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우빠니샤드와 초기불교에서 업과 윤회

실론섬 2016. 7. 19. 20:25

우빠니샤드와 초기불교에서 업과 윤회

이거룡/선문대 통합의학대학원 교수


Ⅰ. 머리말

Ⅱ. 우빠니샤드에서 업과 윤회사상의 형성

Ⅲ. 초기불교에서 업설의 불교적 변용

Ⅳ. 윤회의 주체문제에 대한 우빠니샤드전통과

초기불교의 입장 비교

Ⅴ. 맺는말


I. 머리말


우빠니샤드(Upaniṣad)와 불교는 이른바 “축(軸)의 시대”1)에 인도

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두 사상으로 꼽힌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2-3

세기의 시차를 두고 불교는 갠지스강을 경계로 그 위의 동북부에서

일어났고 우빠니샤드는 그 아래의 도압(Doap)지역을 거점으로 형

성되었다 할지라도, 이 두 사상은 거의 동시대에 갠지스강 유역에

서 형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이 거의 동시대에 인

접한 지역에서 발생한 두 사상이지만, 그 내용으로 보면 우빠니샤드

와 불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특히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Ātman, 我) 개념은 불교의 무아설(無我說, anātmavāda)과 정면으

로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또한 우빠니샤드와 불교는 업

(業)과 윤회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를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다. 이 시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산물이다(카렌 암스트롱지음, 정영목 옮김,『 축의 시대』, 

서울: 교양인, 머리말).


본 논문은 우빠니샤드와 초기불교2)에서 업설과 윤회설이 형성 전

개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3) 이 과정에서 논의의

초점은 우빠니샤드에서 형성된 업과 윤회의 이론이 어떻게 초기불

교에서 변용(變容)되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업과 윤회의 주체 문제

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사실 우빠니샤드에서 형성된 업과 윤회의

이론이 초기불교로 수용되면서 우빠니샤드전통과 불교 사이에 가

장 중요한 논점은 윤회의 주체문제였다.4) 필요에 따라서는 우빠니샤

드와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베단따(Vedānta)나 부파불교의 견해를

참고하였다. 윤회의 주체문제에 대한 우빠니샤드전통과 초기불교

의 입장은 다음 3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1) 초기불

교는 윤회의 주체를 부정했는가? 2)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입장은

무아설과 양립불가능한가? 3) 아뜨만을 인정하는 우빠니샤드전통은

윤회의 주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2) 석가모니 붓다의 재세(在世)시부터 입멸 후 1-2세기까지의 불교, 즉 붓다께서 직접 교법을 

설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교단의 신앙과 사상을 가리킨다(일지,『 붓다·해석·실천』, 서울: 

불일출판사, 1991, p. 74).

3) 업과 윤회는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지만, 처음부터 동시에 서로 관련을 지니며 

전개된 것이 아니라, 각기 독자적으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나중에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신화에는 까르마의 법칙과 무관하게 윤회가 이해되었다는 흔적이 있다. 

(Wendy Doniger O’Flaherty, Hindu Myths , New Delhi:Penguin Books India, 1980, pp. 37-43).

4) 무르티(T.R.V. Murti)의 견해에 따르면, 인도철학사에서 유아설과 무아설의 대립은 근세 유럽철학의 

합리론과 경험론 간의 갈등 이상으로 첨예한 것이었다(무르띠지음, 김성철 옮김,『 불교의 중심철학』, 

서울: 경서원, 1995, p.237). “무아설과 윤회설의 양립을 긍정적으로 보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초기불교에 미친 인도사상의 유산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김호성,「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를 읽고」,『 인도철학』 제5집, 서울: 인도철학회, 1995, p. 321).


Ⅱ. 우빠니샤드에서 업과 윤회사상의 형성


이미 베다(Veda)시대부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었

다. 그러나 업(karma)5)과 윤회(saṃsāra)6)에 대한 이론이 성립되기

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리그베다』(Ṛg-veda , x.2.7) 에는

야마(Yama)가 필멸자 중에서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처음

으로 발견한 자라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현세에 악행을 한 자가 사

후에 가는 곳으로 천(天)공(空)지(地) 3계의 아래에 있는 명부(冥府,

naraka)가 언급된다.『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 xii.4.36)에

는 지옥에 대한 묘사가 더욱 선명해진다. 브라흐마나(Brāhmaṇa)문

헌에서는 지옥의 공포가 한층 상세하게 묘사되며, ‘내세에서 죽음’

(punarmṛtyu)에 대한 두려움이 구체화된다.7) 희생제에 대한 바른

지식을 지니지 못한 자, 게으름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못한 자는 사

후에 다시 죽음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죽은 자가 다시 지상으로 돌

아온다는 윤회 또는 환생의 개념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죽은 자

들은 어디로 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태어나는가? 이에 대한 고대 인

도인들의 대답은 우빠니샤드에서 구체화된다.

5) karma는 kṛ(행위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행위’라는 의미를 지니며, 업설과 관련해서

‘행위의 여력’ 또는 ‘잠재력’을 의미한다.

6) saṃsāra는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과 ‘흘러가다, 움직이다, 불다’를 뜻하는 동사어근 

sri가 결합된 말이며, 문자적으로 ‘함께 흘러감, 이동, 방황, 생의 전환’등을 의미한다.

7) 辻道四郞, ヴェ―ダとウパニツャシド (東京: 創元社, 1953), pp. 100-104.


