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사후에 불교가 18-20여개로 분파되었고 이를 후세에서는 "부파불교"라고 한다. 부파불교는 불교의 교리를 철학적(심리학적)으로 사상적으로 드넓은 깊이를 더하고 지평을 넓힌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머리카락으로 돌맹이에 구멍이라도 낼듯 번쇄한 논쟁으로 날밤을 지새움으로써 결과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딱딱한 돌맹이로 석화시켜버린 잘못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부파불교는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메마른 사막에서 모두다 말라 죽어 버렸다. 한마디로 불교는 인간중심 종교이고 우리들 삶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치 혀끝의 희론적 번쇄한 논쟁거리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앙코 없는 진빵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일부 철학자들이 희론자들에게는 신나는 일이겠지만 괴로움에 허덕이며 오탁악세를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기도 하다.
초기 대승불교는 나름대로 부파불교의 중생구제 소홀/출가승위주의 불교/홀로 깨달음의 추구등을 비판하면서 새롭게 탄생을 했다. 하지만 대승불교도 공관 유가학파등으로 쪼개지고 다시 이들 가운데서도 서로 날밤을 새우며 논쟁에 빠져 들었다. 나중에는 전문적인 수행승들조차 뭐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논쟁이 치열해 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쉬운 불교를 지양하는 즉 그림이나 주술등에 의존하는 밀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재삼 말씀드리지만 불교는 어려운 종교도 아니고 번쇄한 희론의 주제도 아니다. 붓다는 말하길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라고 했다. 그것은 물론 사성제의 길이며 팔정도이고 37조도품이다.
2600년전의 인도민중들의 교육환경이나 그들의 이해력은 어느정도였을까? 과연 몇 퍼센트나 산스크리트어를 알고 문자를 알고 글을 쓸줄 알았을까? 그들의 도덕적인 심성은 어느정도였을까? 왜 붓다의 설법은 점진적 설법이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민중들이 거의다가 까막눈이었고 별로 철학적 깊이가 없는 그저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처음 대하는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 상당부분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상황은 어떤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과연 몇 퍼센트의 중생들이 오계라도 제대로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과연 며 퍼센트의 중생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진심어린 보시를 베풀고 있을까? 과연 몇 퍼센트가 길을 지나가면서 거지에게 지갑을 열고 있을까? 대답은 명쾌하다. 별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번쇄한 철학적 논쟁에 빠져든다. 오계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열반이니 해탈이니 체험이니 수행이니 떠들어 댄다. 오계를 지키는것도 주요한 수행인데 ... 그리고 일부는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을 깔보면서 그들은 전혀 수행이나 체험을 안해본 것처럼 폄훼한다. 과연 학자들을 폄훼하는 그들의 수준이 학자들보다 높아서일까 아니면 학자들의 글을 이해 못하는 까막눈 수준이라서 그럴까? 나는 학자들을 폄훼하는 자들 대부분이 학자들의 글조차 이해못하는 까막문이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불교학자들의 사회생활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며 그들은 엄청난 공부와 수행을 겸한다. 글을 쓰고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서 몇달씩 사색하고 사유하며 온갖 자료들을 모은다. 그리고 한자한자 정리를 하는 그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꼭 화두들고 좌선해야만 수행이 아닌 것이다.
경전에 보면 "붓다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심사숙고하여 그 뜻을 잘못 알거나 왜곡하거나 오해하면 안된다. 만약에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그 뜻을 왜곡하면 그러한 것이 불교를 망치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한 여러 제자들은 붓다에게 " 00는 붓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다니는데 이것은 붓다를 칭찬하는 것입니까 욕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기도 한다. 그만큼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발전적인 논쟁을 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법이 아닌 사견을 내세우는 것은 불교로 위장한 외도들이다. 그토록 대다한 불교수행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논쟁중에 나오는 그들의 말솜씨나 언행을 보면 그 수준이 금방 드러난다. 한마디로 오계도 제대로 못지키는 주제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에 와서 어쩔수 없이 서양철학과 불교가 만나고 상호 비교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어차피 불교와 서양철학은 전혀 다른 즉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다시말해서 불교는 무상 고 무아를 품고 있지만 서양철학 그 어디에도 무상 무아 고라는 사상은 없다. 앙코를 감싸고 있는 밀가루만 가지고 떠드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찌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개 서양 철학가들의 주장과 비교가 되겠는가? 그토록 불교가 하챦은가? 또한 서양철학의 기본은 유일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엇을 하든 그들에게는 유일신 사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철학사상을 전개한다. 하지만 불교는 유일신을 배제하며 철저히 배척하고 대신에 무상 무아 연기이다. 애초부터 비교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왜 한국불교는 깨달음이 불교의 전부라는 오해를 할까? 왜 그들은 다른나라 사람들의 불교를 보질 못할까? 남방권을 돌면서 부처님 앞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태들 때문일까? 아니면 대승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색안경을 끼고 여행을 하기 때문일까?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하면 일반생활에 적용을 하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한줄기 빛이 되고 그래서 그 도움으로 내 삶이 향상되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참다운 귀의를 하는 그런 생활적인 가르침은 없을까?
당장 내일 집세내야 하고 쌀한톨 없는 중생에게 다가가 "놓아라.. 버려라.. 집착하지 말라.." 이게 법문인가 아니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붓다의 가르침을 잘 파악하고 의존하며 어두운 밤 길의 등불로 삼아 오탁악세의 현실을 살아가는 중생들이 조금이라도 위안과 편안함을 얻도록 해야하는게 불교의 진정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야단법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말로 ‘승가’는 ‘스님들’로 번역되어서는 안된다 (0) | 2016.07.12 |
---|---|
윤회에 대한 댓글 (0) | 2016.06.07 |
미디어 붓다에 올린 댓글 정리 (0) | 2016.05.05 |
윌폴라 라훌라 스님의 글 (0) | 2016.04.06 |
토론을 하면서 느낀 생각들 (0) | 2016.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