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멸진정(Nirodhasamāpatti)과 두 가지 열반 이론/황순일

실론섬 2016. 7. 16. 14:18

《불교학연구》제11호(2005.8)

멸진정(Nirodhasamāpatti)과 두 가지 열반 이론

황 순일(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전임강사)


I. 머리말


멸진정(Nirodhasamāpatti)은 구차제정1)의 형태로 정형화된 초기 부파불교의 선

정수행 전통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정은

폴 그리피스(Paul J. Griffiths)가 지적하고 있듯이2), 불교의 해탈론(soteriology)

에 있어서 한발 비켜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멸진정(Nirodhasamāpatti,

滅盡定)은 개념과 느낌이 정지된 선정(saṃjñāvedayitanirodha, 想受滅定)으로 

지칭되고 해석되면서 개념과 느낌을 포함한 모든 정신현상들이 정지되는 것으로서 

칭송되었으며3), 때때로 모든 불교 수행자들이 도달해야 될 목표인 열반(nirvāṇa)과 

동일시4)되기도 하였다.

1) 구차제정은 색계의 四禪, 무색계 四禪定, 멸진정(滅盡定)의 순서로 체계화 되어 있다.

2) Paul Griffiths, on being Mindless: Buddhist Meditation and the Mind-Body Problem (La

   Salle: Opin Court, 1986), XV쪽.

3) Abhidharmakośabhāṣya (ed. P. Pradhan, Patna, 1967) 70쪽; Vism (Viduddhimagga, ed. by

   Henry Clarke Warren, Cambridge, 1950), 604쪽.

4) AN iv 454쪽; Vism 607쪽..


근래 남방불교의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 전통이 국내에 도입되면서 불교의

선정수행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몇몇 쟁점들에 대한 심도 있는 토

의와 여러 가지 담론들을 형성되면서 불교학의 한 분야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하

고 있다. 경전연구소 정준영 박사의 「상수멸정(想受滅定)의 성취에 관한 일고

찰」5)이란 논문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테라바다(Theravāda)의 상수멸정(想受滅

定)에 대한 이해와 남방 수행전통의 선정사상을 중심으로 멸진정

(Nirodhasamāpatti)과 열반의 관계에 대해 심도 있고 훌륭하게 논의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필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은 개념과 느낌이 정지

된 선정(想受滅定)의 체험을 ‘현세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무여열반의 일시적 상

태’6)로 보려는 경향이다. 사실상 이러한 태도는 테라바다의 주석 전통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태도로서 몇몇 부분에 있어서 재검토의 여지가 있는 듯하다.

5) 정준영「상수멸정(想受滅定)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불교학연구』제 9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04), 239~260쪽.

6) 정준영, 위의 논문, 257쪽.


II. 테라바다 주석전통에서 멸진정과 열반


테라바다에서 멸진정(Nirodhasamāpatti)은 열반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아주 중

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상 이 선정은 『청정도론 (Visuddhi magga)에서 

붓다고샤(Buddhaghosa)에 의해 열반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7), 

여기에 대한 주석서 『빠라맛타만쥬사』(Paramatthamañjusa)에서 담마빨라

(Dhammapāla)에 의해 이 열반(nibbāna)이 무여열반(anupādisesanibbāna)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8). 하지만 다음의 담마빨라의 주석을 자세히 보면 

그는 이 선정을 열반과 거의 동일시한 붓다고샤와 달리, 이 선정을 무여열반과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9)

7) Vism 607쪽; Ñyāṇamoḷi, The Path of Purification (Berkeley: Shambhala, 1976), 82쪽;

   Griffiths, 위의 책, 29쪽; 정준영, 위의 논문, 254~255쪽.

8) Pm (Paramatthamañjusa), 902쪽; Ñyāṇamoḷi, 위의 책, 828쪽, 각주 13번; Griffiths, 위의 책,

   30~31쪽; 정준영, 위의 논문, 254~255쪽.

9) Pm 902쪽: nibbānaṃ patvā ti anupādisesanibbānaṃ patvā viya.


‘열반을 얻은 후’ 란 '무여열반을 얻은 후'인 듯(viya) 하다.