1. 우빠니샤드에서 까르마의 법칙과 윤회

업과 윤회이론의 시원에 대한 문제는 인도사상사에서 가장 큰 논

쟁거리 중의 하나다. 아리야인(Āryan)들의 베다에서 그 시원을 찾

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토착 선주민들의 물활론적 사유 속에 이미

업과 윤회에 대한 믿음의 싹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8) 또는 업

과 윤회이론이 고대의 슈라마니즘(Śramaṇism, 沙門傳統)에서 시작

되었다고 보거나,9) 심지어는 인도 아대륙 바깥에서 유입되었다고 주

장하는 학자들도 있다.10) 고얄(S.R. Goyal)의 지적처럼,『 리그베다』

에서 업과 윤회이론의 시원을 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

다. 아리야인들이 인도 아대륙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토착 선주민

들의 믿음 속에 업과 윤회 개념의 싹이 있었으며, 그것은 후기베다시

대에 접어들면서 차츰 아리야인들의 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8) S. Radhakrishnan은 Rig-veda 의 Ṛta(天則)가 업개념의 시원이라고 주장한다(라다크리슈난지음, 

이 거룡옮김,『 인도철학사 1』 서울: 한길사, 1999, pp. 161-162). 한편 S.R.Goyal에 따르면, 

Rig-veda 는 철저하게 현세 지향적이며, 윤회이론의 시원을 베다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A History of Indian Buddhism, Jaipur: M/s Kusumanjali Book World, 1987, pp. 46-47).

9) G.C. Pande에 따르면, 업과 윤회의 이론은 아리야인들이 인도 아대륙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비(非)베다적 사상(Śramaṇism)으로부터 베다전통 속으로 유입된 것이다(S. R. Goyal, 같은 책, p. 47).

10) 업과 윤회이론의 시원에 대해서는 S.R. Goyal, 같은 책, pp. 46-48을 보라.


브라흐마나시대에 들어 제식의 집행이 중요하게 되었을 때, 리따

는 희생제(犧牲祭, yajña)와 동의어가 된다. 까르마라고 불리는 희

생제는 삶 전체를 압도하며, 모든 행위는 희생제와 관련하여 규정되

어야 한다. 희생제 없이는 어떤 것도 희망하거나 얻을 수 없다. 오직

희생제를 통해서 사람은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11)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도 희생제의 영향 하에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스스로의 지위를

얻었다.12) 선행의 힘이 인정되며, 사람의 의무가 강조된다.13) 심지어

이 의무의 이행으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의무의 이

행과 바라는 바의 성취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은 분명히 업이

지니는 필연성 또는 법칙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업설의 단

초는 브라흐마나문헌에 나타나고 있지만, 윤회 환생의 형태는 아니

다.14)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업설은 처음부터 윤회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설해진 것은 아니다.

11) Edward Washburn Hopkins, Religions of India (Boston: Ginn & Co, 1902), p. 204.

12)Ś atapatha-brāhmaṇa , iii.1.4.3; iv.3.2.5.

13) 대개 4가지 의무, 즉 1) 신들에 대한 의무(희생제), 2) 시성(rish)들에 대한 의무(베다공부), 

3) 조상들에 대한 의무(자손의 번식), 그리고 4) 벗들에 대한 의무(후한 대접)가 규정된다.

14) Edward Washburn Hopkins, Religions of India (Boston: Ginn & Co, 1902), p. 199.


우빠니샤드시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적인 사색이 진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까르마의 법칙은 윤회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논의된다.

베다에서 까르마는 희생제, 즉 단지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행위라는

의미가 강했지만, 우빠니샤드에서 업설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 결합

됨으로써 까르마의 의미에는 윤리적 측면이 현저해진다. 선하게 사

는 사람이 고통을 겪거나 악하게 사는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것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것이다. 업의 법칙, 행위와 이에 대한 과보에

대한 믿음은 우빠니샤드의 사상이 점차 베다의 자연주의, 신비주의

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5) 홉킨스(Hopkins)는 까르

마의 법칙이 희생제, 고행, 참회에 대한 고대의 믿음에 큰 충격을 주

었다고 지적한다.16)

15) James Hastings, ed.,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1), vol. vii, p. 673.

16) Subodh Kapoor, ed., The Hindus (New Delhi: Cosmo Publications, 2000), vol. 3, p.1018

에서 재인용.


업설의 분명한 형성은『 브리하드아란야까 우빠니샤드』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실로 사람은 선행에 의하여 선하게 되고 악행에 의하

여 악하게 된다.”17) 여기서 야갸발끼야(Yājñavalkya)는 까르마를 다

음과 같이 이해한다. 사람은 욕망을 지닌다. 그의 욕망과 마찬가지

로 그의 결심이 있다. 그의 결심과 마찬가지로 그의 행위가 있다. 그

가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같이 그는 과보를 거둔다. 다시 말하

여, 사람은 그의 행위로써 자신의 마음이 집착한 대상을 얻는다. 자

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완전히 향수한 후에 그는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다.18)

17) iii.2.13; iv.4.3-6. “puṇyo vai puṇyena karmanād bhavati/ pāpaḥ pāpeneti//”

18)B ṛhadāraṇyaka-upaniṣad , iv.4.5, 6. 여기서 욕망을 윤회의 원인으로 보는 야갸발끼야의 입장은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하며, 또한 Bhagavadgītā 의 niśkāmakarma교의에 의하여 지지된다(S.R. Goyal, 

같은 책, p. 48).


각자의 까르마에 따라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

이 묘사된다. “마치 나방이 풀잎의 끝에 왔을 때,〈 몸을 쭉 뻗어서〉

한 번 더〈 다른 풀잎 쪽으로〉 다가간 후에 그것(다른 풀잎)을 향하

여 자신을 함께 끌어당기듯이, 이 자아(ātamn)는 이 몸을 버리고 무

지를 몰아낸 후에,〈 다른 몸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그쪽으로〉 다가가

서 그 자신을〈 그쪽으로〉 끌어당긴다.”19) 전생(轉生)개념은『 찬도기

야 우빠니샤드』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리가 사후에 자

신의 업에 따라서 나아가게 되는 여러 단계들이 아주 세밀하게 다루

고 있다. “여기서 그 행위가 선했던 자들은 속히 훌륭한 자궁, 즉 브

라흐민(brahmin)의 자궁, 끄샤뜨리야(ksatriya)의 자궁, 또는 바이

쉬야(vaiśya)의 자궁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행위가 악

했던 자들은 속히 나쁜 자궁, 즉 개의 자궁, 돼지의 자궁, 또는 짠달

라(caṇḑala, 최하층 천민)의 자궁을 얻을 것입니다.”20) “금을 훔친 자,

술을 마신 자, 스승의 침대를 욕되게 한 자, 브라흐민을 살해한자, 이

네 부류의〈 악인〉 그리고 또한 이들과 사귄 다섯 번째 부류의〈 악

인〉은〈 신의 길이나 조상의 길이 아닌 제3의 상태〉로 떨어질 것이

다.” 21)

