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나옹선사 어록

懶翁語錄 나옹어록

실론섬 2016. 8. 31. 18:01

懶翁語錄 나옹어록

 

● 광제선사 개당법회 廣濟禪寺開堂

● 신광사 주지가 되어 절에 들어가는 날 神光寺入院

● 결제상당 1 結制上堂

● 해제상당 解制上堂

● 내원당에서의 보설 入內普說

● 소참 小參

● 제야소참 除夜小參

● 보설 普說

● 욕불상당 浴佛上堂

● 결제상당 2 結制上堂

● 달마상에 점안하다 達磨開光祝筆

● 지공화상 탄생일에 指空和尙誕生之晨

● 지공의 입적일 1 入寂之辰

● 지공의 입적일 2 又

● 지공의 입적일 3 又

● 지공의 입적일 4 又

● 시중 示衆

● 입문삼구 入門三句

● 삼전어 三轉語

● 17일 수어 十七日垂語

● 공부십절목 工夫十節目

● 왕사로 봉숭되는 날의 보설 王師封崇日普說

● 일주수좌에게 주는 법어 示一珠首座

● 굉장주에게 주는 법어 示宏藏主

● 각성선화에게 주는 법어 示覺成禪和

● 상국 목인길에게 주는 법어 示睦相國 仁吉

● 득통거사에게 주는 법어 示得通居士

● 상국 이제현에게 보내는 답신 1 答李相國 齊賢

● 상국 이제현에게 보내는 답신 2 又

● 지신사 염흥방에게 주는 법어 示知申事廉興邦

● 지공화상의 기골불사에서 指空和尙起骨

● 입탑 入塔

● 각오선인에게 주는 법어 示覺悟禪人

● 지여상좌를 위한 하화 법문 爲智如上座下火

● 두 스님을 위한 하화 법문 爲二僧下火

● 신백대선사를 위한 살골 법문 爲申白大禪師撒骨

● 지보상좌를 위한 하화 법문 爲志普上座下火

● 숙령옹주 묘선에게 올리는 법어 示淑寧翁主 妙善

● 누이에게 답하는 편지 答姝氏書

● 대어 代語

● 감변 勘辨

● 착어 着語

● 결제 때 법좌에 올라 행한 보설 結制上堂普說

● 해제일상당 解制日上堂

 

● 광제선사 개당1)법회 廣濟禪寺開堂
1) 開堂. 주지 또는 방장으로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것. 또는 임금의 생일
   에 경전을 한역하여 바치고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 포괄적으로는 선종의
   종지를 드러내고 임금의 무병장수를 축원하거나 모든 중생에게 복이 깃들기를
   염원하는 것 등이 모두 개당에 해당한다.『祖庭事苑』권8 卍113 p.235a15 참조.


나옹선사가 강남2) 일대에서 행각3)을 마치고 대도(大都)4)로 돌아와 연대
(燕代)5)의 산천을 유섭(遊涉)6)하였다. 불도를 수행한 선사의 공덕이 궁중
에 알려지게 되면서 을미년(1355) 가을에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광제선사
에 주석하였다. 병신년(1356) 시월 보름에 개당법회가 열리자 황제는 금란
가사7)와 상아 불자를 하사하였다. 이날 제방의 장로·강호의 납자·문무 관
료들 중 모이지 않은 자가 없었다.
師, 自江南行脚畢, 還大都, 遊涉燕代山川. 道行聞于內, 乙未
秋, 奉聖旨, 住廣濟禪寺. 丙申十月望, 設開堂法會, 賜金襴袈
裟·象牙拂子. 是日, 諸山長老·江湖衲子·及諸文武官僚, 無
不集會.
2) 江南. 중국 장강(長江) 이남 지역. 곧 강소성·안휘성 남부 지방과 절강성 일대.
3) 行脚. 白雲語錄 주석80) 참조.
4) 원나라 때의 수도. 현재 중국의 북경(北京)에 해당한다.
5) 현재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서북부와 산동성(山東省) 북부 지역.
6) 행각·유력(遊歷) 등과 모두 통하는 말. 白雲語錄 주석80) 참조.
7) 金襴袈裟. 원나라 순제(順帝)가 하사한 것이며, 금란가사는 선종사적으로 불법
   을 정통으로 계승한 자에게 전한다는 뜻을 지닌다.『景德傳燈錄』권1 釋迦牟尼
   佛傳」大51 p.205c3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금루승가리의(金縷僧迦梨衣)를 가섭
   에게 전해주면서 자씨불이 세상에 출현할 때까지 잘 간직하도록 당부했다고 한
   다(復告迦葉, ‘吾將金縷僧迦梨衣, 傳付於汝, 轉授補處, 至慈氏佛出世, 勿令朽壞.’). 
   또한 “가섭이 승가리의를 지니고 계족산(雞足山)에 들어가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
   하기를 기다렸다.”(같은 책「摩訶迦葉傳」p.206b5. 持僧伽梨衣, 入雞足山, 候慈
   氏下生.)는 기사들이 그러한 전통의 근거가 되었다.

스님이 가사를 받고 들어 올리며 황제의 사자[天使]에게 물었다. “산하
와 대지 그리고 초목과 총림 하나하나가 모두 법왕의 몸인데 이것을 어디
에 입힐까요?” 사자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스님이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다 입힙니다.” 스님이 다시 대중에게 말했다. “맑
고 텅 비고 고요하여 본래 그 어떤 것도 없는데 찬란한 이 가사는 어디에
서 나왔는가?” 대중이 대답이 없자 스님이 말했다. “구중궁궐에 사는 황제
의 입[金口]에서 나왔다.” 이윽고 가사를 입은 다음, 향을 피워 황제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고 나서 법상에 올라앉아 주장자를 가로로 잡고 말하였다.
“내가 이제 날카로운 검을 남김없이 휘둘러 엄정한 명령8)을 시행할 것이니
머뭇거리며 분별하는 순간 목숨을 잃으리라. 칼날에 맞설 자 있는가? 있는
가? 있는가? 순풍이 불어와 바다를 건너기 아주 적합한데도, 여기서는 배
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겠구나.”9) [세속적인 감사의 인사를 했으나
기록하지 않았다.]10)
師受袈裟提起, 問天使云,“ 山河大地, 草木叢林, 盡是一箇法
王身. 未審這箇向甚麽處披?” 天使云,“ 不識.” 師指左肩云,
“向這裏披.” 師又問大衆云, “湛然空寂, 本無一物, 燦兮爛兮,
從何而出?” 衆無對, 師曰,“ 九重宮金口中.” 乃披, 拈香祝聖
罷, 陞座橫按拄杖云,“ 利劒全提, 正令當行, 擬議之閒, 喪身
失命. 還有當鋒底麽? 有麽? 有麽? 正好一帆風過海, 此中不
遇駕舟人. [世謝不錄.]
8) 정령(正令). 언어와 사고에 기반한 어떤 방편도 허용하지 않고 발휘하는 종지
   (宗旨)를 엄격한 법령에 비유한 말.
9) “내가 이제 ~ 만나지 못하겠구나.” 원(元)나라 임제종 앙산정우(仰山正友
   1285~1352)의 상당법어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주석한 다음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지혜의 칼 하나만 들고서 엄정한 법령을 분명하게 시행할 것이니 머뭇
   거리며 분별하고 따라오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으리라. 칼날에 맞설 자 있는가?’
   침묵하다가 ‘순풍이 불어와 바다를 건너기 아주 적합한데도, 여기서는 파도를
   제대로 탈 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한 뒤 한 소리 크게 내질
   렀다.”(『南宋元明禪林僧寶傳』권10 卍137 p.717b12. 住後上堂曰, ‘慧劍單持, 
   明行正令, 擬議不來, 喪身失命. 還有當鋒底麽?’ 良久云, ‘正好一帆風過海, 箇中
   不遇駕濤人.’ 喝一喝.)
10) 오로지 선사의 본분에 입각한 법문의 내용만 기록하고 황제의 하사품에 사례하
    는 인사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뜻.


불자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역대의 조사들·천
하의 노련한 화상들이 모두 산승(山僧)11)의 불자 위에서 크나큰 빛을 발하
며 서로 다른 입이지만 같은 목소리로 우리의 황제를 받들어 축원하고 있
다. 대중들이여! 보이는가? 만약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눈은 있지만 맹
인과 같으며, 만약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12)
알겠는가? 보았거나 보지 못했거나, 이해했거나 이해하지 못했거나 그 양
단은 모두 집어서 한편에 치워두고 결국 이것은 무엇일까?” 불자를 내던지
고 말했다. “모우[氂牛]의 꼬리털로 만든 불자도 모르느냐!”13) 곧바로 법좌
에서 내려왔다.
竪起拂子云,“ 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老和尙, 盡在山僧拂
子頭上, 放大光明, 異口同音, 奉祝我皇帝. 大衆! 還見麽? 若
道不見, 有眼如盲;若道有見, 且作麽生見? 還會麽? 見與不
見, 會與不會, 拈向一邊, 畢竟是箇甚麽?” 擲下拂子云, “氂牛
拂子也不識!” 便下座.
11) 자신에 대한 겸칭.
12) 본다는 것과 보지 못한다는 양단을 모두 틀어막아 마음으로 분별하고 모색할 길
    이 전혀 없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마주하
    도록 이끄는 것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법문에 본 어록과 통하는 내용이 있
    다. “다시 불자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석가노자께서 오셨다! 보이는가? 만약 보
    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눈은 있으나 맹인과 같다. 만약 보인다고 한다면, 말해 보
    라! 불자의 안에 계시는가, 불자 밖에 계시는가? 아니면 불자 중간에 계시는가?
    설령 그대가「안에도 계시지 않고, 밖에도 계시지 않고, 중간에도 계시지 않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나타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나의 문하에서
    는 몽둥이맛을 보아야 할 잘못이다.’”(『大慧語錄』권2 大47 p.818b13. 復擧起云, 
    ‘釋迦老子來也! 還見麽? 若道不見, 有眼如盲. 若道見, 且道! 在拂子內? 拂子外? 拂
    子中間? 直饒爾道, 「不在內, 不在外, 不在中間, 恁麽見得分明.」, 徑山門下正好喫
    棒.’)
13) 불자를 들고서 그것에 있지도 않은 부처와 조사가 앉아 있다고 설정하여 은산
    철벽의 관문(關門)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우불자’를 제
    시한 법문이다. 유사한 방식이 초석범기의 어록에도 보인다. “불자를 꼿꼿이 세
    우고 ‘이것은 무엇인가?’라 하고 다시 말했다. ‘진미불자도 모르는가!’”(『楚石梵
    琦語錄』권2 卍124 p.80a5. 竪拂子云, ‘是什麽?’ 復云, ‘塵尾拂子也不識!’) 진미
    (塵尾)    는 불자의 다른 이름. 먼지를 터는 털이라는 뜻.

● 신광사 주지가 되어 절에 들어가는 날14) 神光寺入院
14) 입원(入院). 太古語錄 주석4) 참조.

나옹선사가 삼문15)에 이르러 손으로 삼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상 전
체가 바로 해탈문이다. 대중들이여! 그 문에 들어가 본 적 있는가? 만약 들
어가 보지 못했다면 나를 따라 앞으로 가자.” 보광명전16)에 이르러서 말했
다. “비로자나불의 정수리를 밟았더라도, 여전히 더러운 발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17) 말해 보라! 무엇을 향해 절을 올릴 것인가?” 손으로 비로자나
불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절을 올릴 일이 생겼습니다.”18)
師到三門, 以手指云, “盡大地是箇解脫門. 大衆! 還曾入門麽?
若也未入, 隨我向前.” 至普光明殿云, “蹋着毗盧頂上, 猶是染
底漢. 且道! 禮拜箇什麽?” 以手指像云,“ 因我得禮你.”
15) 三門. 白雲語錄 주석1) 참조.
16) 普光明殿. 白雲語錄 주석5) 참조.
17)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극치에 이르더라도 그것마저 버려야 한다는 뜻.
18)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가 제시한 말이다. 이후 불전(佛殿) 앞에서 향을 사
    르고 던지는 화두로 정착되었다. “현사가 어떤 학인이 와서 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절을 올려라! 그로 인하여 내가 그대에게 절할 일이 생겼구나.’”
    (『景德傳燈錄』권18「玄沙師備傳」大51 p.346b16. 師見僧來禮拜. 乃曰, 
    ‘禮拜著! 因我得禮拜汝.’);“눈앞에는 학인이 없고, 법좌에 노승도 없다. ‘내가 
   그대에게 절할 일이 생겼다.’라고 하니, 저울의 기준점을 실물로 착각하는 격이
    다.”(『愚菴語錄』권7 卍124 p.346a4. 目前無闍梨, 座上無老僧. 因我得禮你, 
    錯認定盤星.)

이어서 방장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19) 말했다. “이 방은 부처를 불리고 조
사를 담금질하는 커다란 화로이다.”20) 주장자를 잡고서 말했다. “이것은 부
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날카로운 칼이다. 대중들이여! 이 칼 아래에서
몸을 자유롭게 뒤척일 수 있는 자 있는가? 나와도 좋다. 나와도 좋다.” 주장
자를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면서 말했다. “바로 이 우리 가문의 적통을 이
은 자손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이 안에서 운신할 수 있겠는가?” 한 소리 크
게 내지르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次到據室云,“ 此室, 是烹佛烹祖底大爐.” 拈拄杖云,“ 這箇,
是煞佛煞祖底利劒, 大衆! 還有劒下翻身底麽? 不防出來, 不
防出來.” 卓拄杖杖一下云,“ 除是我家親嫡子, 誰人敢向裏頭
行?” 喝一喝, 便下座.
19) 거실(據室). 太古語錄 주석17) 참조.
20) 방장을 대장간의 화로[鑪, 爐]와 풀무질하는 통[鞴]에 비유한 말. 장인(匠人)이
    쇠를 담금질하여 물건을 만들듯이 학인을 단련시키는 가르침을 이렇게 비유한
    다. 팽(烹)은 쇠를 불리고 정련한다는 뜻의 야련(冶煉)이다. 부처와 조사를 만들
    기 위해 거친 범부를 달구고 삶는다는 뜻이다. “주지가 되어 처음으로 절에 들
    어가[入院] 방장을 가리키며 대중들에게 말했다. ‘이곳은 부처를 불리고 조사를
    담금질하는 화로이며, 생사(生死)를 단련하는 지독한 집게와 망치이다.’”(『大慧
    語錄』권5 大47 p.830a6. 入院指方丈, 召大衆云, ‘這裏, 是烹佛烹祖大鑪韝, 鍛生
    鍛死惡鉗鎚.’)

이어서 상당 의식21)을 치렀다. 향을 사르고 황제의 장수를 기원한 다음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산승은 오대산을 떠나기 이전에 벌써 여러분에
게 지금의 일을 다 말해버렸다.22) 바로 지금 손님과 주인이 만나서 서고 앉
는 구별23)이 뚜렷해지고보니 벌써 번잡한 일이 되고 말았거늘, 다시 산승
이 모래 던지고 흙 뿌리기를 기다린다면24) 구름 너머 만 리의 거리로 목적
지에서 아득히 멀어질 것이다.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공적인 일로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허용하지 않아도, 사사롭게는 수레나 말도 통과시키는
법이다.25) 내 말을 알아듣는 자 있는가?”
次上堂. 拈香祝聖罷, 陞座云,“ 山僧未離臺山已前, 早爲諸人
說破今日事了也. 卽今賓主相參, 坐立儼然, 已成多事, 更待山
僧, 抛沙撒土, 白雲萬里. 雖然如是, 官不容針, 私通車馬. 還
有知音者麽?”
21) 입원의 마지막 행사로 치러진다. 이 법문에서는 본분을 견지하며 조금의 방편
    도 허용하지 않는 경계와 모든 것을 허용하여 누구나 출입하도록 열어 놓는 방
    편의 길을 대비시키고 있다.
22)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법문에도 유사한 취지가 보인다. “법좌에 올라앉아 ‘산승
    이 고향을 떠나기 80일 전에 벌써 여러분에게 지금의 일을 다 말해버렸다. 지금
    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라고 한 뒤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大慧語錄』권3 
    大45 p.821b20. 上堂, ‘山僧未出鄕, 八十日已前, 早爲諸人道破今日事了也. 作
    麽生今日事?’ 喝 一喝.) 이러한 형식은 무차별의 경계를 제시하는 선종의 일반
    적인 화두이다. “(부처님은)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고, 
    모태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 중생 제도를 마쳤다.”(『圜悟語錄』권19 大47 
    p800c17. 未離兜率, 已降王宮;未出母胎, 度人已畢.)
23) 앉아서 설법하는 나옹 자신(주인)과 서서 설법을 듣는 대중(손님).
24) 이미 다 이루어졌는데 쓸데없이 법문을 더 듣고자 한다는 뜻. “손님과 주인을 세
    우는 것은 멀쩡한 살결에 흠집을 내는 꼴이 되고 고금의 도리를 들어 밝히더라
    도 깨끗한 곳에 모래와 흙을 뿌리는 격이니 그 자리에서 일이 없는 경지가 바로
    구멍 없는 쇠망치인 것이다. 여기에 별도로 기관(機關)이 있다고 여긴다면 반드
    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雪竇禪師語』續古尊宿語要2 卍118 p.892a7. 
    立賓立主, 剜肉作瘡;擧古擧今, 抛沙撒土, 直下無事, 正是無孔鐵槌. 別有機關, 
    合入無間地獄.) 구멍 없는 쇠망치는 더 이상 분별할 여지가 없는 궁극의 경계를 
    말한다.
25) 궁극적으로는 언어와 분별의 길이 모두 막혀 어떤 수단도 허용되지 않지만, 방
    편으로 전하는 길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뜻이다. 공적이라는 것은 말로 드러내
    기 이전의 경계이고, 사사롭다는 것은 방편적 말로 드러내는 경계를 가리킨다.


문답이 끝나고서 말했다. “티끌같이 무수한 국토26)마다 터럭 하나도 남
아 있지 않으나, 매일같이 분명하게 살아갈 수단이 어디에나 드러나 있
다.27)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두침침하지만,28) 쓰기만 하면 한계도 없
이 밝고 뚜렷하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그 위풍에 굴복하며, 역대의 조사
들도 삼천 리 뒤로 물러난다.29) 생각해 보라! 이것은 어떤 것이기에 이와
같이 기특한가? 잘 알겠는가? 만약 잘 알았다면, 어느 곳에서든 상(相)도
떠나고 명(名)도 떠나며, 삿된 것을 막고 바른 것을 드러내며, 가로로 집어
들었다가 거꾸로 시행하기도 하고, 죽이거나 살리는 것에 자유자재할 것이
다. 또한 한 줄기 풀로 1장 6척의 금신(金身)30)을 만들고, 1장 6척의 금신으
로 한 줄기 풀을 만들 것이다.31)” 불현듯 주장자를 잡고 왼쪽으로 올렸다가
내리치며 말했다. “이것이 한 줄기 풀이다. 어떤 것이 1장 6척의 금신인가?”
다시 오른쪽으로 올렸다가 내리치며 말했다. “이것이 1장 6척의 금신이다.
어떤 것이 한 줄기 풀인가?32) 만약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른 안목을 제시한
다면, 황제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33)를 한꺼번에 갚기에 충분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각자 거처하는 방으로 돌아가 자세히 살펴보아라.”
問答了, 乃云, “塵塵刹刹, 沒一纖毫, 日日堂堂, 現成活計. 看
時不見, 暗昏昏;用則無窮, 明歷歷. 三世諸佛, 立在下風;歷
代祖師, 退後三千. 且道! 是什麽物, 得恁麽奇特? 還委悉麽?
若能委悉, 於一切處, 離相離名, 摧邪現正, 橫拈倒用, 煞活自
在. 將一莖草, 作丈六金身;將丈六金身, 作一莖草.” 驀拈拄
杖, 左邊卓一下云,“ 這箇是一莖草, 那个是丈六金身?” 右邊
卓一下云,“ 這箇是丈六金身, 那箇是一莖草? 若向這裏提得
去, 皇恩佛恩一時報足. 其或未然, 各各歸堂, 子細看.”
26) 진진찰찰(塵塵刹刹). ‘찰’은 ks3etra의 음사어인 흘차달라(紇差呾羅)·찰다라(刹
     多羅)·차다라(差多羅) 등을 약칭한 음사어이다. 이것은 국토라는 뜻이며, 범어
     음사어와 한자를 합하여 찰토(刹土)라고도 한다. 티끌 하나하나마다 국토가 있
     다는 설에 기초한다. 眞覺語錄 주석31) 참조.
27)『大慧語錄』권2 大47 p.819b24에 동일한 구절이 보인다.
28)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말을 활용한 구절. “사람마다 누구나 광명을 가지고 있으
    나, 보려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두침침하다.”(『雲門廣錄』권상 大47 p.553a8. 人
    人自自有光明在, 看時不見暗昏昏.)
29) 주석27)『大慧語錄』에 이어지는 구절에는 “역대의 조사들도 혼이 흩어지고 간
    담이 상한다.”(諸代祖師, 魂飛膽喪)라고 되어 있다.
30) 부처님의 몸. 白雲語錄 주석13) 참조.
31)『圜悟語錄』권7 大47 p.746c26에 동일한 구절이 보인다. 조주종심(趙州從諗)의
    다음 말에서 유래한다. “노승은 한 줄기 풀을 집어서 1장 6척의 금신의 용도로
    삼고, 1장 6척의 금신을 집어서 한 줄기 풀의 용도로 삼는다. 부처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부처다.”(『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卍118 p.310a16. 老僧, 把一枝草, 
    作丈六金身用;把丈六金身, 作一枝草用. 佛卽是煩惱, 煩惱卽是佛.) 풀은 무명초
    (無明草)와 유사한 뜻으로 무명과 번뇌 등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32) 금신과 풀을 마음대로 뒤바꾸면서 위에서 말한 자유자재한 활용을 시현해 보이
    는 장면이다. 선사들의 상당법문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수단이다. 眞覺語錄 주
    석228) 참조.
33) 두 가지 은혜는 사은(四恩)에 해당한다. 白雲語錄 주석151) 참조.

● 결제상당 1 結制上堂

나옹선사가 법좌 앞에 이르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결정적
인 한 물건34)이여! 수많은 사람이 오르지도 못했고 밟지도 못했다. 산승이
이곳에 왔으니, 흐르는 물소리를 여유롭게 밟아 잠잠하게 만들고, 눈길 가
는 대로 보고서 새 날아간 자취를 그려내리라.35)” 향을 사르고 말했다. “모
든 백성에 골고루 미친 요임금의 어진 성품은 만물을 비치는 해와 달의 크
나큰 광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온 세상을 두루 새롭게 만든 탕임금의 덕
은 하늘과 땅의 변하지 않는 굳건함과 어울렸다.36) 산승이 손 가는 대로 향
을 집어 향로에 사르는 까닭은 오로지 황제폐하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師到法座前, 以手指云,“ 這一着子! 多少人, 登不到蹋不着.
山僧到來, 等閑蹋斷流水聲, 縱觀寫出飛禽跡.” 拈香云, “堯仁
廣被, 齊日月之盛明;湯德彌新, 並乾坤之久固. 山僧信手拈
來, 爇向爐中, 端爲祝延聖上陛下. 萬歲! 萬歲! 萬萬歲!”
34) 일자(一着子). 여기서는 법좌를 말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곧바로 지시하여
    근본을 나타내는 직지(直指)의 방법이다. 白雲語錄 주석42) 참조.
35) ‘여유롭게 ~ 그려내리라.’ 설두중현(雪竇重顯)의 게송에 나오는 구절. 단, 등한
    (等閑)은 서행(徐行)으로 되어 있다.『碧巖錄』6則「頌」 大48 p.146b14.
36)『大慧語錄』 권6 大47 p.834a2에 동일한 구절이 나온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쇠뇌의 방아쇠를 당겨서 겨누니 눈도 밝고, 화
살이 과녁을 꿰뚫으니 손도 능숙하다.37) 눈도 밝고 손도 능숙하여 방아쇠
를 당겨서 겨누고 과녁을 꿰뚫을 사람 없는가? 있다면 나와 보라!” 어떤 학
인이 나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38) 중간
에 멈추어 서서 물었다. “스님은 법좌에 올라앉아 계시고 저는 법문을 들으
러 올라왔습니다. 이것은 어떤 소식입니까?” “동쪽이건 서쪽이건 기분 나
는 대로 내달려라.” “화상께서는 방장실에서 나와 보좌(寶座)에 오르셨고,
저는 적묵당(寂默堂)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전의 그곳에 또 다른 몸이
남아 습니까?39)” “있다.” “터럭 하나에 국토40)가 간직되어 있고, 개자 하
나에 수미산이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까?”41) “그렇다.” “종문(宗門) 중의 일
은 묻지 않겠습니다. 북숭봉 앞에 드러난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산문42)
은 전 그대로 남쪽으로 열려 있다.” “그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
까?”43) “눈은 가로로 코는 세로로 붙어 있어 모두 비슷비슷하다.”44)
陞云,“ 弩發機而眼判,45) 箭破的而手親. 莫有眼判手親, 發
機破的,“ 和尙陞座, 學人上來, 未審是甚時節?” 師云,“ 一任
東西馳走.” 問, “和尙, 自方丈裏, 來到寶座;學人, 從寂默堂
中, 來到這裏. 未審彼處還更有身不?” 師云, “有.” 學云, “莫
是毛端藏刹海, 芥子納須彌麽?” 師云, “是.” 進云, “宗門中事
卽不問, 如何是北崇峰前境?” 師云,“ 山門依舊向南開.” 問,
“如何是境中人?” 師云,“ 眼橫鼻直皆相似.”
37) “두 큰스님(趙州와 茱萸)은 눈도 밝았고 손도 능숙하여 화살을 헛되게 쏘지 않았
    다. 설두는 비록 사람을 죽이는 칼은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을 살리는 칼은 없었
    다.”(『古林淸茂語錄』권3 卍123 p.461a4. 二大老, 眼辨手親, 箭不虛發. 雪竇, 
    雖有殺人刀, 且無活人劍.)
38) 덕산선감(德山宣鑑)이 위산영우(溈山靈祐)의 처소에 가서 행한 인연과 같다.
    “덕산이 위산에게 법을 물으러 와서 바랑을 옆구리에 낀 채 법당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방장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위산이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자 덕산
    은 ‘없구나, 아무도 없어!’ 하고는 곧바로 나갔다.”(『溈山語錄』大47 p.578a10. 
    德山來參, 挾複子上法堂, 從西過東, 從東過西, 顧視方丈云, ‘有麽? 有麽?’ 師
    坐次, 殊不顧眄, 德山云, ‘無, 無!’ 便出.)
39) 문답하는 바로 이 장소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방장실과 적묵당에도 몸이 있느
    냐는 질문. 육긍대부와 남전 사이에 동일한 형식의 문답이 전한다. “육긍대부가
    남전에게 물었다. ‘제자는 육합(六合:天地四方)에서 왔습니다. 그 육합 전체에
    또 다른 몸이 남아 있습니까?’ 남전이 말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가 작가(뛰
    어난 종사)를 만나면 문제로 제기해 보시오.’”(『景德傳燈錄』권8 大51 p.258b8. 
    陸亘大夫問云, ‘弟子從六合來, 彼中還更有身否?’ 師云, ‘分明記取, 擧似作家.’)
40) 찰해(刹海). 찰토(刹土)와 같은 말. 眞覺語錄 주석31) 참조.
41) 용문불안(龍門佛眼)의 말로 화엄의 교설에 입각한다.『佛眼禪師語錄』古尊宿語
    錄27 卍118 p.507b18 참조.
42) 山門. 삼문(三門)과 같다. 白雲語錄 주석1) 참조.
43) 절이나 산(북숭봉)과 같은 그 현장의 풍경(경계)을 소재로 삼아 묻고 다시 그 안
    에 사는 사람에 대하여 묻는 방식은 조사선의 일반적 문답양식 중 하나이다.
    “분양이 법좌에 올라앉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분양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자하봉은 높아 오른 자가 드물고 서하의 물은 높이 차올라 나루터를 묻는 자
    가 많다.’ ‘그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앉아서 바람의 방향과 세기
    를 찬찬히 살핀 다음 향을 사르고 등불[聖燈]을 밝힌다.’”(『汾陽語錄』권상 
    大47p.605c18. 上堂僧問, ‘如何是汾陽境?’ 師云, ‘子夏峰高登者少, 西河水滿
    問津多.’ ‘如何是境中人?’ 師云, ‘坐久看風信, 燒香燭聖燈.’)
44) 안횡비직(眼橫鼻直). 그 자리에서 누구나 감각적으로 알 수 있지만 더 이상 말과
    분별이 붙을 수 없는 도리. 조작이 없는 평상 그대로요 이전과 변함이 없는 소식
    이지만 동시에 깨닫고 난 다음의 진일보(進一步)한 경계이기도 하다. “만약 다
    시 이러니저러니 말로 표현한다면 조계로 뻗은 한 길은 평지에서 침몰할 것이
    다. 그런 까닭에 옛날부터 성인이라면 누구나 화염 속에서 나와 손을 드리워 중
    생을 가르치면서 다만 모든 사람이 눈은 가로로 코는 세로로 붙어 있는 그대로
    살기를 바랐을 뿐이다.”(『白雲守端廣錄』권1 卍120 p.400b15. 若言更有如何
    若何, 曹溪一路平沈. 所以, 從上諸聖, 皆向火焰裏, 出來垂手, 只要一切人, 眼橫
    鼻直去.);“‘사람 안의 경계란 어떤 것입니까?’ ‘보배 누각이 허공을 능멸하며 
    금방울을 울리고, 구불구불 기괴한 소나무에서 원숭이가 운다.’ ‘경계 안의 사
    람은 어떻습니까?’ ‘코는 세로로 눈은 가로로 붙어 있다.’”(『五祖法演語錄』 
    권20 卍118 p.411b14. 問, ‘如何是人中境?’ 師云, ‘寶閣凌空金鐸響, 怪松隈
    險野猿啼.’ 學云, ‘如何是境中人?’ 師云, ‘鼻直眼橫.’) 眞覺語錄 주석16) 참조.
45) ‘判’은 ‘辨’이 옳다. 안변(眼辨)은 눈이 밝다는 뜻인 안명(眼明)과 같은 말이다.

