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백운경한 어록

백운어록 - 示衆 시중

실론섬 2016. 8. 30. 12:32

示衆 시중

 

● 무심의 공덕 

● 교외별전의 소식 

● 흙덩이를 쫓는 개 

● 배움을 넘어선 자리 

● 누가 본래의 그 사람을 보는가 

● 병을 약으로 아는 사람들 

● 공겁 이전의 소식 

●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신 이유 

● 봄이 오면 초목은 절로 푸르러지네 

●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

 

무심의 공덕

대중에게 말했다. “산승은 이전에 강남과 강북92)을 돌아다니며[遊歷]93)
선지식이 있기만 하면 법을 묻기 위해 친견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이 모든
선지식들 중 어떤 이는 조주(趙州)의 무자(無字),94) 어떤 이는 만법귀일(萬
法歸一),95) 어떤 이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얼굴, 어떤 이는 마음을
일으켜 밖의 대상을 관조하고 마음을 거두어 안을 관조하는 방법, 어떤 이
는 마음을 맑게 하여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96) 등의 가르침을 내려주었
지만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은 없었다. 처음에는 하무산 천호암의
석옥노화상97)을 찾아가 친견하고 여러 날 동안 곁에서 시봉하며 다만 무념
(無念)이라는 진실한 종지만 배웠을 뿐인데, 여래께서 지시한 최상의 미묘
한 도를 원만하게 깨달았다.98) 이 도는 유심(有心)으로도 구할 수 없고 무
심(無心)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언어로도 이르지 못하고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다99). 그러므로 ‘말도 착각이고 침묵도 착각이니, 침묵과 말을 모두 넘
어서야 길이 있다. 노승은 이 경계에 이르면 다만 입 구멍이 좁아질 뿐이
다.’100)라고 한 것이다. 이 네 구절을 대하고 더 이상 마음을 쓸 여지가 없
어야101) 비로소 이 본분의 소식을 들고 공부할 만하다. 부처님께서는 ‘세간
과 출세간의 공덕 중 무심의 공덕만한 것이 없으니, 그것이 가장 뛰어나 생
각으로도 포착할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不可思議].’102)라고 하셨
다. 다음 이야기를 모르는가?103) 석가노자께서 반야회상에서 문수사리보
살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에 들어갔는가?’ 문수보
살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생각으로도 포착할 수 없
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부사의의 경지에 들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거늘, 어떻게 부사의삼매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겠습
니까? 제가 처음으로 불도를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이 삼매에 들
어가고자 했을 때를 지금 생각해 보면, 진실로 마음에 어떤 차별된 생각104)
도 없이 삼매에 들어갔습니다. 마치 활쏘기를 배울 때 오랫동안 익히면 정
교해져 그 뒤에는 비록 무심하게 하여도 오랫동안 익혔기 때문에 화살을
쏘기만 하면 모두 적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또한 이와 같았으니, 처음에
부사의삼매를 배우면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묶어 두고 이렇게 오랫동안
익히다가 성취하게 되니 어떤 차별된 생각도 없이 항상 삼매와 하나가 되
었습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용(龍)은 항상 선정(禪定)에 들
어 있으니105) 선정에 들어 있지 않는 순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설하신 무심(無心)의 공덕은 아주 뛰어날 뿐이고, 비교할
대상이 없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심은 세간의 흙이나 나무나 기와나
돌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무심이 아니다. 시작할 때 조금이
라도 차이가 나면 나중에는 천 리의 차이로 멀어지게 되니 자세하게 생각
하고 또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示衆云,“ 山僧頃年, 遊歷江南江北, 但有善知識, 無不叅見.
是諸善知識, 誨示於人, 或以趙州無字, 或以萬法歸一, 或以父
母未生前面目, 或以擧心外照·攝心內照, 或以澄心入定, 終
無異說. 末上尋叅霞霧山天湖菴, 石屋老和尙, 許多日侍立左
右, 只學得箇無念眞宗, 圓悟如來無上妙道. 此道, 不可以有心
求, 不可以無心得, 不可以言語造, 不可以寂默通. 故云,‘ 語
也錯默也錯, 寂語向上有路在. 老僧到這裏, 只是口門窄.’ 則
此四句, 無用心處, 方始可以提撕此箇消息. 佛言,‘ 世出世間
功德, 無如無心功德, 最大而不可思議.’ 不見? 釋迦老子, 在
般若會上, 問文殊師利菩薩云, ‘汝入不思議三昧否?’ 文殊云,
‘不也. 世尊, 我卽不思議, 不見有心能思議者, 云何而言入不
思議三昧? 我初發心, 欲入此定, 如今思惟, 實無心想而入三
昧. 如人學射, 久習則巧, 後雖無心, 以久習故, 箭發皆中. 我
亦如是, 初學不思議三昧, 繫心一緣, 若久習成就, 則更無心
想, 常與定俱得.’ 到這介田地, 方始可說, ‘那加常在定, 無有
不定時.’ 所以佛說, 無心功德, 直是殊勝, 直是無較量處. 今
說無心, 非如世間土木瓦石, 頑然無知之無心. 差之毫氂, 失之
千里, 不可不諦審思之, 諦思之.”
92) 중국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남쪽 일대를 강남이라 하고, 북쪽 일대를 강북이라
    한다.
93) 행각(行脚)과 같은 뜻. 주석80) 참조.
94) 太古語錄「示衆」 참조.
95) 조주가 제시한 공안. 차별된 만법은 하나의 평등한 근원으로 귀착된다는 말.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
    가 대답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한 벌을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
    이었다.’”(『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 卍118 p.318b9. 問, ‘萬法歸一, 一歸何所?’ 
    師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96) “마음을 일으켜 ~ 선정에 들어가라.” 이 방법은 북종선(北宗禪)의 선법(禪法)으
    로 간주된다. 신회(神會)가 이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제기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혜(慧)가 발휘될 때는 정(定)이 없고, 정에 들어가면 혜가 없다. 이와 같
