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구법승의 기록/대당서역기

대당서역기 제6권

실론섬 2016. 2. 9. 18:00

대당서역기 제 6 권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7. 중인도[4개국]

 

1)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

실라벌실저국1)의 둘레는 6천여 리이며 도성은 황폐해졌고 국토의 경계도 분명하지 않다. 궁성의 옛터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비록 많이 허물어졌지만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곡식은 풍요롭고 기후는 온화하다. 풍속은 순박하며 학문을 돈독히 하고 복 짓기를 좋아한다. 가람의 수는 백 곳이 있는데 허물어진 곳이 매우 많다. 승도의 수는 아주 적으며 정량부를 배우고 있다. 천사(天祠)는 백 곳이 있는데 외도는 매우 많다.

1) 범어로는 r vast 이며 고대 인도의 keta(沙祇), Ayodhy (阿踰陀)와 함께 16대국
   가운데 하나인 교살라(憍薩羅, Kosala)국의 주요 도시였다. 위치는 현재의 네팔과
   가까운 Bahraich현과 Gonda현과의 경계, R pti 강 남안(南岸)에 있는 S he h-M he h라고
   하는 두 개의 자매촌에 걸쳐 유적이 있다. 이 지역은 종교상·문화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고대 교역 통로의 요점(要點)이기도 하였다. 원시불교 성전의 7∼8할은 이 지역에서 설해졌으며,
   부처님께서는 그 후반 생애의 대부분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보내셨다.

 

이곳은 바로 여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발라서나시다왕(鉢邏犀那恃多王)2)[당나라 말로는 승군(勝軍)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바사닉(波斯匿)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 다스리던 국가의 수도였다. 옛 도성 안에는 옛 터가 있는데 승군왕의 정전(正殿)의 남은 터이다. 이어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옛 터가 하나 있는데 위에는 작은 솔도파가 세워져 있다. 옛날 승군왕이 여래를 위해 커다란 법당을 세웠던 곳이다.

2) 범어로는 prasenajit이며, 승군(勝軍)·승광(勝光)으로 번역한다. 부처님과 동시대 인물로서
   불교에 귀의한 것은 『중본기경(中本起經)』 하(下), 『중아함경』 권59 등에 설명되어 있다.
   마게타국의 아사세왕과 전쟁을 벌였으며, 후에는 아들인 비유리(毘琉璃)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그러나 비유리는 변사(變死)하고 교살라국도 결국에는 마게타국에 병합되고 만다.

 

법당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터가 있다. 위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의 이모인 발라사발저(鉢邏闍鉢底)3)[당나라 말로는 생주(生主)이고 구역에서는 바사바제(波闍波提)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비구니의 정사로서 승군왕이 세운 곳이다. 이어서 동쪽으로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소달다(蘇達多)4)[당나라 말로는 선시(善施)이며 구역에서는 수달(須達)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의 옛 집이다.
3) 범어로는 praj -pati이다.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부인의 동생으로 후에 정반왕의 비(妃)가
   되어 싯달타 태자를 기른다. 말년에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며 비구니 장로로서
   비구니 교단을 다스렸다.
4) 범어로는 sudatta이며 급고독장자를 말한다. 선시(善施)·요시(樂施)라고 번역한다.

 

선시 장자의 집 옆에 커다란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앙구리마라(鴦窶利摩羅)5)[당나라 말로는 지만(指鬘)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앙굴마라(央掘摩羅)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사악한 마음을 버렸던 곳이다. 앙구리마라는 실라벌실저에 살던 흉악한 사람으로서 사람을 해쳐서 나라를 흉폭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머리를 장식하는 관을 만들었다. 그가 어머니를 살해하여 손가락의 숫자를 채우려 하였는데 세존께서 그런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교화하여 인도하고자 하셨다. 앙구리마라는 멀리서 세존을 보고 은밀히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태어나게 되었구나. 돌아가신 스승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부처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면 범천에 태어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노모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오. 먼저 저 대사문을 살해해야겠소."

그리고 나서 칼을 휘두르며 세존을 향해 다가갔다. 여래께서는 이에 천천히 뒤로 걸으셨는데 흉악한 지만이 재빨리 쫓아갔으나 붙잡지를 못하였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비루한 뜻을 지키기 위해 선의 근본을 버리고 악의 원천을 일으키는가?"

 

그러자 지만은 부처님의 일깨움을 듣고서 자신의 행실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로 인하여 귀의하고서 부처님의 법 안에 받아들여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정진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5) 범어로는 a gulim la이다. 교살라국(憍薩羅國) 승군왕(勝軍王)의 재상의 아들로 무뇌
   (無惱 Ahi saka)라고도 한다. 

 

성의 남쪽으로 5∼6리를 가다 보면 서다림(逝多林)[당나라 말로는 승림(勝林)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기타(祇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급고독원(給孤獨園)으로서 승군왕과 대신이 능히 보시하여 부처님을 위하여 정사를 세운 곳이다. 옛날에는 가람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동문의 좌우에는 각각 석주가 세워져 있는데 높이는 70여 척이다. 왼쪽 석주에는 윤상(輪相)이 그 끝에 새겨져 있고 오른쪽 석주에는 그 위에 소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모두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방들은 이미 기울고 무너졌으며 옛 터만이 남아있다. 오직 벽돌집 하나만이 남아서 홀로 우뚝 서있다. 그 속에는 불상이 있는데 옛날 여래께서 삼십삼천으로 올라가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하신 후에 승군왕이 세운 것이다. 즉 승군왕은 출애왕(出愛王)이 전단(栴檀)으로 불상을 새긴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곧 이 상을 조성한 것이다.

 

선시(善施)장자는 어질면서도 총명하여 재산을 모은 뒤에는 또 베풀어서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고아를 가엾이 여기며 노인들을 보살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 덕을 찬미하여 급고독(給孤獨)이라 불렀다. 그런 그가 부처님의 공덕에 관해서 듣고는 깊이 존경심을 일으켜서 정사를 세우기를 원하였으며 부처님께서 그곳으로 와주시기[降臨]를 청하였다. 세존께서 사리자에게 명하여 그를 따라가서 잘 헤아려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태자 서다(逝多)의 동산만이 앞이 탁 트인 적당한 땅이었다. 태자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자세히 말하자 태자가 장난삼아 말하였다.

"금으로 동산을 깐다면 팔겠다."

선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흡족해 하며 곧 금고에 들어 있던 금을 꺼내어 태자의 말을 따라서 동산의 땅에 깔았다. 그런데 금이 조금 부족하여 땅의 끝까지 깔지 못하였다. 그러자 태자가 더 이상 하지 말도록 말리면서 말하였다.

"부처님은 실로 좋은 밭과 같이 선근을 심을 수 있는 분이다."

그리하여 빈 땅에 정사를 세웠다.

"동산의 땅은 선시가 산 것이지만 숲의 나무는 서다 태자가 베푼 것이다.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공업(功業)을 잘 해내었다. 지금부터 이 땅을 서다림급고독원(逝多林給孤獨園)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급고독원의 동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병든 필추를 씻어 주신 곳이다. 옛날 여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병든 필추 한 사람이 고통을 참으며 혼자 이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자 세존께서 이 필추를 보시고 물으셨다.

"너는 어찌하여 고통받고 있으며, 어찌하여 홀로 살고 있느냐?"

그 필추가 말하였다.

"저의 성품이 일을 등한시하고 게을러서 남을 간병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이렇게 병이 걸렸어도 살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래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이제 너를 간호하리라."

그리고 손으로 그를 어루만지시니 병고가 말끔히 치유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를 부축하여 문 밖으로 데리고 나와 그가 깔고 있던 자리를 다시 갈아주고 친히 그의 몸을 씻어 주신 뒤에 다시 새 옷을 입혀 주셨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그 필추에게 말씀하셨다.

"스스로 정진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일깨움을 접하고 은혜를 입게 되자 그의 몸과 마음은 기쁨에 젖었다.

 

급고독원에서 서북쪽으로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몰특가라자(沒特伽羅子)가 신통력을 써서 사리자의 의대(衣帶)를 들어올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던 곳이다. 옛날 부처님께서 무열뇌지(無熱惱池)에 계셨을 때 인간과 천신이 모두 모여들었는데 오직 사리자만이 그 모임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몰특가라에게 명하셔서 가서 사리자를 데리고 오게 하셨다. 몰특가라가 부처님의 명을 받들어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사리자는 이 때 법의를 고치고 있었다. 몰특가라가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지금 무열뇌지에 계시는데 나에게 명하여 그대를 데리고 오라 하셨소.

사리자가 말하였다.

"나의 옷 수선이 끝나기를 잠시만 기다려 준다면 그 때 그대와 함께 가겠소."

"만일 빨리 가지 않으면 신통력으로 그대를 석실(石室)째 들어 올려서 법회가 열리는 곳까지 날아가겠소."

그러자 사리자가 의대를 풀어서 땅에 내려 놓은 뒤 말하였다.

"만일 이 의대를 들어 올릴 수 있다면 내 몸도 따라서 움직여질지도 모르겠소."

