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나옹선사 어록

나옹의 無心學: ‘劒風’과 ‘喝風’의 화쟁과 회통

실론섬 2017. 3. 1. 19:52

나옹의 無心學:

‘劒風’과 ‘喝風’의 화쟁과 회통

高榮燮(고영섭)/(동국대 불교학과)

 

1. 화두: 문제와 구상

2. 劒風과 喝風의 和會

3. 無心禪의 살림살이

   1) 無心의 구조

   2) 照見의 논리

3) 利生의 실현

4. 보림: 정리와 과제

 

1. 화두: 문제와 구상

 

한 사상가의 생평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갈래의 조명은 있어야만

한다. 하나는 해당 시대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그 역정

속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느냐’라는 측면이다. ‘삶’의 과녁에 집중하는 전자를 역

사적 접근이라 한다면, ‘생각’의 과녁을 겨냥하는 후자는 철학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한 사

상가의 생평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러한 양면의 조망이 요청된다. 그래

야만 삶과 생각이 어우러진 한 인간의 풍모를 전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옹 혜근

(1320~1376)의 생평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역사와 철학을 아우르는 접근 방식이 요청된다.

 

나옹은 고려 말기의 격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무심’(無心)의 살림살이를 온전히 보여준 고

승이다. 그는 충숙왕-충혜왕-충숙왕(복위)-충혜왕(복위)-충목왕-충정왕-공민왕 전기로 이어

지는 원 간섭기를 선사로 살았고 공민왕 후기와 우왕 때에는 선사와 왕사로 지내면서 ‘검

풍’(劒風)과 ‘할풍’(喝風)을 자유자재로 쓰는 무심선의 가풍을 선양하였다. 나옹의 몸가짐은

그와 당대를 함께 보낸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0~1374)과 태고 보우(太古普雨, 1301~1382)

와는 서로 대비된다. 즉 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정계를 넘나들며 수행했던 태고와 왕

권과는 철저히 떨어져 산 속에서 수행했던 백운과는 또 달리 왕권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적

당한 거리를 유지하였고1) 아울러 산 속에서 수행에 매진하며 뭇사람들을 제접 교화했다.

1) 종래 일부 연구에서는 나옹이 불교의 본령인 수행에 몰두함으로써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발언에 간여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無心禪’의 가풍을 견지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공민왕 5년부터 왕사로 책봉된 태고에 비해 15년이나 뒤늦은 공민왕 20년에야 왕사로 책봉되
   었기에 발언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행에 몰두하는 것은 선사
   로서는 본분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무심선’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지
   공의 無生戒와 無心禪에 깊은 감화를 받았던 결과로 나옹의 가풍을 무심선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은 一理가 있다. 문제는 나옹의 무심선이 어떠한 구조 속에서 해명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나옹의 구도 역정과 대중들을 위한 열린 살림살이는 태고와 크게 대비된다. 태고가

비교적 중앙 정치인들과 교유하면서 불교의 대사회적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면, 나옹은 철저

히 지방 사원을 배경으로 여러 불자들을 직접 제접 교화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두 사람

의 기질과 가풍은 가지산문을 상승하고 있는 태고와 사굴산문을 상승하고 있는 나옹의 문중

적 기질 내지 살림살이의 차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를 태고와 비교해서 말할 때 대사회적 발언이나 활동이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일급의 선사였고 당시 정계가 친원 세력과 결탁한 화엄승 신돈의 전횡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음을 염두에 둘 때 수도인 개성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는 오히려 그

들에 대한 강력한 ‘안티’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나옹은 신돈이 제거된 이후 다시

공민왕과 우왕의 부름을 받고 왕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스승 지

공으로부터 전수받은 인도 격외선의 ‘검풍’과 평산으로부터 전수받은 중국 임제선의 ‘할풍’을

자신의 가풍 속에서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심선(無心禪)

내지 무심학(체계)으로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래 나옹에 대한 연구는 불교학계2) 일부와 국문학계3)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최근에

는 역사학계4)와 불교학계5) 및 철학계6) 등에서 집중해 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위상이나 가

풍에 견주어 볼 때 아직도 연구가 미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향은 나옹이 태고

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빼어난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법통을 이은 환암 혼수(幻庵混

修, 1320~1392)계와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계 사이의 갈등과 훗날 서산 휴정 이래

그 문도들이 태고 보우- 환암 혼수-구곡 각운(龜谷覺雲)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정통으로 규

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주류에서 밀려났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금할 길이 없다.

2) 朴漢永(石顚沙門), 楊州天寶山遊記,「朝鮮佛敎叢報」13, 1918.; 徐京保, 高僧傳說, 懶翁和尙
   眞蹟,「新佛敎」44.45, 1943.; 徐京保懶翁-高麗最後의 禪師,「韓國의 人間像」3(신구문화
   사,1965); 朴虎南, 檜巖寺和尙懶翁의 無生法考察, 畿田文化硏究 16, 인천교육대학 기전문
   화연구소, 1987.
3) 具壽永, 懶翁和尙과 ‘西往歌’연구 ,「國語國文學」63.63, 국어국문학회, 1973.; 金鍾雨, 懶翁과
   그의 歌辭에 대한 연구 ,「부산대논문집」17, 부산대학교, 1973.
4) 許興植, 懶翁의 思想과 繼承者(상,하),「韓國學報」제58집, 제59집, 1990년 봄.; 허흥식, 懶翁
   禪師: 지공의 철저한 계승자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 指空禪賢」(일조각,1997); 金昌淑(曉
   呑), 懶翁慧勤의 佛敎史的位置,「나옹선사의 생애와 사상」(경상북도 영덕군,1001); 金昌淑
   (曉呑), 懶翁慧勤의 禪思想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1997.
5) 徐宗梵, 懶翁禪風과 朝鮮佛敎,「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한국불교문화사상사」권상(가산문
   고,1992). 여기서 논자는 나옹선풍의 특징을 1) 高峻한 禪風, 2) 興福과 神機의 禪風으로 정리하고
   있다.; 李哲憲, 懶翁慧勤의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996.
6) 辛奎卓, 나옹화상의 선사상 ,「삼대화상 연구 논문집: 지공, 나옹, 무학화상」(불천,1996). 여기
   서 논자는 나옹의 선사상의 줄거리를 1) 진여연기론에 입각한 불성사상, 2) 돈오무심사상으로
   정리한 뒤 임제종풍의 승계로서의 나옹선의 특징을 가) 자기 확신, 나) 주체적인 표현을 강조,
   3) 화두참구를 강조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李德辰, 懶翁慧勤의 緣起說硏究,「삼대화상연구
   논문집 II: 지공․나옹․무학화상」(뷸천,199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옹의 영향력은 선사(先師)였던 지공과 문제(門弟)였던 무학