19) iv.4.3. tad yathā tṛṇājalā tṛṇasyāntaṃ gatvānyam ākramam ākramyātmānam upasaṃharati/ 

evam evāyam ātmedaṃ śarīraṃ nihatyāvidyāṃ gamayitvānyam

ākramyātmānaṃ upasaṃharati// Bhagavadgītā (ii.22)에서는 사후의 윤회를 “마치 헌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20)C hāndogya-upaniṣad , v.10.7.

21)C hāndogya-upaniṣad , v.10.9. 이외에도 Katha-Upanisad , i.1.5. “죽음의 존재(인간)는 곡식의 

낱알처럼 익어서 떨어지고(죽고) 곡식의 낱알처럼 다시 태어난다.”;Bṛhadāraṇyaka-upaniṣad , iv.3.37-38, 

iv.4.1-5등에도 윤회의 개념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우빠니샤드에서 까르마의 법칙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

결합되면서 업의 ‘자기 책임성’ 또는 필연성이 업설의 전면에 부각

된다. 어떤 행위에 대한 과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그 행위

자에게 귀속된다는 사고방식이 확립된다. 행위자에게 그 과보가 귀

속된다는 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는 법칙이다. 즉 까르마의 법칙은

선행과 악행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보존되는 법칙이다. 물론 이 법

칙이 운용되는 배후, 즉 법칙의 운용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

지만, 후기 베단따와 같은 유신론에서는 까르마의 법칙이 이슈와라

(Īśvara, 自在神)의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베단따의 경

우에도 이슈와라는 단지 까르마를 정확히 기억했다가 분배하는 분

배자(distributor)라는 의미를 지닐 뿐이며, 각 개인의 까르마 자체를

자의적으로 가감하는 자는 아니다.22)

22) 니야야(Nyaya)와 바이쉐쉬까(Vaisesika)는 업력이라 할 수 있는 불가견력(不可見力,adrsta)이 

비지성적이고 무의식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신의 지배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한편, 

자이나교. 불교, 상키야, 미맘사(Mīmāṃsa)에서는 까르마의 법칙이 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윤회에 대한 이론은 오화설(五火說)과 이도설(二道說)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23) 오화설은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지상 세계

에 태어나는 경로를 제사의 다섯 불(火)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으

며, 이도설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길이 이생에서의 삶에 따라 신의

길(神道, deva-yana)과 조상의 길(祖道, pitṛ-yana)로 나누어진다

는 것을 말한다. 오화설의 진리를 알고 숲에서 믿음과 고행으로써

명상을 한 자들은 사후에 화장의 불꽃을 따라 브라흐마(Brahmā, 梵

天)의 세계(梵界)로 인도되어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

길이 바로 신도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희생제를 지내고 공공의 의무

를 다하며 자선을 베푼 자들은 달(月), 즉 소마의 세계로 가며, 이 길

이 곧 조상의 길이다. 조상의 길로 간 자들은 그곳에서 스스로의 공

덕만큼 살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24)

23)C hāndogya-upaniṣad , v.3.1-3.

24)C hāndogya-upaniṣad , v.4.1-v.9.1; v.9.2-v.10.5.


2. 업의 필연성과 숙명론

우빠니샤드에서 형성된 업설의 요체는 필연성이다. 즉 행위는 반

드시 이에 상응하는 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신체적, 심리적 상태는 그의 과거의 업에 기인한다. 과거의

업은 우리의 현재 존재 상태를 결정하며, 현재 우리의 행위들은 우리

의 미래 존재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업의 필연성은 흔히 오해되거나 악의적으로 해석되었다. 업설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업설을 믿는 사람들도 그것을

숙명론 혹은 결정론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하는 한, 업

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도덕적 행위들을 단념시키는

교의가 아니다. 이 점은 우선 우빠니샤드에서 업설이 형성되는 과정

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다시대에는 사람의 길흉화복과 운명이

신(deva)들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들을 위무하기

위한 희생제와 찬가가 종교적인 삶의 핵심이었다. 브라흐마나시대

는 제사지상주의시대였다. 인간의 운명과 행불행은 오직 제사를 어

떻게 지내느냐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우빠니샤드에서 확립된 업설

은 사람의 운명은 사람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여, 사람의 운명은 신들이나 제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초기 우빠니샤드에서 업설이 숙명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브리하드아란야까 우빠니샤드』에 나오는 야갸발끼야와 자라

뜨까라바 아르타바가(Jaratkārava Arthabhāga)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말한 것은 까르마이며, 그들이 찬미한 것은 까르마

였다.”25) 까르마를 찬미한다는 것은 결코 이들이 업설을 숙명론적으

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까르마의 법칙

은 오히려 현재의 삶을 토대로 보다 나은 삶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

으로 이해된다. 야갸발끼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장장이가 금

덩어리를 취하여 또 다른 하나의 더욱 새롭고 더욱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어내듯이, 이 자아는 이 몸을 버리고 무지를 떨쳐버린 후에 자신

을 조상, 간다르바(gandharva), 신(deva), 쁘라자빠띠(Prajāpati), 브

라흐마(Brahmā) 또는 다른 존재들처럼 더욱 새롭고 아름다운 모양

으로 만듭니다.”26) 다시 말하여, 까르마의 법칙에 따라 윤회하는 것

은 인간이 더욱 새롭고 아름다워지는 과정이다.

