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燒身供養의 問題點과 그 象徵性
차 차석(금강대학교)
1. 서론
『법화경』「약초유품」에는 燒身供養이 나온다. 다른 어떠한 공양보다도
자신의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임을 표방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몸으로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리라 하고, 곧 여러 가지 전단, 훈륙, 도루바의
향과 필력가, 침수, 교향 등을 먹고, 또 1천2백년동안 첨복 등의 꽃 향유를
마시며, 또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부처님 앞에서 하늘 보배 옷으로 스스로의
몸을 감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발원으로 몸을 태우니, 그
광명이 80억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느니라.1)(A)
1) 대정장9, p.53b. 我雖以神力供養於佛。不如以身供養。卽服諸香。栴檀。薰陸。兜樓婆。
畢力迦。沈水。膠香。又飮瞻蔔諸華香油。滿千二百歲已。香油塗身。於日月淨明德佛前。
以天寶衣而自纏身。灌諸香油。以神通力願。而自然身。光明遍照八十億恒河沙世界。
-. 백복으로 장엄한 팔을 8만4천 탑 앞에서 태워 7만2천년 동안을 공양하고...2)(B)
2) 상동, p.53c. 卽於八萬四千塔前。然百福莊嚴臂。七萬二千歲而以供養。
令無數求聲聞衆無量阿僧祇人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皆使得住現一切色身三昧。
-.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면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를 태워서
부처님의 탑에 공양할지니, 이렇게 하면 국토나 처자나 또는 삼천 국토의 산,
숲, 하천, 못 등과 여러 가지 보배나 진귀한 물건으로 공양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3)(C)
3) 상동. p.54a. 若有發心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能燃手指乃至足一指供養佛塔。
勝以國城妻子及三千大千國土山林河池諸珍寶物而供養者。
이상에서 세 가지 구절로 나누어 예시를 했는데 A는 전신을 태우는 것이며,
B는 팔을 태우는 것이며, C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태워 공양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태워 공양하는 것이 다른 물건을 공양
하는 것보다 殊勝한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선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소개된 이래 많은 불교도들은 직접 소신공양을 실천
하고자 했으며,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를 남기고 있다.4) 그렇지만 소신공양은
숭고한 종교적 의미를 떠나 불교 교리 자체와 논리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초기불교 이론이란 율장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과 의미를 새롭게 조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홍찬법화전』에는 소신공양자가 12명 나온다. 『경덕전등록』권27에 나오는 부흡
(傅翕)은 그의 나이 52세 때인 548년에 소신공양했다. 이에 그의 제자들 역시 따라서
소신공양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팔을 태운 사람, 손가락을 태운사람, 코를
벤 사람, 귀를 자른 사람이 20명이며, 삼일 간 금식하고 재계한 사람이 15명, 자신의
몸을 팔아 공양한 사람이 20명이었다고 한다. 부흡의 장자 보건도 597년 소신공양했
다. 이상의 내용은 曾其海 저,『三宗論』(중국, 상해사회과학원출판사, 2006),p.75
참조. 기타『고승전』제12 망신편과『속고승전』제27 견신편 등에 소신공양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 義淨은『남해기귀내법전』권4에서 소신공양이 불합리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법화사상에 관한 많은 논문이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신
공양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법화경』에 관한 개설서들 역시 소신공양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모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일본의 橫超慧日이
『법화사상』에서 소신공양의 문제점과 그 상징성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중국의 曾其海가 『三宗論』(중국, 상해사회과학원출판사, 2006)
이란 책에서 간단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렇지만 橫超慧日은 개인적 의견을
개진한 것이며, 연구논문은 아니다. 曾其海의 논문은 소신공양의 유래와
역사적 사건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소신공양이 계율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일찍부터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 활동한 삼론종의 길장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한명
이었다. 그는 『법화의소』에서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하고 있다. “毘尼結戒
에 의거하면 소신은 투란차를 얻고, 燒臂는 돌길라를 얻는다.5) 이 보살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길장의 생각은
매우 애매하다. 재가보살은 그럴 수 있지만 출가자는 그런 실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身子(사리불)와 須達이 하나의 수레에 함께 타고 있어도 범죄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6) 시간이 지나면서 명확하게 반대 의견을
표명한 스님으로 義淨이 있다. 그는 소신공양이 파계라고 직접 언급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에 관해선 뒤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선 생략한다.
이상과 같은 전례를 참고로 하면서도 보다 종합적이고 상세한 연구가 필요
하다고 생각한다.
5) 투란차는 바라이죄나 승잔죄를 얻는 것이며, 돌길라는 이부정, 백중학, 칠멸정에 해당하는 죄이다.
6) 대정장34,p.620c. 問。依毘尼結戒燒身得偸蘭遮。燒臂得突吉羅。此菩薩將不犯罪耶。答。
此或可在家菩薩。不預犯戒之例。設令出家適時而化。如身子與須達共載一車而不犯罪也.
