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한 논의 연구: 기원과 의미를 중심으로/김성욱

실론섬 2016. 8. 12. 20:40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46호(2016.03) pp.189∼215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한 논의 연구: 기원과 의미를 중심으로

김성욱

 

I. 들어가는 말

II. 중국에서 전심 일화들의 발전

III. 삼처전심에 대한 한국에서의 논의

IV. 근현대의 삼처전심 논의

V. 맺는 말

 

[요약문]

본 논문은 삼처전심(三處傳心)의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한 전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논의를 살펴본다. 삼처전심의 분반좌(分半座), 염화(拈華), 곽시쌍부(槨示雙趺) 일화가 인도나 또는 중국에서 기원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각각의 일화는 중국에서 교(敎)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그에 대한 우월을 주장하는 선(禪)의 정체성과 연결됐다. 그러나 이 세 일화를 포괄하는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한국의 선 문헌에서 발견되며, 또한 나아가 둘 이상의 전심 사건이 갖는 종교적 의미를 고찰하는 경우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됐다. 특히, 백파긍선(白坡亘璇)은 삼처전심에 대한 위계적 해석을 통해서 당시 한국선이 법맥(法脈) 상으로 동일시하는 임제종(臨濟宗)의 우월성을 정당화했다. 그의 해석은 삼처전심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 냈다. 초의의순(草衣意恂), 김정희(金正喜), 설두유형(雪竇有炯)과 같은 전근대 시기의 인물 뿐 아니라,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 박한영(朴漢永), 김동화(金東華)같은 근현대의 학자들도 논의에 참여했다. 본 논문은 이와같은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삼처전심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불교 사상적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I. 들어가는 말

 

석가모니 부처는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앉아 계시던 자리를 가섭에게 반 나누어 앉도록 하셨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자 이 제자는 미소를 지었고, 희련하(希連河, Hiraṇyavatī) 쌍수(雙樹) 아래에서 입멸 하신 후에 다시 그를 위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1) 이것이 바로 한국 선 불교 전통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들 가운데 하나인 삼처전심이다. 이 삼처전심은 선의 독특한 정체성과 연관돼 있다. 부처의 가장 뛰어난 법은 마음법으로, 세 곳에서 분반좌(分半座), 염화(拈花), 곽시쌍부(槨示雙趺)를 통해 부처에 의해 가섭에게 전해진 이후, 마찬가지로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불립문자 不立文字)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 것(직지인심 直指人心)에 의해 인도와 중국의 선종 법맥을 따라 마음에서 마음으로(이심전심 以心傳心)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즉, 이 삼처전심은 선의 다른 불교종파, 특히 교종으로부터의 독립(교외별전 敎外別傳)과 나아가 그에 대한 우위를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1) 이 내용은 인터넷 불교용어 사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사전류로서는 딩푸바오(丁福保)가 1921년에 출간한 「불학대사전(佛學大辭典)」에 
   아마도 처음으로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특히, 딩푸바오는「선종상감(禪宗象鑑)」
   을 인용해서 삼처전심을 설명한다.「선종상감」이 어떤 문헌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
   마도 휴정 休靜 (1520-1604)의「선가귀감(禪家龜鑑)」을 가리키는 듯한데,선종상감」
   이라는 문헌으로부터 딩푸바오가 인용한 구절은 다름 아닌 「선가귀감」에 나오는 다음
   의 구절 그대로이다: “世尊三處傳心者 為一代所說者 為教 故曰禪是佛心, 教是佛語,” 딩
   푸바오,「불학대사전」(上海: 醫學書局, 1921), pp.328하-329상. 1928년에 출간된 
   오다 토구노(織田得能)의「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또한「선종상감」을 삼처전심의 
   출처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대사전」(東京:大倉書店), p.627 하). 2009년에 출간된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광설불교어대사전(廣說佛教語大辭典)」은 삼처전심의 
   출처로「선가귀감」을 들고 있다 (「광설불교어대사전」(台北: 嘉豐出版社, 2009), p.
   117). 그러나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삼처전심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문헌은 고려 시대의「선문염송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이다.

 

전통적으로 이 세 전심 일화의 집합으로서 삼처전심은 중국이나 심지어 인도에서 발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문헌 비평적 시도가 이루어진 근대 이후에 조차 삼처전심은 중국 선의 개념인 것으로 여겨졌다. 본 논문은 삼처전심의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한 전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논의를 살펴볼 것이다. 무엇보다도 본 논문은 삼처전심이 한국 선불교의 개념이라는 것을 밝히고, 나아가 삼처전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예를 들면 부처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수준의 마음을 전했다는 것과 같은 해설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삼처전심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불교 사상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II. 중국에서 전심 일화들의 발전 2)

2) 본문 가운데 “II. 중국에서 전심 일화들의 발전”과 “III. 1. 기원과 활용”은 Kim Seong-Uk, 
   “The Korean Origin of the Term Samch’ŏ chŏnsim,” Journal of Korean Religions 5.2
   (2014), pp.145-174와 “Three Places of Mind-Transmission,”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33.4(2013), pp.635-650의 내용을 참조한 것으로, 첫 번째 논문은 삼처
   전심 각 일화가 그 초기 형태에서 선종의 일화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각 일화에 맞게 자
   세히 추적하였으며, 두 번째 논문은 한국의 종교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전심일화가 한국 선
   불교에서 독특하게 해석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삼처전심은 교외별전이라는 선의 특별한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 삼처전심의 세 일화가 인도나 또는 중국에서 기원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각각의 일화는 중국에서 교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그에 대한 우월을 주장하는 선의 정체성과 연결됐다. 이 세 일화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다른 전심의 일화들이 존재했는데, 이런 다수의 전심 일화들에 대해 삼처전심이라는 개념이 도입돼서 통합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았다.

