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어록
● 조사선祖師禪
● 선(禪)과 교(敎)를 아울러 논함 禪敎通論
● 운문의 삼구에 대한 풀이 雲門三句釋
● 대양의 삼구에 대한 풀이 大陽三句釋
● 나옹화상의 삼구와 삼전어에 대한 풀이 懶翁和尙三句與三轉語釋
● 석옥노화상의 편지를 받고서
● 무심의 노래 無心歌
● 태고화상에게 붙이는 편지 寄太古和尙書
● 선선인에게 주는 편지 示禪禪人書
● 요선선인에게 붙이는 편지 寄示了禪禪人書
● 희심 사주에게 보내는 편지 示希諗社主書
● 내불당의 감주 장로 천호에게 붙이는 편지 寄內佛堂監主長老天浩書
● 이상공에게 붙이는 편지 示李相公書
● 임종게 臨終偈
● 조사선167)祖師禪
167) 祖師禪. 이 부분은 조사선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소재를 모아 백운선사가 간명
하게 평가를 붙인 형식의 글이다. 원론적인 교설에 의존하지 않고 소리와 색과
언어 등으로 종지를 구체화하고, 감각적 통로로 깨달음에 이르는 사례들을 중
심으로 다루고 있다.
대혜종고(大慧宗杲)의『종문무고』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168) “원오극근
(圜悟克勤)화상이 오조법연(五祖法演)화상을 시봉할 때, 뜻밖에 진제형(陳
提刑)169)이 사직하고 촉(蜀)으로 돌아오며 절을 지나는 길에 도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조가 물었다. ‘제형 당신은 소염(小艶)의 시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중 두 구절이 선지(禪旨)와 자못 가깝습니다. 곧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별다른 뜻은 없고, 다만 담 밖에 있는 낭군에게
목소리를 알리고자 할 뿐이라네.」170)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제형이 ‘예,
예.’ 하고 응답하자 오조가 말했다. ‘그래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원오가
물었다. ‘화상께서 제기한 소염의 시를 듣고 제형이 이해했습니까?’ ‘그는
다만 목소리의 뜻을 알았을 뿐이다.’171) ‘본래의 글에 「다만 담 밖에 있는
낭군에게 목소리를 알리고자 할 뿐이다.」라고 되어 있고, 그도 목소리의 뜻
을 알았다고 했는데 어째서 틀렸다고 하십니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172) 니!173)’ 이에 원오가 홀연히 크게 깨닫
고 불현듯 밖으로 나갔다가 닭이 난간에 날아올라가 날개를 퍼덕이며 우는
소리를 듣고 다시 스스로 생각했다. ‘이것이 어찌 소리가 아니란 말인가?’
마침내 향을 소매에 넣고 방장으로 들어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전했다.
오조가 ‘불조(佛祖)의 일대사는 보잘것없는 근기와 열등한 지혜로는 이를
수 없다. 내가 너의 기쁨을 도왔구나.’라 말하고, 다시 절 안의 노스님들에
게 ‘저의 시자가 조사선을 참구하여 터득했습니다.’라고 두루 알렸다.”
大慧和尙宗門武庫云,“ 圓悟勤和尙, 侍立五祖演和尙, 偶陳
提刑解印還蜀, 過山中問道, 因語話次. 祖問曰,‘ 提刑曾讀少
炎174)詩否? 有兩句頗近禪旨. 曰頻呼小玉非他事, 只要丹郞認
得聲.’ 提刑應諾諾. 祖曰, ‘且字175)細看.’ 圓悟問曰, ‘聞和尙
擧小炎詩, 提刑會麽?’ 祖曰, ‘他只認得聲去.’ 圓悟曰, ‘本文
曰,「 只要丹郞認得聲.」, 他旣認得聲, 爲什麽却不是?’ 祖曰,
‘如何是祖師西來意? 庭前柏樹子. 聻!’ 圓悟忽然大悟, 遽出
去, 見雞飛上欄干, 鼓翼而鳴, 復自謂曰, ‘此豈不是聲?’ 遂袖
香入室, 通所悟. 祖曰, ‘佛祖大事, 非小根劣智, 所能造詣. 吾
助汝喜.’ 復徧請山中耆舊曰, ‘我侍者, 叅得祖師禪也.’”
168)『宗門武庫』大47 p.946a25 이하의 내용.
169) 제형은 지방에서 형벌이나 옥사(獄舍)의 일을 맡아 보던 관직명이다. 송나라 때
의 관직명으로서 제점형옥사(提點刑獄司)를 줄여서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법무부 부장과 같은 직위이다.
170) 양귀비(楊貴妃)가 담 밖에 있는 애인 안록산(安祿山)에게 자신의 목소리라도 전
하기 위해 “소옥아, 소옥아!” 하고 몸종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다. 소옥이 달려
가 보지만 매번 별일이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조사선에서 쓰는 언어의 본질
적 기능 또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가 지니는 전략적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비
유이다. 화두의 말뜻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소옥이 양귀비의 부름에 속은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화두는 어떤 분별도 용납되지 않고, 지시하는 어떤 뜻도
담기지 않은 경계로 유도하는 말이 될 때 비로소 활구(活句)로서의 효용을 얻게
된다. 소염의 시 나머지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저 큰 저택의 아름다운 정취 화
폭에 담지 못하니, 낭군 없는 허전한 방 깊은 곳에서 슬픈 정감을 펼치노라.”(一
段風光畵不成, 洞房深處暢予情.)
171) 진제형은 그 목소리가 지시하는 어떤 숨은 내용이 진짜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뜻. 곧 그 목소리가 소옥을 부른 것이 아니라 안록산에게 들리도록 했다는 뜻이
고, 제형은 이렇게 알았으나 오해라는 말이다. 선지(禪旨)의 비유로 볼 때 그 목
소리는 안록산에게 전한 것도 아니고 그 밖의 어떤 지시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172) 조주종심(趙州從諗)의 문답. 『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 卍118 p.307a17 참조.
173) 聻. 따져서 묻거나 앞의 말을 강조하고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끝 부분에 여
운으로 남기는 소리.
174) ‘少炎’은 ‘小艶’이 옳다.
175) ‘字’는 ‘子’가 옳다.
또한176) 향엄지한(香嚴智閑)이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 지난해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건만, 올
해는 송곳조차 없구나.”라고 하자 앙산이 말했다. “여래선(如來禪)은 사형
이 이해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라고 비
판했다. 향엄이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박거려 그것을
보이노라. 만일 누군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특별히 그를 사미(沙
彌)177)라고 부르리라.”라는 게송 한 수를 들려주자 앙산이 말했다. “기쁘다!
사형이 조사선을 이해했구나.”
又香嚴云,“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有卓錐之地,
今年錐也無.” 仰山云, “如來禪, 卽許師兄會. 祖師禪, 未夢見
在.” 嚴云, “我有一機, 瞬目示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仰山
云,“ 且喜! 師兄會祖師禪.”
176) 이하는『景德傳燈錄』권11「仰山慧寂傳」大51 p.283b3,『潙山語錄』大47
p.580b28 등에 수록되어 있다. 초의의순(草衣意詢 1786~1866)은 『禪門四
辨漫語』「二禪來義」韓10 p.827a2에서 “이 문답이 두 가지 선의 명칭과 뜻
을 분명하게 나눈 유래이다.”(此, 二禪所以分曉名義之始也.)라고 평가했다.
『潙山語錄』 p.580c4에 “현각(玄覺)은 ‘말해 보라! 여래선과 조사선은 나눌
수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가?’라고 말했고, 장경혜릉(長慶慧稜)은 ‘한꺼번에
눌러앉아 버려라!’라고 했다.”(玄覺云, ‘且道! 如來禪與祖師禪, 是分不分?’ 長
慶稜云, ‘一時坐却!’)라고 했는데, 이러한 평가는 이 내용 자체를 하나의 화두
로 수용하면서 여래선과 조사선도 화두의 소재로 활용했을 뿐 의미상으로 구
분하지 않은 것이다.
177) 7세 이상 20세 미만으로서 출가하여 10계(戒)를 받았지만 아직 구족계(具足戒)
를 받지 못하여 정식으로 비구(比丘)가 되지 못한 남자.
또한 보지공(寶誌公)178)은 “대도(大道)는 항상 눈앞에 있다. 비록 눈앞에
있지만 보기 어렵다. 만약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한다면, 색과 소리와
언어를 떠나지 마라.”179)라고 했다. 또한 선덕(先德)은 “색과 소리도 떠나지
않은 채 부처님의 신통력을 보라.”180)고 했고, 또한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는가? 이 말소리가 바로 그것이다.”181)라고 했다. 이러한 언구들을 살펴
보면 곧 그것이 선지(禪旨)이다. 조사선은 색과 소리와 언어를 떠나지 않는
다. 뜰 앞의 잣나무182)·삼 세 근183)·마른 똥막대기184)·신령 앞에 놓인 술
받침대!185) 본분을 깨우친 종사들이 본분에 근거하여 답한 이들 화두는 색
과 소리를 갖춘 언어이니, 이것이 바로 조사선이다. 그러므로 “말을 하려거
든 한 구절에 세 구절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학인
이 도오(道吾)선사에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어떤 것입니까?”라
고 묻자 “강남의 이삼월 풍경을 아득히 기억하자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로웠다네.”186)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또한 어떤 학인이 “달마대
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음에 “나른한 봄날 강산은 아
름답고, 봄바람에 화초는 향기롭다.”187)라고 대답했고, 또 “산꽃이 피니 비
단과 같고, 계곡물은 쪽빛보다 푸르다.”188)라고 했다. 이러한 언구들은 모
두 조사선에서 제시하는 색과 소리를 갖춘 언어인 것이다.
又寶誌公云,“ 大道常在目前. 雖在目前難覩. 若欲悟道眞體,
不離色聲言語.” 又先德云, “亦不離色聲, 見佛神通力.” 又云,
“欲知佛去處? 只這語聲是.” 此等言句, 看之則禪旨. 祖師禪,
不離色聲言語. 庭前柏樹子·麻三斤·乾屎橛·神前酒臺盤!
本分宗師, 本分答話, 具色聲言語, 正是祖師禪也. 故云,“ 凡
欲下語, 一句具三句.” 如僧問道吾, “如何是祖師西來意?” 答
曰,“ 遙憶江南三二月, 鷓鴣啼處百花香.” 又僧問,“ 如何是祖
師西來意?” 答云, “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 又云, “山花開
似錦, 澗水碧於藍.” 此等言句, 皆是祖師禪, 具色聲言語.
178) 497~569. 남조(南朝) 때 선사. 보공(寶公)·지공(誌公)화상이라고도 하며, 寶志·
保志·保誌 등으로도 표기한다.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보였다. 달마대사가 양나
라 무제(武帝)와 기연이 계합하지 않아 떠난 뒤에, 무제에게 달마대사는 불심인
(佛心印)을 전하러 온 관음성인(觀音聖人)이라고 일러주었다는 인연이 전한다.
179)『景德傳燈錄』권29「梁寶誌和尙大乘讚」大51 p.449b1 참조.
180) 80권본 『華嚴經』 권23 大10 p.121c14 참조.
181) 부대사(傅大士:善慧大士)의 말이다. 『善慧大士錄』 卍120 p.24a14 참조.
“현사사비(玄沙師備)가 말했다. ‘대단한 부대사여! 다만 밝디밝고 신령한 마
음[昭昭靈靈]이 있다고 오인하였을 뿐이로다.’ 설두중현(雪竇重顯)이 핵심을
집어내어 말한다. ‘현사는 풀을 쳐서 뱀을 잠에서 깨우려 한 것이다.’”(『雪竇
語錄』권1 大47 p.671b27. 玄沙云, ‘大小傅大士! 只認得箇昭昭靈靈.’ 師拈云,
‘玄沙也是打草蛇驚.’) 현사는 사람들이 부대사의 말을 듣고 ‘말소리가 곧 부처’
라는 식으로 일면적으로 생각할 것을 우려하여 ‘신령한 마음이 있다’고 집착하
는 생각을 깨우쳐 주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소리 자체가 부처 또는 마음
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부대사의 뜻이 아니라는 경계이다. 설두도 ‘말소리’를
‘부처가 간 곳’으로 귀착시키는 일면적 방식을 다시 부각시켜 부정함으로써 그
몽상에서 사람들을 깨워준 것이다.
182) 조주종심(趙州從諗)의 화두. “그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
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
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卍
118 p.307a17. 時, 有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學云, ‘和
尙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云,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
子.’)
183)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의 화두. “‘부처란 무엇입니까?’ ‘삼 세 근이니라.’”
(『洞山守初語錄』 古尊宿語錄38 卍118 p.646a13. 問, ‘如何是佛?’ 師云, ‘麻三
斤.’)
184) 운문문언(雲門文偃)의 화두. “운문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
까?’ ‘마른 똥막대기!’”(『無門關』 21則 大48 p.295c6. 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橛!’)『雲門廣錄』권상 大47 p.549b7 참조.
185) 경조현자(京兆蜆子)의 화두. “화엄휴정(華嚴休靜)이 현자선사를 꼭 붙들고 물
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 현자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신
령 앞에 놓인 술받침대이다.’”(『景德傳燈錄』권17「京兆蜆子傳」大51 p.338b3.
