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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Pāli) 문헌에 나타난 성인(聖人)의 의미와 그 해석에 대한 일고찰

실론섬 2016. 3. 24. 17:57

빨리(Pāli) 문헌에 나타난 성인(聖人)의 의미와 그 해석에 대한 일고찰

서현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명상학전공 박사과정수료.

 

I 머리말. 

Ⅱ 성인에 대한 이해. 

Ⅲ 사향사과의 성립. 

Ⅳ 맺음말.

 

요약문 

빨리 문헌에서 말하는 성인은 사향사과를 말한다. 특히 사향사과에서 과를 성취한 사성인은 

수행의 단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성인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단초는 

빠른 시기의 빨리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다른 관점에서 이들을 

구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사향사과에서 사향과 사과를 묶어서 생각하지 않고 사향설을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성인에서 사후의 생천과 

연관되어 있는 일래와 불환은 현세에서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불교의 본지도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도 아니며, 성립과정에서도 예류와 아라한 사이에 후대에 유입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아울러 사성인의 정의설명에서 몇 가지 부합되지 않은 점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현세에서의 완전한 열반을 강조하였지만, 아울러 삼계윤회와 생천 또한 부정한 

것은 아니다.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지 못하면 누구라도 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윤회하는 과정에서 삼계윤회와 생천은 불가피한 전제이다. 그리고 사성인의 계위성립설에 

있어서도 이들의 해석을 논증할만한 근거자료가 빨리 문헌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일래자에서 엷어지는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은 감각적 욕망의 탐욕, 악의 그리고 무명을 

생기게 하는 근원적인 뿌리이므로, 열 가지 족쇄와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향사과와 

사성인은 고층문헌에서부터 전체 빨리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는 붓다에 의한 바른 

교설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빨리 문헌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본다.

 

Ⅰ. 머리말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nibbāna)이며, 열반은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탐진치가 소멸된 아라한은 수행의 결실이자 완성이다. 아라한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고통의 

종식을 이루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아라한과 더불어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성인의 

범주는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로, 이들은 주로 빨리 문헌에서 불⋅법⋅승 

가운데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범부로 

일컬어진다. 또한 이 여덟 사람 가운데 과(果)를 성취한 네 사람을 사성인, 즉 예류자(預流者, 

Sotāpanna, Stream Winner), 일래자(一來者, Sakadāgāmi, once Returner), 불환자

(不還者, Anāgāmi, Never Returner) 그리고 아라한(阿羅漢, Arahat,Noble one)이라 한다.

 

이 사성인은 열 가지 족쇄의 단계적인 제거에 따라 차별되는 경지이므로, 열 가지 족쇄제거를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열반의 성취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성인의 이해는 

수행의 성취과정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의 깨우침을 

강조하는 우리불교 현실에서는 성인에 대한 관심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사성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어왔다.1) 이러한 연구들은

사성인의 위상에 대해서 문헌적으로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 이필원(2008). 예류과에 대한 고찰 ,「아시아연구」창간호, 경북대학교아시아연구소; 
   이필원(2009). 일래에 대한 고찰 ,「佛敎硏究」제 31집,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한상희
   (2008).「초기불교에 나타나는 聖人의 성취와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석사학위논문; 眞野龍海(1972). 一來に ついて ,「佐藤博士古稀記念 : 佛敎思想論叢」, 
    東京, 山喜房佛書林; 藤本 晃(2005). 四沙門果說の 成立と構造 ,「印度哲學佛敎學」第20; 
   藤田宏達(1959). 四沙門果の 成立に 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第14(7-2); 三友健容
   (1979). 四沙門果說の 成立に ついて ,
  「日本佛敎學會年報」第45; Jun Young, Jeong   (2002). “A textual study of 
   material relating to Vipassanā meditation as found in Pāli  Buddhist 
    scriptures”, 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Gary Ow(2000). 
   “Ānanda's path to becoming an arahat-How he overcame the ten fetters to attain the four 
   stages of enlightenment”, California institute of integral studies; YiRu(2005). “A Study of 
   Nature, Characteristics and the Types of Stream-Winner(Sotāpanna) According to the Pali 
   Canon”, 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등.

 

이 성인연구 가운데 특히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빨리 

문헌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서부터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이론에 대한 단초가 나타나고 

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성립이론에 대해 다양한 논의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된 후에 그로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거나, 

사성인은 불멸후에 네 단계의 계위로 정비된 것이지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이 아니라고 보는 경우

등이다. 또한 일래자나 불환자의 경우, 생천(生天)이나 삼계윤회가 전제되는 이 사상 자체도 

불교가 아닌 우파니샤드의 해탈과 윤회 그리고 생천 사상에서 취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본고는 성인들에 관한 이러한 해석들을 재고찰하는데 목적을 둔다. 그 일환으로 빨리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성인의 의미 그리고 성인의 범위로서의 사향사과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필 것이며, 아울러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성립이론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에 대하여 재고찰을 

할 것이다. 본 연구는 빨리 문헌 가운데 니까야(Nikāya)를 주요 텍스트로 하고, 논장과 주석서 

등을 보완자료로 사용한다. 이러한 성인연구는 성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자행(自行)의 

성격을 띠고 있는 불교수행에서 올바른 성인관(聖人觀)을 확립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Ⅱ. 성인에 대한 이해

 

1. 성인(Ariyapuggala)의 의미

성인은 주로 범부와 대비되어 설명되고 있다. 성인을 의미하는 ‘아리야 뿍갈라(ariya-puggala)’

는 고귀함을 뜻하는 ‘ariya’와 사람을 의미하는 ‘puggala’가 합쳐진 것으로, 이는 ‘고귀한 사람, 

성인(聖人) 또는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 등을 의미한다.2) 물론 문헌에서는 ‘뿍갈라’ 

없이 단지 ‘아리야’만으로 고귀한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2) 전재성 편저(2005) p.176;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1986) pp.77-8; G. P. 
   Malalasekera(1966) 2Vol. p.80; Yi Ru(2005) p.42. 아리야(ariya)는 베다어(Vedic) 아르야
   (ārya)에서 유래된 단어이나 그 어원은 불분명하다. 아리야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아리안 족과 관련한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불교적인 의미이다. 아리안 족과 
   관련해서 아리야는 아리안 족을 의미하고, 사회적으로 고귀하고 구별되며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아리안 족의 관습, 이념과 조화를 이루며 아리안에게 
   존경받고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그런가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빨리(Pāli)의
   ariya는 주로 (인명 앞에 붙이는)경칭의 의미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고귀함, 성스러움’을 
   뜻한다.

 

『숫타니파타(Sutta-Nipāta)』는 아리야를 현상(dhamma)에 대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잘 아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3) 여기서 현상이라 함은 ‘진리, 열반, 오온 그리고 즐거움과 

괴로움등’을 말한다. 그런가하면 범부의 빨리어는 뿌투자나(puthujjana)로, 이는 ‘보통사람, 

속세의 사람’을 뜻한다.4) 범부는 주로 니까야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assutavā puthujjana)’라는

표현으로, ‘잘 배운 고귀한 제자(sutavā ariyasāvaka)’와 대치되어 나타난다.5) 특히 잘 배운 

고귀한 제자라 함은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의미한다. 물론 성인은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 

이외에도 성인의 성취 노력과 방법 그리고 법을 이해하는 정도 등에 따라 빨리 문헌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다.6)

5) SN Ⅱ p.151, Ⅲ pp.42-47, Ⅴ p.362; MN Ⅰ pp.135-136, Ⅲ pp.227-228 등. 
6) MN Ⅰ p.477[일곱 유형]; AN Ⅳ p.373과 Pug pp.73-74[아홉 유형]; SN Ⅴ p.204
   [열 둘의 유형] 여기서 일곱 유형의 성인은 ①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 
   ②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③몸으로 체험한 자(kāya-sakkhī) ④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āga-vimutta) ⑤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 ⑥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ippatta) ⑦지혜로 해탈한 자(paññnāvimutta)이다. 아홉 유형의 성인은 사향사과의 
   여덟 유형에 ‘gotrabhū(種姓者)'가 추가된다. 또한 열 둘 유형의 성인은 아라한, 불환자의 
   다섯 유형, 일래자, 예류자의 세 유형, 법을 따르는 자 그리고 믿음을 따르는 자로 구성된다.