“사람과 경계에 대해서는 이미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이상 향
46)하고자 하면 할 일이 또 있습니까?47)” “있다.” “그렇다면 향상하는 하
나의 길을 표현하는 말은 어떤 것이며, 지극한 말로 드러낸 미묘한 이치는
어떤 종지입니까? 아니면 이러한 말조차 천 리 밖으로 쓸어 없애야 이것이
바로 우리 종문의 근본적인 기틀[第一機]이라는 말입니까? 근본적인 뜻[第
一義]은 어떤 것입니까?” “네가 물었다는 사실 자체가 근본에서 멀어진 뜻
[第二義]이다.48)” “그렇다면 ‘장부에게는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개가 있
어서 여래가 간 길로는 가지 않는다.’49)라는 말씀이시군요.” “네가 알 수 있
는 경계가 아니다.”
進云, “人境已蒙師指示, 向上, 還有事也無?” 師云, “有.” 進
云, “恁麽則向上一路作麽語, 至言妙理是何宗? 蕩盡此言千
里外, 是則吾宗第一機? 作麽生是第一義?” 師云,“ 你問底是
第二義.” 進云, “恁麽則丈夫自有衝天志, 不向如來行處行.”
師云,“ 非你境界.”
46) 向上. 부처와 조사의 지위 또는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르는 것.
47)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원오극근(圜悟克勤)은 “흙에다 다시 진흙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라고 대답했다.(『圜悟語錄』권9 大47 p.754b8. 進云, ‘人境已蒙師指示, 向上
    還有事也無?’ 師云, ‘不可土上更加泥.’)
48) “근본적인 뜻 ~ 멀어진 뜻이다.” 죽암사규(竹庵士珪)에게도 동일한 문답이 있
     다.『續傳燈錄』권29 大51 p.668a16 참조.
49)『續傳燈錄』권7「楊岐方會傳」大51 p.507b26,『大慧語錄』권3 大47 p.822b7 등에
    도 보인다.

“지금 많은 관료와 선비들이 특별히 상당법문을 청하여 이곳에 왔습니
다. 말과 구절을 드러내어 설법하거나, 향을 들고 사르며 축원하거나,50) 
선상(禪床)에 올라 자리 잡고 앉거나, 주장자를 가로로 잡았다 뒤집어 휘둘렀
다 하는 동작 등이 모두 화상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의 방편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아니다.” “화상의 본분에서 나오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이에
스님이 불자를 꼿꼿이 세웠다. “오랑캐와 전쟁을 치르는 30년 동안 소금과
간장이 모자란 적은 없었습니다.”51)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제가 듣기
로 스님께서 평산52)스님을 친견53)하셨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그렇다.”
“무엇이 천축산에서 평산이 스님께 직접 전한 한마디입니까?” 스님이 불자
로 선상을 한 번 쳤다.
問,“ 今日諸官僚士庶, 特請上堂, 來到這裏. 發言吐句;擧香
祝香;上床就座;橫拈倒用底, 莫是和尙爲人處也無?” 師云,
“不是.” 進云, “如何是和尙本分底事?” 師竪起拂子. 進云,
“胡亂三十年, 不曾少鹽醬.” 師云,“ 莫說閑言語.” 進云,“ 學人
聞, 和尙親見平山, 是否?” 師云, “是.” 進云, “如何是天竺
山親傳底一句?” 師以拂子擊禪床一下.
50) 거향축향(擧香祝香). 상당법문을 하기에 앞서 축원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향
    을 들어서 사르 의식.
51) 각자 필수적인 살림살이는 갖추고 있어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 마
    조도일(馬祖道一)의 말이다. 남악회양이 마조도일의 견지를 점검하기 위해 제
    자를 보냈을 때 마조가 이렇게 말했고, 남악은 그 말을 인정해 주었다.『景德傳
    燈錄』권5「南岳懷讓傳」大51 p.241a23 참조. 그 뒤 마조는 제자인 백장회해
    (百丈懷海)에게 간장 세 항아리를 보내면서 이 말이 적힌 편지를 동봉했는데, 
    백장은 대중들 앞에서 주장자로 항아리를 깨뜨렸다. 『百丈語錄』 卍119 p.
    818b13 참조. “법진수일(法眞守一)의 게송:간장 세 항아리 보내어 먼 곳의 
    소식을 전했거늘, 도착한 그 자리에서 깨뜨려 대중이 놀랐다네. 아버지는 자
    애롭고 아들은 효성스러웠다는 사실을 누가 알 것인가? 선사들의 가문이 너
    무 매정하다고 말하지 마라.”(『禪門拈頌說話』183則 韓5 p.184c4. 法眞一
    頌:送醬三甁通遠信, 當時打破衆還驚. 父慈子孝誰相委? 莫道禪家大不情.) 
    ‘30년’에 대해서는 眞覺語錄 주석69) 참조.
52)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 임제종 선사. 항주(杭州:浙江省) 인화(仁和) 
    출신. 속성은 왕(王)씨. 12세에 출가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급암종신
    (及菴宗信) 문하에서 공부하고, 그 법을 이었다. 나옹은 1350년 8월에 평산을 친
    견했다. 주석169) 참조.
53) 친견은 단지 직접 만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 법을 전수받았거나 그 종지를 깨우
    쳤다는 뜻을 포함한다. 眞覺語錄 주석290) 참조.

“이곳 천고의 영남에 좋은 소식이 있으니, 지금 맑은 바람이 온 누리에
골고루 감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접어 두고, 오늘 스님께서 보좌에 높이 올
라앉으신 까닭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니니, 축성(祝聖)의 한마디를 말씀해주
시기 바랍니다.” 스님이 말했다. “만 년토록 지속된 태평성대에서 누리는
복은 변함이 없고, 문무(文武)의 4법(法)은 태양의 밝은 기운을 순조롭게
따른다.” 학인이 “온 세상이 모두 왕의 통치 안에 있으나, 촌노인을 번거롭
게 하며 태평한 세월을 치하하도록 만들지는 않는군요.54)”라고 말한 뒤 물
러나 삼배를 올렸다.
進云,“ 千古嶺南好消息, 今日淸風吹匝地. 此則且置, 今日高
陞寶座, 非爲他事, 祝聖一句, 請師道着.” 師云, “萬年聖日裏
福長, 文武四法隨大陽.” 進云,“ 四海五湖王化裏, 不勞野老賀
昇平.” 退禮三拜.
54) “무명의 진실한 성품 그대로 불성이로다:무명과 불성은 억지로 이름 붙여 생
    겼다네. 온 바다의 파도는 가라앉고 물은 맑아졌으며 때마침 단비가 충분히 내
    리지만, 촌노인을 번거롭게 하며 태평한 세월을 치하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證道歌頌』卍114 p.871b13. 無明實性卽佛性:兩處由來強立名. 四海晏淸
    時雨足, 不勞野老賀升平.)

또 어떤 학인이 나와서 물었다. “다른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학
인의 본분사입니까?” “옷 입고 밥 먹는 것이다.”55) “낱낱의 국토와 티끌 하
나하나가 분명하고 뚜렷한데, 분명하고 뚜렷한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스
님이 불자를 똑바로 세웠다. “향상하는 하나의 길은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
한다56)고 하는데 전하지 못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그대는 묻고 나는
대답했다.” 그 학인이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또 어떤 학인이 물었다.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히고 소리를 듣고 도를 깨우친다57)고 하는데 밝힌 마음은
무입니까?” 스님이 불자를 세웠다. “무엇이 깨우친 도입니까?” 스님이 한
소리 크게 내지르자, 그 학인은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又有僧出問云, “一切卽不問, 如何是學人本分事?” 師云, “着
衣喫飯” 又問,“ 刹刹塵塵明了了, 如何是明了底心?” 師擧起
拂子. 進云,“ 向上一路, 千聖不傳, 如何是不傳底事?” 師云,
“你問我答.” 僧卽禮而退. 又有僧問,“ 見色明心;聞聲悟道,
如何是明底心?” 師竪起拂子. 進云,“ 如何是悟底道?” 師便
喝, 僧禮拜而退.
55) 일상 그대로 무사(無事)의 경지를 발휘하는 평상심의 도를 나타낸다. “불법은
    애써 공들일 여지가 없으니, 다만 평상 그대로 특별히 꾸미는 일이 없을 뿐이다.
    대소변을 보고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
    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뜻을 알 것이다.”(『臨濟語錄』大47 p.498a16. 佛法
    無用功處, 秖是平常無事. 屙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愚人笑我, 智乃知焉.)
56) 반산보적(盤山寶積)의 말. 太古語錄 주석81) 참조.
57) 영운지근(靈雲志勤)선사가 복숭아꽃[桃花]을 보고 깨우친 것은 색을 보고 마음
    을 밝히는 견색명심(見色明心)의 대표적 예이고, 향엄지한(香嚴智閑)이 돌조각
    이 튀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우친 것은 소리를 듣고 도를 깨우치
    는 문성오도(聞聲悟道)의 대표적 예이다. 白雲語錄 주석200)·201) 참조.

나옹이 이어서 말했다. “본래 묶인 것이 없는데, 무엇을 반드시 풀겠는
가?58) 풀 것도 없으니 때에 적절하게 수행자들에게 보일 뿐이다. 허공조
차 깨뜨려 조각조각 내니 이 한 방 매서운 주장자의 독기를 아무도 감당하
지 못한다. 어떤 때는 주장자를 어깨에 메고 산으로 가 곧바로 천 길 만 길
의 봉우리[千峯萬嶺]59)로 들어가니 부처와 조사라도 그를 만나면 두려워
달아날 것이며, 종횡으로 거침없이 죽이거나 살려도 전혀 흠잡을 것이 없
을 것이다. 파도를 일으키는 것도 별다른 것이 아니며 하늘과 땅을 진동시
키는 것 또한 바로 그것이다. 느닷없이 한 소리 내는 순간에 궁극의 경지를
밟고, 한 걸음도 떼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60)”
師乃云,“ 本來無結何須解? 無解隨時示道流. 打破虛空成片
片, 一條毒棒毒難收, 有時肩擔向山去, 直入千峯萬嶺頭, 佛祖
相逢當怖走. 縱橫煞活摠無虧. 興波作浪非他物, 振動乾坤也
是他. 驀地一聲親蹋着, 不移一步便還家.”
58) ‘結’은 結制를 ‘解’는 解制를 각각 빗대고 있다. 결제와 해제라는 틀을 통해 법문
    을 풀어간다.
59) 천봉만봉(千峯萬峯)과 유사한 말. 언어와 사유 등 어떠한 수단도 통하지 않는 경
    지. 험하게 치솟아 오르지 못하는 고봉준령(高峯峻嶺)처럼 언어나 사유의 수단
    과 같은 약간의 방편도 허용하지 않고 엄격하게 본분(本分)만을 고수하는 입장
    이다.『聯燈會要』권11「汾陽善昭章」卍136 p.621b3 참조. “분양선사가 주장
    자를 집어 들고 대중에게 말했다. ‘주장자를 알면, 행각하는 일을 마친다.’ 운봉
    문열(雲峯文悅)선사가 분양의 공안을 제기하고 나서 주장자를 들어 올리며 말하
    였다. ‘이것은 주장자인데, 어떤 것이 행각하는 일인가?’ 다시 말하였다. ‘주장
    자를 옆에 차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채 천 길 만 길 봉우리로 곧장 들어간다.’”
    (師拈拄杖, 示衆云, ‘識得拄杖子, 行脚事畢.’ 雲峯悅擧罷, 拈起拄杖云, ‘這箇是
   拄杖子, 那箇是行脚事?’ 復云, ‘楖栗橫檐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60) 원래 서 있던 곳이 바로 집이기 때문이며, 모든 곳이 또한 집이기 때문에 한 걸
    음 떼지 않고도 바로 집에 당도할 수 있다.

주장자를 집어 들고 말했다. “보았는가?”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며 말했
다. “들었는가?61) 만약 훤하게 보고 막힘없이 들었다면, 산하대지·삼라만
상·초목총림62)·사성육범63)·유정무정64) 등이 봄날 얼음이 녹아내리고 굽
지 않은 기와가 부서지듯이 모두 한꺼번에 사라질 것이다. 이 경계에 이르
면, 선(禪)인가 도(道)인가? 범부인가 성인인가? 마음인가 본성인가? 현
(玄)인가 묘(妙)인가?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拈拄杖云,“ 還見麽?” 卓一下云,“ 還聞麽? 若能見得徹聞得
通, 山河大地, 萬像森羅, 草木叢林, 四聖六凡, 情與無情, 便
見65)氷消瓦解. 到這裏, 是禪耶, 是道耶? 是凡耶, 是聖耶? 是
心耶, 是性耶? 是玄耶, 是妙耶? 是異耶, 是不異耶?”
61) 꼿꼿이 세운 주장자와 그것을 내리칠 때 난 소리를 보고 들었냐고 물어 봄으로
    써 바로 그 현장에서 ‘분별에 따르지 않고도’ 분명하게 감각에 드러난 ‘이 소리
    와 형상’을 알아차리도록 호소하는 조사선의 선풍이 드러난다. 이것은 보고 듣
    고 느끼고 아는 등의 작용을 매개로 곧바로 전하는 직지(直指)의 방법이다. “불
    자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보았는가?’ 불자를 치면서 말했다. ‘들었는가? 뚜
    렷하게 듣고 보는 바로 이것이 무엇인가?’”(『了菴淸欲語錄』권1 卍123 p.588a7. 
    竪起拂子云, ‘還見麽?’ 擊拂子云, ‘還聞麽? 聞見歷然, 是箇什麽?’)
62) 叢林.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63) 사성(四聖)은 성문·연각·보살·불 등 네 가지 세계, 육범(六凡)은 지옥·아귀·축
    생·아수라·인간·천상 등 여섯 가지 세계를 말하며, 합하여 십계(十界)라 한다.
64) 유정은 생명과 식(識)이 있는 중생, 무정은 그것이 없는 중생을 가리킨다. 두 가
    지를 합하여 모든 중생을 나타낸다.
65) 異本에 ‘見’은 ‘得’으로 되어 있다. ‘被’ 또는 ‘受到’의 뜻으로 보통은 동사 앞에 붙
    어 피동의 뜻을 나타낸다. 得은 ‘~이 되다’ 곧 어떤 상태가 된다는 말로서 見과
    得이 뜻이 통하지만 ‘見’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다시 주장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선이라 해도 안 되고 도라 해도 안 된
다. 범부라 해도 안 되고 성인이라 해도 안 된다. 마음이라 해도 안 되고 본
성이라 해도 안 된다. 현이라 해도 안 되고 묘라고 해도 안 된다. 다르다고
해도 안 되고 다르지 않다고 해도 안 된다. 바로 이렇게 안 된다고 해도 또
한 안 된다. 이미 그 어떤 것도 안 된다면, 결국 이것은 무엇인가?66) 알겠는
가? 만약 알아차렸다면 임금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한꺼번에 갚기에
충분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한 수를 더 들려주겠다.67) 진실한 성품은
붙잡을 근거가 전혀 없고, 진실한 견해는 어떤 대상 경계도 따르지 않는다.
진실한 지혜에는 본래 어떤 장애도 없고, 본래 양변의 차별도 없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의 근원과 하나가 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과 일치한다. 그
래서 ‘곳곳이 모두 진실이고, 곳곳이 모두 진실이니, 티끌 하나하나가 모두
본래인(本來人)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고 있을 때도 소리는 드러나지 않
고, 정체(正體)가 당당하게 나타나 있는 순간에도 몸뚱이는 전혀 없다.’68)
라고 하는 것이다. 대중들이여! 당당하게 나타난 정체는 무엇일까?69)”
又卓一下云,“ 禪也不可得, 道也不可得. 凡也不可得, 聖也不
可得. 心也不可得, 性也不可得. 玄也不可得, 妙也不可得. 異
也不可得, 不異也不可得. 只這不可得亦不可得. 旣摠不可得,
畢竟是个什麽? 還會麽? 若也會得, 皇恩佛恩, 一時報足, 其
或未然, 更擧一着. 眞性絶攀綠, 眞見不由境. 眞智本無礙, 眞
慧本70)無邊. 上合諸佛本源, 下合衆71)生心地. 所以道,‘ 處處
眞處處眞, 塵塵盡是本來人. 眞實說時聲不現, 正體堂堂沒却
身.’ 大衆! 作麽生是堂堂正體?”
66) 모든 형식의 분별 양상을 차단하여 생각으로 모색할 수 있는 근거가 모조리 사
    라진 뒤에 뚜렷하게 ‘보이고 들리는’ 바로 그것의 정체(正體)를 가리키는 방법이
    다. 이와 같이 인식의 근거가 되는 모든 범주와 수단을 빼앗은 상태에서 최후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조사선의 일반적인 방법이다.『大慧語錄』권9 大47 p.849b1,
   『了菴淸欲語錄』 권1 卍123 p.594b17 등에 동일한 형식의 법문이 나온다.
67) 이하 “몸뚱이는 전혀 없다”까지는 『大慧語錄』 권3 大47 p.821b26의 내용을 인용
    한 것이다.
68)『圜悟語錄』 권9 大47 p.753b28 등에 나오지만, 누구의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본래인은 본래면목(本來面目)·본분인(本分人)·본래의 자아 등과 같은 말이지
    만 일정한 뜻에 제한되지 않으며, 이 법문의 취지와 같이 주장자 하나가 보여주
    는 소리나 형상과 같이 낱낱의 현상에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당사자를 말한다.
    白雲語錄 주석141) 참조. 문헌에 따라서는 ‘聲不現’이 ‘元是妄’ 또는 ‘人不識’으
    로 되어 있다. 이미 드러나 있지만 소리와 몸뚱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
    리는 당사자를 가리키므로 소리와 몸뚱이를 부정한 것이다.
69) 주장자를 들면서 “보았는가?”라고 시작할 때의 취지와 연속되는 맥락이다. 눈
    앞에 당장 보고 들리는 ‘이것’을 일관되게 지시하고 있다. 산하대지와 삼라만상
    등 모든 것이 그 정체이므로 어떤 분별의 매개도 없이 곧바로 목격하고 포착하
    도록 유도한다.
70)『大慧語錄』에는 ‘本’자가 없다. 다음 구절도 동일함.
71)『大慧語錄』에 ‘合’은 ‘契’, ‘衆’은 ‘群’으로 되어 있다.

주장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이것은 당당하게 드러난 정체인데, 어떤 것
이 주장자인가?” 다시 내리치며 말했다. “이것은 주장자인데, 어떤 것이 당
당하게 드러난 정체인가?”72) 마침내 주장자를 내던지며 말했다. “남의 쌀
한 톨을 탐내다가 자신의 반년치 식량을 잃어버린다.73) 대중이 자애롭게도
오래 서서 법문을 들었구나. 안녕히들 지내시라.74)” 법좌에서 내려왔다.
卓一下云, “這箇是堂堂正體, 那箇是拄杖子?” 又卓一下云,
“這箇是拄杖子, 那箇是堂堂正體?” 遂擲下云,“ 貪他一粒米,
失却半年糧. 衆慈久立, 珍重.” 下座.
72) 眞覺語錄 주석228) 참조.
73) “힘들게 남의 쌀 한 톨을 얻으려다 자신의 반년 식량을 잃어버린다. 이와 같이
    자기 밖으로 행각하여 어떤 이익이 있겠는가?”(『景德傳燈錄』권19「雲門文
    偃傳」大51 p.357c5. 苦屈圖他一粒米, 失却半年糧. 如此行脚, 有什麽利益?) 
    남의 쌀 한 톨은 자기 밖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자기의 식량은 자기 본래
    의 심성을 가리킨다.
74) 진중(珍重). 眞覺語錄 주석10) 참조.

● 해제상당 解制上堂

나옹선사가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4월 5일 결제를 맞이했다가 오늘 7
월 5일에 결제를 푼다. 모였던 납자들 다시 흩어질 것이니, 봄이 가면 가을이
오듯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바뀌며 변하는 도리와 같다.” 불현듯 주장자
를 잡고 말했다. “말해 보라! 이것은 묶인 것인가, 풀린 것인가? 모인 것인가,
흩어진 것인가? 가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새로운 것인가, 오래된 것인가?
변한 것인가, 변하지 않은 것인가?” 주장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묶인 것이라
해도 안 되고, 풀린 것이라 해도 안 된다. 모인 것이라 해도 안 되고, 흩어진
것이라 해도 안 된다. 가는 것이라 해도 안 되고, 오는 것이라 해도 안 된다.
새로운 것이라 해도 안 되고, 오래된 것이라 해도 안 된다. 변한 것이라 해도
안 되고, 변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안 된다. 어떤 것도 안 된다면 결국 이것은
무엇인가?”75) 주장자를 던지며 말했다. “눈썹 치켜세우고 속속들이 직접 보
아라. 당당하게 드러난 분명한 소식은 바로 주장자이다. 안녕히들 계시게.”
師陞座云, “四月十五當結制, 七月十五方解結. 衲子聚之還復
散, 春去秋來新舊變.” 驀拈拄杖云, “且道! 這箇是結耶, 是解
耶? 是聚耶, 是散耶? 是去耶, 是來耶? 是新耶, 是舊耶? 是變
耶, 是不變耶?” 卓一下云, “結也不可得, 解也不可得. 聚也不
可得, 散也不可得. 去也不可得, 來也不可得. 新也不可得, 舊
也不可得. 變也不可得, 不變也不可得. 旣摠不得, 畢竟是箇什
麽?” 擲下云,“ 剔起眉毛親見徹, 堂堂的信是烏藤.76) 珍重.”
75) 장자 하나에 대한 여러 가지 분별의 가지를 제기하고, 그것을 모두 부정하는
     수법이다. 주석66) 참조.
76) 오등(烏藤)은 오주장(烏拄杖) 곧 검은색의 주장자를 말한다.

● 내원당에서의 보설77) 入內普說
77) 普說. 대중을 두루 집합시켜 설법하는 법문 형식 중 하나. 상당(上堂)과 마찬가
    지로 법상에 올라앉아 하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상당과 달리 임금의 만수무강
    을 축원하기 위하여 향을 사르는 축향(祝香)의식을 행하지 않고 가사를 걸치지
    도 않으며, 정기적으로 행하는 형식도 없다. 일반적으로 침당(寢堂:大方丈) 또
    는 법당에서 거행한다. 학인이 향을 사르고 특별히 보설을 청할 경우는 고향보
    설(告香普說)이라 한다. 보설은, 진정극문(眞淨克文 1025~1102)선사가 동산(洞
    山)의 귀종사(歸宗寺)에 주석할 때 시행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며, 대혜종고(大慧
    宗杲)에 이르러서 성행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고, 사물에 응하여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마치 물에 비친 달과 같다.”78) 불자를 똑바로 세우고 말했다. “석가
노자79)께서 산승의 불자 위에 와서 묘한 색신을 드러내고 큰 지혜의 광명
을 발하며 크나큰 해탈의 문을 열었으니 모두 우리 황제폐하의 만수무강
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무수한 법문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미묘한 뜻과
세간·출세간의 모든 법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 속에 있다. 여러분은 알겠는
가? 만약 꿰뚫어 보았다면, 산하대지·삼라만상·초목총림·사성육범·유
정무정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봄날 얼음이 녹아내리고 굽지 않은 기와가
부서지듯이 모두 한꺼번에 사라질 것이다. 이 경계에 이르면 선도 없고 도
도 없고 마음도 없고 성도 없고 현도 없고 묘도 없을 것이니, 깨끗한 벌거
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이 본래 모습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붙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 이렇게 하면서 다시 짚신을 사서 30년80) 동안 돌아다니며 수행
하더라도 꿈에서도 납승의 숨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말해 보라!
납승의 숨소리는 어떠한 장점이 있는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밤의
고요 속에서 우는 소쩍새는 이 뜻을 알 것이니, 외마디 울음소리가 짙푸른
산 그림자 속에 맴돌고 있네.”81)
“佛眞法身, 猶若虛空, 應物現形, 如水中月.” 竪起拂子云,
“釋迦老子來也, 在山僧拂子頭上, 現妙色身, 放大智光明, 開
大解脫門, 全爲我聖上陛下萬萬歲. 百千法門無量妙義, 世出
世間一切諸法, 盡在裏許. 諸人還見麽? 若也見得徹去, 山河
大地, 萬像森羅, 草木叢林, 四聖六凡, 情與無情, 不銷82)一捏,
便見氷消瓦解. 到者83)裏, 也無禪, 也無道;也無心, 也無性;
也無玄, 也無妙, 淨倮倮, 赤洒灑, 沒可把. 便恁麽去, 更買草
鞋, 行脚三十年, 未夢見衲僧氣息. 且道! 衲僧氣息, 有甚麽長
處?” 良久云,“ 夜靜子規知此意, 一聲聲在翠微中.”
78)『金光明經』 권2 大16 p.344b3 참조. 眞覺語錄 주석150) 참조.
79) ‘老子’라는 표현은 윗사람에 대한 존칭. 白雲語錄 주석31) 참조.
80) 眞覺語錄 주석69) 참조.
81)『五祖法演語錄』권하「偈頌」大47 p.667c3 참조.
82) ‘銷’는 ‘消’의 잘못된 표기.
83) ‘者’는 ‘這’와 같다.

● 소참84) 小參
84) 眞覺語錄 주석218) 참조.

“한 걸음 나아가면 땅이 꺼져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면 허공이 부서져 내
리며,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면 숨은 붙어 있으나 죽은 사람과 다
름없다. 그 어느 편도 아니라면 결국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85)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 있는가? 말할 자 있으면 나오라.”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헤아리는 사이에 10만 8천 리의 거리로 멀어질 것이다.” 주장자로 법상을
내리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進一步, 則大地平沈, 退一步, 則虛空撲落, 不進不退, 有氣
死人. 摠不恁麽, 畢竟如何? 還有道得者也無? 若有道得者,
出來!” 良久云,“ 擬議之間, 十萬八千.” 以棒打床一下, 下座.
85) 나아가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부정하고, 이 두 길을 벗어나서 모색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상황을 문제로 제시하는 조사선과 간화선의 일반적인 방법이
    다. “나아가면 이치를 잃어버리고, 물러서면 종지에 어긋나게 되며, 나아가
    지도 물러나지도 않으면 숨은 붙어 있으나 죽은 사람과 다름없다. 말해 보라! 
    어떻게 발을 떼야 하는가?”(『無門關』「禪箴」大48 p.299b4. 進則迷理, 
    退則乖宗;不進不退, 有氣死人. 且道! 如何履踐?)

● 제야86)소참 除夜小參
86) 除夜. 음력 12월 30일 밤.