과 이어지면서 삼화상의 중심으로서 그 덕화가 조선불교 내내 이어졌고 오늘날의 각종 작법

(作法) 및 증명(證明)의 의식 및 의례 문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이

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나옹법통에서 태고법통으로의 전환은 어떠한 의도적인 계기가 있었음

을 부인하기 어렵다. 적어도 나옹과 다른 법통에 있었던 이들은 나옹이 평산의 법을 받은

뒤 지공의 선법까지 받음으로써 임제선풍 계승자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했으며, 밀교의 풍모

까지 지니고 있는 지공의 선법을 받았던 것에 대해서는 더욱 더 수용하기 어려웠는지 모른

다.

 

나옹이 앞서 지공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가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먼저 받은 것은 평

산에게서였으며, 그 뒤에 다시 지공을 만나 법거량을 통해 법의와 불자와 범어 편지 한 통

을 전해 받았다. 때문에 평산에게서 법의와 불자를 받은 위에 지공에게 다시 받은 것을 그

렇게 문제삼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공과의 관계를 문제삼은 것은 휴정 이래 그 문

도들이 임제정맥 일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려 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좌라고 할 수 있

다. 이러한 점은 조선 초기에 나옹의 행장이나 어록에 기록된 지공의 전법 사실을 제치고

평산의 전법만을 사실로 확정지은 것7)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이것은 법통의 계보 확정에

있어서 그 ‘순수성’을 너무 경직되게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7) 나옹의 두 제자였던 환암 혼수와 무학 자초가 입적하자 두 문도의 제자들은 상당한 갈등이 있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무학계는 환암계의 임제정맥의 순수성 논의에 대응하여
   인도로부터 이어지는 지공의 전법 사실을 제치고 중국의 임제 정맥을 이어받은 평산의 전법만을
   사실로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환암이 태고와 나옹 모두의 직제자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태고법통설을 주창한 휴정과 그 문도들이 그를 태고의 직제자로만 인정함으로써 나옹과 환암
   과의 사제 관계를 의도적으로 약화 내지 배제시켜버렸음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해 허흥
   식은 “懶翁의 비문에 陰記가 없음은 自超가 소외되고 混修가 直弟子로 실렸으므로, 자초의 추종자
   에 의하여 조선 건국 초에 이를 갈아버리고 자초를 수제자로 다시 세기려는 의도가 실현되지 못한
   때문일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許興植, 앞의 책, 187면, 주100).

 

한 사상가의 역정은 그가 평생 모색했던 사상적 키워드로 해명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모색했던 기호가 자신의 사상적 지형도를 이끌고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그

것은 곧 한 사상가의 ‘수행적 의단’과 ‘학문적 화두’를 탐색함으로써 그 인물의 사상적 독자

성을 밝혀내려는 시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효의 일심(一心), 지눌의 진심(眞心), 태

고의 자심(自心)에 대응하는 나옹의 키워드는 과연 무엇일까.

 

이 글에서 논자는 지공으로부터 비롯된 ‘천풍’과 평산으로부터 비롯된 ‘할풍’을 이으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무심’ 가풍으로 체화해 간 나옹의 살림살이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8)

8)「懶翁和尙語錄」의 體裁는「語錄」과「歌頌」2권으로 되어 있다. 侍者覺璉이 수집한「어록」에는 
   上堂法語29則, 짧은 글 25則, 李穡이 찬한 塔銘이 있고, 문인 覺宏이 쓴 行狀이 덧붙여 실려 있다.
   侍者覺雷가 수집한「가송」에는 翫珠歌, 百衲歌, 枯髏歌등의 歌와 여러 頌들이 집성되어
   있고, 그 뒤에 이후 別傳되어 온 懶翁和尙僧元歌가 덧붙여 있다. 또 法藏이 具足한 普濟尊者三
   種歌가 추가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한국불교전서」제6책에 실려있다. 나옹의 입적 10년 이내에
   신륵사,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사불산, 용문산, 구룡산, 묘향산 등 7개소에 李穡이 찬한 塔碑가 세
   워졌고, 그 이후에는 원주 令傳寺에도 塔碑가 세워졌다. 오대산 月精寺藏版을 底本으로 1940년 발
   행한「나옹집」」이 있다. 이 논고는「한국불교전서」제6책에 의거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2. 劒風과 喝風의 화회

 

나옹은 이미 8세 때에 마침 고려에 건너와 세속신도들에게 내리는 보살계법회에서 보살계

첩(菩薩戒牒)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절친했던 이웃 친구의 죽음

 

을 맞이하면서 ‘사람은 왜 죽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이웃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해 물

어보았으나 아무도 속시원히 해답을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아픈 마음을 지닌 채 고

뇌하다가 출가를 감행했다. 먼저 고향 영덕에서 멀지 않은 문경 공덕산(사불산) 묘적암(윤필

암)을 찾아가 요연(了然)선사에게 의탁하다가 삭발 수계하였다.