여기에서 담마빨라는 불변화사 ‘iva’에 해당되는 ‘viya’를 사용하고 있다. 이 용

어는 선행하는 명사상당어구를 수식할 때 ‘마치 ~와 같이’ 등으로 해석되지만,

고대 인도어(OIA)에서 be 동사와 함께 술어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처럼 느껴진

다’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10) 동사가 생략된 전형적인 주석 문장의 형태를 갖

추고 있는 위 인용문에서 ‘viya’를 사용한 담마빨라의 의도는 전자와 같은 단순

한 동일화라기보다는 후자와 같은 어떤 개인적인 느낌에 기초한 불확실함의 표

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11). 폴 그리피스(Paul J. Griffiths)는 담마빨라와 붓다

고샤에 있어서 멸진정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를 멸진정과 열반(nirvāṇa)을 거의

유사한 것으로 보는 초기경전의 설명이 후대에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으로 열반의

개념이 체계화 되면서 생겨난 갈등의 표현이 아닌가 하고보고 있다12).

10) Micheal Coulson, Sanskrit An Introduction to the Classical Language (London: Hodder &

    Stoughton, 1976), 80쪽.

11) Griffiths, 위의 책, 30쪽.

12) Griffiths, 위의 책, 31쪽.


비록 담마빨라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붓다고샤의 단순 동일화에 의문을 갖게 되

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멸진정을 열반 또는 무여열반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테라바다 교단 내부에서 이미 상당한 이견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

다. 아마도 멸진정을 개념과 느낌을 포함한 모든 정신현상들이 정지되는 것으로

보려했던 정의가 후대 많은 주석적인 문제점들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

으로 추정된다.


III. 개념과 느낌이 중단된 선정과 멸진정


The Two Traditions of Meditation in Ancient India 에서 브롱코스트

(Johanees Bronkhorst)는 자이나 문헌들과 초기 힌두 문헌들에 대한 분석을 바

탕으로 초기 자이나 수행전통에서 선정은 신체적 작용과 정신적 작용의 멈춤이

라는 최상의 목표의 일부분으로 굶어 죽는 것과 호흡을 멈추는 것을 주요한 특

징으로 하고 있으며, 정신적 작용을 멈추기 위해 모든 감각적인 기관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13).

13) Johanees Bronkhorst, The Two Traditions of Meditation in Ancient India (Delhi: Motilal

    Banarsidass, 1993), 53쪽.


여기에 대해서, 슈미트하우젠(Lambert Schmithausen)은 초기 불교에서 가장 일

반적이고 가장 흔히 나타나는 선정 수행이 색계의 四禪(dhyāna)임을 지적하고

있다14). 브롱코스트는 이러한 불교의 색계 사선의 특징을 기쁨(prīti), 즐거움

(sukha) 또는 평정(upekṣaka)과 같은 느낌을 동반하는 즐거운 경험으로 보고15),

고행을 통해 이전의 행위를 소멸시킨다고 하는 초기 자이나의 괴로움을 동반하

는 수행과 대비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16)

14) Lambert Schmithausen, ‘On some sapects of descriptions or theories of L i b e r a t i n g

    Insight and Enlightenmant in Early Buddhism’, Studien zum Jainismus und Buddhismus

    (Wiesbaden, 1981), 203~204쪽.

15) Bronkhorst, 위의 책, 24~25쪽.

16) Bronkhorst, 위의 책, 30쪽.


"단식, 마음의 억제 그리고 호흡의 중단 대신 [초기불교의 수행자]는 [색계의] 

四禪(dhyāna)을 수행했으며, 모든 감각의 작용을 멈추기 보다는 감각적인 경험들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한편 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들(四禪定)은 초기경전에서 기쁨(prīti) 즐거움

(sukha) 또는 평정(upekṣaka)과 같은 느낌을 동반하는 즐거운 경험으로 묘사되

지 않는다는 점에서 색계의 四禪과 구분되며, 기본적으로 정신현상을 중지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7) 또한 각각의 선정들에 불교 외적인 요소들