“탁 트이고 밝은 모습으로 홀로 드러나 상대도 끊어지고 인연도 끊어지
니,87)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로써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처
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셨던 일88)과 달마대사가
한밤에 눈 위에 서 있던 혜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던 것89)은 겁외(劫外)
의 광명을 발휘하여 본래면목을 비추어 본 것이다.90)” 불자를 세우고 말했
다. “이것은 본래면목인데, 어떤 것이 불자인가?” 다시 불자를 세우고 말했
다. “이것은 불자인데,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 여러분, 알겠는가? 이에 대
하여 문득 어떤 의문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임종하는 날91)
과 발을 허둥대며 후회하는 잘못이 없겠지만, 만약 의심이 남았다면 일생
의 마지막 날이 지금 바로 이 순간일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딱 들어맞히
겠는가?” 불자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한 타래 새끼줄처럼 얽힌 말92)은 과
거에도 이러했고 미래에도 이러할 것이며 현재도 이러하다. 오늘밤을 맞아
묵은해는 아직 가지 않고 새해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말
해 보라! 묵은 것과 새로운 것 그 어느 편에도 물들지 않는 한마디는 무엇
일까?” 불자를 던지며 말했다. “묵은해는 오늘 밤에 가고 새해는 내일 올 것
이다. 안녕히들 계시게.” 법좌에서 내려왔다.
“虛明獨露, 絶對絶綠, 自古自今, 難爲話會. 所以, 靈山會上,
拈花示衆, 小林夜半, 立雪安心, 發揮劫外光明, 照見本來面
目.” 拈起拂子云, “這箇是本來面目, 那箇是拂子?” 又竪起云,
“者个是拂子, 那箇是本來面目? 諸人還會麽? 於斯驀得無疑,
臘月三十日, 免得手忙脚亂. 若也有疑, 臘月三十日, 今正是
時. 諸人作麽生折合去?” 擧起拂子云,“ 這一絡索, 過去也只
恁麽, 未來也只恁麽, 現在也只恁麽. 逗到今夜, 舊歲君未去,
新歲君未來. 正當與麽時, 且道! 不涉新舊底一句, 作麽生?”
擲下拂子云,“ 舊歲今宵盡, 新年明日來. 珍重.” 下座.
87) “생멸하지 않는 법 중에 본래면목을 홀로 드러내니, 이것이 바로 상도 떠나고
    이름도 떠나 상대할 짝을 모두 끊어버린 경지이다.”(『了菴淸欲語錄』권2 卍123
    p.609a16. 於不生法中, 獨露本來面目, 直是離相離名, 絶對絶待.)
88) 白雲語錄 주석155) 참조.
89) 중국 선종의 2대 조사인 혜가가 눈 오는 날 달마대사 앞에서 팔을 잘라 구법(求
    法)의 결심을 나타낸 혜가단비(慧可斷臂)의 고사를 말한다. 眞覺語錄 주석180),
    白雲語錄 주석248) 참조.
90) 시간의 한계를 벗어난[劫外] 지혜의 광명으로 본래면목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
    는 뜻.
91) 납월삼십일(臘月三十日).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임종하는 순간과 대응시킨 말. 眞
    覺語錄 주석238) 참조.
92) 낙색(絡索). 원래는 새끼줄이지만, 의미가 확장되어 새끼줄처럼 풀리지 않고 꼬
    여 있는 말을 나타낸다. 곧 언어문자로 제시되어 해결되어야 할 화두로 남아 있
    는 문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본래면목과 불자, 불자와 본래면목이 이것과 저것
    으로 그때마다 뒤바뀌며 얽혀 있는 화두를 말한다.

● 보설 普說

나옹선사가 법좌에 올라앉아 잠깐 침묵하고 있다가93) 말했다. “알겠는
가? 사중94)이 한 법회에 함께 모여 진실한 마음으로 간곡하게 보설을 청하
였기에 산승은 이 법좌에 올랐고 대중은 묵묵히 기다리다가 이 보설을 듣
고 있다.95) 바로 이렇게 눈앞에 홀로96) 밝고 뚜렷하게 나타나 보설을 듣는
자는 누구이고,97) 합장하고 문안 인사를 올리는 자는 누구이며, 머리 숙이
고 절하는 자는 누구인가? 각자 자세히 살펴보라! 여러분, 이렇게 듣고 이
해하는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98)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이 점에 대
하여 그대들에게 묻겠다. 만약 주인공이라 한다면, 그것은 긴가 짧은가? 큰
가 작은가? 그것은 어떻게 생긴 얼굴이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것
은 어디에다 몸을 깃들이고 목숨을 부지하는가? 설령 그대들이 분명히 알
고 분명히 보고 분명히 설명하더라도,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묻겠다. 주인
공을 알거나 보는 자는 또 누구인가? 그래서 조사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
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99)라고 한 것이다. 그대들이 말해 보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면, 결국에는 무엇인가?100) 이에 대하
여 만약 깨닫지 못하면 어찌 이 산에 있는 1만 2천 담무갈101)의 진신(眞身)
을 볼 수 있겠으며, 어찌 1만 2천 보살이 항상 설하는 반야를 들을 수 있겠
는가? 그런 사람은 다만 기이한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풍경만 볼 뿐일 것이니, 그것이 우리 임제종(臨濟宗)의 본
래 지와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어떻게 그 종지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
가?102) 여러분, 결코 움츠러들지 마라! 임제도 눈은 가로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로 나 있으며103) 여러분도 눈은 가로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로 나 있으
니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또한 약간의 같은 모습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가문의 정통을 이어받은 인물(種草)104)이라면, 같다
고하거나 다르다고 하거나 정법안장을 소멸시킨다거나105) 임제종의 본래
종지를 일으켜 세운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에 누가 상관하겠는가!
師陞座良云,“ 會麽? 四衆共集一會, 誠心堅請普說, 山僧,
升於此座, 大衆, 默默而住, 聽此普說. 只這目前, 孤明歷歷,
能聽普說者是誰? 合掌問訊底是誰? 低頭禮拜底是誰? 各自
點撿106)看! 諸人, 莫道能聽能解底, 是我主人公. 我且問你, 若
道主人公, 是長是短? 是大是小? 是甚面目? 是甚樣子? 是在
甚處安身立命? 直須107)你知得分明, 見得分明, 說得分明, 我
更問你, 能知能見主人公底, 又是阿誰? 所以祖師道, ‘不是心
不是佛不是物.’ 你且道! 不是心不是佛不是物, 畢竟是箇什
麽? 這裏若不悟去, 爭見此山一萬二千曇無渴眞身? 爭聽一萬
二千菩薩常說般若? 只見奇巖高聳, 松栢森然者也, 我臨濟正
宗, 有甚交涉? 有甚扶起? 諸人, 切莫退屈! 臨濟眼橫鼻直, 諸
人眼橫鼻直, 覓一絲毫異相, 不得;覓一絲毫同相, 不得. 旣是
吾門種草, 誰管是異是同, 滅却正法眼藏, 扶起臨濟正宗!
93) 양구(良久). 정황에 따라 서로 다른 지시 내용을 가지지만, 여기서는 설법하여
    말로 드러내기 이전에 이미 눈앞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키기 위
    한 복선이다.
94) 四衆. 네 종류의 불제자. 사부중(四部衆)·사부대중(四部大衆)·사부제자(四部弟
    子) 등이라고도 한다. 출가대중인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와 재가대중인 우
    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를 합하여 이르는 말. 또는 비구·비구니·사미(沙
    彌)·사미니(沙彌尼) 등 출가한 사중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95) 이하 “바로 이렇게 눈앞에”부터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
    면 결국은 무엇인가?”라는 구절까지는『天如惟則語錄』卍122 p.825a9~b2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며, 일부는 축약하여 수록하면서 몇몇 글자가 다를 뿐이다.
96) 고(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는 속성을 나타낸다.
    마치 하늘에 하나의 달[孤月]만이 밝게 세상을 비추고 있는 모습과 같다. ‘독
    (獨)’과 같은 이미지로 쓰인다.
97) 임제의현(臨濟義玄)의 법문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도를 수행하는 자들이여!
    지금 눈앞에서 홀로 밝고 뚜렷하게 설법을 듣는 바로 이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막히지 않고 시방세계 전체에 걸림 없이 통하고 삼계 어디서나 자유자재하다.”
   (『臨濟語錄』大47 p.498b8. 道流! 卽今目前, 孤明歷歷地聽者, 此人處處不滯, 
    通貫十方, 三界自在.)『大慧語錄』권16 大47 878c24 참조.
98) 主人公. 주인옹(主人翁)·본래인(本來人)·본래면목(本來面目) 등과 같은 말이
    다. 이하에서는 주인공이라는 말을 확정된 의미로 제시하지 않고 분별로 포착
    할 수 없는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마음·부처·중생 등을 모두 부정하면서 대중
    에게 문제로 던지고 있는 장면에서 그 의중을 엿볼 수 있다.
99)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이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말에 근거하여 제시한 화
    두.『南泉語要』古尊宿語錄12 卍118 p.295a11,『馬祖語錄』卍119 p.815b7 등 
    참조.
100) 여기까지가『天如惟則語錄』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101) 曇無渴. 曇無竭로도 쓴다. 보살 이름. Dharmodgata의 음사어로서, 법성(法
     盛)·법용(法涌)·법기(法起) 등으로 한역한다. 항상 반야바라밀을 설하였으며,
     상제(常啼:薩陀波倫)보살도 이 보살의 설법을 듣고 반야의 진리를 깨달은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언제나 진리의 소식을 전하는 ‘이 산’의 모든 현상이
     항상 반야를 설했던 담무갈의 진신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활용되었다.
102) 이하 “여러분, 결코 움츠러들지 마라”라는 구절부터 이 보설의 마지막 부분까지
     는『天如惟則語錄』卍122 pp.826a3~827a12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며, 일부는
     축약하여 수록하면서 몇몇 글자가 다를 뿐이다.
103) 안횡비직(眼橫鼻直). 주석44) 및 眞覺語錄 주석16) 참조.
104) 白雲語錄 주석234) 참조.
105) 임제의현(臨濟義玄)이 임종할 때 삼성혜연(三聖慧然)의 선기(禪機)를 평가하여
     했던 말에 따른다. “임제가 입적할 즈음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나의 정법안장을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라 하자 삼성이 나와서 말했다. ‘화
     상의 정법안장을 어찌 소멸시키겠습니까!’ ‘다음에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물으
     면 그에게 어떻게 말하겠느냐?’ 삼성이 곧바로 할을 내질렀다. 이에 임제가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나귀에게 전해진 뒤 소멸할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한 뒤 단
     정한 자세로 입적하였다.”(『臨濟語錄』大47 p.506c3. 師臨遷化時, 據坐云, ‘吾
     滅後, 不得滅却吾正法眼藏.’ 三聖出云, ‘爭敢滅却和尙正法眼藏!’ 師云, ‘已後有人
     問爾, 向他道什麽?’ 三聖便喝. 師云, ‘誰知吾正法眼藏, 向這瞎驢邊滅却!’ 言訖, 
     端然示寂.)
106) ‘撿’은 ‘檢’과 같다.
107)『天如惟則語錄』에는 ‘直饒’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문맥상 옳다.

그렇다면 임제종의 본래 종지를 어떻게 일으켜 세우겠는가? 삼현·삼
108)로 일으켜 세우겠는가? 사료간109)·사빈주110)·사할111)로 일으켜 세
우겠는가? 또한 할이 밥 먹고 얻은 기운112)으로 내는 소리인 줄 누가 모르
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임제종의 본래 종지라고 부르겠는
가? 설령 ‘한 번 내지르는 할에 손님과 주인이 나뉘고, 관조와 작용이 한꺼
번에 시행된다. 이 안의 뜻을 알아차린다면, 정오에 삼경을 알리는 종을 치
리라.’113)고 하더라도 이런 말로는 여러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산승을
속일 수는 없다. 여러분은 자세히 점검해 보라!”
且臨濟正宗, 作麽生扶起? 扶起三玄三要耶? 四料揀四賓主
四喝耶? 且喝是粥飯氣, 阿誰不會? 如何喚作臨濟正宗? 縱使
道, ‘一喝分賓主, 照用一時行. 會得箇中意, 日午打三更.’ 這
說話, 瞞得諸人, 瞞不得山僧. 諸人子細點撿114)看!”
108) 三玄三要. 眞覺語錄 주석76) 참조.
109) 四料簡. 四料揀으로도 쓴다. 임제선사가 학인을 가르치기 위해 근기와 시기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한 지도 방편이다. “임제선사가 만참 법문에서 대중에게 말
     했다.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를 빼앗
     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고, 어떤 때는 사
     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臨濟語錄』大47 p.497a22. 師晚參示衆云, 
     ‘有時奪人不奪境, 有時奪境不奪人, 有時人境俱奪, 有時人境俱不奪.’) 眞覺語錄 
     주석78) 참조.
110) 四賓主. 주인(스승)과 손님(학인)이 만났을 때의 양상을 네 가지로 나눈 것. 내
     용은 선종의 종파나 선사마다 각기 다르다. “학인이 물었다. ‘무엇이 손님 중의
     주인입니까?’ ‘시장에 들어서자 두 눈동자가 멀었다.’ ‘무엇이 주인 중의 손님입
     니까?’ ‘방울을 돌리자 양편에서 싱그럽게 빛난다.’ ‘무엇이 손님 중의 손님입니
     까?’ ‘눈썹을 찌푸리고 구름 위에 앉았다.’ ‘무엇이 주인 중의 주인입니까?’ ‘3척
     의 칼을 간다.’”(『景德傳燈錄』권13「風穴延沼傳」大51 p.303c15. 問, ‘如何
     是賓中主?’ 師曰, ‘入市雙瞳瞽.’ 曰, ‘如何是主中賓?’ 師曰, ‘迴鑾兩曜新.’ 曰, 
     ‘如何是賓中賓?’ 師曰, ‘攢眉坐白雲.’ 曰, ‘如何是主中主?’ 師曰, ‘磨礱三尺刃.’)
111) 四喝. 임제선사가 제시한 할(喝)의 네 가지 양상. “임제선사가 학인에게 물었다.
     ‘어떤 때의 할은 금강명왕의 보검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땅에 웅크리고 있는 금
     털의 사자와 같으며, 어떤 때의 할은 물고기를 유인하는 도구와 같고, 어떤 때의
     할은 할로써의 쓰임을 다하지 못한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인이 머뭇
     거리자 임제가 곧바로 할을 내질렀다.”(『臨濟語錄』大47 p.504a26. 師問僧, 
     ‘有時一喝, 如金剛王寶劍;有時一喝, 如踞地金毛師子;有時一喝, 如探竿影草;
     有時一喝, 不作一喝用. 汝作麽生會?’ 僧擬議, 師便喝.) 眞覺語錄 주석74) 참조.
112) 죽반기(粥飯氣). “‘정법을 알아채는 눈은 어떤 것입니까?’ ‘밥 먹고 얻은 기운이
     다’”(『雲門廣錄』권상 大47 p.545c17. 問, ‘如何是正法眼?’ 師云, ‘粥飯氣.’)
113)『人天眼目』권1「慈明頌」大48 p.304c15 참조.
114) ‘撿’은 ‘檢’과 같다.


잠깐 침묵하다가 할을 내지르고 말했다. “할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손님
과 주인 그리고 관조와 작용이 있는가, 없는가? 이 할이 이미 사라진 다음
에는 관조와 작용 그리고 손님과 주인이 있는가, 없는가? 할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손님과 주인 그리고 관조와 작용이 할 속에 있는가, 할 밖에
있는가?아니면 할 속에도 있지 않고, 바깥에도 있지 않은가?”115)
良久, 喝一喝云,“ 未形已前, 賓主照用, 是有是無? 此喝旣消
之後, 用賓主, 是有是無? 正當喝時, 賓主照用, 在喝裏在喝
外? 在不裏不外耶?”
115) 일반적으로 임제종의 수단이라고 알려진 틀에 의해서는 그 종지를 알 수 없다
      뜻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모조리 의문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하에
     서 다시 그 소식을 드러낸다.

다시 할을 내지르고 말했다. “도리어 이 안의 뜻을 가지고 한꺼번에 모두
말해버렸다.116) 산승의 이와 같은 비판이 임제종의 본래 종지를 일으켜 세
운 것인가? 임제종의 본래 종지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면, 관조·작용·사
료간·사빈주·사할·삼현·삼요 등의 방편 그 어디에도 그것은 결단코 없
다.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면, 결국 어디에 있을까? 바로 여러분 각각의 본
분상에 있을 뿐이니 자기 본분의 결정적인 한 수117)는 하늘을 흔들어 움직
이고 땅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
대의 조사들과 세상 그 어떤 선지식들의 바른 안목으로도 엿보지 못하니,
다만 당사자가 그 자리에서 알아차려 깨닫는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
又一喝云,“ 却將箇中意, 一時說破了也. 山僧與麽批判, 還扶
得臨濟正宗起麽? 旣扶不起臨濟正宗, 決定不在照用處, 四
料揀, 四賓主, 四喝, 三玄三要處. 旣不在一切處, 畢竟在甚麽
處? 只在諸人分上, 諸人當知自己分上一着子, 煩天共地.118)
三世諸佛, 歷代祖師, 天下善知識, 不敢正眼覰着, 只貴當人直
下承當便了.
116) 손님과 주인 그리고 관조와 작용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그 틀을 부수려는 의도
     를 모두 보여 주었다는 뜻이다.
117) 일착자(一着子). 白雲語錄 주석42) 참조. 여기서는 어떤 수단과 방편에도 의지
     하지 않고 발휘되는 자기 자신의 선기(禪機)를 나타낸다.
118)『天如惟則語錄』에는 ‘烜天赫地[하늘과 땅 전체에 밝게 빛난다]’로 되어 있다.


수행의 덕이 높은 존숙119)들은 그대들이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
문에 어쩔 수 없이 자세하게 방편을 내려주어 그대들에게 뜻과 맛이 없는
120)을 참구하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학인이 ‘개에도 불성이 있
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라고 대답한 말과 같다. 이것은 밥과 반
찬을 소반째 모조리 내놓은 격이다. 그대들이 이해하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이 죽은 말을 살리려는 의사121)처럼 다시 그대들에게 오로지 무자(無
字) 하나만을 들도록 했던 것이다.122) 먼저 사대123)·오온124)·육근125)·
126)과 눈앞에 보이는 산하대지, 밝음과 어두움, 색과 공, 그리고 삼라만상
과 유정무정의 중생을 모두 아울러 하나의 무자로 만들어 한 번에 온전히
들어야 한다. 다닐 때도 그렇게 들고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나 잠을 자거
나 밥을 먹거나 그 어느 때든 오로지 이와 같이 들어야 한다. 한순간도 끊임
없이 계속 이어지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한 덩어리가 된다면, 바늘 끝 하나
도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 마치 은산철벽127)과 같을 것이다. 바로 그때 자
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번 밀고나가 자신의 결정적인 한 수128)를 꿰뚫으면,
깨닫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분명히 밝아질 것이다.
前輩尊宿, 爲你不肯直下承當, 不得已而曲垂方便, 敎你參無
義味話. 只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早
是和槃托出.129) 你不得能領略, 不淂130)已而如死馬醫, 又敎你
草草捏131)一个無字. 先將四大五蘊, 六根六塵, 乃至目前所見,
河大地, 明暗色空, 森羅萬像, 情無情等, 都盧幷作一箇無
字, 一擧擧起. 行也恁麽擧, 乃至坐臥, 睡夢喫飯, 一切處, 只
如此擧. 綿綿密密, 無閒無斷, 打成一片, 針箚不入, 銀山鐵壁
相似. 不知不覺, 一拶拶透, 自己一着子, 不待承當, 而自然分
曉矣.
119) 尊宿. 노숙(老宿)과 같은 말. 白雲語錄 주석87) 참조.
120) 화두를 가리킨다. 몰자미(沒滋味)와 같다. “뜻과 맛이 없는 말:종문(宗門)에서
     던져준 대답에는 뜻과 맛이 없는 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일정한 도리를 가
     지고 이해할 수 없고, 사유분별로도 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후인
     들이 사유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리하게 도리를 말하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근본과는 멀어진다. 어찌 그릇되게 말하는 것만 그렇겠는가! 설령 지극히
     당한 도리를 말하더라도 역시 남의 말만 따라하는 앵무새와 같은 학인의 말
     일 뿐이다.”(『御選語錄』권13「雲棲蓮池語錄」卍119 p.500b12. 無義味語:
     宗門話, 有所謂無義味語者. 不可以道理會, 不可以思惟通故也. 後人以思惟心, 
     强說道理, 則愈說愈遠. 豈惟謬說! 直饒說得極是, 亦只如鸚鵡學人語而已.)
121) 사의(死馬醫). 원래는 ‘죽은 말을 살리려고 쓸모없는 노력을 하는 의사’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더욱 쉬운 방편을 써서
     친절하게가르쳐 주는 사람을 말한다.
122) 조주의 구자불성 문답 전체에서 오로지 무자만을 궁구하도록 한다는 뜻. 백파긍
     선(白坡亘璇)은 이것을 단제(單提)라 하고, 이 문답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모두
     궁구하는 것은 전제(全提)라 한다. 또한 단제는 순수하게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혼침에 빠지는 병통[死心病]이 있고, 전제는 의심을 일으키는
     데는 좋으나 정신이 산란해지는 병통[亂想病]이 있다고 하였고, 초심자는 반드
     시 단제의 방법으로 시작하다가 잡다한 생각이 사라진 다음에 전제의 방법으로
     궁구하라고 제안했다.『禪門手鏡』「無字揀病論科解」韓10 p.527a17 참조.
123) 四大.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근본 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
124) 五蘊.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125) 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126) 六塵. 육근이 각각 감수하는 여섯 가지 대상. 색(色)·성(聲)·향(香)·미(味)·촉
     (觸)·법(法).
127) 銀山鐵壁.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과 무쇠로 가로막힌 벽을 말한다. 이 은산
     을 마주하고 어떤 장비도 없이 올라가야 하고, 철벽 앞에서 맨몸으로 뚫고 나
     아가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언어와 사고 등 모든 수단이 박탈되어 해결할 길
     이 전혀 없는 극한의 경계를 비유하는데, 이것은 화두가 타파되기 직전에 도래
     하는 좋은 소식이다. “법좌에 올라 말했다. ‘법에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데 도에
     어찌 여러 길이 있겠는가! 저것과 이것 사이에는 공훈이 전혀 없고, 옛날과 지
     금을 비교해도 변하고 바뀐 것이 없다. 의지하거나 기댈 것은 푸른 허공과 하늘
     이며, 의지하거나 기댈 것이 없는 것은 은산과 철벽이다.’”(『圜悟悟語錄』권4 
     大47 p.728b8. 上堂云, ‘法無二相, 道豈多途? 彼此絶功勳, 古今不變易. 有依倚
     底, 碧落靑霄;無依倚底, 銀山鐵壁.’) 太古語錄 주석164)·205) 참조.
128) 일착자(一着子). 여기서는 무자 화두를 말한다.
129) 화반탁출(和槃托出). ‘槃’보다 ‘盤’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쟁반째 내놓다’는
     말은 ‘가진 것을 숨김없이 모두 보여주었다’는 의미이다.
130) ‘淂’은 ‘得’이 옳다.
131)『天如惟則語錄』에는 ‘草草捏’이 ‘單單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 또한 분명히 밝아지
고, 사대가 각각 흩어진 다음에 귀착될 곳이 어딘지도 분명히 밝혀질 것이
며, 산승이 말로 그대들을 속인 내용도 분명히 밝혀질 것이고, 종래의 조사
들이 천차만별로 설정한 속임수의 장치132)도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이렇
게 하나하나가 분명히 밝아지면, 이때가 임제종의 바른 종지를 일으켜 세
우는 시절인 것이다.
父每133)未生前面目也分曉, 四大各散後落處也分曉;山僧說
話瞞你處也分曉, 從上祖師千差萬別訛處也分曉. 旣一一分
曉, 卽是扶起臨濟正宗底時節也.
132) 효와( 訛). 속임수 또는 거짓말이라는 뜻 또는 교란시키는 말이라는 뜻이다.
     화두가 가지는 장치 또는 관문(關門)으로서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화두가
     상대의 분별을 자극하는 일종의 장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겉으로 드
     러난 말의 논리를 따라다니다 보면, 그 각각이 모두 착각이 되어 결과적으로 화
     두의 말에 속게 된다.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동산수초(洞山守初)가 ‘마
     삼근(麻三斤)’이라 했던 화두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세 근’의 무게가 하나의 장
     치가 되어 마치 분별의 저울에 올려놓을 수 있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
     지만 ‘마삼근’은 그러한 분별을 유도하여 분별이 일어나는 순간 곧바로 때려 부
     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일단 화두를 제시한 다음에 이러한 교란의 방법으로
     상를 이끌어서 헛된 분별의 틀을 깨는 것이 간화선 특유의 방법이다.
133) ‘每’ ‘母’가 옳다.

이때가 되면 세간법과 불법 사이에 꿰맨 틈이 없어져,134) 삼현·삼요·사
료간·사빈주·사할로부터 사대·오온·육근·육식 그리고 산하대지와 삼라
만상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법도 임제종의 바른 종지가 아닌 것이 없다는 진
실을 알게 될 것이니, 일으켜 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
렇게 된 다음에는 베어 없애도 되고 세워도 된다. ‘나는 법왕으로서 법을 자
유자재로 부리는 자’135)라는 경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법좌에서 내려왔다.
當此之時, 世法佛法, 了無縫鏬, 便見三玄三要四料揀四賓主
四喝, 以至四大五蘊, 六根六識, 山河大地, 萬象森羅, 無一
法不是臨濟正宗, 不待扶而自起也. 然後, 剗除也得, 建立也
淂,136)‘ 我爲法王, 於法自在者也.’” 下座.
134) 무봉하(無縫鏬). 천의무봉(天衣無縫)과 같은 말. 바늘과 실을 써서 만들지 않은
    선녀(仙女)의 옷. 지극히 자연스러워 인위적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것을 말
    한다. 송나라 때의 설화집인『太平廣記』에 유래가 나온다(『太平廣記』권68「女
     仙」13. 徐視其衣, 並無縫, 翰問之. 謂翰曰, ‘天衣本非針線爲也.’).
135)『法華經』권2 大9 p.15b6 참조.
136) ‘淂’은 ‘得’이 옳다.

● 욕불상당137) 浴佛上堂
137) 불탄일(佛誕日)인 4월 초파일에 불상의 정수리에 향수를 붓는 욕불(浴佛)의식
     을 치르기에 앞서 행하는 상당법문.『佛祖統紀』권33 大49 p.318b23에 “욕불:
     4월 8일은 부처님의 생일이다. 이날 사람들은 염불을 하면서 불상에 향수를 붓는
     다.『마하찰두경』에 나온다.”(浴佛:四月八日, 是佛生日. 人民念佛浴佛形像. 
     訶刹頭經.)라고 하였는데,『摩訶刹頭經』大16 p.797c23 이하의 서술에 따르
     면, 향수와 꽃을 불상에 뿌린다고 한다.

나옹선사가 향을 사르고 법좌에 올라 ‘세존께서 세상에 탄생하자마자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에 사방을 둘러보고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라고 한 화두를 제
시하고 말했다. “대중들이여! 알겠는가? 괴이한 것을 보고 의심 없이 그대
로 믿으면 그 괴이함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138) 싯다르타 태자가 오늘 태
어나자마자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아무 일도 없는 데서 풍파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로 괴이한 시험의 틀을 만들어내어 후손들의 눈 속에 모래를 집어
넣었다.139) 해마다 오늘 8일이 되기만 하면, 한 동이 향수로 그 허물을 씻어
내지만, 아무리 씻어낸들 그 흔적이 어찌 모두 없어지겠는가! 나귀해140)
될 때까지 씻으면 조금 나아지리라.” 불자로 선상을 세 번 두드린 다음에
“대중들이여! 각자 위의를 갖추고 모두 함께 관불141)을 행합시다.”라고 말
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
師拈香罷, 陞座, 擧,‘ 世尊初生下來,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
行七步, 目顧四方云, 「天上天下, 唯我獨142)尊」’ 師云,“ 大衆!
還會麽? 見怪不猜, 其怪自退. 悉達纔生於此日, 指天指地起
風波, 做模打樣多般怪, 添得兒孫眼裏沙. 每到年年今八日, 一
盆香水洗痕瑕, 洗來洗去塵何盡! 洗到驢年又更差.” 以拂子敲
床三下, 隨後云,“ 大衆! 各具威儀, 同時灌佛.” 便下座.
138) 이상은 『高峰語錄』 卍122 p.658a9의 내용과 같다. 다만 ‘見怪不猜, 其怪自退’가
     ‘見怪不怪, 其怪自壞’로 되어 있다.
139) 간화선의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의 탄생 설화는 비범한 인물의 출현을 알리는
     신비한 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평지풍파(平地風波)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특
     별히 할 일이 없는 곳에서 할 일을 만들어내듯이 고의적으로 풍파를 일으켜 뚫
     고 나가기 어렵도록 설정한 관문(關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시험의
     틀은 임시로 만들어진 허(虛)로서 타파해야 할 화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40) 여년(驢年). 12간지에 없는 해.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141 灌佛. 불상의 정수리에 물을 붓는 의식. 그 물은 침향(沈香)·백단(白檀)·감송
     (甘松)·정자(丁子)·훈육(熏陸)·궁궁(芎藭)·울금(鬱金) 등 일곱 종류의 재료를
     섞어서 솥에 넣고 깨끗한 물을 채운 뒤 끓여서 만든다. 그러므로 이것을 향수(香
     水) 또는 향탕(香湯)이라 한다.『禪林象器箋』권13「報禱類」禪藏 p.974 참조.
142)『長阿含經』권1 大1 p.4c1에는 ‘獨’이 ‘爲’로 되어 있다.