 

요연은 그를 만나자마자 “그대는 무엇하러 출가하고자 하는가?”라고 물었다. 나옹은 “삼

계를 벗어나(超出三界)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利益衆生)입니다.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했다. 요연은 “지금 여기 온 그대는 어떤 물건인가?”라고 물었다. 나옹은 “말할 줄 알

고 들을 줄 아는 이것이 이렇게 왔으나 다만 수행하는 법을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요

연은 “나도 그대와 같아서 아직 모른다. 다른 스승을 찾아가서 물어 보라”9)고 하였다. 4년

가까이 그곳에서 머물렀으나 자신의 기량 부족을 인정한 겸허한 요연에게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9) 覺宏錄, 高麗國 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脩本智 重興祖風 福國祐世 普濟尊者 諡禪覺懶翁 
   和尙行狀(「韓佛全」제6책, 703상 면).

 

여러 산을 유력하다가 양주 회암사에 머무르며 밤낮으로 혼자 앉아 수행하였다. 4년 가까

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깨치고(25세, 1344) 나서는 중국으로 가서 스승을 찾으리라고 결심

했다. 자신의 기량을 키울 생각을 지녔던 그는 곧이어 원나라로 건너가 대도(燕京)의 법원사

(法源寺)에 이르렀다. 거기서 인도에서 온 제납박타존자 지공을 만나 처음으로 ‘검풍’을 접했

다. 검풍은 지공 뿐만 아니라 평산과 나옹에 의해서도 언급되고 있어 ‘칼의 가풍’은 지공의

가풍을 온전히 드러내 주고 있다. 지공과 나옹의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검’(劒)으로 상징되

는 ‘선’(禪)문답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공은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하고 물었다. 나옹은 “고려에서 왔습니다”라고 했다. 지공

은 “배로 왔는가, 육지로 왔는가, 신통으로 왔는가?”라고 물었다. 나옹은 “신통으로 왔습니

다”고 하였다. 지공은 “신통을 나타내 보여라”고 하였다. 나옹은 그 앞으로 가까이 가서 합

장하고 섰다. 지공이 또 “그대가 고려에서 왔다면 동해 저쪽을 다 보고 왔는가?”라고 물었

다. 나옹은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 왔겠습니까?”라고 했다. 지공이 “집 열 두 채를 가

지고 왔는가?”라고 했다. 나옹은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지공은 “누가 그대를 여기 오

라 하던가?”라고 했다. 그러자 나옹은 “제 스스로 왔습니다”라고 했다. 나옹은 “무엇하러 왔

는가?”라고 했다. 나옹은 “뒷사람들을 위해 왔습니다”라고 했다. 지공은 나옹을 받아들여 대

중과 함께 머물게 했다.

 

여기서 지공이 던진 물음은 선가의 전형적인 선풍이라 할 수 있다.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로 표현되듯 선문답에서 ‘어디서’와 ‘어

떻게’는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유효한 의문사인 것이다. 여기서 지공의 물음은 나옹의 기

질을 간파하고 던지는 질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신통으로 왔음’(神通來)과 ‘뒷사람을 위하여

왔음’(爲後人來)은 이후 나옹의 가풍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신비한 기연’(神機)과 ‘이익중생의

가풍’(利生)으로 나타났다.

 

신비한 기연은 그가 태어날 때의 금색의 송골매(隼) 꿈을 꾼 것, 홍건적이 신광사를 침입

하였을 때의 토지신의 전언, 그리고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을 때의 여러 기연 등에서도 잘 나

타나고 있다. 이익중생의 가풍은 요연의 물음에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답변

과 지공의 물음에 ‘뒷사람을 위하여 왔음’이라는 화답 그리고 이후 그가 보여준 광범위한 제

접 교화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어느 날 나옹이 다음 게송을 지공선사에게 지어 올렸다.

 

산과 물과 대지는 눈앞의 꽃이요

삼라만상도 또한 그러하도다

자성이 원래 청정한 줄 비로소 알았나니

티끌마다 세계마다 다 법왕의 몸이라네.10)

10) 覺宏錄,「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03중 면).

 

그러자 지공선사가 말하였다. “서천의 이십 명과 동토의 칠십 이명은 다 같은 사람인데

지공은 그 가운데 없다. 앞에는 사람이 없고 뒤에는 장군이 없다. 지공이 세상에 나왔는데

법왕이 또 어디 있는가?” 그러자 나옹이 답하였다.

 

법왕의 몸이여, 법왕의 몸이여

삼천의 주인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

천검(千劍)을 홀로 뽑아들고 불조(佛祖)를 베는데

백양이 모두 하늘을 두루 비춘다.11)

11) 覺宏錄,「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03중 면).

 

나는 지금 이 소식을 알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의 정력만 허비했네

신기하구나, 정말 신기하구나

부상의 해와 달이 서천을 비춘다.12)

12) 覺宏錄,「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03중하 면).

 

이에 지공선사가 “아버지도 개요, 어머니도 개며, 너도 바로 개다”라고 응수했다. 나옹은

곧 절하고 물러갔다. 여기서 등장하는 ‘천검’ 역시 지공의 가풍을 그대로 드러내는 징표라

할 수 있다. 흔히 검은 문자반야를 상징한다.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와 달리 문자반야의 검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이 휘두르는 문자(언어)의 검이 살인검

이냐 활인검이냐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나옹은 이미 평산과의 첫 만남에서 살활(殺活)

이 자재한 자신의 검풍13)을 과시한 바 있었다. 그 검풍은 지공의 가풍으로부터 영향받은 것

으로 보인다.