그러자 몰특가라는 커다란 신통력을 써서 의대를 들어 올리려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땅이 흔들렸다. 그리하여 다시 신족(神足)을 이용해 부처님 계신 곳으로 돌아갔는데 사리자가 이미 그 법회에 와서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몰특가라가 머리를 숙이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이 일로써 신통의 힘이 지혜의 힘만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대를 들어 올리려던 솔도파 옆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물이 있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 물을 길어다가 필요한 곳에 쓰셨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그 속에는 여래의 사리가 들어 있다. 여래께서 거니시던 유적지와 설법하시던 곳에는 나란히 정표(旌表)와 솔도파를 세웠다. 보이지 않는 신들이 이 솔도파를 지키고 있어서 신령스러운 조짐들이 간간이 일어난다. 어떤 때는 하늘의 음악이 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비스러운 향이 풍기기도 하는데, 커다란 복을 알리는 상서로움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가람 뒤로 멀지 않은 곳에 외도의 바라문[梵志]이 음녀(淫女)를 죽여서 부처님을 비방하였던 곳이 있다. 여래께서는 열 가지 힘을 지니셨고 두려움이 없으며,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지니신 분으로 인간과 하늘이 우러르고 공경하였으며 성현들이 받들고 모시고 있었다. 그러자 외도들이 공모하여 말하였다.

"거짓으로 일을 꾸며서 대중들 사이에서 비방하여 그를 욕되게 하자."

그리하여 음탕한 여인을 유인하여 고용해서 짐짓 부처님의 법을 듣게 하였다. 그래서 대중들이 이 여인의 존재를 알게 한 뒤에 비밀리에 죽여서 그 시체를 나무 옆에 묻었다. 그 후 외도들은 억울하다고 하면서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서 서다원(逝多園)을 샅샅이 뒤지게 하였으며 마침내 그 시체를 찾아내었다. 이 때 외도들이 큰 소리로 4방에 떠들며 다녔다.

"교답마(喬答摩:Gautama) 대사문은 언제나 지계와 인욕을 말하고 다니면서도 이제 이 여인과 정을 통하고서는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하였다. 이것이 어찌 지계이고 어찌 인욕이란 말인가?"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를 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외도는 흉악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말일 뿐이다."

 

가람의 동쪽으로 백여 걸음 가면 크고 깊은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은 제바달다가 독약으로 부처님을 살해하려다 산 채로 지옥으로 빠져 들어간 곳이다. 제바달다(提婆達多)[당나라 말로는 천수(天授)이다]는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다. 12년 동안 부지런히 정진하여 8만 가지 법장(法藏)6)을 모두 암송하였다. 후에 이익을 탐하여 신통력을 익혔으며 나쁜 벗들을 사귀어 그들과 공모하였다.

"나는 서른 가지 상(相)을 갖추었으니 부처님보다 그다지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대중들이 나를 따르고 있으니 여래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한 뒤에 곧 화합(和合)한 승가를 파괴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사리자와 몰특가라자가 부처님의 명을 받들고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이어 받아서 그들에게 설법하고 타일러서 승가는 다시 화합되었다. 제바달다는 악심을 버리지 않고서 독약을 손톱에 묻혀서 부처님께 절을 하는 척하다가 달려들어 해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음모를 실행하려고 먼 곳에서 이곳에 이르렀을 때 땅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6) 자세하게는 8만 4천의 법장을 말한다. 중생에게는 8만 4천의 번뇌가 있기 때문에 부처는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 8만 4천의 경(經)을 설했다고 한다. 8만이나 8만 4천 모두 대수(大數)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남쪽으로 또 큰 구덩이가 있는데 구가리(瞿伽梨)필추7)가 여래를 비방하다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곳이다. 구가리가 떨어진 그 구덩이에서 남쪽으로 8백여 걸음 가다 보면 크고 깊은 구덩이가 있다. 이곳은 전차(戰遮) 바라문 여인8)이 여래를 비방하다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곳이다.

7) 범어로는 kok lika이다. 제바달다의 친구이며 함께 승가를 무너뜨리려는 일을 기도하였다.
8) 범어로는 cinc 이다. 다른 문헌에는 단차마나(栴遮摩那, Cinc M navika)로도 표기되는
    바라문 여인의 이름이다.

부처님께서 인간과 하늘을 위해 여러 법의 요체를 설하시는데 외도의 제자가 멀리서 세존이 대중들의 공경을 받는 모습을 보고 혼자 생각하였다.

'오늘에야말로 교답마를 욕보여야겠다. 그리하여 저 훌륭한 영예를 실추시켜서 마땅히 내 스승의 명성만이 널리 퍼지게 해야겠다.'

그리하여 곧 나무 발우를 옷 안에 묶은 채 급고독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중들 속에 들어가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지금 설법하는 이 사람은 나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습니다. 지금 내 뱃속의 아이는 바로 석가족의 아이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견해를 지닌 자라면 누구나 이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마음이 곧고 믿음이 굳은 자들은 이 여인의 말이 부처님을 비방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이 때 제석천이 대중들의 의심을 없애 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하얀 쥐로 변해서 여인이 임신한 배처럼 꾸미기 위해 발우를 고정시키려고 옷 속에 묶어 놓은 끈을 씹어서 끊었다.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대중들 속에서 진동하자 이것을 보고 들은 자는 더욱더 기뻐하였다. 대중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 나무 발우를 집어 들고 그 여인의 얼굴에 들이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아이냐?"

그 순간 땅이 저절로 갈라지더니 그 여인의 몸이 무간지옥(無間地獄)9)으로 빠져 들어갔다. 여인은 그곳의 온갖 고통을 모두 다 받았다. 이러한 세 개의 구덩이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어 여름과 가을에 장마비가 내려서 도랑과 못이 모두 범람하여도 일찍이 이 깊은 구덩이들만큼은 물이 고여 있었던 적이 없었다.

9) 범어로 avici이다. 8열지옥(熱地獄)의 하나이다. 남섬부주 아래 2만(萬) 유순되는 곳에 있는
   혹독한 지옥이다. 이 지옥은 괴로움을 받는 것이 끊임없으므로 이같이 이름한다. 

 

가람의 동쪽으로 60∼70여 걸음 가다 보면 정사(精舍)가 하나 있는데 높이는 60여 척이며 그 속에는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 여래께서 옛날 이곳에 계시면서 외도들과 대론을 벌이셨다. 이어서 동쪽에는 천사(天祠)가 있는데 그 크기가 정사(精舍)와 같다. 그러나 아침에 해가 떠도 천사의 그림자가 정사를 가리지는 못하는데, 해가 기울 때에는 정사의 그늘이 천사를 덮는다.

 

정사의 그림자가 천사를 덮는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4리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존자 사리자가 외도들과 대론을 벌인 곳이다. 처음 선시 장자가 서다 태자의 동산을 사서 여래를 위해 정사를 세우려고 할 때였다. 이 때 존자 사리자가 장자를 따라와서 측량하였는데, 6사외도(師外道)가 신통력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였다. 이에 존자 사리자는 그들이 어떤 신통변화를 일으키든지 일[事]에 따라서 두루 교화하고 대상[物]에 응하여 항복받았다. 그 옆의 정사 앞에는 솔도파가 세워져 있는데 여래께서 외도들을 물리치신 곳이다. 또 비사거모(毘舍佉母)의 청을 받으신 곳이기도 하다.

10)

10) 범어로는 vi kh 이며 비사거는 실라벌실저성의 장자인 녹자(鹿子)의 부인이다.
     정사(精舍)에 두고 잊고 있었던 자신의 나들이옷을 두고, 상좌의 손에 닿았던 것은
     취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기증하려고 하였지만 그 값비싼
     옷을 입을 정도의 사람이 달리 없었으므로 하는 수없이 자신이 스스로 값을 지불하여
     사들인 뒤에 그 돈으로 부처님의 허락을 얻어서 정사를 세웠다. 기원정사의 동쪽에 있는
     동원정사(東園精舍:鹿子母講堂)가 바로 그것이다.

 

청을 받으신 솔도파의 남쪽에는 비로택가왕(毘盧擇迦王)11)[구역에서는 비유리왕(毘琉璃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 군대를 일으켜서 석가 종족을 주살하려다가 이곳에 이르러 부처님을 뵙자 군대를 돌려 돌아갔던 곳이다. 비로택가왕은 왕위를 잇자 선왕들이 당한 모욕을 앙갚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움직였다. 각자 해야할 일을 나누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한 뒤에 막 출정하려 하였다. 이 때 어떤 필추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부처님께 알렸다. 그러자 세존은 말라버린 나무 아래에 앉아 계셨다. 비로택가왕이 멀리서 세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물러나서 여쭈었다.

"어찌하여 무성한 나무의 그늘에 앉지 않으시고 그루터기는 말라 버렸고 나뭇잎들도 이미 시들어버린 이런 나무에 머물고 계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종족(宗族)이란 바로 나뭇가지와 잎과 같소. 가지와 잎이 위태로운 지경인데 내 몸을 감출 만한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왕이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나의 종친이시니 가마를 돌리는 것이 좋겠다."

이에 부처님을 뵙고 뭔가 생각한 바가 있어 군사를 돌려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11) 범어로는 vir haka이다. 승생(勝生)·증장(增長)이라 번역하며 승군왕의 아들이다.

군사를 돌린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석가족 여인이 살육을 당한 곳이다. 비로택가왕이 전쟁에서 이겨 석가족을 주살한 뒤에 5백 명의 여인들을 뽑아서 후궁으로 삼았다. 이에 석가족 여인들이 분노하여 그 명을 따르지 않고 '이 왕은 하인의 자식'이라며 원한에 맺힌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왕이 분노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명하였다. 법을 집행하는 자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구덩이에 그들을 던져 넣었다. 그 때 석가족 여인들은 고통을 참으며 부처님의 명호를 불렀다. 세존께서 그들의 고통을 비춰 보시고서 필추들에게 명하여 옷을 거두고 그곳으로 갔다. 그리하여 석가족 여인들을 위해 미묘한 법을 설하셨으니 이른바 '5욕(欲)12)에 이끌리고 얽히어 3도(途)13)를 유전하며,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며 나고 죽는 일은 길고도 멀다'라는 것이었다. 이 때 석가족 여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더러움을 멀리하고 번뇌에서 벗어나 깨끗한 법의 눈[法眼淨]을 얻었다. 그와 동시에 목숨을 마쳐 모두 다 천상에 태어났다. 이 때 제석천이 바라문으로 변화하여 나타나서 그들의 유해를 거두어 화장하였으니, 후에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12)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5경에 집착해서 일으키는 다섯 가지 정욕을 말한다. 
13) 지옥·아귀·축생을 말한다.