 

이들 성인과 범부의 구분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홉 종류의 

사람에서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과 범부를 설명하고 있다.7) 뿐만 아니라 성인과 범부의 구분은 

논장을 통해서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뿍갈라빤냣띠(Puggalapaññatti)에 의하면 

범부는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해 예류도에도 들지 못하였으며 유학도 무학도 아닌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성인은 유학과 무학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7) AN Ⅳ p.372

 

A. 무엇이 범부인가? 범부는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해, 그러한 현상들(dhammānaṃ)을 

제거하기 위한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을 범부라고 한다.

Pug p.12. Katamo ca puggalo puthujjano: Yessa puggalassa tīṇi saṁyojanāni appahīnāni na ca 
tesaṃ dhammānaṃ pahānāya paṭipanno ayaṃ vuccati puggalo puthujjano.

 

B. 무엇이 범부와 성인인가? 여덟의 성스러운 사람이 성인이고, 나머지는 성인이 아닌 
범부이다.
Pug p.14. Katamo ca puggalo ariyo: aṭṭhāriyapuggalā ariyā, avasesā puggalā anariyā

C. 무엇이 배워야 할 사람인가? 도(magga)가 구비된 네 사람과 과(phala)가 구비된 세 사람은 
배워야 할 사람(sekha)이다. 아라한은 더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asekha)이다. 나머지는 
배워야 할 사람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도 아닌 사람이다.
Pug p.14. Katamo ca puggalo sekho: cattāro maggasamaṅgino tayo phalasamaṅgino puggalā sekhā, 
arahā asekho, avasesā puggalā neva sekhā nāsekkhā.

본 인용문 A의 경우는 예류도에도 들지 못한 사람을 범부라 하고 있다. ‘세 가지 족쇄를 제거
하기 위한 길(paṭipanno)’이란 예류도 또는 예류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1) 또한 C의 인용문에 
의하면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無學)이며, 아라한을 제외한 사향사과의 
나머지 일곱 사람은 배워야 할 사람(有學)이다. 그리고 범부는 유학도 무학도 아닌 사람이다.
11) 열 가지 족쇄는 ①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③계율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 ④감각적 욕망의 탐욕(kāmarāga) 
   ⑤악의(惡意 또는 嫌惡, byāpāda) ⑥색계에 대한 탐욕(色貪, rūparāga) ⑦무색계에 대한 
   탐욕(無色貪, arūparāga) ⑧자만(自慢, māna) ⑨들뜸(uddhacca) ⑩무명(無明, avijjā)를 
   말한다. 이 가운데 처음 세 가지, 즉 ①~③을 세 가지 족쇄라 한다.

 

따라서 성인은 예류도에서 부터 아라한과에 이르는 여덟의 성스러운 사람[=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을 말하며, 이들은 유학과 무학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이 아닌 나머지는 범부이다.

또한 인용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범부와 성인은 세 가지 족쇄의 제거 상태에 따라 구분되어지므로,
열 가지 족쇄의 첫 번째인 20가지 유신견이 있으면 성인의 흐름에 들 수가 없다.12) 또한 마음이 
탐욕에 오염된 것(貪染, sārāga)이 족쇄이므로,13) 마음이 번뇌로 오염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yathābhūtaṃ pajānāti)’ 마음의 수행(cittabhāvanā)이 있는지 없는지,14) 오온과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로 구분된다.15) 그러므로 성인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아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도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하여 ‘내가 있다(asmi ti)’라는 자아관념
[=유신견에 의한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과 단견(斷見,uccheda-diṭṭhi)]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열 가지 족쇄의 첫 번째인 유신견은 모든 견해를 일으키며 족쇄를 이끌기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면 성인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12) SN Ⅳ pp.285-287. 20가지 유신견이란 오온[色受想行識]의 각각에 대한 네 가지 형태의 
    자아관념을 말한다. 즉 색의 경우, 색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색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rūpavantaṁ vā attānaṁ), 자아 가운데 색이 있다고 
    여기는 것(attani vā rūpaṁ) 그리고 색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rūpasmiṁ vā 
    attanaṁ)을 말한다. 나머지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이다. [MN Ⅰ p.300, Ⅲ pp.17-18; SN Ⅲ 
    pp.15-17, p.46, p.57, pp.96-98, p.102, Ⅳ p.287 등] 
13) AN Ⅰ p.264. 
14) AN Ⅰ p.10. 
15) SN Ⅲ pp.81-82[오온]; AN Ⅰ p.71[사성제].

 

이와 같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조건 가운데 하나인 오온에 대한 집착[오취온]과 유신견 

그리고 사성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분명한 앎’의 여부는 성인과 범부를 구분 짓는 전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번뇌의 잔재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2. 성인의 범위로서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빨리 문헌에서 여덟 사람의 성인은 사향사과와 사쌍팔배라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 둘은 용어의 표현도 다르지만 용례 또한 다르게 쓰이고 있다. 사향사과는 ‘네 종류의 길[道]

로 나아가는 사람[四向]과 네 종류의 과(果)를 확립한 사람(cattāro ca paṭipannā, cattāro ca 

phale ṭhit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길로 나아가는 네 사람이란 예류과⋅일래과⋅불환과⋅

아라한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즉 예류도⋅일래도⋅불환도⋅아라한도를 말한다. 

그리고 과를 성취한 네 사람은 예류자⋅일래자⋅불환자⋅아라한을 말한다. 이는 빨리 문헌에서 

설명되는 사향사과의 정형적인 표현이다.

 

예류자와 예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일래자와 일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불환자와 불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아라한과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나아가는 자이다.

AN Ⅳ p.204, p.292, p.372; DN Ⅲ p.255; Ud p.56; Pug p.73. Sotāpanno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sakadāgāmī sakadāgāmī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anāgāmī anāgāmī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arahā arahāttāya paṭipanno. 

 

본 인용문에서와 같이 사향사과는 여덟 사람의 성인을 설명할 때 주로 나타난다. 이렇게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설명한 위 인용문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후지모토 아키라(藤本 晃)는 

“사문과 뿐만 아니라, 그 과로 향하는 단계(向)가 더해져, 사과와 사향을 아울러 설명하는 

사향사과설이 경전에는 보여진다”고 설명한다.18) 이 설명을 통해 후지모토 아키라는 

사향사과설이 경전에서 일관되게 언급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18) 藤本 晃(2005) p.90. 四門果だけでなく その果に向かう段階(向)も加えて四果と四向
    を並べ說く四 向四果說も經典には見られる.

 

그런가하면 사쌍팔배는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cattār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으로,19) 이 용어는 주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가운데 고귀한 승(僧, 

saṅgha)의 설명에서 나타나고 있다.20) 승가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정형문으로 설명되고 있다.

19) AN Ⅱ p.34, p.56; SN Ⅰ p.220, p.233, Ⅳ p.272; DN Ⅲ p.5; It 90게; Sn 227게. 
20) 빨리어 상가(saṅgha)는 ‘무리, 모임, 집합, 교단, 승단, 승가(僧家)’의 뜻이다.[전재성 
    편저(2005) p.629] 그러므로 논자는 상가(saṅgha)를 승가로 번역하기로 한다.