13) 懶翁은 이외에도 ‘三尺의 吹毛劍’(중국 강남 古潭선사와의 和答偈), ‘吹毛劍’과 ‘王寶劍’ 등 곳에서
    검풍을 드날리고 있다.

 

‘지공은 매일 천검을 쓴다’(日用千劒)나, ‘천검을 준다’(給千劒)나, ‘천검을 홀로 뽑아들고’

(千劒單提)는 표현에서처럼 나옹이 쓰는 천검의 가풍이나 지공이 쓰는 천검의 가풍은 모두

문자반야의 가풍이며 선가의 보편적인 살림살이가 된다. 지공이 자유자재 쓰는 일용가풍에

서 그의 검선풍(劒禪風)이 그 본분사(本分事)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14) 나옹은 지공의 검풍

을 철저히 자기화 하여 자신의 가풍으로 활용하고 있다.

14) 徐宗梵, 앞의 글, 앞의 책, 1151면.

 

뒤이어 나옹은 평산 처림을 찾아가 임제선의 ‘할풍’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나옹

은 인도 지공의 검풍과 중국 평산의 할풍의 화쟁과 회통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가풍으로 새

롭게 형성해 가게 된다. 그것은 검풍과 할풍을 아우른 무심선의 가풍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

옹의 무심과 보제의 화두는 조견의 논리를 매개항으로 하여 보다 분명한 체계를 확보하게

된다.

 

나옹을 만난 평산은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나옹은 “서천의 지공화

상을 보았는데, 그분은 날마다 천검(千劍)을 썼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평산은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 오라”고 하였다. 나옹이 대뜸 좌복으로 평산화상

을 후려쳤다. 화상은 선상 위에 거꾸러지면서 크게 외쳤다.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인다!” 나

옹은 곧 화상을 붙들어 일으켜 주면서 말하기를 “제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나옹의 일검은 죽임과 살림이 자재한 ‘검풍’이 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검품은 더 이상 지공의 가풍이 아니라 나옹의 가풍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평산화상은 ‘하하’ 크게 웃고는 곧 나옹의 손을 잡고 방장실로 돌아가 차를 권했다. 반년

가까이 그곳에 머무르다 나옹은 평산으로부터 법의 한 벌과 불자 하나를 전수받았다.

 

법의와 불자를 지금 맡기노니

돌 가운데서 집어낸 티 없는 옥일러라

계율의 뿌리 깨끗해 깨달음 얻었고

선정과 지혜의 광명을 모두 갖추었네.15)

15) 覺宏錄, 앞의 글, 앞의 책, 704하 면.

 

이 게송은 나옹이 확보한 계정혜 삼학의 일체화를 보여주고 있다. 나옹의 삼학 인식은 시

간적 간격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삼학은 그야말로 동시에 확보되는 것이다. 평산

의 할풍은 임제선풍을 이은 것으로 보이지만 두드러진 특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여기서

평산의 가풍을 임제선의 ‘할풍’이라고 명명한 것은 그가 임제정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이

다. 임제의 가풍은 ‘할풍’이 상징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래 게송은 평

산의 가풍이 살활(殺活) 자재의 가풍으로 무위진인(無位眞人), 수처작주(隨處作住)를 강조한

임제에 그 맥을 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산의 처소에서 반년을 머무른 뒤 헤어질 때 평산은 다시 게송을 지어 주었다.

 

회암(檜巖)의 판수(板首)가 운문을 꾸짖고

백만의 인천(人天)을 한 입에 삼켰네

다시 밝은 스승을 찾아 참구한 뒤에

집에 돌아가 하는 설법은 성낸 우뢰가 달리듯 하리.16)

16) 覺宏錄, 앞의 글, 앞의 책, 705상 면.

 

중원에서 법거량에 나선 나옹의 가풍은 중국의 선사들을 압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게송은 운문을 꾸짖고 백만의 인천을 한 입에 삼킬 정도로 날카로웠던 나옹의 가풍을 그대

로 보여준다. 마치 성낸 우뢰가 달리듯 하는 나옹의 살림살이는 중국 천하를 주유하면서 만

난 많은 선사들과의 법거량에서 돋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임제선의 가품은 뒷

날 자신의 살림살이 속에서 화쟁하고 회통되어 무심의 가풍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에서 확인

된다.

 

이어 나옹은 법원사로 되돌아와 지공을 만나 법의 한 벌과 불자 하나와 범어로 쓴 편지

한 통을 전수받았다. 지공은 나옹에게 전법게를 내려 주었다.

 

백양(百陽)에서 차 마시고 정안(正安)에서 과자 먹으니

해마다 어둡지 않은 한결같은 약이네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종지 밝힌 법왕에게 천검(千劒)을 준다.17)

17) 覺宏錄, 앞의 글, 앞의 책, 705중하 면.

 

나옹은 스승 지공으로부터 종지를 밝힌 법왕으로 인가받았다. 이 게송은 “나를 대신하여

교화하도록 천검을 준다”는 전법게였던 것이다. 그 역시 지공으로부터 천검을 건네 받고 게

송으로 화답하였다.

 

스승님 차를 받들어 마시고

일어나 세 번 절하니

다만 이 참다운 소식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18)

18) 覺宏錄, 앞의 글, 앞의 책, 705하 면.

 

이 게송은 첫 만남에서 보았던 스승의 천검이나 이후 자신이 건네 받은 천검이 예나 지금

이나 자신의 가풍 속에서 변함없이 일검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한 소식이다. 나옹은 지

공 곁에서 한달 간 머물다 하직하고 다시 여러 해 동안 산천 곳곳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의

높은 도행(道行)이 황실의 황제에게까지 전해지자 원황제는 명을 내려 그를 광제선사에 머

물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개당법회를 열었다. 거기에서 황제가 내린 가사를 받아들고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어깨에다 입혀야 됨’을 설파한 뒤 이제 자신의 몸과 하나된 검풍을 보여

준다.

