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雲語錄 백운어록
入院 입원
● 신광사 주지로 취임하며
● 흥성사 주지로 취임하며 興聖寺入院小說
● 신광사 주지로 취임하며
산문에서
백운선사가 을사년(1365) 6월 21일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주지
로 취임하는 날[入院日] 산문(山門:三門)1) 앞에 이르러 주장자를 들고 말
했다. “세상 전체가 모두 해탈로 통하는 문이다. 들어가고 들어가고 또 들
어가도 안이 없고, 나오고 나오고 또 나와도 밖이 없다.2) 이 경계에 도달하
여 무엇을 삼문과 중문(中門)3)이라 하고, 무엇을 부엌과 곳간[廚庫]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승(僧)이라 하고, 무엇을 속(俗)이라 할 것인가? 말해 보
라!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가? 옛사람이 ‘막힘없이 드넓어 밖이 없고, 고요
히 텅 비어 안이 없다. 깨끗한 벌거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4)라고 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주장자를 올렸다가 한 번 내리치고, 한 소리 내지른 다음 곧바로 산문으로
들어갔다.
師, 乙巳六月二十一日, 海州神光寺, 入院日, 至門首, 擧拄杖
云,“ 盡大地解脫門, 入入入無內, 出出出無外. 到這裏, 喚什
麽三門中門, 喚什麽作廚庫, 喚什麽僧, 喚甚麽俗? 且道! 緣何
如此? 不見古人云, ‘寬廓非外, 寂寥非內. 淨裸裸, 赤酒酒, 沒
可把.’” 卓拄杖一下, 喝一喝, 便入門.
1) 절 가장 앞에 세운 정문을 산문 또는 삼문이라 한다. 삼문이라는 말은 공(空)·
무상(無相)·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에 빗대어 해탈에 이르기 위해 들
어서는 문이라는 뜻을 상징한다. 주지로 취임하는 입원(入院)의 일반적 절차에
따라 첫 번째로 산문에서 법문을 한다. 太古語錄 주석4) 참조.
2) 출입(出入)하는 문을 비유로 삼아 들어가도 들어갈 곳이 없고 나와도 나올 곳이
없는 무출무입(無出無入)·무내무외(無內無外)의 선지(禪旨)를 나타낸 말.
3) 산문과 불전(佛殿)의 중간에 위치한 문.
4) 이 말 전체가 정확히 나오는 문헌은 없어서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막
힘없이 드넓어 밖이 없고, 고요히 텅 비어 안이 없다.’(寬廓非外, 寂寥非內.)라는
구절은 남전보원(南泉普願)이 수유(茱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남전이 수
유에게 ‘이(理)는 사(事)를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니 막힘없이 드넓어 밖이 없고,
사는 이를 얻어 하나로 융합하니 고요히 텅 비어 안이 없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붙였다.”(『南泉語要』古尊宿語錄12 卍118 p.290b8. 師寄書與茱萸云, ‘理隨事
變, 寬廓非外, 事得理融, 寂寥非內.’) 또한 그 뒤의 구절은 관계지한(灌溪智閑)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서, 이 법문 전체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곧 “그때 어떤 학
인이 관계지한의 다음 말을 거론했다. ‘시방 그 어디에도 벽과 울타리가 없고, 사
면 그 어느 편에도 문이 없다. 깨끗한 벌거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雲門廣錄』 권3 大47 p.574c18. 時有
僧擧灌溪語云, ‘十方無壁落, 四面亦無門. 淨裸裸, 赤灑灑, 沒可把.’);“관계지한
선사가 법좌에 올라앉아 대중에게 ‘시방 어디에도 벽과 울타리가 없으며, 사면 어
디에도 문은 없다. 알몸을 다 드러내고 맨발로 천천히 걷고 있지만 잡을 방법이
없다.’라고 설법하고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天聖廣燈錄』 권13 「灌谿志閑
章」卍135 p.712b9. 師上堂, 示衆云, ‘十方無壁落, 四畔亦無門. 露裸裸, 赤躧躧,
無可把.’ 便下座.) 또한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다음 말도 유사한 뜻이다. “안에
는 헤아리는 마음이 보이지않고, 밖에는 헤아림의 대상이 되는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깨끗한 벌거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이 전혀 없다.”(『大慧語錄』권21「示妙淨居士」大47 p.900c3. 內不見有
赤灑灑, 沒可把.)