● 결제상당 2 結制上堂

나옹선사가 향을 살라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나서, 다시 향을 사
르고 말했다. “이 향 하나는 가지고 있은 지 오래되었지만 일찍이 한 번도
사른 적이 없었다. 오늘 보암장로가 신의143)를 전해주러 온 까닭에 향로에
다 향을 피워서, 보지 못하는 자는 보도록 하고 듣지 못하는 자는 듣도록
할 것이다. 이 향은 서천 108대 조사이신 지공대화상144)을 위해 사름으로써
법유145)로 길러주신 은혜를 갚으리라.” 향을 꽂은 뒤에 법좌에 올라앉아 말
했다. “오늘은 천하의 총림이 결제를 시작하는 날이다. 청평산146) 비구 나
옹은 부르고 쓸 이름도 없고, 어떤 모습도 없으며, 미혹도 깨달음도 없고,
수행도 없고 수행하여 증득한 결과도 없으며, 태양처럼 밝기도 하고 옻칠
처럼 새까맣기도 한 하나의 그 무엇[一物]147)을 여러분 앞에 뿌려놓았으니,
북을 울려 대중을 집합시키고 함께 보아라! 여러분, 알겠는가? 만약 모르
겠다면, 하나의 소식을 다시 드러내 보이겠다.” 주장자를 세우고서 말했다.
“보았는가?” 다시 주장자를 내리치고서 말했다. “들었는가? 조금 전에 보고
조금 전에 들은 이것은 무엇인가?148) 이것에 대하여 문득 아무 의심도 없
는 경지가 되었다면, 스님이거나 속인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살
아있거나 죽었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저편으로 뚫고
갈 수 있을 것이니, 더 이상 무슨 긴 기간과 짧은 기간 그리고 결제와 해제
등의 구별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149) 석 달의 안거 기간인 90
일 동안 주장자도 치워 두고 포대자루도 묶어 놓고서150) 3개의 서까래 아
래 7척 단전151)에서 금강으로 만든 견고한 울타리[圈]를 뛰쳐나오고 밤송
이·가시나무·생쑥을 삼키며,152) 꿈속에서도 불사를 행하고 거울에 나타
난 마구니도 항복시켜야 한다.153) 그리하여 신(身)·구(口)·의(意) 3업이
청정해지고 육근이 맑고 깨끗해져 사위의에 어떠한 잘못도 없다면, 조사의
지위를 이어 영원히 법맥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어찌 대장부가 아니며
진정한 출가수행자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오늘 신씨 집안
에서 명복을 비는 신군평154)과 모든 영가와 혼령들이 이 공덕을 받을 것이
니 무슨 죄인들 면치 못하고, 무슨 고통인들 벗어나지 못하겠는가? 또한 시
방의 불국토에 마음대로 왕생하고 왕생하는 그 어디에서나 즐거울 것이니,
어찌 모든 일을 막힘없이 펼치지 못하겠는가?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불
자를 세우고 말했다. “이 결정적인 한 수155)는 수행하여 깨닫는 것에 속하
는가? 아니면 수행하여 깨닫는 것에 속하지 않는가?” 불자를 던지고 “바른
안목을 가진 납승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말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
師拈香祝聖罷. 又拈香云,“ 此一辦香, 得之久矣. 前來未曾拈
却, 今因普菴長老, 傳信衣來, 所以爇向爐中, 令不見者見, 不
聞者聞. 奉爲西天一百八祖指空大和尙, 用酬法乳之恩.” 便
揷, 陞座云,“ 今日是天下叢林結制之晨. 淸平山比丘懶翁, 將
得名無字, 無形無狀, 無迷無悟, 無脩無證, 明如日黑似漆
底一物, 散在諸人面前, 打鼓普請看! 諸人還會麽? 若也未會,
更露个消息去也.” 拈拄杖云, “還見麽?” 卓一下云, “還聞麽?
旣見旣聞, 是箇什麽? 於斯驀得無疑, 曰僧曰俗, 曰男曰女, 曰
存曰亡, 不歷階梯, 透過那邊, 更有什麽長期短期, 結制解制?
其或未然, 三月安居九十日內, 縫却拄杖頭, 結却布帒口, 向三
條椽下七尺單前, 跳出金剛圈, 呑却栗棘蓬, 作夢中佛事, 降
鏡魔軍. 三業淸淨, 六根明潔, 四威儀內, 無諸過患, 紹隆祖
位,永不斷絶. 豈非大丈夫·眞出家兒? 若能如是, 今日申氏追
薦16)申君平, 洎諸靈魂等, 蒙此功德, 何罪而不免, 何苦而不
脫? 十方佛刹隨意往生, 隨處快樂, 豈不暢哉? 雖然如此.” 竪
起拂子云, “這一着子, 屬脩證耶? 不屬脩證耶?” 擲下云, “具
眼衲僧, 試自斷看.” 下座.
143) 信衣.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수하는 표시로 주는 가사. 전의(傳衣)라고도 한
     다. “5조 홍인대사가 신의를 한밤중에 노행자(盧行者) 혜능에게 전하자 황매(5
     조 홍인) 문하의 7백 명 대중이 떠들썩하였다.”(『宏智廣錄』권2 大48 p.19c13. 
     信衣半夜付盧能, 攪攪黃梅七百僧.)
144) 지공(指空 ?~1363). 인도 마가다국 출신 스님. 원(元)나라에서 활동했으며, 1326
     년 고려를 방문하여 2년 6개월 동안 체류했다. 이때 나옹이 지공으로부터 보살
     계를 받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나옹이 후에 원나라로 구법을 떠나 1348년에 지
     공을 친견한 이후 수차례 교류가 있었다.
145) 法乳. 법이라는 젖. 곧 법을 어머니의 젖에 비유한 것. 모유(母乳)가 아기의 몸을
     기르는 공능이 있는 것처럼 정법(正法)이 중생의 법신(法身)을 증장시키는 점을
     비유한 말이다.
146) 나옹은 1367년 청평산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청평산은 현재의 춘천 소재
     오봉산(五峰山)이며 청평사는 지금도 남아 있다.
147) 일물(一物). 眞覺語錄 주석44), 白雲語錄 주석249) 참조.
148) 들어 올린 주장자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내리쳤을 때 나는 소리를 들었는데, 바
     로 그렇게 보고 들은 현장의 소식을 곧바로 가리키고 있다.
149) 다음 구절부터 ‘어찌 대장부가 아니며 진정한 출가수행자가 아니겠는가?(豈非
     大丈夫眞出家兒)’라고 한 구절까지는『大慧語錄』 권8 大47 p.843a1~a6의 내
     용과 대의가 일치한다.
150) 안거 90일 동안의 금족(禁足)기간에 참선하는 자리를 떠나 어디에도 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주장자와 포대는 돌아다닐 때 필요한 물건이다.
151) 삼조연하칠척단전(三條椽下七尺單前). 좌선하는 자리라는 뜻으로 상용구처럼
     쓰인다. 삼조연은 지붕 서까래 세 개의 폭으로서 좌선하거나 잠을 자거나 밥을
     먹는 등의 용도로 한 사람이 쓰는 자리의 폭에 해당한다. 단전(單前)은 한 사람
     이 좌선할 때 앉는 자리[單:單位]에 두는 판으로서 길이가 6척, 두께가 1척이 되
     어 합하면 7척이 된다.
152) 모두 화두 공부를 비유하는 말이다. “금강으로 만든 울타리를 꿰뚫고 나가고 밤
     송이·가시나무·생쑥을 삼켜야 하니, 만일 한 번 꿰뚫고 나가면 한 번에 백천억
     의 울타리를 꿰뚫고 나갈 수 있고, 하나의 생쑥을 삼키게 되면 무수하게 많은 생
     쑥을 한꺼번에 삼킬 수가 있다.”(『圜悟語錄』권10 大47 p.758b16. 須是透出金
     剛圈, 吞却栗棘蓬. 若透得一圈, 則百千億圈一時透過;若吞得一蓬, 則無數億蓬一
     時吞得.)
153) “거울에 비친 마군마저도 항복시키고, 꿈속에서도 불사를 크게 행한다.”(『萬善
     同歸集』권상 大48 p.993a8. 降伏鏡像魔軍, 大作夢中佛事.)
154) 申君平. 고려 공민왕 때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낸 사람.
155) 일자(一着子). 白雲語錄 주석42) 참조.
156) 추천(追薦). 죽은 사람을 위하여 공덕을 베풀고 명복을 비는 것.

● 달마상에 점안157)하다 達磨開光祝筆
157) 點眼. 개광(開光)·개안(開眼)이라고도 한다. 불상이나 신상(神像)을 조성한 후
     길일을 택일하여 조성된 상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 것.

나옹선사가 붓을 들고 말했다. “달마는 가섭으로부터 이어진 28대 조사
로서 안목을 갖추고서 큰 도적들을 항복시켰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
의 손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을 필요가 있는가? 대답할 수 있는 자 있는가?
만약 바르게 말한다면, 달마에게 숨통을 트이게 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법계의 모든 중생들에게도 남김없이 그 이익을 입게 할 것이다. 만약 제대
로 말할 수 없다면, 나의 게송 한 수를 들어 보라.”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분명하게 본성을 보게 하니, 달마는 펼칠 줄
만 알고 거둘 줄은 모르는구나.158) 이로부터 눈병이 생겨 허공에 꽃이 피
고, 온 누리에 어지럽게 꽃이 떨어져 눈을 가렸다네. 어지럽게 떨어져 눈을
가리는 꽃이 그치지 않으니, 아득하고 깜깜하여 길은 더욱 멀어지는구나.”
붓으로 점안하고 말했다. “이제 그에게 옛 광채를 보태어 주니, 번득이는
푸른 눈동자가 파란 하늘마저 꿰뚫는구나.”
師擧筆云,“ 旣是迦葉, 二十八代祖, 又能具眼, 降伏大賊, 爲
什麽却要他人點眼? 還有道得底麽? 若也道得, 非但爲達磨吐
氣, 亦使徧法界衆生, 悉霑利益. 若道不得, 聽取一頌.” 良久
云,“ 直指人心明見性, 老胡知放不知收. 從玆眼病空花發, 徧
界紛紛翳亂墜. 翳亂墜兮自不休, 杳杳冥冥路轉遙.” 以筆點
云,“ 今日添渠舊光彩, 碧眸瑩瑩徹靑霄.”
158) ‘방(放)’은 펼치는 것으로서 긍정의 방법이다. 달마대사가 곧바로 사람의 마음
     을 가리켜[直指人心], 분명하게 본성을 보도록 한 것[明見性]을 말한다. 일반적
     으로 선종의 종지로 알려져 있는 이 말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心]과 본성
     [性]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 본성마저도 집착과 분
     별의 대상이 되어 굳어진 관념으로 오용될 수 있으므로 이를 해체하는 방법이
     요청된다. 그것이 부정의 방법인 ‘수(收)’이다. 수는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긍
     정했던 대상을 부정하고 차단하는 방법이다. 나옹은 이처럼 ‘방’과 ‘수’를 자유
     자재로 활용하는 것에 근거하여 직지인심 등에 숨어 있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 지공화상 탄생일에 指空和尙誕生之晨

나옹선사가 지공화상의 진영(眞影) 앞에 이르러 말하였다. “정면으로 얼
굴을 마주하고 직접 꿰뚫어 보니, 기봉159)이 험준하여 털끝부터 뼛속까지
으스스하다. 그대들이 서천(西天)의 얼굴160)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의 향
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이을 보라.161)” 향을 꽂고서 잠깐 침묵하고 있다가
말하다. “말해 보라! 서천의 얼굴과 동토162)의 얼굴이 같은가, 다른가? 비
록 검은 얼굴과 흰 얼굴로 동서가 다르기는 하지만 코163)가 불쑥 튀어나온
모습은 마찬가지이다.”
師至眞前云, “驀面相逢親見徹, 機鋒嶮峻骨毛寒. 諸人欲識西
天面, 一片香烟起處看.” 揷香, 良久云, “且道! 西天面目, 與
東土面目, 是同, 是別? 雖然黑白東西異, 鼻孔堂堂却一般.”
159) 機鋒. 선기(禪機)라고도 한다. ‘기’란 수행에 의하여 얻은 마음의 기틀[心機] 또
     는 그것이 진실과 부합하면서 구체적인 대상 세계에 활용되는 것을 말한다. ‘봉’
     이란 그러한 기의 작용이 날카로운 것을 형용한다. 제자를 가르치거나 사물에
     응용될 때 마음을 나타내 보이는 태도나 수단이 민첩하고 빈틈없이 핵심을 정
     확하게 찌르는 솜씨를 칼끝[鋒]에 비유한 것이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핵심을 찌
     르는 작용을 말한다. 기봉이 ‘험준’하다는 것은 가파르고 높아 오르기 어려운 산
     이나 절벽과 같이 말이나 행위 등의 작용이 본분을 엄격하게 고수하여 쉽게 접
     근할 수 있는 방편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60) 지공이 인도 출신이므로 서천의 얼굴이라 한 것이다.
161) 지공의 본래면목은 바로 이 현장에 드러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
162) 東土. 太古語錄 주석98) 참조.
163) 비공(鼻孔). 얼굴의 중심에 위치하고 또한 우뚝 튀어나온 형상을 가지고 본래면
     목 또는 핵심을 뜻하는 비유로 쓰인다. “대휴실(大休實)선사가 소암(笑巖)에게
     물었다. ‘그대의 스승인 무문정총(無聞正聰)이 특별히 찾아온 지 40년 흘렀는데,
     요즈음 코는 어떠신가?’ ‘화상의 코와 같습니다.’ ‘상좌가 나의 코를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어디서 보았는가?’ ‘두 눈 아래, 입 위에 붙어 있군요.’”(『續燈正統』
     권30「大休實章」 卍144 p.834b1. 師又問, ‘無聞別來四十年, 未知近日鼻孔如何?’ 
     巖曰, ‘與和尙鼻孔一般.’ 師曰, ‘上座, 還見老僧鼻孔?’ 巖曰, ‘見.’ 師曰, ‘向甚麽處見?’ 
     巖曰, ‘兩眼下口門上.’)

● 지공의 입적일164)1 入寂之辰
164) 이하 네 편의 법문은 매년 지공의 입적일을 기념하여 시행한 법문.

나옹선사가 말했다. “와도 온 자취가 없으니165) 밝은 달의 그림자가 모든
강물에 나타난 것과 같고, 가도 간 흔적이 없으니 맑은 허공의 형상이 모든
국토에 나뉜 것 같다. 말해 보라! 지공은 결국 어디 있는가?” 향을 사른 뒤
에 다시 말했다. “하나의 향 연기가 손의 움직임을 따라서 일어나니 바로
이 소식166)을 몇 사람이나 알겠는가?”
師云, “來無所來, 如朗月之影現千江;去無所去, 似澄空之形
分諸刹. 且道! 指空畢竟, 在什麽處?” 燒香云,“ 一片香煙隨手
起, 箇中消息幾人知?”
165) 지공의 생멸과정을 여래(如來)의 그것과 같은 경지로 찬양한 말. “저 부처님 여
     래께서는 와도 온 자취가 없고 가도 간 흔적이 없다. 태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
     도 않으며 이미 가지도 않고 지금 있지도 않으며 아직 오지 않지도 않았다.”(『大
     阿彌陀佛經』권상 大12 p.331a18. 彼佛如來, 來無所來, 去無所去. 無生無滅, 非
     過去現在未來.)
166) 지공의 소식은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바로 이곳에 있다는 뜻이다. 「지공의 입적
     일」3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된 취지와 같다.

● 지공의 입적일 2 又

태어나 올 때 한 줄기 맑은 바람 일어난 듯했고,
죽어 떠날 때 맑은 못에 달그림자 잠긴 듯했다네.
태어나고 죽고 오고 갔으나 어디에도 걸림 없으니,
중생의 몸뚱이에도 진심이 있음을 보이셨도다.
진심이 있는 몸뚱이 묻어버리지 마라.167)
바로 이때 모르고 지나치면 다시 어디서 찾을까?168)
生來一陳淸風起 滅去澄潭月影沉
生滅去來無罣礙 示衆生體有眞心
有眞休埋沒 此時蹉過更何尋
167) 전체 7언의 형식에서 이 구절은 6언으로 파격(破格)이다.
168) 바람이 막힘없이 어디로나 불고, 달그림자가 어떤 물에도 걸리지 않고 뚫고 들
     어가는 현상을 빌려 지공의 생사를 나타낸 시이다. 생사의 당체인 몸뚱이에 있
     는 걸림 없는 이치가 바로 진심이며, 생멸이 오고 가는 눈앞의 중생 세계에서 그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취지이다.

● 지공의 입적일 3 又

선가 향을 사르고 말하였다. “천 개의 검169)을 모두 들고서 언제나 활
발하게 휘두르며, 황제까지 꾸짖어 종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평생 강한 기
력으로 동방의 수행자들을 짓누르더니, 오늘은 대수롭지 않게 하나의 기틀
을 바꾸었다.170) 기틀을 바꾸어 어디로 갔을까?” 향을 꽂고 말했다. “지공화
상께서 진짜로 간 곳을 알고 싶다면, 바로 이곳에서171) 살펴서 찾고 더 이
상 의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師拈香云, “千劒全提常活用, 皇王罵動作奴之. 平生氣壓東方
老, 今日等閑轉一機. 轉一機何處在?” 揷香云,“ 欲識指空眞
去處, 請看這裏更休疑.”
169) 선기(禪機)를 드러내는 무수하게 많은 방편을 상징한다. 지공의 선풍을 천검(千
     劍)이라 평가한 것은 나옹의 안목에 따른다. “지정 10년(1350년) 8월 가을에 평
     산처림(平山處林)을 친견하였다. 평산이 나옹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
     의 가르침을 받았는가?’ ‘서천 출신 지공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분은 매일같
     이 천 개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지공이 휘두른 천 개의 칼은 그만두고 그대의
     칼 하나를 내놓아라.’ 나옹이 깔고 앉은 좌구(坐具)로 평산을 끌자 평산이 선상
     에 뒤집어지며 말했다. ‘이 도적이 나를 죽이는구나!’ 나옹이 ‘저의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라고 한 뒤 평산을 일으켜 세웠다. 평산은 설
     암조흠(雪巖祖欽)이 급암종신(及庵信)에게 전하여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가
     사와 불자를 법제자로 인가하는 징표로 주었다.”(『東國僧尼錄』「懶翁章」
     卍150 p.683b5. 秋八月參平山. 山問, ‘曾見何人?’ 曰, ‘西天指空, 日用千釰.’ 
     山云, ‘且置, 指空千釰, 將汝一釰來.’ 師以坐具提山, 山倒在禪 賊煞我. 師曰, 
     ‘吾釰也能殺人能活人.’ 乃扶起. 山以雪岩所傳及庵衣拂子表信.) 나옹이 설암조
     흠·급암종신·평산처림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속한다는 내용도 보인다.
170) 오늘이 생사의 전기(轉機)를 맞아 입적한 날이라는 말.
171) 각자 서 있는 그 자리에 근원이 드러나 있다는 뜻.

● 지공의 입적일 4 又

선사가 향을 사르고 말하였다. “푸른 한 쌍의 눈동자에 두 귀에는 귀걸
이를 달고,172) 수염은 덥수룩하게 늘어졌고 얼굴은 검다. 다만 그렇게 왔다
가 그렇게 갔을 뿐, 비범한 모습이나 신통은 나타내지 않았다.173) 홀로 고
향 길로 떠나리라 미리 알고서, 말을 전하여 전륜성제(轉輪聖帝)174) 궁전으
로 떠났다고 알려주었다. 떠날 시간이 되어 가르쳐 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자 종지를 알지 못한다고 문도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엄숙히 돌아가실
때 모습은 예전과 같았으나, 온몸에 흐르는 온화한 기운은 세상사람과 달
랐다. 이 불효자는 별달리 가진 물건이 없어 차 한 잔과 향 하나를 올립니
다.” 말을 마치고 향을 꽂았다.
師拈香云,“ 碧雙瞳穿兩耳, 髭須胡兮面皮黑. 但恁麽來恁麽
去, 不露奇相及神通. 預期獨往家鄕路, 傳語令知輪帝宮. 臨行
垂示無人會, 痛罵門徒不解宗. 儼然遷化形如古, 徧體溫和世
不同. 不孝子無餘物, 獻茶一盌香一片.” 便揷.
172) 달마대사의 형상을 묘사하는 말인 동시에 인도 출신의 수행자를 가리키는 일반
     적인 말이기도 하다. 푸른 눈동자는 진리를 보는 밝은 눈을 상징하며, 귓불을 뚫
     고 귀고리를 단 형상은 진리에 통하는 귀가 뚫려 잘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173) 인도인으로서 보통 그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왔다가 그렇게 살다 갔다는 뜻. 평
     상무사(平常無事)의 도리를 함축한다. 앞의 법문과 같은 취지이다.
174) 『佛本行經』 권1 大4 p.59c17 참조.

● 시중 示衆

선사가 하루는 대중을 모아 놓고 한 사람씩 일상 공부 상태를 점검하고
나서 대중에게 말하였다.175) “만약 이와 같다면, 대장부답게 용맹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확고한 뜻을 세우고, 평소에 깨우쳤거나 이해하고 있었던 모
든 불법과 사륙문장176) 그리고 언어에 몰두하는 성향 등을 한꺼번에 쓸어
큰 바다 속에 버리고 다시는 이렇다 저렇다 들먹이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
음 팔만사천의 미세한 번뇌망상에 한꺼번에 눌러 앉아 꼼짝 못하게 하고서
본래 참구하던 화두177)를 단번에 들고 궁구하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
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178)·‘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179)·‘어
떤 것이 나의 성품인가?’ 등의 화두나, 또는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도 불성
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라고 하였고, 「움직이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는 어떤 것이나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
이 없습니까?」’라고 제기한 화두를 들어야 한다. 다만 이들 화두에서 핵심
이 되는 한 구절180)을 힘껏 들고서 항상 끊임없이 반복하여 궁구하다가 공
안이 눈앞에 실현되면181) 붙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붙들리게 되고 고
요한 경계에서나 시끄러운 경계에서나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경계에 이르면 의심을 일으키기 좋아서, 걸어가거나
머물러 있거나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대소
변을 보거나 그 어떤 경계에서도 온몸이 하나의 의심덩어리182)가 될 것이
다.183) 반복하여 의심하고 꾸준히 쥐어짜듯 궁구하면서, 몸과 마음을 확고
하게 통일시켜 분명하고 훤히 밝은 경지를 찾아야 한다. 다른 공안이나 경
전에서 헤아리며 뜻을 찾아서는 안 되며, 반드시 단번에 모든 분별이 끊어
지고 사라지는 경계가 되어야 비로소 본래의 집에 도달할 수 있다. 화두를
들려고 해도 잘 들리지 않거나, 가라앉고 심심하여 아무 맛도 없으면, 낮게
소리를 내어 연달아 세 번 읊어보라. 화두에 힘이 붙는 것을 문득 느낄 것
이니, 바로 이런 경계에 이르게 되면 더욱 힘을 붙여 화두를 들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대들이 각기 화두를 타파하겠다는 뜻을 세워 잡념을 떨어
버리고 눈을 비벼 정신을 차리고 정진하는 중에 더욱 정진하고 용맹한 상
태에서 더욱 용맹한 기상을 발휘한다면, 홀연히 빈틈없이 핵심에 들어맞고
백 가지가 되었건 천 가지가 되었건 모두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런 경계
에 이르면, 바로 점검해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런 다음 이십 년이든 삼
십 년이든 따지지 말고 물가와 숲 아래에서 성태184)를 기른다면, 천룡(天
龍)의 천거를 받아 사람들 앞에서 바른 입을 열고 본분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185) 그때에는 금강으로 만든 울타리를 자유자재로 삼켰다 뱉
었다 할 수 있고,186) 가시나무 숲에서 마음껏 팔을 흔들며 지나갈 수 있으
며, 한 찰나에 시방세계 전체를 삼켰다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토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경계에 이르면, 비로소 그대의 정수리에 비로자나
불의 화관(花冠)을 올려주고 보신불(報身佛)과 화신불(化身佛)의 머리 위
에 눌러 앉을 자격이 있다187)고 인정하겠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밤낮 어
느 때이든 가리지 말고188) 포단189)에 우뚝 앉아 급하게 눈을 붙이고 ‘이것
은 무슨 도리일까?’ 하고 화두를 살펴라.” 말을 마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師一日, 集衆各問日用工夫畢, 示衆云,“ 若如此, 則須發丈夫
心, 立決定志, 將平生悟得底, 解會得底, 一切佛法·四六文
章·語言三昧, 一掃掃向大洋海裏去, 更莫擧着. 把八萬四千
微細念頭, 一坐坐斷, 却將本參話頭, 一提提起. ‘或萬法歸一,
一歸何處?’·‘或那箇是本來面目?’·‘或那箇是我性?’·‘或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蠢動含靈皆有
佛性, 因甚狗子無佛性?」’ 只將末後一句, 着力提起. 提來提
去, 公案現前, 不提自提, 靜中鬧中, 不擧自擧. 却來這裏, 好
起疑情, 行住坐臥·着衣喫飯·屙屎放尿, 於一切處, 通身幷
作一箇疑團. 疑來疑去, 拶來拶去, 凝定身心, 討箇分曉. 不可
向公案上卜度, 語錄經書上尋覓, 直須啐地斷爆地絶, 方始到
家. 若是話頭提不起, 冷冷淡淡, 全無滋味, 低低出聲, 連擧三
徧. 話頭便覺有力, 到這裏, 正好着力, 不可放捨. 諸人各各立
志, 抖擻精神, 挪挱眼睛, 精進中更加精進, 勇猛處更加勇猛,
忽然踢着磕着, 千了百當. 到這裏, 正好見人. 不問二十年三十
年, 水邊林下, 長養聖胎, 天龍推出, 敢向人前, 開大口說大話.
金剛圈呑吐自在, 荊棘林中, 掉臂經過, 於一念中, 呑却十方世
界, 吐出三世諸佛. 若到這裏, 方許你頂盧舍那冠, 坐報化佛
頭. 其或未然, 晝三夜三, 高着蒲團, 急着眼睛. 看他是箇甚麽
道理?” 便下座.
175) 다음 구절부터 ‘본래 참구하던 화두를 단번에 들고 궁구하라(却將本參話頭 
     一提提起)’고 한 구절까지는 『禪關策進』「仰山古梅正友禪師示衆」大48 
     p.1103a22~a25와 거의 동일하며 몇몇 어휘와 구절만 다르다.
176) 四六文章. 사륙문체(四六文體)라고도 한다.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
     문 문체.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
     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문장을 대표적으로 이르는
     말로 각자가 학습한 갖가지 문장을 총괄적으로 나타낸다.
177) 본참화두(本參話頭). 일단 종사에게 받은 다음 참구하기 시작한 화두는 타파될
     때까지 다른 것으로 바꿔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본참’이라 한다. 본 어록「答李相
     國」 第二書에 “결코 이동하지 말고, 결코 화두를 바꾸어 참구하지 마라.(切莫移
     動, 切莫改參.)”라고 한 말이 그 뜻이다.
178) 조주와 학인의 문답에 근거한 공안.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
     디로 돌아갑니까?’ ‘내가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베적삼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
     가 일곱 근이었다.’”(『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卍118 p.318b9. 問, ‘萬法歸一, 一
     歸何所?’ 師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179) 眞覺語錄 주석47) 참조.
180) 말후일구(末後一句). 眞覺語錄 주석38) 참조.
181) 공안현성(公案現成). 다른 어떤 분별의 속성도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화두만 뚜
     렷하게 나타난 경계를 가리킨다.
182) 의단(疑團). 안팎의 모든 것이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통일되어 하나도 남김없이
     의심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 “3백 6십 개의 뼈, 8만 4천 개의 털구멍을
     가지고 온몸으로 의심덩어리를 일으켜 무자를 참구하며, 밤낮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無門關』大48 p.293a2.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撕.)
183) 다음 구절부터 ‘연달아 세 번 읊어보라[連擧三徧]’까지의 구절은『禪關策進』
    「仰山古梅正友禪師示衆」大48 p.1103a25~a29의 대의와 같다.
184) 聖胎. 성인이 길러지는 모태(母胎). 마치 태아가 모태에서 길러지듯이 성인의 경
     지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는 모든 과정과 조목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화두를
     타파한 다음에 그것을 더욱 단단히 다져 완성시키는 보임(保任)의 과정을 비유
     한다.『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疏』권중 大33 p.465c25에 따르면, 10주(住)・
     10행(行)・10회향(廻向)의 3현위(賢位)를 말한다. 이것들은 성인이 될 인(因)으
     로서, 자신이 가진 종자를 인으로 하고 좋은 벗을 연(緣)으로 삼는다. 정법을 듣
     고서 수행하고 성인이 될 종자를 잘 길러내면 초지(初地)에 이르게 되며, 성도할
     조건을 갖출 수 있다고 한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10심(心)을 장양하여 성태
     가 된다.”(『仁王經』권상 大8 p.826b29. 一切諸佛菩薩, 長養十心, 爲聖胎也.)
185) 성태가 완성되어 종지를 펼칠 때가 된 상태를 말한다. “또 반드시 여러 조사들
     이 설정한 겹겹의 관문을 타파한 다음, 두루 선지식을 찾아다녀야 얕고 깊은 차
     이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런 후에 물가와 숲 아래에서 성태를 길러 천룡의
     천거를 받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에 나타나 자유자재로 종지를 선양하고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 것이다.”(『禪關策進』「般若和尚示衆」大48 p.1103a14. 
     更須打破諸祖重關, 遍參知識, 得知一切淺深. 却向水邊林下, 保養聖胎, 直待龍天
     推出, 方可出來扶揚宗教, 普度群生.)
186) 원문에 글자가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금강의 울타리를 뚫고 벗어나고
     밤송이・가시나무를 삼킨다’는 말이 일반적이다. 주석152) 참조.
187) 임제의현(臨濟義玄)의 말에 따른다. “도를 찾는 무리들이여! 나의 견지에 따르
     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 위에 짓눌러 앉는다. 십지(十地)를 달성한 보살도
     남의 집 품팔이와 같고, 등각(等覺)과 묘각(妙覺)도 목칼을 메고 족쇄를 찬 죄수
     와 같으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뒷간의 오물과 같고, 보리와 열반도 나귀를 매어
     놓는 말뚝과 같다.”(『臨濟語錄』大47 p.497c9. 道流! 取山僧見處, 坐斷報化佛
     頭. 十地滿心, 猶如客作兒;等妙二覺, 擔枷鎖漢;羅漢辟支, 猶如廁穢;菩提涅槃, 
     如繫驢橛.)
188) 주삼야삼(晝三夜三). 하루 종일. ‘주삼’은 밝은 낮을 세 단계로 나눈 것으로 신조
     (晨朝)·일중(日中)·일몰(日沒)을 가리키고, ‘야삼’은 해가 저문 때를 세 단계로
     나눈 것으로 초야(初夜)·중야(中夜)·후야(後夜)를 말한다.
189) 蒲團. 부들로 둥글게 틀어 만들어서 깔고 앉는 방석. 좌선(坐禪)할 때 쓴다.