이 포함되어 있는데, 무한한 공간의 영역에 대한 선정(ākāśānantyāyatana)과 무

한한 의식의 영역에 대한 선정(vijñānānantyāyatana)의 경우 사실상 자이나에서 

높은 단계의 선정으로 이야기되는 무한성에 대한 선정(anantavartitā)과 유사하다.18) 

그리고 어떤 것도 없는 영역에 대한 선정(ākiñcanyāyatana)과 개념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영역에 대한 선정(naivasaṃjñānāsaṃjñāyatana)은 각각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아라다 깔라마(Ārāḍa Kālāma)와 라마의 아들 웃라까

(Udraka Rāmaputra)에게서 각각 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9).

17) Bronkhorst, 위의 책, 87쪽.

18) Bronkhorst, 위의 책, 87쪽.

19) MN I 163~164, 240, ii 212쪽; 중아함경 (『대정장』1, 776b); 사분율 (『대정장』22, 780b).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좀더 고층을 이루는 율장 대품에서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누구에게 가장 먼저 가르침을 전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부분에서 다시 나온

다.20) 하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이들의 이름만 언급될 뿐, 어떤 것도 없는 영역

에 대한 선정(ākiñcanyāyatana)과 개념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선정

(naivasaṃjñānāsaṃjñāyatana)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21). 다만, 붓다가 진짜로 이들 밑에

서 두 가지 무색계 선정을 수행했을까 라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적어도 이 두

가지 선정의 수행이 불교 외적인 수행전통에서 들어왔으며 이 선정들을 통해서

는 열반이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 Vin I 7쪽; 오분율 (『대정장』22, 104a).

21) Andreé Bareau, Recherches sur la biographie du Buddha dans les Sūtrapiṭaka et les

    Vinayapiṭaka anciens (Paris, 1963), 20-21쪽; Bronkhorst, 위의 책, 85-87쪽.


그렇다면 멸진정(Nirodhasamāpatti)은 어떠한가? 아마도 이 선정은 멸진정으로

불리기 이전에 개념과 느낌이 정지된 선정(saṃjñāvedayitanirodha, 想受滅定)으

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어 자체로만 보면 이 선정의 상태에서는 어떤 대

상에 대해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느껴졌던 것

(vedayita)22)과 그러한 대상이 언어적으로 개념화 되는 작용(saṃjñā)이 완전히

멈추게 되는 것이다.23) 따라서 이 선정의 명칭 자체로만 보면 여기에서 멈추는

것은 개념(vedanā)과 느낌(saṃjñā)이라는 심리적인 상태 즉 정신현상(caitta)이

지 의식(vijñāna), 마음(citta) 또는 정신(manas) 그 자체는 아니다24).

22) 여기에서는 vedeti의 vedayita라는 과거분사형이 사용되어 있다.

23) 느낌(vedanā)과 개념(saṃjñā)의 관계에 대해서: 황순일, 「설일체유부에서 개념과 명칭」, 

   『인도철학』제 18집 (서울: 인도철학회, 2005), 169-170쪽.

24) 부파불교의 의식(vijñāna), 마음(citta), 정신(manas)의 관계에 관해서: 황순일, 위의 논문,

    171-172쪽.


그러나 초기경전에 나타난 꼿티따(Koṭṭhita)와 사리뿟따(Sāriputta)의 대화에서는

이 선정에서 멈추는 것으로 개념과 느낌 이외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 있다25).

죽은 사람과 느낌과 개념이 정지된 선정에 든 수행자에게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꼿티따의 물음에 대해 양자 모두에서 신체적 작용(kāyasankhārā), 언어적

작용(vacīsankhārā), 정신적 작용(cittasankhārā)은 멈추었지만, 죽은 사람과 달

리 이 선정에 든 수행자의 ‘수명은 파괴되지 않았고 체온은 없어지지 않았으며,

다섯 감각기관은 청정하다’26) 라고 사리뿟따는 설명하고 있다. 폴 그리피스(Paul

J. Griffiths)는 수행자의 이러한 상태를 가장 최소단위의 원자적인 신체적 기능

만이 유지되는 상태로서, 재로 잘 덥혀져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 마치 꺼진 것처

럼 보이지만 여건이 주어지면 다시 타오르는 숯불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27).

