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불교의 ‘선악불이(善惡不二)’에 대한 이해/안옥선

실론섬 2016. 8. 3. 18:35

《불교학연구》제14호(2006.8)

불교의 ‘선악불이(善惡不二)’에 대한 이해

― 육조단경 을 중심으로 ―

(이 논문은 2005년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KRF-2005-041-A00243).

안옥선/순천대 인문학부 교수

 

Ⅰ. 머리말

 

일찍이 니체(Nietzsche)는 선과 악이 어떻게 형성되어 어떻게 기능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메타적 물음을 던졌다. 그는 선과 악에 대한 

타적 성찰을 통해 선악 이분법이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과 삶을 

구속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전통 도덕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그는 서양사회를 지배해 왔던 관습적 주류 도덕으로

서 기독교 윤리, 윤리학에서의 주류를 차지해온 소크라테스, 칸트, 

리주의 윤리는 모두 극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니체가 모든 주류 도덕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본 이유는 그것들이

선과 악에 대한 경직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이분적 구도 속에서 절대적 고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선과 악은 본디 탈이분적인 것으로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선과 악 사이에는 확정적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며 

선과 악은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다. 예컨대 악은 유용성이 있을 수도 

있고 악은 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선악의 이러한 

속성을 간과한 전통도덕은 거부되어야 하며, 거부의 시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1)

1) 그는 ‘거부를 감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선악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고 한다(니체, 
   선악을 넘어서 , 김훈 옮김(서울: 청하, 1982, 28쪽).

 

결과적으로 니체는 탈이분법적 도덕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가 주장하는 

탈이분법적 도덕의 의미는 선과 악의 경계가 확정적․고정적이 아니며 

새로운 방식으로 재규정될 수 있다고 본 데 있다. 선과 악은 서로

다른 독립적 뿌리를 갖는 것이 아니며 한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일 수 있다. 그래서 그 경계나 구분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사람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관점을

반영하며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

도덕의 존재도 의심된다.

 

선악 이분법에 대한 이상과 같은 메타적 사유는 불교에서도 발견된다. 

니체와 달리 불교는 보편도덕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와 

찬가지로 선악이 절대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선과 악 사이에는 선악이분의 절대적 경계선이 있지 않다. 선과 악은

상황을 반영하며 상황 속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생멸한다. 특히 선과

악이라는 두 개념 간 관계를 볼 때, 이 양자는 늘 함께 존재하며 

상호적으로 서로를 규정하고 결정한다. 선악 또한 모든 존재/개념들과 

찬가지로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 無相, 無想)한 것이다. 

그것은 연기/공/무아적으로 생멸한다. 선은 상황독립적이지 않을 뿐만 

니라 악과의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는 선악은 발생적으로 볼 때 절대자나 절대적 

권위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요, 오직 사람에 의해서 연기/공/무아적으로 

결정된다. 선악은 발생학적으로 사람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사람의 관념을 반영하며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마음의 반응으로서 

마음 안의 문제이다. 그것은 마음을 좋게/건전하게 활용하느냐

나쁘게/불건전하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외부 대상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좋게 활용할 때 선으로 표출되며, 그 반대일 때 악으로 표출된

다. 이러한 방식으로 선과 악은 마음이라는 동일한 하나의 근원에 

해서 결정되는데, 선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작용하는 마음 내지는 

음의 핵심을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성은 본래적으로 항상 청정하여 선하다. 그래서 문제는

본래적으로 항상 선한 이러한 자성이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쁘게/불건전하게 작용하여 악을 가능하게 하느냐이다. 이에 대한

선불교의 한 가지 (묵시적) 답변은 악(행)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악조차도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악도 본질적으로는 

선과 마찬가지로 선성을 속성으로 하는 자성 안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이다.

 

선악의 근원으로서 자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선과 악을 하나로

볼 수밖에 없는 핵심적 이유가 된다. 자성 선성/청정의 관점에서 

보면 악도 선성을 반영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선불교의 선악불이(善惡不二)라는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다’는 선악불이는 원론적으로 연기/공/무아에2)

근거한 말이지만, 자성에3) 근거한 말로도 이해된다. 특히 선불교의

경우 선악이 자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성의 작용임을 강조한다. 

선불교에서는 세계의 모든 존재를 두 가지 대립된 개념 쌍들인 대법(對法)

으로 이해하고, 선과 악 또한 자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대법으로 본다.

불교 일반의 관점에서 볼 때도 선과 악은 불이로서 사람의 마음의 

용이지만, 선불교는 독특한 방법으로 이에 대해서 강조한다.

2) 보통 ‘불이’는 연기/공/무아의 다른 표현으로 자타의 불이, 뭇 존재의 불이, 심신의 
   불이, 주객의 불이 등의 존재론적․인식론적 불이를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그 의
   미는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불변의 고유한 실체를 갖지 못하며 그 존재방식에 있
   어서도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들, 혹은 현상들은 무한히 중첩
   적으로 상호의존적이며, 그러한 상호의존성으로 인하여 최종적으로는 모든 존재 
   혹은 모든 관념이 연관되어 있는 둘 아닌(不二) 것이다. 선악의 개념 또한 마찬가
   지이다. 선과 악은 상호적 연관 속에서 결정되는 유동적인 것이다.
3) 선불교의 독특성은 자성, 자성 자체의 불이성, 그리고 이에 따른 모든 대립물/대립 
   개념의 不二에 대한 강조에서 찾아진다. 모든 세계를 자성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바로 그러한 작용에 대한 직관을 깨달음의 핵심(見性)으로 본 것이 선불교이다. 
   선불교 중에서도 우리 선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혜능의 남종선이 자성의 본래
   적 불이성에 근거하여 定慧, 迷悟(凡佛, 煩惱와 菩提), 혹은 眞妄의 불이를 강조한 
   것은 그 이전의 불교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본래적 일원성은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이해되는 마음의 구조로서 12연기의설에도 나타나고 이원적 
   대립개념들의 불이는 유마경 에서도(강혜원은 선종의 불이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유마경 의 불이사상이라고 본다(강혜원, 「달마선에 나타난 유마의 불이사상」
   ( 한국불교학 20, 1995) 참조)) 나타나지만, 불이 자체를 견성의 전제로서 부각시킨 
   것은 선불교의 독특성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은 선불교의 중심경전인「육조단경」을4) 중심으로 하여 ‘선악불이’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선악불이가 어떠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지(Ⅱ장), 선불교에서 나타나는 선악불이의 근거는 무엇인지(Ⅲ장), 

선악불이가 요청하는 선 실천의 태도는 무엇인지에 (Ⅳ장)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선악불이에 대한 이해의 결과로서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이나 선악 초월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밝히고자 한다.5)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을 가르친다는 

주장은 국내외적으로 전문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에게도 수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오해는 선악불이의 개념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6)

