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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 선의 돈점 논쟁

실론섬 2016. 2. 11. 18:47


선의 돈점 논쟁 / 변희욱

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불교평론 [62호] 2015년 06월 01일 (월)


 

 

변희욱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1. 판도라의 상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상자가 열리자 연기가 피워 올랐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탄식했고, 다른 누군가는 이제야 상자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환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상자와 상자에서 나온 연기를 이리저리 살폈고, 외국에서 감정평가사가 오기도 했다. 평가를 위한 대회가 여러 차례 열렸고, 평가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외국에서도 당대 최고의 권위자들이 전문 연구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직도 상자의 진위, 상자 안팎의 물건, 상자를 연 속뜻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오래전부터 선을 소재로 한 연구 결과물이 발표되었지만, 학문적 엄밀성과 객관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선이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온 시점은 1980년대부터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시점을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의 선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를 벗어나 본격 단계로 진입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 했던가.


날갯짓 한 번에 불교계와 불교학계에는 태풍이 몰아쳤고, 그 태풍으로 인해 숨겨졌던 선의 진면목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학계의 선에 대한 이해 수준도 천하에 드러났다. 이미 상자는 열렸고, 연기는 피어올랐다. 연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상자 속에서 불이 났는지, 마니보주의 빛인지, 봄날 아지랑이인지, 한 번은 따져보아야 한다. 선가의 격언이 있지 않은가? “물을 마셔 보아야 물이 찬지 따뜻한지를 알고, 몸소 체험해야 깨달을 수 있다.(冷溫自知 自證自悟)”   


2. 돈점 논쟁의 개막


이설(異說)과 정로(正路)


지난 30년간 한국 불교학계에서 최대의 논쟁이었던 돈점 논쟁은 이렇게 해서 바람을 일으켰다. 성철(性徹, 1912∼1993)은 정통 선은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아니고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공표했다. 그 주장이 1981년 출판된 《선문정로(禪門正路)》에 실려 있다. 책의 제목부터 이목을 집중하게 한다. 선문의 ‘바른길’. 그러니까 지금까지 알려진 선은 바른길이 아니라는 뜻을 넌지시 던진 것이다. 제목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 그렇게 주장했다.    


무릇 異說 중의 一例는 頓悟漸修이다. 禪門의 頓悟漸修 元祖는 荷澤이며 圭峯이 계승하고 普照가 力說한 바이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大宗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詳述한 그의 《節要》 벽두에서 ‘하택은 知解宗師이니 曹溪의 嫡子가 아니다’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요 六祖가 授記하고 叢林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知解宗徒이다. 

원래 知解는 正法을 장애하는 최대의 금기이므로 선문의 正眼祖師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 知解宗徒라 하면 이는 衲僧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頓悟漸修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한다.


성철은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신회(684~758), 종밀(780~841), 지눌(知訥, 1158~1210)을 지해종도라고 비판했다. 성철의 주장에 따르면, 돈오점수는 ‘어긋난 노선[異說]’이다. 


이탈(離脫)과 일탈(逸脫)


한국불교계에서 지눌은 어지간한 척도로 잴 수 없는 위상을 지닌다. 선과 교를 아우르는 한국불교 전통은 지눌에서 연원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선수행의 철학적 기초를 구하는 지적 여행” “깨달음과 닦음의 선불교적 모범 답안”이라는 수식어로 지눌을 묘사하기도 한다.


1981년까지 선문과 학계의 동향으로 보건대, 지눌의 노선을 정통에서 이탈한 길, 혹은 길 밖의 길이라고 생각해본 수행자나 학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성철에 의해 지눌은 지해종도로 정리되었고, 지눌의 노선인 돈오점수는 어긋난 노선, 바른 궤도를 이탈한 노선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지눌의 노선을 따르던 한국의 선문 대부분은 뜻하지 않게 이탈한 길을 걷게 된 셈이다.


이에 성철이 공연히 분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성철은 전통적인 회통불교 정신을 저버렸으니 한마디로 “배타적인 종파주의”이며, 성철의 지눌 비판은 “엘리티즘의 맹랑한 일격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성철의 주장은 바른길[正道]이 아니라 일탈일 뿐이다. 