● 입문삼구190) 入門三句
190) 불문(佛門)에 입문하면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를 세 단계로 나눈 것이다. 白雲
     語錄「나옹화상의 삼구와 삼전어에 대한 풀이」와 주석218) 참조.

문에 들어가는 구절에서 분명하게 말했는데, 문을 마주한 구절은 무엇이
며, 문에 들어간 다음의 구절은 또한 무엇인가?
入門句分明道 當門句作麽生 門裏句作麽生.

● 삼전어191) 三轉語
191) 주석190) 참조.

작은 산들의 기세는 어째서 큰 산 가에서 그치는가?192)
가는 물줄기들은 어째서 큰물을 이루는가?
밥은 어째서 흰쌀로 만들어지는가?
山何嶽邊止 水何到成渠 飯何白米造
192) “모든 작은 봉우리의 기세는 큰 산 가에서 그치고 모든 파도 소리는 바다로 돌
     아가 사라진다.”(『圜悟語錄』권1 大47 p.718b4. 千峯勢到嶽邊止, 萬派聲歸海
     上消.)

● 17일193) 수어194)十七日垂語
193) 하안거가 시작되는 음력 4월 17일로 추정된다. 세 종류의 안거 중 하나이다.『毘
     尼心』 大85 p.666b23 참조.
194) 垂語. 스승이 학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 시중(示衆)·수시(垂示)·수계(垂
     誡) 등과 같은 뜻이다. 또는 스승이 학인에게 법어를 주고 학인의 질문을 이끌어
     내는 것. 이 경우는 조화(釣話)·색화(索話) 등과 같은 뜻이다. 이들 용어들이 엄
     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모두 유사하게 사용된다.『禪林象器箋』권11 
    「垂說類」禪藏 pp.841~843 참조.

나옹선사가 향을 사르고 나서, 법좌에 올라앉아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
다. “의심덩어리가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결코 다른 풍광은 없다가195) 눈을
뜨고 밖의 세계를 보는 순간 속세와 다른 호리병 속의 봄 풍경196)이 펼쳐질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전혀 새로운 세월이 왔다는 것을 믿게 되고, 특별난
세계가 전개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197) 여기서 반드시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상의 관문에 이르러 조사가 걸어 놓은 빗장을 부수어버리면 하나하나의
존재 그 무엇에서든 자유자재로 묘한 경계를 얻고, 드러내는 구절과 말 하
나하나마다 종지와 정해진 틀198)을 뛰어넘을 것이다.199) 한 줄기 풀로 1장
6척의 금신200)을 만들고 1장 6척의 금신으로 한 줄기 풀을 만들 것이니, 세
우는 것 또한 나에게 달려 있고 쓸어 없애는 것도 나에게 달려 있으며 도리
를 말하는 것도 나에게 달려 있고 도리를 설하지 않는 것도 나에게 달려 있
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되는가? 내가 법왕이기 때문에 이처럼 법에 대해서
자재한 것이다.” 주장자를 올렸다가 한 번 내리치고 말했다. “이러한 납승
이 있는가? 있으면 나와서 말해 보라!” 어떤 학인이 문 앞으로 나서자 선사
가 또 말했다. “한 걸음 나아가면 땅이 꺼져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면 허공
이 부서져 내리며,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면 숨은 붙어 있으나 죽
은 사람과 다름없다.201) 어떻게 발을 내딛겠는가?” 학인들이 모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師拈香罷, 陞座良久云, “疑團落處, 終無兩樣風光, 眼孔開時,
別有一壺春色. 始信斬新日月, 方知特地乾坤. 更須蹋着上頭
關, 打破祖師關棙子, 頭頭物物, 縱橫得妙;句句言言, 超宗越
格. 將一莖草, 作丈六金身;將丈六金身, 作一莖草用, 建立亦
在我, 埽蕩亦在我, 說道理亦在我, 不說道理亦在我. 爲甚如
此? 我爲法王, 於法自在.” 以拄杖卓一下云,“ 還有這般底衲
僧麽? 出來道看!” 學者到門, 師又云,“ 進一步則大地平沉, 退
一步則虛空撲落, 不進不退, 有氣死人. 且作麽生進步?” 學者
皆無語而退.
195) 화두를 타파하고 나서 구현되는 무분별·무차별의 세계를 말한다. 구체적인 대
     상과 교섭하지 않은 상태로서 어떤 분별도 일어나지 않는 내면의 본지풍광(本
     地風光)을 가리킨다. 바로 이 경지에서 자기 밖의 대상을 보고 들으면 전혀 새로
     운 세계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 전체가 본지풍광이기도 하다.
196) 호리병 속의 별천지인 상춘(常春)의 세계. 眞覺語錄 주석43) 참조.
197) 화두가 타파되고 난 다음에 전혀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를 이와 같이 묘사하는
     예를 설암조흠(雪巖祖欽)의 법문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이 무자는 견고한 관
     문을 부수고 생사윤회의 고리를 끊으며, 의단을 깨뜨리는 예리한 칼날이다. 모
     름지기 이 하나의 무자를 이마에 소중히 붙여 두고 수미산과 같이 의연하게 궁
     구하여야 한다. 만 길의 벼랑 앞에서 한쪽 다리로 위태롭게 서 있다가 다리를 헛
     디뎌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목숨까지 한꺼번에 분쇄되면, 문득 전
     혀 새로운 세월과 특별난 세계가 전개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니, 삼세의 모든 부
     처와 역대의 모든 조사도 모조리 나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雪巖語錄』권4 
     卍122 p.562b11. 只遮箇無字, 便是剖牢關斷生死, 破疑團的利刃. 却須將一箇
     無字, 放在斬新日月·特地乾坤, 三世佛, 歷代祖, 盡皆在我.
198) 격(格). 언어에 들어 있는 경직된 관념을 말한다.
199) 다음 구절부터 ‘법에 대해서 자재한 것이다’라고 한 구절까지는『大慧語錄』권
     19 大47 p.892b24의 내용과 같다(有時拈一莖草, 作丈六金身;有時將丈六金身, 
     却作一莖草. 用建立亦在我, 掃蕩亦在我, 說道理亦在我, 不說道理亦在我, 我爲法
     王, 於法自在.).
200) 金身. 주석32) 및 白雲語錄 주석13) 참조.
201) 주석85) 참조.

● 공부십절목202)工夫十節目
202) 나옹선사가 학인의 공부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점층적으로 구성한 열 가지 질
     문. 공부선(工夫選)에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옹선사가 전에 금경사에
     있었을 때, 공민왕이 좌가대사 혜심(慧深)을 시켜 스님에게 묻게 했다. ‘어떤 언
     구로 공부인을 시험해 뽑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먼저 입문 등의 삼구를 묻
     고 다음에 공부십절을 물으며 마지막에 삼관(三關)을 물으면, 공부와 수행이 깊
     은지 얕은지를 시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모두 알기는 힘들기 때문에
     십절과 삼관까지는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법회가 끝나자 공민왕이 천태종 스
     님인 신조(神照:여말선초의 권승)를 시켜 공부십절을 묻게 하니 나옹선사가 손
     수 써서 임금께 올렸다.”(『懶翁語錄』「行狀」韓6 p.707a20. 師之前在金經寺
     也, 上使左街大師慧深, 問師曰, ‘何以言句, 試取功夫?’ 師答云, ‘先問入門等三句, 
     次問功夫十節, 後問三關, 可驗功行淺深. 衆皆未會故, 不及十節三關.’ 會罷, 上使
     天台禪師神照, 請問功夫十節, 師手書進獻.)「行狀」에 따르면 공민왕 20년(1370)에 
     개경에 있던 광명사(廣明寺)에서 공민왕 입회하에 공부선이 있었는데, 나옹이 
     주맹(主盟)이 되어 제 종파의 학인을 시험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환암혼수
     (幻庵混修 1320~1392)에게 삼관(三關)까지 물었다고 전한다. 앞의 인용문에 
     근거하면, 공부십절목에 대한 문답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색을 보면 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
면 소리를 넘어서지 못한다.203) 어떻게 하면 소리와 색을 넘어설 수 있
을까?
盡大地人, 見色不超色, 聞聲不越聲. 作麽生超聲越色去?
203) “생각하여 알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대해탈문은 각각 당사자의 본분
     에 있으며 아득히 먼 겁의 세월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실오라기 하나만
     큼의 간격도 없고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부족함도 없다. 다만 그대들의 근기와
     품성이 각기 다르고 지혜로운 식(識)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소리를 들으면 소
     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색을 보면 색을 넘어서지 못한다.”(『元叟行端語錄』권5 
    「拙隱居士求示」 卍124 p.35a8. 此不思議大解脫門, 在各各當人分上, 從曠劫至
     今, 無絲毫間隔, 無絲毫虧欠. 只爲你根性不等, 智識不明, 聽聲不出聲, 見色不超色.)

2. 소리와 색을 넘어섰다면 반드시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바른 공부에 매진할 수 있을까?
旣超聲色, 要須下功. 作麽生下个正功?

3. 공부에 매진했다면 반드시 공부를 무르익게 해야 한다. 공부가 무르익
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은 어떤 경계인가?
旣得下功, 須要熟功. 正熟功時如何?

4. 공부가 무르익었다면 더욱 정진하여 화두를 타파해야 한다.204) 화두를
타파했을 때의 경계는 어떠한가?
旣能熟功, 更加打失鼻孔. 打失鼻孔時如何?
204) 타실비공(打失鼻孔). ‘타실’은 타파(打破)와 같은 말로 어떤 장애를 깨뜨려 문제
     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비공’은 코라는 말로서 코가 얼굴의 중심에 있다는 뜻에
     서 확장되어 핵심 또는 중심이라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공부의 과제인 화
     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화두를 타파하다’ 또는 ‘핵심이 되는 문제를 깨
     닫다’라는 정도의 의미가 된다.

5. 화두를 타파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심심하여 아무 맛도 없고 아무 기
력도 없다. 이렇게 의식이 움직이지 않고 마음의 작용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또한 자신의 허망한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 것도 알지 못한
다. 이 경계에 이르면 이는 무슨 소식인가?
鼻孔打失, 冷冷淡淡, 全無滋味, 全無氣力. 意識不及, 心路不
行時, 亦不知有幻身在人間. 到這裏, 是甚時節?

6. 공부가 시끄럽거나 고요한 어떤 경계에서도 빈틈이 없고205) 깨어 있
거나 잠들어 있거나206) 한결같은 데 이르면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고
휩쓸려도 사라지 않는 것207)이 마치 개가 기름이 끓고 있는 솥을 보고
핥아 먹고자 해도 핥을 수 없고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두지 못할 때와
흡사하니208) 어떻게 이 난관을 해결해야 하는가?
工夫旣到, 動靜無間, 寤寐恒一, 觸不散蕩不失. 如狗子見熱油
鐺相似, 要舐又舐不得, 要捨又捨不得時, 作麽生合殺?
205) 무간(無間). 화두 이외에 다른 생각이 파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으로 무간단(無
     間斷)과 같다. 太古語錄 주석194)·196) 참조.
206) 太古語錄 주석196) 참조.
207) 太古語錄 「答方山居士」 원문 및 주석195) 참조.
208) 개가 뜨거워서 혀를 댈 수도 없지만 먹고 싶어서 그만두지도 못하는 것처럼, 이
     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은산철벽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비유한다. 동
     일한 비유가『大慧語錄』권17 大47 p.883b2에 나온다.

7. 돌연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마치 120근의 짐209)을 내려놓는 것
과 같이 단번에 자르고 순식간에 끊어지는 바로 그 순간 어떤 것이 그
대의 자성인가?
驀然到得, 如放百二十斤擔子相似, 啐地便折, 嚗地便斷時, 那
个是你自性?
209) 화두를 가리킨다. 화두는 의단을 가지고 항상 짊어지듯이 의식에서 놓치지 말
     아야 하는 것이므로 무거운 짐에 비유한다. 반면 화두를 타파한 경지는 ‘백이십
     근의 짐을 내려놓았다’라고 표현한다. “진영(眞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옛
     날 수행할 적에 이 노화상께서 120근의 짐을 내 몸에 던져주셨던 인연으로 지
     금은 천하가 태평하게 된 것이다.’”(『楊岐語錄』大47 p.642b7. 指眞云, “我昔
     日行脚時, 被者老和尙, 將一百二十斤擔子, 放在我身上, 如今且得天下太平.”);
     “그 학인에게는 역량이 있었기에 조주가 120근의 짐을 보내어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던 것이다. 학인은 그 짐을 짊어지고 한숨에 120리의 먼 길을 내달렸고, 더 
     이상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지 않았다.”(『大慧語錄』권16 大47 p.879a13. 這
     僧有力量, 趙州將一百二十斤檐子, 一送送在他肩上. 這僧荷得, 一氣走一百二十
     里, 更不 回頭.)

8. 자성을 깨달았다면 반드시 자성의 본래 작용과 인연을 따르는 응용을
알아야 한다. 본래 작용과 응용이란 무엇인가?
旣悟自性, 須知自性本用, 隨綠應用. 作麽生是本用應用?

9. 자성과 작용(본래 작용과 응용)을 알았다면 반드시 생사를 벗어나야 한
다. 눈빛이 땅에 떨어지며 임종하는 순간에 어떻게 생사를 벗어나는가?
旣知性用, 要脫生死. 眼光落地時, 作麽生脫?

10. 생사를 벗어났다면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을 반드시 알아야 하니 사대
가 각기 흩어지면 어디로 가는가?
旣脫生死, 須知去處, 四大各分, 向甚處去?

● 왕사로 봉숭되는 날의 보설. 신해년210) 8월 26일
   王師封崇日普說 辛亥八月二十六日
210) 1371년. 공민왕 20년.

나옹선사가 법좌에 올라앉아 불자를 들고 잠깐 침묵하고 있다가 말했다.
“그대들은 산승의 깊디깊은 뜻을 아는가? 다만 이렇게 있다가 (법문을 듣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다고 해도 벌써 쓸데없는 일을 벌인 것인데, 다시 산승
이 두 입술을 벌려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를 기다린다면211) 흰 구름 너머 만
리의 거리로 떨어질 것이니 근본에서 아득히 멀어질 것이다.212) 그래서 ‘언
설은 사물의 실정을 나타낼 수 없고, 구절은 심기에 절절히 들어맞히지 못
한다. 말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는 자는 본래의 뜻을 잃고, 구절에 의존하
는 자는 도리어 그 구절에 미혹된다.’213)라고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헤
아리면 곧바로 멀어지고, 생각을 움직이면 곧바로 어긋나며, 헤아리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면 물에 잠긴 돌과 같이 된다.214)
師陞座, 拈拂子, 良久云,“ 汝等諸人, 還會山僧深深意旨麽?
只恁麽散去, 已是多事在. 更待山僧, 開兩片皮, 說黃道黑, 白
雲萬里. 所以云, ‘言無展事, 句不投機. 承言者喪, 滯句者迷.’
擬心卽差, 動念卽乖, 不擬不動, 水沉石頭.
211)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언설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만일 조사의 근본적인 법
     령에 따른다면 조사도 부처도 자취를 감추어 세상이 암흑으로 변할 것이니 어
     찌 그대들이 이 안에 발붙이고 산승의 두 입술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일이 허
     용되겠는가!”(『楊岐語錄』大47 p.641b1. 若據祖宗令下, 祖佛潛蹤, 天下黯黑. 
     豈容諸人, 在者裏立地, 更待山僧開兩片皮!)
212) 이어지는 다음 구절부터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밝고 미묘해질 것이다’라는 구
     절까지는『天如惟則語錄』권1 卍122 p.807a18~b8을 인용한 것이다.
213)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가 제시한 4구이다.『洞山守初語錄』古尊宿語錄38
     卍118 p.648b8 참조.
214) 모든 통로를 봉쇄하여 어떤 수단도 통하지 못하도록 설정하는 선법이다.『天如
     惟則語錄』에는 “선 채로 죽은 사람과 같다(立地死漢)”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조사의 문하에서는 갑자기 길에서 마주치면 누구든 몸을
돌리며 운신할 여지가 없고, 법령에 따라 남김없이 시행하면215) 입을 열고
말할 거리가 전혀 없으며, 한 발 내딛으려 하면 은산철벽이고, 눈을 깜박이
며 생각하는 순간 전광석화와 같이 잠깐 사이에 사라진다. 삼세의 모든 부
처님이 나타나더라도 아득히 솟은 벼랑만 바라보다가 물러날 뿐이고, 역대
의 조사가 나타나도 또한 굴복하고 몸을 숨길 뿐이다.
故我祖師門下, 驀路相逢, 無你轉身處;擧216)令而行, 無你開
口處;跨一步去, 鐵壁銀山;眨得眼來, 電光石火. 三世諸佛
出現, 也只是望崖而退;歷代祖師出頭, 也只是屈伏藏身.
215) 방편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216)『天如惟則語錄』을 비롯한 여타의 어록에는 ‘擧’가 ‘據’로 되어 있다.

만약 생철로 만들어진 사람217)이라면, 무심코 몸을 던져218) 허공을 휘돌
아 남산의 살무사219)를 희롱하고, 동해의 잉어220)와 섬부의 철우221)를 삼키
며, 가주의 대불상222)을 넘어뜨릴 수있을 것이니, 삼계도 그를 묶어둘 수
없고 어떤 성인도 그를 가두어 놓지 못한다. 종전의 갖가지 차별된 현상을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 통달하게 되어 하나하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하
나하나가 빠짐없이 밝고 미묘해질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 있
는가? 만약 진실로 이렇게 된다면, 임금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한꺼번
에 갚으리라.” 주장자를 잡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주장자가 전하는 해
설을 들어보라.”라고 말한 뒤 곧바로 주장자를 던졌다.
若是生鐵鑄就底漢, 等閑一擲, 抹過太虛, 直得南山鱉鼻, 呑却
東海鯉魚陜府鐵牛, 撞倒嘉州大像, 三界拘繫不得, 千聖羅籠
不住. 從前萬別千差, 當下七通八達, 一一圓成, 一一明妙. 還
有這般底麽? 若果如此, 王恩佛恩, 一時報足.” 拈拄杖云, “其
或未然, 且聽杖子下个註脚!” 便擲下.
217) 용광로 불에 녹아 어떤 물건이 된 적이 없는 생철과 같은 사람. 어떤 것에도 지
     배되거나 물들지 않은 본래면목 그대로를 체득하고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218) 일척(一擲). 주석235) 참조.
219) 남산별비(南山鱉鼻). 설봉의존(雪峯義存)이 제기한 화두. 설봉산(雪峯山)의 남쪽
    에 서식한다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이다. 이 뱀을 맨손으로 희롱하는 솜씨를
     종사의 자유자재하고 활발한 수단에 비유한다. 반면에 언어와 관념의 소굴에서
     분별하는 것은 죽은 뱀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는 것에 비유한다.『碧巖錄』22칙
     大8 p.162c2 참조.
220) 동해리어(東海鯉魚). 眞覺語錄 주석319) 참조.
221) 섬부철우(陝府鐵牛). 섬부는 중국 하남성 지방이며 철우(鐵牛)는 황하의 범람을
     막기 위해 우왕(禹王)이 만들었다는 전설상의 소이다. 가주대상(嘉州大像)과 함
     께 거대한 것을 빗대는 말로 쓰인다.
222) 가주대상(嘉州大像). 중국 사천성의 낙산대불(樂山大佛)을 말한다. 당나라 현종
     (玄宗) 때 해통(海通)이 세우기 시작하여 90년 만에 조성을 완료한 미륵불상으로
     서 지금까지 현존하는 최대의 불상이다. 가주(嘉州)는 낙산(樂山)의 옛 이름이다.

● 일주수좌223)에게 주는 법어 示一珠首座
223) 首座. 대중 가운데 첫 번째 지위. 수중(首衆)·상좌(上座)·제일좌(第一座) 등이
     라고도 한다.

결정코 이 일대사를 깨닫고자 한다면, 이룰 수 있다는 큰 믿음[大信心]을
일으키고 견고한 뜻을 세워 지금까지 배웠거나 이해하고 있는 부처에 대
한 견해와 법에 대한 견해는 한꺼번에 쓸어내어 바다 속에 버리고 다시는
들먹이지 말며, 팔만사천의 미세한 번뇌망상 한꺼번에 눌러 앉아 꼼짝 못
하게 해야 한다.224) 다만 하루 모든 시각의 사위의 안에서 ‘학인이 조주에
게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라고 한 공안을 들
어야 한다. ‘없다’라고 한 마지막 한 구절을 있는 힘을 다해서 들고 항상 끊
임없이 붙들고 의심하며 언제나 쥐어짜듯 궁구하다 보면, 고요한 순간이
나 움직이는 순간이나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며, 깨어 있거나 잠
을 자거나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225) 문득 이
런 경계에 도달하면, 다만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이다.226) 만일 화두
를 들어도 가라앉고 심심하여 아무 맛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여지도 없고
힘을 붙일 곳도 없으며 분명한 구석도 없어서, 어떻게 할 도리가 전혀 없을
지라도 결코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 이 경계가 바로 그 사람이 힘을 붙
일 곳이고 힘을 더는 곳이며, 힘을 얻는 곳이고 몸과 목숨을 모두 놓아버릴
곳이다.
決欲了此段大事, 須發大信心, 立堅固志. 將從前所學所解佛
見法見, 一掃掃向大洋海裏去, 更莫擧着, 把八萬四千微細念
頭, 一坐坐斷. 但向二六時中, 四威儀內, 提起,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末後一句, 盡力提起, 提
來提去, 拶來拶去, 靜中動中, 不擧自擧;寤寐二邊, 不疑自疑.
驀到這裏, 只待時刻. 其或擧冷冷淡淡, 全無滋味, 無揷觜處,
無着力處, 無分曉處, 無奈何處, 切莫退之. 正是當人, 着力處,
省力處, 得力處, 放身失命之處也.
224)『關策進』에 나오는 앙산고매우(仰山古梅友)의 시중과 유사하다(『禪關策進』
    「仰山古梅友禪師示衆」大48 p.1103a23). 본 어록「示衆」에도 인용되어 있다.
25)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깨달음이 올 조짐으로 본다. “반복하여 의심하다가 의심
     하에 힘이 덜 드는 상태에 이르면 곧 힘을 얻은 경지가 되어 의심하려 하지 않
     아도 저절로 의심하게 되고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게 된다.”(『高峰語
     錄』권상「示淨修侍子」卍122 p.675b9. 疑來疑去, 疑至省力處, 便是得力處, 
     不疑自疑, 不擧自擧.)
226) “이런 경계가 눈앞에 실현되면 고향집에 도달할 소식이니, 단단히 얽어매고 또
     한 꽉 집어서 다만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이다.”(『禪關策進』大48 p.1100c19.
     此境界現前, 卽是到家消息, 也巴得搆, 也撮得著, 只待時刻而已.) 『高峰原妙語錄』 
     권상「示淨修侍子」卍122 p.676a1에도 유사한 구절이 있다.

● 굉장주227)에게 주는 법어 示宏藏主
227) 藏主. 대장경을 봉안해 놓은 경각(經閣)과 장경(藏經)을 관리하는 스님.

이 추한 가죽자루228) 안에 하나의 그 무엇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떠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하고 있다. 항상 우리가 활동하는 반경 속에 있
지만 활동하고 있는 순간에는 거두어들일 수 없으니,229) 그것을 비로자나
불의 스승이요 법신불의 주인230)이라 부른다. 굉상인!231) 그대는 이해하는
가? 이해해도 삼십 방을 맞을 것이고 이해하지 못해도 삼십 방을 맞을 것
이니, 결국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나옹도 삼십 방을 맞아야 한다. 말해 보
라!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빨리 말해 보라! 빨리 말해 보라!232).
這醜皮帒子裏, 有一箇物, 上拄天, 下拄地. 常在人人動用中,
動用中收不得, 喚作毗盧師法身主. 宏上人! 你會麽? 會來也
喫三十棒, 不會來也喫三十棒, 畢竟如何? 懶翁也合喫三十棒.
且道! 過在甚麽處? 速道! 速道!
228) 피대자(皮帒子). 일반적으로 皮袋子·皮袋라고 쓴다. 사람의 육신을 비유하는
     말이다.
229) 동산양개(洞山良价)가 제시한 말로서 이 법어 전체의 소재가 된다. “동산양개가
     겨울에 태수좌와 과자를 먹으며 물었다. ‘하나의 그 무엇이 위로는 하늘을 떠받
     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하며, 옻칠과 같이 시커멓다. 그것은 항상 활동하는 작
     용 속에 있지만 활동하고 있는 순간에는 거두어들일 수 없다. 말해 보라! 잘못
     이 어디에 있는가?’ 태수좌가 답했다. ‘잘못은 활동하는 작용 속에 있습니다.’ 동
     산이 시자를 불러 과자 탁자를 치우라고 시켰다.”(『洞山語錄』大47 p.511a5. 
     冬節, 與泰首座, 喫果子次, 乃問, ‘有一物, 上拄天, 下拄地,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 且道! 過在甚麽處?’ 泰云, ‘過在動用中.’ 師喚待者, 掇退果卓.)
230) 비로사법신주(毘盧師法身主). 최상의 존재인 비로자나불 또는 법신불 위에 그를
     가르치고 부리는 스승과 주인이 있다고 설정하여 제시한 화두이다. “학인이 동
     산양개에게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불의 스승이며 법신의 주인입니까?’ ‘벼와
     조의 줄기니라.’”(『洞山語錄』 大47 p.510b23. 僧問, ‘如何是毘盧師法身主?’ 
     師曰, ‘禾莖粟幹.’);“‘법신의 주인이란 어떤 것입니까?’ ‘(아무도 그것을) 넘어 
     오지 못한다.’ ‘비로자나불의 스승이란 어떤 것입니까?’ ‘초월하지 못한다.’”
     (『景德傳燈錄』권16 「南際僧一傳」 大51 p.328c11. 問, ‘如何是法身主?’ 
     師曰, ‘不過來.’ 又問, ‘如何是毘盧師?’ 師曰, ‘不超越.’)
231) 上人.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
232) 알아도 몰라도 잘못이라고 하여 두 갈래의 길을 다 막고 그것의 타개책을 요구
     하는 전형적인 화두 설정 방법이다. 또한 과자를 치우라고 한 동산양개의 반응
     에 대한 나옹 식의 해석이 담겨 있다. 즉 과자를 치우라고 했다고 해서 태수자의
     대답이 잘못이라고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태수자가 어떤 대답을 했든 과자를
     치우라고 지시했을 것이라고 해설한 것이다.