 

“날카로운 칼을 온통 들어 바른 명령을 행할 것이니, 어름어름하면 목숨을 잃는다. 이 칼

날에 맞설 이가 있는가, 있는가, 있는가. 돛대 하나에 바람을 타고 바다를 지나가노니, 여기

서는 배 탄 사람을 만나지 못하리라.”19) 이제 지공의 검풍이 아니라 나옹의 검풍이다. 날카

로운 칼 앞에서는 어름어름 할 수가 없다. 이 칼 앞에 맞설려면 또렷 또렷(惺惺)하고 고요

고요(寂寂)하게 깨어있어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순식간에 모가지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

다.

19) 覺璉錄,「懶翁禪師語錄」(「韓佛全」제6책, 712상 면).

 

고려로 돌아오기 전 세 번 째 지공과의 만남을 가졌다. 나옹은 자신이 어느 곳에 머물러

야 되느냐고 물었다. 기공은 “본국으로 돌아가 세 봉오리(三山)와 두 물줄기 사이(兩水間)에

머무른다면 불법이 자연히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삼산양수간’은 지공의 마지막 전언이

자 뒷날 나옹의 역정이 정해지는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삼산’은 삼각산을 가리

키고 ‘양수’는 한강 및 장단(한탄강 혹은 임진강) 사이에 있는 양주 회암사를 가리킨다. 지공

의 곁을 하직하고 나온 나옹은 요양으로 돌아와 평양과 동해 등 여러 곳에서 인연 따라 설

법하였다.

 

나옹의 제자 무학은 뒷날 나옹영찬 (懶翁影讚)을 이렇게 지어 지공과 평산의 가품을 명

료하게 정리했다.

 

지공의 천검(千劒)과 평산의 할(喝)이여

공부를 선택함은 어전에서 있었도다.

최후의 신령스런 빛으로 사리를 남기니

삼한의 조실로서 만년을 전하도다.20)

20) 無學自超, 檜巖寺妙嚴尊者塔碑,「朝鮮金石總覽」권下(아세아문화사,1975), 1280면. “指空千劒平山
    喝, 選擇工夫對御前, 最後神光遺舍利, 三韓祖室萬年傳.”

 

이 영찬 은 인도 지공선의 검풍과 중국 평산선의 할풍이 화쟁하고 회통하여 나옹의 살림

살이 속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한의 조실로서 만년을 전한다는 구절은

그의 진신으로부터 나온 최후의 신령스런 빛인 사리를 통해 많은 덕화가 있을 것을 예견하

고 있다. 하여튼 약 11년간(1347~1358)의 원나라 생활은 그의 기량을 키웠고 두 고승으로부

터 ‘검풍’과 ‘할풍’을 전수받아 자신의 무심 가풍으로 화회시키고 있다.

 

원으로부터 고려로 귀국길에 올라 평양 등의 지역에서 설법을 하다가 공민왕의 간곡한 요

청으로 신광사에 한동안 주석하였다.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한 끝에 신광사 주지를 물러난

뒤 용문산과 원적산 등의 여러 산을 오갔다. 1367년에는 왕명에 의해 청평사 주석하였으나

1369년에는 다시 건강상의 구실을 대고 사퇴하였다. 이처럼 수도 개경과 왕과 일정한 거리

를 유지하면서 인연에 따라 제접하고 교화를 계속하였다.

 

1370년 9월 16일에 광명사에 개설된 공부선의 주맹이 되어 공부선대회를 몸소 주재하였

다. 공민왕까지 임석한 자리에서 1) 공부선 16일 법어를 하였으며, 2) 공부선 입문 삼구와

3) 공부선 삼전어와 4) 공부선 17일 법어와 5) 공부십절목을 세워 주재하였으나 다른 사람

들은 모두 대답을 못하고 오직 환암 혼수만이 이들 관문을 통과하여 공부선에 입격(入格)되

었다. 그의 공부선 주맹은 스러져가는 공부선의 법도를 다시 세움으로써 이후 불교의 디딤

돌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나옹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태고와 달리 개성 정

계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던 그의 처신과도 관련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왕명을 사양하

다 마지못해 잠시 신광사 주지를 맡았으나 이내 그만두고 다시 산 속으로 되돌아간 모습에

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뒤에 다시 회암사 주지를 맡아 스승 지공의 뜻을 실현함에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하여튼 지공의 검풍과 평산의 할풍은 나옹의 무심선

풍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당장 즉각적으로 발휘되는 돈오무심(頓悟無心)에서 솟아나

오는 몸짓들인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사상적 몸체인 무심의 살림살이에 대해 살펴보자.

 

3. 無心禪의 살림살이

 

불교사상사는 말 그대로 마음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불교사상가들은 이 마음을 자

신의 가풍 속에서 저마다 다른 개념과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 기호를 추적해

보면 그들의 사상적 의단 내지 학문적 화두가 선명해진다. 이들 마음의 기호가 해당 사상가

들의 저작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어 가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불교라는 날줄의 줄기에서 씨줄

의 가지가 어떻게 벋어가는가를 탐색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한 나무의 줄기

와 가지를 온전히 바라보게 되고 나아가 나무와 나무가 모여 이루는 숲도 전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옹은 마음에 대해 ‘여러분 각자에게 있는 것’이며 ‘자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인공’이

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또 늘 눈앞에 있건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

리지 않으며, 마음을 먹고 찾되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멀러지고 마는 것이라 했다. 나아가

 

하늘과 땅을 비추고 예와 지금을 비추되 털끝만큼도 숨김이 없고 털끝만큼도 걸림이 없으

며, 모든 부처와 조사들의 경계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써도 써도 다하지 않는 본래 가진 물

건‘이라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문맥에 따라 불성, 진여, 여래장 등으로 변주된다.