    이 아는 자는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선정에 들어가
    고, 마음을 멈추어 청정함을 살피며, 마음을 일으켜 밖의 대상을 관조하고, 마음
    을 거두어들여 안에서 깨닫는 것 등은 해탈을 성취한 마음이 아니라 이 또한 법
    에 속박된 마음이므로 마음을 쓰는 온당한 방법이 아니다.”(『壇語』 神會和尙
    遺集 p.239. 慧時則無定, 定時則無慧. 如是解者, 皆不離煩惱. 凝心入定·住心看
    淨·起心外照·攝心內證, 非解脫心, 亦是法縛心, 不中用.)
97)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 고봉원묘(高峰原妙)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후에
    급암종신(及庵宗信)을 찾아가 화두를 받고 참구하여 득법하고 인가를 받았다.
    백운, 태고 등이 그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98) 이어지는 “이 도는 유심으로도 구할 수 없고”라는 구절부터 마지막까지의 법문
    은 그 중간에 인용된 하당의단(下堂義端)의 말을 제외하고는『大慧語錄』 권22
   「示張太尉」大47 pp.905c23~906a9의 내용과 일치한다.
99) 보령인용(保寧仁勇), 원오극근(圜悟克勤), 대혜종고(大慧宗杲) 등으로 이어지며
    두루 활용되는 구절이다.
100) 남전보원(南泉普願)의 제자 하당의단(下堂義端)의 말을 약간 바꾸었다. “어느
     날 스님이 대중에게 ‘말은 비방이고 침묵은 거짓이니 침묵과 말을 모두 넘어서
     야 길이 있다. 노승은 입 구멍이 좁아 그대들에게 말해 줄 수 없다.’라고 한 뒤 
     곧 법당에서 내려왔다.”(『景德傳燈錄』권10「下堂義端傳」大51 p.276b29. 
     一日, 師謂衆曰, ‘語是謗寂是誑, 寂語向上有路在. 老僧口門窄, 不能與汝說得.’ 
     便下堂.)
101) 모든 분별이 떨어져 나가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나 마음이 작용할 여지가 없는
     상태. 간화선에서 공부하는 데 최적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말이다. “만일 내가 
     그대로 하여금 이와 같이 궁구하며 찾다가 ‘마음을 쓸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스스로 알고 스스로 수긍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매몰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禪林僧寶傳』권23「黃龍慧南傳」卍137 p.530b4. 若不 令汝如
     此究尋, 到無用心處, 自見自肯, 吾卽埋沒汝也.);“세간의 일을 배울 경우에는 
     마음 쓰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면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법을 공부함에는 우리가 마음을 쓸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마음을 써
     서 추구하려고 하자마자 천 리 만 리의 거리로 멀어져서 본래의 목표와 전혀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러하지만 마음을 쓸 여지가 없고, 모색할 수
     도 없으며, 힘을 붙일 도리가 없는 경계에서 바로 힘을 붙이십시오!”(『大慧語
     錄』권19「示智通居士」大 47 p.893b22. 學世間事, 用心不到, 則學不成;學
     出世間法, 無爾用心處. 纔擬用心推求, 則千里萬里, 沒交涉矣. 雖然如是, 無用
     心處, 無摸索處, 無著力處, 正好著力!)
102) 이와 일치하는 경전적 근거는 없으며, 바로 이어서 제시한『文殊般若經』의 부사
     의삼매(不思議三昧)가 지니는 취지를 미리 암시한 것이다. 또한『大般若經』 권
     507 大7 p.587b27에도 유사한 맥락이 있다. “세간과 출세간의 공덕과 진기한 보
     배는 이것에 의지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현아, 마땅히 알아
     라!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거대한 보배 창고 중에서는 생성과 소멸, 오염과
     청정,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 등의 차별에 대하여 말할 약간의 법조차도 없다.
     왜 그런가? 이 중에는 생성하거나 소멸하고, 오염되거나 청정하게 되며, 취하거
     나 버릴 수 있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世出世間功德珍寶, 無不依此, 而出現故. 
     善現, 當知! 甚深般若波羅蜜多大寶藏中, 不說少法, 有生有滅, 有染有淨, 有取有
     捨. 所以者何? 此中, 無法可生可滅, 可染可淨, 可取可捨.)
103)『文殊般若經』권하 大8 p.729b27 참조.
104) 심상(心想).『文殊般若經』에는 ‘心相’으로 되어 있다. 주석99)『大般若經』의 
     인용문에서 든, 生·滅, 染·淨, 取·捨 등 차별로 형성된 관념이 相 또는 想이다.
105) 나가상재정(那伽常在定). ‘나가’는 nāga의 음사어. 상재정은 ‘行·住·坐·臥 등
     모든 행위 양태에서 항상 삼매에 들어 있다’라는 뜻이다. 원래 ‘나가’의 한역어
     는 용(龍)이며, 코끼리[象]·불래(不來) 등으로도 한역한다. 불·보살·아라한 등
     을 용·코끼리에 비유하고, 그들이 성취한 깨달음은 선정(禪定) 곧 삼매에 의지
     하므로 이렇게 의미가 확장되었다. “『본행집경』에서 부처님을 용이라 하면서
     ‘세간의 애착을 모두 멀리 여의었고, 온갖 속박을 풀어서 벗어났으며[解脫], 모
     든 번뇌가 이미 사라졌으므로 용이라 한다.’(大3 p.834c13)라고 하였다. 그러
     므로 ‘용은 항상 선정에 들어 있으니, 선정에 들어 있지 않는 순간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翻譯名義集』 권2 大54 p.1087c7. 本行集經, 稱佛爲龍者, 謂
     世間有愛皆遠離之, 繫縛解脫, 諸漏已盡, 故名爲龍. 故曰, ‘那伽常在定, 無有不定
     時.’);“용의 행동거지는 어느 것이나 삼매이니, 앉는 것도 삼매요 눕는 것도 삼
     매이다. 용은 어느때나 삼매에 들어 있으니 이것을 가리켜 ‘용의 변함없는 법[龍
     常法]’이라 한다.”(『中阿含經』권29 大1 p.608c14. 龍行止俱定, 坐定臥亦定. 
     龍一切時定, 是謂龍常法.);“다른 부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들은 항상 
     선정에 들어 계시므로 마음은 오로지 선(善)일 뿐이고 무기심(無記心)은 없다.’ 
     그러므로 계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용은 걸을 때도 선정에 들어 있고, 머무
     를 때도 선정에 들어 있으며, 앉아 있을 때도 선정에 들어 있고, 누워 있을 때도 
     선정에 들어 있다.”(『俱舍論』권13 大29 p.72a6. 有餘部說, ‘諸佛世尊, 常住定
     故, 心唯是善, 無無記心.’ 故契經說, ‘那伽行在定, 那伽住在定, 那伽坐在定, 那伽
     臥在定.’)