본고는 이러한 점에서 소신공양이 지니고 있는 교리적인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우선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후 소신공양이 지니는 본질적인 의미와
상징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해 보려고 한다. 단순히 교리적 모순을 지니고
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치고 만다면 『법화경』 자체가 비불교적인 경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나 상징성을 파악하게 된다면 거기서 진정한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소신공양이 지닌 교리적 모순
1963년 틱꽝둑이란 베트남 스님이 불교탄압에 항거하여 거리에서 소신공양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카톨릭 입국을 꿈꾸며 불교를 탄압하던 고딘디엠
정권에 항의하는 순교행사로 전세계에 타전되었다. 이 무렵 승려와 신도를
포함해 8명이 소신공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회복
하기 위한 비폭력 운동의 하나로 소개된 소신공양은 전세계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정권을 무너뜨릴 정도로 파괴력을 보이기도
했다.
7) 여익구 편, 『불교의 사회사상』(민족사,1981),p.37과 이 책의 주 44 참조. 틱낫한 저
박윤정 역,『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명진출판, 2005),pp153-156에도 꽝둑
스님을 비롯해 니치마이스님이 이 무렵 소신공양한 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베트남과 같은 소신공양은 아니더라도 신체의 일부를 태워 공양하는 스님들은
현재도 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스님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지만
소신공양은 그 종교적 숭고성에도 불구하고 불교 자체의 교리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역사상 실재했던 수많은 소신공양자들의 거룩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재점검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신공양은 교리적으로 어떠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가? 『법화경』이
표현하고자 하는 상징성을 떠나 순수하게 교리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점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론적으로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과
모순 된다는 점이다. 이하에선 인간 내지 다른 생명과 직결된 계율의 내용을
구체적인 근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도출해 보기로 한다.
1. 殺人의 금지
살인의 금지는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인 사회윤리라 말할 수 있다.
불교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눈먼 거북이의 비유로
설명하곤 한다.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알려주는 이 이야기는 『잡아함경』
권제15에 나오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있는 판자를 큰 바다에 던졌다고 하자. 그것을 동풍이
서쪽으로 옮기고, 서쪽으로 옮긴다. ...거기에 눈먼 거북이가 있는데 백년에
한번씩 바다 속에 떠오른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눈먼
거북이는 그 판자의 구멍에 목을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만일
가능하다면 언젠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일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눈먼 거북이
판자의 구멍에 목을 넣는 것은 오히려 빠른 것이니 그것보다 한번 악처에 떨어진
중생이 인간의 몸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말하리라. 왜냐하면 그러한 중생들은
정의를 실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8)
8) 대정장2, p.108c. 406경. 譬如大地悉成大海。有一盲龜壽無量劫。百年一出其頭。海中有浮木。
止有一孔。漂流海浪。隨風東西。盲龜百年一出其頭。當得遇此孔不。阿難白佛。不能。世尊。
所以者何。此盲龜若至海東。浮木隨風。或至海西。南․北四維圍遶亦爾。不必相得。佛告阿難。
盲龜浮木。雖復差違。或復相得。愚癡凡夫漂流五趣。暫復人身。甚難於彼。所以者何。
彼諸衆生不行其義․不行法․不行善․不行眞實。展轉殺害。强者陵弱。造無量惡故。是故。
이상의 인용문은 특히 육도를 윤회하는 인간이 법에 알맞은 행위나 올바른
행위, 공덕을 쌓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높여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업력에 따라 인간계를 벗어나게 되면 다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만큼 어렵게
얻은 인간의 몸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른 세계로 流轉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도 있다.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려운 만큼 인간의 존엄성은 재언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중시되고 있다. 살인을 금지하는 계율에서 그러한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불교에선 살인을 “고의로 人體의 생명을 빼앗거나 혹은 그렇게 하기
위해 칼을 가지고 다니는 자를 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9) 또한 ‘칼을 가지고
다니는 자를 구하는 것’이란 인연담에선 자신을 죽여주길 바래서 칼을 가진
자를 구한다는 의미였지만 자신이 죽어버리면 바라이죄를 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기 가진 자에게 의뢰하여 타인을 죽여 달라는 의미로 칼을 구하거나,
혹은 자살의 도구로써 칼을 사용하거나, 독약이나 노끈 등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환자의 곁에 두고 환자에게 자살을 권하고, 그것에 의해 환자가
자살하면 죽음을 찬탄하고 죽음을 권한 비구가 되어 바라이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발전했다고 본다.10) 자살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상론하기로 한다.
9) 平川彰, 『이백오십계의 연구』(동경, 春秋社, 1993), pp.272-273.
10) 平川彰, 석혜능 역, 『비구계의 연구』(민족사, 2002). pp.281-282 참조.
또한 ‘故意’란 알면서, 이해하면서, 생각하면서, 주의하면서 범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人體란 모태에서 최초의 의식이 나타난 이후 죽음에 이를 때
까지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아직 태어나진 않았지만 임신 중에 있는 태아도
생명으로 보며, 낙태 역시 살인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아를 오분율
이나 십송율에선 似人11)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모태에 든 지 49일이 지난
태아를 말하며, 이후 낙태하면 살인이나 마찬가지로 본다. 근본유부계통에선
사인을 人胎로 표현한다.12)
11)『오분율』(대정장22, p.8b). 入母胎已後至四十九日名爲似人。過此已後盡名爲人。
12) 平川彰, 석혜능 역, 『비구계의 연구』(민족사, 2002). pp.273 참조.
살생의 성립요건은 다섯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인간이나
동물이나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그것이 살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 살생 의도나 그렇게 하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넷째 적절한 수단에
의한 살생 행위가 있어야 한다. 다섯째 결과로써의 죽음이 있어야 한다.