● 각성선화233)에게 주는 법어 示覺成禪和
233) 禪和. 선화자(禪和子)라고도 한다. 선승에게 친밀감을 나타내는 호칭이며 선사
     가 학인을 부를 때 사용한다. 주석231) 참조.

진실로 이 일대사인연을 반드시 이루고자 한다면, 깨달을 수 있다는 믿
음을 굳게 세우고 견고한 의지를 일으킨 다음 하루 모든 시각의 사위의 안
에서 본래 참구하던 화두234)를 들어야 한다. 항상 끊임없이 들고 언제나 반
복하여 의심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
로 들리고, 의단을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하게 되는 경지에 도
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몸을 한 번 결정적으로 뒤집어 던질 일이며,235)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236)  만일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화두가
때로는 명백하다가 때로는 명백하지 못하고, 어떤 때는 나타났다가 다른
때는 나타나지 않으며, 혹은 있다가 혹은 없어지고, 어떤 때는 빈틈과 끊어
237)이 있다가 다른 때는 빈틈과 끊어짐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깨달을 수
있다는 신심이 똑바로 서지 않고, 의지가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
럼 세월을 헛되게 보내며 공연히 신도의 시주만 받아먹는다면, 훗날 언젠
가는 기필코 염라대왕이 밥값을 계산하여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다. 이
것을 두고 ‘헛되게 세상에 와서 한 바퀴 돌고 갈 뿐이다.’238)라고 말하는 것
이니, 어느 겨를에 다시 쓸데없는 말과 길거나 짧은 구절들을 구해다가 이
것저것 가리키며 실없이 떠들겠는가! 잘 생각하고 또 잘 생각해 보라!
眞實決定欲成此段大事因緣, 立決定信, 生堅固志, 於二六時
中, 四威儀內, 提起本參話頭. 提來提去, 疑來疑去, 不覺參到,
話頭不提自提, 疑團不疑自疑之地. 飜身一擲, 更無閑言長語.
其或未然, 話頭或時眀白, 或時不明白;或現, 或不現;或有,
或無;或間斷, 不間斷, 是爲信心不竪, 立志不固. 如此虛送日
月, 空受信施, 他時後日, 未免閻羅老子, 打筭飯錢. 是謂空來
世上打一遭耳. 何暇更求, 閑言長語, 長句短句, 東指西指者
也! 思之思之!
234) 본참화두(本參話頭). 주석177),「상국 이제현에게 보내는 답신」 2 참조.
235) 번신일척(翻身一擲). 속박된 몸을 뒤집어 자유로운 상태로 바꾼다는 뜻. 화두 공
     부를 하다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번신’이란 몸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괴롭거나 속박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
     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일척’은 도박을 할 때 결정적인 승부수를 던지는 것으
     로, 생사를 걸고 뛰어드는 모험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대혜종고는
     전신일척(轉身一擲)·등신일척(騰身一擲) 등으로 표현한다.『大慧語錄』권24 
     大47 p.912a3 등에 보인다. 고봉원묘(高峰原妙)도 화두 공부가 결정적인 전기
     를 맞이하는 순간을 이 말로 표현하였다. “‘하나는 어디로 귀착되는가?’라는 
     화두를 들고, 어디서나 부딪치고 두드리며 종횡으로 항상 몰아붙이고, 끊임없
     이 궁구하며 몰아붙이다가 더 이상 머물러 쉴 여지가 없게 되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더라도, 진실로 거듭 맹렬함과 날카로움을 덧붙여 
     몸을 한 번 결정적으로 뒤집는다면 흙덩어리까지 모두 성불하게 될 것이다.”
     (高禪要』「示衆」12 卍122 p.713a12. 便就一歸何處上, 東擊西敲, 橫逼竪
     逼, 逼來逼去, 逼到無棲泊, 不奈何處, 誠須重加猛利, 翻身一擲, 土塊泥團, 悉皆
     成佛.)
236) 애쓰지 않아도 화두가 잘 들릴 때 오로지 화두와 결정적인 승부를 낼 마음을 굳
     히고 계속 의심하면서 매진해야 하며, 그 상태를 분별하여 말로 설명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다.
237) 무간단無間斷)은 화두 공부의 요소 중 하나이다. 太古語錄 주석194)·196) 참조.
238)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말이다.『書狀』「答呂郞中」大47 p.930b8. 사대부가 
     유가경전과 제자백가를 외우고도 자기 본분의 일에 대해서는 정작 아는 것이 
     없음을 한탄하는 말로 썼다.

● 상국239) 목인길240)에게 주는 법어 示睦相國 仁吉
239) 相國. 관리의 우두머리에게 붙이는 호칭.
240) 睦仁吉(?~1380). 고려 말의 무신. 공민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시절 수행
     한 장수이다. 홍건적과 왜구를 무찌른 공적 등이 있다.

이 일의 성패는 재가나 출가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초심자나 오래 수
행한 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며, 과거 여러 생 동안의 훈습과 단련에 달
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홀연히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한결같이
진실하고 뚜렷한 그 믿음[信]이라는 한 글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241)
래서 부처님께서는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이니 일체의
선법(善法)을 길러낸다.’242)라고 하고, 또한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길러내
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하게 한다.’243)라고 하셨습니다. 공
께 청하건대, 댁에서 집안일을 지시할 때나, 관청에서 공적인 업무를 판단
할 때나, 손님을 영접하거나, 대화하거나 담소를 나누거나, 밥을 먹거나 차
를 마시거나, 걸어가거나 멈추어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결국 이
것은 무엇일까?’ 하고 의심하십시오. 다만 이렇게 참구해야 하니, 꾸준히
반복하여 참구하고 언제나 잘 간수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음이 터질
때 비로소 이 일대사가 본래 머리 깎고 가사를 입고244) 출가하여 고행하고
계를 지키며 포단이나 대나무 의자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
음을 알 것입니다.
此事不在在家出家, 亦不在初參後學, 又不在多生熏鍊. 忽得
開發, 只在當人一念眞實的的信字裏. 所以, 佛云, ‘信爲道
源245)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信能增長智功德, 信能必到
如來地’ 請公, 或在家中, 指揮雜事時, 或在上官, 判斷公事
時, 或迎接, 或語言或談笑, 或喫飯或喫茶, 或行住或坐臥, 畢
竟是箇甚麽. 但恁麽參, 參來參去, 看來看去, 不覺大笑時, 始
知此段大事, 本不在剃染出家, 苦行持戒, 蒲團竹倚裏.
241) 고봉원묘(高峰原妙)의 다음 말과 통한다. “대체로 참선에는 치소(緇素:僧俗)의
     구분이 없고, 다만 믿음[信]이라는 확고한 한 글자가 필요할 뿐이다. 만약 당장
     에 믿음이 생겨 확고하게 붙들고 자신의 주인으로 삼는다면, 오욕(五欲)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마치 쇠말뚝과 같을 것이다.”(『高峰禪要』 「示信翁居士」 卍
122 p.71a8. 大抵參禪, 不分緇素, 但只要一箇決定信字. 若能直下信得及, 把得定, 作
     得主, 不被五欲所撼, 如箇鐵橛子相似.)
242)『華嚴經』권14「賢首品」大10 p.72b18 참조.
243) 위의 책 권14「賢首品」大10 p.72b23 참조.
244) 삭염(剃染). 삭발염의(剃髮染衣)의 줄임말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는다는 뜻으
     로 출가를 나타낸다. 염의는 청·황·적·백·흑 등의 정색(正色)을 피해 중간색
     (中間色)으로 물들인 가사로 이것을 괴색납의(壞色衲衣)라 한다.
245)『華嚴經』원문에는 ‘元’으로 되어 있으나, 원나라의 국명을 諱하여 ‘源’으로 적
     었다.

● 득통거사에게 주는 법어 示得通居士

당신은 이 일을 참구하고자 하십니까? 이 일은 승·속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남·녀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며, 초심자나 오래 수행한 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과거세 여러 생(生) 동안 쌓은 오랜 훈습에 달려 있
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의 한결같이 진실하고 확고한 믿음[信]이라
는 한 글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이미 이와 같은 믿음이 확고해졌
다면, 하루 모든 시각의 사위의 안에서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조주가 「없다.」라고 대답한’ 공안의 마지막 한 구
절[無字]을 있는 힘을 다해 들어야 합니다. 항상 끊임없이 들고 고요한 곳
에서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공안이 눈앞에 실현되면,246) 깨어 있거나 잠들
어 있거나 화두가 뚜렷하여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의단을 의
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급히 흐르
는 여울물 속의 달을 쳐도 흩어지지 않고 쓸어내도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
습니다. 진실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않아
도 홀연히 한 번 온몸에 땀이 흐르면서247) 말없이 스스로 알아차리고 머리
를 끄덕일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리고, 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你若欲究這般事? 不在僧之與俗, 不在男之與女, 不在初參後
學, 亦不是多生舊習. 只在當人一念眞實決定信字裏. 你旣如
此信得及, 但於二六時中, 四威儀內, 提起‘ 僧問趙州,「 狗子
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末後一句, 盡力提起. 提來提去,
靜中鬧中, 公案現前, 或寤或寐, 話頭明明, 不提自提;疑團,
不疑自疑. 正如急水灘頭月, 觸不散, 蕩不失. 眞實到此田地,
不待年月, 驀得一廻通身汗流, 則默默自點頭矣. 至囑, 至囑.
246) 공안현전(公案現前). 주석181) 참조.
247) 통신한류(通身汗流). 깨달음과 같은 하나의 전기를 맞이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묘사한다. “오늘 그대의 질문 하나를 받고 곧바로 온몸에 땀이 흐르는 지경이
     되었다.”(『洞山語錄』大47 p.513b3. 今日被子一問, 直得通身汗流.);“노공
     (혜능)이 말했다. ‘선이라고도 생각하지 말고 악이라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도명이 이 말을 듣고 크
     게 깨닫고는 온몸에 땀이 흘렀다.”(『大慧語錄』권25 大47 p.920a29. 盧公曰, 
     ‘不思善. 不思惡. 正當恁麽時, 那箇是上座本來面目?’ 明當時大悟, 通身汗流.)

● 상국 이제현248)에게 보내는 답신 1 答李相國 齊賢
248) 李齊賢(1287~1367).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
     려 말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문하에서 정주
     학을 배웠다.

보내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상국과 막 이별하려고 할 때 병이 쾌차하
셨는지를 직접 여쭈었으나 병세가 가볍지 않다고 하셨기에 산승은 구업을
아끼지 않고 집안의 추한 꼴249)을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일250)은출가나
재가에 달려 있지 않고, 늙은이나 젊은이에 달려 있지 않으며, 초심자나 오
래 수행한 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수행하는 그 당사자의 진실
하고 확고한 신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
사는 모두 확고한 신심으로 도과(道果)251)를 이루셨으니, 이 신심에 의지
하지 않고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
처님께서는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이니 일체의 선법(善
法)을 길러낸다.’252)라 하고, 또한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길러내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하게 한다.’253)라고 하셨습니다.
承諭, 相國臨別, 面稟病之言, 不輕故, 山僧不惜口業, 揚於
家醜. 此事不在僧俗, 不在老少, 不在初參後學. 只在當人眞實
決定信心耳. 三世諸佛, 歷代祖師, 皆以決定信心, 而成道果,
若不依此, 而成正覺者, 無有是處. 是以, 佛言,‘ 信爲道源功
德母, 長養一切諸善法.’ 又云,‘ 信能增長智功德, 信能必到如
來地.’
249) 가추(家醜). 眞覺語錄 주석324) 참조.
250)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또는 본분사(本分事)를 말한다.
251) 불법을 수행하여 얻는 과보.
252)『華嚴經』권14「賢首品」大10 p.72b18 참조.
253) 위의 책 권14「賢首品」大10 p.72b23 참조.

상국께서는 소년 시절에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 나라의 정승
이 되시었고 문장가 중에도 최고이시니 국가의 보배입니다. 그런데 또 이
법문254) 관심을 두시니 고금의 현인들과 비교해도 백천만 배나 더 뛰어
나십니다. 비록 이 법문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현생에 뚫지 못하면, 아마
도 도력(道力)이 업력(業力)을 뛰어넘지 못하여,255) 죽은 다음에는 가는 곳
마다 윤회의 굴레에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진실로 꿰뚫
지 못하셨다면 엎드려 바라옵건대, 크고 확고한 의지를 일으키시어 하루
모든 시각 중에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말을 하거나 담소를 나누거나 그
모든 곳에서 본래면목을 참구하십시오. 누군가 말하기를 ‘현생에 태어나서
이 형체가 이루어진 것이 바로 부모가 낳아주신 면목인데, 어떤 것이 부모
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256)인가?’라고 하였으니 다만 이와 같이
참구하십시오. 항상 끊임없이 참구하다 보면, 마음으로 생각하는 길이 끊
어지고 의식도 움직이지 않아 아무런 맛도 없고 모색할 길도 없어 배 속이
갑갑한 순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공(空)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
려워 마십시오257) .오히려 이곳이 바로 상국께서 힘을 얻은 경계이자 힘이
덜 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리고, 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相國年少時, 高登科第, 作一國政承, 作一國文中之王, 爲國重
寶. 又能留心此法門中, 若比古今賢人, 勝於他百千萬倍. 雖能
留心此箇法門中, 今生打未徹, 恐道力不能勝業力, 百年之後,
處處不得自在. 若果未徹, 則伏請起大決定之志, 二六時中, 着
衣喫飯, 語言談笑, 於一切處, 參个本來面目. 或云, ‘今生出來,
作此形體, 是父母所生面目, 那箇是父母未生前本來面目?’ 但
只如此參. 參來參去, 參到心思路絶, 意識不行, 沒滋味沒摸索,
肚裏悶時, 莫怕落空, 正是相國得力處, 省力處, 正是相國安身
立命處也. 至囑, 至囑.
254) 法門. 여기서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말한다. 법문은 일반적으로 불법(佛法)으
     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여 모든 판단과 행위의 기준이 되
     는 것을 ‘법’이라 하고, 이 법에 의지하여 도를 깨닫고 언어와 행위 등으로 그것
     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을 ‘문’이라 한다. 중생의 근기가 다양하므로 그 법도 그
     것에 상응하여 차별이 있다. 팔만사천법문이라는 말도 이처럼 천차만별의 중생
     들이 가진 무수한 번뇌에 응하는 법을 말한다.
255)『書狀』「答李參政」大47 p.920a10에 같은 말이 나온다. 이근(利根)의 수행
     자라도 수행을 쉽게만 하려 하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퇴전(退轉)할 것이
     라고 경계하는 맥락 속에서 이 말이 나온다.
256)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언어로 나타내거나 사유로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조짐도 없는 자기 본분의 경계를 말한다. “다만 번잡한 생각에 얽
     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6조가 도명상좌에게 「선(善)이라고도 생각하지 말고 악
     (惡)이라고도 생각하지 마시오. 바로 이때에 무엇이 도명상좌가 부모로부터 태
     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입니까?」’라고 한 화두를 살펴보십시오. 다만 이와 같이
     항상 끊임없이 간수하여 말로 표현할 방도가 막히고 이치도 효력을 다하여 어
     떻도 할 도리가 없는 경계에서 갑자기 뚫리게 되면, 일생 동안 공부할 일을 마
     치게 됩니다.”(『密菴語錄』「示道禪人」大47 p.979a28. 只就無繫念處, 看箇話
     頭, ‘六祖示明上座道, 「不思善不思惡. 正恁麽時, 如何是明上座, 父母未生前本來
     面目?」’ 但如此看來看去, 到詞窮理盡, 沒奈何處, 驀然看透, 便是一生參學事畢.) 
     眞覺語錄 주석47) 참조.
257) 파낙공(莫怕落空).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라는 말은 의지할 대상이 완전
     히 사라지고 화두만 남아 있으므로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이 허무하게 사
     라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太古語錄「示衆」본문과 같은 곳 주석
     165)의 인용문『書狀』참조.

● 상국 이제현에게 보내는 답신 2 又

일전에 대유령 매화258)를 올리면서 신물(信物)259)을 전했는데, 회신을 읽
어보니 이미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계셨더군요. 산승은 상국께서 이미 그
렇게 무자 화두를 들고 계신 줄을 미처 몰랐기 때문에 직접 소식을 전한 것
입니다.260) 그런데 지금 상국께서 다시 다른 화두를 받겠다고 하시는 말씀
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도리어 쓸모없는 말을 반복하는 꼴이 되
고 마니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옛사람들은 한 마디나 반 구절의 화두를
전해 주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서 발을 떼지 말고261) 바꾸지 말도
록 했습니다. 항상 일상생활하는 매 순간에 비록 천차만별의 일이 있더라
도 생각을 화두에 놓고 다른 것을 따라 변하지 않는다면, 어찌 화두를 바꾸
어 참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前進嶺梅, 分付信物, 及廻言內, 曾於無字話提撕. 山僧未審相
國曾參無字話故, 親傳消息. 今聞相國更求之言, 如此做, 又却
忉怛, 幸望留心, 古人留下一言半句, 令諸人立定脚頭, 不爲移
易. 常於日用間, 雖有千差萬別之事, 志在上面, 不隨他變, 則
何必改參也?
258) 영매(領梅). 대유령은 중국의 남과 북을 가르는 분기점으로 남북의 기후 차이
     때문에 매화의 남쪽 가지가 떨어지는 시기에 북쪽 가지에서 비로소 꽃을 피우
     는 것으로 옛날부터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이 대유령에서 6조 혜능이 도명상좌
     에게 ‘본래면목’ 화두를 제시했기 때문에 ‘대유령 매화를 올렸다’라는 말은 나옹
     선사가 이전의 편지에서 이제현에게 ‘본래면목’ 화두를 제시한 것을 비유적으
     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259) 선물과 같으며, 편지와 함께 신물을 보내는 것은 당시에 일반적인 일이었다. 또
     는 신표(信標)와 같은 말로서, 훗날에 신의를 확인하기 위한 징표로 주고받거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물건이다. “소반 위의 보자기에 법의와 신물
     을 올려놓는다.”(『百丈淸規』권2 大48 p.1122b8. 以柈袱, 托呈法衣信物.);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 작별인사를 올리자 운문이 법상에서 내려와 학인의 손을 
     잡으며 ‘몇 전이나 가지고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자 ‘그대가 나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이에 그 학인이 같은 질문을 함에 운문이 ‘반 푼의 가치도 
     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도 학인의 응답이 없자 그를 대신하여 ‘어떤 
     신물을 떠나는 마당에 가지고 오셨습니까?’라 하고, 또한 ‘그만 떠납니다.’라고 
     했다.”(『雲門廣錄』권하 大47 p.568a28. 因僧辭師, 師下座把僧手云, ‘著幾錢?’ 
     無對. 師云, ‘爾問我.’ 僧便問. 師云, ‘都不直半分錢.’ 代云, ‘有什麽信物, 送路將
     來?’ 又云, ‘臨行.’)
260) 앞의 답신에 나오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를 말한다.
261) 입정각두(立定脚頭). 다리를 고정시킨 채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말. “아직 깨
     달음의 경지가 열리지 않았다고 해서 결코 별도의 방편을 구해서는 안 된다. 다
     만 마음에 다른 대상을 두지 말고 의식에서 모든 망상을 끊고 힘써 궁구하고 버
     리지 마라. 오로지 참구하던 화두에 고정시켜 옮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禪關
     策進』「天目中峯本禪師示衆」大48 p.1102a7. 未卽開悟, 不須別求方便. 但心
     不異緣, 意絶諸妄, 孜孜不捨. 只向所參話上, 立定脚頭.)

더구나 다른 화두를 들 때조차도 이전에 참구하던 무자 화두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니, 이는 틀림없이 무자 화두가 조금이나마 성숙했다는 증거
입니다. 결코 이 화두에서 떠나지 마시고 결코 화두를 바꾸어 참구하지 마
십시오. 다만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사위의 안에서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
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無].」’라고 한 화두의 마지
막 글자인 무자를 있는 힘을 다해 드십시오.
況擧起別話頭時, 曾參無字不離, 則必然無字上, 有小熟也. 切
莫移動, 切莫改參. 但於二六時中, 四威儀內, 擧起,‘ 僧問趙
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末後一箇無字, 盡力
提起.

결코 ‘언제쯤 깨달을까’ 하고 기다리지 말고262)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
닐까’ 하고 염려하지도 말며, 또한 맛이 있거나 맛이 없거나 상관하지 말
고, 또한 힘을 얻었거나 아직 힘을 얻지 못했거나 상관하지 마십시오. 다만
한결같이 무자 화두만 든다면, 어느 틈엔가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
절로 들리며 의정을 일으켜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는
상태와 맞닥뜨릴 것입니다. 생각으로 헤아려도 미치지 못하고 의식도 작용
하지 않아 아무 맛이 없는 것이 마치 모기가 무쇠소 위에 올라앉은 것과 같
아도 공(空)에 떨어질까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263) 이곳이 예로부터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몸을 던지고 목숨을 놓아버린 경계이니 또한 상국께서
화두 공부하기에 힘을 얻은 경계인 동시에 힘이 덜 드는 경계이며,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조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홀연히 몸을 한 번 결정적으
로 뒤집어 던지면,264) 비로소 ‘하나는 조작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쉬지 않는 것’265)이라는 도리를 알 것입니다.
切莫待幾時悟不悟, 莫管有滋味無滋味, 亦莫管得力不得力.
只單單提箇無字, 驀然拶到, 話頭不擧自擧, 疑情不疑自疑.
心思不及, 意識不行, 百無滋味, 如蚊子上鐵牛時, 莫怕落空.
此從上, 諸佛諸位祖師, 放身捨命處, 亦是老相國得力處,
省力處, 成佛作祖之處也. 於此忽得翻身一擲, 始知道, 一不
造二不休.
262) 화두 공부를 할 때 생기는 십종병(十種病) 중 하나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가
    『大慧語錄』 권19 大47 p.891b29에서 “미혹을 잡고 깨달음을 기다린다.”(執迷
     待悟)라고 한 말이나 지눌이『修心訣』大48 p.1006c28에서 “미혹된 상태에서 
     깨닫기를 기다린다.”(將迷待悟)고 한 말도 이 병통을 나타낸다. 지눌은 이것을 
     10종 병 중 근본적인 병통으로 들었다(『看話決疑論』韓4 p.732c13. 所言十
     種病, 以求證悟之心爲本.). “이것은 대체로 깨달음을 희구하는 마음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장애의 어려움을 만든 것이며, 별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書狀』「答曾侍郞狀」大47 p.917c8. 此蓋以求悟證之心, 在前頓放, 自作
     障難, 非干別事.)
263) 모기가 무쇠소에 올라타 부리를 꽂고 피를 빨려고 하지만, 부리가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과 같다는 비유이다. 어떤 화두에 대하여 분별이 가
     능한 대상으로 착각한 끝에 여러 가지 인식 수단으로 접근해 보지만 결국에는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경계에 부딪히고 마는 현상을 나타낸다. 동시에 화두
     참구를 통해 그러한 분별이 모두 떨어져 나가 더 이상 분별이 붙어 있을 자리가
     없게 된 상태를 비유한다.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경계이며 화두가 타파
     되기 가장 적절한 상황이므로 여기서 다른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한다. “약
     산이 이 말을 듣고 깨닫자 마조가 ‘그대는 어떤 도리를 알았는가?’라 물었고, 약
     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석두 문하에 있을 때 마치 모기
     가 무쇠소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좋은 상태였습니다.’”(『圜悟語錄』권13 
     大47 p.772a25. 藥山, 於是有省. 馬云, ‘爾見什麽道理?’ 山云, ‘我在石頭時, 如
     蚊子上鐵牛相似.’);“다만 마음을 쓸 여지가 전혀 없게 되고,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없는 공(空)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 없습니
     다. 그 경계가 오히려 깨닫기에 좋은 기회입니다. 그것은 홀연히 쥐가 소뿔로 만
     든 쥐틀 안으로 들어가 거꾸로 뒤집어져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서지도 못
     하는 지경과 같습니다.”(『書狀』「答張舍人狀」大47 p.941b16. 直得無所用心, 
     心無所之時, 莫怕落空. 這裏, 却是好處. 驀然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264) 번신일척(翻身一擲). 주석235) 참조.
265)『大智度論』권19 大25 p.205c13에 “조작하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다”(不造不休)
     라는 용례가 있다. 이것은 ‘삿된 업(業)을 조작하지 않고 선한 업을 행하는 것
     은 쉬지 않는다’라는 뜻인데, 그 활용법은 본 어록도 같다. 곧 무자 화두를 빈틈
     과 끊어짐도 없이 들면서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경계에까지 이르는 정
     진력이 ‘쉬지 않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희구하지 않고 맛을 느끼려고
     하지도 않으며, 힘을 얻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분별하지도 않는 것 등이 ‘조작하
     지 않는 것’에 해당된다.

한 방의 주먹으로 황학루를 쓰러뜨리고
한 번의 발길질로 앵무주를 뒤집는다.
기세가 등등한 때에 기세를 더하고
멋이 없는 곳에서도 멋을 부리노라.266)
一拳拳倒黃鶴樓
一蹋蹋翻鸚鵡洲
有意氣時添意氣
不風流處也風流
266) 제1구와 제2구는 당나라 최호(崔顥 704~754)의「黃鶴樓」에서 모티브를 얻은 구
     절이며, 게송 전체는 백운수단(白雲守端)의 게송이다. “옛사람이 이미 황학을 타
     고 떠났으니, 이곳은 텅 비고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
     오지 않을 테니, 흰 구름만 영원토록 허공을 떠돌겠구나. 맑게 갠 시냇가에 한양
     의 나무들은 뚜렷이 드러나고, 향기로운 풀은 앵무주에 무성하다. 날은 저무는
     데 고향은 어드메인고? 물안개가 강물에 번져 나의 시름 더하네.”(昔人已乘黃鶴
     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
     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白雲守端語錄』 권하 卍120 p.389b17.

● 지신사267) 염흥방268)에게 주는 법어 示知申事廉興邦
267) 知申事. 고려시대에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등을 관장한
     관청인 밀직사(密直司)에서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
268) 廉興邦(?~1388). 고려 말기의 권신. 1362년(공민왕11)에 지신사로 재임 시 홍건
     적을 대파하여 제학(提學)에 오르는 등 수차례의 무훈을 거두었다. 학문에도 뛰
     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지공거의 보좌관)가 되었다. 훗날 매관매직·토
     지 및 노비 강탈 등의 전횡을 일삼다가 최영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나옹선사가
     염흥방을 만난 것은 1370년(공민왕20) 광명사에서 있었던 공부선(功夫選) 전후
     의 시기이다. 각굉(覺宏)의「懶翁禪師行狀」에 따르면, 공부선 직후에 공민왕은
     염흥방을 시켜 나옹선사를 방문하게 했다고 한다.

만약 진실로 본분사를 밝히고 싶다면, 출가[僧]와 재가[俗] 그리고 남자
와 여자를 구별하지 말고, 또한 상·중·하의 근기로도 구별하지 말며, 초참
자와 수행이 무르익은 자로도 구별하여 따지지 마십시오. 다만 수행하는
당사자가 깨달을 수 있다는 결정적 믿음을 세우고 확고한 의지를 일으켜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이니 일체의
선법(善法)을 길러낸다.’269)고 하셨으며 또한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길러
내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하게 한다.’270)고 말씀하시지 않았
습니까? 공께서는 스무 살 무렵에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셨으며, 당
신을 알아주는 현재의 임금님께서 발탁하여 사무가 번거롭고 바쁜 가운데
도 이 법문271)에 대해 확신하며 의심 없이 마음을 닦는 방편을 구하셨습니
다. 이런 점에서 어찌 세간과 출세간을 통틀어 최고의 역량을 가진 분이 아
니라고 하겠습니까?
若欲眞實究明此段大事, 不問僧之與俗, 男之與女, 亦不問上
中下根, 亦不問初參舊學. 只在當人立決定信, 生堅固志. 佛不
云乎,‘ 信爲道源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又云,‘ 信能增長
智功德, 信能必到如來地.’ 公妙年登高第, 遇知今上, 事務煩
劇之時, 又向此箇門中, 的信無疑, 要求脩心方便. 這箇, 豈非
世出世閒, 第一等有大力量底人也?
269)『華嚴經』권14「賢首品」大10 p.72b18 참조.
270) 위의 책 권14「賢首品」大10 p.72b23 참조.
271) 法門. 여기서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말한다. 주석254) 참조.