교외별전의 소식

대중에게 말했다. “이 일106)이 만약 언어의 구절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3승 12분교107)에 어찌 언어가 없단 말인가?108) 또한 어째서 세존께
서는 복잡하게 얽힌 언어의 보금자리를 뚫고서 다만 꽃을 들어 보이셨단
말인가?109) 달마대사는 인도로부터 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
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고 성불하도록 하였으며, 교설의 틀을 벗어나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였다.110) 모르는가? 아난이 가섭에게 물었다. ‘세존께
서 금란가사111)를 전한 것 말고, 별도로 어떤 법을 전했습니까?’ 가섭이 ‘아
난아!’ 하고 부르자 아난이 ‘예!’ 하고 응답했다. 가섭이 말했다. ‘문 앞에 세
워둔 찰간112)을 쓰러뜨려라!’ 한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분명했고 그에 호응
한 대답도 딱 들어맞았으니, 이것이 바로 교설의 틀을 벗어나 별도의 방법
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소식이다. 아난은 30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 노릇을 하였음에도 많이 듣고 아는 지혜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부처
님께서 꾸짖으며, ‘네가 천 일 동안 배운 지혜가 하루 동안 도를 배우는 것
만도 못하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비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113)라고 말씀하셨다. 이것 또한 교외별전의 본보기이니, 그대들은
잘 생각하도록 하라.”
示衆云,“ 此事, 若在言句上, 三乘十二分敎, 豈是無言語? 何
故, 世尊, 葛藤窠透, 但拈花? 祖師西來, 不立文字, 直指人
心, 見性成佛, 敎外別傳. 不見? 阿難問迦葉, ‘世尊傳金襴外,
別傳何法?’ 迦葉召阿難, 阿難應諾. 迦葉云,‘ 倒却門前刹竿
着!’ 喚處分明應處眞,114) 此是敎外別傳底消息. 阿難三十年
爲佛侍者, 只爲多聞智慧, 故如來呵嘖云,‘ 汝千日學慧, 不如
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也難消, 滴水也難消.115)’ 此亦別傳
底榜樣也. 汝等善思念之.”
106)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바로 이 일. 곧 일대사(一大事) 또는 본분사(本分事).
107) 三乘十二分敎. 부처님의 교설 전체.
108)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말. 『雲門廣錄』 권상 大47 p.545c24 참조.
109)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 지은 염화미소(拈花微笑)를 가리
     킨다. 교외별전의 취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선종의 설화이다. 동시에 이것
     은 가섭을 인도 전법의 초조(初祖)로 내세우는 조통설(祖統說)의 근거가 되
     었다. 이 설화를 경전적으로 근거 짓기 위하여 위경(僞經)도 출현하였다. 2
     권본『大梵天王問佛決疑經』권상 卍87 p.930a2와, 1권본『大梵天王問佛決
     疑經』卍87 p.976a10 등이 그것이다. 선 문헌으로서는『聯燈會要』권1 卍136
     pp.440b18~441a2에서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졌다. 주석155) 참조.
110) 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敎外別傳. 이 네 구절이 선종의 종지를 나타내
     는 말로 온전히 짝이 되어 나타난 것은『祖庭事苑』권5 (卍113 p.132a11)라는 
     것이 정설이다.
111) 金襴袈裟. 원나라 순제(順帝)가 하사한 것이며, 금란가사는 선종사적으로 불법
     을 정통으로 계승한 자에게 전한다는 뜻을 지닌다.『景德傳燈錄』권1「釋迦牟
     尼佛傳」大51 p.205c3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금루승가리의(金縷僧迦梨衣)를 
     가섭(迦葉)에게 전해주면서 자씨불(慈氏佛:彌勒佛)이 세상에 출현할 때까지 잘 
     간직하도록 당부했다고 한다(復告迦葉, ‘吾將金縷僧迦梨衣, 傳付於汝, 轉授補處, 
     至慈氏 佛出世, 勿令朽壞.’). 또한 같은 책「摩訶迦葉傳」p.206b5에 “가섭이 승
     가리의를 지니고 계족산(雞足山)에 들어가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다렸
     다.”(持僧伽梨衣, 入雞足山, 候慈氏下生.)라고 하는 기사들이 그러한 풍속의 근
     거가 되었다.
112) 刹竿. 조사의 법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절 문 앞에 깃발을 달아 세워
     두는 장대.
113) “달마대사는 인도로부터 와서”에서부터 여기까지는『傳心法要』大48 p.384a6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114) ‘眞’은 ‘親’과 통한다.
115) ‘滴水也難消’는 衍文이다.