살생의 방식으로는 여섯 가지가 거론되는데 첫째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
둘째 남을 시켜 죽이는 것, 셋째 무기, 매질, 투석 등에 의한 살인, 넷째
함정에 빠뜨려 죽이는 것, 다섯째 신통에 의거해 죽이는 것, 여섯째 주문에
의해 죽이는 것 등이 있다.13)
13) 조용길 역, 『근본불교윤리』(불광출판사,1999),pp.115-116참조.
살인이나 살생계를 어기는 경우 받게 되는 처벌은 율장에 따라 교단에서
추방되었다. 殺盜淫妄에 해당하는 처벌 규정인 4바라이죄에 해당하며, 가장
무거운 처벌이다.
2. 자살이나 敎殺의 금지
율장에는 살인과 자살, 교살 등이 겹쳐서 나오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을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인데 자살과 교살은 주로 不淨觀과 연관되어
있다.14) 부정관은 4념처관의 하나인 身念處觀이나 五停心의 하나이다.
기본적인 초기불교의 수행방법이지만 이 부정관은 부작용을 야기시켰다. 또한
『대지도론』에는 백골관의 영향으로 자살이나 교살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15) 부정관이나 백골관은 명칭의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부정관이 핵심 사안이라 말할 수 있다.
14) 『중아함경』권24「염처경」(대정장1, p. 583bc), 『구사론』권22(대정장29,p.117b),
『남전대장경』권9,pp92-94 등에서 설하고 있다.
15) 대정장25, p.217c. 觀是骨人是爲骨相。骨相有二種。一者骨人筋骨相連。二者骨節分離。
筋骨相連破男女長短好色細滑之相。骨節分離破衆生根本實相。復有二種。一者淨二者不淨。
淨者久骨白淨無血無膩色如白雪。不淨者餘血塗染膩膏未盡。行者到屍林中。或見積多草木
焚燒死屍。腹破眼出皮色燋黑甚可惡畏。須臾之間變爲灰燼。行者取是燒相思惟。此身未死
之前。沐浴香華五欲自恣。今爲火燒甚於兵刃。此屍初死形猶似人。火燒須臾本相都失。一
切有身皆歸無常我亦如是。是九相斷諸煩惱。
율장에 의하면 부정관의 설법을 들은 제자들이 부정관의 실습에 몰두한
나머지 마침내는 자신의 신체를 싫어하거나 부끄러이 여기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경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의 몸을 혐오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혹은 서로 그 목숨을 끊어주거나, 혹은 녹장사문이 있는 곳에
가서 자신의 발우와 三衣를 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 부정관 대신 ‘入息出息念三昧’를 설해 실습하게
했다고 한다.16) 나아가 자살과 교살을 금지하는 계율이 제정되었다.
16) 平川彰, 석혜능 역, 『비구계의 연구』(민족사, 2002). pp.271 참조.
“죽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거나 혹은 죽음을 권하되 ‘아! 남자여, 그 험하고
괴로운 삶이 그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음은 그대에게 있어서 삶을
능가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하여, 이런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헤아려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음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거나 죽음을 권하며 이것도 또한
바라이로서 함께 살 수 없게 된다.”17)
17) Vin. vol, III, p.71.『남전대장경』 제1권, p.118. 이것은 平川彰, 석혜능 역, 『비구계의
연구』(민족사, 2002). pp.271-272에서 재인용.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율장은 자살이나 교살이 바라이죄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살과 교살의 범위를 명확하게
인식시킨다.18) 『오분율』에선 부처님께서 부정관을 설하셨기 때문에
자살자가 나왔으며, ‘만일 자살하면 투란차죄를 얻는다’고 말하며 자살을 금지
하셨다.19) 병든 자에게 죽음을 권유하거나 자살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자
살하게 만드는 것 등이 모두 금지되었다.20) 생명의 소중함을 철저하게 존중
하도록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8) 平川彰, 석혜능 역, 『비구계의 연구』(민족사, 2002). pp.275-278 참조.
19)『오분율』권2(대정장22,p8b). 若比丘。若人若似人。若自殺若與刀藥殺。若敎人殺。
若敎自殺。 譽死讚死。咄人用惡活爲。死勝生。作是心隨心殺。如是種種因緣。
彼因是死。是比丘得波羅夷不共住.
20) 상동, p.8a. 實爾世尊。佛種種呵責。汝等愚癡。自手殺人敎人自殺。有何等異。
從今是戒應如是說。若比丘自手殺人敎人自殺。得波羅夷不共住.
3. 不傷害(불상해)
불상해란 아힘사라고도 말한다. 일체의 생명체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기
때문에 노여워하지 않는다. 타인을 傷害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는 물론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된다.21) 『사분율』 파일제에 의하면 성내는 마음으로
남을 때리지 말 것이며, 다른 비구를 때리는 시늉을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22) 이러한 정신은 자신을 존중하는 사상으로도 연장되고 있다. 따라서
부정관의 단점이 노출되자 아나파나삼매를 설하신 것도 동일한 입장이라
전술한 바가 있다. 나아가 깨닫기 전 고행림에서 수도할 때 육신을 괴롭히는
것이 결코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고행림을 떠나시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자신의 육신의 일부를 虐待하는 것이 결코
부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1) 中村元,『원시불교의 사상』상(일본, 春秋社, 昭和56),p.294참조.