 

석가족 여인을 살해한 솔도파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말라버린 커다란 못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비로택가왕의 몸이 빠져서 지옥으로 떨어진 곳이다.

 

세존께서 석가족 여인들을 제도하신 뒤 급고독원으로 돌아오셔서 필추들에게 고하였다.

"비로택가왕은 지금부터 7일 후 불에 타게 될 것이다."

왕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기별하신 것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다 7일째에 이르렀는데 하루종일 평안하였고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이 일을 기뻐하고 경사스럽게 생각하여 궁녀들에게 명하여 강가에 가서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그래도 불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맑은 물에 배를 띄워서 놀았다. 그런데 파도가 점차 일어나 범람하더니 강렬한 불길이 일시에 타올랐다. 그리하여 배를 태우니 왕은 배에서 떨어져 무간지옥에 들어가 온갖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가람의 서북쪽으로 3∼4리 가다 보면 득안림(得眼林)에 이른다. 이곳에는 여래께서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다. 그리고 모든 성현들께서 선정을 익히시던 곳으로 이 모든 곳에는 표식이 심어져 있고 솔도파가 세워져 있다. 

 

옛날 이 나라에 도적 5백 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마을을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면서 온 나라를 약탈하였다. 승군왕이 이들을 붙잡아 그 눈을 도려낸 뒤 깊은 숲 속에 내다 버렸다. 그러자 도적떼들이 고통에 못 이겨 자비를 구하면서 부처님을 불렀다. 이 때 여래께서는 서다(逝多) 정사에 계셨는데, 그들의 슬픔에 젖은 소리를 들으시고 자비심을 일으키시어 시원한 바람을 조용히 일으켜 설산(雪山)의 약을 바람에 실어 보내셨다. 그 약들이 그들의 눈 위에 가득 덮이자 이내 시력을 되찾았으며, 그들은 자신들 앞에 부처님께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며, 기뻐하고 자신들의 정수리를 부처님의 발에 대고 절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몽둥이들을 모두 내버리고 떠나갔으니, 그 몽둥이들이 뿌리를 내려 숲을 이루게 되었다.

 

큰 성의 서북쪽으로 60여 리를 가다 보면 옛 성에 이른다. 이곳은 현겁(賢劫) 중에 사람들이 2만 세의 수명을 누릴 때 가섭파불(迦葉波佛)이 태어나신 성이다. 성의 남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정각을 이루신 뒤 최초로 아버지를 뵙던 곳이다. 성의 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가섭파불의 전신(全身) 사리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모두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5백여 리 가다 보면 겁비라벌솔도국(劫比羅伐窣堵國)[구역에서는 가라위국(迦羅衛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2) 겁비라벌솔도국(劫比羅伐窣堵國)

겁비라벌솔도국14)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 비어있는 성이 10여 개에 달하는데 이미 상당히 황폐해져 있다. 왕성은 이미 무너져서 그 둘레나 크기를 알 수가 없다. 그 안의 궁성의 둘레는 14∼15리며 벽돌을 쌓아 만든 기단은 견고하다. 텅 비고 황폐해진지 이미 오래이므로 사람들의 마을도 거의 없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그들을 모두 통솔하는 군주가 없으며 성마다 각자 성주를 세우고 있다. 토지는 비옥하며 농사일은 때에 맞추어 파종하고, 기후가 순조로우며 풍속도 온화하고 맑다. 가람의 옛터는 천여 곳 있다. 궁성 옆에 가람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승도들이 3천여 명 살고 있고 그들은 모두 소승 정량부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두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14) 범어로는 kapilavastu이다. 부처님의 탄생지이며 경전과 그 밖의 서적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까닭에 가비라(迦毗羅) 등 한자의 음사어는 상당히 많다. 부처님 시대부터
     석가족의 나라였는데 차츰 치성해졌으며,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때에는 인구가
     약 백만, 종족은 나뉘어져서 10성(城)에 살았고, 겁비라성은 종족 분포지의 북부에 있으며,
     모든 석가 종족의 수장(首長)이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1895∼1896년
     무렵, Gorakhpur의 북방, Uska 정류장의 서북쪽으로 38마일 떨어진 지점에 Nagl va 및 룸비니
     동산의 아육왕 석주가 발견되었고, 그 후 2년 뒤 W.C. Pepp 의 발굴과 관련된 Piprahv 의 고탑
     (古塔)과 사리 항아리는 고대 가비라성의 위치를 확정지어 주었다. 옛 성터는 룸비니동산의
     서북쪽으로 15마일 떨어진 Tilaura-kot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무너진 성벽이 밀림으로
     변한 잡목 숲 속에 있을 뿐이다.

 

궁성의 안에 옛 터가 있는데 정반왕의 정전(正殿)이다. 위에 정사를 지었으며 그 속에 왕의 상이 있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옛 터가 있는데 마하마야(摩訶摩耶)[당나라 말로는 대술(代術)이라고 한다] 부인의 침전(寢殿)이다. 위에는 정사를 지었는데 그 속에 부인의 상이 있다. 그 옆의 정사는 석가보살이 어머니의 태반에서 내려온[降神] 곳인데, 그 속에는 보살이 강신(降神)하는 상이 세워져 있다.

상좌부에서는 보살이 올달라알사다(嗢呾羅頞沙茶)15) 달의 30일 밤에 모태로 강신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5월 15일에 해당한다. 다른 여러 부파에서는 이 달 23일 밤에 모태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5월 8일에 해당한다.

15) 범어로는 uttara- ha이며 달의 이름이다. 올달라는 상(上)의 뜻이고 알사다는 대음력(大陰曆)
     4월 16일부터 5월 15일 사이에 해당하는 달이다. 즉 여름 세 달의 처음이기 때문에 상(上)이라 한다. 

 

보살이 강신하신 곳에서 동북쪽으로 솔도파가 있는데 아사다(阿私多) 선인16)이 태자의 상(相)을 보았던 곳이다. 보살이 강령(降靈)하시던 날에는 상서로운 징조가 연이었다. 그러자 정반왕은 여러 점성가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솔직하고도 분명한 말로써 대답하라."

그러자 대답하였다.

"앞서 성현들의 기록에 의하면 길한 조짐이라고 생각됩니다.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실 것이요, 집을 버리면 장차 정각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때 아사다 선인이 멀리서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며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몸소 그를 맞이하면서 예를 올렸다. 그리고 보좌(寶座)에 앉기를 권하며 말하였다.

"대선(大仙)께서 오늘 뜻하지 않게 이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자 선인이 말하였다.

"나는 천궁에 있으면서 하안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여러 하늘의 신들이 무리를 이루어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물었습니다.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 있기에 이렇게 크게 기뻐하는 것이오?' 그러자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대선이시여, 알아야 합니다. 섬부주에 사는 석가족 정반왕의 첫째 부인이 이제 막 태자를 낳으셨습니다. 그 분은 장차 3보리(菩提)17)를 증득하시고 일체지(一切智)를 두루 밝히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서 이렇게 그분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몸은 이미 늙고 쇠하였으므로 성스러운 감화를 입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16) 범어로는 asita이며 불백(不白)·무비(無比)·단엄(端嚴) 등으로 번역한다. 이 선인은 5통을
     모두 갖추고 항상 33천에 출입했던 대선(大仙)이다. 
17) 범어로는 sa bodhi이며 번역하여 정등각(正等覺)이라 한다. 

 

성의 남문(南門)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태자께서 여러 석가족 사람들과 함께 힘을 겨루고 난 뒤 코끼리를 쓰러뜨린 곳이다. 태자는 기예에 아주 뛰어났는데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이었다. 정반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태자가 성으로 돌아올 때 마부에게 태자를 모시고 올 코끼리를 몰고 가도록 명하였다. 마부가 코끼리를 몰고 막 성을 빠져나가려 할 때에 때마침 제바달다는 태자의 강한 힘에 져서 밖에서 성문 안으로 들어오던 길이었다. 

제바달다가 마부에게 물었다.

"화려하게 장식한 이 코끼리는 누가 타고 올 것인가?"

"태자께서 성으로 돌아오실 때가 되어 코끼리를 부려서 태자를 모시려고 나가는 길입니다."

제바달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코끼리를 끌고 가서 그 이마를 내리치고 가슴을 발로 찼다. 그러자 코끼리는 숨이 끊어져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몸집이 컸던 까닭에 코끼리는 길을 막았으며 길이 두절되었지만 능히 다른 곳으로 치울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길을 메웠는데 난타가 그곳으로 와서 물었다.

"누가 이 코끼리를 죽였는가?"

그들이 말하였다.

"제바달다가 그랬습니다."

그러자 난타18)는 코끼리를 끌어내어 길을 통하게 하였다. 그 후에 태자가 와서 또다시 물었다.

"누가 착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 코끼리를 죽였는가?"

"제바달다가 코끼리를 죽였는데 코끼리는 쓰러져 성문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난타가 코끼리를 끌어내어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곧 태자는 코끼리를 번쩍 들어서 성의 해자를 훨씬 넘어선 곳까지 던져 버렸다. 그 코끼리가 땅에 떨어지자 크고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그 지방에 전하는 기록에는 이곳을 '코끼리가 떨어져 패인 구덩이[象墮阬]'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18) 범어로는 nanda이며 환희(歡喜)라고 번역한다. 석가의 이모제(異母弟)이다. 