25)B ṛhadāraṇyaka-upaniṣad , iii.2.13: “tau ha yad ūcatuḥ/ karma haiva tad ūcatuḥ atha yat

praśaśaṃsatuḥ karma haiva tat praśaśaṃsatuḥ//”

26)B ṛhadāraṇyaka-upaniṣad , iv.4.4: “tad yathā peśaskārī peśaso mātrām upādāya,

anyan navataraṃ kalyāṇataṛaṃ rūpaṃ tanute, evam evāyam ātmā, idaṃ śarīraṃ

nihatya, avidyāṃ gamayitvā, anyan navataraṃ kalyāṇataṛaṃ rūpaṃ kurute, pitṛyaṃ vā,

gāndharvaṃ vā, daivaṃ vā, prajāpatyaṃ vā, brahmaṃ vā, anyeṣaṃ vā, bhūtānām//”


이와 같이 초기 우빠니샤드에서 업설은 결코 염세적이거나 숙명

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업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각 개인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지닌 행위자이다. 모든 사람은 행위할 수

있는 본래적인 권리와 자유를 지닌다. 그러나 일단 행위를 하게 되

면, 그는 그 결과에 연루된다. 따라서 업설은 자유와 책임을 연결한

다. 업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운명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며, 능동

적으로 추구한 인간의 노력을 옹호한다. 현재의 내가 누구냐에 관심

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

다. 업설은 사람의 자발적인 행위를 부정하거나 과거의 업보를 무거

운 짐으로 강제하는 숙명론이 아니다.


Ⅲ. 초기불교에서 업설의 불교적 변용


1. 의지작용(cetanā)으로서 업

초기불전에는 우빠니샤드의 업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다수 있다. 예를 들어,「 출라깜마비방가 숫따」

(Cūḷakammavibhaṅga-sutta)에서 수바(Subha)에게 설해진 업설

『 브리하드아란야까 우빠니샤드』의 입장과 상통한다. “바라문 청

년이여, 이와 같이 중생들은 자신의 업을 지닌 자로서, 그 업의 상속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지니며, 그 업을 친지로 하며, 그 업을 의지

처로 지닙니다. 그들을 저급한 존재로 또는 수승한 존재로 차별하여

태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업입니다.”27)「 데바두따 숫따」(Devadūtasutta)

는 업설에 대한 당시의 대중적인 믿음에 의거하여 야마(Yama)와 그의 

사자(使者, devadūta)들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다.28) 비구들에게 설해진 

이 숫따에서 야마는 지옥세계의 주인으로 묘사되며, 그의 사자들이 데려온 

다양한 죄인들의 행위들에 대한 심판자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업과 윤회에 

대한 초기 우빠니샤드의 사유가 초기불교에도 여전히 수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7) “ kammassakā, māṇ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kammaṃ satte vibhajati yadidaṃ hīṇappaṇītatāyā ti“(Majjhima Nikāya , vol. iii, p. 202).

28)M ajjhima Nikāya , vol. iii, p. 178ff.


그러나 우빠니샤드 전통의 업설은 불교에서 차츰 변용되었다.

대체로 불교는 행위에서 마음의 상태로 강조점을 옮겼다. 따라

서 일반적으로 행위라는 의미를 지니는 까르마는 불교에서 의지

작용(cetanā)으로 정의되는 경향이 강해졌다.29)「 빠타마산쩨따니

까 숫따」(Paṭhamasañcetanika-sutta)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

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적이고 만들어지고 축적된 업들

(sañcetanikā)이 현세나 다음 생이나 다른 생에 경험되지 않고 종

식된다고 말하지 않는다.”30) 또한「 닙베드히까 숫따」(Nibbedhikasutta)

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지작용이 업이라고 말한다.”31)

물론 여기서 의지작용이란 도덕적 행위를 말한다. 도덕적으로 비결

정적인 의지작용은 도덕적 과보를 지니지 않는다. 의지작용은 이와

함께 있는 정신적 성향과 신체적 기질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실 몸(身)과 말(口)과 뜻(意)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의지작용

의 영향에 기인한다. 만일 어떤 행위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업이란 행위가 의식적이

고, 숙고(熟考)되었고, 의도적(saṃcetanīya)일 때라야만, 그리고 그

것이 의식적으로, 숙고해서, 의도적(saṃcintya, 故思)으로 행해질

때라야만 확실히 업이 된다.”32)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업을 정화하기

위한 실천은 자이나교와 달리 마음의 제어에 초점을 두게 된다. 즉

업을 축적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선하거나 악한 의도가 생겨나

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29)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A( ṅguttara Nikāya vol. iii, p. 415; 황순일,「 농사일의 

비유를 통해본 초기부파불교의 행위(Karman)이론」,『 釋林』 제38집 (서울: 동국대학교 석림회, 2004), 

p. 245.

30)A ṅguttara Nikāyai , vol. v. p. 292.

31)A ṅguttara Nikāyai , vol. iii. p. 415.

32) 에띠엔 라모뜨지음, 호진옮김,『 인도불교사1』 (서울: 시공사, 2006), p. 85.


업설의 주제와 내용은 자유의지와 행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가

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빠니샤드의 업개념이 초기불교에

수용되면서 업은 곧 의지작용이라는 사고방식이 확립되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우선 의지작용에서 생겨난 행위와 본능적인 행위, 또는

부지불식간의 행위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업설은 대개 무

의식적인 행위 또는 부지불식간의 행위를 고려 대상에 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행위는 행위자에게 어떤 속박하는 영향력을 야

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며, 오

직 의지작용에 따른 행위만이 도덕적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의지작용이 수반되지 않는 행위를 업설의 고려 대상에서 배제하

는 것은 열반의 문제와도 관련된다.33) 만일 예외 없이 모든 행위가

응보로 귀결된다고 가정하면, 본능적인 행위들은 경험세계의 삶에

서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열반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하면 심지어 열반 직전까지 도달한 사

람이라도 숨을 쉬는 등의 행위와 이에 부수하는 응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34)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업과 열반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열반이 있으려면 모든 행위의 완전한 소멸이 있

어야 하며, 모든 행위의 완전한 소멸이 없는 한 열반의 가능성은 없

기 때문이다. 응보를 부르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역설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33) 업은 필연성뿐만 아니라 초월가능성도 지닌다. 만일 업의 초월가능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열반)을 목표로 하는 종교는 성립될 수 없다.