뿐만 아니라 ‘본래면목’(本來面目)21)22)23), ‘본지풍광’(本地風光)24)25), ‘큰 신령한 구슬’(大神

珠)26), ‘마니구슬’(摩尼; 靈珠)27), ‘어머니 뱃 속에서 갓 나온 면목’(父母所生底面目28); 娘生

面29)), ‘밝고 신령한 이 한 점’(一點靈明30)31)32)33)34)), ‘밝고 텅 빈 한 점’(一點虛明)35),

‘텅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것’(空寂靈知)36), ‘텅 비고 밝고 신령하고 묘한, 조작 없이 그

대로인 그것’(虛明靈妙, 天然無作者)37), ‘본래의 일’(本有之事)38) 등으로도 언표된다. 이들 모

두는 불성 내지 진여본성 혹은 돈오무심을 가리키는 언어들이다.

21) 覺璉錄, 除夜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4중 면).
22) 覺璉錄, 廻向,「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8중 면).
23) 覺璉錄, 趙尙書請對靈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20중 면).
24) 覺璉錄, 國行水陸齋起始六道普說,「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8상 면).
25) 覺璉錄, 趙尙書請對靈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20중 면).
26) 覺雷錄, 警世外覓者二首,「懶翁和尙歌頌」(「韓佛全」제6책, 744하 면).
27) 覺雷錄, 翫珠歌,「懶翁和尙歌頌(「韓佛全」제6책 730상 면).
28) 覺璉錄, 廻向,「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8중 면).
29) 覺雷錄, 紹禪自求偈,「懶翁和尙歌頌」(「韓佛全」제6책 718중 면).
30) 覺璉錄, 張相國請對靈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7하 면).
31) 覺璉錄, 國行水陸齋起始六道普說,「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8상 면).
32) 覺璉錄, 爲二僧下火,「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27중 면).
33) 覺璉錄, 長興寺願堂主請六道普說,「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20하 면).
34) 覺璉錄, 崔尙書請對靈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 제6책 720상 면).
35) 覺璉錄, 趙尙書請對靈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20중 면).
36) 覺璉錄, 示覺悟禪人,「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27상 면).
37) 覺璉錄, 趙尙書請對靈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9중 면).
38) 覺璉錄, 示知申事廉興邦,「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26중하 면).

 

돈오는 ‘당사자가 그 자리에서 당장 깨닫는’ 것이며 그 대상은 바로 무심이자 불성이며 진

여본성이라 할 수 있다. 여타의 선사들이 그 자리를 각기 달리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로 통하고 있다. 나옹은 자신의 사상적 기호를 지공의 ‘검풍’과 평산의 ‘할풍’을 원융회

통하여 ‘무심’의 기호로 확립하고 있다.

 

1) 무심의 구조

불교의 유수한 사상가들은 자신의 사상적 키워드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그 기호를 통해

자신의 사상적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때문에 그의 사상적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모색해 가는 키워드를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다. 그 벼리(綱)가 되는 기호를 잡아당기면 그물

(網)과 조목(目)과 추(錐)들이 쭉 딸려 나온다. 그러므로 벼리와 그물과 조목과 추가 온전히

만날 때 비로소 한 사상가의 사상적 지형도는 그려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한 사상가의 철

학적 지형도이며 사상의 인드라망이라 할 수 있다.

 

나옹 앞시대를 거슬러보면 원효의 일심, 지눌의 진심, 태고의 자심이 그런 기호였다. 그리

고 뒷시대를 더듬어보면 휴정의 선심(禪心), 경허의 조심(照心), 만해의 유심(惟心) 등이 그

러한 코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상가들의 핵심 기호를 곧장 잡아당기면 그들이 모색했

던 사상적 개념과 범주가 딸려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 기호는 그들의 인식틀을 확

 

보하는 핵심 기호가 된다. 동시에 개별 서까래들을 맞물고 있는 대들보라 할 수 있다. 그러

므로 그의 사상적 집 속에서 이 대들보의 개념을 어떻게 적출해 내느냐가 관건이 된다.

 

화두는 본래 둘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불교의 지향이 그러하듯이 그 하나는 두 측면의 속

성을 지니고 있다. 몸체(體)와 몸짓(用)의 논리를 적용하면 하나의 화두는 두 갈래의 공능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두 공능 사이에는 반드시 매개항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 매개항

이 몸체와 몸짓을 통합하고 전개하기 때문이다. 원효의 ‘화회’, 지눌의 ‘반조’, 태고의 ‘반관’

이 그러하고, 휴정의 ‘회통’, 경허의 ‘조료’ 등은 모두 몸체와 몸짓을 매개하는 기제가 된다.

 

나옹 화두의 몸체와 몸짓이 되는 ‘무심’과 ‘이생’을 매개하는 기호 역시 존재한다. 논자는

‘조견면목’에서 따온 ‘조견’의 기호가 나옹 화두의 두 측면을 실현하는 기제가 된다고 파악한

다.