 

1. 제1전심
첫 번째 일화는 분반좌이다. 이것은 삼처전심 세 일화 가운데 선의 독특한 정체성과 관련해 가장 먼저 발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석가모니 부처가 가섭과 분반좌를 했다는 이야기 자체는 인도 경전에서 기원한다. 초기 경전으로서 『중본기경(中本起經)』그리고『잡아함경(雜阿含經)』의「납의중경(衲衣重經)」등에 실려 있다.3) 이 초기 경전에서 중요한 점은 이 두 경전에 나타난 일화가 교외별전이라는 선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분반좌 일화의 이 최초기 형태에서 나타나는 부처의 분좌 행동은 다만 가섭을 다른 나머지 제자들 보다 높은 지위에 위치시키려는 행동일 뿐이었다.4) 
3)「중본기경」(『大正藏』196.4.161상18-상25);「납의중경」(『잡아함경』41 p.1704). 
   번역은 인터넷 한글대장경.
4) 가섭을 불교교단에서 중요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대승문헌들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자세한 내용은 Silk, Jonathan A. “Dressed for Success: The Monk Kāśyapa and 
   Strategies of Legitimation in Earlier Mahāyāna Buddhist Scriptures,” Journal Asiatique 
   291 no.1-2 (2003), pp.173-219

9 세기경 중국에서 이 일화는 마침내 선과 교를 구별하려는 선의 시도와 연결되는데, 그 초기 형태들 가운데 하나는 황벽희운 黃檗希運 (850 몰)의 어록인「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 발견된다.「전심법요」는 비록 선을 ‘교외별전’이라고 직접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지만, 부처가 가섭에게 전하는 대상으로서 ‘마음’을 언급하는 최초의 문서들 가운데 하나이다.5) 
5) 교외별전을 포함해서 교와 구별되는 선의 독특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과 같은 문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야나기다 세이잔 (柳田聖山),「初期禪宗史書
   の研究」 (京都:法蔵館, 1967), pp.470-482

대략 1세기 후에 송(宋)대 (960-1279)에 이르러, 분반좌 일화는 다양한 선 문헌에서 등장한다. 이 문헌들 가운데 하나는 1029년에 출판된「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인데, 이 전등서는 분반좌 일화의 장소를 다자탑 앞으로 확정지을 뿐 아니라 부처가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부촉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전심 진술을 덧붙인다.6) 1093년에 편집된 유명한 초기 공안집이었던「종문통요집(宗門統要集)」에 기록된 이후,7) 이 일화는 다른 선문헌, 예를 들면, 1175년의「선종송고련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1183년의「연등회요(聯燈會要」, 그리고 1253년의「오등회원(五燈會元)」과 같은 다양한 선 문헌에 기록됐다.8)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 분반좌 일화는 두 번째 일화와 함께 등장한다. 

6)「광등록」(「卍續藏」1553.78.428상16-상24)
7)「종문통요집」(야나기다 세이잔, 「禪學典籍叢刊」(東京:臨川書店,1999), p.7상9-11) 
8)「선종송고련주통집」(「卍續藏」1295.65.486하04-06);「연등회요」(「卍續藏」1557.
   79.14상11-13);「오등회원」(「卍續藏」1565.80.31상10-12)

 

2. 제2전심
두 번째 전심 일화인 세존염화(世尊拈花) 또는 염화미소(拈花微笑)에 대한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1029년에 나온「광등록」이다. 이 일화는 이 전등서의 가섭 전기 부분에 실려 있다.9)「광등록」의 일화는 후대에 나타난 많은 이 일화의 다른 형태에 원형을 제공했는데, 예를 들면, 이 일화의 배경이 영산회상이 되고, 여기에서 부처는 분반좌 일화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게 자신이 정법안장을 가섭에게 부촉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9)「광등록」(「卍續藏」1553.78.428하02-05)

이후 염화미소 일화는 1183년에 편집된 「연등회요」와 같은 여러 선 문헌에 등장했다.10) 그러나, 이 일화를 담고 있는 인도원전의 부재로 인해 그 역사적 진위에 대해 논쟁이 있어왔고, 이런 상황에서 1188년에 편집된「인천안목(人天眼目)」에서 염화미소를 담고 있는 경전이 처음으로 언급됐다. 이 문헌은 왕안석 王安石 (1021-1086)과 운문종의 선사인 불혜법천 佛慧法泉 (11세기 활약)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싣고 있다. 이 대화에서, 염화미소 일화가 장경의 어떤 경전에도 실려 있지 않다는 불혜의 말에 대해, 왕안석은 한림원에서 염화미소를 상세히 설명하는『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라는 경전을 읽어보았다고 답한다.11)「인천안목」에 등장한 이후, 이 대화는 널리 알려지기 시작해서 중국과 한국의 다양한 문헌들, 예를 들면, 1230년의「인천보감(人天寶鑑)」, 1269년의「불조통기(佛祖統記)」, 그리고 1354년의「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과 같은 중국의 문헌을 비롯해서 13세기 중후반에 편집된「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와 같은 한국의 선서에 거의 똑같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문제의 경전인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은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어느 시점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으로 판명됐다.13)
10)「연등회요」 (「卍續藏」1557.79.14상06-08)
11)「인천안목」(『大正藏』2006.48.325중06-중09) 
12)「인천보감」(「卍續藏」1612.87.22중21-하03;「불조통기」(『大正藏』2035.49.170하
    12-14;「석씨계고략」(『大正藏』2037.49.873상27-중05);「선문염송설화」(『한불전』
    5, 015하20-016상07.「인천보감」,「불조통기」, 그리고「석씨계고략」은 이 이야기가 
   「매계집(梅溪集)」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싣고 있는「매계집」
    은 발견되지 않는다.「매계집」이라는 제목으로 송대의 문인 왕십붕 王十朋 (1112-1171)
    이 지은 것이 있다. 그러나 왕십붕의「매계집」54권에서 이『대범천왕문불결의경』의 발
    견에 대한 이야기는 발견되지 않는다.선문염송설화」의 이야기는「인천보감」의 이야기
    를 기록한 것이다.
13) Foulk, Griffith, “Sung Controversies Concerning the ‘Separate Transmission’ of Ch’an,” 
    Buddhism in the Sung (Honolulu: Hawai’i Press, 1999), p.277.