 

승가는 청정한 믿음을 갖춘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이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 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 받을만하며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에서 위없는 공덕의 복밭이다.

SN Ⅱ p.69; AN Ⅱ p.34, Ⅲ p.286, p.315, Ⅳ p.406, Ⅴ p.183, p.330 등. Saṅg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s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uj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ñāya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sāmīci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yadidaṃ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purisapuggalā, 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āhuṇeyyo pāhuṇ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ā t

 

본 인용문에서와 같이 사쌍팔배는 고귀한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여덟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여덟 성인을 나타내는 사향사과와 사쌍팔배라는 두 표현의 쓰임이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상윳따니까야야자마나숫타(Yajamānasutta)앙굿따라 니까야의 

「앗따뿍갈라숫타(aṭṭhapuggalasutta) 는 승가를 구성하는 여덟 사람을 사쌍팔배가 아니라 

사향사과로 표현하고 있다.22) 이와 같이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향사과에 대해, 후지모토 

아키라는 ‘승가의 다른 이름’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23)

22) SN Ⅰ p.233; AN Ⅳ p.292.
23) 藤本 晃(2005) p.90.

 

Ⅲ. 사향사과의 성립

 

1. 사향과 사과의 성립에 대한 논의

이렇듯 사향사과가 빨리 문헌에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으나, 학자들은 사향사과의 성립설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다. 몇명의 학자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사향사과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학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사향사과는 최초경전의 편찬 때부터 이미 성립되어있었다는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사향은 

사과가 성립한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의견이다. 전자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미토모 켄요우(三友健容)와 후지모토 아키라 등이며, 후자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후지타 

코타츠(藤田宏達)와 이필원 등이다.

 

먼저 전자의 설을 주장하는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최고의 경전이라는 숫타니파타에서도 사쌍팔배라는 용어가 보이고, 예류⋅일래⋅불환⋅아라한의 

사단계가 향과 과로 나뉘어서 논해지고 있기 때문에, 꽤 일찍부터 이른바 사향사과의 이론이 

성립돼 있었다."24)

24) 三友健容(1979) p.51.

 

"사사문과설의 성립을 경전의 성립 순으로 추측해보더라도, 이 설이 고층(古層)인 운문(韻文)

경전을 포함한 다섯 니까야의 전체에 걸쳐있고, 더구나 처음부터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논의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경전이 편찬되었던 시기에 사사문과설도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경전을 설하고 보급한 석존 자신이 처음부터 사사문과를 전부 

설명했다고 고찰하는 편이 자연스럽다."25)

25) 藤本 晃(2005) p.98

 

이 두 학자는 「숫타니파타」에서도 사쌍팔배라는 용어가 보이며 고층(古層)인 운문(韻文)

경전을 포함한 다섯 니까야 전체에 걸쳐 사향사과가 향과 과로 나뉘어서 명확하게 논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는 경전 편찬 시부터 이 설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며 세존 자신이 처음부터 

설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후지타 코타츠는 특히 사향의 성립 시기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비교적 고층에 속한다고 보는 경전에서 사향사과가 언급되는 예가 있지만[SN. Ⅰ.233; AN.Ⅳ.

292 등], 이것만으로 사향사과설이 고층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된 후에, 그로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26)

26) 藤田宏達(1959) p.472, note.1.

 

이와 같이 후지타 코타츠는 아무리 고층에 속하는 경전에서 사향사과가 언급되어 있다고는 

하나, 이것만으로 고층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향설은 후대에 사과설로

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필원은 이와 같은 후지타 코타츠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여하튼 Dhp와 Thī 등에 향(向, paṭipanna)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과 사향사과를 말하고 

있는 Sn의 Ratanasutta와 SN의 Sakkavagga의 성립이 Dhp/Thī보다 빠르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늦게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藤田宏達이 말한바 대로 사과(四果,cattāro 

phalāni)가 먼저 성립되고, 나중에 어떤 시기에 사향(四向, cattaro paṭipannā)설이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는 설이라고 생각된다."27)

27) 이필원(2008) pp.40-41.

 

이처럼 이필원은 향(paṭipanna)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담마빠다(Dhammapada)』와 
『테리가타(Therīgāthā)』가 사향사과가 언급된『숫타니파타』의 「라따나숫타(Ratanasutta)」
와『상윳따니까야』의 「삭카상윳따(Sakkasaṃyutta)」 보다 성립이 더 빠를 가능성이 있다고 
하고 있다.28) 그래서 사향설이 사과설처럼 초기에 일찍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한 논증으로 ‘ 라따나숫타 의 경우 사향사과의 사람들로 구성된 
승가에 관한 게송이 전체 17게송 가운데 7게송으로 다른 경전에 비해 많은 횟수이기 때문에, 이 
경전은 승가가 집단으로 정비된 후나 또는 정비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일찍 
성립된 경전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28) Sn 227게의 내용은 ‘ye puggalā aṭṭhasataṃ pasatthā,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칭찬받는 
    선한 여덟 사람, 이들이 네 쌍이다)’이다. SN Ⅰ p.233의 내용은 ‘Cattāro ca paṭipannā, 
    cattāro ca pahale ṭhitā. (네 종류의 길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과 네 종류의 과를 확립한 
    사람)’이다.

이러한 두 상반된 주장들에 대해, 논자는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경전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경전도 확실하지가 않다. 단지 앞서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인용문에서와 같이『숫타니파타』와 운문경전을 일반적으로
고층경전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특히 전재성은『숫타니파타』의 고층성을 열 가지로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29) 그러므로『담마빠다』와『테리가타』의 성립시기는『숫타니파타』와 
『상윳따니까야』의「삭카상윳따」 보다 더 빠를 가능성이 있으며, 사향설은 사과 성립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고 보는 이필원과 후지타 코타츠의 주장은 구체적인 논거제시가 충분
하지 않다.
29) 전재성 편저(2004) pp.13-14; 최종남 외(2011) p.25

논자 또한 이들의 주장을 논증할 만한 직접적인 내용을 빨리문헌에서 찾지 못하였다. 오히려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과 같이 숫타니파타에서는 사쌍팔배의 용어와30) 
일래자(sakadāgāmi)를 제외한 예류자와 불환자 그리고 아라한의 세 성인이 설명되고 있다.31) 
여기서 예류자(sotāpanna)는 명칭으로 언급되지 않고, 예류자의 특성인 ‘세 가지 족쇄로부터 
벗어남과 더불어 네 가지 악한 운명과 여섯 가지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승가의 보배’로 나타난다.
32) 이처럼『숫타니파타』는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30) Sn 227게. Ye puggalā aṭṭha sataṃ pasatthā,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 여기서도 
    사쌍팔배는 승가를 이루고 있는 공양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다. 
31) Sn 230게, 231게, 727게, 765게 그리고 Sn pp.139-150; Dhp 178게. 
32) 네 가지 악한 운명(catūhapāyehi)이란 지옥(niraya), 축생(tiracchāna), 아귀계(petti-
    visaya), 아수라(asura-kāyā)를 말한다. 여섯 가지 큰 죄악(cha abhiṭhānāni)이란 
    ①어머니를 살해하고(mātughāta), ②아버지를 살해하고(pitughāta), ③아라한을 살해
    하고(arahataghāta), ④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고(lohituppāda), ⑤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saṃghabheda)의 다섯 가지 무간지옥에 태어날 업보(ānantariyakamma)와 
    ⑥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aññasatthāra'uddesa)을 말한다.