흙덩이를 쫓는 개

대중에게 말했다. “요즘 도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총명하고 날
카로운 지혜에 쫓기면서 넓게 배우고 많이 알아 둠으로써 이야깃거리나 벌
고자 하는 행태는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 스스로 그것에 얽히고 스스
로 속박되는 것과 같다. 그들 대부분은 정식(情識)에 치우쳐 헤아리며 언
어의 덫을 버리지 못한다.116) 그런 이유 때문에 끝내는 흙을 쫓아가는 개의
신세117)가 되어 마음의 근원을 환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각
경』에서 ‘사유분별에 얽매인 마음으로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경계를 헤
아리는 것은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 하지만 결코 불을 붙
일 수 없는 것과 같다.’118)라고 한 말과 다르지 않다. 그대들이 다만 굳고
강인한 의지를 일으키고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빼어난 생각을 펼쳐서 자
기 자신에게서 물러나 진실하게 공부함으로써 곧바로 안락의 극치에 이른
다면 비로소 약간 근본과 상응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루 어느
시각에나 어금니를 단단히 물고 등뼈를 꼿꼿이 세운 채 마음마다 다른 생
각이 들어올 틈이 없고 어느 찰나에도 화두를 잊지 않음으로써, 번잡한 세
속의 경계를 고요한 참선 중에 밝히고 고요한 참선 중의 문제를 번잡한 세
속의 경계에서 알아차려서 갑자기 폭발하듯 한 번에 타파되는 순간 119)
로소 원래부터 옛날 그대로의 자기120)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
람은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고 성불하도록 하였으며, 교설의 틀을 벗어나 별도
의 방법으로 전했다.’라는 소리를 듣고, ‘달마대사는 마음 밖에 별도로 전
수하거나 깨달을 수 있는 하나의 법을 가지고 왔다.’라고 생각한 끝에 마음
밖에서 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이어
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이다.121) 옛사람이 ‘청풍루(淸風樓)에 공양을 하러 갔는데, 바로 이날 평생
의 안목이 활짝 열려, 보통년에 달마가 멀리서 건너온 사실122)과 그가 총령
(蔥嶺)123)의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노라.’라고
읊은 게송124)을 모르는가?
示衆云,“ 今時學道人, 多爲聰明利智所使, 廣學多聞, 以資談
柄, 如蠶作繭, 自縈自縛. 多在情識邊卜度, 不能忘筌. 所以,
遂成逐塊, 不能洞明心源. 如圓覺經云,‘ 有思惟心, 測度如
來圓覺境界, 如取螢火, 燒須彌山, 終不能着.’ 汝等, 但興決
烈之志, 開特達之懷, 退步就己, 用眞實功夫, 直造大安樂之
地, 始有少分相應. 若不恁麽, 於十二時中, 咬定牙關, 竪起
脊梁骨, 心心無間, 念念不忘, 鬧裏底靜中明, 靜裏底鬧中薦,
驀然噴地一下, 方知元來舊時人. 有人聞,‘ 達磨西來, 不立
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敎外別傳.’ 將謂, ‘達磨, 心外別
有, 一法將來, 可傳可授, 可取可證.’ 遂將心外覓法. 殊不知,
心卽是法, 法卽心, 不可將心, 更求於心. 不見古人云, ‘淸風
樓上赴官齋, 此日平生眼豁開, 方信普通年遠事, 不從葱嶺付
將來.’”
116) 여기까지는 무견선도(無見先覩)의 말을 인용한 것.『無見語錄』「示徐提點」
     卍 122 p.463b4 참조.
117) 개에게 흙을 던지면 흙덩이를 쫓아가고 그것을 던진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속
     담. 말이나 행위에 미혹되어 그것이 나타내는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모든 범부가 결과만 보고 그 발생의 조건이 되는 인연을
     살필 줄 모르니, 마치 개가 자기에게 던져진 흙덩이를 쫓아가고 던진 사람을 쫓
     아가 물지 못하는 것과 같다.”(『大般涅槃經』권25 大12 p.516b13. 一切凡夫,
     惟觀於果, 不觀因緣, 如犬逐塊, 不逐於人.)
118)『圓覺經』 大17 p.915c24 참조.
119) “번잡한 세속의 경계를 ~ 타파되는 순간”. 무견선도(無見先覩)의 말이며, 그
     의 조부(祖父) 단교묘륜(斷橋妙倫)의 영향도 보인다.『無見語錄』권상 卍122
     p.467a18,『斷橋妙倫語錄』권상 卍122 p.414b19 등 참조.
120) 구시인(舊時人).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 사람. 본래의 자기 곧 본래면목
     (本來面目)과 같은 뜻이다. 수행하여 깨달아도 새롭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
     그대로라는 뜻을 가진다. 예전과 달라진 현재의 사람을 금시인(今時人)이라 하
     는데, 둘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에 ‘원래부터’라 한다. “원래 옛날 그대로
     의 사람이지만 옛날에 가던 길로 가지 않을 뿐이다.”(『曹山語錄』大47 p.530b1. 
     元是舊時人, 只是不行舊時路.)
121) “달마대사는 마음 밖에 ~ 모르고 있는 것이다”.『傳心法要』大48 p.380c7의 내
     용을 취했다.
122) 보통 7년(526)에 달마대사가 중국에 들어왔다는 설에 기초한 말. 남천축으로부
     터 바다를 건너 중국 광주에 도착했다는 기록에 따른다.
123) 입적한 뒤 달마를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했는데 동위사(東魏使) 송운(宋雲)이
     총령에서 신 한 짝을 들고 서쪽으로 가는 달마를 만났다고 보고하여 관을 열어
     보았더니 신 한 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景德傳燈錄』권3 大51 p.220b4.
124) 월산사내(越山師鼐)가 민왕(閩王)의 초청으로 청풍루에서 마련한 재(齋)에 가서
     앉아 있다가 햇빛을 보고 활연히 깨달은 소식을 전한 게송.『景德傳燈錄』권19
     大51 p.356a14 참조.