4) 이 글에서 사용한 육조단경 은 덕이본( 大正藏 48)이다. 번역에 있어서는 판본은 다르지만 
   청화와 정성본의 도움을 받았다(청화 역주, 육조단경 (돈황본), 광륜출판사, 2003; 정성본 
   역주, 돈황본 육조단경 , 한국선문화연구원, 2003). 흥성사본(니카가와 다카 주해, 양기봉 
   옮김, 육조단경 , 김영사, 1993)과 종보본(법성 해의, 육조법보단경해의 , 큰수레, 1995)
   을 인용해야 할 경우는 예외적인 몇 경우만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번역을 그대로 활용했다.
5)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분적으로’ 밖에 검토할 수 없는 
   까닭은 한편으로는 이 글의 일차적 목적이 ‘선악불이’에 대한 이해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고찰은 다각도에서 
   여러 가지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목적상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선악불이는 선악의 공성에 대한 선불교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을 가르친다는 오해는 선악의 공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예컨대, 김성철, 「공과윤리」, 공과 연기의 현대적 조명
   (서울: 고려대장경연구소, 1999); Christopher Ives, Zen Awakeningand Society (Hawa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참조. 특히 크리스토퍼는 이러한 오해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정하며 어떤 긍정적인 것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II. 선악불이의 의미

 

1. 선과 악은 (본성상) 다르지 않다

실제 현실에서 선과 악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다는 의미에서 선악은 

둘이다. 그러나 선과 악은 본성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악은 둘이 아니다(善惡不二). 이처럼 선악불이는 선과 악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선과 악은 실제로 다른 것이지만, 

‘그 본성의 관점에서 보면’ 다르지 않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흥성사본 육조단경 에서는 선과 악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악은 비록 다르지만 그 본성은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닌 본성을 이름 하여

참된 속성이라고 이름 한다. 이 참된 속성 가운데에 있으면서 선악에 물들지 

으니 이를 복덕원만의 보신불이라 이름 한다."7)

7) “善惡雖殊本性無二無二之性名爲實性. 實於性中不染善惡此名圓滿報身佛”(흥성사본
   「육조단경」원문 265쪽, 필자번역). ‘필자번역’이라고 특별히 명시된 경우는, 필
   자의 관점에서 이전 번역이 흡족하지 않거나 필자와 용어선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선과 악이 다르다는 것은 선과 악이 서로 다른 모습(相)으로서 

구별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실제 현실 속에서 선과 악은 서로 구별되는 

개별적 사태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일상적으로 

구별하고 구별해야 하는 선과 악의 구체적 모습이 있다. 중생의 삶은 

이러한 구별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별되는 선과 악은 

본성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그러면 본성에 있어서 선과 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선과 악이 속성상 공통적으로 ‘공하다’는 점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선과 악은 독립적 존재성, 고정성, 항상성, 실체성, 

불변성 등을 갖지 않으며, 이러한 점에서 선과 악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공하다’는 점에서 선악이 다르지 않다는 입장은 선악의 차이를 

실질적으로 무화시키려는 시도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선도 악도 

고정적 속성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의 영역 또한 고정적일 수 없을 

것이다. 즉 선이 악의 영역으로 이행할 수도 있고 악이 선의 영역으로 

이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의 악으로의 이행가능성보다도 

악의 선으로의 이행가능성을 믿는다. 그래서 선의 무화보다도 악의 

무화를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후에 살펴보겠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자성(의 선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자성은 ‘본래적으로’, 그리고 

‘항상’ 청정한 선성을 잃지 않으므로 자성의 산물인 악도 청정성으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즉 악도 선과 마찬가지로 자성으로 부터 비롯될 뿐만 

아니라 자성의 작용이기 때문에, 자신 속에 선을 은폐시키고 있거나 

내재하는 선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악의 본성 또한 선(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악은 가상적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악에 대해서 그 

내재적 선성 혹은 선으로의 전환가능성을 강조하여 그 악의 실질성이나 

의미를 무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자성이 계정혜와 오분법신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은8) 악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악을 무화시키려는 시도라고 이해

될 수 있다. 계정혜와 오분법신을 이미 갖춘 범부에게 악은 애초부터

부정된 것이다. 수행의 필요성이 부정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자신의 청정한/선한 자성의 본래 모습만 확인하는 견성(見性)만이 

필요할 뿐이다.9) 청정해지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은 자신을 속박하는 

관념(相)을 세우는 것으로써 오히려 견성에 역행하는 것일 뿐이다.10) 

마찬가지로 번뇌와 보리를 둘로 보아 지혜로서 번뇌를 비추어

깨뜨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11) 종보본「육조단경」에서는 

뇌와 보리가 다르지 않으니 번뇌를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라고 한다.

8) 마음은 그릇됨, 혼란, 어리석음이 없어서 계정혜를 이미 갖추고 있다(心地無非是自性
   戒心地無亂是自性定心地無癡是自性慧( 육조단경 , 大正藏 48, 342b). 흥성사본 육조
   단경 에서는 자성에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한글 90쪽, 원문 268쪽).
9) 김태완에 의하면 견성은 지적이거나 논리적인 과정이 아니다(김태완, 「조사선에서 
   선지의 표현에 관한 연구」, 백련불교논집 9, 1999, 104쪽). 이월호에 의하면 견성은 
   ‘모든 사물에서 있는 그대로의 완전성을 보는 것’과 통한다(이월호, 「육조단경에서 
   견성의 의미」, 백련불교논집 1, 1999, 90쪽).
10) 예컨대 청정은 상을 갖지 않는데 청정함에 대한 상(淨相)을 세워 도리어 청정함에 
   속박된다(却被淨縛)고 한다( 육조단경 , 大正藏 48, 338c).
11) 악의 실재성에 대한 부정은 미혹과 깨달음, 혹은 범부와 부처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즉 미혹(凡夫)의 본성―자성청정―은 깨달음(부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
   기 때문에, 미혹은 이미 깨달음(부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迷悟不二/凡聖不二).

 

번뇌가 곧 보리라 둘이 없고 다름도 없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이 

지혜로서 번뇌를 비추어 깨뜨린다면 이것은 이승의 치우친 견해요, 

양수레, 사슴수레 등의 낮은 근기인 것이니, 높은 지혜와 큰 근기는 

모두 이와 같지 않다.12)

12) 종보본「육조단경」 법성 170쪽.

 

이처럼 선악이 공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입장은 자성의 

청정성/선성에 근거하여 악을 무화시키려는 시도와 연관시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선에 대한 무화보다도 악에 대한 무화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본성과 가능성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서 여기에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것은 선과 악이 

공하다는 점에서 선악은 다르지 않지만, 선과 악이 항상 무차별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과 악은 여전히 개별적 모습/상으로 

드러나는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다음에서 살펴볼 선악불이의

의미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2. 선과 악은 더불어 있다

돈황본「육조단경」에서 ‘선과 악이 둘이 아니다(善惡不二)’는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은 ‘악이 선과 더불어 있다는 것을 

알라’는 ‘악지여선(惡知與善)’이라는 말이다.13) 악지여선은 선과 악을 

함께 볼 것을 요구하는 말인데, 사람을 보든지 사람 아닌 것을 보든지 

모든 존재를 볼 때 선과 악을 함께 보라는 것이다.