靜把住問曰, ‘如何是祖師西來意?’ 師遽答曰, ‘神前酒臺盤.’) 『禪門拈頌說話』
922則 韓5 p.666a24에는 신령 앞에 바친 술받침대에 대하여 “어떤 맛도 없이
대답한 말”(無味答話也)이라 하였는데, 몰자미(沒滋味)한 화두라는 뜻이다.
186) 전거를 알 수 없다. 풍혈연소(風穴延沼)의 말로 알려져 있으며, 앞 구절은 “늘 강
남의 3월 풍경을 기억한다”(長憶江南三月裏)라는 표현이 보통이다.『密菴語錄』
大47 p.969a1,『虛堂語錄』권2 大47 p.999a7 등 참조.
187)『金山退菴道奇禪師語』續古尊宿語要6 卍119 p.158b14,『如淨語錄』권상 大48
p.122b2,『介石智朋語錄』卍121 p.387b10,『五燈全書』권49「雪巖祖欽章」
卍141 p.94a18 등에 나오지만, 본 어록과 같은 문답 형식은 아니다.
188) 대룡(大龍)의 화두. “색신(色身)은 부서져 없어지는데 견고한 법신(法身)이란 어
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碧巖錄』 82則 大48 p.208a26 참조.
종사들 중 어떤 이들은 언어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치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조주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아침은 먹었느냐?”
“먹었습니다.” “발우나 씻어라!” 이 말에 그 학인은 깨달았다.189) 또한 운문
문언(雲門文偃)이 동산수초(洞山守初)에게 물었다. “요즘 어디 있다가 왔
는가?” “강서의 사도(査渡)에서 왔습니다.” “하안거는 어디서 보냈는가?”
“호남의 보자사(普慈寺)에 있었습니다.” “언제 그곳을 떠났는가?” “8월 25일
입니다.” “이 밥자루야!190) 강서로 호남으로 그렇게 돌아다녔단 말이냐!” 동
산이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191)
宗師家, 或以言語, 示法示人者. 如趙州問僧, “喫粥了未?” 僧
云, “喫粥了.” 州云, “洗鉢盂去!” 其僧悟去. 又雲門問洞山,
“近離什麽處?” 山云, “査渡.” 又問, “夏在什麽處?” 山云,
“湖南普慈.” 又問, “幾時離彼中.” 山云, “八月二十五.” 門云,
“飯袋子! 江西湖南, 又恁麽去也!” 山於言下大悟.
189)『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卍118 p.321a18 참조.
190) 반대자(飯袋子). 자신의 본분을 모르고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수행자라는 비판
의 말.
191)『景德傳燈錄』권23「洞山守初傳」大51 p.389b13,『雲門廣錄』권하 古尊宿語錄18
卍118 p.388b4, 『洞山守初語錄』 古尊宿語錄38 卍118 p.658a9 등 참조.
어떤 이들은 말소리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다. 현사사비(玄
沙師備)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느냐?” “들립
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라!”192) 또한 경청도부(鏡淸道怤)가 어떤 학인에
게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가 나느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중생이 전도되어 자신을 잃어버리고 밖의 대상을 좇는구나.”193)
或以言聲, 示法示人者. 玄沙問僧,“ 還聞偃溪水聲麽?” 僧云,
“聞.” 沙云,“ 從這裏入!” 又鏡淸問僧,“ 門外是什麽聲?” 僧
云,“ 雨滴聲.” 師云,“ 衆生顚倒, 迷己逐物.”
192)『景德傳燈錄』권18「玄沙師備傳」大51 p.347a29,『玄沙廣錄』권상 卍126
p.358b18 등에 따르면, 질문한 학인은 경청도부(鏡淸道怤)이다.
193)『景德傳燈錄』권1 「鏡淸道怤傳」大51 p.349c12,『碧巖錄』46則 大48 p.
182b19등 참조.
어떤 이들은 자연의 소리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다. 까마귀
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194) 나귀가 울고 개가 짖는 것195)이 모두 여래께
서 큰 법륜을 굴리시는 소리이다. 또한 제비는 실상을 깊이 이야기하고196)
꾀꼬리는 반야를 잘 설한다. 또한 “두견197)이 하늘까지 닿도록 울고도, 피
를 토하며 밤새도록 또 우는구나. 원통문(圓通門)198)이 활짝 열렸거늘, 무
슨 까닭에 하늘과 땅 사이만큼 떨어졌을까?”199)라고 한다.
或以聲, 示法示人者. 鴉鳴鵲噪, 驢鳴犬吠, 皆是如來轉大法
輪;又鷰子深談實相, 黃鶯善說般若;又蜀魄連霄呌, 血流終
夜啼. 圓通門大啓, 何事隔雲泥?
194) “술집들과 어물전 하나하나가 보배가 있는 장소요, 까마귀 울음소리와 까치 지
저귐 하나하나가 진리를 전하는 소리이다.”(『續傳燈錄』권25「香山道淵傳」
大51 p.641b16. 酒市魚行, 頭頭寶所;鴉鳴鵲噪, 一一妙音.)
195) “하루 어느 시각에나 눈에 들어오고 귓전에 울리는 것들, 종소리와 북소리 그리
고 나귀가 울고 개가 짖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본분의 소식이 아닌 것이 없다.”
(『圜悟語錄』권12 大47 p.768a25. 二六時中, 眼裏耳裏, 乃至鐘鳴鼓響, 驢鳴犬
吠, 無非這箇消息.)
196) 현사사비(玄沙師備)의 말. “법좌에 올라앉아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실
상을 깊이 이야기하고, 법의 요체를 잘 설하는구나.’라고 한 뒤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玄沙廣錄』 권하 卍126 p.388a3. 上堂, 聞燕子叫云, ‘深談實相,
善說法要.’ 便下座.)
197) 촉백(蜀魄). “촉백은 두견[杜宇]이다. 『화양국지』에 ‘두견이라는 새는 그 크기가
까치만 하고, 그 소리는 슬퍼서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하다.’라고 하였다.”(『祖庭
事苑』권5 卍113 p.140a1. 蜀魄, 卽杜宇也. 華陽國志云, ‘鳥有名杜宇者, 其大如鵲,
其聲哀而吻有血.’)
198) 걸림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낱낱의 존재들이 막힘없이 서로 통하는 세계.
199) 천의의회(天衣義懷)의 게송.『嘉泰普燈錄』권2 卍137 p.59a18,『續傳燈錄』 권6
大51 p.501c26 참조. ‘血流’는 ‘鵽鳭’ 또는 ‘鵽鳩’로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형색과 소리 등으로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다. 건
추를 잡거나 불자를 세우고, 손가락을 퉁기거나 눈썹을 찡그리며, 방(棒)
을 휘두르거나 할(喝)을 내지르는 등 이런 갖가지 작용이 모두 조사선이다.
그러므로 “소리를 들을 때가 깨달을 순간이며, 색을 볼 때가 깨달을 순간이
다.”라고 하는 것이다. 영운지근(靈雲志勤)이 색을 보고 깨달은 것200)과 향
엄지한(香嚴智閑)이 소리를 듣고 깨달은 것,201) 그리고 운문문언(雲門文偃)
이 다리에 고통을 받고 깨달은 것202)과 현사시비(玄沙師備)가 발가락에 통
증을 느끼고 깨달은 것203) 등의 기연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자면 결국 하나
(조사선)인 것이다.
或以色聲, 示法示人者. 拈搥竪拂, 彈指揚眉, 行棒下喝, 種種
作用, 皆是祖師禪. 故云, “聞聲時證時, 見色時證時.” 則靈雲
從色悟入, 香嚴從聲悟入, 乃至雲門痛脚, 玄沙痛足, 良遂稱名
一也.
200) “영운이 위산 문하에 있을 때 복숭아꽃을 보고 도를 깨우치고는 게송을 지었다.
‘30년 동안 검객을 찾아다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잎이 떨어지고 다시 새 가지가
돋았던가! 복숭아꽃을 한 번 보고 알아차린 다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더 이
상 의심이 남아 있지 않노라.’”(『潙山語錄』大47 p.580c14. 靈雲, 初在潙山,
因見桃花悟道, 有偈云, ‘三十年來尋劍客, 幾回落葉又抽枝! 自從一見桃華後, 直
至如今更不 疑.’)
201) “어느 날 산에서 초목을 베다가 던진 돌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쳐 나는 소리를
듣고는 문득 웃는 순간 확연히 깨달았다.”(『景德傳燈錄』권11「香嚴智閑傳」
大51 p.284a9. 一日, 因山中芟除草木, 以瓦礫擊竹作聲, 俄失笑間, 廓然省悟.)
202) “목주(睦州)는 평소 학인을 대할 때에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바로 멱살을 움켜
쥐고는 ‘말해 보라! 말해 보라!’고 하였으며 머뭇머뭇하며 말하지 못하면 바로
밀쳐내면서 ‘진나라의 탁력찬 같은 놈이로다.’라고 하였다. 운문이 목주를 만나
러간 지 세 차례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목주가 ‘누구냐?’고
물었다. ‘문언(文偃)입니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목주는 운문의 멱살
을 움켜쥐고는 ‘말해 보라! 말해 보라!’라고 하였다. 운문이 머뭇거리자 곧바로
문 밖으로 밀쳐버렸다. (운문이 미처 발을 떼어 다 나오지 못하여) 한쪽 발이 문지
방 안쪽에 있는데 목주가 문을 급하게 닫는 바람에 운문의 다리가 문틈에 끼어
부러지고 말았다. 운문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홀연 크게 깨
쳤다.”(『碧巖錄』 6則 大48 p.145c16. 尋常接人, 纔跨門便搊住云, ‘道! 道!’ 擬
議不來, 便推出云, ‘秦時轢鑽.’ 雲門凡去見, 至第三回. 纔敲門, 州云, ‘誰?’ 門云,
‘文偃.’纔開門便跳入, 州搊住云, ‘道! 道!’ 門擬議, 便被推出門, 一足在門閫內,
被州急合門, 拶折雲門脚, 門忍痛作聲, 忽然大悟.)
203)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현사는 거처하던 산을 떠나지 않았고 보수(保
壽)는 강을 건너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현사는 떠나다가 넘어져 발가
락을 다치고는 한탄하며 생각했다. ‘이 몸은 실재하지 않는 것인데 고통이 어디
서 온단 말인가? 이 몸과 이 고통은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만두자, 그
만둬! 달마대사는 동토(중국)에 오지 않았고 2조 혜가(慧可)도 서천(인도)에 가
지 않았다.’ 마침내 가던 길에서 돌아와 『능엄경』을 보다가 깨달았다.”(『從
容錄』81則 「評唱」大48 p.279b19. 世傳, 玄沙不出嶺, 保壽不渡河. 因蹶傷足
指, 歎曰, ‘是身非有, 痛自何來? 是身是苦, 畢竟無生. 休休! 達磨不來東土, 二祖
不往西天.’ 遂廻, 復因閱楞嚴而發明.) 『正法眼藏』 卍118 p.103a16 참조.
● 선(禪)과 교(敎)를 아울러 논함 禪敎通論
우리의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불께서 마지막에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
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백만억의 대중들이 모두 어찌할 줄 몰라 하였으나
오로지 대가섭만은 활짝 웃어 보였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
을 꿰뚫어 보는 눈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이 있으니 그것을 대가섭에게 당
부하여 맡기노라.”204) 또한 “(부처님께서) 교의 바닷물은 아난의 입에 쏟아
부었고, 선의 등불은 가섭의 마음에 붙였다.”205)라고 했다. 먼저 가섭에게
전하여 초조로 삼았고, 이로부터 인도의 28대 조사206)와 중국의 6대 조사
가 대대로 전승하여 등불과 등불이 이어졌으니 이들 모두 석가여래의 제자
인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오로지 본사의 말씀으로써 무리들에게 가르
침을 주어 그 말씀을 근거로 도를 증명하고 법을 드러내어 종지를 밝힐 뿐
밖으로 내달리면서 구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뜻을 직접 전하고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서 융성하게 하면 조사의 지위로 들어가더라도 교를 기준으로
삼을 것이니 어찌 선과 교의 차별이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은 마
음을 근본으로 삼고, 정해진 문이 없는 것207)을 법문으로 삼으니’208)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마음
과 말씀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하나의 부처가 다른 부처에게 직접
건네준 것도 이 종지이며, 하나의 조사가 다른 조사에게 전해준 것도 이 마
음이다.’209) 각자 다른 이름과 구절을 따르기에 동일하지 않은 듯이 보이지
만, 선과 교는 명칭만 다를 뿐 본질은 같으므로 본래 평등하다고 알아야 한
다. 왜 그런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210)은 근기에 적절하게 교를 설하
므로 권·실(權實)과 돈·점(頓漸)211)의 차별을 나누고, 궁극의 경지에 통달
한 사람212)은 이치와 하나가 되어 말에 대한 집착을 잊으니 어찌 그에게 부
처와 조사 그리고 선과 교의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입에 올리면 교
라 하고, 마음에 전하면 선이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근원에 통달
한 자에게는 선도 없고 교도 없지만, 그 갈래를 나누는 자는 선이나 교 중
어느 한편에 집착한다. 몰라서 어두우면 양편 모두 잃고, 어느 한편에 집착
하면 양편이 다 상한다. 선과 교를 융합하여 서로 통하게 하면 통하지 못할
것이 없고, 서로 소통시켜 바로잡으면 바로잡지 못할 것이 없으니, 바르거
나 바르지 못한 차이는 오로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다만 한 찰나에
기틀을 돌리기만 한다면 자연히 만법이 모두 사라져 선과 교의 차별도 전
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사문(佛事門)213) 중에서 방편을 베푸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납승 문하의 입장에 따른다면, 본래 부처도 없고 중생
도 없으며 명(名)도 없고 상(相)도 없어서, 아무 걸림도 없고 드넓게 펼쳐
져 생각과 말의 한계를 훌쩍 넘어설 것이거늘, 무엇을 가지고 선이라 할 것
이며 무엇을 가지고 교라 할 것인가?