22) 목정배,『계율학 개론』(장경각, 2001), p.216참조.
육신을 훼손하는 소신 내지 소비공양이 출가자가 해선 안 되는 일이라
공공연하게 반대한 최초의 인물은 『남해기귀내법전』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을 쓴 義淨(635-713)스님이다. 그는 당나라 때 인도에 들어가 공부한 유학승인데
『남해기귀내법전』에서 출가자가 눈이나 몸을 손상해서 보시를 행하고,
斷命을 예고하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捨身하는
것은 僧徒가 할 일은 아니라 강조한다.23)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일이
출가자에겐 돌길라죄가 된다는 점과 상통한다.
23) 대정장54, p.231b. 未閑聖典取信先人。將燒指作精勤。用然肌爲大福。隨情卽作斷在自心。
然經中所明。事存通俗。己身尙勸供養。何況諸餘外財。是故經中但言若人發心。不道出家
之衆。意者出家之人局乎律藏。戒中無犯方得通經。於戒有違未見其可。縱使香臺草茂。
豈損一莖。曠野獨飢。寧餐半粒。然衆生喜見。斯乃俗流。燒臂供養。誠其宜矣。可以菩薩
捨男捨女。遂遣苾芻求男女以捨之。大士捐目捐身。卽令乞士將身目而行施。仙預斷命。
豈律者所爲。慈力捨身。非僧徒應作。
이상의 1과 2, 그리고 3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살인과 자살, 교살
내지 자기학대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을 고려
한다면 소신공양은 부처님의 기본적인 계율의 정신에 부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상 숭고한 행위로 칭송받은 소신공양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말한다면 파계행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인식과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문제에 대해 혹자들은 대승경전의 사상과 초기불교의 경전이나
율장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상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승불교도 율장을 지켰다는 점, 특히 동북아 불교는『사분율』에
의거하고 있는데『사분율』역시 살인, 자살, 교살을 엄금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24) 또한 대승보살계를 설하고 있는『범망경』이나
『유가사지론』,『열반경』등에 의하면 대승불교 역시 살생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으며, 자살과 교살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5)
24) 平川彰, 석혜능 역,『비구계의 연구』(민족사, 2002). pp.297-299 참조. 사분율의 조
항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다.
25) 목정배, 『계율학 개론』(장경각, 2001), pp.336-341참조. 불교생명윤리 정립을 위한
공개 심포지움『현대사회와 불교생명윤리』(대한불교 조계종 사회부,2005),pp.202-
205 참조.
3. 燒身供養의 象徵性과 思想的 淵源
2장에서 우리는 소신공양이 불교사상, 특히 율장의 기본입장과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율장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소신공양을 강조하는『법화경』이 비불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경전이라
단정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면 소신공양이 율장
이나 생명을 중시하는 불교적 사상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신공양을 통해『법화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또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점에 주목하면서 소신공양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분석해 보고, 불교사상사적 입장에서 사상적 연원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1. 燒身供養의 象徵性
소신공양이 논리적이나 교리적인 측면에서 율장이나 불교사상과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지만『법화경』「약왕보살본사품」에 나오는 소신공양과
관련된 구절들을 분석하면 소신공양 자체가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장을 통해서는 소신공양에 관한
설법이 우리들의 사고나 논리의 영역을 초월해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며,
전반부의 설명과 후반부의 이어지는 문장이 논리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설법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전체적인 설법이
상징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선 경전을 통해 논리적 추론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신공양을 하며 일어난 불꽃을 통해, 그 광명으로 80억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26)
26) 대정장9,p.53b. 灌諸香油。以神通力願。而自然身。光明遍照八十億恒河沙世界。
둘째 (소신공양하는) 그 몸이 1천2백 년 동안을 탄 뒤에야 몸이 다 타버렸느니라.27)
27) 상동, 其身火燃千二百歲。過是已後其身乃盡。一切衆生喜見菩薩。作如是法供養已。
셋째 일월정명덕불이 7만2천년 동안 팔을 태워 공양하여 일체의 대중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게 한 점.28)
28) 상동, p.53c. 卽於八萬四千塔前。然百福莊嚴臂。七萬二千歲而以供養。
令無數求聲聞衆無量阿僧祇人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넷째 대중 가운데서 맹서하길 ‘내가 두 팔을 버렸지만 반드시 부처님의 금색의
몸을 얻으리라. 만일 나의 이런 서원이 참되고 헛되지 않다면 나의 이 두 팔은
예전처럼 회복되리라’고 하자 과연 옛날처럼 회복된 점.29)
29) 상동, p.54a. 於大衆中立此誓言。我捨兩臂。必當得佛金色之身。若實不虛。
令我兩臂還復如故。作是誓已自然還復。由斯菩薩福德智慧淳厚所致。
다섯째 일체중생 희견보살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지금의 약왕보살이 바로
그이니라. 그가 이렇게 몸을 버려 보시한 것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
나유타이니라.30)
30) 상동. 一切衆生喜見菩薩。豈異人乎。今藥王菩薩是也。其所捨身布施如是.