34) Bhagavadgītā (iii.5)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있는 한 한 순간도 행위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여, ‘행위의 포기’(a-karma)는 불가능하며, ‘행위하는 포기’(renunciation in action), 즉 

‘이욕행’(離慾行, niśkāmakarma)이 강조된다.


2. 무아설과 업설

초기불교에서 까르마가 “의지작용”이라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은

무아설과 관련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여, 무아윤회의

이론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업의 심리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는 것

이다. 초기불교의 오온설(五蘊說)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다섯 요소

의 집합에 불과하며, 거기에는 고정 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존재란 무엇인가? 이른바

다섯 요소들이다. 다섯 요소들이란 무엇인가? 색, 수, 상, 행, 식이다.

이것을 존재라고 한다.”35) 이와 같이 불교는 상주불변하는 고정된 실

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교는 윤회를 인정한

다. 무아윤회의 입장에서는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 다니는 영

혼, 또는 개아의 이행(移行)과 같은 개념은 없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의 신체 기관은 해체되어 사라진다. 이생에서 내생으로 옮겨가는 영

혼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35)『 大正藏』 2, 181b.


무아윤회든 유아윤회든, 업과 윤회에 대한 설명에서 핵심은 업이

지속되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어야 한다. 1) 죽음의 순간에 어떻게 업이 보존

되고 지속되는가? 2) 업과 이로 인한 윤회과정에서 자기동일성이 어

떻게 확보되는가? 즉 죽음에도 불구하고 업이 지속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A라는 존재와 관련된 업이 B라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A에

게 귀속된다는 점이 설명되어야 한다. 사실 까르마가 단지 ‘행위’라

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잠재력’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과정

자체가 까르마의 연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적어도 현상적인 차원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과 단절로 관찰되기 때문에, 자기동일성을 지니

는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육체 이외의 어떤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행위의 잠재력 또는 여력으로서 까르마는 처

음부터 다분히 그 근저에 심리적인 요소를 깔고 있는 셈이다. 불교

에서 까르마의 의미가 단순히 신체적 행위(身)뿐만 아니라 말(口)과

뜻(意)까지 확장되는 것은 까르마의 이와 같은 측면이 드러나는 구

체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36)

36) 업을 신(身)구(口)의(意) 3업으로 나누는 방식은 우빠니샤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의업(意業)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잡아함경』에서 “업의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37)

고 한 것은 무아윤회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다. 또한『 도간경』(稻竿經)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

어서 옮겨가는 존재는 없으며,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다시 이어져

옮겨오지도 않는다. 인과 연의 손감(損減)이 없기 때문에, 업의 과보

에 대한 보응(報應)이 있다.”38) 여기서 업감(業感), 즉 업의 과보에 해

당하는 인식(karmaphalaprativijñapti)은 오온으로 이루어진 어떤 존

재의 현상적 죽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존속하는 것으로 간주된

다. 이로써 까르마의 도덕적 인과법칙을 확보하고자 한다.39)

37) “有業報而無作者”『( 大正藏』 2, 92c); S. Radhakrishnan, Indian Philosophy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vol.ⅰ, pp. 440-446 참조.

38) “衆生不從 此世至於後世。不從後世復至於此。然有業果因緣報應。不可損減”『( 大正藏』16, 818b).

39) V.P.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New Delhi: Mushiram Manoharlal, 1973), 

pp. 248-9 참조.


이와 같이 불교는 상주 불변의 영혼이 아니라 업의 상속을 상정하

고 있지만, 죽음 현상으로 분리되는 현생과 내생 사이에 업의 연속

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개

업의 상속은 비유를 통하여 설명된다. 촛불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타거나, 한 초에서 타른 초로 옮겨 붙었을 때, 어떤 고정적인 불의 주

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초가 있으면 촛불이 지속되고 초가 다 타면

촛불도 꺼진다. 또 한 초에서 다른 초로 불이 옮겨졌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촛불의 주체가 이동된 것은 아니다. 초가 다 타면 언제든지

그 촛불은 없어지게 되고, 불이 없어진 다음에라도 다시 불을 켜서

초에 붙이게 되면 촛불이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나라고 하

는 영원한 주체가 없이 오직 업의 불길에 따라서 윤회하게 된다는 것

이다.


이와 같은 설명과 비유에도 불구하고 무아설이 단지 “죽음과 재생

사이에 윤회하는 실체의40) 부정”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한, 업설의

요체인 자업자득, 또는 업의 자기 책임성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문제

가 있다.41) 왜냐하면 윤회의 당체를 부정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업

을 지었는데 다른 어떤 사람이 그 과보를 받을 수도 있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윤회하는 실체가 없다면, 어떤 사람이 죽을 때

그가 죽기 전에 지은 업의 과보는 누가 받는가? 만일 개별적인 인격

체로서 자아가 없다면, 누가 윤회하며, 누가 과보를 받으며, 또한 누

가 열반을 이루는가에 대하여 묻는다. 불교 안에서도 무아설은 윤

회의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초기불교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국내에서도 “무아이론과 윤회이론은 양립할 수 없다”42)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양자가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43)

40) ātmā, bhūtātmā, jīva, pudgala, liṅga-deha, paṭisandhi(죽음과 재생 사이의 연결고리)등의 용어로 

표현된다.

41) Bareau는 초기부파불교가 직면한 모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업자득의 필연성을 핵심으로 하는 

업설과 무아설의 모순이라고 지적한다(황순일, p. 246, 주 12에서 재인용).