我本師釋迦牟尼佛, 於末後靈山會上, 拈花示衆, 百萬億大衆,
悉皆罔措, 唯大迦葉, 破顔微咲.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
槃妙心, 付囑摩訶大迦葉.” 又云,“ 敎海瀉阿難之口, 禪燈點迦
葉之心.” 首傳迦葉, 以爲初祖, 以此西天四七, 東震二三, 轉
轉相承, 燈燈相繼, 皆是釋迦如來弟子. 迄至于今, 唯以本師之
語, 訓示徒衆, 因言證道, 見法明宗, 不外馳求. 親傳佛意, 紹
隆佛種, 卽入祖位, 以敎爲指南, 豈有禪敎之別! 然,‘ 佛語心
爲宗, 無門爲法門’, 則敎是佛語, 禪是佛意. 然, 諸佛心口, 必
不相違則‘佛佛手授, 受斯旨, 祖祖相傳, 傳此心.’ 各隨名句,
似有差殊, 當知, 禪敎名異體同, 本來平等. 平等214)何故? 至
人隨機說敎, 則分權實頓漸之殊;達士契理忘言, 則豈有佛祖
禪敎之異! 故云, “登之於口, 謂之敎;傳之於心, 謂之禪.” 達
其源者, 無禪無敎;列其派者, 禪敎各執. 昧之則皆失, 執之則
兩傷. 融而通之, 則無不通;決而正之, 則無不正, 正邪唯在人
焉. 但得一念廻機, 自然萬法俱泯矣, 了無禪敎之別. 然, 此是
佛事門中施設. 若據衲僧門下, 本來無佛無衆生, 無名無相, 蕩
蕩焉恢恢焉, 逈出思議之表, 喚什麽作禪敎也?
204) 주석152) 참조.
205)『禪門寶藏錄』「序文」韓6 p.469c4 참조.
206) 가섭을 초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보리달마에 이르기까지 28대 조사가 있었
다는 설은 801년(정원17) 성립된 선종 최초의 전등록『寶林傳』에서 완성되었고,
그 뒤의 전등록들도 대체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207) 구체적인 상황과 근기에 따라 교설을 달리하는 방편문(方便門)을 가리킨다.
208)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말.『景德傳燈錄』권6「馬祖道一傳」大51 p.246a8에
『楞伽經』의 글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4권본 『楞伽經』 전체가
「一切佛語心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확하게 이와 일치하는 구절은 없다.
그래서 대혜종고(大慧宗杲)는 “이 두 구절은 모두 마조가 경의 근본 취지를
가리킨 말이며 경의 말 자체는 아니다.”(『正法眼藏』 권1하 卍118 p.35b1.
此二句, 皆馬祖指經大旨, 非經語也.)라고 했던 것이다.
209)『宗鏡錄』권1 大48 p.417c2 참조.
210) 교(敎)의 본질을 꿰뚫은 사람.
211) 권(權)은 상대방의 근기에 맞추어 시설하는 방편, 실(實)은 궁극적인 불변의 진
실을 말한다. 돈점(頓漸)은 돈속(頓速)과 점차(漸次)라는 뜻이며, 돈오점수(頓悟
漸修)의 줄임말로도 쓰인다.
212) 선(禪)의 종지를 체득한 사람.
213) 불법을 펼치기 위하여 다양한 차별의 방편을 베푸는 입장. 반면 어떤 분별도 허
용하지 않는 무차별의 궁극적 경지는 실제이지(實際理地)라 한다. “가령 여러
선문의 선사들은 ‘육도만행을 불법으로 삼는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은 진리
를 장엄하는 문이며 불법을 펼치기 위한 문에 불과할 뿐 불법 자체는 아니다.’라
고 말한다.”(『臨濟語錄』大47 p.502a16. 秖如諸方說, ‘六度萬行, 以爲佛法.’
我道, ‘是莊嚴門, 佛事門, 非是佛法.’);“불조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이지는 본
래 언어의 차별된 표현을 벗어나 있다.’ 그러나 불사문 중에서 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면 비록 유위(有爲)는 아니지만 또한 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天童遺落錄序』大48 p.133b27. 夫佛祖道, ‘實際理地, 本離言語相.’ 然佛事
門中, 爲物垂慈, 則雖非有爲, 又非無語.);“실제이지에서는 하나의 티끌도 용
납하지 않지만, 불사문에서는 하나의 법도 버리지 않는다.”(『天聖廣燈錄』
권19「廬山護國章」卍135 p.788b3. 實際理地, 不受一塵;佛事門中, 不捨一法.)
214) ‘平等’은 衍文이다.
● 운문의 삼구에 대한 풀이215) 雲門三句釋
215) 엄밀히 말하면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제자 덕산연밀(德山緣密)이 제시
한 삼구에 대한 풀이이다. 삼구는 삼종어(三種語)라고도 하며, 선의 종지를 세
구절의 시로 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 운문삼구의 각 구절에 백운선사가 또
하나의 시를 붙여 그 뜻을 해석한 것이다. 운문은 ① 하늘과 땅 전체를 감싸서
덮고[函蓋乾坤], ② 한눈에 핵심을 헤아리며[目機銖兩], ③ 모든 인연과 교섭하지
않는다[不涉萬緣] 등의 세 구절의 뜻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문제로 제시했
다. 이에 대해 덕산연밀은 자신의 안목에 입각하여 함개건곤(函蓋乾坤)·절단중
류(截斷衆流)·수파축랑(隨波逐浪) 등의 삼구로 바꾸어 확정했다. 첫 번째 구절
은 진리 그 자체, 두 번째 구절은 번뇌망상을 끊는 것, 세 번째 구절은 구체적인
현상의 조건에 알맞게 펼치는 적절하고 자유자재한 활용을 나타낸다.『人天眼
目』권2「三句條」大48 p.312a7 참조.
하늘과 땅 전체를 감싸서 덮는 구절: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이(理)
와 사(事)가 원만하게 융합한다.
번뇌망상의 흐름을 끊어 없애는 구절:티끌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조짐과 자취가 전혀 없다.
물결의 흐름을 따르고 쫓아가는 구절:자신의 본성을 고수하지 않고, 상
황과 조건[緣]에 따라 성립한다.
函盖乾坤句:普天普地 理事圓融
絶斷衆流句:不受一塵 了無朕迹
隨波逐浪句:不守自性 隨緣成立
● 대양의 삼구에 대한 풀이216) 大陽三句釋
216) 대양경현(大陽警玄 943~1027)이 세 구절로 요약한 종지에 대한 풀이. 대양삼구
는 명안삼구(明安三句)라고도 한다.『五燈會元』권14 卍138 p.522b1 참조.
평상시에 어떤 생성도 없는 구절:평상심이 도이니,217) 생성도 없고 소멸
도 없다.
미묘하고 깊고 사사로움이 없는 구절:미묘한 법은 본래 사사롭게 치우
침이 없으나, 그것이 정황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感應]은 생각하여
알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본체가 끝이 없이 밝은 구절:신령하고 밝은 본체는 텅 비고 고요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용은 끝이 없다.
平常無生句:平常心是道 無生亦無滅
妙玄無私句:妙法本無私 感應難思議
體明無盡句:靈明體空寂 恒沙用無盡
217) “평상심이 도이다.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조작이 없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
별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리는 마음도 없고, 완전히 사라졌다[斷]거나 영원히
변함이 없다[常]거나 하는 관념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
다.”(『馬祖語錄』卍119 p.812a7.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
● 나옹화상의 삼구와 삼전어에 대한 풀이218)
懶翁和尙三句與三轉語釋
218) 나옹의 삼구는 불문(佛門)에 입문하여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를 세 단계로 나눈
것이며, 분양선소(汾陽善昭)가 학인의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한 구절[入門
句·門裏句·當門句·出門句·門外句] 중 세 가지를 선별한 것이다. 백운선사는 이
삼구에 대하여 조동종의 공훈오위(功勳五位:向·奉·功·共功·功功) 중 향(向)·
봉(奉)·공공(共功) 등 세 가지를 선별하여 활용했다.『人天眼目』권6「汾陽五門
句」大48 p.329a10 참조. 삼전어란 깨달음의 결정적 전기가 되는 세 가지 뜻을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밝힌 것이며, 이에 대한 백운선사의 두 가지 풀이가 있다.
懶翁語錄「入門三句」참조.
삼구
입문구:불문으로 향할 때[向時] 좌측에도 떨어지지 않고 우측으로도 기
울지 않으며 정면을 향해 들어간다.
당문구:불법을 받들어 행할 때[奉時] 기틀[機]과 지혜[智]가 상응하여
겹겹의 심오한 이치로 깊이 들어간다.
문리구:불법을 깨닫고 그것을 활용할 때[共功時] 마땅히 주인 중의 주
인을 깨달아 오랫동안 문밖으로 나오지 않는다.219)
入門句:向時, 不落左不落右, 正面而入.
當門句:奉時, 機智相應, 深入重玄.
門裏句:共功時, 當證主中主, 長年不出戶.
219) “동산(洞山)이 물었다. ‘주인 중의 주인이란 어떤 것입니까?’ 용산(龍山)이 대답
했다. ‘오랫동안 문밖으로 나오지 않는다.’”(『洞山語錄』大47 p.508c26. 師曰,
‘如何是主中主?’ 山曰, ‘長年不出戶.’)
삼전어1
작은 산들의 기세는 어째서 큰 산 가에서 그치는가?:최상의 법왕(法王)
은 가장 높고 두드러지니, 마치 뭇 봉우리의 기세가 큰 산 가에서 그
치는 것과 같다.
가는 물줄기들은 어째서 큰물을 이루는가?:원만한 깨달음의 청정한 성
품은 중생의 다양한 종류에 따라 차별되게 응하니, 마치 여러 물줄
기가 바다에 이르러 큰물을 이루는 것과 같다.
밥은 어째서 흰쌀로 만들어지는가?:심성은 오염되지 않고 본래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마치 흰밥이 원래 흰쌀에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山何岳邊止:無上法王最高勝 如羣峰勢岳邊止
水何到成渠:圓覺淨性隨類應 如濕流海到成渠
飯何白米造:心性無染本圓成 如白飯元來米造
삼전어2
법왕의 법령220)은 가장 높고 두드러지니, 마치 온갖 봉우리의 기세가 큰
산 가에 이르러 그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임금의 은혜는 바다와 같이 드넓으니, 땅 밑을 흐르던 지류가
바다에 이르러 큰물을 이루는 것과 같다.
금세에 이르러 희황221)의 치세를 만나니, 구로222)보다 많은 밥을 흰쌀로
만드노라.
法王法令最高勝 如千峯勢岳邊止
聖君德澤如大海 潛流過海到成渠
當今世到羲皇上 飯勝俱盧白米造
220) 법왕인 부처님께서 지엄한 법령과 같이 내리는 근본적인 진리. 언어와 행위로
드러내기 이전의 경계, 어떤 수단으로도 알 수 없는 경지, 한 치의 분별도 허용
하지 않는 조사선의 종지 등을 나타낸다. 문수백추(文殊白椎)의 화두와 관련되
는 용어이다. 부처님께서 사자좌에 오르자마자 문수보살이 건추를 울려 대중에
게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法王法如是)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
이 사자좌에서 내려오신 이야기(『碧巖錄』92則 大48 p.216b18)를 화두로 삼
은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사좌자에 오르시고 문수보살이 건추를 울려 대중에
게 알리니, 법왕이 내려주신 법령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늙어 꼬부라진 문
수보살이 억지로 머리를 내밀고 나와, 부처님을 등에 업고서 여전히 섬길 만하
다고 하니, 지금껏 천고의 세월 동안 시끄럽게들 재잘거리는구나.”(『佛眼語錄』
古尊宿語錄34 卍118 p.591b2. 世尊陞座, 文殊白槌, 法王法令若爲酬? 潦倒文殊
强出頭, 負累釋迦猶可事, 至今千古鬧啾啾.)
221) 羲皇.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복희는 삼황(三皇) 중 한 사람으로서 희황이
라 불린다. 8괘(卦)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또 그물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태평성대를 이끈 인물을 상징한다.
222) 俱盧. krośa, kosa의 줄인 음사어. 인도 고대의 척도. 구로사(俱盧舍)·구루사
(拘摟賖) 등으로 음사하고, 역성(譯聲)·명환(鳴喚) 등으로 의역한다. 소의 울음
소리 또는 북소리가 들리는 거리, 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수행처까
지의 거리를 가리킨다.
● 석옥노화상의 편지를 받고서
갑오년 6월 초나흘, 법안(法眼) 선인(禪人)223)이 하무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석옥화상의) 편지 한 통을 제자인 나224)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무릎을 꿇고 받아서 펼쳐 살펴보니, 나의 스승인 하무산 천호암의 석
옥노화상께서 열반에 들기 전에 세상과 작별하며 지은 게송이었다. 그 게
송은 다음과 같다. “백운을 사고 맑은 바람은 팔았더니,225) 집안의 재산은
온통 흩어져 뼈가 시리도록 가난하구나. 한 칸의 띠풀집은 남겨 두었으니,
떠나려는 이 순간 병정동자226)에게 전해 주노라.”