이상의 인용문은 소신공양과 직결되어 있으며, 이들을 내용을 보면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겠다고 하거나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천이백년이나 태웠다고 한다. 7만2천년 간 팔을 태워 대중들이 보리심을
내게 했으며, 소신공양의 서원이 진실했으므로 두 팔을 태웠지만 이전 상태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개념을 초월해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상식이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듯이 소신공양은 우리들의 상식을 초월한 상징체계 속에 놓여져 있으며,
그러한 상징성이 의미하는 바를 탐색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라 본다.
『법화경』전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법사품」을 시작으로 실천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내용이 시작된다. 그것은『법화경』을 受持 讀 誦 解說
書寫하는 것이며,『법화경』의 가르침에 따라 일체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藥王菩薩이
등장한다.「권지품」에 등장하는 약왕보살은 전생에는 부처님을 길러준
마하파제파티이며, 마하파자파티의 전생이 일체중생희견보살이다. 그런데
「권지품」에선 부처님께서 입멸한 뒤 중생들의 선근이 감소하고, 증상만이
많은 악세에 나타나므로 身命을 바쳐서 불법을 지키는 보살로 묘사된다.
「약왕보살본사품」에 오면 약왕보살은 捨身이란 고행을 통해 불법을 호지
하고 홍포하는 보살이 되며,「묘음보살품」과「다라니품」에선 설법자, 즉
법사를 수호하기 위해 다라니를 설하는 보살 중의 으뜸이 된다.「묘장엄왕본사품」
에선 약왕보살이 본래 선지식이란 것을 화제로 삼고 있다.31) 약왕보살이란
부처님이 일체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의사에 비유하는 것이란
점에서「여래수량품」에 나오는 良醫의 비유와도 상통한다. 이상과 같이
『법화경』에 등장하는 약왕보살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의 표현이며, 중생의 소원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
31) 橫超慧日, 『法花思想』(일본, 平樂寺, 1975), pp.149-150참조.
이러한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약왕보살의 전생보살인
일체중생희견보살이 현일체색신삼매를 얻어 소신공양을 결행한다는 점이다.
일체중생희견보살이란 이름은 ‘일체의 중생을 기쁘게 바라보는 보살’이란
의미이다. 또한 現一切色身三昧란 중생과 感應道交하기 위해 등장하는 삼매의
이름이다. 중생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혹은 중생들의 고뇌를 해결해 주기
위해 다종다양한 색신을 필요한 경우 언제나 나타낼 수 있는 삼매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해 있는 제불보살이 중생들과 감응하기 위해
構想된 삼매이며, 이런 점에서 천태지의는 『법화경』 특유의 법화삼매를
「약왕보살본사품」에서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32)
32) 橫超慧日, 『법화사상의 연구』제1(일본, 평락사서점, 소화50), pp.282-290참조.
필자의 견해는 지의처럼 현학적인 해석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사회성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소신공양이 지니는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며, 일정하지 않다. 천태
지의는 약왕보살이 소신공양한 이유로 ‘一身을 버리고 양팔을 태운 것은
삶을 가벼이 여기고 법을 중시한 것이며, 목숨을 버려 도를 지킨 것’이라 해석
한다. 이어서 「약왕보살본사품」 이하 다섯 品은 ‘위대한 법을 크게 홍포하고,
중생들이 커다란 이익을 어도록 원하기 때문에 神力을 다하고 그 形命을
던지는 것’이라 말한다.33) 또한 ‘참다운 법공양이란 안으로 智觀을 운용하여
번뇌의 인과를 관찰하고 空慧를 써서 모두 제거하는 것’이라 보고, 태우는
주체나 대상이나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실상을 체득해야 한다고
말한다.34)
33)『법화문구』(대정장34, p.143a). 一切衆生喜見頓捨一身復燒兩臂輕生重法命殞道存。
34) 상동, 143b. 眞法供養者。當是內運智觀觀煩惱因果。皆用空慧蕩之。故言眞法也。
又觀若身若火能供所供皆是實相。誰燒誰然能供所供皆不可得。
당나라 때 활동한 길장은 소신공양을 부처님에 대한 報恩으로 해석하고
있다. ‘약왕이 身命財로 報恩하는 공양은 경전을 홍포하여 남을 이롭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라 말한다.35) 그는 보은공양을 현세공양과 轉身보은공양
으로 나눈다. 현세보은공양에는 외재공양과 내신공양이 있는데 소신공양은
三業 중에서 身業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전신공양은 佛在世時의 공양과
불멸후의 공양으로 구분하며, 소신이나 燒臂공양은 불멸 후의 공양으로 분류
하고 있다.36) 나아가 보살이 소신과 소비를 통해 着情을 깨뜨리기 때문에
染着心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한다.37)
35)『법화의소』(대정장34,p.620a) 謂藥王以身命財報恩供養。弘經利人敎化衆生。
36) 상동, p. 620bc. 인용문이 길어서 인용 생략
37) 상동, p.621b. 菩薩捨身捨臂破彼著情故不生染著。
중국 법상종의 초석을 다진 규기는 그의 『법화현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약왕이 당시 모임 중에 있었다 하더라도 과거의 燒身과 燃臂를
말한 것은 스스로 고행을 실행해 正法을 유통시키고자 한 것이며, 당시의
모임을 이롭게 하고자 함이다.”38)고 정의하고 있다. 나아가 불법을 공양하는
방법이 일곱 가지 있는데 그 중에 소신공양이 하나라 보며, 이러한 소신공양
에는 향유를 마시는 것과 年歲를 밝히는 것 내지 燃身의 세 가지가 있다고
본다.39) 또한 사리를 공양하는 방법 열 네 가지 중에 起塔이 있는데 여기에
悲戀과 燒身, 기탑의 세 가지가 해당된다고 해석하고 있다. 탑을 세우는 것에
燒身공양이 해당된다는 점에서 물질적인 탑이 아니라 정신적인 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8) 상동, p.843b. 藥王時雖在會。說其過去燒身燃臂。自行苦行以流通正法。利益時會。
39) 상동, p.844a. 燃身供養有三。一服香油。二明年歲。三正燃身
이상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법화경』 주석서를 통해 그들이 바라본
소신공양의 상징성을 일별해 보았다. 그들의 해석은 나름대로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논자는 그들의 해석을 참조하면서도 소신
공양의 상징적 의미를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선언적인 차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애착하던 내 몸까지 선뜻 버리고
거룩하신 세존께 공양 올리니 위없는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40)
와 ‘태양이 어둠을 제거하듯이 이 경전도 마찬가지로 일체의 착하지 못한
어둠을 제거하느니라.’41)하는 대목이다.