 

┌───┬───┬─────┬─────┬─────┐

│ 시대  │ 인물 │ 화두(體)   │ 매개항    │ 화두(用)  │

╞═══╬═══╬═════╬═════╬═════╡

│ 신라  │ 元曉 │ 歸一心源  │ 和諍會通  │ 饒益衆生 │

├───┼───┼─────┼─────┼─────┤

│ 고려  │ 知訥 │ 二門眞心  │ 廻光返照  │ 禪敎一元 │

├───┼───┼─────┼─────┼─────┤

│ 고려  │ 太古 │ 直指自心  │ 返觀參思  │ 須參決擇 │

├───┼───┼─────┼─────┼─────┤

│ 고려  │ 懶翁 │ 無心可用  │ 照見面目  │ 利益衆生 │

└───┴───┴─────┴─────┴─────┘

 

나옹의 어록과 행장 등이 소략하여 그의 전모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많

지 않은 저작 속에서나마 사상적 코드를 추출해 낼 수밖에 없다. 불교사상사를 마음의 역사

로 전제할 때 마음의 기호를 적출해 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초목 영과의 대화에서 보인

‘무심’이라는 기호가 적절할 것이다. 이미 지공의 가풍이기도 했던 ‘무심’의 기호를 전수 받

았던 나옹이었다. 때문에 고목(枯木) 영(榮)과의 대화에서 그는 ‘무심가용’(無心可用)을 통해

자신의 가풍을 드러내었다.

 

고목 영 선사를 찾아가서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더니 고목이 물었다.

“수좌는 좌선할 때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

“쓸 마음이 없소.”(無心可用)

“쓸 마음이 없다면(無心可用) 평소에 무엇이 그대를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가?”

나옹이 눈을 치껴 뜨고 바라보니 고목선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부모가 낳아준 그 눈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무엇으로 보는가?”

나옹은 ‘악!’하고 할(喝)을 한 번 하고는 “어떤 것을 낳아준 뒤 다 낳아주기 전이다 하는가?” 하니

고목선사는 곧 나옹의 손을 잡고, “고려가 바다 건너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하였다. 나옹은 소매를

떨치고 나와버렸다.39)

39) 覺宏錄, 앞의 글, 앞의 책, 705상 면.

 

나옹이 말한 ‘무심가용’의 표현처럼 ‘무심’은 조사선 내지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흔히 ‘돈오무심’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깨달으면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

는 것이다. 진심(眞心40))으로도 표현되는 ‘무심’은 안다와 모른다, 있다와 없다, 쓴다와 쓰지

않는다 등등의 이항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운 지평이다. 모든 분별을 넘어선 마음이며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다. 이러한 무심은 인도에서 온 지공의 가풍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40) 覺璉錄, 入寂之辰四篇,「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7상 면).

 

2) 照見의 논리

화두의 몸체와 몸짓을 화회시키는 매개항은 화두의 두 측면을 다 살리는 기제가 된다. 나

옹에게 있어 ‘무심가용’과 ‘이익중생’을 가능케 하는 기제는 조견 내지 반조의 기호가 된다.

조견이나 반조는 교법과 달리 선법에서 전용되는 용례이다. 교법은 어떠한 전제를 제기한

뒤에 그 쟁론을 하나씩 해소시켜가는 방법을 취한다. 하지만 선법은 쟁론 자체를 뿌리 뽑으

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교법과는 변별된다.

 

마치 “원효에 있어서 화쟁(和諍)의 논리가 그의 전 사상을 일관한 것이라면, 지눌에 있어

서는 반조의 논리가 그의 신해(信解) 전체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이 반조의 논리는 이미

제기되어 있는 쟁론을 보다 고차적인 입장에서 화해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걸음 더 파고

들어 쟁론무용의 밑바닥을 밝히려는 것”41)이라고 할 수 있다. 쟁론의 쓸모 없음의 기저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대목에 선법의 진면목이 있다.

41) 朴鍾鴻, “韓國思想史: 佛敎思想篇(서문당,1987, 8쇄), 180면.

 

교법에서는 쟁론을 뿌리 뽑기 위해서 먼저 쟁론이라는 무엇을 실체화 내지 대상화 해 놓

고 가기 마련이지만, 선법에서는 자신의 빛 내지 마음을 되비추어 봄으로써 문제 자체가 본

디 문제가 아니었음을 일깨워 준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논리 내지 논법이라고 명명하기 어

렵다. 그러나 선과 선학이 변별되듯이 교법의 방식을 빌어 선학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는 사

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논리 내지 방식이라는 부득이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나옹의 무심가용 즉 돈오무심은 지공의 검풍과 평산의 할풍이 화쟁하고 회통하면서 그 모

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빛을 되돌려 (본래의 면목을) 돌이켜 비춤’ 내지

‘비추어 봄’이라는 논리를 통해 무심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비추어 봄’이라는 것은 곧 ‘조

견(照見)한다’ 혹은 ‘반조(返照)한다’는 것이다. 나옹이 그의 저술에서 보여주고 있는 매개항

은 바로 이 조견42) 내지 ‘반조’43)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지눌이 쓰는 반조의 논리를 피해 여

기서 우리는 나옹의 매개항을 ‘조견’의 기호라고 명명할 수 있다.

42) 懶翁, 除夜小參,「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4중 면). “照見本來面目.”
43) 覺璉錄, 廻向,「懶翁和尙語錄」(「韓佛全」제6책, 718중 면). “無果廻光返照, 識得公主本來面目.”

 

┌──────╥───────────┐

│ 照見         ║ 本來面目                │

├──────╬───────────┤

│ 廻光返照    ║ 本來面目                │

 

└──────╨───────────┘

 

나옹은 승의공주의 영가천도를 위한 소참법문에서 “원수나 친한 이를 면하고 생사를 면하

여 고해를 건너려거든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아’ 주인공의 본래면목을 아는 것이 제일”이라

고 역설하고 있다. 자신의 본래면목을 알게 되면 원수와 친한 이의 분별을 넘어서고 생사를

면하고 고해를 건너게 되므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된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

가 바로 무심가용이며 즉각적으로 깨달았기에 이제 분별심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래면목에 대한 ‘어두움’이 결국 끝없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원

인임을 반추시켜 준다. 그래서 자신의 본성의 ‘빛을 돌이키어 비추어 보아’야만 그 윤회 고

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추어 본다’(照見, 返照)는 인식의 전환 내지 근원

적인 전회는 자신의 무심한 본성을 일깨우기 위한 기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 내지 매개항은 곧 이익중생의 실현으로 이어져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내는 구제의 길을 제시하게 된다.