甲午六月初四日, 禪人法眼, 自霞霧山, 航海而來, 授以一通書
予小師. 白雲跪而受, 披而覽, 乃吾師霞霧山天湖庵石屋老和
尙, 臨入涅槃辭世頌也. 頌曰,“白雲買了賣淸風, 散盡家私澈
骨窮. 留得一間茅草屋, 臨行付與丙丁童.”
223) 선수행자. 오로지 참선을 일로 삼는 수행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224) 여소사(予小師). ‘여’와 ‘소사’는 동격으로 쓰였다. 소사란 원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지만 아직 10하(夏)를 채우지 못한 수행자를 가리키는데, 뜻이 확장되어 ‘제
자’ 또는 자신을 겸손하게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스승으로부터 전해온
편지를 받는 입장이므로 제자라는 뜻과 동시에 자신을 낮추는 말로 쓴 것이다.
『南海寄歸內法傳』권3 大54 p.220a21,『大宋僧史略』권3 大54 p.251a29 등 참조.
225) 백운은 백운경한을, 맑은 바람 곧 청풍은 석옥청공을 나타낸다. 백운을 법을 이
은 제자로서 인정하고 자신은 세상을 뜬다는 암시이다.
226) 丙丁童子. 등화(燈火)를 담당하는 동자. 병·정은 오행(五行)상 각각 양화(陽火)
와 음화(陰火)에 속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여기서는 진리의 등불을 가지
고 어둠을 밝힐 제자라는 은유적 말로서 백운선사를 가리킨다.
제자인 내가 두 번 세 번 펼쳐 보며 그 뜻을 자세히 궁구해 보고 나니, 그
것은 선사227)께서 세상과 맺은 인연이 이미 끝나자 그것을 거두고 입적할
즈음에 한평생 쌓아 두었던 맑은 바람228)을 나에게 남긴 법게(法偈)에 전
송하여 붙였던 것이다. 아, 하늘이 나를 돕지 않으시는구나! 법의 깃발은
꺾이고 법의 대들보는 부러졌으며, 법의 바다는 마르고 법의 등불은 꺼졌
다. 이렇기는 하지만, 대중들이여! 이것은 선사께서 마지막으로 친밀하게
전하신 소식이다. 여러분, 정신을 바짝 차려라, 정신을 바짝 차려라! 대중
은 특별히 도모할 일이 없다. 나도 본래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으나229)
가섭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황면노자의 정법안장230)과 최상
의 법보가 오늘 자연스럽게 나에게 이르렀다.
予小師, 再三披閱, 審詳其義, 乃先師世緣旣畢, 收化歸寂之
際, 平生所薀之淸風, 傳付於我之法偈也. 噫, 天不祐我! 法幢
摧法樑折, 法海枯法燈滅. 然雖如是, 大衆! 此是先師末後密
付底消息. 諸仁者, 快着精彩, 快着精彩! 大衆不圖. 我本無
心, 有所希求, 自迦葉轉轉相承底, 黃面老子, 正法眼藏, 無上
法寶, 今日自然而至於我.
227) 先師. 입적한 스승을 올려 부르는 호칭.
228) 석옥청공의 청정한 선풍(禪風)을 말한다. 석옥의 게송에서 ‘백운을 샀다’라고 한
말은 백운선사를 제자로 받아들여 법을 전했던 사실을 암시한 것이고, ‘맑은 바
람을 팔았다’라고 한 말은 백운선사에게 청정한 자신의 선풍을 전한다는 뜻으
로 해석된다.
229)『法華經』「信解品」의 비유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릴 때 집을 나가 타향을 떠돌며
빈곤하게 지내던 아들이 부자인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본래 자신이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한 말이다. 모든 중생이 부처님
의 아들과 같아서 일승(一乘)의 법과 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다. “나
는 본래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나, 지금 이 보배 창고가 자연스럽게 다가
왔다.”(『法華經』권2 大9 p.17b16. 我本無心, 有所希求, 今此寶藏, 自然而至.”
230) 正法眼藏. 진리를 꿰뚫어 보는 눈. 선종의 초조 가섭이 부처님으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의 눈. ‘정법’은 최상의 진리, ‘안’은 그 정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눈, ‘장’
은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 줄여서 ‘정법안’이라고도 한다. 주석152) 참조.
그러나 나는 제자로서 자못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왜 그런가?
달마대사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다가 분양선사에게까지 전수되었을 때 분
양은 세 종류의 사자를 비유로 든 구절을 제시했다.231) “첫째는 종지도 넘
어서는 남달리 뛰어난 눈을 가진 사자이고, 둘째는 눈썹을 나란히 하고 같
은 길을 밟아 가는 사자이며, 셋째는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이 남을 모방만
할 뿐 진실하지 못한 사자이다.232) 종지도 넘어서는 남달리 뛰어난 눈을 가
진 학인의 경우, 그 견해가 스승을 뛰어넘으니 비로소 종지를 전수받을 자
격이 있으며,233) 이 자가 바로 종초(種草)234)인 것이다. 눈썹을 나란히 하
고 같은 길을 밟아가는 학인의 경우, 그 견해가 스승의 수준과 같아서 스승
의 덕을 반으로 깎아먹으니, 전수받을 자격이 없다.” 분양화상은 본래 순수
하고 바르며 큰 역량을 지니고 있어서 옛사람들도 “이와 같다”라고 그 말에
동감했던 것이다. 하물며 말법의 오탁악세(五濁惡世)235)에 열등한 근기와
얄팍한 지혜를 지닌,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진실하지 못한 학인들로서 허세
를 부리는 여우 도깨비와 같은 무리들236)이야 언급할 가치가 있겠는가! 나
와 같이 지혜롭지 못한 자 또한 어찌 최상의 법왕이 전하는 최상의 법보(法
寶)를 전수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내가 쌓은 덕과 행위를 헤아려보면 보여
줄 만한 덕도 없고 훌륭한 행위도 없다. 행위는 행위를 억지로 꾸미지 않는
행위여야 하고, 마음은 마음에 집착이 없는 마음이어야 하며, 상념은 상념
을 조작하지 않는 상념이어야 하고, 말은 말에 걸리지 않는 말이어야 하며,
수행은 수행에 얽매이지 않는 수행이 되어야 하거늘 내가 어찌 최상의 법
보를 전수받을 자격이 되겠는가! 법보의 은혜를 전수받기를 바라는 것은
그래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지만, 법왕의 진실한 아들로서 인가받
는 것은 옳지 않다.237)
余小師, 良難當克. 何也? 自達磨遞代相承, 傳至汾陽, 汾陽示
有三種師子句云,“ 一超宗異目底師子, 二齊肩238)並239)躅底師
子, 三影響不眞底師子. 若超宗異目者, 智過於師, 方堪傳授,
正爲種草也. 若齊肩並躅者, 智與師齊, 減師半德, 不堪傳授.”
汾陽和尙, 本自純正, 有大力量, 古人尙曰, “如是.” 況末法五
濁惡世, 劣機淺智, 如影響不眞底, 狐魑勢類! 如我無智者, 豈
堪傳授, 豈堪傳授,240) 無上法王, 無上法寶也! 忖我德行, 無
德可覽, 無行可觀. 行是無行行, 心是無心心, 念是無念念, 言
是無言言, 修是無修修, 豈堪傳授無上法寶也? 叨沐猶吾之納,
謬當眞子之職.241)
231) 이하, 법을 전수할 만한 자격이 있는 학인을 판별하는 기준에 대한 분양선소(汾
陽善昭)의 견해가 서술된다. 이 분양의 말은 부산법원(浮山法遠)에 의하여 알려
진 것이다.『人天眼目』권2 大48 p.307a5,『五家宗旨纂要』권상 卍114 p.524b17
등 참조.
232)『續燈正統』권35 卍144 p.900b14,『請益錄』59則 卍117 p.865b2,『緇門警訓』
권8 大48 p.1086a23 등에 실린 글과 같다. 다만『人天眼目』과『五家宗旨纂要』
등에는 “影響不眞”이 “影響音聞”으로 되어 있다. 그림자와 메아리가 본래의 형체
와 소리를 본뜨듯이 스승의 자취를 모방하여 그대로 답습하는 제자를 말한다. ‘音
聞’이란 ‘음성을 전파한다’는 말로 전수받은 내용을 답습하여 그대로 옮긴다는 뜻
이다.
233)『臨濟語錄』大47 p.506a5에 위산영우(潙山靈祐)의 말로 나온다.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으로 깎아먹는다. 견해가 스승을 넘어서야 스승의 법을
전수할 자격이 있다.”(見與師齊, 減師半德. 見過於師, 方堪傳授.) 『景德傳燈錄』
권16「巖頭全豁傳」大51 p.326b12 참조.
234) 동족(同族)·동류(同類) 등과 같은 말. ‘동일한 종자에서 자라난 풀’이라는 뜻으
로 여기서는 선종의 정통을 계승한 선사를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238) ‘齊肩’이 다른 문헌에는 ‘齊眉’로 되어 있다. 앞의 것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
이며, 뒤의 것은 눈썹을 나란히 한다는 말로 부부가 서로 평등하게 공경하거나
늙을 때까지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다. 스승과 제자의 경지가 비슷한 수준에 이
르렀다는 뜻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239) ‘並’은 ‘共’과 같다.
240) ‘豈堪傳授’라는 구절은 衍文으로 보인다.
241) ‘職’은 ‘印’의 잘못된 표기.
그러나 옛사람은 “그가 장부라면 나 또한 그렇거늘 어찌 스스로 경멸하
며 비굴하게 물러날 것인가!”242)라 하였고, 또한 부처님께서는 “나의 이
법은 상념을 조작하지 않는 상념을 하고, 행위를 억지로 꾸미지 않는 행위
를 하며, 말에 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수행에 얽매이지 않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243)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부처의 종자가 될 자격이
있다. 스스로 경멸하거나 스스로 속이지 않아야 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것
이다.
然, 古人云, “彼旣丈夫我亦爾, 何得自謾244)而退屈!” 又佛云,
“我此法者,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如是
之人, 堪爲佛種, 則不可以自輕自謾, 乃可受法也.
242) 귀종혜성(歸宗慧誠)의 말.『景德傳燈錄』권26 大51 p.429a21 참조.『阿彌陀經』
권하 大12 p.340a7에는 두 번째 구절이 “스스로 경멸하며 비굴하게 물러나서는
안 된다.”(不應自輕而退屈)라고 되어 있다.
243) 경전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244) ‘謾’은 ‘輕’의 잘못된 표기.
그러나 법은 본래 형체가 없고 마음도 본래 흔적이 없으니, 무엇을 전하
고 무엇을 받을 것이며,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팔 것인가? 하하하! 깨끗한 벌
거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245) 비록 이렇다고는 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법도 없고 전할 수 있는
마음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표현할 수 있는 법이 없다는 말이 바로 법에
대해 설명한 것이며, 전할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그대로가 친밀하게 전
하고 친밀하게 받은 것이다. 전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는 뜻을
모르는가? 화창한 봄빛이요 물에 비친 달그림자로다. 현재 이곳과 인도에
찬란하게 꽃 한 송이에 다섯 잎이 열렸다.246) 게송으로 전한다.
然, 法本無形, 心本無跡, 且傳箇什麽, 得箇甚麽, 買箇什麽,
賣介什麽? 阿呵呵! 淨裸裸, 赤酒酒, 沒可把. 然雖如是, 且莫
道, 無法可說, 無心可傳. 無法可說, 是名說法, 無傳無得, 親
傳親得. 不見無傳無說? 春容水月. 至今此土與西天, 粲然一
花開五葉. 偈曰,
245) 주석4) 참조.
246)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2조 혜가(慧可)에게 전했던 전법게(傳法偈) 중 한 구절.
달마대사 이후로 2조 혜가로부터 6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선종의 종
지가 전개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또는 선종이 후대에 5가(家)로 나뉘어 꽃을 피
울 것이라는 예언으로도 해석된다. 이 게송은 돈황본(敦煌本)『壇經』에서 최초
로 전한다. “내가 본래 중국에 온 뜻은 교(敎)를 전하여 미혹된 중생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꽃 한 송이에 다섯 잎이 열려,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리라.”(敦煌
本『壇經』大48 p.344a26. 吾本來唐國, 傳敎救迷情. 一花開五葉, 結菓自然成.)
『景德傳燈錄』권3「菩提達磨傳」大51 p.219c17 참조.
세존께서 꽃을 집어 상근기에게 보이시자,
금색두타247)가 활짝 웃어 응답했고,
달마는 면벽한 채 영리한 근기를 대했으니,
팔을 자른 신광248)이 눈 속에 서 있었다네.
세존과 달마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말했고,
가섭과 신광은 들음에 집착하지 않고 들었다.
여기서 일물249)은 아주 분명히 드러나,
이와 같이 하늘과 함께하고 땅과 함께한다.
하늘이나 땅과 함께하는 형상은 어떤 것인가?
어떤 형상이 되었건 일물이 아닌 것은 없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아 어떤 장애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다.
위음왕불 이전의 시기250)로 홀로[孤] 넘어서고,
공겁(空劫) 이후의 경계를 홀로[獨] 거닌다.
이것을 정법안장·열반묘심251)이라 하고,
또한 본지풍광252)·본래면목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아누보리253)이고,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가 대대로 전한 마음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이곳과 인도에
지금 꽃 한 송이에 다섯 잎이 열린 것이다.