염화미소 일화는 1228년에 편집된「무문관(無門關)」의 제 6칙으로서 등장하는데, 중국 사회에서 널리 읽혔던 이 공안집에 실리면서, 이 일화는 선의 독립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전심 일화들 가운데에서 가장 잘 알려지게 됐다.

 

3. 제3전심
세 번째 전심일화는 ‘곽시쌍부’인데, 교외별전이라는 선의 정체성과는 연관성이 가장 적다. 이 일화는 유명한 불교 경전들 가운데 하나에서 유래한다. 즉,『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그리고『반니원경(般泥洹經)』과 같은 열반경 계열 경전에 별다른 차이 없이 나타난다. 

부처가 관 속에서 가섭을 위해 두 발을 내보였다는 이 일화는 그 자체의 신이함으로 인해서 인도 뿐 아니라 중국에도 매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중국에서 선의 독립성을 나타내주는 전심일화로서는 완전히 발전하지 못했는데, 처음 두 일화와는 달리, 이 곽시쌍부 일화들 가운데에는 부처가 직접 정법안장의 전승을 선언하는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14)  
14) 흥미롭게도, 도성 道誠 (fl. 1019)의 저술인「석가여래성도기주(釋迦如來成道記註)」에서는 
    부처의 양발이 관 밖으로 나온 직후 부처가 가섭에게 정법안장을 부촉한다는 소리가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卍續藏」1509.75.14중15-19). 그러나, 도성의 저술에서 이 사건은 선
    의 교외별전이라는 정체성과는 관련이 적다. 오히려 이 저술은 선과 교의 조화로운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데, 도성은 여기에서 경전에 주석서를 저술한 인도의 조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선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련성이 적다고 하더라도 이 일화는 앞의 두 일화와 마찬가지로 많은 공안집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선종송고련주통집」에 이 일화가 기록돼 있는데, 이 공안집은 다른 신이한 요소들을 더한다.15) 즉, 부처의 시신을 담고 있는 관이 쿠시나가라 위로 떠올려졌고 부처 자신의 삼매의 힘을 통해서 시신이 저절로 화장됐다는 것 등이다. 이 두 신이한 요소는 송 대에 발전된 이 일화의 다른 형태들에서도 종종 확인된다.16) 대부분의 경우, 중국에서 이 곽시쌍부의 일화는 선의 교외별전으로서의 정체성에 그 근원적 원형을 제공하려는 특별한 전심의 일화로서 보다는 (물론 가끔씩 그렇게 사용되기도 했지만), 주로 공안의 하나로서 활용됐다.  
15)「선종송고련주통집」(「卍續藏」1295.65.487중01-04와 중08-09)
    이런 요소들에 대한 초기 기록들 가운데 하나는 「종문통요집이다 (야나기다 세이잔,
   「禪學典籍叢刊」, 앞의 책, p.7상19-20) 

4. 중국 선종의 전심 일화 이해
이 세 일화들은 오랜 형성과정을 거쳐서 발전했다. 삼처전심의 제1전심 일화로서 알려진 분반좌와 제 3 전심일화로서 알려진 곽시쌍부는 인도 경전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제2전심 일화인 염화미소는 중국의 선 문헌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그 기원에 상관없이, 이 세 일화 모두 중국에서 선의 교외별전적 정체성과 연결됐다. 

사실, 송대에 형성된 이런 전심 일화들에 대해 선종 내부에서 조차 초기부터 그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의심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예를 들면, 송초의 선사 계숭 契嵩 (1007-1072)은 1061년에 나온 그의 저서「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에서 다음과 같이 제 1전심 일화와 제 2전심 일화의 역사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현했다.

"혹자는 여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보이자 가섭이 미소 지었던 것이 법을 전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또는 여래께서 다자탑 앞에서 법을 전하셨다고도 하셨다고도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를 [마음을] 주고받은 것에 대한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떤 사료에서] 그것들이 유래했는지를 보지 못했다. 내가 이것들을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또한 과감히 살피지도 않을 것이다."17)
17)「전법정종기」(『大正藏』2078.51.718하2-6), “或謂 如來於靈山會中拈花示之 而迦葉微笑 
    即是而付法 又曰 如來以法付大迦葉於多子塔前 而世皆以是為傳受之實 然此未始見其所出 
    吾雖稍取 亦不敢果以為審也.”

 

선가뿐만 아니라 당연히 교가에서도 교 보다 수승한 선을 내세우는 이런 전심 일화들을 비판했는데, 천태종 승려 법등 法燈 (fl. 1194)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선의 별전 주장을 비판하는 그의 글은 흥미롭게도 당시 중국에 여러 전심 이론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드러냈다.18) 즉, 그의「원돈종안(圓頓宗眼)」에 따르면, 부처가 꽃을 들어 보인 것, 부처가 자신의 지혜를 반야계 경전을 통해 전한 것, 그의 생애 동안 줄곧 전한 것, 그의 가사를 내려준 것, 그리고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인 것 등이 그 예들인데, 이 시기 중국에서 여러 전심 일화들이 유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18)「원돈종안(圓頓宗眼)」(「卍續藏」958.57.92하13-19)

전심과 관련된 여러 일화 또는 이론들이 만들어졌지만, 중국에서는 특정한 세 일화가 다른 일화들 가운데에서 뽑아져서 삼처전심이라는 개념으로 집합적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나아가 이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는 중국의 선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세 일화 모두를 특별한 전심 일화로 간주하여 동시에 나열하는 경우도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또한 둘 이상의 전심일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별다른 고려가 없었다. 