 

그 옆에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태자의 상이 있다. 그 옆에 또 정사가 있는데 태자비의 침전(寢殿)이 있던 곳이다. 그 속에는 야수다라19)와 라호라의 상을 나란히 만들어 놓았다. 궁 옆의 정사에는 수업 받는 상이 만들어져 있는데 태자의 학당(學堂)이 있던 터라고 한다.

19) 범어로는 ya odh r 이며 야수달라(耶戍達羅)라고도 한다. 석가가 태자였을 때의 정비(正妃)로 라호라의 생모이다. 석가 성도 후 비구니가 되었다.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정사가 하나 있는데 그 속에는 태자가 백마를 타고 허공을 넘나드는 상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성을 넘었던 곳이다. 성의 사대문 밖에는 각각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는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과 사문의 상이 있다. 이곳은 태자가 성문 밖으로 유람하러 나갔다가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회한이 더해져서 깊이 세속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느낀 바가 있어 하인에게 명하여 가마를 돌리게 하였던 곳이다.

 

성의 남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옛 성에 이른다. 그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현겁 중 사람의 수명이 6만 세일 때 가라가촌타불(迦羅迦村馱佛)20)께서 태어나셨던 곳이다. 성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에 아버지를 만나신 곳이다. 성의 동남쪽에 있는 솔도파에는 가라가촌타부처님의 유신(遺身) 사리가 있다. 그 앞에는 높이가 30여 척에 달하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기둥위에는 사자의 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옆에는 부처님께서 적멸하신 일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20) 과거 7불 가운데 제4, 현겁천불 가운데 제1불이다. 

 

가라가촌타불의 성에서 동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오래된 거대한 성에 이르게 된다. 그 성 안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현겁 중 사람의 수명이 4만 세일 때 가낙가모니불(迦諾迦牟尼佛)께서 태어나신 성이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에 아버지를 제도한 곳이다. 이어서 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에는 그 여래의 유신 사리가 있다. 앞에는 높이가 20여 척에 달하는 돌기둥21)이 세워져 있으며 위에는 돌사자의 상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 적멸에 관한 일이 기록되어 이으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21) 이 돌기둥은 룸비니동산의 서북쪽으로 13마일 떨어진 곳에는 Nigl v 마을의 남쪽 1마일
     지점의 Nig l S gar라고 하는 연못의 서안(西岸)에 세워져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돌기둥이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져 있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옮겨져 왔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성의 동북쪽으로 40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태자께서 나무 그늘에 앉아서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곳이다. 이에 정(定)을 익히시고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반왕은 태자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적정(寂定)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 때 태양이 옮겨가면서 비추었지만 나무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느낌을 갖게 되었으며 깊이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큰 성의 서북쪽으로 수백수천 개의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석가족 사람들이 몰살당한 곳이다. 비로택가왕(毘盧擇迦王)이 석가족과 싸워 이긴 뒤에 9천 990만 명에 달하는 석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리하여 그들을 모두 살육하였는데, 시체가 쌓인 것이 마치 덤불 숲과도 같았으며 그들이 흘린 피는 연못을 이루었다. 하늘이 사람들의 마음을 징계하기 위해서 그들의 유해를 모아서 묻어 주고 장례를 지내 주었다.

 

석가족을 살육한 곳으로부터 서남쪽에는 네 개의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네 명의 석가족이 군사들을 물리친 곳이다. 처음에 승군왕이 왕위를 잇자 석가족에게 자신의 혼처를 구하였다. 석가족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과 다른 부류의 인간임을 비천하게 여겨서 그를 속여 여종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는 두터운 예를 갖추어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정후(正后)의 자리에 앉혔다. 곧 이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비로택가왕이다.

 

어느 날 비로택가는 외삼촌에게 가서 더욱 유익한 수업을 받고자 하여 이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가 새로 지은 강당을 발견하고 잠시 가마에서 내려 그 속에 들어가서 쉬었다. 이 때 여러 석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쫓아와서 욕을 퍼부었다.

"비천한 하녀의 자식이 감히 이 방에 들어 있구나. 이 방은 석가족들이 세운 것인데 부처님의 방을 본뜬 것이다."

 

비로택가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곧 바로 앞서 당한 모욕을 복수하려고 군사를 일으켜서 나아갔다. 그리하여 이곳에 이르러 잠시 군사를 머물게 하였다. 이 때 석가족 네 명이 친히 밭이랑을 갈고 있다가 곧 그 군사들에게 항거하였는데 비로택가왕의 군사들은 패배하여 도망쳤다. 그 후 이들이 성에 들어가자 석가족 사람들이 말하였다.

"석가족 사람들은 전륜성왕의 훌륭한 자손이며, 법왕(法王:석가모니)의 적장자이다. 그런데 너희는 흉폭한 짓을 감행하여 어찌 차마 살생을 하였는가? 그리하여 종문(宗門)을 욕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절연(絶緣)하고서 먼 곳으로 추방하였다. 쫓겨난 네 사람은 북쪽 설산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오장나국(烏仗那國)·범연나국(梵衍那國)·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상미국(商彌國)의 왕이 되어 대대로 업을 전하였고 후손이 끊이지 않았다.

 

성의 남쪽으로 3∼4리 가면 니구율수림(尼拘律樹林)이 나오는데 이곳에 솔도파가 있다.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석가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에 본국으로 돌아가셔서 부왕을 만나 설법하신 곳이다. 정반왕은 여래께서 마군(魔軍)22)에게 항복받고 중생들을 교화하며 다니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움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나기를 고대하며 예경을 올리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사신에게 명하여 여래께 청하게 하였다.

"옛날 성불을 기약하시며 장차 본국으로 돌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이제 시기가 도래하였으니 발걸음을 이곳으로 돌려 주소서."

사신은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왕의 뜻을 자세히 전하였다. 그러자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7일 뒤에 본국으로 돌아가겠다."

사신이 돌아가 이 일을 왕에게 알리니 정반왕은 곧 신하들에게 명하여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온갖 향과 꽃을 쌓아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날이 되자 모든 군신들과 함께 40리 밖까지 가마를 타고 나가 맞아들였다. 이 때 여래께서는 대중들과 함께 하셨는데, 8금강(金剛)23)이 호위하고 사천왕(四天王)이 길을 열었으며, 제석이 욕계의 천신들과 함께 왼쪽에서 모시고 범왕이 색계의 천신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모시는 가운데 모든 필추들이 그 뒤를 줄지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대중들 속에 있는 모습은 마치 달이 별을 비추는 것처럼 그 위신력은 삼계를 감동시켰고 그 광명은 7요(七曜:일·월·화·수·목·금·토)를 뛰어넘었다. 허공을 밟고 본국에 이르시니 왕과 대신들이 예경을 올렸다. 그 후에 함께 나라로 돌아오셔서 니구로타(尼拘盧墮)승가람에서 멈추셨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큰 나무 아래에 머무시며 동쪽을 향하여 앉으셔서 이모(姨母)의 금루가사(金縷袈裟)를 받으신 곳이다. 그 옆에도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여덟 왕자와 5백 명의 석가족들을 제도하신 곳24)이다.

22) 악마의 군병을 말한다. 부처가 성도할 때에 제6천의 마왕이 여러 권속을 거느리고 와서
     방해했으나 부처의 신통력으로 모두 항복시켰다. 모든 나쁜 일이 불도를 방해하는 것을
     마군이라고도 한다. 
23) 8인의 금강역사를 말한다.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갖고 항상 석존 좌우에서 모시며 호위하며
     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으면 금강저를 휘둘러 처리한다. 
24) 『사분율(四分律)』 권4에 의하면 여덟 왕자란, 여덟 명의 석가 종족, 즉 마하나마·아누루다·발타리가·
     제바달다·아난타·바구·김비라의 일곱 명과 이발사였던 우파리라고 한다. 5백 명의 석가 종족이란
     수많은 석가족을 뜻하는 말이다. 가비라성에서 득도출가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부처님께서
     가비라성에서 왕사성으로 가는 도중의 아노마(阿奴摩, Anom ) 강가의 아누비야(Anupiya)로 따라와서
     이루어진 일이다.

 

성의 동문 안쪽 길 왼쪽으로 솔도파가 있다. 이곳에서 옛날 일체의성(一切義成)25) 태자가 모든 기예를 익혔다. 문 밖에는 자재천사(自在天祠)가 있는데, 사당 안에는 돌로 만든 천상(天像)이 있다. 이 천상은 몸을 반듯하게 하여 일어나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태자가 아직 강보에 계실 때 들어가셨던 사당이다. 정반왕이 납벌니(臘伐尼:룸비니) 동산에서 돌아오는 태자를 맞이하여 돌아오는 도중에 천사(天祠)가 있으므로 왕이 말하였다.

"이 사당은 영감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석가족의 아이들이 천우신조를 이곳에서 구하면 반드시 그 효험이 나타난다. 이제 태자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경배를 올리게 해야겠다."

이 때 태자의 보모를 시켜 태자를 안게 하고 사당으로 들어섰는데, 그 돌로 만들어진 천상이 일어나서 태자를 맞이하였고 태자가 사당을 나오자 천상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25) 범어 Sarv rthasiddha의 의역이다. '일체의 목적을 성취한 자'라는 뜻으로 석가모니의
     소년 시절의 별칭이라고 한다.