그러나 마음을 닦는 요체는 따로 구하지 마십시오. 제가 광명사272)에 있
을 때 일찍이 공에게 제시한 ‘이것은 무엇인가?’273)라는 화두를 항상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어떤 장소 어떤 순간에도 절대 놓아버리지 마십시오. 항상
끊임없이 제기하고 참구하여 잠시 잠깐의 빈틈도 끊어짐도 없어야 합니
다.274) 걸어가면서도 다만 ‘이것은 무엇인가?’일 뿐이고, 머무르면서도 ‘이
것은 무엇인가?’일 뿐이며, 앉아 있으면서도 ‘이것은 무엇인가?’일 뿐이고,
누워 있으면서도 다만 ‘이것은 무엇인가?’일 뿐이니, 옷을 입거나 밥을 먹
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손님을 맞이하고 상대하거나, 공적인 업무를 판단하
거나, 임금 앞에 나아가고 물러나거나, 붓을 쥐고 글을 쓰거나, 이 모든 행위
반경에서 궁극적으로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참구하십시오. 다만 이와 같
이 들고 이와 같이 참구하기만 하십시오. 항상 끊임없이 참구하고 빈틈없이
반복하여 들다보면, 불현듯 이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하게 되는 경계에 도달할 것이니, 밥을
먹고 있어도 밥인 줄 모르고, 차를 마시고 있어도 차인 줄 모르며, 또한 허망
하고 덧없는 자신의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게 됩니다. 몸과 마음
이 하나가 되며, 잠을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하나가 된 경계275)에서 몸을
한 번 결정적으로 뒤집어 던지십시오.276) 이러한 마음 상태에 도달하게 되
면, 관직을 버리지도 않고, 속인의 모습을 바꾸지도 않으며, 화택277)에서 벗
어나지 않고서도 인도의 28대 조사와 중국의 6대 조사와 최고의 선지식들
이 전하려 했으나 전하지 못하고 말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한 본분사를 비로
소 알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리고, 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然而脩心之要, 更莫別求. 吾在廣明時, 曾爲公說底,‘ 是箇什
麽’ 話頭, 常於二六時中, 一切處一切時, 切莫放捨. 提來提
去, 參來參去, 不得有小閒斷. 行也只是, ‘是箇什麽’;住也只
, ‘是箇什麽’;坐也只是, ‘是箇甚麽’;臥也只是, ‘是箇什
麽’ 着衣喫飯, 屙屎放尿, 迎賓對客, 乃至判斷公事時, 上前進
退時, 把筆作書時, 畢竟,‘ 是箇什麽?’ 但伊麽提, 但恁麽參.
參來參去, 提來提去, 驀然到得話頭, 不提自提, 不疑自疑, 喫
飯不知飯, 喫茶不知茶, 亦不知幻身在人閒. 身心如一, 寤寐一
般處, 翻身一擲. 到得這箇田地, 始知不改官職, 不改俗形, 不
離火宅, 西天四七, 東土二三, 天下善知識, 傳不到說不及底本
有之事也. 至囑, 至囑!
272) 廣明寺. 개성에 있는 절. 고려 태조가 대대로 살아오던 집을 기증받아 창건한 절
     이다. 고려시대에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1370년(공민왕20)에는 나
     옹이 주맹(主盟)이 되어 공부선(功夫選)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273) 시개시마(是箇什麽). 시심마(是甚麽)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이 뭐꼬?’
     로 알려져 있는 화두이다. 본 어록과 같이 이것을 ‘화두’라는 말로 분명하게 묘
     사하거나 이것을 참구할 화두로 내려 주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선
     문헌에서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쓰였고, 간화선의 방법이 적용되
     면 본 어록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이 화두로서의 효용을 발휘하기에 조금도 모
     자람이 없다.
274) 이하는 모든 것을 ‘시개시마(是箇什麽)’ 화두 하나로 통일시키는 화두 참구의 전
     형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하나의 화두에 다른 모든 것을 수렴시키
     는 방식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한다.
275) 古語錄 주석196) 참조.
276) 주석235) 참조.
277) 火宅. 불난 집. 번뇌로 가득 찬 세계를 불난 집에 비유한 것이다.『法華經』권2 
     大9 p.12b21에 나오는 비유로 화택유(火宅喩)라 한다. “삼계의 뜨거운 번뇌는 
     마치 불난 집과 같다.”(『修心訣』大48 p.1005c21. 三界熱惱, 猶如火宅.)

● 지공화상의 기골불사278)에서 指空和尙起骨

“한 점의 텅 비고 밝은 것279)이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다. 한 번 몸을 던
져 뒤집었으니280)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281)” 주장자로 침전(寢殿)을 한 번
내리치며, 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말했다. “일으켜라!”
“一點虛明, 了無所礙. 一擲翻身, 多少自在.” 以棒打托一下,
喝一喝云,“ 起!”
279) 삶과 죽음 그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본래면목을 묘사하는 말이다. 입적한 사
     람의 본래면목을 죽은 육신과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한다.
280) 주석235) 참조.
281) 텅 비고 밝은 한 점이 육신을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몸을 뒤집는 결정적인 전
     기를 나타낸 것이다.

● 입탑282) 入塔
282) 入塔. 영골을 탑 안에 넣는 것. 주석278) 참조.

나옹선사가 지공화상의 영골(靈骨)을 들고 말했다. “인도 108대 조사이
신 지공대화상은 삼천 가지 위의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 규율283)을 어찌 헤아리며 얽매였겠는가? 몸 전체에는 언제나 순금의
옷을 입고 있는 듯했고,284) 입으로는 부처와 조사를 통렬하게 꾸짖으며, 평
소의 기력은 제방의 납승들을 압도했으니, 송골매 같은 눈빛에 감히 어떤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 원나라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좌선하며 수행을 하
자 감동한 인천(人天)의 대중이 공양을 받쳤는데,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
가신다는 말을 전하니 천룡팔부285)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에 탄식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정성스레 탑을 세웠으니, 그 영골은 삼한286)
땅에 언제나 편안히 남아 있겠지만, 그 법신은 법계 전체에 두루 있으리라.
말해 보라! 이 탑 안에 거두어 넣을 수 있는가? 만약 거두어 넣지 못한다면,
이 영골은 어디에 편히 머물 것인가? 말할 수 있는 자 있는가? 나와서 말해
보라! 나와서 말해 보라! 만일 없다면, 산승이 스스로 말하겠다.” 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수미산을 개자에 넣어 두기는 오
히려 쉬우나, 개자를 수미산에 넣어 두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287)
師擎骨云, “西天一百八代祖, 指空大和尙, 三千威儀不顧, 八
萬細行那權? 身上常穿渾金, 口裏痛罵佛祖, 平生氣壓諸方,
鶻眼難能揷觜. 元朝默坐多年, 感得人天打供, 一朝傳語還鄕
去, 八部龍天嘆不還. 故我今朝誠立塔, 三韓境內鎭常安, 法
身徧法界. 且道! 還收入這塔中也未? 若收不入, 這个骨頭,
向甚麽處安着? 還有道得者麽? 出來道看! 出來道看! 如無,
山僧自道去也.” 喝一喝, 良久云,“ 須彌納芥猶容易, 芥納須
彌有甚難.”
283) 삼천위의팔만세행(三千威儀八萬細行).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위의와 행위
     방식.『金剛頂瑜伽略述三十七尊心要』大18 p.296c6,『楞嚴經』권5 大19 p.
     127a13등에 나오는 말이다. 종보본 『壇經』 大48 p.357c9에 따르면, 영가현각
     (永嘉玄覺)이 6조 혜능(慧能)을 찾아와 6조가 앉아 있는 주변을 세 바퀴 돌고 석
     장을 내리친 다음 꼿꼿이 서 있자, 6조가 “사문이란 3천 가지 위의와 8만 가지 
     세세한 행위를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이렇게 큰 아만을 부리
     는가! (夫沙門者, 具三千威儀, 八萬細行, 大德自何方而來, 生大我慢!)”라고 하며 
     현각을 점검했다고 한다.
284) 속세의 티끌을 벗어난 순수한 풍모를 나타낸다.
285) 天龍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모든 신. 팔부중(八部衆)이라고도 한다. 천(天)·용
     (龍)·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
     那羅)·마후라가(摩睺羅伽) 등이다.
286) 三韓. 太古語錄 주석13) 참조.
287) 입형식에 조응하는 화두이다. 영골을 탑에 ‘넣는다’는 절차를 두고 선가에
     널리 회자되는 이 화두를 시기적절하게 끌어들였다.

● 각오선인에게 주는 법어288) 示覺悟禪人
288) 이 법어는 太古語錄 「答方山居士」와 비교할 때, ‘寂’이라는 글자가 ‘靈’으로 되
     어 있는 것 외에 모두 동일하다. ‘靈’은 신령하다 또는 밝다는 뜻이며, 의식의 기
     멸이 사라져 고요하게 깨어 밝은 상태라는 점에서 ‘寂’의 개념과 일부는 통한다.
     화두를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고 있다는 뜻의 ‘知’를 수식하는 말로 쓰인 듯하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소멸하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는데, 이 생사와
마주치는 순간에 있는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 하나만 순수
하게 남으면 생각의 기멸(起滅)이 다하고, 기멸이 다한 경계를 밝다[靈]고
한다. 밝은[靈] 경계라도 화두가 없으면 의식에 아무 내용도 없는 무기(無
記)에 불과하며, 밝은[靈] 경계에서도 화두를 뚜렷하게 놓치지 않는 것을
영지(靈知)라고 한다. 이 공적영지(空寂靈知)는 파괴되어 사라지는 일도
없고 다른 것과 뒤섞이는 일도 없다. 이렇게 공부하면 머지않아 공부가 완
성될 것이다.
念起念滅, 謂之生死, 當生死之際, 須盡力提起話頭. 話頭純
一, 則起滅卽盡, 起滅盡處, 謂之靈. 靈中無話頭, 謂之無記,
靈中不昧話頭, 謂之靈知. 卽此空寂靈知, 無壞無雜. 如是用
功, 則不日成功.

● 지여상좌를 위한 하화289) 법문 爲智如上座下火
289) 下火. 하거(下炬)라고도 한다. 장례 때 화장(火葬)을 한다는 표시로 횃불을 드는
     것이다. 진짜 불을 사용하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쉽게 타버리므로 횃불 모양
     의 나무를 깎아 붉은색을 칠하여 불의 형상을 본뜬다. 또는 붉은 비단으로 꽃을
     만들어 횃불 머리에 달아 불을 대신하고, 실제로 불을 붙이지는 않는다.『禪林象
     器箋』권14「秉炬條」禪藏 p.1068 참조.

세 가지 인연290)이 화합하여 잠시 동안 몸을 이루었다가, 사대291)가 흩어
지면 홀연히 공(空)292)으로 돌아간다. 37년 동안 허깨비 바다를 돌아다니다
가, 오늘 껍데기를 벗어던졌으니 바람에 날리는 쑥과 같이 가볍게 벗어났
구나. 대중이여! 지여상좌는 어디로 갔는가? 알겠는가? 목마를 거꾸로 타
다가 한 번에 뒤집어 생사를 바꾸어버리니, 붉게 타오르는 불꽃에서 차디
찬 바람이 불어온다.293)
三緣和合, 暫時成有, 四大離散, 忽得還空. 三十七年遊於幻
海, 今朝脫殼, 慶快如蓬. 大衆! 智如上座, 向甚麽處去? 還會
麽? 木馬倒騎翻一轉, 大紅焰裏放寒風.
290) 삼연(三緣). 부(父)·모(母)·자기[己]. “태어나는 것은 본래 태어나는 것이 아니
     고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니, 삶과 죽음이 오고 가는 것에 본래 자성이 없고 진
     실한 법도 없다. 단지 업을 따라 발현하여 허망한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경전(『楞嚴經』권2 大19 p.114a22)에 말하기를,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
     났다가, 인연이 떠나면 허망하게 사라진다.’라고 한다. 생을 받는 시초를 따져보
     면, 부·모·자기의 세 가지 연이 만나는데, 이것을 『楞嚴經』(권4 大19 p.120a29
     에서는 ‘성교를 통해 수정(受精)되는 시점에 같은 업[同業]을 끌어들인다’라고
     했으니 이로부터 지·수·화·풍 사대가 화합하여 여기서 신체가 생기는 것이다.”
     (『天如惟則語錄』권9 卍122 p.970b13. 生本不生, 死亦非死, 生死去來, 本無自性,
     亦無實法. 特由循業, 發現而有虛妄之相耳. 所以教中道, ‘因緣和合, 虛妄有生, 因緣
     別     離, 虛妄名滅.’ 原其受生之初, 因父母己, 三緣會遇, 謂之, ‘交遘發生, 吸引同
     業’, 從而地水火風四大和合, 於是乎有身.)
291) 四大. 지(地)·수(水)·화(火)·풍(風). 신체 등의 물질을 구성하는 네 가지 근본
     요소.
292) 공무(空無)와 같은 말. 모든 것이 사라진 허무한 경계를 나타낸다.
293) 단하자순(丹霞子淳)에게도 이 법문과 유사한 형식이 보인다. “단하자순이 입적
     한 스님을 위해 하화를 행하면서 말했다. ‘세 가지 연이 화합하여 몸이 되었다
     가 사대가 흩어지면 공(空)으로 돌아간다. 말해 보라. 어떤 것이 능상좌의 주인
     공인가? 알겠는가? 올 때도 의지한 것이 없었는데, 갈 때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붉은 불꽃이 허공으로 뻗쳐도 허공을 태우지는 못하는 법이다.’”(『丹霞子淳語
     錄』124 p.490b11. 爲亡僧下火云, ‘三緣和合成有, 四大離散還空. 且道. 那箇
     是能上座主人翁? 還會麽? 來兮無依, 去兮何託? 紅燄亘空, 不曾燒著.’)

● 두 스님을 위한 하화 법문 爲二僧下火

“혜징수좌여! 지인상좌여! 이 한 점의 신령하고 밝은 것294)은 태어날 때
도 분명하여 삶을 따르지 않고 죽을 때도 당당하여 죽음을 따르지 않으니,
삶과 죽음이 오고 가는 것에 관계없이 정체가 뚜렷하게 눈앞에 드러나 있
다.” 허공에 횃불로 원상(○)을 그리고서 말했다. “대중이여! 이 두 상좌는
결국 어디로 갔는가? 57년 동안 허깨비 세계에서 노닐다가, 오늘 손 털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이 안의 소식을 누가 알 수 있을까? 타오르는 불속으로
함께 들어갔으니295) 몸을 숨길 곳이 없구나.”
“慧澄首座! 志因上座! 這一點靈明, 生時的的不隨生;死去
堂堂不隨死, 生死去來無干攝, 正體堂堂在目前.” 以炬畫圓相
云,“ 大衆! 這二上座, 畢竟向甚麽處去也? 五十七年遊幻界,
今朝撒手, 便歸鄕, 个中消息誰能識? 同入火光無處藏.”
294) 주석279)와 같다. 신령하다는 뜻의 ‘靈’은 텅 비어 걸림이 없다는 뜻의 ‘虛’와 통
     한다.
295) 시신을 화장(火葬)할 때 몸에서 일어나는 불을 화광삼매(火光三昧)라 하는데,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 신백대선사를 위한 살골296) 법문297) 爲申白大禪師撒骨
296) 撒骨. 화장 후 유골을 수습하고 그 것을 빻아[碎骨] 뿌리는 의식.
297) 이것은 고매우선사(古梅友禪師)의 법문을 변용한 것이다. 본래 유골을 탑에 안
     치하는 입탑(入塔)의 상황에서 행한 법문이지만, 나옹은 살골의 상황에 어울리
     게 바꾸었다. “고매우선사의 영도자를 위한 입탑 법문:재는 넓은 들판으로 날
     아갔고, 뼈마디는 산으로 돌아갔다. 폭발하는 듯한 한 소리에 비로소 견고한 관
     문에 도달했구나. 영도자여! 한 점의 밝은 빛은 안과 밖의 구별이 없기에, 부도
     (탑)에 공연히 가두어도 흰 구름이 되어 유유하게 떠돌리라.”(『列祖提綱錄』
     권35 卍112 p.699a12. 古梅友禪師爲榮道者入塔. 灰飛大野, 骨節還山. 爆地一
     聲, 始到牢關. 榮道者! 一點靈光非內外, 浮屠空鎻白雲閒.) 폭지일성(爆地一聲)은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면서 나는 소리이며,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재는 넓은 들판으로 날아갔지만, 뼈마디는 어디에 안착하는가? 불현듯
들리는 한 소리에 비로소 견고한 관문298)에 도달했도다. 돌! 이 한 점의 신
령하게 밝은 빛299)은 안과 밖의 구별이 없기에, 오대산에 공연히 가두어도
흰 구름이 되어 유유하게 떠돌리라.
灰飛大野, 骨節何安? 驀地一聲, 始到牢關. 咄! 一點靈光非內
外, 五臺空鎖白雲閑.
298) 뇌관(牢關). 최후의 또는 궁극적인 관문을 나타낸다.
299) 주석279) 참조.

● 지보상좌를 위한 하화 법문 爲志普上座下火

지금이 바로 본원으로 돌아갈 때이니,
가는 도중에 머뭇거리며 의심하지 말라.
별 하나 스치는 짧은 순간 몸을 뒤집으면,
9품연대300)를 타고 마음대로 정토(淨土)로 돌아가리라.
返本還源今正時 莫於中路滯狐疑
一星揮處翻身轉 九品蓮臺任自歸
300) 九品蓮臺. 정토(淨土)에 왕생하는 자를 영접하기 위하여 마련한 9종류의 연화대
     (蓮花臺). 행자(行者)가 목숨이 끊어졌을 때 아미타불이 그 몸을 광명으로 비추
     어 주고 여러 보살들이 연화대를 가지고 와서 맞이하면, 행자는 이 연화대를 올
     라타고 정토에 도달한다. 수행자의 지위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9종류로 나누어
     지는데, 이에 따라 연화대도 9종류 곧 9품으로 차별된다. 이것을 9품연대라 한
     다.『觀無量壽佛經』大12 p.344c20 참조.

● 숙령옹주301) 묘선에게 올리는 법어 示淑寧翁主 妙善
301) 淑寧翁主. 사적에는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며, 다만「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의
     기(陰記)에 ‘淑寧翁主金氏妙善’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본분사를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출가와 재가 또는 남자와 여자 그리
고 초심자와 오래 수행한 자에 달려 있지 않으며, 다만 당사자가 지닌 궁극
적인 일념의 진실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저는 옹주께서 천성이 남들과 다
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래 삿된 마음이 없고 본래 의심이
없으며 본래 미혹된 마음이 없이 다만 온통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
는 마음만 있거늘 이 어찌 과거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세월 동안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반야의 정법을 훈습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옛날부터 “장부
란 남자나 여자의 형상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네 가지 법만
갖추면 장부라 한다. 네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첫째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것, 둘째 정법을 듣는 것, 셋째 그 뜻을 사유하는 것, 넷째 말씀대로 수행하
는 것 등이다. 이 네 가지 법을 갖추면 진실로 장부라 하며, 이 네 가지 법이
없다면 비록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더라도 장부라 하지 않는다.”302)라고 하
였습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옹주께서는 이 말을 확고하게 믿고, 다만 일상
생활의 어느 시각에서도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는 사위의 안에서 본래
참구하던 화두303)를 정신을 집중하여 들고서 언제나 놓치지 않으며 끊임
없이 반복하여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고요한 경계에서나 시끄
러운 경계에서나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말할 때나 침묵할 때
나 의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생기며,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화두가 늘 눈앞에 나타나304) 잊고자 해도 잊지 못하고 일으키고자 해도 일
으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결정적으로
몸을 뒤집어 던지게 될 것이니,305) 이때가 바로 여자의 몸을 바꾸어 남자가
고 남자의 몸을 바꾸어 부처가 되는306) 순간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리고,
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若成此一段大事, 不在僧之與俗, 男之與女, 初機後學, 只在
當人究竟一念眞實耳. 我見翁主, 天性與他有異. 本無邪心, 本
無疑, 本無惑心, 只有全心, 欲求無上菩提之心, 豈非過去
無量劫來, 親近善知識, 熏習般若正法也? 古云,“ 丈夫者, 非
是男形女相論之, 只具四法, 而名丈夫. 何等四法? 一親近知
識, 二聽聞正法, 三思惟其義, 四如說脩行. 具此四法, 眞名丈
夫, 無此四法, 雖是男形, 不名丈夫.” 伏請翁主, 的信此語, 但
於日用二六時中, 行住坐臥, 四威儀內, 全精提起本參話頭, 提
來提去, 疑來疑去. 靜中鬧中, 不提自提;或語或默, 不疑自疑,
或寢或寤, 話頭現前, 要忘不忘, 要起不起. 到此, 不覺翻身一
擲, 只此便是轉女成男, 轉男成佛之處也. 至囑, 至囑.
302)『大般涅槃經』권18大12 p.469a24에 나오는 말이다.
303) 본참화두(本參話頭). 주석177),「상국 이제현에게 보내는 답신」2 참조
304) 太古語錄 주석196) 참조.
305) 주석235) 참조.
306) 본래 여인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으나 남자의 몸으로 바꾸면 성불할 수 있다
     는 설에 근거한 말이다.『法華經』권4「提婆達多品」大9 p.35c6에 나오는 용
     녀성불(龍女成佛)의 설이 대표적이다. 곧 여인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어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의 몸으로 바꾸어야 성불의 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하
     면서, 8세 용녀가 남자의 몸으로 변하여 남방 무구(無垢)세계에 왕생하여 성불
     하였다고 한다.

● 누이에게 답하는 편지307) 答姝氏書
307) 누이에게 세속적 친소(親疎) 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항상 염불(念佛)수행을 하라
     고 권하는 편지이다. 화두 참구의 방법을 아미타불의 염송에 적용하는 염불선
     (念佛禪) 또는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의식
     에서 아미타불을 놓치지 말고 염송하면서 ‘아미타불은 어디에 계실까?’라는 의
     문이 막다른 곳에 이르는 경계는 화두 공부를 하다가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맞
     닥뜨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려서 출가한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가까운 친
척과 먼 타인을 구별하지 않으면서, 불도만을 생각하다가 벌써 오늘에 이
르렀습니다. 인의(仁義)의 도308) 중에는 친족에 대한 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지 않지만 우리의 불도 중에는 이러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바로 큰 잘못이 됩니다. 이러한 뜻을 아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저를 만나려
는 마음을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루 모든 시각에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말하고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 그 모든 상황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송(念誦)하십시오. 항상 반복하
여 염송하며 언제나 놓치지 않고 지속하다가 염송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염송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저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또한 헛되게 6도윤회의 고통을 당하는 잘못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리고, 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게송 한 수
적습니다.
自小出來, 不記年月, 不念親踈, 以道爲念, 已到今日. 於仁義
道中, 不無親情, 及與愛心, 我佛道中, 纔有此念, 便乃大錯也.
請知此意, 千萬斷除親見之心. 常常二六時中, 着衣喫飯, 語言
相問, 所作所爲, 於一切處, 至念阿彌陀佛. 念來念去, 持來持
去, 到於不念自念之地, 則能免待我之心, 亦免枉被六道輪廻
之苦. 至囑, 至囑. 頌曰,
308) 혈육의 정을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윤리를 말한다.

아미타불은 어느 곳에 계실까?
마음에 붙여 두고 결코 잊지 마시라.
염송이 막혀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계에 이르면,
여섯 문309)에서 항상 자금색의 광명이 비추리라.
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309) 육문(六門). 여섯 가지 감각 기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를 가리킨다.

● 대어310) 代語
310) 代語. 문답의 당사자가 대답을 하지 않았을 경우, 그를 대신하여 질문을 던진 편
     에서 스스로 대답을 하거나, 후대에 그 문답을 보고 제삼자가 대신하여 대답하
     는 형식을 말한다. 여기서는 보령인용(保寧仁勇)의 여섯 가지 대어에 대하여 나
     옹이 그 각각에 또 다른 대어를 제시하는 형식이다.

양나라 무제가 달마에게 “짐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요?”라고 묻자
달마가 “모르겠소.”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령인
용(保寧仁勇)311)이 무제를 대신하여, 혀를 내밀어 그 뜻을 보였다.312) 나옹
이 대신 말했다. “하늘과 땅은 하나의 이치로 합한다.”
梁武帝問達磨云,“ 對朕者誰?” 磨云,“ 不識.” 帝無語.
保寧代, 吐舌示之. 師云,“ 天地一統.”
311) 생몰연대 미상. 송(宋)나라 때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 선사.
312) 보령인용의 대어는 이 문답과 “‘성스러운 진리의 근본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막힘없이 트여 성스러움조차 없습니다.’”(問, ‘如何是聖諦第一義?’ 祖曰, ‘廓然無
     聖帝.’)라는 문답 등 두 가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이 문답을 전하는 모든 문헌에
     ‘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라는 구절은 없으며, 이 어록에서 대어의 형식에
     충실하기 위하여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宗門拈古彙集』권5 卍115 p.570a9, 
    『宗鑑法林』권6 卍116 p.89b12 등 참조.

송(宋)나라 태종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십니까?” “와운313)
에서 옵니다.” “와운은 으슥한 곳에 숨어 살면서 천자를 알현하지 않거늘
어떤 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보령이 그 스님을 대신해서 말했다. “밝은
빛을 만나면 나타납니다.” 나옹이 대신 말했다. “지극한 교화가 실현되어
있거늘 누가 몸을 피하겠습니까?”314)
宋太宗問僧,“ 甚處來?” 僧云,“ 臥雲來.” 帝云,“ 臥雲深處不
朝天, 因甚到此?” 保寧代云,“ 遇明卽現.” 師云,“ 至化誰逃?”
313) 臥雲. 흘러가지 않고 쉬는 구름 또는 숨은 구름.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사는 ‘은둔자’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聯燈會要』권29 卍
     136 p.929a15에 따르면, 와운은 태종을 알현한 스님이 거처하는 여산(廬山)의 와
     운암(臥雲庵)을 가리킨다.
314) 나옹의 말은 이 문답에 대한 설두중현(雪竇重顯)의 대어를 변형한 것이다. “지
     극한 교화로부터 달아나기는 힘듭니다.”(『雪竇語錄』大47 p.695b3. 代云, 
     ‘難逃至化’.) ‘밝은 빛’은 현명한 지혜를 비유하고, ‘지극한 교화’는 세상을 다스
     리는 황제의 감화력을 비유한다.

적대사(寂大師)가 삼계도(三界圖)를 바치자 태종황제가 물었다. “짐은
삼계 중 어디에 거처합니까?” 적대사가 대답하지 못했다. 보령이 그를 대
신하여 말했다. “폐하께서 어느 곳에 있은들 황제로 존경받지 못하겠습니
까?” 나옹이 대신하여 말했다. “두 손을 모으고 몸을 굽히신다면 누가 우러
러보지 않겠습니까?”
寂大師進三界圖, 帝問,“ 朕居何界?” 寂無對. 保寧代云,“ 陛
下何處不稱尊?” 師云,“ 叉手鞠躬, 誰不仰望?”

고사인(高舍人)315)이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시방의 모든 것이 부처라면
그중 어떤 것이 보신이며, 어떤 것이 법신입니까?”316) 보령이 그 학인을 대
신하여 말했다. “사인이시여, 다시 누구냐고 물어 보십시오.”317) 나옹이 대
신하여 말했다. “비구니318)는 본래 여인의 신분이다.”319)
高舍人問僧,“ 十方摠是佛, 那箇是報身, 那个是法身?” 保寧
代僧云,“ 舍人, 更問阿誰.” 師云,“ 師姑是女做.”
315) 사인(舍人)은 관직 이름. 시대마다 품계의 차이가 있지만, 주로 조칙(詔勅)에 관
     한 사무와 간쟁(諫諍) 등을 담당하던 관직이다.
316)『楚石梵琦語錄』권8 卍124 p.148a16에 수록되어 있다.
317) 이렇게 되묻는 형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저의 자기란 어떤 것입니
     까?’ ‘다시 누구냐고 물어 보아라.’”(『景德傳燈錄』권16「九峰道虔傳」 大51 
     p.329b7. 問, ‘如何是學人自己?’ 師曰, ‘更問阿誰.’);“‘부처란 무엇입니까?’ 
     ‘다시 누구냐고 물어 보아라.’”(같은 책 권26「上藍守訥傳」p.419c22. 問, ‘如
     何是佛?’ 師曰, ‘更問阿誰.’)
318) 사고(師姑). 덕이 있는 비구니를 공경하여 이르는 말.
319) 당연한 말로 의문 자체를 차단하는 방법이다. 동시에 그 자체로 새로운 의문을
     자극하는 하나의 화두가 된다.