 

그리고『담마빠다』와 『테리가타』에서도 향과 과라는 단어가 보이고 있다.33) 붓다의 
가르침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담마빠다』는 전체적으로 내용이 은유적이며 간결하다. 
그래서 성인에 관한 내용 또한 직설적이거나 상세하지 않으며 언급횟수도 적은 편이긴 하지만 
향과 과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테리가타』도 마찬가지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3) 향(向)으로 표현된 paṭipanna는 ‘따라가는, 나아가는, 실천하는, 도달하는’의 뜻이다.
    [전재성 편저 (2005) p.456]

A. 지상에서의 유일한 왕권보다, 천상계로 가는 것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 예류과
(sotāpattiphala)가 탁월하다. Dhp 178게.

B. 화살의 제거를 알아서 나는 길을 선언했으니, 이렇게 길을 향해 나아간다면(paṭipanna) 
그대들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게 될 것이다. Dhp 275게. 

 

C. 그대들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여래는 단지 선언하는 자이다. 길을 향해 나아가는

(paṭipanna) 사람과 선정 수행을 하는 사람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Dhp 276게

 

D. 부정한 길[邪道]로 나아가는(paṭipanna) 나에게 당신은 고귀한 도(ariyamagga)를 갖게 

하였습니다. 벗이여, 당신에게 목욕하는 옷(浴衣)을 드리겠습니다. Thī 245게.

 

본 A의 인용문은 ‘쏘따빳띠팔라(sotāpattiphala)’인 예류과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B, C, D의 

인용문에서는 정확하게 사향[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그리고 아라한도]의 하나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빠띠빤나(paṭipanna)’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여진 용어가 

아니라, 성인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향(向, paṭipanna)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성인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면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고 악마의 속박과 그리고 부정한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담마빠다』와『테리가타』에서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성인과 관련된 

향과 과가 언급되고 있다. 뿐만아니라『숫타니파타』와『우다나(Udāna) 그리고『상윳따니까야』

삭카상윳따등에도 사향사과라는 용어와 그 여덟 사람이 설명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네 종류의 니까야에서는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 설명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후지타 

코타츠와 이필원의 주장과 같이 사과가 먼저 성립되고 나중에 어떤 시기에 사향설이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는 의견은 설득력이 약하다. 따라서 ‘사향사과설은 고층인 운문경전을 포함한 다섯 

니까야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논의 대상은 아니라고 보는’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에 

논자는 더 무게를 둔다.

 

이제까지 사향사과의 용례와 성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쌍팔배 또는 사향사과의 여덟 성인은 

주로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사향은 사과의 성립 후에 파생적

으로 고안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증할만한 근거자료를 문헌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반면 

사향사과가 일찍부터 언급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주는 단초들은 숫타니파타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2. 예류도[향]에 대한 논의

앞서 성인은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인의 범위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이필원은 니까야에 한정해서 예류도는 성인이 아니며, 불교에서 

하는 성인은 예류과를 획득한 수행자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과설이 먼저 성립된 

후에 각 과를 지향하는 수행자를 향(向, patipanna)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예류향은 성인의 

계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8)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류도란 삼보[佛法僧]에 대한 불괴의 믿음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는 견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된 후에 그로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므로, 

본래 성인은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뿐이라는’ 후지타 코타츠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39)

38) 이필원(2009) p.24. 이필원은 이 논문 각주에서 “니까야에서 사예류지가 설명될 당시에는 
    예류향이란 개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아 어떤 상태가 예류향인지는 의문이지만, 예류향이란 
    삼보에 대한 불괴의 믿음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구사론」
    과 같은 논서의 이해와는 달라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다음 각주에서 사향사과설은 사과설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후지타 코타츠
    (藤田宏達, 1959)의 견해를 따르면, 본래 성자의 계위는 사과(四果)인 예류과⋅일래과⋅불환과⋅
    아라한과만이다. 이들 네 부류의 수행자가 바로 성자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각 과를 지향하는 수행자를 ‘向, patipanna’으로 설정한 것이기에, 예류향은 
    성자의 계위에 해당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39) 藤田宏達(1959) p.472. note.1. 四向說は 四果說の成立した後に それより派生的に考出さ
    れたものと見られる.

 

이러한 논의에 대한 고찰로 먼저 예류도(sotāpatti-magga)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Ⅱ장. 2절. 성인의 범위로서의 사향사과>에서 설명하였듯이 니까야에서는 사향(四向)을 

가 아니라, ‘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a)’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하면「아비담맛따상가하(Abhidhammatthasaṅgaha)와「빠띠삼비다막가

(Paṭisambhidhāmagga)는 사향을 주로 도(magga)로 표현하고 있다.40)

40) Abhidh-s p.4; Paṭis Ⅰ pp.72-73. 

 

예류도에서 예류의 빨리어인 소따(sota, 흐름)는 여러 용례로 쓰이기도 하나,41) 예류를 나타낼 

때의 흐름은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 magga)를 의미한다.42) 그래서 예류자(sotāpanna)

란 팔정도를 갖춘 사람을 말하며, 예류도란 ‘팔정도를 실현하기 위한 길로 들어선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예류도에 들어선 사람은 두 가지 형태의 사예류지 가운데 특히 ‘참사람과 사귀고,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리고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원리를 갖춘 사람이다.43) 그래서 사예류지를 갖춘 예류도는 ‘견해의 성취(diṭṭhisampadā)’로 

표현되고 있으며,44) 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진 견해성취자(diṭṭhisampanna)를 예류자라 

한다.45)

40) Abhidh-s p.4; Paṭis Ⅰ pp.72-73. 

41) 이 흐름은 여러 용례로 쓰이고 있다. 주로 ①팔정도의 흐름으로[SN Ⅴ p.347] 
    ②존재(bhava) 또는 윤회(saṁsāra)의 흐름으로[SN Ⅰ p.15] ③갈애(taṇhā)의 
    흐름으로[SN Ⅳ p.291] ④의식(viññāṇa)의 흐름[DN Ⅲ p.105]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1986) p.725에서도 이 네 가지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법(dhamma)의 흐름이 예류의 기원적 의미라고 설명
    하기도 한다.[藤田宏達(1959) p.465] 
42) SN Ⅴ p.347. 
43) 사예류지는 두 종류의 형태로 설명되고 있다. ①참사람과 사귀고,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리고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다.[SN Ⅴ p.347; 
    DN Ⅲ p.227] ②부처님[佛]에 대하여⋅가르침[法]에 대하여⋅승가[僧]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과 그리고 계행[戒]을 갖추는 것이다.[SN Ⅱ pp.69-71, Ⅴ pp.342-344, 
    pp.371-372, pp.387-389, pp.396-398, p.404, p.407; AN Ⅱ p.56, Ⅲ p.212, p.285, Ⅳ 
    p.406; DN Ⅲ p.227 등]. DN Ⅲ p.227에서는 ①을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
    (sotāpattiaṅga)로, ②를 예류과를 얻은 자의 구성요소(sotāpannassa aṅga)로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사예류지는 예류도와 예류과에 들기 위한 기본원리로 설명되고 있지만, 
    이는 네 성인 모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기본원리를 
    잘 수지하면서 수행한다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선정과 지혜를 통해 족쇄
    에서도 벗어나 종극에는 열반을 얻게 된다.[SN Ⅴ pp.360-362] 
44) AA Ⅲ p.414.
45) MA Ⅳ p.107.

 

그러므로 예류자는 견해에 해당하는 세 가지 족쇄에서 벗어난 사람을 말하며, 예류도는 이러한 

족쇄들을 제거해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46) 이는 예류도에 나아가는 순간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를 포함한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과(phala)를 실현해 나아가기 때문이다.47) 

이렇게 도의 마음에 즉각적으로 뒤따르는 과의 마음으로 도가 만들어낸 그 경지의 해탈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같이 비록 여덟의 성인에서 도와 과가 따로 분리되어 언급되고 있지만 도와 

과의 시간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도와 과는 수행성취에서 수행의 결실

[果]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그 결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별개로 구분될 수 없는 연속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앞서뿍갈라빤냣띠에서도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해 

예류도에도 들지 못한 사람은 범부이며, 나머지는 성인’이라고 하였다.

