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윤회에 대한 댓글

실론섬 2016. 6. 7. 17:51


삶이란 윤회의 연속이다
세상이 없다고 믿고서 현생에서 악행을 일삼으며 제 멋대로 살다가 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두 가지를 모두 잃어 버린다. 첫째는 지옥이 있다면 악행의 업으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둘째는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현생이 일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

저 세상이 있다고 믿고 선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를 모두 얻는다. 첫째 이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윤회가 있다면 현생의 선행으로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요, 둘째 설사 저세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현생의 선행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칭송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심찰나적으로 생멸(죽고 태어남)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삶이란 윤회의 흐름이요 연속일 뿐이다. 어릴적의 나와 지금은 나는 다르고, 지금의 나와 10년후의 나는 다를 것이다. 1초전의 나와 1초후의 나는 다르다. 이렇듯 우리는 몸과 마음이 심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며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져 가는 것이다. 

생과 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방이 있고 중간에 문이 하나 있다고 하자. 왼쪽의 사람이 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나간다고 할 때, 오른쪽 사람이 볼 때 문을 닫고 들어오는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오른쪽 사람이 문을 닫고 왼쪽으로 나간다고 했을 때, 왼쪽 사람이 볼 때는 문을 열고 왼쪽으로 들어오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태어남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태어남으로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붓다께서는 단멸론과 영원론을 외도라고 분명하게 부정하였다. 이 죽음이 끝이라면 단멸이요, 이 죽음뒤에 저세상이 영원하다면 영원론이다. 윤회란 단멸론도 영원론도 아니다. 윤회란 또다른 태어남의 조건지워짐이다. 계속하여 태어남의 조건지워짐을 만든다면 생사를 거듭하며 흘러갈 것이고, 어느 순간에 태어남의 조건지워짐을 소멸시킨다면 이 생이 마지막 생이며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안다고 하는 것이다.

윤회가 있다고 한다면 영원론이요
윤회가 없다고 한다면 단멸론이다.

이 둘은 모두다 불교가 아니다. 외도일 뿐이다.

업이란 의도된 행위의 결과이다(도덕적 인과율)

업이란 말과 몸과 입으로 의도된 행위를 한 결과물이다. 이런 의도된 행위만이 업을 잉태하고 윤회의 조건을 만든다. 윤회의 조건(조건지워짐)을 만들지 않으면 다시 태어남이란 결과도 없다. 원인과 조건없이 결과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교리. 의도된 행위 = 업, 조건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나도 모르게 발밑에 있는 지렁이를 뭉개서 죽였다. 이런경우 업이 잉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적으로 지렁이를 밝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죽고 다시 싹이 나지만 이걸 윤회라고 하지 않는다. 굼벵이도 지렁이도 아메바도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지만 이걸 윤회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물이나 이런 생물들은 의도적 행위(스스로 옮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능력/의지가 없음)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걸 뭐라고 할까? 그건 자연의 순환, 생태계의 순환, 자연현상이라고 부른다. 나무나 궁벵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윤회가 아니라 자연현상, 생태계의 순환등등으로 부른다. 

윤회를 좁게 규정하자면 네발달린 짐승까지이다. 그 중에서도 약간의 인지와 의식이 있는 것에 한정된다. 물고기가 새를 윤회의 대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회란 의도된 행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결코 본능이나 무의식적으로 행한 것이 윤회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의 중심은 인간일뿐이다. 다시 말해서 동물이나 다른 존재를 윤회의 대상에 올려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번쇄한 논쟁이나 쓰잘데기 없는 잡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미가 윤회를 할까, 뱀이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날까?.. 라는 것은 번뇌나 망상만 키울 뿐이다. 자신의 몸에 꽂혀있는 독화살부터 제거하고 볼 일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작자들은 윤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있다느니 없다느니 단멸론이나 영원론에 빠져있는 외도들이다. 또한 윤회를 부정하는 작자들은 불교도가 아니다. 무늬만 불교일 뿐이다.

훌륭한 이름 석자 남기고

윤회에 대한 교리가 중국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과 많은 갈등을 낳았다. 중국에서는 온갖 동물들을 동원하여 윤회론을 펼쳤고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가 과거 몇겁전에는 내 wife였을 수도 있고, 지금의 아버지가 내 자식이었을 수도 있고, 저 돼지가 과거에 나였을 수도 있다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무한정의 엉터리 윤회론을 펼쳤다. 그 결과로 중국불교는 황제들로부터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법난을 맞이하고 불교계가 황폐화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의 어머니가 먼 과거세에 내 wife 일수도 있었고, 지금의 아버지가 먼 과거세에 내 자식이었을 수도 있다.. 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번뇌와 망상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조건을 만들었기에 법난을 당했던 것이다.