불전에서
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보광명전(普光明殿)5)을 가리키며, 대중들에게 말
했다. “조금 전 삼문 앞에서 ‘세상 전체가 하나의 법신’이라고 하여 공연히
불법에 대한 헛된 분별만 일으키고 말았다. 이제 그렇게 하지 않겠다. 불전
(佛殿)을 보고는 다만 불전이라 부르고, 주장자를 보고는 다만 주장자라 부
를 것이다.6) 이것은 유나(維那)7)의 방이고 저것은 전좌(典座)8)의 방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 말해 보라! 노승은 어
떤 도리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을까? 그 뜻을 잘 알겠는가? 만일 이해하
지 못한다면 또한 상방(上方)9)에 높이 우뚝 솟은 곳이 있으니 내가 그곳에
가서 그대들에게 말해 주겠다.” 주장자를 던지고 옷소매를 턴 다음 곧바로
방장(方丈)10)으로 갔다.
師擧杖指普光明殿, 召大衆云,“ 適來三門頭, 盡大地是箇法
身, 枉作箇佛法知解. 如今不恁麽. 見佛殿, 但喚作佛殿, 見拄
杖, 但喚作拄杖. 者箇維那房, 那箇典座房. 山是山, 水是水,
僧是僧, 俗是俗. 且道! 老僧據箇甚麽道理, 便伊麽道? 還委悉
麽? 若也不會, 更有上方高絶處, 老僧到者裏, 爲君說.” 擲下
拄杖, 拂袖, 便行方丈.
5)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Vairocana)을 봉안한 법당. 원래 부처님께서 80권본
『화엄경』을 설했던 곳이며, 인도의 마가다국( Magadha) 보리도량(菩提道場
Bodhi-manda) 옆에 있었던 법당 이름이다. 보광법당(普光法堂)이라고도 한다.
6)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법문을 활용한 말이다. “나는 평상시에 ‘모든 소리는 부처
님의 소리이고 모든 색은 부처님의 색이니, 세상 전체가 바로 법신이다.’라고 말
하여 공연히 불법에 대한 헛된 견해만 일으키고 말았다. 이제 주장자를 보면 다
만 주장자라 부르고 집을 보면 다만 집이라 부를 것이다.”(『雲門廣錄』 권2 大
47 p.559a15. 我尋常道, ‘一切聲是佛聲, 一切色是佛色, 盡大地是法身.’ 枉作箇
佛法中見. 如今見拄杖但喚作拄杖, 見屋但喚作屋.)
7) 총림에서 대중의 수행을 감독하고, 절의 여러 가지 소임을 총괄하여 맡아보는
직책. 독경 때는 경의 제목이나 회향문을 읽는 일 등을 맡아 한다. 범어 음사어
와 한자를 합하여 만든 글자이다. 유(維)란 강유(綱維)를 이르는 말로서 대중을
다스린다는 뜻이며, 나(那)란 karma-dāna에 대한 음사어 갈마다나(羯磨陀那)
의 끝 글자만 취한 것으로, 한역하면 수사(授事) 곧 여러 가지 할 일을 배분하여
준다는 뜻이다. 도유나(都維那)라고도 하고, 이전에는 열중(悅衆) 또는 사호(寺
護)라고도 하였다. 기원으로 따지면 인도 승단에서 만든 직책의 이름이다. 『十
誦律』권34 大23 p.250b23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실 때 대중 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담당할 유나라는 직책을 두게 했다고 한다. 『百丈淸規』
권4「維那條」大48 p.1132b4에 그 소임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8) 대중의 식사를 담당하는 직책.
9) 주지가 거처하는 방장. 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10) 사방이 일장(一丈) 너비로 되어 있는 작은 방. 일장은 약 3m정도이다. 방장실(方
丈室) 또는 장실(丈室)이라고도 한다. 선종의 절 안에서 주지가 거처하는 방 또
는 함장(函丈)·정당(正堂)·당두(堂頭) 등과 같은 말이다. 인도의 승방(僧房)은
보통 사방 일장(一丈)으로 만들어지는데, 유마거사의 방 또한 이 형식에 따라
조성된 것이어서 사방 일장의 설이 생기게 되었다. 그 뜻이 넓어져서 선종에서
는 주지나 종장(宗匠)에 대한 존칭으로 쓰기도 한다. 이 경우는 방장화상(方丈和
尙)이라는 뜻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돌로 쌓아 올린 곳이 바로 유마거사가
법을 설하며 방편으로 병든 모습을 보여주었던 장소’라고 한다. 당나라 현경년
간(656~660)에 칙사인 위장사(衛長史) 왕현책(王玄策)이 인도로 가다가 유마거
사의 집터를 지날 때 홀(笏)을 가지고 그 터의 크기를 쟀는데, 10홀의 크기에 불
과했다. 그러므로 사방 일장인 방장(方丈) 크기의 방이라 불렀던 것이다.”(『法苑
珠林』권29 大53 p.501c3. 傳云, ‘積石, 卽是說法現疾處也.’ 於大唐顯慶年中, 敕
使衛長史, 王玄策, 因向印度, 過淨名宅, 以笏量基, 止有十笏, 故號方丈之室也.)