설봉이 덕산에게 물었다.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종승(宗乘)320)의 본분사
에 대하여 저에게도 그것을 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덕산이 한 대 때리면
서 “무슨 쓸데없는 말이냐!”라고 하였는데, 설봉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
다.321) 보령이 설봉을 대신하여 “가슴을 밀치고 곧바로 나가야 했다.”라고
말했다. 나옹은 그를 대신하여 “발을 내딛고 나가야 했다.”라고 말했다.
雪峯問德山, “從上宗乘中事, 學人還有分也無?” 山打云, “
甚麽!” 峯無語. 保寧代云,“ 搥胸便出.” 師代云,“ 蹋足出去.”
320) 근본적인 가르침. 선종의 종지를 가리킨다.
321)『禪門拈頌』780則 韓5 p.577c4,『雪峰語錄』卍119 p.945a12 등 참조.

남전이 양흠에게 물었다. “공겁(空劫) 중에도 부처님이 계신가?” “계십니
다.” “그는 누구인가?” “양흠입니다.” “어떤 국토에 사는가?” 양흠이 대답하
지 못했다. 보령이 양흠을 대신하여 “선상(禪床)을 한 바퀴 돌고 나가야 했
다.”라고 말했다. 나옹이 말했다. “어떤 국토에 사는가?”
南泉問良欽, ‘空劫中還有佛不?’ 欽云, ‘有.’ 泉云, ‘是阿
誰?’ 欽云, ‘良欽.’ 泉云, ‘居何國土?’ 欽無語. 保寧代云,
‘繞禪床一匝出去.’ 師云,‘ 居何國土?’

● 감변322) 勘辨
322) 勘辨. 문답을 통하여 상대의 견지를 점검함으로써 잘잘못을 가려내고 더욱 향
     상된 길을 터주는 선가의 방식이다.

나옹이 어떤 좌주(座主)323)에게 물었다. “교가(敎家)에서 말하는 일시
324)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좌주가 머뭇거리자 나옹이 소리쳐 내쫓았다
가 다시 “좌주!” 하고 불렀다. 좌주가 고개를 돌리자 나옹이 물었다. “알겠
는가?” “모르겠습니다.” 나옹이 “다시 때려야겠군.”라고 하자 좌주가 절을
올렸다.325)
師問座主, “敎家說一時佛, 卽今在何處?” 主擬議, 師喝出, 復
召主, 主廻首, 師云, “會麽?” 主云, “不會.” 師云, “更要打
在.” 主禮拜.
323) 일정한 경론(經論)에 정통하여 그것을 강설하는 강승(講僧) 또는 법사를 말한
     다. 선어록에 나오는 좌주는 주로 선가(禪家)와 교가(敎家)의 입장을 대칭시켜
     선종의 종지를 보여주기 위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배우고 이해하
     는 폭이 넓고 빼어난 자를 가리켜 좌주라 한다.”(『釋氏要覽』권1 大54 p.261
     a26. 取學解優贍穎拔者, 名座主.)
324) 一時佛. 모든 경전의 첫 구절. “한때 부처님께서”라는 뜻이지만, ‘일시불’ 그대로
     명사화하여 쓰고 있다.
325) 이렇게 나가는 상대를 불러서 그가 돌아볼 때 다시 말을 붙이는 형식은 조사선
     에 자주 활용하는 감변의 방법이다. “마침내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마
     조 ‘좌주!’ 하고 불렀고 그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을 때, ‘이것은 무엇인가?’라
     고 묻자 또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스님아!’”(『景
     德傳燈錄』권6「馬祖道一傳」大51 p.246b24. 遂辭出門, 師召云, ‘坐主!’ 彼卽
     廻首, 師云, ‘是什麽?’ 亦無對, 師云, ‘遮鈍根阿師!’);“목주가 어떤 학인에게 
     ‘대덕이여!’라 부르자 그 학인이 고개를 돌렸다. 목주가 말했다. ‘한편밖에 볼 
     줄 모르는 놈아!’”(『禪門拈頌』639則 韓5 p.494b12. 睦州喚僧云, ‘大德!’ 僧
     廻首, 師云, ‘擔板漢!’)

세 명의 학인이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나옹이 물었다. “세
사람이 동행을 하면 반드시 지혜로운 자가 하나 있는 법이라고 하나,326) 
지혜로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계327)를 한마디로 말해 보라.” 첫 번째 학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옹이 “지혜는 말에 달려 있지 않다. 두 번째 사람
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학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세 번째 칠통
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으나, 그 학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나옹이 말했다. “노승이 그대들에게 감파당했군. 앉아서 차나 마시게.”
師見三僧來禮, 問云,“ 三人同行, 必有一智, 智不到處, 道將
一句來.” 僧無語. 師云, “智不在語, 第二箇如何?” 僧又無語.
師云,“ 第三箇漆桶如何?” 僧亦無語. 師云,“ 老僧被汝勘破.
且坐喫茶.”
326) 이 말은『論語』「述而」에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그중에 나의 스승이 있
     다.”(三人同行, 必有我師焉.)라고 한 말을 응용한 것이다. 세 사람이 법을 물으러
     찾아왔을 때 이 말을 시작으로 하여 종사가 각각 세 사람에게 질문을 하나씩 던
     짐으로써 그들을 점검하는 전례는 양기방회(楊岐方會)에게도 있었다.『楊岐語
     錄』大47 p.642b21 참조.
327)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의 말이다. 남전이 종지(宗智)의 방문을 받고 그의
     법명을 소로 하여 나눈 문답에서 유래한다. 종지라는 법명은 ‘지혜를 근본으
     로 한다’는 뜻이다. “종지가 스승 약산(藥山)을 떠나 남전을 만났을 때, 남전이
     물었다. ‘스님의 법명은 무엇인가?’ ‘종지입니다.’ ‘지혜로도 도달할 수 없는 경
     계는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결코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하군! 말해버리
     면 리에서 뿔이 난다.’”(『五燈會元』권5「宗智章」卍138 p.172a2. 師離藥山, 
     見南泉, 泉問, ‘闍黎名甚麽?’ 師曰, ‘宗智.’ 泉曰, ‘智不到處, 作麽生宗?’ 師曰, ‘切
     忌道著. 泉曰, ‘灼然! 道著卽頭角生.’)

나옹이 도사(道士)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호주(毫州)에서 옵니
다.” “그대가 호주에서 왔다면 노군328)은 보았는가?” “보지 못했습니다.” “눈
은 두었다 어디다 쓰느냐?” 그 도사가 절을 올리자 나옹이 말했다. “노군이
석가에게 절을 하는구나.”
師問道士, “從甚處來?” 士云, “毫州來.” 師云, “汝從毫州來,
還見老君麽?” 士云,“ 不見.” 師云,“ 要汝眼作麽?” 士禮拜.
師云,“ 老君拜釋迦.”
328) 老君. 태상노군(太上老君)의 줄임말이며,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 착어329) 着語
329) 着語. 일정한 문답이나 게송 등의 각 구절에 대하여 간명하게 붙이는 해설. 오조
     법연(五祖法演)이 백운수단(白雲守端)에게 화두 하나를 제기하여 물었다가 백
     운이 질책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다음 게송 한 수를 지었는데, 이 게송의 각
     구절에 대하여 치절도충(癡絶道沖)이 붙인 착어를 나옹이 그대로 옮겨놓은 것
     이다.『癡絶語錄』권상 卍121 p.502a17 참조. 백운수단은 오조법연의 게송을 
     듣고 “밤송이와 가시나무와 쑥과 같이 씹어 삼키기 어려운 선(禪)이 모두 그대
     의 이니라.”(栗棘蓬禪, 屬子矣.)라고 하며 그 경지를 인가해 주었다. 밤송이 
     등의 비유는 언어와 분별로 미치지 못하는 화두를 나타낸다.『禪林僧寶傳』 
     권30卍137 p.565b1,『佛祖歷代通載』권19 大49 p.679a29,『五祖法演語錄』 
     권하 大47 p.666a18 등 참조.

옛사람(오조법연)이 “산 앞에 경작하지 않고 놀리는 밭330) 한 뙈기가 있
다.”라는 구절에 “만물은 주인을 보면 눈초리를 치켜뜬다.”331)라고 착어했
고, “두 손 모아 간곡하게 스승에게 물었다네.”라는 구절에는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계약 문서는 어디 있는가?”332)라고 착어했으며, “몇
번이나 팔려고 내놓았다가 다시 스스로 사들였던가?”333)라는 구절에는 “경
쇠 소리가 끊어진 다음에 돌이켜 후회하면 안 된다.”334)라고착어했고, “송
죽(松竹)의 절개가 맑은 바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에는 “이득이 있으면 군자도 움직인다.”라고 착어했다.
古云,“ 山前一片閑田地.” 師云,“ 物見主, 眼卓竪.”“ 叉手叮嚀
問祖翁.” 師云,“ 自家本來契券, 何在?”“ 幾度賣來還自買?”
師云,“ 磬聲斷後, 不得翻悔.”“ 爲憐松竹引淸風.” 師云,“ 利動
君子.”
330) 한전지(閑田地). 간전(間田)과 같은 말이다. 두 밭의 경계 사이[間]에 있기 때문
     에 ‘주인이 없는 땅’이다. 곧 경작할 주인이 없어 황폐하게 버려진 땅이라는 뜻
     이 된다. 이 뜻을 확장하여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고 어떤 수단에도 물들지 않은
     적나라한 본분의 뜻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원오극근(圜悟克勤)은 이 게송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한 뙈기의 밭에서 깨끗한 벌거숭이에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가 되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圜悟語錄』 
     권13 大47 p.774c1. 須是向此一片田地, 淨裸裸, 赤灑灑, 方可入作.)
331) 허당지우(虛堂智愚)가 즐겨 쓴 말이다. 여기서는 주인 없는 땅이 자신을 경작해
     줄 주인을 만나면 기대에 부푼다는 뜻으로 의인화되었다. “입이 있어도 부처님
     을 찬탄하기에는 부족하다. 왜 그런가? 사람은 주인을 보면 눈초리를 치켜 뜰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虛堂語錄』권2 大47 p.999b13. 有口也讚嘆不及. 
     何故? 物見主, 眼卓竪.);“어떤 학인이 물었다. ‘세존께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셨는데, 오로지 가섭존자만이 활짝 웃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사람은 
     주인을 보면 눈초리를 치켜뜬다.’”(같은 책 권9 大47 p.1055a12. 僧云, ‘世尊拈
     起, 顯示大衆, 惟有迦葉尊者, 破顔微笑, 又作麽生?’ 師云, ‘物見主, 眼卓竪.’)
332) 스승에게 그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다는 것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본래 그
     땅의 계약 문서를 가지고 있는 주인이라는 뜻을 대칭시켰다. 자신이 주인인 것
     도 모르고 주인을 찾는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333) 수없이 팔려고 내놓았지만 사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본래의 주인인 자기 자신
     에게 돌아왔다는 말이다.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어 고스란히 자신의 문
     제로 남았다는 뜻과 밀접히 연관된다.
334) 경쇠 소리는 물건을 경매할 때 매매가 끝났다는 신호음이다. 남의 손에 팔려 넘
     어간 다음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 결제때 법좌에 올라 행한 보설 結制上堂普說

나옹선사가 법좌에 올라앉아 불자를 잡고 말했다. “대중들이여! 방석을
거두어 치우고 법문을 듣지 않고 해산할지라도, 아무 일도 없는데 쓸모없
이 일을 만들고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키는 짓이다.335) 그러나 법은 한
가지로 정해진 것이 없고, 구체적인 현상은 한편으로 치우친 일이 없으니,
산승의 말을 들어 보라.336) ‘고요하여 본래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으나
텅 비고 밝아 스스로 신령하게 통하는 기운이 있고, 미묘한 본질을 다 발휘
하고 공(功)을 잊은 텅 빈 곳에서 다시 고요하게 관조하는 경계로 돌아간
다.’337) 이 한 구절338)은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을 모조리 드
러내었으니, 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소리와 색이 모두 그것이다.339)
인도의 28대 조사들도 이것으로 인하여 분별 작용을 잊었고, 중국의 6대
사들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할 말을 잃었다.340) 시끌벅적한 곳에서는 밝
고 고요히 비추며, 밝고 고요히 비추는 곳에서는 시끌벅적하게 움직인다.
바로 눈앞에 왕의 보검이 드러나 있는 것과 같으니 그 날카로운 칼날과 대
적하려 든다면 주검이 만 리 사방에 가득할 것이다.341) 다시 무슨 말을 하
겠는가? 대지가 산을 떠받치고 있지만 산이 높이 치솟아 있다는 사실을 모
르는 것과 같고, 돌이 옥을 머금고 있지만 옥에 한 점의 티도 없다는 사실
을 모르는 것과 같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코끼리가 강을 건널 때는
밑바닥까지 밟고서 가로질러 지나가는 법이다.342)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
가? 삼현·삼요와 사료간·사빈주로써 죽일 때는 모두 죽이고 살릴 때는 모
두 살리며, 남김없이 밝게 만들기도 하고 남김없이 어둡게 만들기도 하며,
양편을 모두 놓아주기도 하고 모두 잡아들이기도 한다.343) 하면서도 하지
않고 하지 않으면서도 하니, 진실은 거짓을 가리지 못하고 굽은 틀에는 곧
은 것을 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주장자를 잡고 올렸다가 내리치면서 말했
다. “여러분, 알겠는가? 떨어져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니, 종횡 어느 곳
에나 하찮은 것은 없다.”344) 마침내 주장자를 던지면서 말했다. “이미 떨어
져 있고 또한 다른 것도 아니라면 결국 이것은 무엇일까?” 한 소리 크게 내
지르고 말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은 똬리를 틀고 대치하는 기세이며,
산의 형상과 구름의 그림자가 마주보는 모습이다.”345)
師登座, 拈拂子云,“ 大衆! 卷席散去, 也是無事生事, 無風起
浪. 雖然如是, 法無一定, 事無一向, 且聽山僧葛藤.‘ 湛然本
無變異, 虛徹自有靈通, 妙盡功忘空處, 還歸寂照之中.’ 這一
句子, 聲前露裸裸, 盖天盖地, 盖聲盖色. 西乾四七, 自此忘
機;東震二三, 從玆失口. 鬧浩浩處明皎皎, 明皎皎處鬧浩浩.
直下如王寶劒, 擬犯吹毛, 伏屍萬里. 更說什麽? 似地擎山, 不
知山之高峻;如石含玉, 不知玉之無瑕. 更說甚麽? 香象渡河,
徹底截流而過. 更說什麽? 三玄三要, 四料揀, 四賓主, 全殺全
活, 全明全暗, 雙放雙收. 爲而不爲, 不爲而爲, 眞不掩僞, 曲
不藏直.” 拈拄杖, 卓一下云, “諸人會麽? 撲落非他物, 縱橫不
是塵.” 遂擲下云,“ 旣已撲落, 又非他物, 畢竟是箇甚麽?” 喝
一喝云,“ 虎踞龍蟠勢, 山形雲影像.”
335) 말로 드러내기 이전의 경계를 지향하더라도 궁극의 진실에 닿지 못한다는 뜻이
     다. 법문을 듣기 위해 깔아 놓은 방석을 치워서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상
     황을 만들지라도 소용이 없는데, 게다가 한마디라도 꺼낸다면 더욱 잘못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마조도일(馬祖道一)과 백장회해(百丈懷海)의 기연을 활용한 것
     이다. 곧 마조가 법상에 올라앉아 설법을 하려는데, 백장이 나와서 절을 하기 위
     해 깔아 놓은 대자리를 말아버렸고 마조도 법상에서 내려와 방장으로 돌아갔
     다.『景德傳燈錄』권6「百丈海懷傳」大51 p.249c2 참조.
336) 말이 통하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하나의 방편을 펼쳐서 그 의미를 보여 주겠다
     는 뜻이다.
337) 단하자순(丹霞子淳)의 법어에서 인용한 내용이다.『丹霞子淳語錄』卍124
     p.490a16 참조.
338) 본분 자체를 가리키며, 어떤 규정도 내릴 수 없는 궁극의 그 무엇이다. 말후일구
     (末後一句)와 같은 뜻이다. 이것은 결코 ‘말의 구절’이 아니며, 언어의 형식에 담
     기 이전에 이미 노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절’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39)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욕불시중(浴佛示衆) 첫 부분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궁극
     적인 한 구절[末後一句]은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을 모조리 드러
     내었으니, 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소리와 색이 모두 그것이다. 부처님은 이
     결정적인 하나의 소식을 얻고서 ‘도솔천을 떠나기 이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
     였고, 모태에서 태어나기 이전에 중생 제도를 벌써 마쳤다.’라고 하신 것이다.”
     (『大慧語錄』권8 大47 p.842c8. 末後一句子, 聲前露裸裸 , 蓋天蓋地, 蓋聲蓋色. 
     黃面老子, 得箇一著子, 便道, ‘未離兜率, 已降王宮;未出母胎, 度人已畢.’)
340) 이하 “시끌벅적한 곳에서는 ~ 모두 잡아들이기도 한다”라는 부분은『大慧語錄』
     권9 大47 p.848b10에 나오는 결하병불(結夏秉拂)의 인용이며, 문장에 출입이 있
     지만 대의는 같다.
341)『大慧語錄』에는 “정면에서 범하려 든다면, 그 칼날에 쓰러진 주검이 만 리에 가
     득할 것이다.”(敢當頭擬犯, 鋒鋩橫屍萬里.)라고 되어 있다.
342) 코끼리는 근원을 철저하게 깨달은 대승의 가르침을 비유한다. 반면에 토끼와
     말은 성문과 연각 등 이승을 비유한다. 이러한 세 종류의 짐승을 가지고 삼승(三
     乘) 교설의 심천(深淺)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세상에 세 종류 짐승이 있
     다. 토끼와 말과 흰 코끼리가 그들이다. 토끼가 강물을 건널 경우 헤엄쳐서 겨
     우 건널 뿐이다. 말은 비록 그보다는 날래지만 여전히 물이 깊은지 얕은지는 모
     른다. 흰 코끼리가 건널 경우 발을 그 바닥까지 닿으면서 건넌다. 성문과 연각은
     마치 토끼나 말과 같아서 비록 생사의 강물을 건너기는 하지만 법의 근본에 통
     달하지는 못한다. 보살의 대승은 비유하자면 흰 코끼리와 같아서 삼계의 12연
     기를 모두 이해하여 펼치고 그것이 본래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모든 이를 구하
     고 보호하여 구제의 은혜를 입지 않는 중생이 없다.”(『普曜經』권3 大3 p.488
     b20. 世有三獸, 一兎, 二馬, 三白象. 兎之渡水, 趣自渡耳;馬雖差猛, 猶不知水
     之深淺也;白象之渡, 盡其源底. 聲聞緣覺, 其猶兎馬, 雖度生死, 不達法本;菩
     薩大乘, 譬若白象, 解暢三界十二緣起, 了之本無, 救護一切, 莫不蒙濟.)『大般
     涅槃經』권27 大12 p.523c29 등에도 나오는 비유이다.
343)『大慧語錄』에는 “三玄三要, 四料揀, 四賓主, 全殺全活”라는 부분은 없다.
344) 흥교홍수(興敎洪壽)선사의 오도송에서 비롯된 말이다. 곳곳에 버려진 듯이 널
     려 있는 하찮은 존재들이 바로 근본을 가리키는 징표라는 취지이다. “홍수선사
     가 그 뒤 천태산의 덕소국사(德韶國師)를 친견하였는데, 어느 날 운력을 하던 
     나르던 나무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떨어진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네. 종횡 어느 곳에나 하찮은 것은 없도다. 산하와 대지
     전체가 남김없이 법왕의 몸을 드러내는구나.’ 덕소가 그 경지를 인정해 주었다.”
     (『天聖廣燈錄』권27「洪壽章」卍135 p.872a11. 後參天台山韶國師, 一日, 因
     普請般柴墜落, 乃成一頌曰, ‘撲落非他物, 縱橫不是塵. 山河及大地, 全露法王身.’ 
     國師然之.)
345) 던져진 주장자를 본분의 상징물로 묘사한 구절이다. 이것은 대치하는 양단에
     그 어느 편으로나 막히지 않고 자유롭게 오고 가는 경지를 나타낸다. 이 법문의
     앞부분에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계를 제시했고, 마지막의 이 대목에서
     는 모든 언어와 현상을 종횡무진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은 굉
    지정각(宏智正覺)의 법어와 설두중현(雪竇重顯)의 「兎角拄杖」이라는 단편에 나
     온다. 법좌에 올라앉아 주장자를 잡고 대중에게 말했다. ‘훌륭한 여러 선수행자
     들이여! 납승의 주장자는 고요할 때는 각 사람의 뒤에 있고, 움직일 때는 각 사
     람의 에 있다. 이 두 경계 중 어디에도 묶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변
     화에 응할 수 있다. 여러분, 말해 보라! 갖가지 변화에 응할 때 어떤 모습이 되
     는가 알겠는가?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은 똬리를 틀고 대치하는 기세가 그치지
     않으며, 구름의 그림자와 산의 형상이 냉랭하게 마주 보고 있다.”(『宏智廣錄』 
     권1 大48 p.8a13. 上堂, 拈拄杖, 示衆云, ‘好諸禪德! 衲僧家拄杖子, 靜也在人人
     之後, 動也在人人之前, 都緣不涉兩頭, 所以能應諸變. 諸仁者, 且道! 應諸變時, 
     作何面目? 還會麽? 虎踞龍盤勢未休, 雲影山形冷相向.’) 『雪竇祖英集』권6 
     大47 p.707b12 참조.

방거사와 그의 딸 영조(靈照)가 나눈 다음의 문답을 제기했다. “분명하
게 드러난 온갖 현상에 분명하게 조사의 뜻이 나타나 있다.346)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늙은이시여! 머리털은 희어지고 이빨이 누렇게 변할 때
까지 살아오면서 겨우 이 정도 견해를 내십니까?” “너라면 어떻게 말하겠
느냐?” “분명하게 드러난 온갖 현상에 분명하게 조사의 뜻이 나타나 있습
니다.” 나옹이 이 문답에 대하여 평가했다. “거사는 말로는 목적지에 도달
했지만 생각으로는 도달하지 못했고, 영조는 생각으로는 목적지에 도달했
지만 말로는 도달하지 못했다. 설령 말과 생각이 모두 도달했더라도 나옹
의 문하에서는 한꺼번에 묻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말해 보라! 어디에 잘못
이 있는가?” 잠깐 침묵하다가 “분명하게 드러난 온갖 현상에 분명하게 조
사의 뜻이 나타나 있다.347) 안녕히!”라 한 다음 법좌에서 내려왔다.
擧, 龐居士問靈照女云,“ 明明百草頭, 明明祖師意, 你作麽
會?” 照云,“ 這老漢! 頭白齒黃, 作這箇見解?” 士云,“ 你作麽
生道?” 照云, “明明百草頭, 明明祖師意.” 乃云, “居士句到意
不到, 靈照意到句不到. 直饒句意俱到, 懶翁門下, 未免一場埋
却. 且道! 過在甚麽處?” 良久云,“ 明明百草頭, 明明祖師意.
珍重!” 下座
346) 백초(百草) 곧 온갖 풀이란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갖가지 현상을 나타낸다. 바로
     여기에 조사의 근본적인 뜻이 들어 있다는 말로써 화두를 삼은 것이다.『龐居士
     語錄』卍120 p.61b3 등에 나온다.
347) 방거사가 처음 제시한 화두를 영조와 나옹까지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이 말 자
     체가 하나의 극치를 이룬 은산철벽의 화두이므로 다른 모든 설명 도구는 무용
     지물이 되며, 오로지 처음의 그 구절만이 끝까지 살아남을 뿐이라는 점이 드러
     난다. 최초의 구절과 마지막 구절이 일말의 가감도 없이 일치하여 어떤 말이나
     분별도 덧붙일 수 없다. 이 다음에 나오는 「해제일상당」에 그 뜻이 나온다. 나옹
     의 평가는 대혜종고(大慧宗杲)가 이 문답에 대하여 내린 평가와 비교하여 그 형
     식과 내용이 유사하다. 眞覺語錄 주석129) 참조.

● 해제일상당 解制日上堂

법좌에 올라앉아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바로 이것348)은 주인의 구절
인가, 손님의 구절인가? 파주의 구절인가, 방행의 구절인가?349) 대중들이
여,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분명하게 구분한다면 더 이상 말을
듣지 말고 해산하기 바란다. 그러나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면 내 말을 들
어 보라. 최초의 한 구절과 마지막 하나의 기미350)는 삼세의 부처님들도 몰
랐고 역대의 조사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여러분의 눈앞에 집어내
어 주었으니, 북을 울려 대중을 집합시키고 그 힘을 모아 살펴보라. 천 년
묵은 그림자 없는 나무가 지금은 밑 빠진 바구니가 되었다.351) 2천 년 전에
도 이랬고 2천 년 뒤352)에도 이러하며, 90일 전에도 이랬고 90일 뒤353)에도
이러하다. 위로는 우러러 존경할 부처가 없고 아래로는 제도할 중생이 없
거늘 무슨 장기다 단기다 따져서 말하겠으며, 무슨 결제다 해제다 가려서
말할 것인가?” 주장자를 잡고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고 말했다. “반대의 두
편도 잘라내고, 가운데도 머물지 않노라. 빈손에 호미를 들고, 걸어가면서
물소를 탄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는데,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
네.”354) 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안녕히들 계시오.”라고 한 뒤 법좌에서 내
려왔다.
陞座, 良久云, “只這箇, 是主句耶, 賓句耶? 把住句耶, 放行句
耶? 大衆, 還辨得麽? 若能辨淂, 便請散去. 若辨不得, 且聽葛
藤. 最初一句, 末後一機, 三世諸佛不知, 歷代祖師不會. 拈向
諸人面前, 打鼓普請看. 千年無影樹, 今時沒底籃. 二千年前也
伊麽, 二千年後也伊麽;九十日前也伊麽, 九十日後也伊麽. 上
無諸佛可仰, 下無衆生可度, 說甚長期短期? 說甚結制解制?”
拈拄杖, 卓一下云, “截斷兩頭, 不居中空. 空手把鋤頭, 步行騎
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喝一喝,“ 珍重.” 下座.
348) 지금 현장의 이것, 말이 나오기 이전의 침묵, 눈앞에 보이는 것, 곧바로 가리킬
     수 있는 것, 지금 여기서 들리는 것 또는 만져지는 것, 침묵이나 말 등이 모두 ‘바
     로 이것’이다. 그것이 최초의 한 구절이며 동시에 최후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다만, 주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며, 방행도 아니고 파주도 아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든 길이 틀어 막힌 관문(關門)으로 수용되면 모두 ‘바로 이
     것’이다. 본래의 자아가 되었건 본래면목이 되었건 이와 같은 관문이 되지 않으
     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없다
349) 파주와 방행에 관해서는 眞覺語錄 주석127)·273), 太古語錄 주석127) 등 참조.
350) 두 가지가 나타내는 궁극적인 의미는 다르지 않다. 최초의 한 구절은 어떤 기미
     도 드러내지 않아 분별할 여지가 없는 경계를 나타내고, 마지막 하나의 기미는
     진리를 보여주는 말이나 분별과 같은 결정적인 하나의 조짐을 가리킨다. 최초
     의 한 구절은 마지막 하나의 기미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마지막 하나의 기
     미는 단서는 있지만 최초의 한 구절과 같이 말과 분별의 형식에 담을 수 없다.
     “최초구를 안다면, 말후구도 알리라. 그러나 말후구와 최초구여! (그 어느 것도)
     이 하나의 구절은 아니로다.”(『無門關』13則「頌」大48 p.294c10. 識得最初
     句, 便會末後句. 末後與最初! 不是者一句.);“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최초의 
     한 구절과 마지막 하나의 기미를 그 자리에서 만난다면 등롱과 노주가 대지를 
     흔들며 빛을 발산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오늘 손해를 본 것이다.”
     (『續燈正統』권23「了堂惟一章」卍144 p.766a1. 上堂, ‘最初一句, 末後一機, 
     直下搆得, 燈籠露柱, 動地放光. 其或未然, 竹山今日失利.’)
351) 그림자 없는 나무와 밑 빠진 바구니는 어떤 인식의 규격에도 들어맞지 않는 격
     외(格外)의 이치 곧 ‘바로 이것’의 또 다른 뜻이다. “‘조사의 심인은 유와 무 그 
     어느 편에도 떨어지지 않는데, 스님께서는 선사의 문하에 계실 때 무엇을 얻었
    습니까?’ ‘천 년 묵은 그림자 없는 나무가 지금은 밑창이 없는 신발이 되었다.’”
     (『汾陽語錄』권상 大47 p.596a27. 問, ‘祖師心印, 不落 有無, 未審師於先師處, 
     得箇什麽?’ 師云, ‘千年無影樹, 今時勿底靴.’)
352)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와 오늘날.
353) 이전의 결제와 해제하는 오늘.
354) “빈손에 호미를 ~ 흐르지 않네.” 선혜대사(善慧大士) 곧 부대사(傅大士)의 게송
     이다.『景德傳燈錄』권27 大51 p.430b6, 『善慧大士錄』 卍120 p.53b1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