3. 전개와 성과


의도하지 않은 성과


10년 후, 상자와 연기를 감정하는 자리가 열렸다. 1990년 지눌의 후예들은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표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실질적인 주제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에 대한 학문적 검토이다. 이전까지 선어록에 산재되었지만 학문의 치외법권 영역이었던 깨달음과 닦음, 돈과 오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본분조사(本分祖師)가 되어 조계적자로서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여 영겁 불멸의 무상정법(無上正法)을 선양하기를 기원”했던 성철이 일으킨 바람은 선이 엄밀한 의미의 학문으로 들어오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나비효과이겠다.


보조사상연구원이 학술대회를 열어 성철의 주장에 대해 점검한 때는 1990년이지만, 지눌의 계승자들은 1987년에 연구원을 창립했고 그때부터 지눌의 전서(全書)를 간행하기로 기획했다. 1989년 《보조전서(普照全書)》가 간행되었다.


성철의 후예들은 1987년에 백련불교문화재단을, 1996년에 성철선사상연구원을 열었다. 재단과 연구원에서는 성철의 법어집 11권과 선어록 37권을 간행하였다. 여기서 간행한 책은 대체로 본래성불 돈오돈수를 그 골간으로 한다.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돈점 논쟁의 성과가 적지 않다. 첫째, 지눌과 성철의 일차문헌이 정리되어 간행되었고 중요 선어록이 번역 출판되었다. 이로써 한국 선 연구의 기반은 탄탄해졌다.


둘째, 선이 본격적으로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성철의 지눌 비판과 지눌 전공 학자들의 반론을 계기로 하여 선이 학문의 영역으로 포섭되고, 한국의 선이 세계 학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계기로 작동한 점만은 틀림없다. 한국 학계의 돈점 논쟁을 모은 전문 연구서가 출판되었는데, 여기에는 주로 돈점론의 불교사적 기원과 돈오점수 측의 대응이 실려 있다. 또 돈점론에 관한 영어권 연구를 집대성한 연구물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돈점 논쟁의 이론적 근거가 실려 있다.


그 이후 돈점론은 비대칭적으로 발전되고 있다. 돈오점수를 지지하는 쪽은 학술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정규 학술지를 간행하고 있으며, 돈오점수에 관해 논의의 지평과 깊이를 계속 확장 심화시키고 있다. 반면 돈오돈수를 지지하는 쪽은 간헐적으로 학술대회를 기획하고 있다.


최근의 돈점론과 그 가치


한동안 성철이 일으킨 바람과 돈점 논쟁의 파도는 잔잔해졌다. 하지만 잠재된 에너지는 여전했고 바다는 움직이고 있었다. 잠재했던 에너지가 겉으로 드러난 계기는 2012년에 열린 ‘돈점사상의 역사와 의미’ 학술대회였다.


그중 〈중국 선사들의 돈점론과 그 이해〉(종호 스님)는 ‘중국 선의 돈점론 기원과 전개’를 집대성했다. 특히 《육조단경》을 비롯한 주요 선어록을 분석하여 예문을 제시하면서 주장을 펼쳤기에, 이 주제에 관한 지금까지의 최종본이라 할 만하다. 이 연구는 이렇게 주장한다. ⑴ “돈점오수 관점은 수행자의 근기와 맞물려 있다.” ⑵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중에서 중국 선사들이 더 많이 보이고 있는 것은 돈오점수론이다.”


주장 ⑴은 이전 연구의 연속 선상에 있다. 많은 연구가 공통적으로 “법에는 돈점이 없으며 사람에게 날카로움과 우둔함이 있다.”는 《육조단경》의 구절을 논거로 제시하면서, 그렇게 정리했다. 돈오점수 지지자는 대체로 돈점의 문제를 근기의 문제로 치환하는 관점을 견지한다. 지눌이 최상 근기는 돈오돈수가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존재는 돈오점수에 해당한다고 정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주장 ⑵를 논증하기 위하여, 논문은 신회, 위산(771~853), 연수(904~975), 대혜(1189~1163), 중봉(1263~1323), 덕청(1546~1623) 등의 주요 선어록을 분석했다. 특히 원오와 대혜에는 돈오돈수보다 돈오점수적 내용이 훨씬 많다고 정리했다.    