 

3) 利行의 실현

나옹은 첫 득도사였던 요연선사와의 만남에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출가한다고

했다. 전법사였던 지공선사와의 만남에서는 ‘뒷사람을 위하여 (중국의 연도의 법원사까지)

왔다’고 했다. 처음 마을을 일으켰을 때나 깨달음을 얻고 전법을 받을 때나 이익중생은 일관

된 목표였다. 보살의 기치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인 것처럼 그 역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였고 중국으로 건너가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이익중생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대승보살행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나옹에게 내린 시호인 ‘보제’ 역시도 그의 이러한 행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 추정된다. ‘널

리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한다’는 뜻을 지닌 이 기호는 ‘이행’의 다른 표현이 된다. 그가 보여

준 생평은 선사로서의 풍모만이 아니다. 그는 가장 보편적인 문학적 형식이었던 가사를 지

어 불법을 보다 광범위하게 전하려 했고, 발원문을 지어 뭇삶들의 기원을 들어주려고 했다.

아울러 미타정토과 관음정토를 수용하여 널리 설법하였고, 지공으로부터 비롯된 밀교적 전

통도 수용하여 뒷날 많은 의식 및 의례 문의 문법을 확립시켰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모두 보다 많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무심가용의 가풍

을 이익중생으로 확립해가는 과정이었다. 무심가용과 이익중생을 매개하는 기제는 조견면목

이었다. 특히 ‘조견’의 기호는 그의 화두가 머금고 있는 몸체와 몸짓의 공능을 화회시켰다.

그리하여 무심가용-조견면목-이익중생으로 이어지는 역정은 그의 무심학의 얼개를 이루고

있다. 지공의 검풍과 평산의 할풍 역시 조견의 논리에 의해 무심선풍으로 화회되어 자신의

가풍으로 새롭게 확립되었다.

 

무심과 이생의 기호로 펼쳐지는 그의 무심선은 조견의 논리를 무심과 이생의 기호로 화회

되었고, 지공의 검풍과 평산의 할풍 역시 그의 무심선풍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따라서 무심

-조견-이생의 기호는 검풍과 할풍과 더불어 나옹의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주춧돌 내지 뼈대

라고 할 수 있다.

 

4. 보림: 정리와 과제

 

고려 말기의 혼란기를 살았던 나옹 혜근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태고와 백운과는 변별되는

가풍을 지녔다. 그는 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정계를 넘나들며 수행했던 태고와 왕권과

는 철저히 격리된 채 산속에서 수행했던 백운과는 또달리 왕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 산 속에서 수행을 하며 뭇사람들을 제접하고 교화했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11년간 유력하면서 평산과 지공에게 인가를 받고 검

풍과 할풍을 전수받아 자기의 무심선풍으로 확립시켰다. 그의 무심선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

고 돈오무심하는 가풍이었으며 이 두 측면을 조견의 논리를 통해 확보했다. 본래면목을 비

추어 본다는 조견은 어떠한 쟁론을 전제하고 진행하는 교법의 논리와 달리 그 쟁론의 쓸모

없음의 기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빛 내지 마음을 되비추어 봄으로써 궁극적

으로는 문제 자체가 본디 문제가 아니었음을 일깨워 주는 매개항이다.

 

나옹은 이러한 매개항을 통해 무심가용의 돈오무심의 도리를 확립했고, 이익중생의 가풍

을 실현했다. 이러한 가풍은 지공의 검풍과 평산의 할풍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내면

속에서 숙성시키고 발효시켜 무심선풍으로 꽃피워냄으로써 그는 여말 선초 이래 조선불교와

대한불교시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오랫동안 숙성되고 발효되었

으나 상대적으로 태고에 가려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말년의 나옹은 양주 회암사에서 자신의 무심선의 살림살이를 크게 열어 보였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했던 유자들에 의해 모함되어 왕명으로 유배지인 밀양 영원사로 떠나게 되었다.

뱃길로 떠나다 여주 신륵사에 멈춰 입적함으로써 그의 생평을 마쳤다. 행장의 기록에 나타

나 있는 것처럼 나옹의 입적 전후에 나타난 신비한 기연(神機)들 조차도 당대 백성들의 염

원과 그의 법력이 뒤섞여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역사성을 넘어 진실성을 확보하

려는 당대인들의 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옹은 선사로서의 면모를 마지막까지 유지하였다. 그러면서도 대중을 맞이해서는 정토사

상과 밀교사상까지도 원용하여 제접 교화하였다. 나아가서는 당시 가장 보편적인 문학적 형

식이었던 가사 양식을 빌어 서왕가 등의 노래를 지어 보급함으로써 보다 많은 대중들과 교

감의 길을 열어두었다. 때문에 그의 가풍은 선과 교와 밀행과 정토행까지를 수용하는 넉넉

한 살림살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말의 고승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 되고 있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이러한 나옹의 모습은 선적 가풍으로 지나치게 경사됨으로써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의 여지를 좁혔던 태고와는 크게 대비된다44)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가지산문을 상승한 태고와 사굴산문을 상승한 나옹의 가풍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이

들 산문의 두 가풍 내지 이들 두 사람의 사상적 경향이 이후 한국불교사의 흐름을 결정지었

다는 점에서 상당한 주목을 요하고 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이제 나옹의 사상적 키워드를

통해 그의 생각의 구조를 좀더 폭넓게 조망해야 하는 과제를 또 하나 떠 안게 되었다.

44) 拙論, 太古의 自心學: 몸체(體)의 심화와 몸짓(用)의 위축 ,「인물로 보는 한국의 불교사상」
 (예문서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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