나의 스승은 먼저 급암조사254)를 친견하고,
이 삼매와 하나로 들어맞아, 전수되어 온 등불을 받은 다음,
신중하고 치밀하게 실천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경지로 넘어섰으나,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산림에 묻혀서 40년간 살았고,
한마디도 남에게 그 경지를 전하여 알린 적이 없었기에,
아무도 분명히 가려내지 못했다.
나는 임진년(1352) 정월 봄에,
몸소 조실에 들어가 그 지도를 받아 익히고 단련한 끝에,
상원255)이 되기 33일 전에
무심이라는 최상의 종지와 빈틈없이 일치했다.
부처를 불리고 조사를 담금질하는 거대한 화로256)와
범부를 성인으로 단련하는 지독한 집게와 망치로써,
억겁 동안 쌓았던 나의 전도된 망상을 태우고,
승기257)의 수행도 거치지 않고 법신을 얻었다.
나도 이제 전법게258)를 받았으니,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나와 같이 증득하게 하리라.
깊이 깨달은 이 마음으로 티끌같이 무수한 국토를 받든다면,
이것을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한다.
원하건대 부처님과 조사의 큰 자비심으로,
또 다시 미세하게 남은 번뇌를 온전히 제거하시어,
제가 조속히 위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
시방세계에서 도량에 앉도록 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허공의 신259)은 소멸할지라도,
정혜(定慧)의 원만하고 밝은 본질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世尊拈花示上機 金色頭陁破顔笑
達磨壁面接利根 斷臂神光雪中立
世尊達磨不說說 迦葉神光不聞聞
於焉一物大分明 如是同天亦同地
同天同地作麽形 作麽形兮無不是
無去無來無障㝵 無名無相絶一切
孤超威音之前 獨步劫空之後
是稱正法眼藏涅槃妙心
亦謂之本地風光本來面目
是諸佛阿耨菩提 是諸佛祖轉轉心燈
是故此土與西天 至今一花開五葉
我師首謁及菴祖 契此三昧受傳燈
穩密履踐超過量 晦跡山林四十年
未曾一言及人知 是故無人明辨出
我於壬辰正月春 躬造室中受熏煉
上元前三十三日 密契無心無上宗
烹佛烹祖大爐鞴 煆凡煆聖惡鉗鎚
燒我億劫顚倒想 不歷僧祗獲法身
我今亦受傳法偈 轉敎未悟如我證
將此深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惟願佛祖大慈悲 希更甚除微細惑
令我早登無上覺 於十方界坐道場
舜若多神可消亡 定慧圓明終不失
247) 金色頭陁. 마하가섭(摩訶迦葉)을 말한다. 금색가섭(金色迦葉)이라고도 한다. 과
거세에 수행을 할 때 단금사(鍛金師)였던 가섭이 금색으로 된 비바시불(毘婆尸
佛)의 사리탑이 낡은 것을 보고 어떤 여인과 함께 이것을 수리한 공덕으로 91겁
(劫) 동안 온몸이 금빛이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타라는 명칭은 가섭
이 출가한 후 12두타(頭陀)를 잘 행하여 부처님으로부터 두타제일(頭陀第一)이
라는 찬탄을 받은 것에서 유래한다.『佛祖統紀』권5 大49 p.169b19, 『佛祖歷
代通載』권3 大49 p.496b16 참조.
248) 神光. 2조 혜가(慧可)를 가리킨다. 달마로부터 도를 얻기 위해 한 팔을 잘라 그
뜻을 보였던 고사를 말한다. 그 뒤 달마는 신광에게 혜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
다.『景德傳燈錄』권3「菩提達磨傳」大51 p.219b11 참조.
249) 一物. 근원적인 ‘하나의 그 무엇’을 가리킨다. 이것은『壇經』에서 쓰기 시작한 선
종 특유의 용어이다. 돈황본 『壇經』에서 혜능(慧能)의 게송 중 “불성은 항상 청
정하다.”(佛性常淸淨) 또는 “밝은 거울은 본래 청정하다.”(明鏡本淸淨)라는 구절
이 돈황본 이후의『壇經』에서는 “본래 하나의 그 무엇조차 없다.”(本來無一物)라
는 말로 바뀌면서 ‘일물’의 개념이 등장한다. 불성이 일물로 전환되면서, 불성·
진여 등 어떤 교학적 개념으로도 대체하지 못하는 선종 특유의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다. 또한 혜능과 회양(懷讓)의 다음 문답에도 나온다. “‘어떤 것이 이렇게
왔는가?’ ‘하나의 그 무엇이라 말해도 맞지 않습니다.’ ‘닦아서 깨달을 수 있는
가?’ ‘닦아서 깨닫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宗寶本『壇
經』大48 p.357b21. 師曰, ‘什麽物恁麽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
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250)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의 시기. 위음왕불은 헤아릴 수 없
는 과거세에 최초로 출현한 부처님이다. 위음이전(威音已前)은 공겁이전(空劫已
前) 또는 부모미생이전(父母未生已前) 등과 동의어로 쓰이며 어떤 것에도 의지
하지 않고 독립해 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가리킨다. 고(孤)·독(獨) 등이 나
타내는 의미가 그것이다.
251) 주석152) 참조.
252) 本地風光. 오염되지 않은 자기 본래의 심성[本地]이 고스란히 드러난 세계[風
光]를 가리킨다. 본래면목(本來面目)과 통한다. 풍광은 풍경·경치 등을 나타내
는데, 자신의 본래 모습과 같은 뜻이다. “만약 진실로 바른 견해를 가지고 고요
한 진여(眞如)와 딱 들어맞는다면, 비록 하루 어느 시각에나 생각하며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꾸미지 않더라도,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깨어 있거나 잠자는 등 그 어떤 순간도 본지풍광·본래면목이 아닌 경우가 없을
것이다.”(『圜悟語錄』 권5 大47 p.735a1. 若以眞實正見, 契寂如如, 雖二六時中,
不思不量, 無作無爲, 至於動靜語默覺夢之間, 無不皆是本地風光本來面目.)
253) 眞覺語錄 주석63) 참조.
254) 백운의 조부 격인 급암종신(及菴宗信)을 높여 부른 말. 중국 호주(湖州) 도량사
(道場寺)에서 출가한 후에, 설암조흠(雪巖祖欽)의 법을 이었다.
255) 上元. 정월 대보름.
256) 懶翁語錄 주석20) 참조.
257) 僧祗.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 asam3 khya)의 줄임말. 보살이 수행하여 궁극적인
깨달음[佛果]을 얻기까지의 기간.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을 뜻한다. 이 뜻에 따
라 무량수(無量數)·무앙수(無央數) 등으로 한역한다.
258) 傳法偈. 스승이 자신의 종지를 이을 자격이 있는 제자에게 그것을 증명하기 위
하여 전하는 게송. 여기서는 석옥이 백운에게 보낸 앞의 게송을 가리킨다. 선종
사에서 달마대사로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조사의 징표는 가사와 발우였으나, 6
조 혜능(慧能)이 이것이 투쟁의 실마리가 된다고 하여 전법게로 대체함으로써
전통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돈황본 『壇經』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내가 입적한
뒤 20년이 지나면 삿된 법이 분란을 일으켜 우리의 종지를 미혹시킬 것이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교의 시비를 확정하여 종지를 굳
건히 세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바른 법이니 가사는 전하지 않는 것이 합
당하다. 그대가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가 이전 5대 조사들이 가사를 전하면서
함께 전한 부법송(付法頌:傳法偈)을 읊어 주겠다.”(敦煌本『壇經』 大48 p.344a
19. 是吾正法, 衣不合傳. 汝不信, 吾與誦先代五祖傳衣付法頌.)
259) 순야다신(舜若多神). 순야다는 śūnyatā, suññatā의 음사어로, 한역어는 공성
(空性)이다. 순야다신이라 하면 허공을 주재하는 신(神)을 가리킨다. “순야다
신:공(空)이라 한역한다. 이는 허공을 주재하는 신이다. 무색계천(無色界天)
또한 이러한 종류이다.”(『祖庭事苑』권7 卍113 p.194a6. 舜若多神:此云空,
卽主空神也. 無色界天, 亦是此類.)
● 무심의 노래 無心歌
흰 구름은 티 없이 고요히 떠다니며 드넓은 하늘에서 출몰하고, 잔잔히
흐르는 물은 동쪽 바다 깊숙이 흘러든다.260) 물은 굽은 계곡을 만나면 돌아
서 흐르고 곧은 계곡을 만나면 똑바로 흐를 뿐 저곳과 이곳을 구분하여 흐
르지 않는다. 구름은 저절로 걷히고 저절로 펼쳐지거늘 무엇과 가깝고 무
엇과 멀단 말인가?261) 만물은 본래 한가하여 스스로 푸르다거나 시들었다
고 말하지 않건만, 사람들만이 스스로 시끄럽게 굴며 억지로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생각을 일으킬 뿐이다.262) 경계를 맞닥뜨리고도 마음이 구름이나
물의 뜻과 같다면, 세상에서 종횡 어디로 가나 무슨 일이 있겠는가? 만약
사람이 억지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아름답고 추한 차별이 어디서 일
어나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잊지만 마음에 대한 집착은 잊지 못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잊지만 경계에 대한 집착은 잊지 못한다. 마
음을 잊으면 경계는 저절로 고요해지고, 경계가 고요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여일(如一)하게 되니, 이것을 가리켜 무심의 진실한 종지라 한다.
白雲澹泞, 出沒於大虛之中;流水潺湲, 東注於大海之心. 水
也遇曲遇直, 無彼無此. 雲也自卷自舒, 何親何踈? 萬物本閑,
不言我靑我黃, 惟人自鬧, 强生是好是醜. 觸境心如雲水意, 在
世縱橫有何事? 若人心不强名, 好醜從何而起? 愚人忘境不忘
心, 智者忘心不忘境. 忘心境自寂, 境寂心自如, 夫是之謂無心
眞宗.
260) 구름이 떠다니고 물이 흐르는 자연 현상을 비유로 삼아 무사(無事)·무심(無心)
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제시한다. “법좌에 올라앉아 ‘담쟁이넝쿨은 줄줄이 이어
져 소나무 꼭대기까지 올라타고, 흰 구름은 티 없이 고요히 떠다니며 드넓은 하
늘에 출몰한다.’라고 말했다. <주장자를 잡고> ‘국사가 오셨다, 오셨어.’라고 한
다음 <올렸다가 내려치면서> ‘길은 평탄한 곳에서 험해지고, 사람은 고요한 곳에
서 바쁘다.’라고 말했다.”(『大川普濟語錄』 卍121 p.331b8. 上堂, ‘靑蘿夤緣, 直上寒松
之頂, 白雲澹泞, 出沒太虛之中.’ <拈拄杖> ‘國師來也來也.’ <卓一下> ‘路從平處險, 人向
靜中忙.’);“흰 구름은 티 없이 고요히 떠다니며,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모든 존
재가 본래 한가롭거늘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五燈全書』 권25 「大潙慕喆章」 卍
140 p.618a18. 白雲澹泞, 水注滄溟. 萬法本閒, 復有何事?) 『續燈正統』 권12 「雲峰妙
高章」 卍144 p.642a4 참조.
261) “높디높은 산 위의 구름은 저절로 걷히고 저절로 펼쳐지거늘 무엇과 가깝고 무
엇과 멀단 말인가? 깊디깊은 골짜기 물은 굽은 계곡을 만나면 돌아서 흐르고 곧
은 계곡을 만나면 똑바로 흐를 뿐 저곳과 이곳을 구분하여 흐르지 않는다.”(『黃
龍慧南語錄』 大47 p.633a5. 高高山上雲, 自卷自舒, 何親何疎? 深深澗底水, 遇曲遇直,
無彼無此);“모든 시각 중에 하나하나가 이와 같으니, 흡사 빈 배가 물결을 탈 때
그 흐름에 따라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과 같다. 또한 마치 흐르는 물이 산을 감
돌 때 굽은 계곡을 만나면 돌아서 흐르고 곧은 계곡을 만나면 똑바로 흐를 뿐 마
음마다 분별이 없는 것과 같다.”(『修心訣』 大48 p.1008a20. 一切時中, 一一如是, 似
虛舟駕浪, 隨高隨下. 如流水轉山, 遇曲遇直, 而心心無知.)
262) “만물은 본래 한가한데 시끄럽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 시끄럽게 하
지 않는다면 세상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紫柏老人集』 권9 卍126 p.783b14. 萬物
本閒, 鬧之者人耳. 人而不鬧, 天下何事?)
● 태고화상에게 붙이는 편지 寄太古和尙書
지난해 임진년에 보법사(普法寺)에서 헤어진 뒤로 여러 해가 바뀌고 길
은 동서로 멀어졌습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 있다 보니 항상 마음은 먼
곳으로만 향하고 언제 만날까 고대할 뿐 근심스러움에 마음은 편치 않습니
다. 날은 늦봄의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하니, 대화상(大和尙)의 귀하신 몸도
일상생활에서 온갖 복을 누리시고 병도 괴로움도 없기를 멀리서 바랍니다.