〈중국 선사들의 돈점론과 그 이해〉는 선행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돈오점수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선어록을 섭렵 분석하여 논증했다. 그런 점에서 돈점론의 선적 기원과 전개에 관해 논의를 심화시켰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돈점논쟁 새로 읽기〉(박태원)는 논점 논쟁에 대한 그때까지 연구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평가하는 근거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2012년까지의 논쟁 현황을 충실하게 정리했다. 이 연구는 2012년까지 돈점 논쟁 관련 연구를 분석하여 두 가지 주제로 정리했다: ⑴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 ⑵ “돈점론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


둘째, 관점의 문제를 제기했다. 〈돈점논쟁 새로 읽기〉는 돈점 논쟁을 해오를 중심으로 재검토하자고 제안했다. 〈돈점논쟁 새로 읽기〉는 해오를 중심으로 지눌과 성철의 분기를 정리했고, ‘돈점 논쟁의 핵심’으로 해오를 특정하여 해오의 성격을 재검토했다. “지눌은 돈오/해오를 화엄 교학으로 설명하면서 선교일치와 돈오점수의 이론체계를 수립하는 동시에 지해의 해애(解碍)를 반조 및 간화선으로 치유하는 데 비해, 성철은 증오의 최대 장애물이 지해라는 전제에 입각하여 ‘해오인 돈오=지해=교=화엄’의 등식 명제로 돈오점수를 선문의 돈오 견성에 대한 배반/오염으로 규정한다. 지눌이 선문에 화엄을 받아들여 화엄과 선의 공존과 종합을 지향한다면, 성철은 양자의 양립불가를 천명하며 선문에서 화엄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렇게 보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불화를 음미하는 기존 논쟁의 초점이 명백해진다. ‘㈀지눌은 스스로 화엄적 해오가 해애(解碍)를 안고 있다고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왜 굳이 선문 안에 화엄적 해오를 포함시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성철은 왜 그토록 배타적으로 보일 정도의 단호하고도 철저한 태도로 화엄적 해오를 선문에서 축출해 내려는 것인가?’-성철의 돈오점수 비판과 돈오돈수 천명 이후 전개된 돈점 논쟁의 모든 논의는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응답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제안한다. “‘지눌의 돈오는 화엄의 원돈신해적 해오’라는 명제를 재검토해야 한다.” 계속해서 돈오에는 해오의 성격만이 아니라 되돌아봄(返照)의 뜻도 있다고 정리했다. 

2012년 박태원의 문제 제기는 돈점론 연구에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4. 최근의 쟁점: 돈오, 해오와 반조


해오, 도약대? 장애?


돈오점수의 돈오를 다시 검토하자는 제안이 던져졌다. 돈오돈수 측의 돈오점수 비판과 돈오점수 측의 반비판의 키워드는 돈오이기 때문에, 이 제안을 외면할 수 없다. 해오로서 돈오에 관해 확인된 사실부터 정리하자.


첫째, 종밀과 지눌은 돈오를 해오라고 설명했다. 종밀은 선과 교를 모두 수용하는 입장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했고, 지눌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노선으로 돈오점수를 채택했다. 지눌은 해오 이후의 노력만이 진정한 수행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돈오점수 체계에서 돈오는 해오이며, 해오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면서, 자기 성찰의 결정적 계기이다. 적어도 돈오점수 체계에서 돈오는 궁극이 아니라 궁극으로 비상하기 위한 도약대이다.


둘째, 성철은 돈오점수의 해오를 지해(知解, 지적 이해), 해애(解碍, 이해라는 장애)로 규정했다. 그러니까 해오는 돈오가 아니라 장애이며, 돈오는 궁극의 체험 즉 구경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지눌도 해오에 사량분별의 성격이 있다고 했다. 지눌도 돈오의 성격과 그 접근법에 대해 깊게 성찰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까지라면 성철의 지눌 비판에는 별 무리가 없다. 그런데 지눌의 저술에는 지적 이해로 규정할 수 없는 돈오(해오)가 자주 거론된다. 이 대목에서 물어볼 수 있다. “지눌의 돈오점수 체계에서 해오는 도약대일까, 장애일까?” 


반조


지눌은 돈오를 해오이면서 지해라고 정리했다. 지눌은 “만일 자신의 마음을 반조해 보지 않고 마음의 공능을 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을 명성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일컫는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지눌이 우려하고 성철이 언어와 지식으로 깨달음을 체험하려는 자(지해종도)를 비판한 취지와 일치한다. 성철이 지눌 돈오점수의 돈오를 지적 이해·장애로 정리했고, 심지어 성철의 비판을 반박하는 연구자도 돈오를 ‘지적인 기초’로 정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눌 돈오점수의 돈오에는 지적 이해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성격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한 성철의 비판은 다시 검토해야 한다. 문제는 지눌 돈오점수의 돈오가 성철의 규정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눌은 도약대 기능을 살리면서 장애 요소를 제어할 장치를 준비했다. 바로 자기 돌아보기, 즉 반조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지눌이 돈오를 반조와 연관하여 설명한 대목이 결코 적지 않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돈오에는 반드시 반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만약 스스로의 진지한 반조의 노력도 없이 단지 현재의 능지(能知)가 바로 불심(佛心)이라는 말에 헛되이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는 자라면 결코 그 올바른 뜻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자가 어찌 자기 앞의 거울과 같은 의식이 바로 공하고 고요한 영지(空寂靈知)임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진실함과 허망함도 분별하지 못하는 이런 자가 어찌 마음을 깨달은 자이겠는가?


