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 7. 옷감 경(vatthuupamasuttam)
7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의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오염되고 때가 묻은 옷감이 있다. 그런 그것을 염색하는 사람이 파랑이나 노랑이나 빨강이나 진홍 등 각각의 여러 염료에 담그더라도 색을 염색하기가 어렵고 색을 선명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옷감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면 나쁜 곳(악처.惡處)가 예상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옷감이 있다. 그런 그것을 염색하는 사람이 파랑이나 노랑이나 빨강이나 진홍 등 각각의 여러 염료에 담그면 색을 염색하기가 쉽고 색을 선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옷감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마음이 오염되지 않으면 좋은 곳(선처.善處)가 예상된다.
*'나쁜 곳'은 duggati를 옮긴 것이고 '좋은 곳'는 sugati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좋은 곳은 26가지 천상세계이고 나쁜 곳은 네 가지이다."(SN.ii.470)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나쁜 곳은 삼악도라고 하여 지옥, 축생, 아귀의 셋으로 알려져 있지만 주석서에서 보듯이 상좌부에서는 아수라를 악도 혹은 나쁜 곳에 넣어서 4악도로 나타난다.
*여기서 '오염원'은 upakkilesa를 옮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염원으로 옮기는 단어에는 kilesa와 여기에 접두어 'upa+'가 붙은 upakkilesa(본경에서처럼)와 접두어 'san+'이 첨가된 sankilesa의 세 가지가 나타나는데 kilesa가 대표적인 것이다.
주석서는 "성가시게 하고 억누른다, 들볶는다(kilissati vibadhati, upatapeti)는 뜻에서 오염원이라 한다."(DhsA.42)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논장 「담마상가니」에는 "열 가지 오염원이 있으니 1탐욕 2 성냄 어리석음 자만 사견 의심 해태 들뜸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이다(lobho, doso, moho, mano. ditthi, vicikiccha, thinam, uddhaccam, ahirikam, anottappam)"(Dhs.214) 라고 하여 열 가지 오염원을 들고 있지만 니까야에는 10가지 오염원이 나타지 않는다.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오염원 경」(S46.33)과 「앙굿따라 니까야」 제3권 「오염원 경」(A5.23)에는 삼매를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오개.panca nivaranani) 즉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혼침, 들뜸.후회, 의심의 다섯 가지를 마음의 오염원(cittassa upakkilesa)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 제3권 「눈(眼)경」(S27.1)에는 눈.귀.코.혀.몸. 마음의 육내입처를 마음의 오염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본서 제4권 「오염원 경」(MN128)에는 의심,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 해태와 혼침, 두려움, 우쭐댐(의기양양함), 무력증, 지나친 정진, 느슨한 정진, 갈애, 다양한 인식, 형색들에 대한 지나친 명상의 11가지를 마음의 오염원으로 들고 있다.
71. 비구들이여, 무엇이 마음의 오염원들인가?
탐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분노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원한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위선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무자비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질투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인색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속임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못된 꾀(사기)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완고함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격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거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부주의(방일)가 마음의 오염원이다.
72. 비구들이여, 비구는 '탐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탐욕을 버린다. '분노(성냄)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분노를 버린다. '원한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원한을 버린다. '위선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위선을 버린다. '무자비(횡포)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무자비를 버린다. '질투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질투를 버린다. '인색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인색을 버린다. '속임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 속임을 버린다. '사기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사기를 버린다. '완고함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완고함을 버린다. '격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격정을 버린다. '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교만을 버린다. '거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거만을 버린다. '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자만을 버린다. '부주의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부주의를 버린다.
73.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탐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탐욕이 버려지고, '분노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분노가 버려지고, '원한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원한이 버려지고, '위선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위선이 버려지고, '무자비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무자비가 버려지고, '질투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질투가 버려지고, '인색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인색이 버려지고, '속임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속임이 버려지고, '사기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사기가 버려지고, '완고함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완고함이 버려지고, '격정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격정이 버려지고, '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교만이 버려지고, '거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거만이 버려지고, '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자만이 버려지고, '부주의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안 뒤에 마음의 오염원인 부주의가 버려질 때,
74. 그는 여래·아라한·정등각께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춘다. '이렇게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이시다.'라고.
그는 법에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춘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그는 승가에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춘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 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으니, 저 네 쌍의 분들 여덟단계에 계신 분들이다.[四雙八輩.사쌍팔배]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의 다시 없는 복전[福田]이시다.'라고.
75. 또한 제한적인 포기, 토함, 벗어남, 버려짐, 놓음에 따라, 그는 '나는 세존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추었다.'라고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기쁨(희열)이 생긴다. 기쁨이 있는 자는 몸이 편안하다. 몸이 편안한 자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즐거운 자는 마음은 삼매에 들어진다. 그는 '나는 가르침에 대한 ··· '나는 승가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녔다.'라고 의미에 대한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기쁨(희열)이 생긴다. 기쁨이 있는 자는 몸이 편안하다. 몸이 편안한 자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즐거운 자는 마음은 삼매에 들어진다. '나에게 제한적인 포기, 토함, 벗어남, 버려짐, 놓음이 있다.'라고 의미에 대한 앎을 얻고, 법에 대한 앎을 얻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 환희하는 자에게 기쁨(희열)이 생긴다. 기쁨이 있는 자는 몸이 편안하다. 몸이 편안한 자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즐거운 자는 마음은 삼매에 들어진다.