III. 삼처전심에 대한 한국에서의 논의

 

1. 기원과 활용

앞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 일화를 포괄하는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한국의 선 문헌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며, 또한 나아가 둘 이상의 전심 사건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고찰하는 경우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됐다. 

 

1) 구곡각운(龜谷覺雲, 13세기 활약)

삼처전심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고려의 선승인 각운이 그의 스승인 진각혜심 眞覺慧諶 (1178-1234)의 공안집인「선문염송(禪門拈頌)」에 대해 주석한「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에서 이다. 혜심의「선문염송」은 이 세 전심 일화를 각각 4칙, 5칙, 37칙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일화들을 연결하기 위해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19)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각운으로, 그는「선문염송설화」의 곽시쌍부에 대한 주석 부분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각운은 위에 언급한 세 일화들을 삼처전심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집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이 용어를 통해 중국에서 전해온 다수의 일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 즉 위계적 통합성이라는 관점을 제공했던 것이다. 특히, 각운은 삼처전심 가운데 두 전심 일화에 대해서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데, 제 1 전심 분반좌를 살인도(殺人刀), 그리고 제 2 전심 염화미소를 활인검(活人劍)에 비유한다. 하나의 날을 가진 살인도는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지혜의 일차원적측면을 상징하며 두 개의 날을 가진 활인검은 번뇌를 제거할 뿐 아니라 현상적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대응하는 지혜의 이차원적 측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각운은 이 해석을 통해서 삼처전심 가운데 첫 두 전심이 지혜의 서로 다른 측면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즉, 일차원적 측면의 지혜가 다자탑의 분반좌 사건에서 전해지며 이어서 보다 완전한 이차원적 지혜가 영산의 염화미소 사건을 통해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운은 자신의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석가모니 부처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다른 수준의 마음, 보다 정확하게는, 점차로 높은 수준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는 개념을 도입했다.20)

19)「선문염송설화」(「韓佛全」5, 012하17-013상02; 014상3-상7; 050상09-상12)
20) 앞의 책 (051상03-23) 

 

2) 벽송지엄(碧松智儼, 1464-1534)과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삼처전심은 조선의 선사인 벽송지엄과 청허휴정의 저서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는 이 용어가 어떻게 종파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가 암시된다. 지엄은「훈몽요초(訓蒙要抄)」에서 휴정은「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삼처전심과 교판을 선과 교의 핵심적 내용으로서 연이어 나열했다.

21) 지엄과 휴정이 여러 전심 일화들의 존재가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두 선사가 삼처전심과 교판을 위와 같이 함께 위치시킨 것은 삼처전심이 교판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21)「훈몽요초」(『韓佛全』7. 387하04-06);「선가귀감」(『韓佛全』7, 635중09-17) 

 

교판은 부처가 다른 시기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전했다고 전제한다. 부처의 가르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높은 수준이 되며 최후에는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교종의 승려들은 다양한 경전의 가르침들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고 자기 종파의 경전을 최후 그리고 최고의 위치에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속한 종파의 우월성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삼처전심은 선종의 종파들에게 교판과 같은 형태의 체계를 제공할 수 있다. 즉, 부처가 점차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전한 것이 각 교종의 가르침이 됐듯이, 그가 점차로 완전한 심법을 전한 것이 각 선종의 심법이 됐다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지엄과 휴정이 삼처전심과 교판을 함께 나열함으로써 보여주는 삼처전심이라는 용어의 종파적 활용의 가능성은 실제로 조선 후기의 선사인 백파긍선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3)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
백파긍선은 조선시대에 불교가 처한 독특한 상황 속에서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그의 선판에 적용했다.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그는 선의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부처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수준의 마음을 전했다고 직접적으로 선언했다. 특히 백파는 적어도 삼처 가운데 처음 두 곳에서 다른 수준의 전심, 즉 제 1처에서는 부분적인 전심이 그리고 제 2처에서는 완전한 전심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삼처전심 중에서 첫 번째 분좌는 진공이며 살인도로서 곧 불변의 진여를 전한 것으로 오직 살만 있고 활은 없다. 이에 대해, 두 번째 염화는 묘유이며 활인검으로서, 진공과 묘유를 전한 것으로 곧 살과 활을 모두 구족하고 있다.22) 이어서 백파는 이 대응을 5가의 선종 종파에 적용했다. 그는 법안, 위앙, 조동 세 종파의 종지는 제 1 전심인 분좌의 수준에 해당하며 운문과 임제 두 종파의 종지는 제 2 전심인 염화미소의 수준에 해당한다고 단언했다.23) 덧붙여서 그는 운문종에 대해서는 살과 활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다고 암시하면서 임제종 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간주했다.24) 따라서, 백파는 자신의 선판을 통해 임제종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22)「선문수경(禪文手鏡)」(『韓佛全』10, 520중10-16).
23) 앞의 책, 519하13-18.
24)「선문오종강요사기(禪門五宗綱要私記)」, pp.44-47; 자세한 내용은 김호귀, 「선문오종강요사기에 
    나타난 백파의 임제삼구에 대한 해석 고찰」, 「정토학연구」 제18 호 (서울: 정토학연구회, 2012), 
    339.