 

성의 남문 밖 길 왼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태자가 석가족들과 기예를 다투며 활로 쇠북[鐵鼓]을 쏘던 곳이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그 옆으로 샘이 있다. 샘물은 아주 맑아서 마치 거울과도 같다. 이곳은 태자가 석가족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며 그 힘을 시험하던 곳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쇠북을 뚫고 나와서 샘으로 날아가 꽂혔다. 그러자 이로 인하여 맑은 물이 샘솟게 되었으며 당시 세간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전천(箭泉)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병을 앓는 사람들이 와서 샘의 물을 마시고 목욕하면 쾌차하게 된다고 하며, 먼 곳에서 사람들은 샘의 진흙을 가지고 돌아가서 아픈 곳을 담그거나 이마에 바르면 신령스러운 가호를 입게 되어 대부분이 쾌유하게 된다고 한다.

 

전천의 동북쪽으로 80∼90리를 가다 보면 납벌니 숲에 이르게 된다. 석가족들이 목욕하던 못이 있는데 물이 맑고 깨끗하여 거울처럼 비치며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피어있다. 그 북쪽으로 24∼25걸음 걸어가다 보면 무우화수(無憂華樹)가 있다. 지금은 나무가 시들고 말았지만 이곳은 보살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보살은 폐사거월(吠舍佉月) 후반(後半) 8일, 당나라의 3월 8일에 해당하는 그 날 태어나셨다. 상좌부에서는 그 날이 폐사거월 후반 15일, 즉 당나라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동쪽으로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용 두 마리가 태자를 목욕시킨 곳이다. 보살께서 태어나신 뒤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4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이제부터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태자가 발로 밟는 곳마다 커다란 연꽃이 솟아났다. 이 때 두 마리 용이 솟아 올라와 허공에 머물면서 각기 물을 토해 내는데 찬 물줄기와 더운 물줄기였다. 이들은 이 두 물줄기로 태자를 목욕시켰다.

 

태자가 목욕한 솔도파의 동쪽에 두 개의 맑은 샘이 있는데 곁에 두 개의 솔도파를 세웠다. 이곳은 용 두 마리가 대지에서 솟아올라온 곳이다. 보살께서 태어나시자 그 종친들이 그를 씻기기 위해 물을 구하러 이리저리 어지럽게 다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 때 사람들 앞에 두 개의 샘이 저절로 솟아났는데 각기 더운물과 찬물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물로 태자를 목욕시킬 수 있었다.

 

그 남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천제석(天帝釋)26)이 보살을 안았던 곳이다. 보살이 처음에 태반에서 나올 때 천제석이 무릎을 꿇고 묘천의(妙天衣)로 보살을 받들었다. 그 옆에 솔도파가 네 개가 있었다. 이곳은 사천왕(四天王)이 보살을 안았던 곳이다. 보살은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셨는데, 사대천왕이 황금 모직 옷으로 보살을 받들고 황금 궤짝 위에 올려 놓고 그 어머니 앞으로 모시고 가서 말하였다.

"부인께서 이런 복스러운 아이를 낳으셨습니다. 참으로 경탄할 일입니다. 여러 천신들이 이렇게 기뻐하거늘 하물며 인간들의 기쁨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26) 도리천(忉利天)의 주인인 제석천(帝釋天)을 말한다. 

사천왕이 태자를 받들었던 솔도파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돌기둥이 있는데 위에는 말[馬]의 상이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후에 사악한 용이 벼락을 일으켜서 그 기둥 가운데를 부러뜨려 땅에 쓰러지게 하였다.27) 그 옆에 작은 하천이 있는데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27) 이것이 바로 Rummindei Pillar이다. 네팔의 Bithri 지방의 Rummindei마을에 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Rupan-dehi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은 기둥머리 부분에 있던 말의 형태는 없어졌고
     현장이 기술한 것처럼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아래 부분에 아육왕이 즉위 20년에 친히
     참배하여 말의 형상을 지닌 기둥의 머리 부분을 가진 석주를 부처님 탄생지에 세운다는 취지를
     기술하고 있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유하(油河)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곳은 마야부인이 해산한 뒤 하늘에서 빛나고 윤기 나며 드맑은 물이 담긴 연못을 만들어 부인으로 하여금 이 물을 가져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 더러움을 없애게 해준 곳이다. 지금은 변하여 물이 되었지만 그 물에는 지금도 기름기가 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광야와 황량한 숲 속을 2백여 리 가다 보면 람마국(藍摩國)[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3) 람마국(藍摩國)

람마국28)은 텅 비고 황량한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으며 경계도 분명하지 않다. 성읍은 폐허가 되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매우 드물다. 옛 성의 동남쪽에는 벽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백 척에 조금 못 미친다. 옛날 여래께서 입멸에 드신 뒤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제 몫의 사리를 얻어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정중하게 모셨는데, 신이한 기적이 간간이 일어나며 신령스러운 빛이 이따금 비치었다.

28) 범어로는 r ma(gr ma)이며 마을·성(城)·작은 읍이라는 뜻으로 수도명을 현장이 나라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또한 라마가(羅摩伽)·남막(藍莫)이라고도 표기한다. 지금의 네팔과 Gorakhpur
     와의 경계에 있는 Dharmaur 이라고도 하고, 또는 Basti 현의 Rampur Deoriya라고도 한다.
     석가족과 세력을 견주었던 구리(拘利, Ko iya)족의 거주지 가운데 하나이다.

 

솔도파 옆에 맑은 못이 하나 있는데 용이 언제나 나와서 노닐다가 뱀으로 모습을 바꾸어서 솔도파를 오른쪽으로 감싸고 빙빙 돈다. 야생 코끼리들은 무리를 지어 꽃을 따 가지고 와서 흩뿌리는데, 보이지 않는 힘의 가호에 의해 처음부터 이러한 신기한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옛날 무우왕이 솔도파를 다시 나누어 세우고자 하였다. 이 때 일곱 나라에서 세워진 것은 이미 다 알려져 발굴되었고 이제 이 나라에 이르러 그 일을 하려고 하였다. 이 때 이 못에 사는 용이 사리를 빼앗길까 두려워서 바라문의 모습으로 변하여 앞으로 나아가 코끼리를 잡아당기며 말하였다.

"대왕의 마음이 부처님의 법으로 흐르시어 널리 복밭[福田]을 심으셨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가마를 돌리시어 저의 집으로 걸음을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물었다.

"그대의 집은 여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바라문이 말하였다.

"저는 이 못의 용왕입니다. 대왕께서 수승한 복을 세우시고자 하시니, 그 뜻을 받들어 이에 감히 와서 청을 올리는 것입니다."

왕은 그 청을 받아들여 용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 얼마 후에 용왕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였다.

"저는 악업으로 인하여 이런 용의 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리를 공양하여 죄를 없애기를 바랐습니다. 부디 왕께서도 친히 가시어 부처님의 사리를 보시고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무우왕은 사리를 본 다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여 말하였다.

"모든 공양거리들이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용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부디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무우왕은 자신의 힘이 미칠 범위가 아님을 헤아리고서 마침내 솔도파를 발굴하지 않았다. 왕이 못을 나온 곳에 지금도 봉기(封記)가 남아있다.

 

솔도파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가람이 하나 있다. 그곳에 사는 승가 대중들의 수는 아주 적지만 위의가 엄숙하고 청정하다. 그런데 사미에게 대중들의 소임을 모두 맡기고 있다.29) 멀리서 승려가 오면 지극한 예로써 맞이하는데 아주 융숭한 대접을 하며 반드시 3일을 머물게 하고 4사(事)로 공양한다.

29) 사미는 출가해서 10계(戒)를 받기는 하였지만 아직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한 남자로서
     대중들을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승중의 잡사를 관할하는 사람을 지사(知事)·
     지승사(知僧事)라고 말하며, 이 일은 8해탈을 갖춘 아라한이나 또한 수다원과 등에 도달한 학인(學人)
     들이 맡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미의 신분으로서 그런 일을 맡는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필추가 도반들을 불러 모아 먼 곳에서부터 이곳으로 와서 솔도파에 절을 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온갖 코끼리 떼들이 와서 오가면서 상아로 풀을 베기도 하고 코로 물을 뿌리기도 하며 각자 온갖 꽃을 가지고 함께 솔도파에 공양하였다. 대중들은 이 모습을 보고서 모두 슬픔에 젖어서 회한에 잠겼다. 마침내 어떤 필추가 이내 구족계를 버리고 남아서 솔도파에 공양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대중들과 작별하며 말하였다.

"나는 복이 많아 감히 분수에 넘치게 승가 대중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도 행업(行業)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 솔도파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있습니다. 성덕(聖德)이 눈에 보이지 않게 통하여 코끼리 떼들도 소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남아서 저들과 함께 하며 남은 생을 마친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대중들이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는 번뇌가 무겁고 지혜롭지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스스로를 돌보시고 승업(勝業)이 이지러지지 마소서."

그리하여 그는 대중과 헤어지며 거듭 지극한 소원을 말하고 흔쾌히 홀로 머물면서 이 세상을 마치리라고 다짐하였다. 이에 띠를 엮어서 집을 짓고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었다. 제철의 꽃을 따서 모으고, 부처님의 유적지를 청소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이렇게 솔도파를 공양하며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그 마음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주변 국가의 왕들이 이 소문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서 다투어 재물을 보시하며 함께 가람을 세웠고, 이로 인하여 그를 권하여 승가의 소임을 억지로 맡겼다. 그 후로도 이 일은 끊어지지 않았고 본래의 공덕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사미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모두 맡아보게 한 것이다.