46) 대림ㆍ각묵 공역(2004) p.166.[관련 내용: p.171, p.393] 이 내용들에 의하면, 도
    (magga)의 도(magga)의 마음은 정신적인 오염원들을 제거하거나 엷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도의 마음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과(phala)의 마음은 도가 만들어낸 그 
    경지의 해탈을 경험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각각의 네 가지 도는 그 과위에 해당하는 
    족쇄들을 제거해 나아간다. 
47) Paṭis Ⅰ pp.71-73.

 

이처럼 예류도에 나아가는 순간 사예류지, 팔정도와 같은 여러 조건들을 갖추게 됨으로써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그 계위에서 수반되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해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예류과로 넘어가기 직전의 예류도 또한 세 가지 족쇄가 제거되고 사예류지를 갖추고 팔정도를 

실현해 나아가는 길에 들어선 사람이므로 예류도[향]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류도가 포함된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은 고귀한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공양⋅대접⋅보시⋅존경을 받을 만하고 세상에서 가장 위없는 복밭(puññakkhetta)’이며,48) 지혜와 

계행을 갖추고49) 그리고 도를 바르게 잘 닦는 사람들로 지칭된다.50) 또한 빨리 문헌과 주석서 

등에서는 수행의 여러 성취 형태에 따라 일곱 종류의 성인을 설명하고 있다.51) 이 일곱 성인

가운데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와 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는 ‘예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한 길로 나아가는 자(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또는 예류도의 순간에

(sotāpattimaggakkhaṇe)’ 성취되는 자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여덟 성인의 첫 번째인 

예류도[예류향] 또한 성인임을 알 수 있다.

48) AN Ⅱ p.34, Ⅲ p.36, p.86, p.315, Ⅳ p.406, Ⅴ p.183, p.330; DN Ⅱ p.94, Ⅲ p.227. 
49) SN Ⅰ p.233. 
50) DN Ⅱ p.94, Ⅲ p.227. 
51) MN Ⅰ pp.477-479; Pug p.15; Vism p.659; Nyanatiloka Thera(1980) p.26f. ①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 ②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③몸으로 체험한 자(kāya-
    sakkhī) ④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āga-vimutta) ⑤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 
    ⑥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ippatta) ⑦지혜로 해탈한 자(paññnāvimutta)이다.

 

이제까지 여러 문헌들을 통해 예류도의 상태, 역할 그리고 수행성취 정도들을 살펴 보아도 

예류도가 성인이 아니라는 예증은 희박하다. 또한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각 과를 지향하는 

수행자를 향(向, patipanna)으로 설정했다는’ 이필원의 의견과 그리고 성인은 사과(四果)뿐

이라는 후지타 코타츠의 의견은 그 주장을 확인할만한 관련내용이 빨리문헌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우다나』를52) 비롯한 전체 니까야에서는 예류도를 포함한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이 명확히 언급되고 있으므로, 여덟 성인의 하나인 예류도[향] 또한 성인의 범주에 해당

한다고 볼 수 있다.

52) Ud p.56.

 

3. 사성인의 성립에 대한 논의

 

⑴ 사성인의 성립에 대한 문제점

사성인은 성인의 단계적인 계위(階位)로 빨리 니까야에서 정형화된 정의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53) 그러나 사성인의 계위 성립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사향사과의 성립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양한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성인 순차적인 계위는 처음부터 

정립된 것이 아니라 법을 전하는데 오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후에 수행의 계위로 정비된 

것이며, 불교의 본지도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도 아니라는 것’이 주된 견해이다.

53) AN Ⅱ p.238.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예류자가 되어 
    쉽게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정등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확정된 
    사람이다.[예류자]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일래자가 되어 한 번만 이 세상에 돌아와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게 된다.[일래자]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불환자]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번뇌를 소멸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아라한]. [같은 내용: SN Ⅴ pp.356-357, p.376, p.406; AN Ⅱ 
    p.88, Ⅳ p.12; DN Ⅰ p.156, Ⅱ p.92, p.251, Ⅲ p.107. p.132; MN Ⅰ p.34, 
    p.141, p.226, p.465 등]

 

이 주장의 배경은 특히 수행 계위의 정비과정에서 후에 유입된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일래자와 

불환자의 사후 생천사상이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여러 일본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되고 있다. 

특히 마노 류카이(眞野龍海)는 여러 학자들의 논점을 종합적으로 고찰함과 아울러 불교 이전의 

우파니샤드 사상과 비교하여 그 의미들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54) 반면 후지모토 

아키라는 위와 같은 논의가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사향사과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성인 또한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임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55)

55) 藤本 晃(2005) p.86.

 

따라서 사성인의 과위를 연구한 학자들의 논점과 그 배경들을 살며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과설은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이 아니라는 점이다.56) ‘현세에서 괴로움을 여읜 완전한 

열반을 강조한 붓다는 사후설이나 재생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생에 기대하는 

일래와 불환은 불설이 아니며, 현세에서의 여실지견의 해탈로 성취되는 예류와 아라한만이 

붓다의 본지에 가깝게 성립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에 대한 논증으로 학자들은 주로 

두 가지 경우를 예시하고 있다. 하나는 예류와 아라한은 현세에서 여실지견[있는 그대로

 

의 앎과 봄(yathābhūtaṁ ñāṇadassana)]을 실천하는 사람이다.57)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류와 아라한은 각각 독립된 품이 있는데 반해,58) 불환자는 한군데뿐이며59) 일래는 독립된 

품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니까야에서는 예류와 아라한을 서로 연계하여 대비시킨 

설명이 있으며 그리고 독립된 경(sutta)과 품(vagga)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래서 

예류와 아라한은 사과성립 이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며, 자연적인 연속으로 불교의 성격에 

따라 발생된 사상으로 보고 있다.60) 반면 일래와 불환은 재생에 기대하는 설이므로 이들과 

함께 구성된 사성인은 불설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56) 宇井伯壽(1965) pp.246-248; 眞野龍海(1972) p.332. 
57) SN Ⅲ p.160f[오취온], p.192[오취온], Ⅴ p.193f[오근], p.205[육근], p.208[다섯 
    느낌의 능력]. 오근⋅오취온⋅육근⋅다섯 느낌[sukkha, dukkha, somanassa, domanassa, 
    upekha]의 능력 발생에서 달콤함(assādañca)과 위험(ādīnavañca)과 소멸(nissaraṇañca)에 
    대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yathābhūtam pajānāti)’ 예류자이고, ‘있는 그대로 알고나서 
    집착 없이 해탈하면(yathābhūtam viditvā anupāda vimutto hoti)’ 아라한이다. 
58) SN Ⅰ p.14[아라한], p.160[아라한], Ⅲ p.73[아라한], p.161[아라한], p.202[예류자], 
    Ⅴ p.342[예류자]; AN Ⅲ p.429[아라한]; Dhp 90-99게[아라한]. 
59) AN Ⅲ p.421. 
60) 眞野龍海(1972) p.338.