붓다께서는 오직 말씀하시길 ... 내가 윤회를 거듭하며 짐슴으로 태어나서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저 겐지스 강물보다 많을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잘못을 하여 목이 짤려서 흘린 피가 저 겐지스 강물보다 많을 것이다... 라고 엄중하게 훈계하고 있을 뿐이다.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윤회를 하면서 육도중에서 가보지 않은 세계가 없고 우리가 즐거움을 맛보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들이 괴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다시 우리들은 인간의 몸을 받아 지금 여기에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 이곳에서 열심히 정진하여 해탈하고 성불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합시다... 또다시 짐승이나 악처에 태어나서 목이 잘려 흘린 피로 이미 겐지스강보다 더 많이 흘린 피에 보태지 말자라는 뜻일 것이다.

선행을 하면 나도 즐겁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줄거움을 준다.
악행을 하면 나도 괴롭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괴로움을 안겨 줄 뿐이다. 

악행을 하여 이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이름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서 비난을 받을테니 ... 입덧한다고 온갖 음식을 구하러 다닌 아버지나, 세상에 태어나 자식이라고 미역국 먹고 몸을 추스린 어머님을 생각해서라도 호적에 올린 이름 석자 부끄럽게 하지 않고 내 자식들이 좋은 아빠라고 기억해 주고 제사상 차린다면 그게 불교믿고 붓다믿은 보람 아니겠는가.

결론을말하자면
나무가 죽고 새싹이 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지 않는다.
번데기나 아메바나 굼벵이가 죽고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지 않는다.
새나 물고기는 윤회의 대상이 아니다. 
윤회란 의도된 행위의 결과물이다. 의도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식능력이 있고 그리고 자유의지에 의한 스스로의 결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도된 행위라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회의 축생계는 네발달린 짐승정도에 국한된다. 

중국불교에서 윤회는 민간신앙등과 뒤섞이면서 온갖 희안한 스토리들을 양산해 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 엄마는 과거에 내 wife 였을 수도 있고, 내 아버지는 과거에 내 자식일 수도 있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까지 전개를 하였다. 그러니 황제라는 사람이 듣고 보니 얼마나 기가 차겠나... "내 어머니가 과거에 내 wife 라니..." 그러니 불교말살의 법난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도가 지나치면 넘치는 법이고 쑥대밭이 되도록 당하는 것이다.

우리들 삶이란 업의 연속이요 흐름이다. 업을 만들면 윤회의 조건지워짐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죽고 태어난다. 하지만 조건지워짐을 더이상 만들지 않으면 그건 해탈이요 열반인 것이다. 

따라서 윤회가 있다고 하면 영원론이고, 윤회가 없다고 하면 단멸론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조건지워짐을 만들면 돌고 돌뿐이고 조건지워짐을 만들지 않으면 stop 하니 있다 없다가 아니다.

윤회를 믿지 않고 지옥을 믿지 않고 악행을 해도 말릴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옥이 없다고 함부로 까불다가 막상 죽고나서 지옥이 있으면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지옥이 있든 없든 선행을 하면 두 가지를 모두다 얻는다. 천상의 세계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리... 내가 착한일하고 내 마음이 행복하고 따뜻해 지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윤회가 있다는 증거
초등학생을 위한 설법...

윤회가 있을까 없을까? 있다면 어떻게 증거를 들이댈 것인가? 
조건 지워짐이나 연기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은 분명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무언가 현재의 나가 있게 했기에 현재의 내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내 모습이 10-20년후의 내 모습을 결정하는 원인이 됨은 분명해 보인다. 악행을 거듭하는 원인을 만들면 감옥에서 평생을 썪는 결과가 나오지 결코 로또복권에 당첨되어 수사망을 피하여 크루즈 유람선타고 카리브해에서 비키니 미녀들과 쾌락을 만끽할 수 있을리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내 삶은 업의 연속이요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걸 무시하고 물이 거꾸로 가는 자연의 이치는 없다.

우리는 왜 이세상에 태어날 때 각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까? 추하고 잘생기고 부자고 가난하고 건강하고 허약하고 하는일마다 안되고 하는일 마다 잘되고... 왜 각자 타고난 조건이 다를까? 이걸 과거에 수많은 불자들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거참 어떤 작자는 로또복권식으로 통안에서 구슬 구르다가 당첨되는 식으로 태어난다고 해서 내가 몽둥이 찜질을 한 적도 있다. 불교에서 로또 복권식으로 인생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다르게 태어날까? 이걸 과학적이든 상식적이든 철학적이든 어떤 대답을 하든지간에 가장 명쾌한 답은 다음과 같다.

업지은 대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또다른 이유나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의 높은 지혜를 얻고자 하니 댓글을 부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