마땅히 알아라. 내가 말하는바 마음을 깨달은 자란 언설에 의하여 의심을 없애고 직접 이 공적영지(空寂靈知)라는 말에 의거하여 반조하는 노력을 행하고 이 반조의 노력으로 인해서 생각을 떠나 있는 마음의 본체를 깨달은 자이다. 

   

지눌에 따르면 돈오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스승이나 경론의 말을 통해 생각의 전회를 일으키고 믿어서[解悟, 信解], 자기를 돌아보는 노력[返照]을 거쳐 깨닫는다[頓悟]. 이해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해오는 이해로서의 깨달음, 신해는 믿음 차원의 수용, 반조는 자기 성찰 즉 자기 본래면목 돌아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해로서의 깨달음, 믿음 차원의 수용, 자기 본래면목 돌아보기,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야 돈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조는 지눌이 새롭게 창작해낸 장치가 아니라 선 수행의 핵심이었다.


5. 복기(復棋): 걸어온 길, 가지 않은 길


걸어온 길, 문헌 해석으로서 돈점 논쟁


엄밀한 의미의 학문으로 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성철의 문제 제기이다. 한국의 불교(학)가 세계 학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동인(動因)도 그것이다. 현대 불교학계의 최대 논쟁은 돈점 논쟁이라 해도 별 무리가 없다.  


1980년대 상자에서 나온 연기는 돈점 논쟁의 개막을 알렸다. 1990년대의 논쟁은 상자 안팎을 관찰했다. 돈오점수, 돈오돈수의 정체를 파악해냈다. 2012년의 연구는 논쟁의 핵심 쟁점인 해오를 재해석했다. 일련의 노력으로 돈점론은 학문적으로 완숙해졌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의 주요 쟁점은 ‘깨달음은 과정인가, 궁극의 결과인가?’이다. 그 속에 내재된 쟁점도 있다. ‘선은 교학을 필수조건으로 요구하나, 배척하나?’ ‘깨달음 이후에는 노력이 필요할까, 아닐까?’ 이런 쟁점들은 ‘깨달음의 성격’ ‘선과 교학의 관계’ ‘깨달음 이후의 삶’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런 주제는 어느 정도 밝혀졌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에 대해 교학적·경전적 전거로 따진 성과가 있고, 선 정통으로 대입해본 연구도 축적되었다. 돈점 논쟁에 대한 이론적 정리는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문헌을 분석하여 돈점론을 묘사했다. 연구의 소재는 선 문헌이고, 주제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였다.


가지 않은 길, 세계 해석으로서의 돈점 논쟁


본래성불이라고 한다.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도 한다. 

문제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세상사는 고달프다. 세간의 질서는 탐·진·치를 용인한다. 문밖의 현실은 숨 막히는 질곡이고 마구니가 들끓는 세상이다. 누군가는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에 도덕과 예술적 감수성, 인간다운 삶을 희생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본래성불이라는 단어보다는 욕망이라는 용어가 더 친숙하다고 고백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에게 본디 그대로 진실한 성품[天眞自性]이 갖추어져 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할진대 지금 그대로 부처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는 탐·진·치에 칡넝쿨처럼 얽혀 사는 중생이라고 자처한다.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하는 쪽은 돈오점수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돈오점수 노선의 강점은 중생의 현실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일련의 세상사를 곱씹어 보면 본래성불 돈오돈수로 해석되지 않는 사건들이 너무도 많다. 돈오점수를 인정한 지눌은 세상 사람들의 현실에 가슴 시려했음 직하다. 잠정적으로 이렇게 돈오점수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돈오돈수로 세계를 해석하면 어떨까? 돈오점수, 돈오돈수 두 노선을 오늘날 세상사의 흐름과 중생의 실제 삶에 연결하여 연구할 수 있다면, 지눌과 성철의 문제의식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돈점론을 분석하여 세계와 사람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미미하다. 역대 조사를 비롯하여 지눌과 성철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여 세계의 모순과 사람의 아픔을 해석하고 해결하려 해봄 직하다.     