방장에서
스님이 선상(禪床)에 걸터앉아 주장자를 올렸다가 한 번 내리치고 말했
다. “이 세 칸 방장이여! 암자는 비록 작지만 법계(法界)를 모두 머금고 있
으니,11) 스스로 깨달은 자[自然覺者]가 이 안에 사노라.12) 말해 보라! 스스
로 깨달은 자란 어떤 뜻일까? 현재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맑고 항상
고요한 것이다. 쳐다보면 앞에 있지만 어느덧 뒤에 있다. 마치 신통한 변화
와 같아서 그것이 위치한 방위를 결정하지 못한다. 말해 보라! 이것은 어떤
것이기에 이와 같이 기괴한 것일까?” 곧바로 “지난해에는 손님의 입장이었
다가 이제야 주인이 되었는데, 특별히 기특한 일은 없으나 당당히 드러난
6척의 몸13)이 아주 분명하구나.”라고 말한 뒤, 주장자를 올렸다가 한 번 내
리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師據禪床上, 卓拄杖一下云,“ 者箇三閒方丈! 庵雖小含法界,
自然覺者處其中. 且道! 作麽生是自然覺者? 云, 不離當處, 湛
然常寂. 瞻之在前, 忽焉在後. 如同神變, 莫定方隅. 且道! 是
甚麽物得恁麽奇怪?” 便云,“ 去年爲客處, 今日作主人, 別無
奇特, 堂堂六尺, 甚分明.” 卓拄杖一下, 便下座.
11) 석두희천(石頭希遷)의 「草庵歌」에 나오는 구절이다. “세상사람들이 머무는 곳
에 나는 머물지 않고,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을 나는 좋아하지 않노라. 암자
는 비록 작지만 법계를 모두 머금고 있으니, 방장의 노인은 이 도리를 자세히 안
다네.”(『景德傳燈錄』권30 「石頭和尙草庵歌」大51 p.461c11. 世人住處我不
住, 世人愛處我不愛. 庵雖小含法界, 方丈老人相體解.)
12) 자연각자(自然覺者)라는 말은 『華嚴經』에 나오는 구절이며, 대혜종고(大慧宗杲)
가 이 말을 간화선(看話禪)의 안목으로 활용했다. 누구의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스로 성취한 지혜, 곧 무사지(無師智)·자연지(自然智) 등의
맥락과 관련된 말로서 ‘스스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여래의 궁전은 끝이 없
고, 자연각자가 그 안에 산다.”(80권본『華嚴經』 권5 大10 p.24a27. 如來宮殿
無有邊 自然覺者處其中.);“(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안에서는 세간의 총명한
말솜씨를 한 점도 써먹을 수 없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몸을 던지고
목숨까지 버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경계는 반드시 당사자가 스스
로 증명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된다. 그런 이유로 『華嚴經』에서 ‘여래의 궁전은
끝이 없고, 자연각자가 그 안에 산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날부터 온갖
성인들이 성취한 대해탈의 법문이다.”(『大慧語錄』 권17 大47 p.885b25. 這裏,
世間聰明辯才, 用一點不得. 到得恁麽田地, 方始是放身捨命處. 這般境界, 須是當
人自證自悟始得. 所以, 華嚴經云, ‘如來宮殿無有邊, 自然覺者處其中’. 此是從上諸
聖大解脫法門.)
13) 석가모니불의 크기를 보통 1장 6척(一丈六尺)이라 하는 말에 따른다. “어떤 사
람은 부처님의 몸[佛身]이 1장 6척이라 주장하고, 어떤 이는 1리나 10리 또는 백
천만억 또는 끝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허공을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라고 주
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신밀(身密)이라 한다.”(『大智度論』권10 大25
p.127c14. 有人見佛身, 一丈六尺, 或見一里十里, 百千萬億, 乃至無邊無量, 遍虛
空中. 如是等名身密.)