13) 흥성사본에서는 ‘惡之與善’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흥성사본 육조단경 , 원문 264쪽).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것이 크다. 만법이 다 자성이다. 일체의 사람

및 사람 아닌 것을 봄에 악이 선과 더불어 있음을 알라. 악법, 선법을 다 버리지

말라. 오염되지도 말라. (자성이) 허공과 같으니 이를 크다고 하며 이를 마하행이라고 

한다."14)

14)「육조단경」(『大正藏 』48, 339c-340a): “性含萬法是大. 萬法盡是自性. 見一切人及
    非人惡知與善. 惡法善法盡皆不捨. 不可染著. 由如虛空名之爲大此是摩訶行.”

 

여기에서 ‘선악이 함께(與) 있다’는 말이나 ‘악법도 선법도 다 버리지 

말라’는 말은 선의 관점과 악의 관점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선을 볼 때도 악과 함께 보며 악을 볼 때도 선과 함께 보라는 말이다.

마치 큰 허공에는 만물이 차별 없이 다 포함되어 있듯이, 자성이라 

리는 마음에도 악법과 선법이 다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보라는 것이다. 

선과 악 어느 하나만을 남긴 다른 하나의 배제는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악이 선과 함께 있다’는 의미는 보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첫째는 실질적으로 선과 악이 함께 출현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시적으로 선을 보는 곳에서 악도 보아야 하고, 악을 보는 

곳에서 선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선과 악이 상호적으로 수반된다. 

이는 후에 살펴보게 될 선악의 상호의존성으로서의 선악불이의

의미와 상통한다. 둘째로 선악이 함께 있다는 말은 선은 악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고 악은 선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선은 조건에 따라 악으로 변화될 수 있기에 악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악 또한 그러하다. 선과 악은 서로가 바뀔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내재적으로 선과 악이 각각 상대가 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선과 악이 모두 동일한 자성안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육조단경」은 자성이 삿될(邪) 때 18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올바를 (正) 때 18가지 올바름이 일어난다고 하기도 하고, 자성의 

선용에 의해 부처도 되고 악용에 의해 중생이 된다고 한다.15) 자성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며, 부처도 

되고 중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선악 혹은 범불의 유동적 가변성을 

전제한다. 선악 혹은 범불의 본질성을 부정하면서도 자성의 의도에 

따라 선악 혹은 범불의 상호적 전환의 용이성을 긍정한 것이다. 

요컨대 선악이 ‘자성’이라는 동일한 하나의 원천을 갖기 때문에, 

선은 악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고 악은 선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는 것이다.

15)「육조단경」(『大正藏』48, 343b)

 

그런데 선불교 전통에서는 선 속의 악의 가능성보다도 악 속의 선의 

가능성을 더 강조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자성의 본질적 속성은

선성에 있으며 악은 언제든지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뜬구름과 같은 

이다. 그래서 선에 내재된 악성을 말하는 경우는 없지만, 악에 내재된

선(성)에 대해서는 강조한다. 예컨대 악이라 할 수 있는 망념(妄念)은

선성을 포함한다. 망념 가운데 청정한 성품이 있다(淨性於妄中)고 한다.

 

"보리는 본래 청정하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망념이다. 청정한 자성이 망념 

운데 있으니 오직 세 (가지) 장애를 바르게 제거해야 한다."16)

16)「육조단경」(『大正藏』 48, 341c), “菩提本淸淨 起心卽是妄. 淨性於妄中 但正除三障.”

 

요컨대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의미로서 선악불이는 실질적으로

선과 악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고, 내재적으로는 선과 악이

서로 상대가 될 가능성을 자신 속에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상을 볼 때 악과 선을 함께 보아야 하며, 선과 악이 그 반대의 

것으로 (쉽게) (순간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선과 악은 상호의존 한다

선악불이의 세 번째 의미는 선과 악이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육조단경」에서는 자연적

현상, 언어/개념, 자성의 작용 등이 서로 반대되는 대립쌍(對法)으로

나타난다고 보는데, 선과 악 또한 그 중의 한 가지에 해당한다. 세계는 

대립적 개념 쌍들인 대법으로 구성․파악되며, 이 때의 대법은 서로 

의존적 관계 속에서만 각자의 의미를 성립시킨다는 의미이다. 여타의 

대법과 마찬가지로 선악도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하며 상호의존적으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육조단경」에서는 세계가 대법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세계(현상)를 

대법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가 대법을 통달하지

못하면 세계와 불법에 대해서도 통달할 수 없다고 한다.「육조단경」은 

구체적으로 36가지 대법을 제시한다. 예컨대 자연현상과 관련된

대법으로서 천지(天地), 일월(日月), 명암(明暗), 음양(陰陽), 수화(水火)

5가지, 말과 관련된 대법으로서 유무(有無), 유상무상(有相無相), 유루

무루(有漏無漏), 색공(色空), 청탁(淸濁), 범성(凡聖), 승속(僧俗), 노소

(老少) 등 12가지, 자성의 작용과 관련된 대법으로서 장단(長短), 사정(邪正), 

치혜(癡慧), 계비(戒非), 번뇌보리(煩惱菩提), 상무상(常無常), 성상(性相) 

등 19가지가 제시되고 있다.17) 선악과 유사한 대법으로서 삿됨과 

올바름(邪正), 계와 어김(戒非) 등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선악이 

대법으로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선악 또한 많은 

대법들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열거된 36가지 대법은 

세계를 이루는 모든 대법을 망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에 대한 

예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제시된 대법이 몇 가지이냐 혹은 

어떠어떠한 것들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육조단경」

에서 대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대법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다.

17)「육조단경」(『大正藏』 48, 343b). 두 번째 군과 세 번째 군을 나누는 대법의 
    분류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36가지 대법 모두를 자성의 작용이라고
    하면서도 36대법을 이루는 세 번째 군에 대하여 또 다시 자성의 작용이라고(自
   性起用)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대법을 분류하는 기준은 체계적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을 가르치니 근본종지를 잃지 말라. 과(科)별 

문을 들고 36대법을 쓰라. 출몰에 있어서 곧 양쪽을 다 떠나라. 일체의 법을 

함에 성(性)과 상(相)을 떠나지 말라. 법을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을 냄에

쌍을 다하고, 모두 대법을 취하라. 오고 감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니, 궁극적으로

는 이법(二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이 36대법을 이해하여 

쓰면 모든 경전에 통달하고 출입에 있어서 양쪽을 떠나게 된다......어둠은 스스로 

어두워지지 못하고, 밝음이 있는 까닭에 어두워진다. 어둠은 스스로 어두워지지 

못하고, 밝음이 있는 까닭에 어둠으로 바뀌고 어둠이 있는 까닭에 밝음이

드러난다. 오고 감은 서로 의존한 것이니 36대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18)

18)「육조단경」(『大正藏』 48, 343b-c), “吾敎汝說法不失本宗. 擧科法門動三十六對. 
   出沒卽離兩邊. 說一切法莫離於性相. 若有人問法出語盡雙皆取法對. 來去相因究竟二
   法盡除更無去處......此三十六對法解用通一切經出入卽離兩邊(343c)......暗不自暗以
   明故暗. 暗不自暗以明變暗以暗現明. 來去相因三十六對亦復如是.”