25) MN i 296쪽.

26) MN i 296쪽: āyu aparikkhīṅo usmā avūpasantā indriyāni vippasannāni.

27) Griffiths, 위의 책, 10쪽. 필자의 견해로는 아마도 이러한 설명이 멸진정에서 윤회가 중단된다거나 

    멸진정에 든 성인을 죽을 수 없었다고 하는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생겨나게 된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위의 설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선정에 든 수행자에 있어서 멈추는

것이 단순한 두가지 정신현상(caitta)에서 신체적 작용(kāyasankhārā), 언어적

작용(vacīsankhārā), 정신적 작용(cittasankhārā)으로 확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쭐라웨달라숫따(Cūḷavedallasutta)에서 담마딘나(Dhammadinnā)

비구니에 의해 신체적 작용은 들숨과 날숨으로, 언어적 작용은 추리(vitarka,

尋)와 궁리(vicāra, 伺)28)로, 정신적 작용은 느낌(vedanā)과 개념(saṃjñā)으로

설명되고 있다29). 담마딘나(Dhammadinnā)의 이러한 설명은 테라바다 주석전

통에서 붓다고사에 의해 고스란히 받아들여지고 있으며30), 유식 계열의 『섭대

승론석』에서도 느낌(vedanā) 대신 의도(cetanā)가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전체

적인 맥락을 유지하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31)

28) 尋(vitarka)와 伺(vicāra)는 테라바다 주석전통에서 선정과 수행을 중심으로 사용될 때, 좀더 전문

    적인 용어로서 각각 ‘어떤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의 작용’과 ‘그 대상의 주변을 맴도는 마음의 작용’

    으로 설명된다.하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이 용어들이 주로 언어적인 작용의 측면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29) MN i 301-302쪽.

30) Ps (Papañcasūdanī) ii 351쪽.

31) 섭대승론석 (『대정장』31, 335b): 此中身行。謂入出息。其語行者。謂尋與伺。其意行者。

    謂思想等。


따라서 초기경전에 나타난 느낌과 개념이 정지된 선정(saṃjñāvedayitanirodha)

은 색계의 四禪 중에서 제 2선의 단계에서 이미 포기된 추리(vitarka,

尋)와 궁리(vicāra, 伺)가 여기에서 중단된다는 것으로부터 구차제정의 형태로

정립되기 이전에 이미 독자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들숨과 날

숨이 중단된다는 것으로부터 호흡을 멈추려하는 자이나적인 요소가 이미 어느

정도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개념과 느낌이 정지된 선정(saṃjñāvedayitanirodha)은 아비달마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주로 멸진정(Nirodhasamāpatti)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사실상 이렇게 이름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선정의 내용까지도 달라진 것으로 보

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위의 설명에서 중단되는 정신적 작용(cittasankhārā)으로

정신현상(caitta, cetasika)의 범주에 속하는 느낌(vedanā)과 개념(saṃjñā)이 언

급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와수반두의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마음과 정신현

상의 소멸’(nirodhaś cittacaittānām)32)이란 정의를 통해 정신현상 뿐만 아니라

마음의 작용 자체까지 중단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장은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 및 경량부(Sautrāntika)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테라바

다(Theravāda)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붓다고샤의 『청정도론』에서는 멸진정

(Nirodhasamāpatti)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33)

32) Abhidharmakośabhāṣya (ed. P. Pradhan, Patna, 1967) 70쪽;.

33) Vism 604쪽: kā nirodhasamāpatti? yā anupubba-nirodha-vasena cittacetasikānaṃ

    dhammānaṃ appavatti.


"멸진정이란 무엇인가? 점차적인 소멸의 힘에 의해서 마음과 정신현상(cetasika dhamma)이 생

기지 않는 것(appavatti)이다."