배움을 넘어선 자리

대중에게 말했다. “옛사람이 말했다. ‘만법은 마음과 어떻게 구분되고 마
음은 만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거늘 어떤 이유로 애써 다시 경전의
뜻을 찾는가? 마음 자체는 본래 갖가지 분별이 전혀 없으니, 지혜로운 자
는 다만 배움을 넘어선 자리만 밝힐 뿐이다.’125) 그러므로 여러 형제들이
여! 경전의 교설을 살필 필요가 없고, 도를 수행하거나 부처님께 예배할 필
요도 없으며, 육신을 불사르고 뼈를 달구는 공양을 할 필요도 없다. 설령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제시한 12분교를 다 이해한 다음, 사자좌126)에 걸
터앉아 거침없이 흐르는 물과 같이 유창한 말솜씨를 구사하며 빽빽이 모
인 사람들을 구름처럼 덮어 가려주고 그들에게 비처럼 윤택하게 설해 줌으
로써 감동한 천신이 땅에 꽃을 뿌리고,127) 온 대지가 황금으로 변하고 모든
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천 가지 삼매를 얻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묘
한 뜻을 이해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더라도 일념으로 번뇌가 없는 업을 닦는
것만 못하다. 총명한 분별로는 업을 대적할 수 없고, 메마른 지혜로는 생사
를 벗어나지 못한다.128) 그러므로 옛사람은 ‘만약 분별에 얽매인 아주 작
은 생각이라도 잊지 못한다면 인천(人天)의 인과129)에 속박되는 잘못을 벗
어나지 못하니, 그들 모두 반드시 돌아가며 다른 윤회에 떨어지게 되고 만
다.’라고 했다. 천경초남(千頃楚南)선사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모르는가?
그는 ‘여러 불제자들이 설사 삼세 부처님들의 교설을 이해하여 병에서 물
이 쏟아지듯이 유창하게 설법하고 백천 가지의 삼매를 얻었더라도, 일념으
로 번뇌가 없는 도를 닦아 인천의 인과에 속박되는 잘못을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130)라고 했던 것이다. 만일 여러 형제들이 나중에 그 언젠가 근본
적인 가르침을 퍼뜨리고자 한다면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흉금으로부터
흘러나와 하늘과 땅을 뒤덮을 정도가 되어야131) 어디서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示衆,“ 古人云,‘萬法何殊心何異! 何勞更用尋經義? 心王本
自絶多知, 智者只明無學地.’ 然則, 諸兄弟! 不用看經敎, 不用
行道禮拜, 不用燒身煉骨. 設使解得三世諸佛, 十二分敎, 踞師
子座, 瀉懸河之辯, 對稠人廣說妙法, 如雲如雨, 感得天花落地,
地變黃金, 群石點頭, 及解得百千三昧, 無量妙義, 不如一念修
無漏業. 且聰明不能於敵業, 乾慧未免於生死. 故古人云, ‘若一
毫情念未忘, 未免人天因果繫縛, 盡須輪墜.’不見千頃楚南禪
師曰,‘諸子設使解得三世佛敎, 如甁注水, 及得百千三昧, 不
如一念修無漏道, 免被人天因果繫絆.’若也諸兄弟, 他時後日,
播揚宗敎,132) 一一從自己胸襟流出, 盖天盖地, 觸處現成矣.”
125) 포대화상(布袋和尙)의 게송 중 일부.『景德傳燈錄』권27 大51 p.434b13,『五燈會
     元』권2 卍138 p.81b1 등 참조.
126) 師子座. sim3 hāsana. 불조(佛祖)가 앉아서 설법하는 자리. 예좌(猊座)라고도
     한다. “이는 부르기를 사자라 하는 것이지 실제의 사자가 아니다. 부처님은 사람
     중의 사자와 같은 지위이므로 부처님이 앉는 곳은 평상이건 맨바닥이건 모두
     사자좌라 한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국왕이 앉는 곳도 사자좌라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왕을 건인(健人)이라 하고 인사자(人師子)라고도 하니 사람들은 국왕을 일
     러 인사자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사자가 네 다리를 가진 짐승 중에서 독보적
     이고 두려워할 것 없이 모든 동물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처럼 부처님도 이와 같
     아서 96종의 외도를 모두 항복시키고 두려워할 것이 없으므로 인사자라 한다.”
     (『大智度論』大25 p.111b2. 是號名師子, 非實師子也. 佛爲人中師子, 佛所坐處, 
      若床若地, 皆名師子座. 譬如今者國王坐處, 亦名師子座. 復次王呼健人, 亦名人師
     子, 人稱國王, 亦名人師子. 又如師子四足獸中獨步無畏, 能伏一切, 佛亦如是, 於九
     十六種道中, 一切降伏無畏故, 名人師子.);“사자좌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사람(설법하는 사람)이 앉는 좌석으로 세속에서는 높은 자리[高座]라고 한다.”
     (『一切經音義』권36 大54 p.546a14. 師子座者, 轉法輪人所坐之座, 俗名高座.)
127) 설법에 감동하여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장면은『法華經』권2 大9 p.2b7에 나
     온다. 곧 부처님께서 설법을 마치고 앉아 계실 때 하늘에서 온갖 꽃들이 부처님
     과 대중 위로 뿌려졌다고 한다.
128) 분주무업(汾州無業)의 말에 기초한다. “총명한 분별로는 업을 대적할 수 없고,
     메마른 지혜로는 괴로움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景德傳燈錄』 권
     28「上堂」大51 p.444c17. 且聰明不能敵業, 乾慧未免苦輪.) 메마른 지혜는 
     간혜(乾慧)를 말한다. “비록 지혜가 있지만 선정(禪定)의 물에 의해 윤택함을 
     얻지 못했으므로 간혜라 한다. 또한 이러한 견해에서 아직 이치의 물[理水]을 
     얻지 못한 것을 또한 간혜라 한다.”(『大乘義章』권14 大44 p.755c12. 雖有
     智慧, 未得定水, 故云, 乾慧. 又此事觀, 未得理水, 亦名乾慧.)
129) 6도 윤회 중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하늘에 태어나게 되는 인과관계. 비록 인계
     (人界)와 천계(天界)가 지옥·축생·아귀·아수라 등 다른 윤회 방식보다 상대적
     으로 낫다고 해도 이것 역시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130)『景德傳燈錄』권12 大51 p.292c4 참조.
131) “나중에 그 언젠가”부터 이 부분까지는 암두전활(巖頭全豁)의 말.『頌古聯珠
     通集』권28 卍115 p.349b8,『大慧語錄』권22 大47 p.906b13,『密菴語錄』 
     大47 p.980a21 등 참조.
132) ‘宗敎’는 ‘大敎’와 동일.