42) 윤호진,『 무아 윤회문제의 연구』 (서울: 민족사, 1992), 머리말.

43) 정승석,「 무아와 윤회의 양립문제」,『 인도철학』 제4집 (서울: 인도철학회, 1994), p.257.


Ⅳ. 윤회의 주체문제에 대한 우빠니샤드전통과 초기불교의 입장 비교


우빠니샤드에서 형성된 업설이 초기불교에 수용되면서 처음부터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부분은 바로 ‘윤회의 주체’ 문제이다. 여기

서 윤회의 주체란 전생(轉生)이 가능하도록 현생과 내생으로 이어주

는 원리를 말한다. 본 장(章)에서는 다음의 3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윤회의 주체문제에 대한 우빠니샤드전통과 초기불교의 입장을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44) 1) 초기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부정했는가? 2)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입장은 무아설과 양립불가능한가? 3) 아뜨

만 또는 뿌루샤의 실재를 인정하는 우빠니샤드전통은 윤회의 주체

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44) 윤회의 주체 문제 외에도 우빠니샤드와 초기불교의 윤회설 사이에는 몇몇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면, 우빠니샤드에서는 윤회의 범위가 나무나 식물의 씨앗으로까지 확장되지만, 불교에서는 

인간이 나무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고방식은 없다(Varma, 같은 책,pp. 164-165참조).


1. 초기불교는 윤회의 주체를 부정했는가?

무아설을 근본 교의로 하는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초기불전에는

행위자(kartar)의 개인적인 책임성을 수반하는 까르마에 대한 강조

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염라대왕

(Yamarāja)은 악행을 한 어떤 비구에게 개인적인 응보를 강조한다.

“그대는 나태함 때문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선행을 쌓지 않았소. 그

대의 나태함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오. 이 악업은 그대의 어머

니가 지은 것도 아니고,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친척, 신, 사문, 바

라문이 지은 것도 아니요. 오직 그대가 이 악업을 지었소, 그대가 이

과보를 받을 것이오.”45)『 담마빠다』 165에서 “실로 자신에 의해 악이

행해지고, 자신에 의해 스스로 타락되며, 자신에 의해 악이 행해지지

않고, 자신에 의해 스스로 청정해진다.”46)는 언급도 개인적인 책임성

을 함축하고 있는 업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슈와고샤(Aśvaghoṣa)는

『붓다짜리따』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행한 자, 실로 그가 이로

인한 과보를 감당한다.”47) 이와 같은 경전 구절들은 윤회하는 주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45)『 앙굿따라니까야』 제1권, 대림스님 옮김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6), p. 369.

46) “attanā hi kataṃ pāpaṃ attanā saṃkilissati/ attanā akataṃ pāpaṃ attanāva visujjyati/”

Dhammapada , The Dalai Lama Tibeto-Indological Studies Series vol. iv, (Varanasi: Central Institute 

of Higher Tibetan Studies, 1992), p. 166. 

47)B uddhacarita , xx.3.2: “yā kartā so hi bhoktā/”


재생( punarbhava)개념 또한 윤회하는 실체와 재생에 대

한 믿음을 함축하고 있다.『 디가니까야』의「 마하빠다나숫따」

(Mahāpadāna-sutta),『 맛지마니까야』의「 아리야빠리예사나숫따」

(Ariyapariyesana-sutta)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

은 나의 마지막 생이다. 더 이상의 재생은 없다.”48) 이것이 붓다의 마

지막 생이었다는 붓다의 언급은 만일 그가 정각(正覺)을 얻지 못했

다면 한 번 또는 그 이상의 생을 다시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

다.『 디가니까야』의「 마하빠리닙바나숫따」(Mahāparinibbā-sutta)

에서 참된 제자는 지옥에 다시 태어날 지, 축생으로 태어날 지, 아

귀(preta)로 태어날 지, 또는 어떤 형벌을 받은 상태로 태어날지 안

다는 언급이 있다.49) 이 또한 사후에 여러 형태의 존재로 다시 태

어난다는 믿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붓다는 우리가 한 존재

에서 다른 한 존재로 계속하는 상태로 존재하며, 오랜 윤회의 과정

(dīghaṃ samsaritaṃ)을 겪어야 하는 것은 사성제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으면, 존재에 대한

갈망을 뿌리 뽑고, 재생을 멸하며(khinā bhavanetti), 이로써 더 이상

재생이 없는 상태가 된다. 여기서 “오랜 윤회의 과정”이라는 표현은

축적된 까르마에 따라서 거듭 재생하는 어떤 실체를 가리킨다고 봐

야 한다.

48) “ayam antimā jāti n’ atthi’ dāni punabbhavo/” 이 정형구는 니까야문헌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49)『 디가니까야』 제2권, 각묵스님 옮김,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6), pp. 192-196.


2.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입장은 무아설과 양립불가능한가?

석가모니 붓다는 엄연히 윤회를 전제로 하는 설법을 했고,50) 윤회

설은 불자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기능해왔다. 또한 위에서 보는

것처럼, 초기불전에는 행위자(kartar)의 개인적인 책임을 수반하는

까르마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아마 이것은 ‘윤회의 주체’와 무아설의 ‘아’(我, ātman)를 직결시킨 데

서 오는 오해가 아닌가 한다. 또는 우빠니샤드에서 확립된 윤회설에

서 윤회의 주체에 대한 오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

하여, 우빠니샤드에서 윤회의 주체는 아뜨만인데, 불교는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50) S. R. Goyal에 따르면, 붓다의 시대에 즈음하여 이미 업과 윤회이론은 문명화된 인도의

모든 지역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 경전 어디에서도 윤회에 대한 

믿음을 설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같은 책, p. 48).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물론 우빠니샤드에는 윤회의 주

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용어가 있으며,『 브리하드아

란야까우빠니샤드』(iv.4.3)의 ‘풀잎에 있는 거머리’와 ‘풀잎’의 관계

로 윤회를 설명하는 비유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아

뜨만이 사용되기도 한다.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뜨만은 궁

극적 실재로서의 아뜨만, 또는 유일무이’(ekameva-advitīya)한 아

뜨만 자체는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뜨만은 그 자체로 윤회를 겪

는 당사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되면 “지고지순하고

영원불변한 아(我)가 윤회의 고(苦)를 받는 수보자(受報者)가 된다

고 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51)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브라흐만

(Brahman)과 둘이 아닌(不二), 아뜨만이 윤회한다고 하면, 그것은

곧 브라흐만이 윤회한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51) 김호성,「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정승석)를 읽고」,『 인도철학』, 제5집 (서울: 인도철학회, 1995), 

p.320.