 

사미가람의 동쪽에 커다란 숲이 있는데 이곳에서 백여 리 가다 보면 커다란 솔도파가 나온다.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태자가 성을 나와서 이곳에 도착하여 보석옷을 벗고 진귀한 구슬[瓔珞]을 떼어내고서 하인에게 명하여 돌아가게 한 곳이다.30) 태자는 한밤중에 성을 넘어서 동틀 무렵에 이곳에 닿았다. 이미 과거세의 마음이 무르익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이 나를 얽어매는 우리에서 벗어나고, 나를 속박하는 굴레를 버리며, 마지막으로 수레를 풀어내야 할 곳이다."

그리고 나서 훌륭한 보석관[天冠] 속에서 마니보[末尼寶]31)를 뽑아내어 하인에게 주며 명하였다.

"너는 이 보석을 가지고 부왕에게 돌아가 아뢰어라. 이제 세속을 멀리 떠나려는 것은 그저 눈앞의 일을 피하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상(無常)을 끊고 모든 유루(有漏)를 끊어 버리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려라."

그러자 천탁가(闡鐸迦)[구역에서는 차닉(車匿)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말하였다.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빈 수레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자 태자가 그를 잘 위로하여 마음을 돌이키게 해준 뒤에 돌려보냈다.

수레를 돌린 솔도파에서 동쪽에 섬부수(贍部樹)가 있다. 가지와 잎은 비록 시들었지만 고목의 그루터기는 지금도 남아있다. 그 옆에 다시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태자가 나머지 보의를 사슴가죽 옷과 바꿔 입었던 곳이다.

태자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서 옷을 바꿔 입었을 때 비록 영락(瓔珞)은 떼어버렸다지만 여전히 천의(天衣)를 입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자는 말하였다.

"이 옷은 너무나도 호사스러운 것이니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이 때 정거천(淨居天)32)이 사냥꾼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는 사슴껍질 옷을 입었고 손에는 활을 들었으며 화살을 등에 지고 나타났다. 그러자 태자가 그 옷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옷을 서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제발 그렇게 해주시오."

그러자 사냥꾼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태자는 값비싼 옷을 벗어서 사냥꾼에게 주었다. 사냥꾼은 태자의 옷을 받은 뒤에 다시 하늘의 몸[天身]으로 되돌아가 옷을 가지고 허공을 타고 사라졌다.

30) 이 지점은 Maurya 종족의 영토에 있는 아노마(Anom ) 강가, Anupiya 숲이라고 한다.
31) 마니(摩尼)라고도 한다. 주옥(珠玉)의 총칭이다. 일반적으로 마니에는 불행이나 재난을
     없애주고 탁수(濁水)를 청정하게 하며, 물을 변하게 하는 등의 덕이 있다고 한다. 특히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대로 가지가지의 진보(珍寶)를 내는 덕이 있는 보주를 여의보주라고
     일컫는다. 
32)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한 성인이 살아야 할 곳으로 무번천(無煩天)·선현천(善現天)·선견천(善見天)·
     색구경천(色究竟天)의 오정거천(五淨居天)이라고도 한다. 때로는 이렇게 그곳에 사는 신들을 직접
     가리키기도 한다. 범어 uddh v sa의 의역이다.

 

태자가 옷을 바꾼 곳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은 태자가 머리카락을 자른 곳이다. 태자는 천탁가에게 칼을 받아 들고서 스스로 그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이 때 제석천이 그 머리카락을 받아 들고 천궁으로 올라가서 공양을 올렸다. 이 때 정거천자는 이발사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 잘 드는 칼을 들고 서서히 걸어가서 태자의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태자가 말하였다.

"머리를 삭발해 줄 수 있겠소? 부디 나를 위하여 깨끗하게 잘라주시오."

이발사로 변한 정거천자가 명을 받들고 마침내 머리를 깎게 되었다.

 

성을 나와서 출가한 때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곳에서는 보살의 나이가 19세 때의 일이라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29세 때의 일이라고 한다. 폐사거월 후반 8일에 성을 나와서 출가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3월 8일에 해당한다. 어떤 곳에서는 폐사거월 후반 15일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3월 15일에 해당한다.

 

태자가 머리를 깎은 솔도파의 동남쪽에 광야가 펼쳐지는데 그곳에서 180∼190리 가다 보면 니구로타림(尼拘盧陀林)에 이른다. 이곳에 솔도파가 하나 있는데 높이는 30여 척에 달한다. 옛날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 사리가 이미 다 분배되어 모든 바라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열첩반나(涅疊般那)33)[당나라에서는 분소(焚燒)라 하고 구역에서는 사유(闍維)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땅에서 타고 남은 재와 숯을 모아서 이것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령스러운 솔도파를 세우고 공양을 올렸다. 이후에 기적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병든 사람이 기도하면 대부분 쾌유되었다.

33) 범어로는 ni k pana이며 시체를 화장하여 그 유골을 수습하는 장례법이다. 다비(茶毗)를 말한다.

 

재와 숯이 담긴 솔도파 옆에 옛 가람이 있는데 그 속에는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다.

 

옛 가람의 좌우에는 수백 기의 솔도파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기단은 비록 허물어졌지만 높이는 백 척에 달한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있는 큰 숲 속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고 길도 위험하다. 야생 소나 코끼리가 무리지어 다니면서 사냥꾼을 위협하며, 지나가는 행렬을 기다렸다가 이들을 해치는데, 그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 이 숲을 벗어나면 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4) 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

구시나게라국34)은 성곽이 기울고 허물어졌으며 마을도 인적이 드물다. 벽돌로 만들어진 옛 성터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하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도 거의 없고 거리들은 황량하다.

34) 범어로는 ku inagara이며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구이나갈(拘夷那竭)·구시나(拘尸那)·
     구시나(俱尸那)·구이(拘夷) 등으로도 표기하며 상모성(上茅城)·모당성(茅堂城) 등으로
     번역한다. 구시나게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데 그 중에 통설을 소개하자면 지금의
     고라쿠푸르(Gorakhpur)시 동쪽 34마일 지점에 이는 Kasia(Kasaya)라고 하는 설이다.

 

성 안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준타(准陀)35)[구역에서는 순타(純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의 옛 집이다. 집 안에는 우물이 있는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뚫은 것이다. 세월이 비록 흘렀지만 물은 여전히 맑고 감미롭다.

35) 범어로는 cunda이며 주나(周那)·순타(淳陀)·순타(純陀)·준타(准他)·준제(準提) 등으로
     표기하고 생략해서 순(淳)이라고도 하며, 이 뜻을 새기면 묘의(妙義) 또는 치소(稚小)라고 한다.

 

성의 서북쪽으로 3∼4리를 가다가 아시다벌저하(阿恃多伐底河)36)[당나라 말로는 무승(無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간에서 모두 함께 부르는 말이다. 구역에서는 아리라발제하(阿利羅跋提河)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전적(典籍)에서는 이것을 일컬어 시뢰나벌저하(尸賴拏伐底河)라고 하며, 번역하여 유금하(有金河)라고 한다]를 건너면 서안(西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라나무숲[娑羅林]에 이른다. 사라나무는 떡갈나무와 비슷한데 껍질이 청백색이다. 잎에는 광택이 아주 많이 흐르는데, 네 그루의 나무가 높이 자라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적멸에 드신 곳이다. 

36) 범어로는 ajitavat 이다.

 

그 벽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정사 아래에는 여래의 열반상37)이 만들어져 있다. 여래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우셨다. 곁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기단은 비록 기울고 허물어졌지만 높이는 여전히 2백여 척에 달한다.38) 앞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데39) 여기에는 여래께서 적멸하신 일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비록 문장들이 있기는 하여도 날짜가 적혀 있지 않다.

37) 오늘날 Kasia에는 5세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길이 6미터의 거대한 열반상이 있다. 1876년에 발굴되어
     수리된 것이다.
38) 오늘날에도 열반상을 모신 당(堂) 뒤, 오래된 기단 위에 시멘트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다. 시멘트 부분은
     미얀마 불교도의 손에 의해서 1927년에 세워진 것이다.
39) 이 돌기둥은 오늘날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

 

앞선 여러 기록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지 80년이 지난 해의 폐사거월 후반 15일에 반열반(般涅槃)40)에 드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3월 15일에 해당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부처님께서 가랄저가월(迦剌底迦月) 후반 8일에 반열반에 드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9월 8일에 해당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래 여러 부파들은 각각 다른 견해를 내었는데 어떤 부파는 1천 2백여 년이라고 말하고, 어떤 부파는 1천 3백여 년이라고 말하며, 어떤 부파는 1천 5백여 년이라고 말하고, 어떤 부파는 9백 년이 지나고 아직 천 년이 채 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40) 범어로 parinirv a라고 한다. 원적(圓寂)이라 번역한다. 열반과 같은 뜻으로 영원히 일체의 번뇌와
     재난을 끊은 경지이다. 석존이 무여열반에 드는 것을 가리킨다. 

 

정사의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 꿩 무리의 왕이 되어서 그들을 화재에서 구해 준 곳이다. 옛날 이 지역에 아주 무성한 숲이 있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이 숲에 깃들어 둥지를 틀고 굴을 파고서 살고 있었는데 돌연히 거센 바람이 4방에서 일어나더니 맹렬한 불길이 바람에 실려 숲에 붙었다. 그 때 꿩 한 마리가 그들이 불에 탄 것을 불쌍히 여겨 맑은 물을 몸에 적셔서 허공을 날아와 그 물을 뿌려댔다. 이 때 제석천이 이 모습을 내려다보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어리석게 헛된 날개짓을 하느냐? 큰불이 일어나 임야를 태우고 있는데 너의 그 작은 몸으로 그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꿩이 물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나는 제석천이다."