누가 본래의 그 사람을 보는가

대중에게 말했다. “참학(參學)133)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문화(問話)134)
배우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간화(諫話)135)를 배우는 것도 반드시 참
학이라 할 수 없고, 대어(代語)136)를 배우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별어
(別語)137)를 배우는 것도 반드시 참학이라 할 수 없고,138) 경전의 교설을 살
피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논(論)을 짓고 소(䟽)를 궁구하는 것도 반
드시 참학은 아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구하는 것도 반드시 참
학은 아니고, 또한 마음을 일으켜 밖의 대상을 관조하거나 마음을 맑게 하
여 묵묵히 관조하는 것139)이 결코 참학은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하여 그대가 언제 어디서나 막힘없이 통하고 걸림없이 도달한다 하더라
도 참학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총명한 분별로는 업을 대
적할 수 없고, 메마른 지혜로는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140)라고 하는 것
이다. 만약 진실하게 참학하는 자라면 참선은 반드시 진실한 참선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참선과
진실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루 어느 시각이나 어떤 행위 양상에서도
생사윤회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일대사(一大事)를 목표로 붙들고 사유분별
하는 심의식(心意識)을 여읜 채, 참선하여 범부와 성인의 길을 모두 벗어나
고 도를 배워 분별하는 마음도 없고[無心] 억지로 하는 행위도 없는[無爲]
경지가 그것이다. 끊어지지 않고 빈틈없이 기르고 언제나 망상이 없으며
항상 뚜렷하게 깨어 있고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깊고 고요한 경지
에 이른다면 자연스럽게 도와 하나가 될 것이다. 옛사람이 ‘분별하는 마음
이 없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141)을 볼 수 있다.’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示衆云,“ 夫叅學事作麽生? 叅學者, 不必學問話, 是叅學也;
不必諫話, 是叅學也;不必代語, 是叅學也;不必學別語, 是
叅學也;不必看經敎, 是叅學也;不必造論討䟽, 是叅學也;
不必遊州獵縣, 是叅學也;不必避喧求靜, 是叅學也;亦不是
擧心外照, 澄心默照, 是叅學也. 若於如是等事, 任你七通八
達, 於叅學事, 了沒交涉. 故云,‘ 聰明不能敵業, 乾慧未免生
死.’ 若也眞實叅學者, 叅須實叅, 悟須實悟, 始得. 且作麽生
是實叅實悟耶?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以生死大事爲念, 離
心意識, 叅出凡聖路, 學以無心無爲. 綿密養之, 常常無念, 常
常不昧, 了無依倚, 到冥然地, 自然合道. 不見古人云,‘ 無心
方見本來人.’
133) 참선하고 도를 배운다는 ‘참선학도(參禪學道)’의 뜻이다.
134) 전해지는 이야기나 공안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 대답하는 것은 답화(答話)라 한다.
135) 간화(揀話)와 같다. 공안 또는 화두의 시비를 가려내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
136) 질문을 받은 사람이 대답을 하지 못할 경우, 그를 대신하여 질문을 던진 사람이
     대답하는 말. 또는 어떤 문답으로 이루어진 공안에서 한편의 대답이 없을 때 후
     대에 그 공안을 제기한 선사가 대신하여 답하는 경우도 대어라 한다. 운문문언
     (雲門文偃)은 대어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시 어떤 학인에게 ‘가령 기틀
     을 당면하고서 어떤 말을 해야만 할까?’라 묻고 대신 대답하기를 ‘일어났다!’라
     하고, 다시 말했다. ‘백 세 된 노인이 노래하고 춤을 춘다.’”(『雲門廣錄』권중 大47
     p.566b27. 復問僧, ‘秖如當機, 合下得什麽語?’ 代云, ‘發!’ 又云, ‘百歲老兒作歌舞.’)
137) 다른 선사들이 나눈 문답 중에서 이미 대답한 내용과는 별도로 자신의 견해로
     대답하는 것. 그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현장에서 대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해진 문답을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선기(禪機)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대어와 별어를 아울러 써서 대별(代別)이라고도 한다. “용아가 물었다. ‘제가 막
     야검을 들고 스님의 머리를 자르려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덕산이 목을
     빼어 보였다<법안(法眼)이 별도로 말한다. ‘그대는 어느 곳에다 손을 대겠는가?’>. 
     용아가 ‘머리가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하자 덕산이 미소를 지었다.”(『景德傳燈錄』
     권15「德山傳」大51 p.317c22. 龍牙問, ‘學人仗鏌鎁劍, 擬取師頭時, 如何?’ 師引頸
     <法眼別云, ‘汝向什麽處下手?’>. 龍牙曰, ‘頭落也!’ 師微笑.)
138) 여기까지는 참학에 대한 서록본선(瑞鹿本先)의 말을 인용한 것이며, 그 이후도
     일부는 그대로 인용하고 일부는 같은 맥락으로 백운선사가 활용한 것이다. 불
     필(不必) 다음에 학(學)이라는 글자가 생략된 형태이며, 서록의 말에는 미필(未
     必로) 되어 있다. 『景德傳燈錄』 권26 「瑞鹿本先傳」 大51 p.426b19 참조.
139) 주석96)과 동일한 맥락.
140) 주석128) 참조.
141) 타고난 그대로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은 사람. 수행한다고 청정하게 변하지도
     않고 번뇌에 휩싸였다고 오염되지도 않는 본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본래
     면목(本來面目)과 같은 말이다.

병을 약으로 아는 사람들142)
142) 이 시중은『大慧語錄』권23「示陳機宜」大47 p.908b16~b22의 내용과 동일하다.
     다만 방거사의 구절에 대한 배치를 달리했고, 끝 부분에 “공은 깨달음의 본체”
     라고 한 구절을 덧붙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중에게 말했다. “방거사(龐居士)는 ‘다만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공
(空)으로 보기 바랄 뿐, 결코 없는 것을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지 마
라!’143)라고 말했다. 이 두 구절을 깨닫기만 한다면 일생 동안 공부할 일을
모두 마칠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본래 법이 아니고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
기에 마음과 법이 모두 공인 것이 바로 참된 실상이다. 그러나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와 같은 견
해를 일으키는 자들은 옛 성인의 방편을 잘못 알고서 병을 약이라 집착한
다. 그들은 공도 본래 공이 아니며 오로지 하나의 참된 법계일 뿐이라는 것
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144) 그러므로 방거사는 또한 ‘그대들은 공에 떨어지
지 않을까 의심하지 말고, 공에 떨어지는 것 또한 싫어하지 마라.’145)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이 한 구절의 뜻을 간파한다면 끝없는 악업과 무명이 바
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녹고 굽지 않은 기와가 부서지듯이 사라질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장경의 교설 또한 이 한 구절에 대한 해설일 뿐이니,
공이란 깨달음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示衆,“老龐公云,‘ 但願空諸所有, 愼勿實諸所無!’只了得
這兩句, 一生叅學事畢. 以故, 法本無法, 心亦無心, 心法兩空,
是眞實相. 而今學道之人, 多怕落空. 作如是見者, 錯認古聖方
便, 執病爲藥. 殊不知, 空本無空, 唯一眞法界耳. 故龐公亦云,
‘汝勿嫌落空, 落空亦不惡.’ 若覰破這一句字,146) 無邊147)惡業
無明, 當下冰消瓦解. 如來所說一大藏敎, 亦註解這一句, 空是
覺體故也.”
143) 입적을 앞두고 친구인 절도사 우적(于頔)이 문병 왔을 때 남긴 임종게(臨終偈).
     『景德傳燈錄』권8 大51 p.263c15,『龐居士語錄』권상 卍120 p.61b11 등 참조.
144) “그들은 공도 ~ 모르는 것이다.”『大慧語錄』에는 “대단히 애처롭다.”(深可憐愍)
     라고 되어 있다.
145)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지만, “공에 떨어지는 것이 두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공을 얻는 것 또한 싫어하지 마라.”(『龐居士語錄』 권중 卍120 p.68a15. 莫道怕落空.
     得空亦不惡.)라는 구절을 대혜선사가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146) ‘字’는 『大慧語錄』의 ‘子’가 맞다.
147)『大慧語錄』에는 ‘無邊’ 앞에 ‘破’가 붙어 있다.

공겁 이전의 소식148)
148)『景德傳燈錄』권25「天台德韶傳」大51 p.409b23의 내용에 기초한다.