이러한 멸진정의 정의는 부파불교에서 자아(ātman)와 같은 영속적인 실체가 없

으면서도(無我) 행위를 한 사람과 그 과보를 받는 사람 사이의 자기동일성은 가

능하다(業說)는 것을 설명하기위해 도입된 물질적 정신적 흐름(saṃtāna, 相續)

이론과 관련해서, 정신적인 흐름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즉 초기경전에 이미 나타난 들숨과 날숨의 중단이라는 자이나적인 요소

에 추가하여, 정신적 작용 또는 정신적 흐름의 완전한 중단된다고 하는 자이나

및 요가적인 요소가 확고하게 멸진정의 설명 속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

으며, 브롱코스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주류선정전통(mainstream meditation

tradition)이34) 불교적 선정수행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4) 주류 선정전통(main stream meditation tradition)에 대해서: Bronkhorst, 위의 책, 31~77쪽.


IV. 멸진정과 구차제정


그렇다면 이러한 외래적인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멸진정(Nirodhasamāpatti)

이 구차제정에서 가장 높은 위치로 체계화되고 사실상 열반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방식으로 설명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마도 초기 부

파불교의 교리적 체계화 과정과 선정수행 방법론이 일정기간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해 오다가 일정 시점에 양자가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양자를 조화시키

기 위한 방편으로서 다양한 설명들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비록 멸진정(Nirodhasamāpatti)이 구차제정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

지만, 이 선정 자체는 개념적으로 보았을 때 열반(nirvāṇa)과 아무런 관련이 없

다. 브라만의 신성한 세 가지 불과 대립시키는 방편으로 수행자가 피해야 할 세

가지 불인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의 소멸로 열반이 정의되고 있

지만35), 기존의 행위(karman)를 중성화시켜 더 이상 작용할 수 없게 만들기 위

해서36)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야만 할 것이다37). 따라서 열반은 모든 번뇌가 소

멸된다는 것으로부터 단순한 정신적 작용 또는 정신적 흐름이 소멸되는 것과 분

명하게 구분된다.

35) Richard Gombrich, How Buddhism Began (London: Athlone, 1996), 66쪽.

36) Etienn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sm (Louvain-La-Neuve: Peeters Press, 1988),

    40쪽.

37) 열반을 탐냄, 혐오, 우둔함의 소멸로 정의한 빨리니까야 (SN iv 251-252쪽)에 해당되는 

    잡아함경 (『대정장』2 126b) 에서는 탐냄, 혐오, 우둔함의 소멸에 번뇌의 소멸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대반열반경」에 나타난 붓다가 마지막 열반에 드는 과정의 묘사에서 멸

진정은 구차제정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역

할을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붓다는 멸진정의 단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초선까

지 내려온 후 제4선까지 다시 올라가 그 단계에서 마지막 열반에 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38). 여기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이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이점은 멸진정이 사실상 불교의 해탈론(soteriology)과 거의 별도로 발전해오다

가 구차제정의 형태로 체계화되는 과정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

기고 있다.

38) DN ii 156쪽; Griffiths, 위의 책, 140~141쪽, 각주 8번.


그렇다면 멸진정(Nirodhasamāpatti)은 불교의 해탈론(soteriology)과 직접 관련

되어 있지도 않고 많은 외래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구

차제정의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할 수 있었을까?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열반에

대한 언급들과 역사적인 붓다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묘사들을 통한 열반의 체계

화가 주로 초기부파불교에서 경전을 전승하고 분석하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이루

어졌다면, 구차제정의 형태로 선정수행방법론이 체계화되는 과정에서는 주로 선

정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치

초기경전에 수많은 불교 외적인 요소들이 붓다의 대기설법(upāya-kauśalya)의

형태를 통해 불교적으로 흡수되었듯이39), 브롱코스트에 의해 주류 선정전통으로

규정된 자이나적, 요가적 수행 전통의 초기적 형태들이 불교적 수행전통 속에 흘

러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외래적 수행전통은 브롱코스트가 지

적한 것과 같이 조금은 난해해 보이는 불교적인 수행전통보다 더 큰 흐름을 형

성하고 있었고 ‘행위로부터 촉발된 괴로움은 행위를 하지 않음을 통해 해결한다’

는 간단명료한 메시지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을 것이다40).

39) Gombrich, 위의 책, 17~21쪽.