40) 대정장9, p.53b. 捨所愛之身 供養於世尊 爲求無上慧.
41) 대정장9, p.54a. 又如衆星之中。月天子最爲第一。此法華經亦復如是。
於千萬億種諸經法中。最爲照明。又如日天子能除諸闇。此經亦復如是。
能破一切不善之闇。
위없는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법화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처님의 知見이며, 그것은 중생들을
開示悟入시키는 지혜라는 점이다. 특히 부처님의 지견에 중생들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개시오입의 최종 귀착점이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태양이
어둠을 제거하듯이 세상의 무명과 어둠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방편품」에서 말하는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실천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약왕보살본사품」이며, 그것이 소신공양으로 상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光明이나 등불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약왕보살본사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왕화야, 이 『법화경』은 능히 일체 중생을 구원하며, 이 경은 능히 일체
중생의 모든 고뇌를 여의게 하고, 이 경은 능히 일체중생을 크게 이익케 하여
일체 중생의 소원을 충만케 하나니, 맑고 시원한 못이 일체의 목마른 사람들을
채워주는 것과 같으며, 추위에 떨던 사람이 불을 얻은 것과 같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난 것과 같으며, 나루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고, 병든 이가 의사를 만난 것과
같으며, 어둔 밤에 등불을 만난 것과 같으며,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고, 국민들이 현명한 지도자를 만난 것과 같고, 행상이 바다를 얻은 것과
같느니라.”42)
42) 대정장9,p.54b. 宿王華。此經能救一切衆生者。此經能令一切衆生離諸苦惱。此經能大饒益
一切衆生。充滿其願。如淸涼池。能滿一切諸渴乏者。如寒者得火。如裸者得衣。如商人得主。
如子得母。如渡得船。如病得醫。如暗得燈。如貧得寶。如民得王。如賈客得海。如炬除暗。
此法華經亦復如是。能令衆生離一切苦一切病痛。能解一切生死之縛。
마치 근본불교의 전도선언을 연상시키는 이상의 인용문처럼 『법화경』의
역할이 그러한 것이라면 현일체색신삼매를 통해 중생의 등불이 되고자
하는 약왕보살의 소신공양도 이상의 의미와 상통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신이란 ‘중생들의 일체 고통과 질병을 여의게 하여 능히 일체 생사의
속박에서 해탈케 하는 것’이며, 이러한 가르침을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지는 것이자, 일체중생에 대한 무한한 헌신과 봉사라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매우 자의적인 해석 내지 주장이라 비판받을 수 있는 소신공양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에서 필자는 “종교적 언어는 자기 나름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참여하는 일 뿐만 아니라 보편화하고 그 언어 자체를 심화시킨다
.”43)는 윌리엄 페이든의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말처럼 종교언어에
대한 접근은 매우 다양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성격을 구비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호교적일 수도 배타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야를 넓혀주는 계기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전들은 해석된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해석
되어야만 한다.”44)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시대성을 담보해야 하며,
종교성 내부에 사회성이 풍요롭게 살아나오도록 해석하는 것이 해석자
당대의 시대적 사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윌리엄 페이든이
분석한 종교성의 유형에 대한 분석을 참고로 살펴본다면45), 소신공양의
상징성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3) 이민용 역, 『성스러움의 해석』(청년사, 2005),p.159
44) 상동, p.177참조
45) 상동, pp.216-217참조.