● 흥성사14) 주지로 취임하며 興聖寺入院小說
법좌에 올라앉아 대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승은 오늘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성지(聖旨)를 선포한다.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니 조사의 청정한 선
풍(禪風)을 들어 보임으로써 천자(天子)의 훌륭한 명령(休命)15)을 널리 알
릴 것이다. 마지막 한 구절16)은 소리로 표현되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을
다 드러내어 하늘을 덮고 땅을 덮으며 색과 소리를 마음대로 부린다. 황면
노자17)께서 이 한 수를 얻고는 ‘이 법은 평등하여 높거나 낮은 차별이 없으
니, 이를 아누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한다.’18)라고 하셨
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여기서 평등이라 한 말은 학 다리를 자르
고 오리 다리를 늘이거나, 산의 봉우리를 깎아 골짜기를 메운 다음에 성취
하는 평등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19) ‘이 법이 법의 위치에 머무니 세간의
차별상도 변함없이 머문다.’20)라고 하니, 모든 법은 현재 있는 그대로 진
실할 뿐이고 현재 있는 그대로 해탈이며 현재 있는 그대로 고요한 것이다.
‘긴 것은 긴 그대로 법신이고 짧은 것은 짧은 그대로 법신이니’,21) 더 이상
지워 없앨22)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
이 바로 변함없이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승은 ‘주장자를 보고
는 다만 주장자라 부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
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노승은 어떤 도리에 근거하여 이렇
게 말했을까? 영리한 자는 알겠지만, 영리하지 못한 자는 내 말에 몹시 속
을 것이다.
上堂, 師顧大衆云,“ 老僧今日, 承禀宣旨. 辭不獲已, 且擧祖
師之淸風, 對揚天子之休命. 末後一句子, 聲前露裸裸, 盖天盖
地, 盖色騎聲. 黃面老子, 得這一着子道,‘ 是法平等, 無有高
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汝等諸人, 作麽生會? 平等者,
不可截鶴續鳧, 夷嶽塡壑, 然後爲平等也.‘ 是法住法位, 世間
相常住’, 則一切諸法, 當處自眞, 當處解脫, 當處寂滅.‘ 長者
長法身, 短者短法身’, 更無一物可雌黃.” 擧杖白,“ 者箇不是
常住! 所以, 老僧,‘ 見拄杖但喚作拄杖, 山是山, 水是水, 僧是
僧, 俗是俗.’ 且道! 老僧, 據介甚麽道理, 便恁麽道? 靈利者
見, 不靈利者着23)我熱謾.”
14) 興聖寺.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원당(願堂). 백운선사는 1368년에 이 절의
주지로 취임했다.
15) 아름답고 선한 명령. 천자나 신명(神明)의 뜻. “군자는 악을 막고 선을 드날려 하
늘의 휴명을 따른다.”(『周易』 「大有」. 君子以遏惡揚善, 順天休命.)
16) 말후일구자(末後一句子). 진리를 나타내는 궁극적인 한 구절을 가리키며, 최초
의 한 구절 곧 최초일구자(最初一句子)·최초구(最初句)도 똑같은 뜻이다. “최초
구를 안다면, 말후구도 알리라. 그러나 말후구와 최초구여! 그 어느 것도 결정적
인 한 구절은 아니로다.”(『無門關』13則「頌」大48 p.294c7. 識得最初句, 便
會末後句. 末後與最初! 不是者一句.)
17) 黃面老子. 부처님을 가리킨다. 황면구담(黃面瞿曇)·황면로(黃面老)·황두대사
(黃頭大士)·황두로(黃頭老)·황두(黃頭)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몸은 황금
색의 금색신(金色身)으로 인식되는 까닭에 붙여진 칭호이다. 불상을 황금색으
로 도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태어나
신 가비라위성(迦毘羅衛城 Kapilavastu)이라는 말에서 Kapila는 황색 또는 황
적색(黃赤色)이라는 뜻이며, vastu는 머무는 곳 또는 성(城)이라는 뜻이므로
가비라위성은 ‘가비라선(迦毘羅仙) 또는 황두선인(黃頭仙人)이 머무는 곳’이라
는 말이 된다.
18)『金剛經』 大8 p.751c24 참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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