 

여기에서 ‘대법’이 의미하는 바는 각 대법을 이루는 개념 쌍들이 생멸에 

있어서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명암의 관계로 예시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있게 한다. 밝음이 결코 스스로 홀로 

밝을 수 없고 어둠으로 인하여 밝을 수 있듯이―어둠도 마찬가지이듯이―, 

선은 스스로 선일 수 없고 악으로 인하여 선일 수 있다. 악도 마찬가지이다. 

선과 악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가능케 하는 상호의존적인․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과 악은 서로에게서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대법이다.

 

선과 악이 상호의존적 대법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중도(中道)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돈황본 육조단경 에서는 대법을 설명할 때 ‘중도’ 

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흥성사 본은 대법을 중도라는 

말로 설명한다.

 

"만약 누가 그대들의 의견을 물어올 경우, 유를 질문 받으면 무로 대답하고, 범을

질문 받으면 성으로 대답하고, 성을 질문 받으면 범으로 대답해야 한다. 대립된

한 쌍의 개념이 서로 조건이 되어 중도의 의미가 우러난다."19)

19) 흥성사본「육조단경」한글 169쪽, 원문 250쪽, 
    “若有人問汝義問有將無對問無將有對問凡以聖對問聖以凡對二法相因生中道義.”

 

유무 혹은 범성은 대법으로서 상호 조건이 되는 상호의존적 방식으로 

작용하며, 그것이 곧 중도라는 것이다. 선과 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악의 상호의존성이 곧 중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으로서 

중도의 의미를 용수는 ‘정(淨)’과 ‘부정(不淨)’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한다.

 

"청정한 상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면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정을 원인으로

하여 부정이 있으니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을 원인으로 하지 않으면 또한 

청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을 원인으로 하여 청정이 있으니 청정은 존재하지 

않는다."20)

20)「중론」23-10, 11(『大正藏』30, 31b-c), “不因於淨相則無有不淨因淨有不淨是故無不淨. 
    不因於不淨則亦無有淨因不淨有淨是故無有淨.” 김성철 역주, 中 論 (서울: 경서원, 1993) 참조.

 

상호의존성으로서의 중도는 선악을 ‘함께’ 부정하거나 ‘함께’ 긍정하는 

쌍차(雙遮)와 쌍조(雙照)의 독해법 혹은 유무중도의 독해법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중도가 무엇이냐의 물음에 대하여 중도는 변(邊)

이라고 말하는데,21) 이는 두 변을 모두 긍정하거나 모두 부정하라는

말이다. 즉 선과 악은 존재할 때도 함께 존재하고 사라질 때도 함께

사라진다. 선과 악, 어느 하나만을 말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상호의존성으로서의 중도의 의미는 초기불교에서의 유무중도의 의미와 

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유론과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론의 

두 극단을 모두 버리는 유무중도22)의 태도는 존재를 ‘상호의존적으로/

연기적으로만’ 존재한다(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선(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고, 악(만)이 존재한다는 

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21) 법성 연의,「돈오입도요문론」(서울: 큰수레, 1993), 168쪽.
22) Kaccaayanagotta-Sutta (SN ii, 17쪽).

 

III. 선악불이의 근거: 자성의 속성

 

선악불이의 근거는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듯이 연기/공/무아에서 

타난다.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 또한 연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조단경의 경우 선악불이의 근거를 자성의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육조단경」에서 자성은 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마음과 동일한

개념만은 아니다.23) 예컨대 ‘본심을 아는 것(識本心)이 본성을 보는 
것(見本性)’24)이라는 경우와 같이 마음과 자성이 거의 동일하게 쓰이기

도 하고, ‘심은 땅이고 성은 왕이다’25)의 경우처럼 구별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구별의 경계선은 분명치 않으며 양자는 중첩적으로

쓰인다.

23) 김태완은 선어록에서 마음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하고, 마음을 크게 세 가지 경우로 이해한다. 즉 마음이 성(性)과 상(相) 모두를 의미하
    는 경우, 마음이 성만을 의미하는 경우, 그리고 마음이 상만을 의미하는 경우이다(김
    태완,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 서울: 장경각, 2001, 160쪽). 이러한 이해는「육조단경」
    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24)「육조단경」(『大正藏』48, 338c), “識自本是見本性”; 청화, 앞의 책(돈황본), 87쪽,
    “識自本心是見本性.”
25)「육조단경」(『大正藏』48, 341b), “心卽是地性卽是王.”

 

「육조단경」에서는 ‘마음’보다도 ‘자성’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본성

(本性), 성(性), 진여성(眞如性), 법성(法性), 인성(人性) 등의 말을 사용

하는데, 이들은 모두 본래 갖추어지고, 본래 청정하고, 본래 완성된

인간의 근본 속성을 강조한 말들로 이해된다. 예컨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성이 계정혜 삼학 혹은 오분법신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성이 삼신불을 자신 속에 내포하고 있다고도

하기 때문이다.

 

살펴보았듯이「육조단경」에 의하면 선악은 자성으로부터 혹은 자성과 

함께 전개되는데, 이 때 자성의 두 가지 속성이 선과 악을 불이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 첫째 속성은 선악을 발생시키는 자성의 방식이 

상대를 전제해야 하는 ‘대법’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선악을 발생시키는 

자성의 방식이 선은 악을 전제하고 악은 선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 둘째 

속성은 자성의 선성이다. 자성의 선성으로 인하여 악조차도 선을 

공유하며 선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 자성의 선성은 선은 물론 악에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자성이 선악을 발생시키며, 발생시키는데 있어서는 서로를 전제하는 

대법적 방식이기에 선악이 불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만법이 사람 없이는 생겨날 수 없으며 사람과 함께 

전개된다고 한다. “사람이 없다면 일체만법 또한 본래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을 따라 일어남을 알라”26)고 한다. 여기에

서 ‘사람’은 마음이나 자성으로 대치될 수 있다. 선악 또한 만법의 

부이므로 선악도 사람, 마음, 혹은 자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육조단경」의 핵심을 설파하고 있는 돈오입도요문론 은 

“일체선악이 다 스스로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됨을 알라”

(知善惡一切皆由自心)27)고 하는데, 이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26)「육조단경」(『大正藏 』48, 340b), “若無世人一切萬法本無不有. 故知萬法本從人興.” 
    여기에서 ‘世’자는 돈황본에 따라 ‘智’로 이해함.
27) 법성,「돈오입도요문론」, 74쪽.