"제석천이시라면 커다란 복덕의 힘이 있어서 원하는 것은 이루지 못할 것이 없으니, 중생들을 재난에서 구해내는 일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부질없다고 비난하시기만 하니 그런 허물이 대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지금 거센 불이 타오르고 있으니 쓸데없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또다시 부지런히 날아서 물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제석천이 마침내 물을 떠서 그 숲에 뿌리니 불이 꺼지고 연기도 사라져 중생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에도 이것을 일컬어 구화솔도파(救火率堵波)라고 부른다.

 

꿩이 불을 끈 곳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 사슴이 되어서 중생들의 목숨을 구한 곳이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 큰 숲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숲에 큰불이 일어나서 온갖 새들과 짐승들은 곤경에 처하였다. 앞에는 급류가 흐르고 뒤에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이 있었다. 불을 피해 몰려온 그들은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잃을 운명에 놓였다. 이 때 그 사슴이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몸을 강물에 가로 눕혀서 다리가 되어주었다. 사슴의 껍질은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지만 스스로 물에 빠지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다리를 저는 토끼가 강둑에 이르자 피로함과 고통을 무릅쓰고 그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근력이 완전히 다하여 물에 빠져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천신들이 그 유해를 거두어서 솔도파를 세웠다.

 

사슴이 물에 빠지게 된 짐승들을 건져 준 곳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소발타라(蘇跋陀羅)41)[당나라 말로는 선현(善賢)이다. 구역에서 수발타라(須跋陀羅)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적멸에 든 곳이다. 선현은 본래 바라문[梵志師]이었다. 그의 나이는 1백 20세였는데 나이가 많고 지혜로웠다. 부처님께서 적멸에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쌍수(雙樹) 사이로 나아가서 아난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신다고 하는데, 제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 부디 세존께 질문을 올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난이 말하였다.

"불세존께서 이제 열반에 드시려 하니 부디 어지럽게 하지 말아주시오."

그러자 선현(善現)이 말하였다.

"나는 부처님을 세상에서 만나기 어렵고 정법을 듣기란 더욱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내게는 커다란 의문이 있는데 장차 그 대답을 청할 곳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마침내 선현은 부처님께 나아가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모든 대중들은 스스로를 스승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각자 다른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가르침을 주고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교답마(喬答摩)42)[구역에서는 구담(瞿曇)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께서는 능히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깊이 궁구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널리 그를 위하여 설하시자 선현은 이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속에 깨끗한 믿음과 이해가 생겼다. 그리하여 법 속에 들어가서 구족계를 받기를 구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할 수 있겠는가? 외도이학(外道異學)으로서 범행(梵行)을 닦으려는 자는 마땅히 4년 동안

43) 그 행과 성품을 관찰하여야 하지만 그 위의가 적정(寂靜)하고 그 언사가 성실하다면 곧 나의 법 속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행에 달려 있을 뿐이니, 무엇이 그리 어렵다 하겠는가?"

선현이 답하였다.

"세존께서는 중생을 가엾게 여기시고 그들을 구제하심에 사사로운 마음이 없습니다. 4년 간 학업을 닦고 3업(業)을 잘 길들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앞서 이미 사람의 행에 있다고 설하였다."

이에 선현은 출가하여 곧 구족계를 받았으며 부지런히 수행하여 심신을 닦으며 용맹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법에 대하여 의심이 없어졌으며 스스로의 몸으로 증오(證悟)를 이루었으니, 그날 밤이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승가 대중 사이에 있다가 화계정(火界定)에 들었으며 여러 가지 신통을 나타낸 뒤에 부처님보다 먼저 적멸에 들었다. 이에 그가 여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으며 먼저 멸도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옛날의 다리를 절었던 그 토끼였던 것이다.

41) 범어로는 subhadra이다. 구역에서는 수발타라(須跋陀羅) 외에도 수파두라(藪婆頭羅)·수발타
     (須拔陀)·수발타(須跋陀)·수발(須跋)·수발(須拔)로도 표기하며 선현(善賢)·쾌현(快賢)의 뜻으로
     번역한다. 이 사람의 귀의에 관한 내용은 『장아함경』 권4, 『잡아함경』 권35, 『증일아함』 권37,
     『비나야잡사』 권38, 『대반열반경』권5·6 등에 나온다.
42) 범어로는 gautama이다. 인도 고대의 선인의 이름이지만 석가족의 선조가 이 선인의 제자였기
     때문에 후인이 그 자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는 석존을 교답마라고 말하였다. 
43) 『사분율』 권34, 『오분율』 권17 등에서는 외도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으려면 먼저 4개월간의
     시험적인 학습을 시키고 그 성적의 여하에 따라서 정식으로 승중(僧衆)에 넣어주고 구족계를 주는
     것에 관한 가부가 결정된다. 여기에서 4년이라고 말한 것은 4개월의 오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현이 적멸한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집금강(執金剛)이 넘어진 곳이다. 대비세존께서 근기에 따라서 그들을 이롭게 해주시고 교화의 공덕을 모두 마치신 뒤에 적멸의 안락에 드시고자 쌍수 사이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두시고 누우셨다. 이 때 집금강신(執金剛神)과 밀적역사(密迹力士)가 부처님의 멸도를 보고 비탄에 젖어 이렇게 울부짖었다.
"여래께서 우리를 버리시고 대열반에 드셨도다. 이제 우리는 귀의할 곳이 없어졌고 보호받을 곳이 없어졌다. 독화살이 깊게 박히고 근심의 불길이 맹렬하게 솟게 되었구나."
그리고 나서 금강저(金剛杵)를 내던지고 기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한참이 지나 일어나서는 또다시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서로 말하였다.
"생사의 넓은 바다를 이제 누가 노를 저어 건넬 것이며, 무명의 길고 긴 밤에 누가 등불이 되어 주겠는가?"

 

금강신이 쓰러진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적멸에 드신 지 7일 동안 공양을 올리던 곳이다. 여래께서 적멸에 드시려 할 때에 광명이 두루 비치고 인간과 천신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시름에 잠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들은 함께 이렇게 말하였다.

"대각 세존께서 이제 적멸에 드시려 하신다. 중생들의 복이 다하였고 세간이 의지처가 없어지게 되었다."

여래께서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사자상(師子床)에 누우신 뒤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끝끝내 적멸에 들었다고 말하지 말라. 법신(法身)은 상주하니 모든 변하고 바뀌는 것에서 벗어났느니라. 마땅히 게으른 마음을 버리고 어서 빨리 해탈을 구하라."

모든 필추들이 슬픔에 겨워 흐느껴 울며 비탄에 잠겼다. 이 때 아니율타(阿泥律陀)[구역에서는 아나율(阿那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가 필추들에게 말하였다.

"멈추시오. 멈추시오. 슬퍼하지 마시오. 천신들이 비난하겠소."

 

이 때 말라(末羅)44)의 사람들이 공양을 마친 뒤에 금관(金棺)을 들고 열첩반나(涅疊般那)의 장소까지 가고자 하였다. 이 때 아니율타가 말하였다.

"잠시 멈추시오. 천신들이 7일 동안 공양을 올리고 싶어하오."

이에 하늘의 대중들이 미묘한 하늘의 꽃을 가지고 허공에서 노닐면서 성덕(聖德)을 찬양하며 각자 지극한 마음으로 함께 공양을 올렸다.

44) 범어로는 mall 이며 마라(摩羅)·만라(滿羅)·발라(跋羅)로도 표기하며 역사(力士)·장사(壯士)로
     번역한다. 고대 인도의 16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 종족의 명칭이며 Kasia로 추정되고 있는
     Kusin r 를 수도로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P v 와 Bhoganagara의 두 개의 중요 도시가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깊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랐으며 이 나라의 영토 안에서 부처님의 입멸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장례식이나 불골(佛骨)의 분배 등에 관해서 지도적인 입장에 있었다.

 

관이 멈춘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마하마야부인이 부처님의 입멸에 곡(哭)을 한 곳이다. 여래께서 적멸에 드시고서 입관의 절차가 모두 끝나자 아니율타가 천궁으로 올라가 마야부인에게 알렸다.

"대성(大聖)이시며 법의 왕이신 세존께서 이제 적멸에 드셨습니다."

마야부인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비탄에 잠기다 못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여러 하늘의 대중들과 함께 쌍수 사이로 나아가서 승가지발(僧伽胝鉢)과 석장(錫杖)을 보았다. 마야부인은 이런 유품들을 보더니 슬피 통곡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깨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과 하늘의 복이 다하였고 세간의 눈이 사라졌구나. 이제 이런 물건들은 쓸모가 없으니, 주인이 없구나."

 

이 때 여래의 성스러운 힘으로 금관(金棺)이 저절로 열리더니 광명이 비치는 가운데 여래께서 합장하고 앉아 계셨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로하시기 위해 먼 곳에서 내려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행(諸行)의 법이 원래 그러하나니 부디 그토록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아난이 애통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훗날 세간에서 저에게 물으면 저는 그들에게 무엇이라 답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부처님께서 이미 열반에 드셨으나 어머니 마야부인이 천궁에서 내려와 쌍수 사이에 이르시니, 여래께서 모든 불효한 중생들을 위하여 금관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설법하셨다고 하라."

