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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 59. 많은 느낌(경험) 경(bahuvedanīyasuttaṃ)

실론섬 2016. 4. 19. 13:09

MN 59. 많은 느낌(경험) 경(bahuvedanīyasuttaṃ)

 

8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까?"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느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의 두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함의 영역에 있는 수승한 즐거움에 대한 세존의 말씀입니다(고요하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느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의 두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함의 영역에 있는 수승한 즐거움에 대한 세존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도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목수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도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느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의 두 가지 느낌을 말씀하셨습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함의 영역에 있는 수승한 즐거움에 대한 세존의 말씀입니다."

우다이 존자는 얼굴을 마주한 빤짜깡가 목수를 설득할 수 없었고, 빤짜깡가 목수도 얼굴을 마주한 우다이 존자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빤짜깡가 목수(Pancakanga thapati)는 사왓티에 거주하는 목수들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SA.ii.79) 그는 까뀌(vasipharasu)와 끌(nikhadana)과 자(danda)와 먹줄(kala-sutta)의 다섯 가지 연장을 사용하는데 능숙했기 때문에 다섯(pancaka.빤짜까) 연장(anga앙가)을 가진 자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DA.iii.903)
빤짜깡가 목수는 '사마나만디까 경(M78)'과 '아누룻다 경(M127)에도 기술되고 있다.
*'우다이(Udayi)' 존자는 빤디따 우다이(Pandita-udayi)존자라고도 주석서에 나타나는데 그만큼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 분(pandita)이었다고 한다. 그는 세존의 고향인 까삘라왓투의 바라문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며 세존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 세존의 덕성을 흠모하여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뒤에 아라한이 되었다.(Thiga.iii)

 

89.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우정의 대화를 아난다 존자가 들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우정의 대화를 들은 대로 그대로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또한 우다이가 빤짜깡가 목수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다. 나는 방법에 따라 두 가지로도 느낌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세 가지로도 말했고, 방법에 따라 다섯 가지로도 느낌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여섯 가지로도 느낌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열여덟 가지로도 느낌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서른여섯 가지로도 느낌을 말했고, 방법에 따라 백여덟 가지로도 느낌을  말했다.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법에 따라 설한 법이 있다.  

 

* 두 가지 느낌은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이다. 세 가지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다섯 가지 느낌은 감각의 문에 따라 눈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등이다. 열 여덟가지 느낌은 고찰에 따라 '눈으로 형색을 보고 좋아하는 형색을 조사한다'는 등이다. 즉 여섯 감각의 문에 의한 여섯 가지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과 여섯 가지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과 여섯 가지 평정한 느낌이다. 서른여섯 가지 느낌은 앞의 열여덟 가지 느낌이 각각 세속에 바탕을 둔 것과 출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백여덟 가지 느낌은 앞의 서른 여섯 가지 느낌이 각각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이다.(MA.ii.114)

 

참으로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법에 따라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논쟁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분쟁하게 되고 혀를 무기 삼아 서로를 찌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아난다여, 이렇게 내가 방법에 따라 설한 법에 대해 잘 말해지고 잘 설해진 것이라고 서로 동의하고 수긍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화합하고 즐거워하고 다투지 않고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이 서로를 사랑스런 눈으로 보면서 지낼 것이 예상된다.

 

90.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묶인 것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즐거움과 기쁨, 이것이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라고 불린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아난다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성자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갖가지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의식'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쁨이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더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고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다.

 

91. 그런데, 아난다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상수멸.想受滅)을 설했다. 그리고 즐거움의 영역에서 그것을 설명한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움의 영역에 대해서  느낌만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도반들이여, 여래는 즐거움이 있는 어디에서든지 그것을 즐거움의 영역에서 설명합니다.'라고." 

 

*여기서 다섯 가지에 묶인 감각적 쾌락으로 인한 즐거움과 여덟 가지 증득으로 인한 즐거움은 느껴진 즐거움이고, '소멸(nirodha)'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다.(MA.iii.115) '소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된다. 다섯 가지에 묶인 감각적 쾌락과 여덟 가지 증득을 통해서 생긴 즐거움은 느껴진 즐거움이지만, 소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외도들은 '소멸'이 어떻게 즐거움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세존께서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하고 계신다.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이 둘 다를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신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 괴로움이 없는 상태이기에 여래는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시기 때문이다. 즉 인식과 느낌의 소멸(상수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인 까닭에 이 또한 즐거움인 것이다.(SA.iii.80)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많은 느낌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