백파는 자신의 선판을 삼처전심에 대한 위계적 해석을 통해 정당화했다. 그는 부처가 보다 높은 수준의 마음을 보다 나중에 전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그의 선판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교종의 학승들이 얻었던 것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임제종은 그의 선판에서 염화미소의 사건을 통해 가섭에게 전해진 부처의 마음을 온전히 전승받은 종파가 되며, 따라서 가장 뛰어난 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백파가 당시 소위 선종의 5가와 나아가 하택종 뿐 아니라 이렇다 할 선종 종파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선종 종파와 비교해서 임제종을 내세우는 선판을 했던 이유는 한국 불교의 법맥적 정체성 문제와 연관이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미 밝혔듯이, 조선 후기 한국 불교를 주도한 휴정의 제자들은 선맥을 재정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고려 시대의 선사 태고 보우 太古普愚 (1301-1382)를 자신들의 법맥의 시조로 내세움으로써 한국선을 임제선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따라서, 비록 임제 법맥 하나만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와 연결된 한국의 선맥은 백파의 삼처전심을 이용한 삼종선판을 통해 최상승선을 잇는 법맥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다.

 

2. 삼처전심에 대한 해석 논쟁
백파가 삼처전심을 삼종선판과 연관시켜 해석함으로써, 삼처전심은 조선 후기 선불교계에 적지 않은 논란이 됐다. 당대의 저명한 학자와 승려들이 백파의 이론을 비판하거나 옹호했다. 물론, 이들은 삼처전심 이외에도 다른 여러 사안을 다루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삼처전심과 관련된 주장들만을 보고자 한다.

1)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
백파의 이론을 가장 먼저 비판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의가 있다. 그의 비판은 백파가 삼처전심에 위계적 해석을 하는 것에 집중됐다. 즉, 백파가 삼처전심 가운데 분반좌는 불변의 진여만을 전하여 오직 살만 있고 활이 없으며, 염화미소가 살과 활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제 1 전심보다 제 2 전심에서 보다 수승한 심법이 전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초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처전심 가운데 “分座는 殺을 전하고 拈華는 活을 전하고, 示趺는 殺活을 다 보였다”는  말은 구곡 노스님의 말이다. 지금 분좌는 다만 살일 뿐이고, 염화는 활이 살을 겸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구곡의 말 가운데에 없다. (…)살과 활은 서로 의지하여 분리될 수 없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살을 전하되 반드시 활을 겸하는 것이고 활을 전하되 반드시 살을 겸하는 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이치이다. 지금 말한 분좌의 살은 다만 살만 있고 활이 없는 것이고, 염화의 활은 활이 살을 겸하는 것인데, 결단코 이러한 이치는 없다. 單이면 모두 單이고 具이면 모두 具이지, 어째서 살은 활을 겸하지 못했는데 활만 살을 겸하겠는가."25)
25)「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韓佛全』10, pp.820하-821상), “三處傳心中 分座傳殺 
    拈花傳活 示趺殺活齊示 此龜谷老之言 今分座之但殺 拈花活之兼殺 龜谷說中無之 … 殺活之
    相資不離 亦復如是也 故知傳殺必兼於活 傳活必兼於殺 此必然之理也 今言分座之殺 但殺無活 
    拈花之活 活兼於殺 斷無是理 單則俱單 具則同具 其何以殺不兼活 活獨兼殺.”

여기에서 초의는 백파가「선문염송설화」의 저자인 각운의 말을 왜곡했다고 말하고 있다. 초의에게, 살과 활은 한 쌍으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어서 어느 하나만 갖추고 다른 하나는 갖추지 않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것이 살을 갖추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활도 함께 갖춘 것이고, 마찬가지로 활을 갖추었다고 말하면, 살도 함께 갖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의에게는 이것이 바로 각운의 말의 본래 뜻인 것이다. 백파가 분좌는 살만을 전하고 염화는 활만을 전하였다고 한 것은 구곡의 말을 단순히 왜곡한 것뿐 아니라 사실은 살과 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초의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초의의 주장은 그가 백파의 위계적 삼종선판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의에게 선은 그것이 어떤 종파의 이름으로 불리고, 그 선풍이 비록 달라 보인다고 할지라도, 모두 하나의 선인 것이다. 따라서, 삼처전심 각각은 모두 하나의 마음을 전한 격외선의 기원이 되는 일화이며, 선종의 5가는 이 부처로부터 전해오는 하나의 선을 전해 받은 동등한 수준의 선이 되는 것이다.

2)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선 시대 후기 저명한 학자이자 초의, 백파와도 친분이 있었던 김정희 또한 백파의 삼처전심과 관련한 주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특히 백파의 해석 뿐 아니라 삼처전심 자체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김정희의 삼처전심 개념에 대한 비판을 먼저 살펴보면, 그는 이에 대해 처음으로 문헌학적으로 접근, 그 허구성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제 3전심 곽시쌍부 일화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비판을 남겼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일화는 열반경에 근거하는데, 비록 이 경에 다른 본이 있어서 그 내용상에 서로 차이가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곽시쌍부의 이야기는 공통되어 이것이 삼처전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법현 法顯 (337-422), 혜생 惠生 (5세기 활약), 현장 玄奘 (600-664)등의 기록 등에 근거해서 보면,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 장소가 희련하라고 실증할 수 없으며, ?위서(魏書)?, ?석로지(釋老志)?, ?법원주림(法苑珠林)?, ?전법정종(傳法正宗)? 등의 역사서 및 불서에 근거해 보면 부처의 생멸 시기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런 상황 속에서 열반할 때의 구체적 정황, 즉 곽시쌍부와 같은 일이 실재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길이 없다. 김정희는 이런 비판에서 더 나아가 ?열반경?번역에 있어서의 오류 가능성마저 제기했다.