 

성의 북쪽으로 강을 건너 3백여 걸음을 걷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의 몸을 불사른 곳이다.45) 그 땅은 지금도 짙은 누런 색이며 땅에는 재와 숯이 섞여있다. 만일 지극한 정성으로 이곳에 찾아와 간절히 구하여 청한다면 혹 사리를 얻을 수도 있다. 여래께서 적멸하시자 인간과 하늘의 중생들은 비통함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7보로 관을 만들고 천 개의 모직으로 그 몸을 감싼 뒤에 향과 꽃을 준비하고 깃발과 일산(日傘)을 세우고는 말라족 사람들이 가마를 받들고 발인하여 앞뒤로 부처님의 유해를 모셨다. 그리하여 북쪽으로 가서 금하(金河)를 건너 향유를 가득 부은 뒤에 많은 향목(香木)을 쌓고 다비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헝겊은 타지 않았으니 하나는 부처님 몸에 직접 닿아 있는 속옷이었고 또 하나는 가장 겉에 두른 헝겊이었다. 모든 중생들이 사리를 나누어 가져갔지만 오직 머리카락과 손톱만이 그대로 남아있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45) 다비를 치룬 장소에 대해서 현장은 성의 북쪽이라고 하고 있지만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후분(後分) 하(下)에는 동문(東門) 밖이라고 하고 있고, 『반니원경(般泥洹經)』 하(下)에서는
     서문(西門) 밖이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다비처의 유적으로 여겨지고 있는 장소는 열반하신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10마일 떨어진 지점, 넓은 밭 한 가운데에 큰 나무가 있는데 그곳의
     낮은 구릉이 다비의 유적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곳은 벽돌이 무너져 내려 만들어진 언덕이며,
     중앙의 커다란 구멍은 불골(佛骨)이 매장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몸을 불사른 곳 옆에 솔도파가 하나 있는데 여래께서 대가섭파를 위하여 두 발을 보여 주신 곳이다. 여래의 금관(金棺) 아래로 이미 향목들이 쌓여졌고 그곳에 불을 붙이려고 하였지만 붙지 않았다. 대중들은 이 일을 보고 모두 놀랐다.

그러자 아니율타가 말하였다.

"가섭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때 대가섭파는 5백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림에서부터 구시성(拘尸城)에 도착하여 아난에게 물었다.

"세존의 유해를 볼 수 있겠소?"

아난이 말하였다.

"천 겹의 헝겊으로 세존을 감싸 이중 관에 안치하였습니다. 쌓은 향목에 이제 막 불을 붙이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밀었다. 그런데 가섭은 부처님의 윤상(輪相) 위가 뭔가 다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아난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에 이런 일이 생겼소?"

아난이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막 열반에 드셨을 때 인간과 천신들이 모두 비통에 잠겼습니다. 그 대중들이 쏟은 눈물들이 여기에 떨어져서 이렇게 변색되었습니다."

가섭파는 예를 올리고 관 주위를 돌면서 부처님을 찬양하였다. 그러자 향목에 저절로 큰불이 붙더니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여래께서는 적멸에 드신 뒤에 세 번 관에서 나오셨다. 첫 번째는 팔을 내밀어 아난에게 길이 깨끗이 치워졌는지 물으셨고,46) 두 번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하셨으며, 마지막으로는 두 발을 내밀어 대가섭파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46) 『경율이상(經律異相)』 권4, 「현반열반(現般涅槃)」5에 나오는 전설을 말한다.

발을 내보이신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은 여덟 명의 왕47)이 사리를 나눈 곳이다. 앞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이러한 일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다비가 끝나자 여덟 나라의 왕들이 4병(兵)을 데리고 와서 직성(直性)바라문48)을 보내어서 구시성(拘尸城)의 역사(力士)에게 말하였다.

"하늘과 인간들을 인도하시던 스승께서 이 나라에서 적멸에 드셨으므로 우리는 사리를 나누어 가지려고 먼 곳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역사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발걸음을 옮기셨던 곳은 바로 이 땅입니다. 세간의 지혜로운 스승께서 입멸하시니 중생들은 어진 아버지를 잃은 셈입니다. 여래의 사리는 우리들이 마땅히 공양 올리겠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노고도 헛되게 그들은 사리를 얻을 수 없었다. 왕들은 정중한 자신들의 청이 거절당하자 다시 말하였다.

"예를 갖추어 청하여도 따라 주질 않는구나. 우리의 군대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러자 직성바라문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였다.

"삼가십시오. 대비세존께서는 아주 오랜 세월을 인욕으로써 복선(福善)을 닦으셨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일들을 모두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일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제 사리를 똑같이 여덟 등분으로 나누어서 각자 공양을 올릴 수 있다면 군사를 일으킬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자 여러 역사들은 이 말대로 즉시 여덟 등분으로 똑같이 나누려고 하였다. 제석이 왕들에게 말하였다.

"하늘에게도 마땅히 몫이 있어야 합니다. 힘을 믿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아나파답다(阿那婆答多)용왕, 문린(文隣)용왕, 의나발달라(醫那鉢呾羅)용왕도 다시 이렇게 청하였다.

"우리들의 몫까지 그들에게 주지 마시오. 만일 힘으로 상대한다면 대중들은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직성바라문이 말하였다.

"싸움을 일으켜서는 안 되오. 마땅히 함께 이것을 나누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삼등분 하여서 하나는 천신들의 몫, 또 하나는 용의 무리들의 몫,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인간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여덟 나라가 또 다시 나누어 가졌다. 하늘과 용과 인간들의 왕은 사리를 나누어 가지면서 모두들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7) 현장의 이 글을 읽어보면 구시성 외에 여덟 나라의 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요구한 것처럼
    이해되지만 다른 서적들을 통해서 보면 구시성을 포함한 여덟 나라가 된다. 즉 구시성(拘尸城)의
     말라중(末羅衆), 파파(波婆, P v )성의 말라중, 남마(藍摩, R ma-gr ma)읍의 구리(拘利, Koli)중,
     차라파(遮羅頗, 팔리어로는 Allakappa)성의 발리(跋離, Buli)중, 비류제(毘留提, Vai ra-dv pa)성의
     바라문중, 겁비라(劫比羅, Kapilavastu)성의 석가중, 폐사리(吠舍離, Vai l )성의 리차비(梨車毗,
     Licchavi)중, 마케타(摩揭陀, Magadha)국의 아사세(阿闍貰, Aj ta atru)왕의 여덟 사람이다.
48) 향성(香姓)·성연(姓烟)이라고도 번역하며 범어로는 dro a이다. 부처님께 귀의한 바라문으로서
     사리의 원만한 분배의 공덕에 의해 분배에 사용되었던 병을 얻어서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로써
     여덟 왕의 사리 8탑·탄탑(炭塔)·병탑(甁塔)을 합하여 10탑이 되며 불교사상 최초의 불탑으로서 유명하다.

 

사리를 나눈 솔도파에서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커다란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에 바라문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세도가였고 거부였으며 다른 이들보다 걸출하게 뛰어난 자였다. 그는 5명(明)을 배우고 궁구하였으며 3보를 경배하였다. 그의 집 옆에 잇닿아 승방(僧坊)을 세웠으며 여러 물품들을 모두 베풀어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만일 어떤 승가 대중이 길을 오가는 모습을 보면 은근하게 그들에게 청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올렸고 하루나 이레 동안 머물게 하였다.

 

그 후 설상가왕(設賞迦王)이 불법을 훼멸하니49) 승가 대중들은 제자들을 더 이상 배출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 바라문은 언제나 은근하고 측은한 마음을 품은 채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행하던 동안에 사문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 사문은 머리와 눈썹이 눈처럼 흰 노인이었는데 석장을 짚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바라문은 얼른 달려나가 그를 맞아들여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를 묻고 승방에 들기를 청하고서 온갖 공양을 갖추었다. 그는 아침이 되자 깨끗한 우유를 끓여서 죽을 만들어 사문에게 올렸다. 사문은 죽을 받아 들고서 겨우 한 모금을 먹을 뿐 이내 발우를 내려놓더니 길게 탄식하였다. 바라문은 사문이 죽을 먹기를 옆에서 기다리다가 물었다.

"대덕께서 자비를 드리우셔서 인연에 따라서 고맙게도 이곳으로 와주셨습니다만 저녁에 편안하지 못하셨습니까? 죽이 맛이 없으십니까?"

사문이 가여운 듯 말하였다.

"나는 중생의 복이 점점 희박해지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여기서 그만두기로 하고 식사를 마친 뒤에 설하겠습니다."

사문은 식사를 마친 뒤에 옷을 거두었다. 그러자 바라문이 말하였다.

"아까는 뭔가 말씀을 해주시겠다고 하시더니 어찌하여 지금은 아무 말씀

이 없으십니까?"

사문이 말하였다.

"나는 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일은 의심을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반드시 듣고자 하신다면 이제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내가 아까 탄식한 것은 그대의 죽이 맛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수백 년이래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맛이었습니다. 옛날 여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저는 이따금 세존을 모셨습니다.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셨을 때 맑은 물에 몸을 구부려서 그릇을 씻기도 하고 또는 입을 헹구시거나 목욕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아아, 그런데 지금의 이 맑은 우유는 옛날의 담수(淡水)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과 하늘의 복이 차츰 줄어드는 까닭입니다."

그러자 바라문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대덕께서는 세존을 친견하였다는 말씀입니까?"

사문이 말하였다.

"그렇소. 그대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였습니까? 부처님의 아들인 라호라가 바로 나입니다. 정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아직 적멸에 들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뒤에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바라문은 이에 그 사문이 묵었던 방에 향을 사르고 깨끗이 청소한 뒤에 상(像)을 마련하고 온갖 의식을 갖추어 공경하였으니 마치 그 사문이 방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49) 설상가왕의 불법 훼멸은 현장이 인도를 다녀가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며 619년에 

     하루샤왕에게 굴하고 만다.

 

또다시 대림(大林) 속에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바라닐사국(婆羅女黠反斯國)[구역에서는 파라나국(波羅奈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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