 

② 사과설은 불교의 본지(本旨)가 아니라고 보는 점이다.61) 후나하시 잇사이(舟橋一哉)는 

재가도(在家道)에 의한 세간도(世間道)와 출가도(出家道)에 의한 출세간도(出世間道)에서의 

두 종류의 생천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재가도에서의 생천은 천락(天樂)을 위한 것이고, 출가도

에서의 생천은 생사(生死)를 여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류와 아라한이 불교의 본래적인 

것이지, 출세간도에서 일래와 불환이 수행의 완성을 내세에 기대하는 생천설로 다루어 진 것은 

사향사과설의 성립 과정이나 그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불교의 본지가 아니라고 한다. 또한 마노 

류카이는 일래와 불환은 우파니사드의 생천설과 그리고 불교의 현세에서의 증득과 열반이라는 

양사상이 그대로 사과설로 받아들여지고 유입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62)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내세관인 천도(天道, devayāna)와 조도(祖道, pitṛyāna)인 이도설(二道說)과 

재사(再死, punamṛtyu)의 사상이 사성인의 계위에 유입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61) 舟橋一哉(1954) pp.38-39; 眞野龍海(1972) pp.333-334. 
62) 眞野龍海(1972) pp.339-340; Dhp 126게, 174-177게. 물론 이도설 이외에도 제삼형
    (第三型)이 있다. 여기서 천도(天道)는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 가는 천상으로 다시는 
    퇴전하지 않는다. 조도는 선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천상에 나지만 다시 태내로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제삼형은 악업을 닦아 지옥 같은 악처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정승석 저(1998) pp.145-146

 

이에 대한 논증으로 마노 류카이는 빨리 문헌에 나타나는 [우파니샤드적]용어와 불환의 생천을 

예로 들고 있다.『담마빠다』의 「로카왁가(Lokavagga)」에서 나타나는 태양과 허공 같은 

용어와 천상왕래는 인도사상의 신앙이 불교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이는 우파니샤드의 이도설

에서의 생천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보시와 내세의 안락이라는 용어도 우파니샤드의 보시, 

조어, 복덕 등에 의해 생천이 약속된다고 하는 사상과 같다. 그리고 불환은 생천설로 표현되지만 

적어도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 다는 면에서는 아라한과 차이가 없다고 한다.63) 또한 

우파니샤드에서의 재사(再死, puna-mṛtyu)는 ‘한번만 태어난다는’ 의미에서는 일래와 통하지만,

재사하여 다시 천상에 생존하는 것(puna-mṛtymapajāyati)이므로 오히려 불환에 유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64) 따라서 마노 류카이 뿐만 아니라 일부학자들은 일래와 불환의 생천

사상을 우파니샤드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의 본지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63) 眞野龍海(1972) p.340. 아라한을 상징하는 설명어에서 ‘최후의 생이다(ayaṃ antimā 
    jāti)[SN Ⅴp.423], 최후의 몸이다(abtimadeha)[SN Ⅰ p.14], 미래의 존재(punabbhava)를 
    받지 않는다’ 라는 점에서, 이 점은 불환과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다. 
64) 眞野龍海(1972) p.344.

 

③ 사성인의 성립 순에서도 일부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공통적인 견해들을 보이고 있다. 후지타 

코타츠는 계위에 있어서도 일래는 사과 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된 계위로, 이는 예류와 불환을 

계적으로 결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65) 그리고 후나하시 잇사이는 오랜 수도과정에서 

일래와 불환이 유입되어 사성인의 계위가 형성되었으며, 예류는 독립으로 설해졌으며 바로 

이어서 일래와 불환이 설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류는 일래와 불환보다 더 오래 전에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66) 또한 미토모 켄요우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하지 못하고 수행 도중에 

목숨이 다한 자가 문제가 되어, 그 결과 계위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먼저 불환과가 설해지고 

다음에 일래과가 설해진 형태가 되었다고 하였다.67) 따라서 이들의 의견에 따르면 사과의 성립 

순은 아라한⟶예류자⟶불환자⟶일래자의 순이 되고 있다.

65) 藤田宏達(1959) pp.469-470.
66) 舟橋一哉(1952) pp.179-180. 
67) 三友健容(1979) p.71

 

(4) 사성인의 정의에서 서로 중복되거나 부합(符合)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문헌에서 

사성인의 차별은 열 가지 족쇄로 규정지어지고 있으므로, 이를 전제로 하였을 때 사성인의 

정형문에서 서로 중복되거나 부합(符合)되지 않는 점이 보이고 있다. 정의에서 내용이 서로 

중복되어있다는 것은 예류자에서 제거된 세 가지 족쇄가 일래자에 다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오상분결의 무명이 일래자에서 탐진치의 치(痴)로 

언급되고 있으며, 아라한의 정의에서 오상분결의 제거가 아닌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만일 열 가지 족쇄에 의한 차제적인 제거를 전제로 

한다면 일래자에서 엷어지는 것은 탐진치(rāgadosamoha)가 아니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족쇄인 감각적 욕망의 탐욕(kāmarāga)과 악의(byāpāda)로 표현되었어야 한다. 탐진치에서의 

치(痴,어리석음)는 무명의 의미로 대치되어 쓰이는 용어이므로, 만일 어리석음을 무명으로 

간주한다면 열 가지 족쇄의 마지막인 무명이 일래자에서 언급되는 모순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관점에 대해서, 사성인을 다루는 학자들이라면 대부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⑤ 붓다가 설했다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68) 아까누마 치젠(赤沼智善)은 사성인의과위 차별도 

붓다가 설했다는 자료가 없으며, 붓다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분류법이라고 하고 있다.

68) 赤沼智善(1939) p.167.

 

이와 같이 사성인의 단계적인 계위성립과 각 계위의 연결성에서 몇 가지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주된 해석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논점들에 대해서 심도 있게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빨리 문헌 상, 학자들이 연구한 논거(論據)들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 쉽지 않은 한계가 

있다.

 

⑵ 사성인의 성립 문제점에 대한 고찰

위에서 언급된 다섯 가지 논점에 대해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일래와 

불환의 생천사상, 사성인의 계위 성립설에 대한 문제 그리고 사성인의 정의에서 열 가지 족쇄와 

부합되지 않은 점을 말한다.

 

① 일래와 불환에 대한 생천설이다. 이 생천설에 대하여 논의를

제기한 학자들과는 달리, 후지모토 아키라는 사향사과의 성립설에

서와 마찬가지로 사성인의 성립설에 대해서도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임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후지모토 아키라는 ‘사과설이

생천이나 삼계윤회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들어 이 사상 자체도

불교가 아닌 우파니샤드의 해탈과 윤회 그리고 생천 사상에서 취

입된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삼계설은 「숫타니파타」에

서도 전제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69) 또한 이어서 후지모토

아키라는 ‘첫 번째 선정에서 상수멸정까지를 기초로 하는 삼계설

은 바라문교의 전통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붓다 자신에 의해

직접 설해진 것이며, 사과설 또한 최초의 운문 니까야인 「숫타니

파타」에서 부터 이미 명확하고 일관되게 설해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논자 또한 사향사과의 성립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지모토

아키라의 견해에 타당성을 둔다.

69) 藤本 晃(2005) p.86. 후지모토 아키라(藤本 晃)는 ‘삼계설이 최고층 경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나카무라(中村)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p.102. 각주 24] ‘『담마빠다』와
   『상윳따니까야』Ⅳ권의「사가타왁가(Sagāthavagga)」를 번역한 나카무라는『담마빠다』
    와「사가타왁가」가 만들어질 당시에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이라는 관념은 성립되어 있었지만 
    아직 삼계설은 결부되어 있지 않았으며,『담마빠다』와『숫타니파타』의 중반에도 삼계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삼계설은 꽤 늦게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나카무라가
   「담마빠다의 주석서」의 문구를 일부만 취한 것이지, 문구 전부를 읽으면 삼계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숫타니파타』에도 삼계설이 설명되어 있다고’ 후지모토 아키라는 주장하고 
    있다. 