즉 그는 종교성의 다섯 가지 측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
종교성은 엑스터시적인 감정적 체험의 매개를 통해 발현된다는 점. 둘째
종교성은 명상적인 지혜, 그리고 내적인 성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셋째
희생과 고행의 현상, 다시 말해 자기의 욕구충족에 대한 의도적 포기에
근거한다는 것. 넷째 윤리적인 것으로서 이 경우의 종교성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표현된다는 점. 다섯째 많은 사람들이 종교성을 신앙과 동등한
것으로 파악하는데 믿음, 신뢰, 순종, 복종, 충성, 수용 같은 것들이 그것의
몇몇 변형이라는 점 등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소신공양이란 상징성에 내재하는
종교성은 윌리엄 페이든이 분석한 다섯 가지 유형 중에서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의 유형이 혼합되어 있는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소신공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약왕보살본사품」에 등장하는 소신공양의 사상적 상징성에 대해 살펴
보았다. 문제는 초기불교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소신공양과 같은 苦行이
최고의 공양으로 찬탄되고 있으며, 그것이 대승경전 중의 으뜸으로 칭송받고
있는『법화경』에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고행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소신공양이 언제 어떻게 불교에
수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구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단편적인
가설만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점을 참고로 필자 역시 소신공양의
연원과 그 전개에 대해 고찰해 보려고 한다.
「약왕보살본사품」에서 소신공양이 강조되고 있고, 이후 많은 불교사상가
들이 그에 대한 찬반의 해석을 시도했지만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참다운
공양이 되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정설이 없다. 경전의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본다면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몸을 태워 세상을 비추는 광명이 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많은 공양도구가 있다. 경전에는 흔히
꽃, 향, 영락, 번개, 칠보 등이 공양구로 등장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광명이기 때문에 등불을 공양하는 것이 중시되었으며,
그러한 것은 현재도 사찰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살이
자신의 몸을 연료로 삼아 일월정명덕부처님께 등불을 공양했던 것이다.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불교적 상징성은 그대로 불교의식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소신공양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강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광명사상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로아스터교의 유구한 역사는 동서의 많은 종교에 광명을 숭배하는 사상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광명을 존중하는 사상은
조로아스터교와 함께 이란의 태양신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그러한 예를 미륵사상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Levi는 원초상태의 미륵으로 알려진 아시타와 마이트레야가 이란의
Mithra와 만나 미래의 세계를 구원해 준다는 메시아적 성격의 미륵으로 재탄생
했다고 본다. 조로아스터교의 미트라는 태양신이며, 그것이 로마의 영역 안에
확산되어 無敵을 나타내는 invectus라는 형용사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시타 즉 ‘이길 수 없는 자’와 같은 의미로 본다. 한편 미트라신의 호칭은
파리어에선 메테야이고, 산스크리트에선 마이트레야라 한다. 인도 고전인
『마하바라타』가 편찬된 시대에 태양을 가리키는 호칭 중에 마이트레야
(인자한 자)가 있다. 이것이 이란의 마이트레야신과 불교가 만나는 과정에서
아시타와 마이트레야를 결합시켰다고도 본다.46) 불교의 발전과 대중화운동은
태양사상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상징체계를 수립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46) 이것은 Levi의 학설을 인용한 것인데 필자 역시 재인용했다. 출전은 鈴木中正 편,『천년
왕국적 민중운동의 연구』(일본, 동경대학출판부, 1982),pp.42-43참조. 미륵은 네 가지
발전 단계가 있다고 본다. 첫째 우바리 바라문의 제자였던 미륵과 아시타이며,『수타니
파타』에 나온다. 둘째 석가불 보다 당래성불의 수기를 받는 미륵이다. 셋째는 미래에
전륜성왕이 되는 아시타와 미래불이 되는 미륵의 동시 출현이다. 넷째는 미륵과 아시타를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첫째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넷째가 가장 늦게 성
립된 것으로 본다. 이것이 불교의 대중화 운동과 맞물려 종래에 볼 수 없었던 아시타와
미륵을 미래불로 변형시켰다고 본다. 이러한 것은 프랑스인 학자 라모뜨의 학설이며,
상기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한편 소신공양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7)
자이나교는 불교 보다 그 창종의 역사가 훨씬 유구하며, 석가모니부처님 역시
출가 수도할 때 일시적이지만 자이나교에 몸담은 적도 있다. 그리고 자이나교
제24대 교주인 마하비라와 동시기에 활동한다. 자이나교는 수행인의 자살에
반대하지 않는데 그것은 반드시 출가한 이후 12년이 경과한 뒤거나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야 그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
47) 曾其海,『삼종론』(중국, 상해사회과학원출판사,2006),pp.73-74참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활동하던 시기 제자들 중에는 바라문교나 자이나교
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자이나교와 힌두교 등 불교 보다 역사가
긴 종교들은 경쟁과 견제 속에서 인도 종교계를 이끌고 있었다. 교파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행에 대한 극단적인 사고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생명을
바치면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이 출현했다. 즉 일찍 죽는 것이 일찍 열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수행자들이 등장하게 되며, 이러한 것들이 불교의 수행자 집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했듯이 소신공양이란 불교적인 종교행위가 성립하기까지는
인도사회의 다양한 문화, 내지 주변국가의 다양한 문화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부정관 때문에 소신공양이 발생했다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이란의 태양신 내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문화의 속성 자체가 복합적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다양한
문화들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지만 두드러진 사상을 찾으라면
이상에 언급한 태양신 내지 자이나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이다.