"『열반경』또한 어떻게 번역의 오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관곽 속에서 두 발등을 내보였다는 한 가지 안건이 천만 가지 설(說)들을 일으켜 뭇 장님이 코끼리를 논하는 격이 되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게 한다."27) 
27) 앞의 책, “涅槃經亦安得無翻訛也. 以槨示雙跗一案. 千藤萬葛. 衆盲論象. 令人噴筍滿案.”

결국 김정희에 따르면, 이 제3전심 일화는 인도 경전에서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에 위조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정희의 삼처전심에 대한 의심은 사실 이 3전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제2전심 나아가 삼처전심 전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세 곳에서 마음을 전수했다는 것은 모두 명확한 증거가 없으며 두 발등을 보였다는 그 일도 적확(的確)한 것이 없으니 곧바로 의사로써 억조(臆造)한 것에 불과하다(…) 또, 염화(拈花)와 같은 한 안은 혜천대사(慧泉大師) 같은 이는 대장경(大藏經)에서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과연 무엇을 근거함인가?(…) 하나의 정상안(頂上眼)을 가진 사람이 벽파한 바 없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28) 
28) 「書某衲牋」(「완당전집(阮堂全集)」7), “三處傳心 俱無明證 雙跗一案 尤無的確 卽不過以意造 ···
    又如拈花一案 如慧泉大師以爲大藏之所不見 此果何據 而如龜谷以下七葛八藤 承謬疊訛無一頂
    上眼人道破 寧不可歎.”

여기에서, 김정희는「인천안목」에 나오는 왕안석과 불혜법천의 대화를 언급하고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대화는 제 2전심일화인 염화미소에 대해 경전전 근거를 제시했다.『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라는 경전의 이름이 이 대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김정희는 이 경전보다는 오히려 대장경에서 이 경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불혜법천의 말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가 이 경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없으므로, 그가 이 경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길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비록 철저하지는 않지만, 이 염화미소 일화, 나아가 삼처전심에 대해서 나름의 문헌적 접근을 시도해서 이에 대해 분명한 근거가 없는 위조라고 단언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 근거해서, 김정희는 삼처전심과 관련된 백파의 선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백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백파가 선을 마음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전해내려 오는 선서만 읽고서 그것을 이해하려다 미혹에 빠지고 만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29)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김정희는 백파의 선이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여러 차례 솔직하게 전했다. 예를 들면,
29) 「與白坡」2 (「완당전집(阮堂全集)」 5, 한국 고전종합 DB)

"전사리(顚闍梨)는 곧 백파노납으로부터 와서 백파의 살활 기용을 성대히 얘기하는데, 모르괘라 삼세의 제불과 역대 조사나 담연의 원묘도 다 살활 속에 들어가서 교활 곤전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오네 그려!"30) 
30) 「與草衣」26 (「완당전집(阮堂全集)」 5, 한국 고전종합 DB), “顚闍梨卽從白老衲來 盛說白之殺活機用 
    未知三世諸佛歷代祖師 湛然圓妙 盡入於殺活中膠葛滾轉耶 好覺噴筍滿案.” 

김정희에게 있어서, 백파가 삼처전심으로 선의 종파들을 나누고, 여기에 살과 활 등의 개념을 활용해서 설명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망설일 뿐 아니라, 선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이 낮음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31) 
31) 앞의 책, 21; 22.

 

3)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7) 
백파의 삼처전심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한 세대 후 선사들 사이에서도 계속됐다. 우담홍기優壘洪基 (1822-1881), 축원진하 竺源震河 (1851-1926), 그리고 설두유형이 이 논쟁에 참여했다. 우담과 축원은 삼처전심 모두가 격외의 조사선에 속한다고 보는 초의의 입장과 크게 보아서 다르지 않으므로 본고에서는 설두의 입장을 살펴보겠다. 

설두는 백파의 이론, 무엇보다도 삼처전심의 위계적 해석을 변호했다. 설두는 모든 선이 하나로서 동등한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열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인용한다. 진귀조사설은「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실린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깨달았으나, 이후 그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아, 다시 진귀조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내용이다. 조사를 부처, 즉 여래의 상위에 두는 이 독특한 한국적 전설에 근거해서, 설두는 다음과 같이 삼처전심의 위계적 해석을 정당화한다.

"세존이 이렇게 해서 [진귀조사로부터] 전해 받고 깨닫게 된 뒤에 세 곳에서 전하게 되었다. 첫 번째 전심, 즉 자리를 절반 나누어 준 일은 살인도이다(…)여래가 깨달은 것을 전한 것이다(…)두번째 전심, 즉 꽃을 들어 보인 일은 활인검이다(…)조사가 전한 것을 전한 것이다."32)
32)「선원소류(禪源溯流)」(『한불전』668중6-11),“世尊如上悟之受之 以是而傳之三處 第一分座 殺人刀 ···
     是傳如來悟底也...第二拈花 活人劒…是傳祖師傳底也.”

여기에서, 설두는 제1 전심 사건인 분반좌에서는 여래가 깨달은 수준의 선이, 그리고 이어지는 제 2 전심 사건인 염화미소에서는 이 보다 수준이 높은 조사가 깨달은 수준의 선이 전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계적 삼처전심 해석에 더해서, 설두는 백파의 선종 법맥에 대한 선판 또한 옹호했다. 즉, 설두는 제 1 전심과 제 2전심 사건에서 전해진 두 종류의 선이 인도에서는 모두 하나의 선 법맥을 따라 전해졌지만, 중국에 들어온 후 육조 이래부터는 살과 활로 나뉘어져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비록 임제종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남악은 활인검을 얻었고 청원은 살인도를 얻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해, 백파의 오가에 대한 선판을 어느 정도 변호했다.33) 
33) 앞의 책, 657중22, “南嶽得活人劒 淸源得殺人刀.” 