 

물론 붓다는 현세에서의 완전한 열반을 강조하고 사후설이나 재생에 중점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삼계윤회와 생천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열반이다. 그렇지만 현세에서 아라한이 되지 못하고 수행 도중에 목숨이 다한 수행자에게 

수행상태에 따른 생천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류자 또한 최대한 일곱 번의 윤회를 거듭한 

후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 그러므로 일곱 번의 윤회과정에서 생천의 가능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또한 성인의 범위에 들지 못한 재가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현세에서 재가자의 실천도로서의 

보시(布施)와 지계(持戒) 등에 의한 생천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70) 물론 불교성립 당시 

인도에 존재했던 우파니샤드와 같은 여러 사상이 불교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빨리 문헌에서는 생천과 관련된 일래와 불환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언급되고 있다.

숫타니파타는 색계와 무색계에 대해 소멸(nirodha)을 분명히 알고 해탈하면 불환자나 

아라한이 되지만 소멸을 모르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고 설명하고 있다.71) 또한 예류와 

아라한,72) 불환과 아라한73) 그리고 일래와 불환74)으로 연계시켜 대비 설명한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예류와 아라한 그리고 불환과 아라한의 연계 설명에서 이들을 구분 짓는 유일한 

거는 우빠디세사(upādisesa)로, 어떠한 경우라도 ‘집착이 남아있다면(upādisesa)’ 현세에서 

아라한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집착의 유무는 불환과 아라한을 구분 짓는 준거가 되고 

있으므로,75) 그래서 아라한은 ‘집착을 완전히 제거한 사람’으로 상징된다.76) 이와같이 생천을 

나타내는 일래와 불환 또한숫타니파타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예류와 아라한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라한처럼 현세에서의 열반성취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환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생천을 통해서도 열반의 성취가 가능함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사성인의 체계는 처음부터 함께 정립되어 있었다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생천에 있어서도 삼계에 사는 존재와 신들의 세계나 지옥에 태어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

들이 있으며,77) 아울러 선정의 성취로 가게 되는 색계천과 무색계천 그리고 수행자들이 죽어서 

어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빨리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다.78)

70) 藤田宏達(1971) p.901; 한상희(2008) p.91. 
71) Sn 754게, 755게. 
72) SN Ⅲ p.160, p.192, Ⅴ p.193, p.205, p.208. 
73) AN Ⅲ p.81, p.143; SN Ⅴ p.237, p.285; Sn pp.139-150.
74) AN Ⅰ p.63. 이 경전에서는 내적으로 결박된(ajjhattasaññojano) 사람과 외적으로 결박된
    (bahiddhāsaññojano) 사람을 설명하고 있다. 내적으로 결박된 사람은 ‘죽은 뒤에 어떤 
    천계에는 태어나지만, 거기서 죽어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오는 자(āgāmī)’이며, 외적으로 
    결박된 사람은 ‘죽은 뒤에 어떤 천계에 태어나, 거기서 죽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불환자,
    anāgāmi)’를 말한다. 여기서 āgāmī는 ‘한 번 돌아오는 일래자(sakadāgāmi)’를 의미한다.
75) AN Ⅲ p.82; MN Ⅰ pp.62-63, p.481; SN Ⅴ p.181; Sn pp.139-149; It 46게.
76) Sn 354게; Th 1274게. Nibbāyati so anū saupādisesa.(그는 실로 남아있는 집착을 소멸하였다.)
77) Dhp 126게, 200게, 224게, 236게, 307게, 309게, 311게; SN Ⅰ p.53, pp.131-133, p.165, 
78) AN Ⅱ p.126. p.160, Ⅲ p.348, Ⅳ p.401, Ⅴ p.138; MN Ⅰ p.455, Ⅱ.p.206; DN Ⅲ p.264; 
    Dhp 200게.

 

일래자인 사람은 도솔천에 몸을 나타냈다

79) AN Ⅲ p.348,Ⅴ p.138.

 

비구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여의고 불선한 법을 떨쳐 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그는 그것에 매혹되고 그것을 갈망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발견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그것을 확신하고 거기에 자주 머물러 그것으로부터 물러나지 않고, 죽은 뒤에 범천의 

무리인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80) AN Ⅱ p.126f. 이 인용문에서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사람만 언급하였지만, 원문에는 
    네 번째 선정 성취자까지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선정 성취자는 범중천(梵衆天 
    또는 梵身天, Brahmakāyika devā)⋅ 두 번째 선정 성취자는 극광천([極光天 또는 光音天, 
    Ābhāsarā devā)⋅세 번째 선정 성취자는 변정천(遍淨天, Subhakiṇṇā devā)⋅네 번째 선정 
    성취자는 광과천(廣果天, Vehapphalā devā)의 동료로 태어난다.

 

이와 같이 수행자들의 선정성취 정도에 따라 그들이 생천하여 머무는 천상세계는 차이가 있다. 

상기 인용문에서 뿐만 아니라, 삿타와사숫타(Sattāvāsasutta) 는 욕계에 머무는 유정(有情, 

sattāvāsā)과 더불어 첫 번째 선정으로 태어나는 범중천에서부터 여덟번째 선정으로 태어나는 

비상비비상천에 이르기까지 아홉 종류의 유정들이 머무는 장소를 언급하고 있다81)

81) AN Ⅳ p.401; DN Ⅲ p.263. sattāvāsā는 ‘有情, 중생의 住處, 존재의 주처, 有情居’의 뜻이다.
    [전재성 편저(2005) p.634]

 

이처럼 삼계윤회와 생천은 사성인의 성취와 수행의 핵심인 선정 수행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의 성취에 있어 선정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과 더불어 성인의 

지를 성취해 나아가기 위한 핵심적인 수행법이다. 그렇다면 선정 상태에 따른 생천은 현세

에서 아라한이 되지 못한 경우 한 번에서 최대한 일곱 번을 윤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 선정을 성취하여 그 세계에 태어났다하더라도 그에 

따른 탐욕, 자만, 들뜸 그리고 무명과 같은 족쇄가 남아있다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단지 붓다가 현세에서의 열반을 특히 강조한 것은 생천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해탈에 장애가 되는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열 가지 족쇄에 묶여 삼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범부들에게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깨우쳐주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② 사성인의 계위설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여러 해석을 하고 있다. 즉 수행 도중에 목숨이 다한 

자가 문제가 되어 그 결과 계위설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예류와 아라한 다음에 먼저 불환이 

설해지고 다음에 일래가 설해졌으며, 특히 일래는 예류와 불환을 단계적으로 결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또한 충분한 논거가 뒷받침되지 않고 있으며, 

문헌에서도 합당한 근거자료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숫타니파타에서부터 사향사과라는 용어와 그의 여덟 사람이 계위별로 정형화되어 언급되고 

있었으므로, 이 또한 크게 논의될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빨리 문헌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에서 사성인이 연구되고 있지만,『앙굿따라니까야사마나숫타

(Samaṇasutta)는 과를 이룬 사성인만이 붓다의 바른 교설임을 강조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여기에 첫 번째 사문[예류자]이 있고, 여기에 두 번째 사문[일래자]이 

있고, 여기에 세 번째 사문[불환자]이 있고, 여기에 네 번째 사문[아라한]이 있다. 다른 사문들에

의한 교설은 공허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바르게 사자후를 외쳐야 한다.82)

82) AN Ⅱ p.238. sīhanāda는 ‘사자후[부처님의 설법]’을 의미한다.[전재성 편저(2005) p.675]

 

본 인용문의 설명에 앞서 본문에서는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그리고 아라한을 규정짓는 

정형문이 설명되고 있었으며, 이들 네 성인을 사문(samaṇa)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의 네 사문은 사성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인용문은 오직 네 단계의 사성인만이 붓다의 

바른 교설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③ 연구자들은 사성인의 정의 부분에서 부합(符合)되지 않는 점을 주로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일래자의 정의에서 세 가지 족쇄의 재 언급과 탐진치가 엷어진다는 표현 그리고 

아라한을 오상분결의 제거가 아닌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첫 번째는 예류자에서 이미 벗어난 세 가지 족쇄가 일래자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추론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미토모 켄요우는 ‘사성인의 성립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남는다고 하였다.83) 그러나 세 가지 족쇄의 재 언급은 

그다지 논의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직 족쇄의 기준에서 일래자를 표현한다면, 

일래자는 이미 세 가지 족쇄에서 벗어났으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족쇄인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가 엷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래자가 열 가지 족쇄 가운데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예류자와 같이 세 가지 족쇄뿐이므로, 이는 일래자의 족쇄제거 상태를 좀 더 

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단순한 가정을 해 본다.