대중에게 말했다.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이시고 가섭이 미소 지어 응답
149) 뒤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반복하여 전해지고 등불에서 등
불로 끊임없이 이어진 교외별전의 일을 그대들 조사 문하의 선객(禪客)들
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대들이 만약 이해하고자 해도 별달리 도리
는 없다. 가령 지금의 대지와 허공, 밝은 태양과 어두운 구름, 모든 산하와
국토 등의 모든 유위법들이 다 함께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같이 무위
의 실상 또한 이와 같다. 공겁(空劫)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눈앞에서
원만히 밝고 환하게 비추며, 시방 전체를 막힘없이 뚫어 안도 없고 밖도 없
으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며, 단절도 없고 소멸도 없이 마
주하고 분명히 나타날 뿐만 아니라 약간의 차별도 없으니, 다시 누구에게
전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영산(靈山)150)에서 부처님이 가섭에게 법을 전한
본보기이다. 여러 형제들이여! 한순간에 모두 이해하는 것이 좋으리라. 시
간을 헛되게 보내지 말고, 신도의 보시를 헛되게 낭비하지 마라! 그대들이
만약 위로 네 겹의 은혜151)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도를 보는 안목을
명백히 하여 함께 해탈문으로 들어가야만 된다.”
示衆云,“ 自世尊拈花, 迦葉微咲, 迄至于今, 轉轉相承, 燈燈
相繼, 敎外別傳底事, 汝等祖門下客, 且作麽生會取? 汝若要
會, 別無道理. 只如如今大地虛空, 日明雲暗, 一切山河國土,
諸有爲法, 皆悉明現, 乃至無爲實相, 亦復如是. 自空劫已前,
直至如今, 合下圓明朗照, 洞澈十方, 無內無外, 亘古亘今, 無
斷無滅, 對現分明, 並無絲毫差別, 更付阿誰? 此是靈山付囑
榜樣. 諸兄弟! 一時會取好. 莫虛喪光陰, 莫虛消信施! 汝若要
上報四重恩, 應須道眼明白, 共入解脫門, 始得.”
149) 주석109) 참조.
150)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곳. 일반적으로 영취산(靈鷲山)이라 한다. Gr3 dhrakūta,
     Gijjha-kūta.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鷲] 머리와 같고 독수리가 많이 서식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151) 네 가지 은혜[四恩]를 말한다.『大乘本生心地觀經』권2 大3 p.297a12에는 
     “부모은(父母恩)·중생은(衆生恩)·국왕은(國王恩)·삼보은(三寶恩)”, 『正法念
     處經』권 61 大17 p.359b14에는 “모은(母恩)·부은(父恩)·여래은(如來恩)·설
     법사은(說法師恩)” 등으로 되어 있다.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신 이유


대중에게 말했다.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자 인천(人
天)의 백만억 대중이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오로지 대가섭만은 어김없이
알아듣고 파안미소를 지었다.152) 말해 보라! 가섭이 어김없이 알아들은 사
안은 무엇일까? ‘부처님께서는 말씀에 집착하지 않고 말씀하셨고, 가섭은
듣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들었다.’153)라거나 ‘부처님에게는 은밀한 말씀이
있었고, 가섭은 그것을 덮어서 가리지 않았다.’154)라고 한 말과 같다고 생
각하지 마라. 세존께서 또한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으니 그것
을 마하가섭에게 전한다.’155)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 비록 그렇다고
는 하지만 나는 ‘영산에서 부처님은 달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조계 혜능
(慧能)은 달을 직접 가리켰다.156)’라고 말하리라.
示衆云, “世尊, 於靈山會上拈花, 人天百萬億大衆, 悉皆罔措,
唯大迦葉親聞, 破顔微咲. 且道! 迦葉親聞底事, 作麽生? 不
可道,‘ 如來不說說, 迦葉不聞聞. 且如如來有密語, 迦葉不覆
藏.’ 世尊亦云, ‘吾有正法眼藏, 付囑摩訶迦葉.’ 又作麽生?
然雖如是, 我道,‘ 靈山話月, 曹溪指月.’”
152) 2권본『大梵天王問佛決疑經』권상 卍87 p.930a2 및 1권본『大梵天王問佛決疑
     經』「拈花品」卍87 p.976a10에 이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지만, 이 경전은 선종의
     설화가 유행한 뒤에 그것을 근거 짓기 위하여 만들어낸 위경(僞經)이다.
153) 여기까지는『景德傳燈錄』 권18「玄沙師備傳」大51 p.346a6의 내용과 일치한다.
154)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문답에 보인다. 『景德傳燈錄』 권17 大51 p.335c2 참조.
155)『聯燈會要』에 이 말의 완성된 형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존께서 영취산의
     법화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대중이 모두 말이 없었으나, 오
     직 가섭만이 파안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 열반의 현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진실한 상, 미묘한 법문이 있다. 문
     자에 의존하지 않고 교설 밖에 별도로 전하니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
     라.’”(『聯燈會要』 권1 卍136 p.440b18. 世尊, 在靈山會上, 拈花示衆, 衆皆默然, 
     唯迦葉, 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
     字,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주석109) 참조.
156) 이 역시 위의 말에 이어지는 현사사비(玄沙師備)의 법문을 축약한 것이다. 현사
     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나에게 정법을 간직한 눈이 있으니 그것
     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라고 하신 것을 나는 달에 대하여 말씀한 것과 같다
     고 생각하고, 조계 혜능이 불자를 꼿꼿이 세운 것은 또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玄沙語錄』권상 卍126 p.414a1. 且如道, ‘吾有正法眼, 
     付囑大迦葉.’ 我道, 猶如話月, 曹谿竪拂子, 還如指月.)