*이 불환자인 비구가 각각의 오염원을 완전히 남김없이 버릴 수 있는 그 각각의 도로써 그 오염원을 포기하고, 토해내고, 풀어주고, 버리고, 완전히 놓아버린다. 즉 예류도로써 모욕, 얕봄, 질투, 인색등을 완전히 남김없이 버리고, 불환도로써는 악의, 적의 등을 완전히 남김없이 버린다. 그는 이렇게 오염원들의 버림을 돌이켜 보면서 기쁨을 얻는다. 또한 그보다 더 높은 '삼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구족했다.'라고 생각하면서 기쁨을 얻는다는 뜻이다.
'제한적인 포기'는 yatho 는 이유를 나타내고 odhi 는 일반적으로 '한계, 부분'을 뜻한다. 여기서는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도는 한계(odhi)를 짓고 부분(kotthasa)을 만들어서, 더 위의 아라한도로써 버려야 할 오염원들을 남겨두고 버리기 때문에 odhi 라고 한다. 그러나 마지막인 아라한도는 어떤 오염원들도 남기지 않고 모두 버리기 때문에 anodhi(제한없음)라고 한다. 이 비구가 아래 단계의 세 가지 도로써 오염원들을 버린 것이 yathodhi kho panassa cattam hoti 의 뜻이다.
*환희(pamujja)는 얕은 희열(taruna-piti)이고, 희열은 만족의 형태로 나타나는 강한 희열이다. 몸은 정신의 무더기를 뜻하고, 마음이 삼매에 들어진다는 것은 아라한과의 삼매로 삼매에 든다는 뜻이다.(AA.ii.230)
76. 비구들이여, 이렇게 계를 지니고, 이렇게 법을 지니고, 이렇게 지혜를 지닌 그 비구는 만약 맛있는 탁발 음식 즉 흰 쌀밥과 여러 가지 국과 여러 가지 반찬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오염되고 때가 묻은 옷감은 깨끗한 물에 의해 깨끗해지고 청정해진다. 금은 용광로에 의해 깨끗해지고 청정해진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이렇게 계를 지니고, 이렇게 법을 지니고, 이렇게 지혜를 지닌 그 비구는 만약 맛있는 탁발 음식 즉 흰 쌀밥과 여러 가지 국과 여러 가지 반찬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77. 그는 자애(자비)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문다.
78. 그는 '이것이 있다. 저열한 것이 있다. 수승한 것이 있다. 이런 인식에 속한 것을 넘어선 더 높은 벗어남이 있다.'라고 철저히 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그에게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가 내면의 목욕으로 목욕한 자.'라고 불린다.
79. 그때 순다리까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세존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그런데 고따마 존자는 바후까 강으로 목욕하기 위해 가십니까?"라고.
"바라문이여, 바후까 강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바후까 강이 무엇을 만듭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많은 사람들은 바후까 강이 해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많은 사람들은 바후까 강은 공덕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바후까 강에서 많은 사람들은 악업을 흘려보냅니다(씻어냅니다)."라고.
그러자 세존께서는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바후까 강, 아디깍까 강, 순다리까 강
사랏사띠 강, 빠야가 강, 그리고 바후마띠 강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항상 뛰어들지만 나쁜 업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순다리까 강이 무엇을 하는가? 빠야까 강이 무엇을 하고, 바후까 강이 무엇을 하겠는가?
적대하고, 죄를 지은 사람, 악업을 지은 그를 정화하지 못한다.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정화하는 날이고,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포살일이다.
청정하고 업이 깨끗한 자에게는 항상 계를 구족한 것과 같다.
바라문이여, 오직 여기에서 목욕하라. 모든 존재들에 대해 안온(安隱)함을 베풀라.
만일 그대가 거짓을 말하지 않고, 생명을 해치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고
믿음 있고, 인색하지 않으면
가야 강에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우물도 그대에게 가야 강이 될 것이다."
*"가야 강에서 목욕을 하건 우물에서 목욕을 하건 그대는 오직 이 도닦음으로써만 오염원들이 청정해진다. 몸의 더러움을 씻는 것은 두 곳 모두에서 할 수 있다.(MA.i.179)
80.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불가사의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한 일입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듯,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읽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오시듯, 고따마 존자께서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법)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고따마 존자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고따마 존자의 곁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순다리까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비구계를 받았다. 비구계를 받은 지 오래지 않아 홀로 외딴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머문 순다리까바라드와자 존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바라드와자 존자는 아라한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옷감 경(M7)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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