 

선악을 포함한 만법을 생기게 하는 것으로서의 자성의 작용방식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자성으로부터의 세계 전개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성에 식이 포함되어 있다가 식이 작용을 시작함으로써

여섯 의식(六識)을 발생시켜 여섯 감각(六門)을 작동시키고, 여섯 경계

(六塵)를 드러낸다고 한다. 18계의 작용에 따라 만법이 출현한다고 보

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자성이 삿되게 작용하느냐 올바르게 작용하

느냐에 따라, 18계/세계가 삿되기도 하고 올바르기도 하며, 사람이 중

생이 되기도 하고 부처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성의 작용은 항상 대

립된 개념쌍인 대법으로 나타나고 그 대표적인 대법으로서 36대법이

예시된다.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고 있으니 함장식이라고 이름 한다. 사량을 하면, 식이 

용하여 여섯 식이 생기고 여섯 감각을 나와 여섯 경계를 보게 된다. 이것이 

3 x 6은 18과 같으며 모두 자성의 작용을 따른 것이다. 자성이 삿되면 18이 삿되게

일어나고, 자성이 올바르면 18이 올바르게 일어난다. 자성이 올바름을 포함하니

18올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자성을) 악용하면 중생이고, 선용하면 부처이다. 

작용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8)

28)「육조단경」(『大正藏 』48, 360b), “自性能含萬法名含藏識. 若起思量卽轉識生六識出
    六門見六塵. 如是三六十八皆從自性起用. 自性若邪起十八邪自性若正起十八正. 含惡用卽
    衆生善用卽佛. 用由何等由自性對.”

 

나타난 바와 같이 만법은 대법이라는 방식을 통한 자성의 작용에

의한 것이고, 이 때 자성의 작용은 좋은 방향에서 올바르게 나타날 

수 도 있고 그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다. 세계의 선악은 대법을 매개로

한 자성의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에서 관찰되는 대법과 자성의

관계를 말할 때, 우리는 대법을 떠나서는 자성을 말할 수 없고 자성을

떠나서는 대법을 말할 수 없다. 특히 선과 악의 대법을 예로 들어 말

한다면, 선악 대법이 곧 자성의 작용이다. 선악을 발생시키는 자성이

작용하는 방식은 서로를 전제해야하는 대법의 방식인 것이다.29) 

이처럼 자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선악은 자성의 작용방식으로 인하여 

대법으로 존재한다. 선은 악을 전제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고 악은 

선을 전제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어서 불이적인 것이다. 그 근원인 

자성의 속성상 선악은 항상 서로를 전제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성의 대법적 작용방식이 선악불이의 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29) 선악이 자성안의 문제라는 것은 모든 존재, 인식, 관념, 개념 등이 인간 마음의 소산
    이라는 불교일반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존재를 대법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대법을 자성의 작용이라고 명백히 한 것은 육조단경 의 독특한 설명방식이다.

 

선악불이의 근거가 되는 자성의 두 번째 속성인 선성은 선뿐만 아니라 

악에도 공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악 또한 본질적으로

선(善)을 내포하여 악은 변증법적인 악이다. 악의 이러한 변증법적 

선 내포성이 선악불이의 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자성이 성(性), 인성(人性) 본성(本性), 진여본성

(眞如本性), 본원자성(本源自性), 본심(本心) 등 어떻게 불리든지 간에, 

성은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청정하다. 자성은 항상 본래적으로 

청정하여,30) 선성을 그 속성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성으로부터 

선은 물론 악이 발현한다. 육조단경 은 ‘항상 청정한 자성’에서 선도 

비롯되고 악도 비롯된다고 한다. 자성이 착하게 생각할 때 선이 나타나고 

하게 생각할 때 악이 나타난다고 한다. 착한 일을 생각하면 선행을 

게 되고, 악한 일을 생각하면 악한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

30)「육조단경」(『大正藏』 48, 354b), “世人性本淸淨.”

 

사람들의 자성은 본래 청정하며 만법은 자성에 따라 생겨난다. 여러 가지 나쁜

일을 생각하면 악행이 생겨나고, 착한 일을 생각하면 선행이 생겨난다. 이와 

이 모든 법이 자성 안에 있는 것은 하늘이 항상 청정하고 해와 달이 항상 밝은

것과 같다.31)

31)「육조단경」(『大正藏』 48, 354b), “世人性本淸淨萬法從自性生. 思量一切惡事卽生惡行思量
    一切善事卽生善行. 如是諸法在自性中如天常淸淨日月常明.”

 

이와 같이 선악을 발현시키는 자성은 본래부터 항상 청정하다(상청정)/

선하다. 그것은 노력을 기우릴 필요도 없이 ‘본래부터’ 선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그러하다. 번뇌, 망념 등의 악 속에서도 그것은 

오염되지 않는다.32) 어떠한 곳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성의 선성은 

소멸되거나 삭감될 수 없다.

32)「육조단경」(『大正藏 』48, 354b), “自心歸淨一切塵勞受欲境界自性不染著名衆中尊.”

 

「육조단경」에 의하면 악이 청정한 자성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

선성을 은폐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는 맑은 하늘(淸天)(自性常淸淨)을 

가리는 뜬구름에 비유된다. 뜬구름(浮雲)이 맑은 하늘을 덮을 수 있듯이, 

번뇌 망념은 해와 달처럼 항상 비추고 있는 자성을 가려 비추지 못하게 

할 수 있다.33) 중요한 것은 비록 번뇌 망념이 가리고 있을지라도 자성은 

여전히 항상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자성은 항상 밝게ㅣ비추고 있지만, 

중생이 밖의 경계에 집착함으로써 망념이라는 뜬구름에 의해서 자성이 

가려지고 있을 뿐이다.34)

33)「육조단경」(『大正藏 』48, 354b).
34)「육조단경」(『大正藏 』48, 354b).

 

맑은 하늘이나 해와 달이 단지 뜬구름에 의해서 가려지듯이, 번뇌

망념이 자성의 선성을 덮고 있다는 비유는 선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악이 자성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자성의 선성을

일시적으로 은폐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악이 어떠

한 경우에도 선으로부터 격리되어 순수한 악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악은 선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가능태이다. 사실 선성을 내포한 

악은 본질적으로는 선이다. 악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선이다.35)

악은 사실상 악일 수 없고 기껏해야 선을 은폐시킬 수 있을 뿐이다.

35) 자성이 선성이 함축하는 이러한 의미는 결국 자성의 표현으로서 모든 세계 또한 
    선임을 의미한다. 마치 유마경 에서 “일체 중생이 다 진여며 일체법 또한 진여다
    (一切衆生皆如也一切法亦如也)” (『유마경』,「大正藏 」14, 542b)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이 선악을 발생시키는 자성의 선성으로 인하여 악은 자신 속에 

항상 선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선악불이의 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 선악불이의 한 근거로서 자성의 이러한 선성은 사실 초기불교36) 

이래의 모든 불교의 공통된 핵심이다. 다만 혜능은 이점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불교뿐만 아니라

자신 이전의 선불교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36) 초기불교에서는 “이 마음은 (본래) 총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객진에 오염되어 있다”
    (AN v, 144쪽)고 한다.