봄이 오면 초목은 절로 푸르러지네

대중에게 말했다. “옛사람은 종지를 깨우친 다음, 깊은 산속 으슥한 계곡
에서 바위 동굴에 은거하며 하늘만 응시하고 인간 세상의 일은 한꺼번에
잊은 채 품은 생각을 그대로 펼치면서도 번뇌망상을 완전히 그쳤다.157)
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거나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거나 상관하지 않았
으니, 그 해에 윤달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 달이 큰지 작은지도 몰랐다. 사
계절도 구별하지 못했거늘 여덟 절기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만 사방의
산들이 연출하는 푸른 봄빛과 시든 가을빛을 바라보며, 배고프면 먹고 졸
리면 자고, 추울 때는 불을 쪼이고 더우면 서늘한 곳으로 갔다. 오늘은 자
유자재로 움직이며 마음 가는 대로 맡겨두고, 내일은 마음 가는 대로 맡겨
두고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것이다. 온갖 볼품없고 형편없는 꼴을 하고서
이렇게 세월을 보냈으니, 이러한 경계가 되어야 비로소 도를 품었다[道懷]
고 하며,158) 또한 그것은 모든 기교를 잊는 근본이기도 한 것이다. 나찬화
159)의 말을 모르는가? ‘복잡하게 얽힌 세상일이여! 산 풍경만 못하구나.
푸른 소나무가 해를 가리고, 맑은 계곡물은 아득히 흐른다. 산 구름을 장막
으로 삼고 달을 등불로 삼으며, 등나무 아래 누워 돌덩이를 베개로 삼는다.
천자에게도 굽히지 않으니, 어찌 왕과 제후를 부러워하랴! 삶과 죽음에 근
심이 없거늘, 다시 무엇을 걱정하랴! 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형체가 없으나,
나는 늘 편안할 뿐이라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어리석은 사람들
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뜻을 알리라. 어리석고 무딘
것이 아니라 법의 본체가 그러한 것이라네. 꼼짝하지 않고 일없이 앉아 있
으니, 봄이 오면 초목은 저절로 푸르리라.’160)”
示衆云,“ 古人得意之後, 向深山幽谷, 高棲巖上, 目視雲漢,
頓忘人世, 放懷履踐, 大休歇去. 一任海變桑田, 從他兎走烏
飛, 不知年之餘閏;不知月之大小. 四時不分, 八節那知? 但
見四山靑靑黃黃, 飢來喫食困來眠;寒時向火熱乘凉. 今日騰
騰任運;明日任運騰騰. 百醜千拙, 且恁過時, 如斯之境, 方稱
道懷, 亦乃忘機之本. 不見嬾瓚和尙云, ‘悠悠世事! 不如山丘.
靑松蔽日, 碧澗長流. 山雲當幕, 夜月爲燈. 臥藤蘿下, 塊石枕
頭. 不朝天子, 豈羨王侯! 生死無慮, 更復何憂! 水月無容,161)
我常只寧. 飢來喫食, 困來打眠. 愚人咲我, 智乃知焉. 不是癡
頑, 法體如然. 兀然無事坐, 春來草自靑.’”
157) “옛사람은 종지를 깨우친 다음, 깊고 후미진 바위 동굴이나 띠풀집이나 석실에
     서 번뇌망상을 완전히 그친 채 품은 생각을 그대로 펼치며 명예도 잊고 이익도
     버리고서 세상일에는 관심을 두지않았다.”(『圜悟心要』卷下始 卍120 p.766b7. 
     古人得意之後, 向深巖僻洞, 茅茨石室, 大休大歇, 放懷履踐, 忘名棄利, 與世不相
     關涉.)
158) 서암영각(瑞岩永覺)의 법문과 같은 기조이다. “납승의 본분에 따른다면 사계절
     도 구별하지 못했을 것인데, 여덟 절기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바위 동굴에 은거
     하며 나왔다 사라졌다 거두었다 펼쳤다 하며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거나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이불이 따뜻해지면 비로소 봄이
     온 줄 알았고, 시든 잎이 섬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가을빛을 제대로 알
     았다. 이와 같은 경계가 되어야 비로소 도를 품었다고 한다.”(『續傳燈錄』권14 
     大 51 p.562a17. 若據衲僧分上, 四時不別, 八節安知? 高棲巖上, 出沒卷舒, 一任
     桑田海變, 從他兎走烏飛. 布衾煖處始知春, 黃葉飄階委秋色. 如斯境界, 方稱道懷.)
159) 嬾瓚和尙. 명찬(明瓚)을 말한다. 숭산보적(嵩山普寂 651~739)의 법을 이은 뒤 형
     악(衡嶽)에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살았다. 대중들이 운력을 하여도 동참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내 비난을 받았으나 전혀 부끄러운 줄 몰랐다. 이렇게 게으
     른 습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나찬(懶瓚)·나잔(懶殘) 등이라 불렀다.
160)「南嶽懶瓚和尙歌」의 일부이다.『景德傳燈錄』 권30 大51 p.461c3 참조. ‘배고
      프면 밥 먹고 ~ 법의 본체가 그러한 것이라네’라는 구절은 p.461b21의 내용이 
     삽입된 것이다.『佛祖歷代通載』권14 大49 p.606c4 참조.
161) ‘容’은 ‘形’, ‘影’ 등과 통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

대중에게 말했다. “마음은 자상(自相)162)이 없어 대상 경계에 의탁하여
야 발생한다. 경계의 본성도 본래 공(空)이기에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다. 인식기관[根]과 인식대상[塵]이 화합한 결과로 있는 듯이 보이지만 마
음에 따라 나타난 것일 뿐이다. 안팎을 헤아려볼 때 무엇이 본체인가?163)
마땅히 알라!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는 다만 하나일 뿐이니 결코 두 토막으
로 나누어보지 마라.164) 조사의 다음 말을 모르는가? ‘대상 경계에는 아름
다운 것과 추한 것의 구별이 없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구별은 마음에
서 일어난다. 마음이 억지로 차별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망령된 분별
이 어디서 일어나겠는가? 망령된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진심은 만나
는 대상마다 두루 알게 될 것이다.’165) 그대들은 다음 문답을 기억해 두라.
위산(潙山)이 앙산(仰山)에게 물었다.166)  ‘미묘하고 청정하며 밝은 마음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산하와 대지, 해와 달, 그리고 별들입니
다.’ ‘그대는 다만 차별된 현상[事]만 터득했구나.’ ‘화상께서는 조금 전에
무엇에 대하여 물으셨습니까?’ ‘미묘하고 청정하며 밝은 마음이었지.’ ‘그
것을 현상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맞다. 맞아!’ ”
示衆云,“ 夫心無自相, 託境方生. 境性本空, 由心故現. 根塵
和合, 似有緣心. 內外推之, 何是其體? 當知! 內心外境, 只是
一箇, 切忌分作兩橛看. 不見祖師云,‘ 境緣無好醜, 好醜起於
心. 心若不强名, 妄情從何起? 妄情旣不起, 眞心任徧知.’ 汝
等記得. 潙山問仰山,‘ 妙淨明心子, 作麽生會?’ 仰山云,‘ 山
河大地, 日月星辰.’ 潙山云, ‘汝只得其事.’ 仰山云, ‘和尙適
來, 問什麽?’ 潙山云,‘ 妙淨明心.’ 仰山云,‘ 喚作事得麽?’ 潙
山云,‘ 如是, 如是!’”
162)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립적 특징. 다른 것과 공유하는 특징인 공상(共
     相)과 대칭된다.
163) 이상은『圓覺經略疏』권상2 大39 p.540c23의 내용을 인용한 단락이다.
164)『大慧語錄』권21「示妙淨居士」大47 p.901a8 참조.
165) 4조 도신(道信)의 말.『景德傳燈錄』권4「牛頭法融傳」大51 p.227b1 참조
166)『潙山語錄』大47 p.579b19에 나오는 문답. 묘정명심(妙淨明心)은『楞嚴經』 
     권1 大19 p.109a6에 나오는 용어이다. 이 마음을 근본적인 이(理)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차별 현상인 사(事)를 대비시켜 궁극적으로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아
     니라는 취지로 유도하고 있는 문답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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