우빠니샤드에서 윤회의 주체를 가리키는 말로 아뜨만이 사용되는

경우에 그것은 1) 궁극적 실재로서의 아뜨만(Ātman)이 아니라, 개

아(個我, jīvātman)를 가리키는 말이거나, 2) “윤회를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윤회를 겪는 당사자의 토대(āśraya)”라는 의미로 이해되어

야 한다. 물론 이 둘 중에서 경험적 개아는 윤회를 겪는 당사자라는

의미에서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궁극적 실재로서의 아뜨만은

어떤 경우에도 윤회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 아뜨만은 윤회 바깥에

있다.


이제 다시 불교의 무아설과 윤회의 주체 문제를 생각해보자. 불

교는 무아설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

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아뜨만을 인정하지만 아뜨만 그 자체

는 윤회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아설을 주장하면서

도 무아와 무관하게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불

교는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같은 실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윤회의 주

체로서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 즉 무상한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무상한 것처럼, 윤

회를 겪는 당사자로서 윤회의 주체, 즉 우빠니샤드의 개아 또한 무

상한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끼샨(Y. Kishan)은 다음과 같이 말한

다. “무아설은 윤회하는 경험적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

라, 영원한 개아의 궁극적인 존재를 부정할 뿐이다.”52) 윤회의 당사

자는 곧 가아(假我)이며, 오온이다.53) 따라서 오온으로서 경험적 자

아를 윤회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무아설과 상충한다고 볼 수

없다.

52) Y. Kishan, “Anātmavāda and the Doctrines of Karma, Punarbhava and Bhūmis”, Bodhi-

Raśmi (ed. by Mahesh Tiwary, First International Conference on Buddhism and

National Cultures, New Delhi, 1984), p. 71.

53) 김호성, 같은 책, p.321.


베단따나 상키야에서 윤회의 주체는 미세신(微細身, sūkṣmaśarīra)

이다.54) 육체에 해당하는 조대신(粗大身, sthūla-śarīra)은

육체적인 죽음과 함께 자연으로 돌아가며, 아뜨만에 해당하는 원

인신(原因身, karāṇa-śarīra)은 조대신과 미세신의 토대가 되지만,

윤회의 주체는 아니다. 윤회를 겪는 당사자는 영원한 아뜨만이 아

니라 미세신이며, 미세신은 17종 요소들, 즉 5종 지각기관(pañca-

jñānebdrīya), 5종 행동기관(pañca-karmendrīya), 5종 쁘라나

(prāṇa), 마나스(manas), 붓디(buddhi)로 이루어져 있다.55) 미세신을

윤회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보면, 우빠니샤드 전통은 초기불

교와 큰 차이가 없다. 17종의 요소로 이루저진 미세신은 색수상행식

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오온의

집합이 무상한 것처럼, 우빠니샤드의 경험적 자아 또는 미세신 또한

무상하다.

54) Paul Deussen, The System of the Vedanta (Varanasi: Chaukhamba Surbharati Prakashan, 1987), 

pp. 325-326.

55)T he Oxford Dictionary of World Religions , ed., John Bowker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924.


3. 아뜨만을 인정하는 우빠니샤드전통은 윤회의 주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는 오온을 연결하는 어떤 공동토대 없이도 윤회가 가능

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주력했다. 이에 비하여 우빠니샤드전통은

어떻게 영원불멸, 유일무이한 아뜨만을 윤회의 토대로 설명할 것인

가 하는 문제가 주된 관심사이다. 인도사상사를 통하여 아뜨만 개념

이 이법적(理法的) 원리의 측면으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아뜨만을

생명의 원리로 구체화하는 작업이 일어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아뜨

만 개념을 차츰 구체화 하게 되는 것은 결국 윤회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법적 원리로 이해되는 아뜨만의 구체화는 우선 아뜨만의 개별

성(individuality) 문제와 관련된다. 즉 아뜨만을 편재적(vibhu)이

아니라 원자적(aṇu)인 실재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만일 아뜨만

이 단지 편재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유일무이하며 또한 변화가 있

을 수 없기 때문에 생명의 원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편재적인 아

뜨만은 윤회를 겪는 주체로서 개별적인 신체를 유지하는 토대가 될

수 없다. 아드와이따(Advaita) 베단따와는 달리 라마누자나 그 이후

의 실재론적 베단따에서 아뜨만을 원자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나56) 상키야에서 무수한 뿌루샤(puruṣa)를 인정하는 것은 우빠니샤

드전통 안에서도 행위자(kartar)의 개인적인 책임성을 수반하는 까

르마에 대한 강조로 봐도 무방하다. 아뜨만이 보다 적극적으로 구

체화되는 다른 한 측면은 앞에서 말한 미세신 개념이다. 미세신은

우빠니샤드전통에서 브라흐만과 불이(不二)인 아뜨만과 육체 사이

에 다른 어떤 개념을 상정함으로써 윤회의 주체를 설명하려는 노력

의 구체적인 산물이다. 미세신의 전조는 이미 우빠니샤드에서 ‘쁘

라나를 몸으로 삼는’(prāṇa-śarīra) 아뜨만, 또는 ‘쁘라나의 아뜨만’

(prāṇasyaātmā)57)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56) S. 라다크리슈난지음,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 4』 (서울: 한길사, 1999), p.348, 역주 14.