저는 오로지 불법의 그늘에 의지하여 졸렬함을 가리고 세 칸살이 산촌에서
손과 발을 떨면서 몹시도 볼품없고 형편없는 꼴을 한 채로 이렇게 세월이나
죽이며 남은 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화상의 문하에서는 어떻게 보임263)하
는지요? 저는 전생에 종자를 익힌 결과가 뛰어난 탓이었던지 대화상과 함
께 같은 스승 아래서 공부264)를 하였으니 우리 두 사람 모두 석옥선사의 제
자입니다. 말해 보십시오! 같은 스승 아래서 함께 배우고 공부한 일을 어떻
게 생각하십니까? 남들에게 이 사실을 들려준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 세상
에 지공(指空)선사265) 한 분을 제외하고는 석옥선사와 비견할 인물은 매우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스승은 비록 입적하셨으나 공안은 남아 있습
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화상께서는 번거롭더라도 저에게 그 공안들에 대하
여 각각 가르침의 손길을 내려 주십시오. 그에 따라 한 달이나 반 달 동안
이 일을 헤아린다면 마치 스승을 친견한 것과 같아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화상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일전에 듣자 하니 화상께서
는 임금의 명령으로 궁전에 들어가 하루 동안 용안(龍顔)을 대하고 종승(宗
乘)266) 중의 일267)을 들어 임금에게 문명(文明)의 교화를 주셨다더군요. 저
는 기쁨에 넘쳐 가슴 속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화상께서는 아주 좋은 운이
트이셨는데, 어리석은 저와 인연이 이어져 황공하고 또 황공한 심정입니다.
지금은 말법의 운을 맞이하여 정법은 쇠락하고, 불조(佛祖)가 전하신 지혜
의 생명은 위기에 처하여 저는 마음 몹시도 애통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도 바라던 대로 대화상과 같은 분이 이제 이미 세상에 나타나 인간과 천상
두 세계의 중생을 이끄는 지도자268)가 되어 원나라와 우리나라에 위엄을 떨
치셨으니, 어찌 우리의 종지가 사라질까 걱정하겠습니까! 지극히 축원하고
또 축원 드리옵니다. 구차하게도 번잡하게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요즘 장안
에 사는 인재들269)에게는 풍류를 값싸게 팔아도270) 사는 사람이 거의 없습
니다.271) 한번 웃어넘기십시오. 이만 줄이고272) 삼가 올립니다.273)
往者歲在壬辰, 於普法寺, 辭違已來, 星霜屢換, 路隔東西. 久
阻音問, 時復遙心, 望風悒怏. 卽辰季春盛暄, 緬惟大和尙尊
體, 起居萬福, 少病少惱. 弟子全承法蔭, 藏拙三家村塢, 跛跛
挈挈, 百醜千拙, 且恁過時, 以餞殘生. 未審大和尙丈下如何保
任? 弟子宿熏種勝, 且與大和尙同叅, 俱是石屋之子. 且道! 同
叅底事作麽生? 還曾擧似人麽? 在今天下, 除是指空一人, 如
先師和尙者, 甚爲希有. 先師雖入滅, 公案遺在. 伏望和尙, 枉
與弟子, 於公案上, 各出隻手. 若一月半月商量箇事, 則如親
見先師, 報恩足矣. 未審尊意如何如何? 昨聞和尙詔入天庭,
日對龍顔, 擧揚宗乘中事, 以助文明之化. 弟子喜溢, 胸襟感
荷. 和尙好生命快命快, 繼有愚私, 惶恐惶恐. 今當末運, 正法
凌替, 佛祖慧命懸危, 弟子直得心痛. 祝果大和尙, 今旣出世,
已爲人天眼目, 威振大元三韓, 何患吾宗寂寥哉! 至祝至祝.
姑此274)葛藤. 卽辰長安桃李, 賤賣風流, 少不得. 一笑. 不宣
拜上.
263) 保任.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줄임말. 보(保)는 잘 보호하여 지키다는 뜻이고, 임
(任)은 등에 지다는 뜻이다.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것, 자신의 것으로 완
전히 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선종에서는 주로 견성(見性)한 뒤에 그것을 잘 함
양하여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264) 동참(同參). 동문(同門)·법속(法屬)·법권(法眷)·법친(法親)·법연(法緣)·도우
(道友)·도구(道舊) 등과 같은 말이다.
265) 懶翁語錄 주석144) 참조
266) 달마 이래로 이어져 온 선종의 근본 취지. 선(禪)의 극치로 실어 나르는[乘] 종
지를 가리킨다.
267) 본분사(本分事)와 같은 뜻.
268) 인천안목(人天眼目). 일반적으로 선종의 종지를 깨닫고 학인을 지도할 지위에
도달한 선사를 가리킨다.
269) 도리(桃李). 복숭아와 자두. 인재를 비유한다.
270) 천매풍류(賤賣風流). 높은 품격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한
다는 말. 자신이 터득한 심오한 경지를 중생의 입장에서 쉽게 펼친다는 뜻이다.
271) 태고화상이 알아듣도록 풀어준 말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
272) 불선(不宣). 하나하나 상세히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편지 끝에 상투적
으로 붙이는 말이다. 바로 앞에서 ‘한번 웃어넘기십시오[一笑]’라고 한 말도 자
신의 편지를 소중히 여길 것 없다는 겸손의 뜻이다.
273) 배상(拜上). 앞의 말과 마찬가지로 편지 끝에 붙이는 인사말.
274) ‘此’는 ‘且’와 통한다. 고차(姑且)는 관유(寬宥) 또는 구차(苟且)와 같은 뜻이다.
● 선선인에게 주는 편지 示禪禪人書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옛날에 알던 사이라고만 여기지는 마십
시오. 노숙(老宿)275)께서는 옛날부터 걸어왔던 잘못된 길을 바꾸셨는지요?
만약 바꾸었다면,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경계에 눌러앉지 말고, 재빠르게 백
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불조(佛祖)의 정수리에 있는 묘한 이치를 궁
구하여 밝히고, 어떤 행동거지도 한결같이 허위에 떨어지지 않아야 비로
소 편안히 앉아 머무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백척간두에서
반드시 한 발 더 나아가 시방의 세계에 온몸을 드러내야 한다.”276)라고 한
말을 모르십니까? 또한 선덕277)이 “깨닫고 나면 반드시 사람을 만나야 한
다.”278)라고 한 말도 아실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주지 않는
다면 꼬리 없는 원숭이가 기교를 부리자마자 곧바로 비웃음을 사는 것과
흡사할 것입니다. 당부하여 말씀드립니다. 깨닫고 난 다음 반드시 사람을
만나 그 경지를 전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향상하는 안
목을 터득하지 못하고, 또한 왜곡된 견해의 가시279)에 미혹당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떠돌게 될 것입니다. 만약 보잘것없는 느낌을 얻고서
충분히 깨달았다고 여기며 스스로 삿된 견해에 집착하여 결코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하지도 않고 또한 사람을 만나 전하지도 않는다면, 치명적인 결
점이 되어 스스로 속을 뿐만 아니라 불조(佛祖)까지 속이는 결과가 될 것이
니, 생각하고 또 살펴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만약 향상하는 종승 중의 일280)
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과 마주칠 방법을 자세히 알려드리기 위해 부
끄러움을 무릅쓰고281) 하나의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구차하게 늘어
놓은 말이지만 답신 바랍니다.
多年不相見, 莫作舊時看. 未審老宿換却舊時行李處麽? 若也
換得, 莫坐在已見上, 急宜竿頭進步, 究明佛祖頂上妙致, 凡
所擧止, 悉不落虛僞, 始解穩坐. 不見古人云,“ 百尺竿頭須進
步, 十方世界是全身.” 又不見先德云,“ 悟了須遇人.” 若不見
人, 如無尾巴猢猻相似, 才弄出便取咲. 囑曰, 悟了須見人. 若
不見人, 不得向上眼, 又被見刺惑, 依前流浪去. 其或得小分覺
觸, 便以爲足, 自執邪見, 更不進步, 亦不見人, 卽成大患, 非
唯自謾, 亦謾佛祖, 思之諦思之. 若也要會向上宗乘中事, 枉垂
相訪, 不惜眉毛, 爲君一訣. 姑此書覆.
275) 수행한 경력이 오래되고 덕이 높은 스님을 존칭하는 말. 장로(長老)·존숙(尊
宿)·노덕(老德)·기숙(耆宿)이라고도 하며, 노년숙덕(老年宿德)의 줄임말로도
본다. “체비리(體毘履 sthavira. thera)는 노숙이라 한역한다.”(『翻譯名義集』
권1 大54 p.1074c14. 體毘履, 此云, 老宿.)
276) 장사경잠(長沙景岑)의 말. 백장간두(百丈竿頭)라고도 한다. ‘백척’이란 100이라
는 숫자에 해당하는 높이가 아니라 더 이상이 없는 가장 큰 수 곧 만수(滿數)를
나타내며, ‘간두’는 그러한 높이를 가진 장대의 꼭대기를 가리킨다. 고요함의 극
치를 나타내지만 이곳에 머물기만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속박에 불과하므로
한 발 더 나아가서 모든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백척간두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비록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지만 아직 완성
된 것은 아니다. 백척간두에서 반드시 한 발 더 나아가 시방의 세계에 온몸을 드
러내야 한다.”(『景德傳燈錄』권10「長沙景岑傳」大51 p.274b7. 百丈竿頭不
動人, 雖然得入未爲眞. 百丈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 마지막 구절 ‘是全身’
은 문헌에 따라 ‘現全身’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더 적절하다.
277) 先德. 깨우친 도가 높아 후대의 본보기가 되는 앞서간 인물. 고인(古人)·선배(先
輩)·고덕(古德) 등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는 백운수단(白雲守端)을 가리킨다.
278)『應菴曇華語錄』권7「示湛禪人」卍120 p.859b16,『宗範』 권상 卍114 p.629a7
등에 응암담화(應菴曇華)가 백운수단(白雲守端)의 말이라고 인용하고 있다. 여기
서 ‘사람’은 자신이 가르침을 내려 줄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에 이르면 반드
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은 다음에는 또한 반드시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다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다시 사람을 만나 가르침
을 주어야 하는가?’라고 의심한다. 만약 깨닫고 난 후에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주는 자라면 방편의 손길을 내려 주는 순간 하나하나에 속박된 몸을 벗어날 길
이 있어 학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깨닫기만 하고 무미건
조하게 자신에게만 머무는 자라면 학인의 눈을 멀게 할 뿐만 아니라 움직이기
만 하면 먼저 칼날을 범하여 자신의 손을 다치게 될 것이다.”(『白雲守端語錄』
권상 卍120 p.381b10. 到者裏, 直須悟始得, 悟後, 更須遇人始得. 汝道, ‘旣悟了
便休, 又何必更須遇人?’ 若悟了遇人底, 當垂手方便之時, 著著自有出身之路, 不
瞎卻學者眼. 若祇悟得乾蘿蔔頭底, 不唯瞎卻學者眼, 兼自已動, 便先自犯鋒傷手.);
올암보령(兀菴普寧)은 깨달은 다음 종사를 만나야 한다는 뜻으로 쓴다. “그래서
‘참선하려면 반드시 깨달아야 하고, 깨닫고 나면 반드시 (점검해 줄) 사람을 만
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만약 밝은 눈을 가진 종사로부터 인증(印證)을 구하지
않는다면, 마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여 급제는 했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
하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兀菴普寧語錄』 권상 卍123 p.14b5. 所以道, ‘參
禪須是悟, 悟了須遇人.’ 若不 求明眼宗師印證, 譬如讀書發解及第了, 不得轉官
相似.)
279) 삿된 견해를 가시에 비유한 말. 『長阿含經』 권8 大1 p.50c7에는 욕자(欲刺)·에
자(恚刺)·견자(見刺)·만자(慢刺) 등 사자(四刺)를 제시하고 있다.
280) 주석266) 참조.
281) 주석49) 참조.
● 요선선인에게 붙이는 편지 寄示了禪禪人書
집을 떠나고 속세를 벗어나는 목적은 다만 도를 넓히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남들을 제도하거나 도를 얻은 흔적이 전혀
없어야 비로소 불조(佛祖)의 경지로 향상한 사람이 걸어간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다음의 문답을 모르십니까? 석두(石頭)가 (좌선하고 있는) 약
산(藥山)에게 물었습니다.282)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할 일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로구나.” “할 일 없
이 앉아 있는 것도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고 말했는데,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어떤 성인도 이해하지 못
합니다.” 이에 석두가 게송 한 수를 읊었습니다. “본래부터 함께 살았으나
이름조차 모르고, 마음 가는 대로 서로 도우며 그렇게 해왔을 뿐이라네.
예로부터 성현들도 알지 못했거늘, 짧은 시간에 얕은 식견의 범부가 어찌
쉽게 밝히겠는가!” 저들 스승과 제자가 이렇게 밟아간 길과 이와 같이 지
향했던 뜻을 살펴보십시오. 이 어찌 향상하는 본분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선로(禪老)283)께서는 이 경지에 들어선 사람이지만 제가 이 본분사를 언
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앞서간 조사들의 선풍(禪風)을 되새기며 그
뜻을 우러러야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망상을 그치고 그 길을 따라가며 예
로부터 이어온 선풍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자기의 본분사가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꽃핀 산에 봄의 정취를 조금도 느낄 수 없습니다. 한번 웃어
넘기시기 바랍니다.
夫出家離俗, 只要弘道利生. 然, 絶無度人, 得道之跡, 方可詣
向上人行李. 不見? 石頭問藥山,“ 汝在這裏, 作什麽?” 山云,
“一切284)不爲.” 頭云,“ 恁麽則閑坐也.” 山云,“ 閑坐則爲也.”