 

혜능에게 있어서 자성의 청정성/선성은 보다 확장되어, 자성 안에

계정혜, 삼신불, 오분법신이 갖추어져 있다는 주장으로 발전된다. 

러한 관점에서 혜능은 북종선의 신수가 말하는 칠불통계의 수행으로서의 

계정혜도 비판하고,37) 신수의 게송도 비판하여 그러한 방법에

의지해서는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깨달음의 문 안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기껏해야 삼악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38) 

미혹한 중생은 미혹한 중생이 아니라 이미 깨달은 부처이니 오직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만 자각하여 견성(見性)하면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인지는 수행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찰나/순간에’가능하다고 

말한다. 일순간에 뜬구름과 같은 망념이나 번뇌가 사라지면 밝음/

청정함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견성은 오직 ‘단박에’ 깨닫는 

돈오(頓悟)의 문제인 것이다.39)

37) 칠불통계로 표현되는 신수의 계정혜는 근기가 낮은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고 혜능
    자신이 가르치는 계정혜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혜능은 자성
    을 단박에 깨달으면 계정혜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본다. 자성은 본래 그릇됨, 산란
    함, 어리석음이 없기(無非無亂無痴) 때문이다(「육조단경」, 『大正藏』 48, 358c).
38)「육조단경」(『大正藏 』48, 348c).
39) 여기에서 ‘돈’은 단박에 망념을 제거하는 것이다. 돈오입도요문론 에서는 돈오(단박 
    깨달음)를 풀이하여 “돈(단박)이라는 것은 단박에 망념을 제거하는 것이요, 오(깨달
    음)라는 것은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頓者頓除妄念悟者悟無所得)”라고 한
    다(법성,「돈오입도요문론」, 69쪽

 

요컨대 선악불이의 근거를 자성의 속성에서 찾아볼 때, 우리는 그

근거를 자성의 다음과 같은 두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자성이

선악을 발생시키는 데 있어서 대법의 방식으로 발생시키며, 자성은

그 선성이라는 속성상 악 속에도 선을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IV. 선악불이가 요청하는 선실천 태도

 

1. 중도적 선실천

살펴본 것처럼 선악은 본성적으로 다르지 않고, 함께 있으며,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불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이의 근거는 

성의 두 가지 속성―자성의 작동방식으로서의 대법과 자성의 선성―

에서 찾아진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선악불이를 고려한 선의 실천

방식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육조단경 에서의 한 가지 답변은

선악을 볼 때 대법으로 보고 성(性)과 상(相)을 모두 보는 중도로 제시

된다.

 

선악을 볼 때 대법으로 보는 것은 선과 악이 상호적으로 생겨나고

상호적으로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선을 인지할 때는 그 선에 상응

하는 악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알고, 악을 인지할 때는 그 악에 상응하

는 선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요컨대 선악은 상호적 전제

속에서만 성립 가능한 것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육조단경 에서는 

를 선악 대법을 함께 취하는―혹은 함께 버리는― 태도로 설명한다.

앞 인용문(쪽)에서 보았듯이 “만약 법을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을 다하고 대법을 다 취하여 말하라. 오고 감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來去相因). 궁극적으로는 이법(二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고 한다.

 

대법은 서로를 조건으로 하므로 대법을 취할 때는 둘 다 함께 취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함께’ 긍정하고(雙照), ‘함께’ 부정하

(雙遮) 방법이다. 오고 감, 혹은 생겨남과 사라짐에 있어서 선악은

서로를 조건으로 해서만 존립할 수 있으므로 이들을 대하는 방식 

한 그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선이 생겨날 때 악이 생겨나며 선이 

사라질 때 악도 사라진다고 보아야 한다. 악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절대적 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중도적 선의 실천으로서 성(性)과 상(相)을 모두 보는 방법은 앞의

논의에서 이미 인용된 ‘성과 상을 떠나지 않는 막리어성상(莫離於性相)의 

방법’이다. 현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선악의 모습/상(상)을 

지각하면서도 동시에 그 상의 반실체적/반고정적/반절대적 속성인 

공/성을 보는 것이다. 상을 전제로 해서 성을 보고, 성을 전제로 해서 

상을 봄으로써 상과 성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이는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이나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선악에 대해 함축하고 

있는 바와 같다. 공 속에서 색/유를 보듯이 공 속에서 상을 보아야 

한다. 공과 색 혹은 공과 유 중에서 어느 하나를 버리거나 어느 하나에 

치우쳐도 안 되듯이 성과 상에 대해서도 그리하는 것이다.

 

상과 성을 함께 보는 것을 육조단경 에서는 ‘상에서 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라는 어상리상 어공리공(於相離相於空離空)’이라고

도 한다. 자성을 일으켜 쓰는 방법을 어상리상 어공리공으로 말한다.

 

"어떻게 자성을 일으켜 쓸 것인가? 36 대법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언어이다. 

에서 밖으로 나가면 상을 떠나게 되고, 공에서 안으로 들면 공을 떠나게 된다.

공에 집착하면 곧 오직 무명을 기를 뿐이며, 상에 집착하면 오직 삿되게 보아 

을 비방할 따름이다."40)

40)「육조단경」(『大正藏 』48, 343c), “如何自性起用. 三十六對共人言語. 出外於(相)
    離相入內於空離空. 著空卽惟長無明著相惟邪見謗法.”

 

여기에서 ‘자성을 쓴다(기용)’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선악을 포함한 

모든 대법들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성을 쓰는 

식으로서 ‘어상리상 어공리공’은 선악 대법을 다루는 방식에도 적용

된다. 그것은 선악 대법에 대하여 상에서 상을 떠나지 않고 공에서 공을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다루라는 것이다. 이러한 어상리상 어공리공의 

방법은 막리어성상의 방법과 다르지 않지만, ‘무집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막리어성상’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막리어성상에서처럼 성과 상을 함께 보아야 하지만, 이에 덧붙여

성과 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상에서 상을 떠나는 것(어상리상)’은 공을 전제로 한 구체적/개별적 

선악 현상을 보되 그러한 선악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공에서 공을 

떠나는 것(어공리공)’은 구체적/개별적 선악의 비실체성, 비고정성, 

혹은 비절대성을 보되, 그 비실체성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

개별적 선악에 집착한다면 선악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며, 선악의 비실체성에 집착하게 된다면 구체적 선악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선악에 있어서 상과 공을 함께 보되, 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선악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중도적 선실천 방법으로서 선악을 대법으로 보는 것, 그리고 ‘막리어성상

(혹은 어상리상 어공리공)’은 한편으로는 선악이 연기/공/무아이니 

무상한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돈오입도요문론 에서는 중도를 변(邊)이라고 

설명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선악중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41) 이같이 무상한 선악은 고정적이고 절대불변일 수 없다. 

