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윤회의 연속이다 | |||||||||||||
저 세상이 없다고 믿고서 현생에서 악행을 일삼으며 제 멋대로 살다가 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두 가지를 모두 잃어 버린다. 첫째는 지옥이 있다면 악행의 업으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둘째는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현생이 일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 저 세상이 있다고 믿고 선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를 모두 얻는다. 첫째 이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윤회가 있다면 현생의 선행으로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요, 둘째 설사 저세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현생의 선행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칭송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심찰나적으로 생멸(죽고 태어남)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삶이란 윤회의 흐름이요 연속일 뿐이다. 어릴적의 나와 지금은 나는 다르고, 지금의 나와 10년후의 나는 다를 것이다. 1초전의 나와 1초후의 나는 다르다. 이렇듯 우리는 몸과 마음이 심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며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져 가는 것이다. 생과 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방이 있고 중간에 문이 하나 있다고 하자. 왼쪽의 사람이 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나간다고 할 때, 오른쪽 사람이 볼 때 문을 닫고 들어오는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오른쪽 사람이 문을 닫고 왼쪽으로 나간다고 했을 때, 왼쪽 사람이 볼 때는 문을 열고 왼쪽으로 들어오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태어남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태어남으로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붓다께서는 단멸론과 영원론을 외도라고 분명하게 부정하였다. 이 죽음이 끝이라면 단멸이요, 이 죽음뒤에 저세상이 영원하다면 영원론이다. 윤회란 단멸론도 영원론도 아니다. 윤회란 또다른 태어남의 조건지워짐이다. 계속하여 태어남의 조건지워짐을 만든다면 생사를 거듭하며 흘러갈 것이고, 어느 순간에 태어남의 조건지워짐을 소멸시킨다면 이 생이 마지막 생이며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안다고 하는 것이다. 윤회가 있다고 한다면 영원론이요 윤회가 없다고 한다면 단멸론이다. 이 둘은 모두다 불교가 아니다. 외도일 뿐이다. 업이란 의도된 행위의 결과이다(도덕적 인과율) 업이란 말과 몸과 입으로 의도된 행위를 한 결과물이다. 이런 의도된 행위만이 업을 잉태하고 윤회의 조건을 만든다. 윤회의 조건(조건지워짐)을 만들지 않으면 다시 태어남이란 결과도 없다. 원인과 조건없이 결과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교리. 의도된 행위 = 업, 조건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나도 모르게 발밑에 있는 지렁이를 뭉개서 죽였다. 이런경우 업이 잉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적으로 지렁이를 밝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죽고 다시 싹이 나지만 이걸 윤회라고 하지 않는다. 굼벵이도 지렁이도 아메바도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지만 이걸 윤회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물이나 이런 생물들은 의도적 행위(스스로 옮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능력/의지가 없음)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걸 뭐라고 할까? 그건 자연의 순환, 생태계의 순환, 자연현상이라고 부른다. 나무나 궁벵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윤회가 아니라 자연현상, 생태계의 순환등등으로 부른다. 윤회를 좁게 규정하자면 네발달린 짐승까지이다. 그 중에서도 약간의 인지와 의식이 있는 것에 한정된다. 물고기가 새를 윤회의 대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회란 의도된 행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결코 본능이나 무의식적으로 행한 것이 윤회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의 중심은 인간일뿐이다. 다시 말해서 동물이나 다른 존재를 윤회의 대상에 올려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번쇄한 논쟁이나 쓰잘데기 없는 잡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미가 윤회를 할까, 뱀이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날까?.. 라는 것은 번뇌나 망상만 키울 뿐이다. 자신의 몸에 꽂혀있는 독화살부터 제거하고 볼 일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작자들은 윤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있다느니 없다느니 단멸론이나 영원론에 빠져있는 외도들이다. 또한 윤회를 부정하는 작자들은 불교도가 아니다. 무늬만 불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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