특히 광명에 대한 신성시 내지 숭배는 초기불교의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貧女一燈의 고사나 『증일아함경』권38에 나오듯이 보장여래에게
등불을 공양하여 수기를 받는 장로 비구의 이야기, 『증일아함경』11에 나오는
꽃을 사서 정광불에게 공양한 초술 범지의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또한
『본생담』에 나오듯이 찾아온 손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火爐에
던지는 토끼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불교적인 사상 속에 들어와
더욱 심화되고, 외연을 확장하면서 소신공양과 같은 형태로 구상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많은 경전을 통해 골격은 다르지만
상징하는 의미가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비유적인 설법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光明을 보급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정신은 대승불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본다. 『본생경류의 사상사
적 연구』란 책을 저술한 干瀉龍祥은 대승사상이 발전하는데 직간접으로
본생경류의 영향이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유형의 경전들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48) 첫째는 연등불 수기에서 출발하는 수기본생담 내지
이것들과 유사하거나 여기서 파생된 본생경류, 둘째 중생제도의 大願을 위해
불도의 완성을 추구하는 激烈한 求法과 求道心을 나타내는 본생경류, 셋째
원시적인 것에서 대승적인 정신을 찾아내는 본생경류 등이다.
48) 干瀉龍祥 저,『本生經類의 思想史的 硏究』(일본, 산희방불서림, 소화 53),pp.80-82참조.
이 중에서 두 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본생경류는 爲法忘軀의 정신을 고양하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본다. 즉 본생경류에 나오는 다양한 우화들을
채용하여 필요한 설법을 재구성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에 등장한 것이
『육도집경』권4에 나오는 ‘菩薩投身飼餓虎’49)같은 이야기로 본다. 또한
『현우경』권1에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財寶를 사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법을 위해 자신의 몸과 妻子까지 버린다는 내용이 나온다.50) 『현우경』
의 내용은 『열반경』의 설산동자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사상적 전개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헌신적인 보살행이 대승불교의
전개와 함께 『반야경』에 나오는 공양구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常啼菩薩이나 『화엄경』의 선재동자, 『열반경』의 설산동자 등의 이야기로
변형되었다고 본다.51)
49) 대정장3, p.2b. (四)昔者菩薩。時爲逝心。恒處山澤。專精念道不犯諸惡。食果飮水不畜微餘。
慈念衆生愚癡自衰。每睹危厄沒命濟之。行索果蓏。道逢乳虎。虎乳之後。疲困乏食。飢饉心荒。
欲還食子。菩薩睹之愴然心悲。哀念衆生處世憂苦其爲無量。母子相呑其痛難言。哽咽流淚。
迴身四顧。索可以食虎以濟子命都無所見。內自惟曰。夫虎肉食之類也。深重思惟。吾建志學道
但爲衆生沒在重苦欲以濟之。令得去禍身命永安耳。吾後老死。身會棄捐。不如慈惠濟衆成德。
卽自以首投虎口中。以頭與者。欲令疾死不覺其痛耳。虎母子俱全。
50) 대정장4, p.349b.爾時夜叉復告王曰。學法事難。云何直爾欲得聞知。王叉手曰。一切所須不敢有逆。
夜叉報曰。若以大王可愛妻子與我食者。乃與汝法。爾時大王以所愛夫人及兒中勝者供養夜叉。夜叉得已。
於高座上衆會之中取而食之。
51) 干瀉龍祥, 전게서, 상동.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신공양의 원초적인 모델이나 그 사상적 연원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상에 소개한
다양한 요소들이 직간접적인 영향 속에 구상되었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광명사상이나 구법정신이 다양한 인도문화적 요소와 결합하면서도 본생담등에
나오는 우화와 결합하여 대승보살사상으로 발전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소신공양을 강조하는『법화경』도
이러한 사상적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색신을 공양하는 것보다도
정신적 차원의 공양이 보다 바람직한 공양이라는 관점에서 상징선이 농후
하면서도 보다 격렬한 공양을 구상하게 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4. 맺는 말
이상에서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나오는 燒身供養의 문제점과
상징성, 그리고 사상적 연원과 전개과정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소신공양은
그 종교적 엄숙성이나 고행성 때문에 불교계의 찬탄을 받아왔으며, 최근까지
도 소신공양을 실천한 수행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적인 소신공양을 중시하기보다는 소신공양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몸을 태우는 것은 계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점을 노출하게 되며, 동시에
경전 자체도 소신공양이 자신을 불태워 중생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등불이
되라는 강한 메시지라는 점을 여러 측면에서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필자는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소신공양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자 했다.
첫째 율장의 입장에서 소신공양은 어떠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가?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실질적으로 燒身을 하거나 燃臂 내지 燒指供養을 하는 것은
투란차나 돌길라에 해당하는 파계행위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대해
이미 당나라 때 활동한 義淨스님이 지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여타의 『법화경』 연구가나 불교사상가들은 소신공양의 實演을 찬양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이다.
둘째 소신공양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계율과
충돌하면서도 소신공양을 강조한 것은 그 이면에 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에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분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자신을 헌신하여 세상의 등불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법화경』의 정신이며, 불교도들의 의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자 하는
것이란 점이다.
셋째 소신공양의 사상적 연원과 그 전개과정에 대한 탐색이다. 소신공양의
상징성을 보다 정확하게 추출하기 위해, 아니 소신공양이 시사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신공양은 자이나교의 고행사상, 조로아스터교 내지 이란 태양신
사상, 불교의 수행관 중 하나인 부정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하면서도 초기불교의
본생경류에 녹아 있는 우화들을 융합하여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爲法忘軀의
보살상을 구상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적 연장선상에서 소신공양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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