IV. 근현대의 삼처전심 논의

1.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 1867-1934)
일본의 불교학자 누카리야 카이텐은 삼처전심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백파의 선판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먼저 The Religion of the Samurai: A Study of Zen Philosophy and Discipline in China and Japan 에서 염화시중 일화에 대해 그의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송대 초기에 선불교 학자가 이 일화를 “날조했을(fabricated)”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또한, 이 일화의 경전적 전거가 되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대해서도 물론 왕안석이 한림원에서 이 경전을 보았다고 했으나, 후대에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단언했다.34)
34) Nukariya Kaiten, The Religion of the Samurai: A Study of Zen Philosophy and Discipline in 
    China and Japan (New York: Cosimo Classics, 1913. 2005), pp.1-2 (각주 1번)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에서는 이와 같은 시각을 그대로 이어서 백파의 이론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백파가 삼처전심이라는 “망설”을 믿어서, 이 가운데 분반좌를 불변에, 염화시중을 수연에 배당한 것은 “공중에 지어놓은 누각”과 같은 설명이라고 주장했다.35) 누카리야는 특히 백파의 선문수경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다.
35)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朝鮮禪敎史」 (東京: 春秋社 , 1929), p.503

"삼처전심 가운데, 제 1 분반좌는 진공의 살인도로서(...)본분 및 향상이다. 다만 불변의 진여만을 전할 뿐이다. 오직 살만 있고 활은 없는 까닭이다. 청원이 이를 얻어 육조의 방계가 되었다.36) 제2처 염화는 묘유의 활인검이다. 곧 제1구인데, 기용, 살활의 삼요 및 향상의 진공 묘유(...)를 구족하였는데(…)남악이 이를 얻어 육조의 정계가 되었다."37)
36) 앞의 책, p.505
37) 앞의 책, pp.505-506

이에 대해, 누카리야는 삼처전심이라는 허황된 이야기에 근거해서 여기에 살과 활을 대입하고 나아가 선판을 하기까지 이른 것은 선의 역사에서 없던 독단이며 마치 미친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정도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38)
38) 앞의 책, pp.505-508

2. 박한영(朴漢永, 1870-1948)
박한영 또한 삼처전심의 허구성을 주장했다. 특히, 그의 비판은 삼처전심의 세 전심 일화 가운데 처음 두 일화 보다는 세 번째 곽시쌍부 일화에 집중돼 있다.

"삼처전심이란 예부터 많은 말이 있다. 이는 원오가 승수좌에게 보인 법어에 준하여 말을 하나 그 법어에는 단지 “여래께서 다자탑 앞에서 반으로 좌석을 나누어 앉은 후, 은밀히 법인을 전수하셨으며, 영산회상에서 꽃을 꺾어든 것이 2중 공안이다”고 말하였을 뿐, 끝내 곽시 쌍부를 설한 곳은 없다."39)
39) 박한영,「영호대종사 어록(映湖大宗師語錄)」(서울: 동국출판사, 1988), p.110

여기에서, 박한영은 원오극근의 어록에 실린 분반좌 일화와 염화미소 일화에 대한 말에 근거해 이 두 일화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문을 보이지 않는데 반해서, 곽시쌍부 일화에 대해서만 그 사료적 근거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 나아가 그는『열반경』과「선문염송설화」를 인용해서 곽시쌍부 이야기의 전심일화로서의 기원에 대해 묻는다.  

또한『열반경』후반에 이러한 말이 있다. “세존께서 열반하신 후 7 일이 되어 가섭존자는 계족산에서 뒤늦게 도착하여 ‘여래에게 예배할 곳을 현시하여 주시라’고 청하니 세존은 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보이시어 그 광명이 3천세계에 비추었다”고 한다.「염송설화」에서는 이를 가리켜 “여래의 제 3의 전심처이라”고 말하니, 이는 어디에 근거하여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40)
40) 앞의 책. p.110

여기에서 보듯이, 박한영은『열반경』에 등장하는 곽시쌍부의 이야기를「선문염송설화」의 저자인 각운이 아무런 근거 없이, 즉 중국 선과 어떤 관련도 없이, 선의 일화로서 재해석하여 제 3의 전심일화로 만들었다고 암시하고 있다. 나아가 박한영은 이 거짓된 제 3전심 곽시쌍부 일화가 지금까지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각운이 잘못 전함에 따라서 많은 사람이 실제처럼 끊임없이 전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박한영이 곽시쌍부 일화에 대해서만 비판적으로 접근해서 그 전심 일화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일화의 신이적 요소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 곽시쌍부의 이야기를 “예수교의 천주가 3 일 만에 부활하였다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망설로 보았던 것이다.41)
41) 앞의 책. pp.110-111 

3. 김동화(金東華, 1902-1980)
김동화는 삼처전심 전체에 대해 다루지는 않았고, 주로 삼처전심의 세 일화 가운데에서 두 번째 일화인 염화시중에 집중했다. 특히, 그는 이 염화시중을 선종의 계보설과 관련해서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 일어난 불교의 종파들은 그 권위를 위해 모두 계보설을 발전시켰는데, 선종만이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소위 28 조사를 통해 인도와 중국에서 끊김이 없이 그 법맥이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선종이 서천28조설과 교외별전설을 “날조”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대까지 왕성했던 모든 교종들은 그 소의경론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서, 선종에서는 그것이 없었으므로 그 이유를 밝히는 동시에 다른 종파의 소의경론보다 오히려 더 유력한 근거설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동화는 이러한 선종의 28조설은 당시에도 그 설득력이 부족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염화미소, 교외별전설이 주창됐던 것이라고 주장했다.42)
42) 김동화,「선종사상사禪宗思想史」(서울: 동국출판사, 1968), p.77  