頭云, “汝道不爲, 且不爲箇什麽?” 山云, “千聖亦不會.” 頭乃
有頌云,“ 從來共住不知名, 任運相將只麽行. 自古聖賢猶不
識, 造次凡流豈易明!” 看他師資, 恁麽履踐, 趣向如此. 可不
是向上本分事耶! 禪老, 是箇中人, 不可不說箇中事, 宜乎追
慕先祖之風. 休心履踐, 使古風不墜, 乃自己事明白也. 花山春
興少不得. 一咲.
282) 이 문답은『五祖法演語錄』권하 大47 p.664c23,『圜悟語錄』권12 大47
p.767b29 등에 수록되어 있다.
283) 이 편지를 받는 요선선인(了禪禪人)을 가리킨다. ‘老’는 존칭.
● 희심 사주에게 보내는 편지285) 示希諗社主書
285) ‘희심’의 ‘심’은 조주종심(趙州從諗)을 가리킨다. 곧 ‘희심’이란 조주와 같이 되기
를 바란다[希]는 뜻이다. 이 법명을 가진 희심 사주에게 그 법명에 어울리도록
조주의 몇 가지 법문을 활용하여 적은 편지이다.
장로286)의 법휘287)를 처음 접하는 순간 마음속 깊이 진실로 놀라고 또 진
실로 놀랐습니다. 장로의 희심이라는 법명은 조주의 어떤 측면과 같이 되
기를 희망하여 붙인 것입니까? 백세의 춘추를 누렸던 조주와 같이 장수하
기를 바라서입니까? 아니면 80세에도 참선한 조주의 정진력을 본받고 싶
어서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조주의 선(禪)을 사모하는 것이로군요. 조주
는 “나는 무수한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은 모두 부처를 찾는 사람들일 뿐,
그들 중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른 도인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주가 사람들에게 준 공안은 비록 대단히 많았지만, 이 한마
디로 그것을 다 포괄할 수 있습니다. 저 고불(古佛)288) 조주가 이렇게 밟아
간 길과 이와 같이 지향했던 뜻을 살펴보십시오. 이 어찌 부처의 경지로 향
상하는 본분사가 아니겠습니까! 장로는 법명이 희심인 이상 마땅히 (법명
의 뜻과 어울리게) 조주의 옛 선풍을 사모하여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 할 것
입니다. 하루 어느 때나 모든 행위 방식 안에서 이 말을 깊이 음미하며 망
상을 그치고 그 길을 따라간다면, 어떤 경계를 만나고 어떤 인연을 마주치
더라도 자연히 하늘과 땅을 뒤덮는 기세로 어느 곳에서나 조주의 선풍을
눈앞에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마음에서 ‘바라는 것’이
없어야 도(道)라 한다.”289)라고 하였으니, 바랄 희(希)자 하나가 온갖 화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290)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하십시오.
直觸長老法諱, 深心誠恐誠恐. 未審長老法名希諗者, 希箇趙
州什麽邊事耶? 希趙州百歲春秋耶? 希趙州八十更叅禪耶?
若是, 希慕趙老禪也. 趙州道,“ 我見千萬人, 只是覓佛底人,
其中一箇無心道人難得.” 趙州爲人公案, 雖千萬言, 此一言弊
之. 看他古佛趙老, 恁麽履踐, 趣向如是. 豈不是向上事也! 長
老旣是希諗, 宜乎希慕趙州古風. 十二時中, 四威儀內, 深味此
言, 休心履踐, 逄境遇緣, 自然盖天盖地, 觸處現成. 然古人云,
“心無所希, 名之曰道.” 則希之一字, 是衆禍之源. 思之諦思之.
286) 주석87)·275) 참조.
287) 法諱. 법명(法名)·법호(法號)·계명(戒名) 등과 같은 말이다. 불법에 귀의한 사
람에게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으로 붙여주는 이름이다.
288)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이전의 부처님. 또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아 석가모
니불과 버금간다는 뜻을 나타내며, 부처님의 경지를 나타내는 최고의 찬사로
쓰이는 말이다. 조주를 고불이라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따른다.
“남방에서 어떤 학인이 와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설봉(雪峰)에
게「오래된 산골 물이 차갑게 샘솟을 때는 어떠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설봉이
「아무리 보려 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대답했고,「마시는 자는 어떻습
니까?」라고 물었더니「입으로 들이키지 못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주가
그 말을 듣고 ‘입으로 들이키지 못한다면 콧구멍으로 들이킨다.’라고 말했다. 그
학인이 다시 ‘옛 산골 물이 차갑게 샘솟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쓰다.’라고 답했고, ‘마시는 자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죽는다.’라고 대답했
다. 그 뒤 설봉이 조주의 이 말을 전해 듣고 ‘고불이로다! 고불이로다!’라고 찬
탄했다.”(『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 卍118 p.304b14. 因有南方僧來, 擧問雪峰,
‘古澗寒泉時如何?’ 雪峰云, ‘瞪目不見底.’ 學云, ‘飮者如何?’ 峰云, ‘不從口入.’ 師
聞之曰, ‘不從口入, 從鼻孔裏入.’ 其僧却問師, ‘古澗寒泉時如何?’ 師云, ‘苦.’ 學云,
‘飮者如何?’ 師云, ‘死.’ 雪峰聞師此語, 讚云, ‘古佛! 古佛!’)
289) 서천(西天) 제21조 사야다(闍夜多)의 말.『景德傳燈錄』권2 大51 p.213a27,
『佛祖歷代通載』 권4 大49 p.508b5 등에 나온다. “도를 구하지도 않고 전도
(顚倒)되지도 않으며, 부처님께 절을 올리지도 않고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만
족할 줄도 모르고 탐욕을 부리지도 않는다.”라는 등의 내용이 “마음에서 바라
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제시된다.
290) 문장의 형식으로 보면, 규봉종밀(圭峯宗密)의 “지(知)라는 한 글자는 온갖 미묘
함이 출입하는 문이다.”(『都序』권상2 大48 p.403a1. 知之一字, 衆妙之門.)라
는 말을 역으로 활용한 황룡사심(黃龍死心)의 “지라는 한 글자는 온갖 화가 출
입하는 문이다.”(『大慧語錄』권16 大47 p.879b9. 知之一字, 衆禍之門.)라고
한 말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조주가 “불(佛)이라는 한 글자
조차도 나는 듣고 싶지 않다.”(『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卍118 p.313b7.
佛之一字, 吾不喜聞.)라고 한 말과 연관되는 구절로도 보인다. 불(佛)이라는
최고의 경지를 비롯하여 어떤 분별도 허용하지 않고 모두 물리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 내불당의 감주 장로 천호에게 붙이는 편지
寄內佛堂監主長老天浩書
임진년(壬辰年)에 성각사(性覺寺)에서 헤어진 뒤로 세월은 벌써 스무 해
나 바뀌었습니다. 서로 갈라진 길이 천 리 사이로 떨어져 각각 하늘 한 끝
에 있으니 오랫동안 소식이 막힌 채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가끔 스님의 풍
모가 그리워 당신이 계신 먼 곳으로 가고픈 마음에 때로 거듭 힘들어집니
다. 얼마 전 장로께서 임금의 명령으로 궁전에 들어가 임금을 친견하고 조
사의 맑은 선풍을 널리 펼침으로써 문명의 성스러운 교화를 도왔다는 소
문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아주 좋은 운이 트이셨으니 이 노승은 감사한 마
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 밝게 비추어 본 것이니 (다음에 제가
하는 말을) 너무 나무라지는 마십시오.291) 게송으로 저의 그 심정을 읊겠습
니다.
“존경하는 이와 헤어진 뒤 짧은 순간을 보내는 동안,
시간은 홀연히 흘러가니 남은 삶을 생각해 보았다네.
비록 시방 어디에나 통하는 눈을 이미 얻었더라도,
남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조사선을 꿰뚫어야 하노라.”
말해 보십시오. 조사선이란 무엇일까요? 도오(道吾)가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박거려 그것을 보이노라. 만일 누군가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한다면, 특별히 그를 사미(沙彌)라고 부르리라.”292)라고 한 말을
모르십니까? 또한 옛사람들의 방편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무수합니
다. 가령 뜰 앞의 잣나무293)·삼 세 근294)·마른 똥막대기295) 등의 화두에 대
하여 조사 문하의 선객(禪客)으로서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바르게
이해한다면 대단히 예사롭지 않은 경지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과보를 모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조법연(五祖法演)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부처를 죽이거나 조사를 죽인 결과로 5무간
의 지옥에 떨어지는 업296)을 지었다가도 한 찰나에 마음을 돌리면 참회가
허용되지만, 오로지 배워서 이해하거나 전수받은 것을 익히면서 입으로 떠
들고 귀로 듣기만 하는 무리들은 그 근거에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간
지옥에 떨어지는 무거운 과보를 피하지 못한다.”297) 엎드려 바라건대 대장
로께서는 한창 나이인 장년(壯年)298)이시고 기민한 지혜는 누구보다 뛰어
나시니, 마땅히 법연선사의 이 말을 받아들여 깨달음을 근본적인 법도로
삼으십시오. 만약 대장로께서 근본적인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려면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깨달음으로 하늘과 땅을 뒤덮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렇게 하지 않으면서 조사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염송』11권 26폭299)에
나오는 다음 공안을 살펴보십시오. “섭현귀성(葉縣歸省)화상300)에게 어떤
학인이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들고서 가르침을 청하자 귀성이 말했
다. ‘내가 그대에게 말해 주지 못할 것은 없지만 내 말을 믿겠느냐?’ ‘화상
의 소중한 말씀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
방울 소리가 들리느냐?’ 이 말을 듣고 그 학인은 탁 트인 듯이 크게 깨닫
고는 절을 올렸다. ‘그대는 어떤 도리를 알았기에 절을 올리느냐?’ 그 학인
이 게송으로 대답했다. ‘처마 끝의 물방울, 똑똑 떨어지는 소리 분명하구
나! 하늘과 땅을 때려 부수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쉬었도다.’ 귀성이 기꺼
이 그의 경지를 인정하며 ‘그대는 조사선을 이해했구나.’라고 말했다.” 만
약 장로께서 이 공안을 밑바닥까지 꿰뚫지 못하여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다 여기지 않으신다면,301) 선종의 이빨과 발톱302) 그리고 납승의 수
단303)인 조사선과 마주칠 방법을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노승은 잘못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고304) 하나의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세존
께서 아난의 잘못을 꾸짖으며 “네가 천 일 동안 배운 지혜가 하루 동안 도를
배우는 것만도 못하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비할 자
격이 없을 것이다.”305)라고 하신 구절을 모르십니까? 또 말하게 되면 길어
지게 되니 이만 줄입니다. 구차하게 늘어놓은 말을 삼가 올립니다.
歲在壬辰, 於性覺寺, 辭違已來, 星霜已換於廿秋. 歧路俄隔
於千里, 各在天涯, 久阻音問, 日去306)月諸. 往往望風, 遙心眷
想, 時復成勞. 近聞, 長老詔入天庭, 利307)覲天顔, 擧揚祖師之
淸風, 以助文明之聖化. 好生命快命快, 予老僧, 不勝珎感. 然
意洞照, 休罪休罪. 頌曰, “奉別尊顔輕屈指, 光陰倏忽念餘年.
雖然已得通方眼, 爲人須透祖師禪.” 且道! 作麽生是祖師禪?
不見道吾云, “我有一機, 瞬目視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且
古人方便, 數如恒沙. 只如庭前柏樹子·麻三斤·乾屎橛, 祖
門下客, 作麽生會? 會則甚奇特, 不會則難免果報. 何故? 演
祖云, “世人, 殺佛殺祖, 造五無間業, 一念廻心, 却許懺悔. 唯
學解傳習口耳之流, 未達其由, 無間重報, 難逃難逃.” 伏希大
長老, 春秋鼎盛, 機智過人, 當事斯語, 以悟爲則. 若也大長
老, 播揚宗敎, 從自己胸襟流出, 盖天盖地. 若不如是, 要會祖
師禪, 看取拈頌十一卷二十六幅.“ 葉縣省和尙, 因僧請益, 擧
趙州庭前柏樹子話, 省曰,‘ 我不辭與汝說, 汝還信否?’ 僧云,
‘和尙重言, 爭敢不信?’ 省曰,‘ 汝還聞簷頭雨滴聲麽?’ 其僧
豁然大悟禮拜. 省曰,‘ 汝見介什麽道理禮拜?’ 其僧便以頌對
曰, ‘簷頭雨滴, 分明歷歷! 打破乾坤, 當下心息.’ 省大然曰,
‘汝會得祖師禪也.’” 若也長老, 此公案上, 未得透澈, 不恥下
問, 枉垂相訪, 宗門牙爪, 衲僧巴鼻, 祖師禪. 老僧不惜眉毛,
爲君一訣. 不見世尊訶嘖阿難曰,“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
道. 若不學道, 滴水也難消.” 向下文長. 姑此謹啓.
291) 휴죄(休罪). 나무라지 마라 또는 잘못이라고 여기지 마라는 뜻. 비록 임금의 인
정을 받아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지만 선사로서의 본분을 확고히 하려면 “조사
선의 근본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을 상대에게 하기에 앞서 그렇게 말하는 자신
을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는 뜻으로 겸손하게 한 말이다.
292) 도오의 말이 아니라 향엄지한(香嚴智閑)의 게송이다. 본 어록「祖師禪」 참조.
