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깨달음에 대한 논쟁은 한국불교의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나라 불교특히 남방불교에서는 이런 황당한(?) 논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붓다께서는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을 아주 정교하게 순차적으로 나열해 놓았고 더우기 스스로가 어느 단계에 있는가는 자신 스스로 체득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 그리고 각 단계마다 깨부수어야 족쇄를 총 10가지로 나열해 놓았습니다. 또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구차제정이라고 하여 초선 - 비상비비상처 그리고 상수멸정까지 구분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가는 진정으로 수행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산을 오르는데 어느 능선까지 왔으며 이 길이 옳은가 틀린가를 구분할 줄 모른다면 그 등산자체가 불교적 수행은 아닐 것입니다.
"할 일과 청정범행을 다했고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라고 하는 아라한의 정형구에서 보듯이 열반에 이르는 길은 제삼자가 인정해주거나 승인해주거나 또는 허락받는게 아닌 오직 개인 스스로의 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장에서는 깨닫지 않았는데 깨달았다고 거짓말을하면 승가에서 쫓아낼 정도로 엄격한 윤리기준을 제정해 놓기도 했습니다.
깨달음이 변화하고 발전하여 왔다는 말에 제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는 궁극적 진리는 단 한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는 자신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 옛 선인들이 걸어갔던 길이 묻히고 잊혀진 것을 붓다 자신이 발견했다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명명백백합니다. 또한 시대별로 종파별로 다양한 언어로 깨달음을 표현하고 말하는 것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측면에서는 내것만이 최고이고 진짜라고 주장하는 아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이 촉발시킨 현재의 깨달음 논쟁은 교학적으로나 수행적으로나 불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맞다고 보지만 그래도 그것은 선종이라는 한 종파에 국한된 문제일 뿐 불교라는 큰 울타리 전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더우기 니까야를 소의경전으로 삼는 남방권하고는 천리만리 떨어진 남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대승불교 특히 선불교 그중에서도 한국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큰 틀에서의 비판의 글은 홍사성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주옥같은 글을 이미 발표했습니다. 그러니 연꽃님의 엉터리 글은 일고의 값어치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분의 말처럼 은근슬쩍 다리하나 끼워넣어서 잘난체 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 이런게 한두번도 아니니 애써 무시해 버리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초기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극히 단순합니다만...
열반 = 불이 꺼진 상태. 삼독심 제거
깨달음 = 사성제를 여실히 아는 것
따라서 지금 한국불교에서 일어난 깨달음 논쟁은 선불교라는 종파 내부의 문제로 보면 간단합니다. 굳이 외부인들 특히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이 애써 나서거나 끼어들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번 말씀드리지만 니까야는 18-20여개 부파중의 하나였던 상좌부라는 부파가 전승한 경전입니다. 또한 니까야는 출가주의를 지양한 수행승들의 지침서일 뿐입니다. 남전 북전이라고 하여 아가마(아함경)도 니까에 못지 않은 초기불교의 한 축을 이어가고 있는 경전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대승 비불설에 대한 여러 말들이 있지만 개인적인 결론은 이렇습니다.
"붓다께서 직접 설하시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비불설(비친설)이지만 붓다의 친설을 담았다는 측면에서는 불설이다."
많은 한국불자들이 선불교에 대해서 뭔가 약간씩은 오해를 하고 있는듯 합니다만 중국에서 일어난 선불교는 중국불교의 한 종파에 불과합니다. 사실 선불교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화엄 법화 정토종등등입니다. 고승전에 보면 수많은 고승들이 화엄 범화 정토종 계통입니다. 선불교는 중국의 6대 종파중에서도 극히 지분이 낮았지만 묘하게도 한국에서 조계종이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다보니 선불교의 위상이 굉장히 높아 보이는 착시현상을 겪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분들이 가장 폭넓게 믿고 있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선불교가 지양하는 진리도 덕목도 아닙니다. 아미타불은 선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이 아닙니다.
유독 선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논쟁이 나오는 것은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짬뽕하여 태동할 당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수행하고 체득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극히 개인적인 아주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가라는 즉 깨달음을 스승에게 인가받고 몰래 스승과 제자만이 법통을 물려주는 도교식의 수행법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문자에 매이지 말라고 하면서도 책장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넘쳐나는 선불교의 고승들의 저서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는지요? 바로 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의 체험이라는 것을 놓고서 마치 그게 최고이고 그것만이 유일한 것이라는 아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열반을 지양하는 불교적 깨달음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비판 받아도 마땅한 것입니다. 차라리 도교적인 깨달음을 불교라는 것을 통해서 얻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방권의 수많은 논서들은 궁극적 진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훼손 또는 변질시키지 않은채 오직 궁극적 진리에 대한 해설 또는 쉽게 풀어놓은 것이거나 또는 철학적 교리적으로 깊이를 더한 것에 불과합니다. 절대로 궁극적 진리를 변형시키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불교를 철학적 교리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지 결코 변질 시키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국화 된 중국불교 특히 선불교는 불교를 변화시킨게 아니라 변질 시킨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변화와 변질은 180도 다른 것입니다. 변화는 궁극적 진리와 본체를 발전시키는 것이지만 변질은 상해서 못 먹는 것입니다.
정말로 한국의 선불교(조계종)이 변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통불교니 원융이니 하면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등등 남의 소의경전을 훔쳐다가 짬뽕을 시키지 말고 원리원칙대로 조사들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조사교이든 혜능교이든 알아서 할 일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제쳐두고 조사들의 가르침을 가져와서 세치 혀끝으로 말장난이나 하는게 불교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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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에 충실하되 변화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원칙을 무시하고 변질된다면 그건 불교라고 하기보다는 혜능교 조사교 등등으로 불러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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