다른 한편 중도로서 선악을 대법으로 보는 것과 ‘막리어성상’은 

선악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실재함을 인지하라는 것이다. 악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무상하기에 집착할 수 없는 것이다.

41) “중도란 변과 더불어 있고 서로 원인이 되어 세워지므로 모두 무상하다. 색수상행식도 
    이와 같다”(中之與邊相因而立悉是無常. 色受相行識亦復如是)라고 한다 (법성,「돈오
    입도요문론」, 168쪽).

 

요컨대 중도적으로 선을 실천한다는 것은 선악을 볼 때 대법으로

보아 선악이 서로를 전제하고 상호적인 방식으로 생멸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며, 공함(性)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선악(相)을 보아

성상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상으로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선악이 비절대적임을 알아 무집착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도적 선 실천방법은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박(無縛), 

반야삼매, 혹은 무소득(無所得)의 태도로 선을 실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 ‘선악무분별’론과 중도적 선실천

살펴본 것처럼 중도적 선실천은 선악의 절대화를 부정하면서도(공)

구체적 선악(상)을 인정한다. 그것은 선악이나 선악분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악에 대한 올바른 분별과 올바른 분별에 

입각한 선 실천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 특히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을 가르친다고 이해되고 있다. 

깨달음/견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악에 대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오해되고 있다. 그리하여 선불교는 선의 실천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선악무분별을 가르치고 선악의 초월을 가르친다고

이해된다. 예컨대 일본인 스즈키(Suzuki)를 통해 선불교를 접했던 19세기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선불교가 초도덕을 가르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때의 ‘초도덕’을 선악에 대한 구별이나 분별심을 버리라고 

요청하는 ‘무도덕주의(amoralism)’로 이해하였다.42)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선악에 대한 분별과 분별에 의한 선의 실천은 깨달음에 대한 

장애쯤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비판적 연구들43)에도 

불구하고, 우리불교에서도 불교, 특히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이나 초월을 

가르친다는 오해는 지속되고 있다. 우리 선불교 전통 속에는 파계(破戒)를 

깨달음에 대한 보증으로까지 여기는 측면이 있으며, 많은 법문과 여러 

불교서적에서 ‘선악에 대한 분별심을 버려라’고 가르쳐지고 있다.44)

42) 예컨대 럽(Rupp)은 스즈키(Suzuki)와 무르티(Murti)에 의하면 대승불교에서 도덕은 
    예비적인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전적으로 가상적(unreal)인’ 것이라고 한다. 자신 
    또한 이러한 이해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George Rupp, “The Relationship of 
    Nirvana and Samsara: An Essay on the Evolution of Buddhist Ethics,” 
    Philosophy East and West, 21/1, 1971, 62쪽). 브리어(Brear)는 선불교가 선악을 
    포함한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다고 본다. 이원적 분별을 넘어서야 하므로 선악 구분 
    또한 가상적인 (illusory) 것이라고 본다(D. Brear, “The Nature and Status of Moral 
    Behavior in Zen Buddhist Tradition,” Philosophy East and West 24/4, 1974, 429
    쪽, 436쪽). 킹(King) 또한 윤리적 행위에 대한 동기가 초월되었을 때만 깨달음이 성
    취된다고 본다(Winston King, “Motivated Goodness and Unmotivated Perfection 
    in Buddhist Ethics,” Anglican Theological Review 71/2, 1989 참조). 이들은 공통
    적으로 열반이 선악분별을 벗어나는 경지라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
    가 깨달음은 선과 악 모두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지포린(Ziporyn)은 천
    태불교를 해석하며 깨달음은 악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모두를 온전하
    게 현시․실현하는 것이라고 한다(Brook Ziporyn, Evil and/or/as The Good: 
    Omnicentrism, Intersubjectivity, and Value Paradox in Tiantai Buddhist Thought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301쪽).
43) 선불교가 도덕초월주의로 이해되고 있는 데에 대한 비판적인 국내의 대표적 논문으로 
    한동익의 연구(「선불교 윤리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철학논구 29, 2001)를 들 수 있
    다. 또 선의 초월이나 부정을 가르친다고 보는 것은 악취공적 태도라고 지적되었다(예
    컨대 김성철, 앞의 논문, 111쪽; 김지견, 「악에 대한 불교적 이해」, 악이란 무엇인가 , 
    서울: 창, 1992, 150쪽).
44) 선불교에서 ‘선악무분별’이라는 말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한다. 첫째 경우는 선악분별 이전의 상태나 자성의 상태를 
    설명하려는 경우이다. 선악은 자성작용의 결과로서 혹은 자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지만, 우리는 선악분별 이전의 자성상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선도 악도 생각
    하지 않는(不思善不思惡)’(「육조단경」,『大正藏』 48, 353c)과 무문관 23칙(정성본 
    역주,「무문관」,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4) 참조) 바로 그 자리에 대한 물음의 
    경우이다. 둘째 경우는 선이 완전히 구현되어 선악분별의 필요성이 없게 된 경우이다. 
    깨달은 사람의 경우는 선의 판단력이 체화되어 있어서 선악분별이라는 숙고의 과정이 
    불필요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의 사람에게는 ‘선악무분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
    이다. 예컨대 ‘큰 도는 시비가 없다(無是無非...是大道)’(「육조단경」,『大正藏 』48, 
    345a)는 말의 경우이다. 중요한 것은 선악무분별이 ‘올바른 선악분별을 전제한 선실천 
    이후’의 말이며, 중생의 처지에서는 언제나 올바른 선악분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더
    욱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에서 ‘선악무분별’은 현상적 세계에서의 선악무분별을 의
    미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정성본의 연구(정성본, 「돈황본 육조
    단경의 선사상(lI)」, 백련불교논집 2, 서울: 백련불교문화재단, 2000)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無念’이 ‘일체 생각하는 마음 작용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는(앞의 논문, 
    6쪽) 것을 지적한 후, 무념이란 ‘주객, 선악, 미추 등의 상대적 고정관념 이전의 근원
    적․본래청정한 진여본성을 념하는 것’을(21쪽)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유마경 
    의 ‘不動則無念無念則無分別’을 인용하며 ‘무념=무분별’, 더 나아가서는 ‘무념=무분별
    =무집착’의미를 밝혀내고 있다(앞의 논문, 7-8쪽). 정성본의 이러한 연구는 ‘선악무분
    별’이 선악을 분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
    다. 무분별이 본래 청정한 진여본성을 념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무집착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악)무분별’이 현상세계에서의 (선악)무분별을 의미함이 아님을 
    보인 것이기도 하다. 유사하게 정준기(유진)(「무념에 대한 고찰」, 한국불교학 35, 서
    울: 한국불교학회, 2003) 또한 남종선의 무념의 의미를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하
    여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무
    는 일이 없는 마음의 자유로운 작용을 깨닫는 것’(정준기 앞의 논문,79쪽)이라고 지
    적한다. 우리는 이러한 무념의 의미를 선악에 적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더라도) 선과 
    악,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선을 실천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이나 선악초월을 가르친다는 주장은 전체적으로는 