40) Bronkhorst, 위의 책, 68쪽.


따라서 신체적 활동이 최소단위의 원자적인 신체적 기능을 제외하고 거의 중단

되면서, 비록 느낌(vedanā)과 개념(saṃjñā)으로 제한되기는 했지만, 어떤 정신적

작용(cittasankhārā)이 중단되는 것으로 초기경전에서 설명된 개념과 느낌이 정

지된 선정(saṃjñāvedayitanirodha)은 주류 선정전통의 목표인 모든 정신적인

작용들이 중지되는 선정으로 점차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구

차제정의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독자적으로 발전한 양자를 조화시키는 방편의 일환이 아마도 멸

진정을 열반과 유사한 것으로 보려는 시도인 듯 하다. 비록 청정도론에 나타난

붓다고샤의 느낌과 개념이 정지된 선정(saṃjñāvedayitanirodha)에 대한 설명이

이 선정을 열반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41). 하지

만 기본적인 개념규정이 전혀 다른 양자를 붓다고샤가 구분하지 못했을 리도 없

고, 앞에서 언급한 담마빨라(Dhammapāla)의 복주에서 보여준 불확실성이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화는 필연적으로 열반이란 것이 지혜를 통

해서 가능한가 또는 선정수행을 통해서 가능한가 하는 깨달음의 본성에 관한 논

의로 확대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42).

41) Vism 607쪽; 정준영, 위의 책, 254~255쪽.

42) Bronkhorst, 위의 책, 101~102쪽: 이러한 논의는 초기 경전에서 이미 무실라(Musīla)와 나라다

    (Nārada)의 논의를 통해 깨달음이란 것이 앎을 통해 가능한 것인가 선정수행을 통해 가능한 것인

    가 하는 부분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SN ii 115~116쪽). 무실라의 견해는 후대 바가바드기타에서

    상키아(Sāṃkhya)적 입장으로 정의되고 나라다의 견해는 요가(yoga)적 입장으로 정의된다 (Louis

    de La Vallée Poussin, 'Musīla et Nārada', Mélanges Chinois et Bouddhiques 5 (Paris,

    1937), 189~222쪽).


사실상 자이나 및 요가의 수행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신적인 작용이 멈추는 것은

영혼(jīva) 또는 자아(ātman)가 외적, 내적 대상들에 의해 들뜬 상태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사실상 이들의 정신적 수행의 목표가 된다. 특히

정신적인 작용과 함께 육체적인 작용을 완전히 멈추어 더 이상의 행위를 만들지

않고, 이미 있는 행위들을 고행을 통해 제거한다고 하는 자이나의 해탈론

(soteriology)의 경우, 모든 정신적인 작용이 정지하는 선정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선정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이 선정이 직접적으로

열반(nirvāṇa)을 가져다준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 선정을 통해서 도달

한 경지가 열반과 유사한 것이라는 설명을 통해 자신들이 확립한 구차제정의 최

고단계 선정이 합리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

(Abhidharmakośabhāṣya)은 멸진정에서 깨어난 수행자가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43)

43) Abhidharmakośabhāṣya (ed. P. Pradhan, Patna, 1967) 363쪽: bhavati śānta vata

    nirodhasamāpattinirvāṇasadṛśī vata nirodhasamāpattiḥ; Louis de La Vallée Poussin,

    Abhidharmakośabhāṣyam (tr. Leo M. Pruden, Berkeley, 1923), 978쪽,


오! 멸진정(nirodhasamāpatti)은 평온(śānta)하고, 

오! 멸진정은 열반과 유사(sadṛśī) 하구나.


물론 모든 정신적인 작용이 멸진정에서 중단되는데 어떻게 수행자가 평온(śānta)

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반박이 가능하겠지만, 이러한 선언들을 통해

우리는 멸진정을 적어도 열반과 유사한 위치에 놓고 싶어 했던 끊임없는 노력들

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V. 멸진정과 두 가지 열반 이론


그렇다면 이러한 멸진정(nirodhasamāpatti)은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두 가지 열

반, 즉 유여열반(saupādisesanibbāna)과 무여열반(anupādisesanibbāna)44)의 관

점에서 보았을 때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것일까? 또한 어떤 관점으로부터 붓다고

샤(Buddhaghosa)에 의해 열반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해석된45) 이 선정이 담마

빨라(Dhammapāla)에 의해 무여열반과 유사한 것46)으로 간주되게 되었을까?