김동화는 이런 선종의 독특한 이론들은 모두 당나라 중기 이후부터 송대까지 만들어져 유행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숭의 예를 통해 염화미소와 분반좌 일화 등의 전심일화가 이미 송나라 초부터 그 역사적 진위 여부로 인해 문제가 됐음을 지적했다. 특히, 김동화는 앞서 보았던 누카리야 카이텐과 마찬가지로, 염화미소 일화의 경전적 전거를「인천안목」에 실린 왕안석과 불혜법천의 대화에 근거해『대범천왕문불결의경』으로 간주하면서, 이 경전이 대장경에도 수록돼 있지 않고 경전목록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염화미소, 교외별전설도 역시 날조된 하나의 망설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43)
43) 앞의 책, p.78

4. 삼처전심에 대한 최근 논의
박건주는 “추사의 간화선, 대혜종고, 삼처전심에 대한 비판과 사상사적 의의”에서 추사의 삼처전심에 대한 비판을 정리하면서, 삼처전심에 대해 나름의 문헌적 비평을 가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삼처전심 일화들이 허구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먼저 분반좌와 곽시쌍부의 전거를『중본기경』과 
『불반니원경』,『반니원경』으로 보고, 이에서 발견되는 내용이 선의 전심 개념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단언했다. 박건주는 특히 염화미소의 경전적 전거가 되는『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그의 비판을 집중해서, 이 경전이 위조라는 점을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간단히 요약해보면, 경전에서 부처가 가섭에게 법을 전한 증거로서 전의 (傳衣)했다는 것은 사실 8세기 이후 중국 선종에서 전개된 특성이며, 경전에 등장하는 교외별전이라는 말 또한 북송말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송 이래의 선사들이 이 경전을 삼처전심의 전거로 제시한 경우를 찾기 어렵다는 것 등이다. 이런 논의 후에 박건주는 삼처전심이 온전한 모습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북송 때로, 위조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허구의 설화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나아가 그는 김정희가 이런 삼처전심의 허구성을 간파했던 것은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선구적인 쾌거였으며, 그것을 사실로 믿고 떠받드는 조선 불교계에 큰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박건주는 추사가 밝혀낸 삼처전심이 허구라는 사실이 널리 펼쳐지지 못해서 그 폐해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44)  
44) 자세한 논의는, 박건주, 「추사의 간화선, 대혜종고, 삼처전심에 대한 비판과 사상사적 의의」,
   「선문화연구」 제17호 (서울: 선문화연구회, 2014), pp.147-157

V. 맺는 말

삼처전심은 중국에서 수입된 전심 개념으로부터 발전한 한국의 선불교 용어이다. 삼처전심을 구성하는 각 일화들이 선의 교외별전적 정체성을 정당화하는 전심의 원형적 사건으로 중국에서 개별적으로 발전했다고는 하더라도, 이 여러 개의 전심일화들의 존재가 갖는 종교적 함축에 대해서는 전혀 고찰되지 않았다. 한국 선 전통은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함으로써, 다수의 전심 일화가 갖는 종교적 의미를 발전시켰고, 삼처전심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냈다.    

이 삼처전심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삼처전심의 해석문제에 치중했던 움직임이다. 주로, 김정희를 제외한 전근대의 인물들, 즉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각운을 비롯한, 백파, 초의, 설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차원은 삼처전심의 역사적 사실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전근대 시기 인물로서는 대표적으로 김정희가 있지만, 주로 근현대의 접근법이다. 누카리야 카이텐, 박한영, 김동화, 박건주 등이 그들이다. 이 근현대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삼처전심이 역사적으로 허구이며 따라서 망설일 따름이라는 입장에 서 있으며, 나아가, 이에 기반해서 삼처전심의 해석 시도조차 통렬히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 모든 논의는 송 대부터 이미 어느 정도 그 역사성에 대한 의문이 일각에서 제기됐음에도 그 이후 선 내부에서는 전통적으로 그 역사성이 받아들여졌던 다수의 전심일화가 삼처전심이라는 집합적 개념으로 통합됐을 때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종교적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고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만일 전심일화가 둘 이상이라면, 즉 전심 사건이 두 번 이상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중국 선사들이나 한국 대부분의 선사들과 학자들은 거의 어떤 흥미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부처는 각각의 전심 사건에서 같은 마음을 전했는가? 아니면 다른 마음 또는 다른 수준의 마음을 전했는가?”, “만일 같은 마음을 전했다면, 왜 한 번 이상 마음을 전할 필요가 있었을까?”, “만일 다른 수준의 마음을 전했다면 어떤 다른 마음을 전했을까?”와 같은 질문들이다. 그 역사성이 어느 정도라도 받아들여졌을 때 이러한 질문들이 갖는 종교적 의미는 각운 나아가 백파에 의해서 발전했다. 특히, 백파는 삼처전심에 대한 위계적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삼종선판을 정당화했다. 그는 부처가 다자탑 앞에서는 분반좌를 통해서 부분적인 전심을 그리고 영산회상에서는 염화미소를 통해서 완전한 전심을 했으며, 나아가 후자에서 전해진 이 마음의 진리는 임제종의 법맥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함으로써, 당시 임제종과 법맥 상으로 동일시했던 한국 선 법맥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왜 백파의 삼처전심 해석이 현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의 위계적 해석이 한국 선불교사에서 갖는 보다 큰 의미는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는 본 논문의 의도를 넘어서므로 다루지 않았다. 다만 백파의 해석이 앞서 살펴보았듯이, 옹호를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어지는 논의에서 대부분 크게 비판받았기 때문에 서서히 잊혀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운, 특히 백파의 삼처전심을 통한 독특한 “전심”이론의 발전은 한국 선불교가 중국이나 일본 선불교와 구별되는 독자적 이론들을 추구해 나갔다는 주장의 한 증거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답하는 것으로 본 논문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