선실천에 대한 불교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합치하지 않고,45) 부분적으로는 

선악에 대해 분별하라는 선불교의 직접적 표현들에도 배치된다.46)

45) 예컨대 “마음을 바르게 하여 늘 지혜를 내서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 비추어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붓다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종보본「육조
    단경」)(법성, 137쪽).
46) 예컨대, “일체의 선악에 대하여 다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다(對一切善惡悉能分別
    是慧)”(법성, 「돈오입도요문론」, 126쪽), “여러 물질경계에서부터 선악에 이르
    기까지 다 미세하게 분별하여 염착하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자재한 것을 혜안이라
    고 한다(於諸色境乃至善惡悉能微細分別無所染着於中自在名爲慧眼)”(법성,「돈오
    입도요문론」, 121쪽)(법성의 번역을 참조한 필자의 번역) 등의 표현과 배치된다.

 

중도적 선실천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상과 같은 선악무분별론은 선악불이와 

중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불충분한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선악불이가 선과 악의 다름을 전제한다는 것이 간과되거나 중도의 

한 측면인 ‘함께 버림(雙遮)’만이 강조․일반화 될 때, 선악무분별을 

가르친다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살펴본 것처럼 ‘선악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서의 선악불이에서 선은 

물론 악도 자성의 선성을 전제한다. 자성의 선성으로 인하여 선과 악은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 말은 선과 악이 같다거나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선악불이는 ‘선악이 다르지만’ 

자성의 선성으로 인하여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불이에서 선악의 본질적 차이 없음만이 강조되어 선악불이에 

전제된 선악구별의 대전제는 망각될 수 있다. 선악불이에 내포된 

‘선악분별을 전제로 한 선선호’의 메시지가 무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불교가 선악무분별을 가르친다고 오해될 수 있다.47)

47) 선악불이가 선악무구별이나 선악무분별의 메시지로 오해되는 것은 미오불이(혹은 
    범불불이)에서 미오의 차이가 무시된 채 미오무구별이나 미오무분별이 주장되는 
    것과 같다. 자성의 선성으로 인하여 미와 오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해
    지지만, 이 말은 미오의 다름을 전제로 한 말이다.「육조단경」에서는 “미와 오는 
    같지 않다(迷悟不同)”고 한다(종보본「육조단경」, 법성, 96쪽).

 

다른 한편 선악불이의 중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함께 버림’의 측

면만을 볼 때, 선악은 본래 없으니 선악분별은 옳지 않다고 주장될 수

있다. ‘함께 살림’의 측면을 무시함으로써 중도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

이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중도는 함께 버림과 함께 살림의 두 측면

이 있으며, 이는 선악분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는 선악

의 상호 조건성 혹은 상호 생멸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물론 중도적 선실천의 관점에서 볼 때도 

불교, 특히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을 가르친다는 선악무분별론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선악무분별’이라는 말이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이 있을지라도 불교 일반은 물론 선불교에서도 선악에 대한

올바른 분별을 전제로 한 선의 실천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V. 맺음말

 

이 글에서 필자는 육조단경 을 중심으로 하여 선악불이의 의미,

선악불이의 근거, 그리고 선악불이가 요청하는 선실천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선악불이의 의미는 세 가지로 설명되었다. 선악은 본성상 다르지 않고, 

더불어 있으며, 상호 의존한다. 즉 선악은 (서로 다르지만) 공하다는 

점에서 본성상 다르지 않으며, 선악은 함께 있어서 항상 함께 나타나며 

내재적으로는 반대가 될 속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선악은 상호 의존하는 

것으로서 대법이라는 중도적 방법으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의미는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라 동일한 내용에 대한 상이한 설명 

방식이다. 한마디로 선악은 서로의 존재근거가 되는 상대적인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악불이의 한 근거는 자성의 속성에서 찾아진다. 자성은 

한편으로는 선악을 발생시키는 데 있어서 대법의 방식으로 발생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성이라는 속성상 악 속에도 잠재적 선을 

포함시키고 있다. 선악은 자성 안에서 대법으로서 불이이며 선성을 

공유하여 불이이다. 사실 선악을 포함한 만법은 자성의 작용으로서 

자성 안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악은 물론 모든 유무형의 존재가

대법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불이이다. 다만 선악은 다른 대법과 달리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하여 항상 배척되기 때문에, 선악불이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선악불이가 요청하는 선 실천 태도는 중도적 실천이다. 중도적 실천은 

선악이 서로를 전제하고 상호적 방식으로 생멸한다고 보아 선악을 

그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며, 상(相)으로서 구체적 선악을 인지

하면서도 그 속성의 공함(性)을 인지하여 상과 성,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선에 대한 이러한 중도적 실천은 선악에 

대한 올바른 분별을 전제로 한 선의 실천을 말한 것이지 선악무분별이나 

선악초월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교, 특히 선불교가 

‘선악무분별’―이 말이 특별한 맥락에서 쓰이고는 있지만―을 가르친다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선악불이에 대한 이러한 검토의 결과를 한마디로 간추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선악불이’는 선악이분을 통한 선과 악의 

정화 내지 절대화를 경계한 것이며, 이분된/개념화된 선악에 대한 

착을 경계한 것이다. 개념화 작용과 개념화된 것에 대한 집착은 초기

불교 이래 유마경 과 금강경 등 모든 불교의 공통된 가르침이지만,

선불교는 특유의 수사법으로 특히 선에 대해 집착하는 것(着善/着淨)

에 대해 경계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선악(분별)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분별한 선악에 대해 속박/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선불교가 개념/언어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개념/

어에 속박되는 것을 경계한 것과 같다. 올바른 분별 자체를 부정한 

이 아니라 분별 이후의 집착, 더 나아가서는 집착에 의한 잘못된 

실천을 경계한 것이다. 부처와 마구니를 분별한(辨佛辨魔) 이후에는, 

마구니와 부처(에 대한 집착)를 함께 떨쳐버려야 하듯이(魔佛俱打),48) 

선과 악을 분별하지만 분별된 선악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 까닭은 개념화된/절대화된 선악은 

매 경우마다 고유하고 반복 불가능하여 무상(無常, 無相, 無想)한 선악의

본래 속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 실제 선악은 매 경우마다 

새로운 것이어서 이미 개념화된/관념화된 선악의 적용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48)「臨濟錄」(『大正藏 』47, 498a).

 

이렇게 보면 ‘선악불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념화되고, 관념화되고, 절대화된 선악에 대한 거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즉 선악에 대한 잘못된 분별과 집착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육조단경 의 핵심인 무념(無念), 무주(無住), 혹은 

박(無縛)을 선악의 맥락에 적용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