6. 전망: 가야 할 길


해석과 실천으로서 돈점 논쟁


아주 오래전 태자와 왕자의 일이다. 

세상살이에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았던 어떤 태자는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했고 왕궁 밖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해석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찾아내었고, 세상의 아픔을 치유했다. 또 다른 어떤 왕자는 멀리 동쪽으로 유랑하여 기존의 지식체계를 믿지 말라고 외쳤다. 그는 자신과 세상이 바뀌지 않는 까닭은 이론이 잘못되어서도 아니고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는 지식 공부 대신에 자기 돌아보기, 세상 새롭게 보기를 권했다. 


현재로부터 과거를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 지눌의 문제의식과 성철의 그것은 현재의 지적 수준과 탐구 의지로 알아낼 수 있으며, 현재의 선과 교의 관계, 앎과 실천의 동력학에 대한 학계의 이해 정도는 성철의 문제 제기 이후에서 파악될 수 있었다.


부처로 살지 못하는 자신, 중생 노릇은 어찌할 것인가? 

선문에서는 지금 여기서 그대로 부처이고 본디부터 자유롭다고 한다. 성철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본래 부처이다. 그러면 중생은 없는가? 성철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대가 중생이라고 생각하기에, 부처가 중생이 된다. 중생이라는 생각 자체가 허상일 뿐이다.’ 숨 막히고 가슴 아린 현실은 성철의 생각대로 착각이고 허상일지도 모른다.


2011년 가을, 우치무문 범부가 착각했기에 자본주의의 한복판 맨해튼에 모여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고 외쳤고, 그들의 아픔은 허구일 뿐인데도 1% 대 99%의 현실에 저항했던 것일까? 2014년 봄, 진도 앞바다에서의 이별에 비통해하는 것은 한낱 중생의 감정놀이 때문이고, 2015년 봄, 광화문 광장을 꽉 채운 중생들이 “진실을 인양하라!”라고 요구한 것은 미망(迷妄)에 사로잡혔기 때문일까?


지눌이라면 현실의 아픔과 모순을 끝내 외면했을까, 성철은 어떻게 했을까? 돈오점수를 지지하는 연구자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돈오돈수를 대변하는 연구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눌의 설계와 성철의 설계 중 어느 쪽이 세계와 인간을 제대로 해석했을까? 


돈점 논쟁으로 세계의 모순을 해결하고 사람의 아픔을 치유할 수는 없을까?

돈오점수나 돈오돈수 모두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는 가설이며,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지향하는 방안이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 모두 불변의 진리는 아니며 변화(혹은 복원)를 위한 방안일 뿐이다. 돈점 논쟁은 과학의 명제나 실험 결과에 대한 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논쟁의 쟁점을 돈오점수나 돈오돈수 수행 방법에 머물게 한다면,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문에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한다(認賊爲子).”는 말이 전해진다. 가짜를 진짜로 잘못 생각하거나, 방안을 궁극으로 착각하거나, 남의 집 살림을 내 집 살림으로 오인한다는 뜻일 것이다. 진리 체계나 그 접근 방법에 대한 묘사는 할 만큼 했다. 선 문헌을 대상화하는 연구는 그럭저럭 해왔다. 묘사(描寫), 기술(記述)로서의 논쟁도 어느 정도 따져봤다. 세계를 해석하고 변화(혹은 복원)시키기 위한 쟁론, 사람의 아픔을 해석하고 치유하기 위한 담론으로 나아가도 좋을 것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로 세계를 해석하고 세계를 바꾸려 한다면 어떨까? 어느 쪽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에 적합할까? 어느 쪽이 퀭한 눈, 시린 가슴을 달래줄 수 있을까? 틀 밖으로 나가보자. 낯설게 바라보자. 집요하게 파고들자. 아픔을 함께 느껴보자.


해석과 실천으로서 돈점 논쟁을 기약한다. 상자 속에는 희망이 남아 있다. ■ 


변희욱 /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 〈대혜 간화선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교학불교가 선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가져서 《금강경》 《유마경》을 선의 관점에서 해석해 왔으며, 조사선의 간화와 성리학의 격물을 비교하는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간화의 철학 : 실제와 원리〉 〈송대의 간화와 격물〉 외 다수의 논문과 《간화선 수행의 성찰과 과제》 등 6권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