44) 불교혼성범어에서는 sopadhiśeṣanirvāṇadhātu와 nir/an-upadhiśeṣanirvāṇadhātu로 표기한다.

45) Vism 607쪽; Ñyāṇamoḷi, 위의 책, 828쪽; Griffiths, 위의 책, 29쪽; 정준영, 위의 논문,

    254~255쪽.

46) Pm (Paramatthamañjusa), 902쪽; Ñyāṇamoḷi, 위의 책, 828쪽, 각주 13번; Griffiths, 위의 책,

    30~31쪽; 정준영, 위의 논문, 254~255쪽.


테라바다(Theravāda)의 주석 전통에서는 ‘upādi’가 더미(蘊)를 지시하는 것을 고

려하여,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을 붓다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

인 깨달음과 마지막 열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다. 전자는 비록 탐냄(rāga) 혐오

(dosa)47) 우둔함(moha)과 같은 번뇌들은 소멸되었지만(nibbāna) ‘나’라는 존재

를 구성하는 더미(蘊)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태(sa-upādhisesa)로서 번뇌의

소멸(kilesa-parinibbāna)이다.48) 그리고 후자는 모든 번뇌들이 이미 소멸된 상

태에서(nibbāna) 남아있던 더미(蘊)마저 완전히 소멸된 상태(an-upādhisesa)로

서 더미(蘊)의 소멸(khandha-parinibāna)이라고 설명한다49). 물론 내용적으로

많은 차이를 가지지만 유여열반을 깨달음으로 보고 무여열반을 마지막 열반으로

보는 것은 부파불교의 교단들 사이에서 큰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47) dosa는 주로 ‘성냄’으로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길을 가다가 유연히 다른 사람과 부딪쳤을 때도

    성을 낼 수 있다. dosa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번뇌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번뇌 중의 하나로 이를 

    매개로 무수히 많은 번뇌들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단순한 ‘성냄’이란 용어로는 이러한 dosa

    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어려운 듯 하다. dosa의 심리상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으로 끓어

    오르는 싫어하는 상태임으로 필자는 여기에서 ‘혐오’란 용어를 사용했다.

48) Th-a i 46쪽; Dhp-a ii 163쪽.

49) Th-a I 46쪽; Dhp-a ii 163쪽.


사실상 테라바다(Theravāda) 주석 전통에서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가 유여열반

을 아라한(arhant)과 동일한 것으로 보려한다. 테라바다의 두 번째 아비담마 논

서인 『위방가』(Vibhaṅga)의 주석서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ī)에

서는 논쟁가(Vitaṇḍvādin)로 불리는 사람들과의 열반의 본성에 대한 논쟁이 소개

되고 있다50). 열반을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의 소멸로 정의로하는

것으로부터 열반(nibbāna)이란 단순한 소멸에 불과하다는 논쟁가들의 주장에 대

해서, 테라바다는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의 소멸이란 정의가 열반

뿐만 아니라 아라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들어 반박한다. 그리고 테라

바다의 정설로서 이러한 소멸은 ‘그 [열반]으로 가는데’(etam āgamma)51) 나타

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열반 자체는 다섯 더미(蘊)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pāṭiekka) 어떤 것52)으로 설명한다.

50) Vibh-a 51쪽.

51) 유사한 내용이『청정도론』에도 나타난다: Ñyāṇamoḷi, 위의 책, 576~581쪽.

52) Vibh-a 51쪽. 동일한 용어가『청정도론』에도 나타난다: Ñyāṇamoḷi, 위의 책, 577~578쪽.


