의 대중들이 저의 나라의 사문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지 않아 우리 사문은 온갖 고통을 겪고 수치를 당하고서 귀국하였습니다. 이에 장래의 일을 생각하여 후손들에게 모범을 남기기 위해 인도 여러 땅에 가람을 짓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객승이나 유행승들이 피로를 풀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양국이 우호를 나누고 두 나라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변함
없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왕이 말하였다.
"여래의 감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유풍(遺風)은 이렇게 남아있도다. 부처님의 유적지 가운데 마음대로 한 곳을 택하도록 하라."
이에 사신은 왕의 말을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가 보고하였다. 그러자 군신들이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라 하며 기뻐하였다. 마침내 사문들을 불러모아서 어느 곳에 가람을 세워야 할지 의견을 들어보았다. 이 때 사문이 말하였다.
"보리수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그 성스러움을 증명하신 곳입니다."
다른 의견을 들어보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으므로 나라의 모든 진귀한 보배를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승려들이 공양을 올렸으니 이에 동판에 새겨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릇 모든 부처님의 지극한 가르침은 두루 베푸심에 사사로움이 없으며, 인연 있는 자들을 은혜롭게 구제하는 것이 성왕의 명백한 가르침이었다. 이제 못난 나는 왕업을 훌륭하게 이어받아서 가람을 세워 이로써 부처님의 유적을 널리 드러내나니, 이것은 조상들의 복을 빌고 백성들에게 부처님의 은혜가 미치게 하기 위함이다. 오직 우리 나라의 승려들만이 자유롭게 이 가람을 이용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 사람들도 승려의 경우와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 이로써 후손들에게 전하나니 영원토록 끊임이 없을 지어다."
그런 까닭에 이 가람에는 집사자국(執師子國) 승려들이 많다.32)
32) 여기에 현장이 기록한 전설은 대략 360년 무렵, 굽타왕조의 Samudragupta왕과 세일론의
Siri Meghavana왕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보리수의 남쪽으로 10여 리에 달하는 거리에는 부처님의 유적이 연이어 있어 하나하나 들어서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해마다 비구가 안거를 해제하면 4방의 출가자나 재가자들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몰려와 7일 밤낮을 향과 꽃을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예배하고 공양을 올린다.
인도의 승려들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거하여 모두 다 실라벌나월(室羅伐拏月) 전반(前半) 초하루에 우안거(雨安居)에 들어가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5월 16일에 해당한다. 그리고 알습박유사월(頞濕縛庾闍月) 후반(後半) 15일에 우안거를 해제하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8월 15일에 해당한다. 인도의 월명(月名)은 별자리에 의거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고 있으며 여러 부파에도 차이는 없다. 실로 중국과 인도의 말이 달라 번역하는 데에 오류가 생기게 되었으며 시(時)를 나누고 달[月]을 헤아리는 데에 이 같은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4월 16일에 안거에 들어가서 7월 15일에 안거를 해제하는 것이다.
'인도 구법승의 기록 > 대당서역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당서역기 제10권 (0) | 2016.02.10 |
---|---|
대당서역기 제9권 (0) | 2016.02.10 |
대당서역기 제7권 (0) | 2016.02.09 |
대당서역기 제6권 (0) | 2016.02.09 |
대당서역기 제5권 (0) | 2016.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