83) 三友健容(1979) p.65. 

 

두 번째는 열 가지 족쇄의 점진적인 제거순서에 따른다면, 일래자에서는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가 엷어진다고 표현되었어야 정확하다. 하지만 탐진치가 엷어진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은 ‘탐진치가 제거된 아라한의 상태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아라한에 가깝게 고찰된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한다.84) 이처럼 빨리 니까야에서의 

사성인의 정의는 각 과위에서 제거되는 내용이 열 가지 족쇄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일래자에서 언급된 탐진치, 즉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은 열 가지 족쇄의 감각적 욕망의 탐욕(kāmarāga), 악의(vyāpāda) 그리고 

무명(avijjā)을 일으키는 근본 뿌리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84) 三友健容(1979) p.71; 藤田宏達(1959) pp.470-471

 

『앙굿따라니까야』는 ‘탐욕(lobha) 때문에 탐착(abhijjhā)이, 성냄(dosa) 때문에 악의(vyāpāda)

가 그리고 어리석음(moha) 때문에 무명(avijjā)이 생긴다고’ 설명하고 있다.85) 여기서 탐착

(abhijjhā)은『앙굿따라니까야』에서 네 번째 족쇄인 감각적 욕망의 탐욕(kamaraga)에 대치되어

언급되기도 한다.86) 이처럼 탐진치로 인해 탐착과 악의와 무명이 생긴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항상 탐욕과 성냄을 일어나게 한다.87)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이루(YiRu) 또한 ‘탐욕과 성냄은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와 거의 동의어이며, 탐욕과 성냄이 엷어진다는 것은 어리석음이 

엷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88) 따라서 일래자에 대한 정의는 좀더 근원적인 

의미를 표현한 것일 뿐,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의 족쇄와 다르지 않다. 또한 니까야에서는 

족쇄의 완전제거와 엷어짐의 차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된 

사람은 아라한이므로, 아라한의 과위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탐진치가 이미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한 일래자의 단계에서 엷어진다고 설명한 점은 사과의 계위 성립 상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니라고 생각한다.

85) AN Ⅰ p.194. 
86) AN Ⅰ p.242. 
87) 대림 외(2004) pp.121-123, p.459. 탐착(abhijjhā)은 탐욕의 뿌리(lobha-mūla)의 한 
    형태이며, 악의(byāpāda)는 성냄의 뿌리(dosa-mūla)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들뜸은 
    회의적인 의심과 함께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이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항상 탐욕과 
    성냄을 일어나게 한다. 
88) Yi Ru(2005) p.80.

 

세 번째는 아라한의 정의에서 오상분결의 제거가 아닌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번뇌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는 아라한의 상태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문구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의 정의에서 오상분결의 제거라는 언급은 없지만, 어쩌면 

‘번뇌 없는’이라는 이 표현 안에 ‘오상분결의 제거’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오상분결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번뇌가 남아있어 ‘번뇌 없는(anāsava)’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로 네 종류의 니까야에서 표현되는 사성인의 정형구에서는 세 가지 족쇄,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 언급될 뿐 각각의 족쇄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장과 

소부의 하나인『뿍갈라빤냣띠』와 『빠띠삼비다막가』에서는 열 가지 족쇄의 순차적인 제거에 

따라 사성인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89)

89) Pug pp.17-18; Paṭis Ⅱ pp.94-95.『뿍갈라빤냣띠』는 열 가지 족쇄의 순차적인 제거에 
    따라 사성인의 단계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류자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한 사람이며, 
    그 다음 족쇄인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일래자에서 엷어지고, 불환자에서 완전히 끊어진다. 
    그리고 아라한은 오상분결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으로, 오상분결의 다섯 가지 내용 또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가하면『빠띠삼비다막가』도 열 가지 족쇄로 사성인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전에서는 열 가지 족쇄뿐만 아니라, 족쇄에 상응하는 잠재적 
    성향들을 추가하고 있으며 네 가지 과(phala)가 아니라 네 가지 도(magga)에서 단절되는 
    번뇌들로 설명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성인의 정의에서 열 가지 족쇄와 완전히 부합(符合)되지 않은 몇 가지 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는 각 성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유사한 표현일 뿐 

사성인의 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성인의 정의는 논장과 소부의 일부에서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

 

Ⅳ. 맺음말

 

빨리 문헌에서 말하는 성인의 범주는 여덟 사람으로 구성된 사향사과를 말하며, 이 가운데 과를 

이룬 사성인은 불교수행의 계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성인의 형태이다. 이러한 사향사과와 

사성인은 최고층 문헌의 하나로 회자되고 있는 『숫타니파타』에서부터 빨리 문헌 전체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논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사향사과에 대해서는 주로 두 가지 논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는 점과 예류향[도]은 성인이 아니라는 점이 제시된다. 그리고 

사성인에 대해서는 주로 세 가지 논점을 지적하고 있다. 계위성립에 있어서 순차적이지 

으며, 일래와 불환에서의 생천설은 불교의 본지도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성인의 정의에서 몇 가지 부합되지 않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후지모토 아키라

(藤本晃)는 사향사과와 사성인에 대해서 위와 같은 주장들을 부정하고 일관되게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임을 주장하고 있다. 논자 또한 후지모토 아키라의 견해에 타당성을 두고 고찰

하였다.

 

고찰한 결과 학자들이 지적한 논점들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그것들을 확증할만한 논거들이 빨리 

문헌에서 쉽게 보이지 않았으며, 학자들의 논거제시 또한 충분하지 못한 면이 있다. 반면 

빨리 문헌 가운데숫타니파타,상윳따니까야삭카상윳따,마빠다그리고 

테리가타등에서는 사향사과라는 용어는 물론 사성인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우다나』는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사향사과설과 

사성인의 계위가 일찍부터 정립되어 있었다는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사향사과와 

사성인에 대한 설명은 빨리 문헌 전체에서 더 체계화되고 명확해진다.

 

그런가하면 사성인에 대해서도 몇 가지 명확하지 않은 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불교의 본지와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성인의 삼계윤회와 생천 사상은 아라한이 되지 못하면 누구라도 

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한 번[일래자]에서 최대한 일곱 번[예류자]을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는 불가피한 전제이다. 그리고 정의부분에서 일래자와 아라한의 경우는 열 가지 족쇄와 상응

하여 다르게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유사한 다른 표현일 뿐 족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아까누마 치젠(赤沼智善)은 사성인의 과위 차별도 붓다가 설했다는 자료가 없다고 

하였으나, ‘붓다가 설하지 않았다는’ 자료 또한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앙굿따라니까야사마나숫타는 오직 네 단계의 사성인만이 바른 교설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사향사과설과 사성인의 계위에 대해서는 크게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빨리 문헌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본다.

 

끝으로 사향사과와 사성인에 대한 학자들의 심도있는 연구는 성인에 대한 바른 이해를 

확립시켜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