논쟁가(Vitaṇḍvādin)의 단멸론적인 열반관에 반박하는 경전적인 근거로서 이들은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의 소멸이 동일하게 열반(nibbāna)53)과 아

라한(arhant)54)에 적용되는 『상유따니까야』(Saṃyuttanikāya)의 

「잠부카다까」(Jambukhādakasutta) 경과 그 다음의 경을 제시하면서

성공적으로 방어한 듯하다. 하지만 테라바다 주석 전통은 그 대가로서 열반을 아

라한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던 듯하다. 두 가지 열반 중

에서 아라한이 죽은 다음에 성취되는 무여열반과 동일시 될 수 없음으로 자연스

럽게 유여열반이 아라한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유

여열반을 아라한과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붓다의 깨달음 이후 마지막 열반에 들

기 전까지의 단계로 보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듯 하다55).

53) SN iv 251쪽.

54) SN iv 252쪽.

55) 정준영, 위의 책, 249~250쪽.


피터하베(Peter Harvey)는 테라바다의 주석전통이 아라한과 열반을 동일한 것

으로 보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초기경전은 이들을 다른 것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56). 사실상 유여열반이란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

함(moha)이 소멸되는 경험으로서57) 이 경험의 결과로 자신이 더 이상 끝없는

윤회를 계속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명확히 아는 것58)을 통해 아라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여․무여 열반이 ‘불의 자동적인 소멸(nirvāṇa)’에 비유

된다는 점으로부터 열반은 아라한에게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라한이 되기 직전에 했을 것으로 보이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경험을 지칭했

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부파불교에서 정형화된 유여열반

과 무여열반에 대한 설명에서 아직까지 수명이 파괴되지 않았다59)거나 다섯 가

지 감각적 기관이 파괴되지 않았다60)고 하는 설명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유여열반과 아라한의 동일화는 테라바다 주석전통에 의한 부분적인

견해일 뿐 초기부파불교의 전체적인 견해로 결코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이다.

56) Peter Hervey, The Selfless Mind, Personality, Consciousness and Nirvāṇa in Early

    Buddhism (Surrey: Curzon Press,1995), 182~183쪽.

57) Richard Gombrich, Theravā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London: Routledge, 1988), 64쪽.

58) K.R. Norman, ‘Mistaken Ideas about Nibbāna’, The Buddhist Forum 3 (London, 1993), 

    214쪽.

59) 발지론 (『대정장』26, 923b), Pe (Peṭakopadesa) 124쪽.

60) It 38쪽.


그렇다면 이들의 이러한 유여열반과 아라한의 동일화가 멸진정(nirodhasa

māpatti) 또는 개념과 느낌이 정지된 선정(想受滅定)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

을까? 모든 정신적인 활동이 정지된 것으로 정의된 이 선정은 아직까지 의식적

인 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아라한의 경지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게 되었으며 따

라서 자연스럽게 ‘현세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무여열반의 일시적 상태’ 로 간주되

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VI. 맺음말


멸진정(nirodhasamāpatti)을 유여열반보다 무여열반에 가까운 것으로 보려는 경

향은 이 선정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앞에서 지적한 주류 선정전통의 영향 하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이나로 대표되는 주류 선정

전통에서 해탈이란 살아서는 불가능하며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서 무여

열반을 중시하지만, 불교의 경우 현생에서(diṭṭhe va dhamme) 모든 번뇌가 제

거되었음을 유여열반을 통해 경험하여 자신이 죽은 후 더 이상 새로운 생을 받

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안다는 것을 통해 유여열반에 사실상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멸진정(nirodhasamāpatti)의 외적 영향에 대한 불

교 내부적 반발이 멸진정에서도 여전히 마음의 작용이 계속되고 있다는 문제제

기를 통해 유심·무심 논쟁61)의 형태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멸진

정(nirodhasamāpatti)에서도 정신적 작용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은 주

류 선정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가

행자(Yogācāra)들로까지 불렸던 유식학파(Vijñaptimātra)가 이 논쟁을 통해 자신

들의 알라야식(ālayavijñāna)의 존재를 증명하고 유심의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는

긴긴 과정은, 주류 선정전통에 치우친 멸진정(nirodhasamāpatti)에 대한 이해가

다시 느낌과 개념이 정지된 선정(saṃjñāvedayitanirodha)이란 명칭에 입각한 불

교적 선정전통으로 되돌아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