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자유의지와 인과론적 결정론자들

실론섬 2016. 3. 29. 02:24

토파스님이나 님이나 참으로 좀더 깊은 사유가 필요한 분들 같습니다...^^ 님들을 보고 인과론적 결정론자라고 하는데  이건 인도철학에 엄연히 있는 외도사상입니다. 님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인과론적 결정론자이오니 제가 별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시한번 불교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1) 중생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모든 행동에는 그런 행동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인과론적 결정론으로 간다면 선한 사람은 늘 선하고 악한 사람은 늘 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부처님 법을 배우면 모두다 선해야 할 뿐 나쁜 사람이 나오면 안되고 또한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조건이나 원인이 되어 모두다 불자가 되어야 한다는 엄청난 논리적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2) 중생들이 말과 몸과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에는 두 가지의 행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선한 행동이고 다른 한가지는 악한 행동입니다. 이걸 불교에서는 십선행(법)이라고 하고 반대는 십악행(법)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모두다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길거리에 돈을 봤을 때 경찰서에 가느냐 슬쩍하느냐는 그 사람의 양심이나 인격적 수양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는 스스로의 결정 즉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업이란 도덕적 인과율입니다. 즉 스스로가 행한 의도적 행위(자유의지)에 대한 결과입니다. 내 행위가 신이 시켰거나 또는 숙명적으로 운명적으로 그렇게 하게끔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습니다.


3)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내 의도적 행위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도력이 높을수록 의도적 행위는 청정합니다. 조건발생이라는 것은 신구의 세 가지로 행이라는 의도적 action 이 취해졌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도적이라는 말은 00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로봇처럼 또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생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결심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단이지 결코 제삼자가 개입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제삼자에게 떠넘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신이나 운명이나 숙명을 말한다면 제삼자에게 떠넘길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신의 뜻대로.. 신이 정해진 길이야... 신이 인도해 주겠지..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불교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설법을 해야 겠다고 의도적인 생각을 내시고 실천에 옮깁니다.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심에 의해서 설법도 하시고 육신통도 발휘하시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씀드려서 그분의 행이 청정하기에 선법인 것이지 만약에 붓다께서 주무실 때 그분이 아침에 일어나 선행을 할지 악행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되풀이합니다만 수행력이 높으면 행이 청정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수행의 도력이 조건발생에서 말하는 조건이 되는게 아니라 신구의 세 가지로 행하는 행이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제발 이해를 했으면 합니다.


조건발생 = 신구의 세 가지로 행할 때 그 행한 것이 조건이지 수행이나 부처님 말씀이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님들은 부처님 말씀이나 수행이 조건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부처님 설법 들음 = 100% 선행'이라는 웃지 못할 논리적 궤변에 빠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조건이 선한 것이니 결과도 무조건 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이 조건발생에서 말하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님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4) 또한 조건발생이라고 할 때 그 조건은 신구의 세가지로 행하는 "행"이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 행에 대한 결과가 업을 낳습니다. 님들은 자꾸만 부처님의 말씀대로 수행을 했으니 그 수행이 바로 조건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만약에 그런 논리라면 부처님 법 알면 모두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불자인데 돈을 보고 경찰서에 가는 사람도 있고 쓸쩍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럴때 쓸쩍하는 사람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이 조건이고 수행이 조건인데 당연히 선법인 부처님 법대로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내가 신구의 세 가지로 행하는 행위가 선한 조건을 낳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수행력이 조건발생에서 말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5) 님들은 연기를 들고 나오는데 그것도 굉장한 논리적 모순에 빠져있는 것을 들고 나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란 =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명하는 것에 한정합니다. 훗날 대승불교에 와서 연기법이 무궁무진하게 발전을 한 것이지 결코 초기불교의 연기는 대승불교의 연기와 전혀 다릅니다. 논문/평론방에 논문이 두 편이 올려져 있으니 제발 한번 가서 읽어 보십시오.


왜 님들의 연기가 궤변인지 설명드리겠습니다.


12연기에서 ...촉 - 수 - 갈애 - 취 ... 이렇게 순서가 됩니다. 이 부분은 여러번 화살의 경을 가지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도 중생도 첫 번째 화살은 맞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지만 중생들은 두 번째 화살까지 모두다 맞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길에 돈이 떨어져 있는 것은 부처님도 보며 중생들도 봅니다. 그리고 부처님도 행동을 하고 중생들도 행동을 하면서 조건을 만듭니다. 부처님은 경찰서로 중생들은 갈애를 일으키며 쓸쩍 합니다. 부처님도 행동을 했으나 윤회의 조건(업)을 짓지 않았고 중생들은 윤회의 업을 지은 것의 차이입니다. 의도적 행위가 결과가 부처님이 경찰서 간 것도 부처님의 생각이었고(자유의지) 중생들이 돈을 쓸쩍한 것도 중생들이 자유의지일 뿐입니다. 


부처님도 밥먹고 화장실가고 설법하는등 중생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화장실갈 때 물론 생리적인 반응도 있겠지만 참기도 했을 것이고 또는 화장실 가야 겠다고 생각하시고 화장실 갔을 것입니다. 공양을 할 때도 마찬가지고 설법을 할 때도 모두다 의도적인 행위를 하신 것이지 무뇌아처럼 또는 아메바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인게 아닙니다. 


6) 의도적 행위만이 업을 낳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때 의도적인 행위에 자유의지가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도대체 의도적 행위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00을 해야겠다고 스스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의도적 행위입니다. 만약에 자유의지가 내재되어 있지만 않다면 스스로의 의도적 행위는 신이 명령해서 무뇌아처럼 따라만 가거나 또는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리모콘으로 조정당하거나 또는 신이 결정해 놓은대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건가요?


7) 불교에서는 인(간접적인 원인) +연(직접적인 원인)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은 씨앗이라면 그 씨앗만으로는 싹이 트질 않습니다. 싹이 틀려면 물이나 공기나 햇빛이 필요합니다. 이 둘이 합친 인연이 원인이 되어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 인연이라는 원인은 내가 얼마든지 자유의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강병균 교수님 말처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는 내 자유의지에 달려있는 의도적 행위의 결과에 의존합니다. 원인을 좋게 만드는 것도 자유의지이며, 원인을 나쁘게 만드는 것도 내 자유의지 입니다. 인연이라는 원인을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지 신이나 제삼자가 만드는게 아닙니다.


8) 인과론적 결정론자가 되지 않을려면 조건발생일 때 그 조건(원인.인연)을 어떻게 누가 만드는지를 잘 봐야 하고 그리고 밑바탕(부처님 말씀, 수행)등과 신구의 세 가지 행위 그 자체를 엄격하게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연기와 조건발생을 잘 구분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