57)C hāndogya-upaniṣad , iii.14.


베단따에서는 무아설이 윤회설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교

를 비판하고 있지만, 엄격히 말하여 무아설에 비하여 유아설이 윤회

의 주체 문제를 설명하는데 보다 논리적인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

다. 베단따의 지적처럼, 오온의 상속을 가능케 하는 토대를 인정하

지 않기 때문에 무아설은 윤회의 핵심인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자

기동일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뜨만을 인정한다고 해서 윤

회의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빠니샤드

에서 아뜨만은 영원불변, 유일무이한 실체로 규정되는 측면이 강하

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여, 아뜨만은 죽을 수도 없고 다시 태

어날 수도 없는 궁극적 실재이기 때문에 윤회와 무관하다. 불교는

‘새(鳥) 없는 비행(飛行)’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우

빠니샤드전통은 ‘날지 못하는 새의 비행’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날지 못하는 새의 비행’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시된 우빠니샤드전

통의 대표적인 개념이 미세신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아뜨만 자체는 윤회의 주체가 되기 어려우므로 그 대신에 미세신을

상정하고 있지만, 미세신과 아뜨만의 관계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둘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또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인

가? 세 번째의 대안이 가장 바람직한 것 같지만, 그것은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우파니샤드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아뜨만은

모든 변화의 토대임에 분명하지만, 변화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 아

뜨만은 영원불변이며, 다만 무명으로 인하여 업에 물든 개아가 윤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청정무구한 아뜨만이 업에

물들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단지 무시(無始, anādi)라고 대답할

뿐이다. 결국 아뜨만과 경험적 개아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유아윤회설의 어려움은 어떻게 영원불변의 아트만이 윤회의 주

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아트만이 윤회하

는 영혼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있

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샹까라(Śaṅkara, 8세기)의 경우에는 ‘마

야’(māyā, 幻影)라는 개념을, 그리고 라마누자의 경우에는 ‘파리

나마’(pariṇāma, 轉變)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논리적인 어려움

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샹카라에게 마야는 결국 ‘설명할 수 없음’

(anirvacanīya)이다. 브라흐만이 윤회하는 영혼의 원인이요 토대라

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라마누자의

전변설은 브라흐만의 유한화(有限化)라는 심각한 종교철학적 문제

를 안고 있다.58) 이와 같이 심증으로는 유아설이 윤회의 이론에 적합

할 것 같으나, 논리적인 입장에서는 무아설의 입장과 결국 다르지 않

은 결과를 가져온다. 차이가 있다면, 불교에서는 ‘비행’(飛行)을 실재

로 인정하는데 비하여 우빠니샤드에서는 ‘새’(鳥)를 실재로 인정한다

는 것뿐이며, 이것은 철학을 위한 전제의 문제에 속한다.

58)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이거룡,「 라마누자의 범재신론(汎在神論)에 있어서 신과 세계의 

존재론적 연속성과 신의 유한화 문제」,『 인도철학』, 제4집 (서울: 인도철학회, 1994), pp.181-203 참조.


Ⅴ. 맺는말


지금까지 우빠니샤드에서 형성되고 초기불교에서 변용되는 업

과 윤회의 이론을 살펴보았다. 우빠니샤드의 핵심개념이 아뜨만이

라면, 불교는 아뜨만을 부정하는 무아설을 근본교의로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빠니샤드와 불교는 업과 윤

회의 이론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문제는 우빠

니샤드전통과 불교 사이에 가장 중요한 논쟁의 주제 중 하나였다.


불교전통 안에서도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 가능한가에 대한 뜨거

운 논쟁이 있었으며, 그 핵심에는 윤회의 주체문제가 있다. 다시 말

하여, 근본적으로 불교는 무아설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

를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무아설은 윤회설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윤회의 주체문제에 대한 우빠니샤드와 불교의 입

장을 비교하기 전에, 우선 우빠니샤드에서 형성된 업과 윤회의 이론

이 숙명론으로 오해되는 문제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야갸발끼야와

자라뜨까라바 아르타바가의 대화에서 보는 것처럼, 우빠니샤드전통

에서 까르마는 오히려 ‘찬미’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까르마의 법칙

은 현재의 삶을 토대로 보다 나은 삶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으로 이

해된다. 그것은 개인의 운명이 신이나 제사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초기불전에는 우빠니샤드의 업과 윤회 이론이 그대로 수용되었

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 여럿 있다. 그러나 차츰 까르마가 ‘의지

작용’(cetana)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것은 무아윤회를

설명하는 과정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무아설의 입장에서 윤회를

업의 상속으로 설명할 때, 업의 연속성은 육체적인 측면보다 심리적

인 측면에 기대어 설명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는 엄연히 윤회를 전제로 하는 설법을 했으며, 초기

불전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설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선 ‘윤회의 주체’(당체)와 무아설의 ‘아’(我)를 혼동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우빠니샤드의 아뜨만은 윤회의 주체가 아니다. 윤회의

주체는 경험적인 개아이며 아뜨만은 다만 윤회의 주체인 개아의 토

대일 뿐이다. 따라서 불교는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윤회설

을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아뜨만이든 무아

의 아(我)든 궁극적으로 윤회의 주체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베단따

나 상키야철학에서 윤회의 주체로서 제시되는 미세신은 아뜨만 또

는 뿌루샤가 아니다. 그것은 윤회 바깥에 있는 아뜨만(뿌루샤)을 윤

회에 개입시키기 위한 장치이며, 이와 같은 장치가 필요한 것은 아뜨

만 그 자체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세신을 윤회의

주체로 간주하는 우빠니샤드전통은 오온의 상속으로 윤회를 설명하

는 불교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윤회의 주체문제를 논리

적으로 설명함에 있어서는 두 전통 모두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불

교는 ‘새(鳥) 없는 비행(飛行)’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반면

에, 우빠니샤드전통은 ‘날지 못하는 새의 비행’을 설명해야 하는 어

려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