293) 주석182) 참조.
294) 주석183) 참조.
295) 주석184) 참조.
296) 오무간업(五無間業). 오역죄(五逆罪)를 지은 업에 따라 죽은 다음에 떨어지는 지
옥을 말한다. 무간지옥은 아비지옥(阿鼻地獄 Avīci)이라고도 한다. 오역죄란 어
머니를 살해한 죄[害母·殺母], 아버지를 살해한 죄[害父·殺父], 아라한을 살해한
죄[害阿羅漢·殺阿羅漢], 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한 죄[惡心出佛身血·出佛
身血], 승단의 화합을 깨뜨린 죄[破僧·破和合僧·鬪亂衆僧] 등을 가리킨다.
297)『五祖法演語錄』에는 나오지 않는 구절이며, 응암담화(應菴曇華)가 오조법연의
말로 인용한 것이다. 백운은『應菴曇華語錄』권9「示珣禪人」卍120 p.880a7~
a10의 내용을 축약하여 실었다.
298) 정성(鼎盛)은 장년 곧 삼사십 대를 가리킨다.
299)『禪門拈頌說話』권11 421則 韓5 p.352c22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
『禪門拈頌』은 역대 선사들의 문답과 기연(機緣) 및 경전의 내용들에 이르기까
지 간화선(看話禪)의 관점에서 타당한 해설과 게송을 선별하여 모아 놓은 문헌
이다. 따라서 백운이 말하는 조사선은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려는 간
화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葉縣歸省語錄』古尊宿語
錄23 卍118 p.463a8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300) 생몰연대 미상. 송대(宋代) 임제종 선사로 기주(冀洲:河北省) 출신이고, 속성은
가(賈)씨이다. 역주(易州) 보수원(保壽院)에서 출가한 다음, 남쪽으로 돌아다니
다 여주(汝州)에서 수산성념(首山省念 926~993)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
었다.
301) 불치하문(不恥下問).『論語』「公冶長」에 나오는 구절이다.
302) 종문아조(宗門牙爪). 선사로서의 결정적인 수단과 방편. 사자가 먹이를 잡기 위
해 이빨과 발톱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사로서의 본분을 발휘
할 수 있는 핵심적인 수단을 말한다.
303) 파비(巴鼻). 파비(把鼻)라고도 한다. 어떤 대상을 포착하는 수단을 가리킨다.
‘巴’는 ‘把’와 같은 말로 손잡이 또는 근거를 잡는다는 뜻이며, ‘파비’란 소의
코를 묶어 붙드는 고삐로 파비(把臂)로도 쓴다.
304) 주석49)와 같은 뜻.
305)『傳心法要』大48 p.384a10에 나오는 구절. 주석113) 참조.
306) ‘去’는 ‘居’의 잘못된 표기. ‘日居月諸’는 ‘세월이 흘러간다’는 뜻이며, ‘居’와 ‘諸’
는 어조사이다.
307) ‘利’는 ‘來’ 또는 ‘入’의 잘못된 표기.
● 이상공에게 붙이는 편지308) 示李相公書
308) 이 편지는 시작되는 부분부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곳까지『大
慧語錄』권23「示太虛居士」大47 pp.909c24~910a7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 뒤
백운은 경전을 인용하여 선한 뿌리를 심은 인연에 대하여 설명한 다음 일상의 반
경에서 무심(無心)의 이치를 터득할 것을 권하고 있다. 반면 대혜종고(大慧宗
杲)는 조주(趙州)의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제시하면서 일상의 반경에서 ‘어떤
찰나에서도 빈틈과 끊어짐이 없이 이 화두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며 항상 붙들
고 알아차리고 있어야 한다.’(念念不間斷, 時時提撕, 時時擧覺.)라고 하는 화두 참
구의 일반적 방법을 들려준다.
옛날부터 부처와 조사가 어찌 하나의 법이라도 사람들에게 준 일이 있었
겠습니까! 만약 하나의 법이라도 전하거나 받은 일이 있었다면 불법이 어
찌 오늘날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옛날 남인도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 중
에는 복업309)을 믿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14조 용수(龍樹)310)가 특별한 뜻
을 품고 가서 그들을 교화했습니다. 그 나라 대중들이 용수에게 말했습니
다. “사람에게 복업은 세간에서 가장 좋은 일인데 한갓 불성(佛性)만 말씀
하시니 누가 그것을 본다는 말씀입니까?” “당신들이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먼저 아만311)을 없애야 합니다.” “불성은 큽니까, 작습니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으며, 복도 없고 과보도 없으며, 죽
지도 않고 살지도 않습니다.”312) 이것이 바로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보여준
실례이니, 그 일단의 대중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바른 이치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당사자에게 달려 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들이 세상에 나타나시고, 달마대사가 인
도로부터 중국에 왔지만 하나의 법도 사람들에게 준 적은 없었다.”라고 한
말이 그 도리를 가리킵니다. 불법에는 대단한 것이 없으나313)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것을 아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상공께서는 다행히 연세
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아 적절하며, 기민한 지혜도 넘치거나 모자라는
차이가 없고,314) 매일같이 대상과 응하는 경계에서 스스로 경각하여 세간
의 망념에 물든 마음을 돌려 최상의 불과(佛果)인 보리(菩提)를 익히며 배
우고 있으니, 과거세에 반야의 종지(種智)를 심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315) 경전에서 “한 분의 부처님이나 두 분의 부처님 또는 셋
이나 넷이나 다섯의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선한 원인을 심은 것이 아니고,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만의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온갖 선한
뿌리를 심은 결과로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 자”316)라 하고, 또한 “부처님께
서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일체종지(一切種智)317)를 성취했다고 한다”318)
라고 한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공께서 이 뜻을 견고하게 다져 일
상생활에서 행위하는 모든 반경에서 다만 무심(無心)하게만 하신다면 자연
히 도(道)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추기만 한다
면 결코 속지 않을 것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그렇게 되기를 축원하고 또
축원합니다.
從上來諸佛諸祖, 豈可有一法與人哉! 若一法有傳有授, 佛法
豈到今日也? 昔南印度, 彼國之人, 多信福業. 十四祖龍樹,
特往化之. 彼衆曰,“ 人有福業, 世間第一, 徒言佛性, 誰能見
之?” 龍樹曰,“ 汝欲見佛性, 先須除我慢.” 彼衆曰,“ 佛性大
小?” 祖曰,“ 非大非小, 非廣非狹, 無福無報, 不死不生.” 此乃
直示心體也, 彼一衆聞之, 皆悟正理. 然, 悟在當人, 不從他得.
故云,“ 諸佛出世, 祖師西來, 無有一法與人.” 便是這箇道理.
佛法無多子, 久長難得人. 相公幸自春秋不老不少, 機智無過
不及之差, 於日用應緣處, 能自警覺, 廻世間妄染底心, 習學無
上佛果菩提, 非夙植般若種智, 焉能如是乎? 不見經云, “非於
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因,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生淨信者.” 又云,“ 佛說是人, 名爲成就一切種智.” 願公堅固
此志, 於日用四威儀內, 但自無心去, 自然合道. 但辦肯心, 決
不相賺. 至祝至祝.
309) 福業. pun ya-karma. 천계(天界)나 인계(人界) 등에 태어나는 복을 받는 선한
업을 말한다. “복업이란 선한 윤회의 길[天 또는 人]에 태어나는 과보를 초래하
거나 다섯 종류의 윤회[五趣]를 따라 태어나면서 선한 업을 받는 것을 말한다.”
(『瑜伽師地論』권9 大30 p.319c21. 福業者, 謂感善趣異熟, 及順五趣受善業.)
“복이란 재물이 많아 풍요롭다는 뜻이다. 선한 업을 일으켜 천계나 인계에 태어
나는 즐거운 과보를 불러일으키므로 복이라 한다.”(『百論疏』 권상 大42 p.239
a3. 福是富饒爲義. 起於善業, 招人天樂果, 故稱爲福.) 이러한 복업은 번뇌가 완전
히 사라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선한 것이므로 윤회의 고통을 모두 제거할 수 없는
유루(有漏)의 속성을 가진다.
310) Nāgārjuna. 인도 대승불교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창시자. 선종에서 인도로
부터 중국에 이르는 일련의 전등설(傳燈說)이 만들어지면서 용수가 계보상 제
14대 조사로 편입되었다.
311) 我慢. ātma-māna.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것을 자아 또는 자기 자신의 소유라
고 착각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기중심의 교만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헛된
자아를 진실한 것으로 오해함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
다. “아만이란 오취온을 자아와 자아의 소유라고 여겨서 이를 근거로 교만한 마
음을 일으키는 것이다.”(『大毘婆沙論』 권43 大27 p.225c18. 我慢者, 於五取
蘊, 謂我我所, 由此起慢.);“아만이란 무엇인가? 거만한 태도로 자아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을 의지하여 마음을 높이 들뜨게 하므로 아만이라 한다.”(『成唯識
論』권4 大31 p.22b1. 我慢者, 謂踞傲恃所執我, 令心高擧, 故名我慢.)
312)『景德傳燈錄』권1「龍樹傳」大51 p.210b2 참조.
313) 임제의현(臨濟義玄)의 말. 겉으로 드러난 말에 따르면, 불법에 특별한 점이 없어
별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법에는 잡다한 군더더기가 없이 핵심을 찌
르는 간명한 도리만 있으므로 그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역설적 뜻을 담고 있
다. “임제가 대우를 만나러 갔을 때 대우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황벽 문하
에서 왔습니다.’ ‘황벽이 어떤 말로 가르치던가?’ ‘제가 세 번 불법의 핵심적인
뜻을 물었다가 세 번 다 얻어맞았으나, 저에게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
니다.’ ‘황벽이 그토록 친절하게 그대가 사무치도록 가르쳐 주었는데 다시 여기
까지 와서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가!’ 이 말에 임제가 크게 깨닫고 말했다.
‘원래 황벽의 불법에는 대단한 것이 없었군요.’ 대우가 임제의 멱살을 잡고 말했
다. ‘이 오줌싸개야! 조금 전에는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묻더니 지금은 황벽의
불법에는 대단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구나! 그대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 임제가 대우의 옆구리를 세 번 주먹으로 찌르자 대우가 잡
은 멱살을 놓으며 말했다.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니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臨濟語錄』大47 p.504c19. 師到大愚, 大愚問, ‘什麽處來?’ 師云, ‘黃檗處來.’
大愚云, ‘黃檗有何言句?’ 師云, ‘某甲, 三度問佛法的的大意, 三度被打, 不知某
甲有過無過.’ 大愚云, ‘黃檗與麽老婆, 爲汝得徹困, 更來這裏, 問有過無過!’ 師於
言下大悟云, ‘元來黃檗佛法無多子.’ 大愚搊住云, ‘這尿床鬼子! 適來道有過無過,
如今却道, 黃檗佛法無多子! 爾見箇什麽道理? 速道! 速道!’ 師於大愚脅下築三拳,
大愚托開云, ‘汝師黃檗, 非干我事.’);“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을 어째서 모르는
것일까? 불법에는 잡다한 군더더기가 없으니, 다만 간명한 지름길이 필요할 뿐
이다.”(『佛眼語錄』古尊宿語錄32 卍118 p.567b16. 本有之性, 因什麽不會?
法無多子, 祇要省徑也.)
314)『大慧語錄』에는 “한창 나이인 장년”(春秋鼎盛之時)으로 되어 있다.
315) 이 부분까지는 대혜종고의 말을 답습하여 적은 것이다.
316)『金剛經』 大8 p.749b1 참조.
317) sarvathā-jñāna. 모든 존재의 공통적 특징인 적멸상(寂滅相)과 각각의 존재들
이 별도로 가지는 특징인 차별상(差別相)을 빠짐없이 아는 지혜. 오로지 불과(佛
果)를 터득한 경지에서만 알 수 있으므로 불지(佛智) 또는 일체지(一切智)라고
도 한다.
318)『圓覺經』大17 p.917b15 참조.
● 임종게 臨終偈
백운선사가 세상을 떠날 시기가 닥치자 몇몇 제자들에게 말했다. “옛사
람이 말하기를 ‘항상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이치를 알아차리고, 하나의
법이라도 분별의 틀(情)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지 마라. 이것이 모든 부
처님께서 마음을 쓰는 경지이니, 그대들은 부지런히 수행하도록 하라.’319)
라고 하였다. 나는 이제 물거품처럼 사라지겠지만 슬픈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師臨行, 示二三兄弟曰,“ 古人云,‘ 常了一切空, 無一法當情.
是諸佛用心處, 汝等勤而行之.’ 我今漚滅, 不可興悲.”
319)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분주무업(汾州無業 760~821)이 임종하기 전에 제
자들에게 했던 말이다.『佛祖歷代通載』권15 大49 p.627a2,『釋氏稽古略』권3
大49 p.835c3 참조.
인생 70세는 예부터 드문 일.
77년 전에 왔다가 77년 뒤에 가노라.
곳곳마다 돌아갈 길이요, 하나하나가 모두 고향이거늘,
어찌 반드시 배를 타고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이 몸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또한 머물 곳이 없으니,
재를 만들어 사방에 뿌리고, 신도들의 땅을 차지하지 마라.
人生七十歲 古來亦希有
七十七年來 七十七年去
處處皆歸路 頭頭是古鄕
何須理舟楫 特地欲歸鄕
我身本不有 心亦無所住
作灰散四方 勿占檀那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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