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래(一来)에 대한 고찰
* 본 논문은 필자의 2007년도 박사학위 논문 「阿羅漢の研究」(京都:仏教大学)의 3장 3절 ‘一来果の成立問題について’를 골격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학위 논문과 비교해 보면, 내용상 구성의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학위논문에서 언급하지 못한 전거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분량 면에서도 배 이상으로 늘어나 단순한 학위논문의 자기 복제라는 허물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필 원 / 청주대학교 강사
목차
1. 문제제기
2. 일래의 개념형성
2.1. 니까-야에 나타난 일래의 개념
2.2. ‘imaṃ lokaṃ’을 통해 살펴본 일래의 의미
3. 일래(一来)와 일종(ekabījin), 가가(kolaṃkola)와의 관계
4. 결론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성인의 계위를 나타내는 사과설 가운데 제2과에 해당하는 일래의 의미와 성립에 관해서 고찰하였다. 사과설은 달리 사향사과설, 혹은 사문사과설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의 단계를 네 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이 가운데 일래는 이 세상에 한 번만 돌아오면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다시는 윤회의 삶을 받지 않는 성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 일래 관념은 그 원형적 모습이 니까-야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다른 3과와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며, 불교 외 전통-특히 우빠니샤드-에서 들어온 관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일래를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하나는 일래를 설명하는 ‘sakid eva imaṃ lokaṃ’이라고 하는 술어의 의미에 주목한 것이고, 둘째는 빠-리 논서(특히 Ppk) 등에서 일래를 구분한 다섯 가지 범주에 대한 고찰이었다. 이를 통해서 ‘한 번만 돌아오는 자’라고 번역되는 일래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천착하였다.
아울러 일종과 가가라고 하는 성인의 계위를 일래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있는 일부 견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일래가 아닌 예류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1. 문제제기
불교의 목표는 깨달음을 성취하여 깨달은 이, 곧 붇다(Buddha)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불교이든 부파나 대승 혹은 선불교이든 차이가 없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들의 궁극적 목표는 붇다가 되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수행자가 죽기 전에 붇다, 즉 완전한 깨달음을 통해 생사윤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수행자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 현실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불교가 인도의 유력 종교로 대두되면서, 붇다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구하는 구도자들이 많이 생겨났음을 경전을 통해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출가자 못지않은 정진력으로 수행하는 재가자 역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 내부의 사정이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어떤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라는 점이 여러 선학들의 연구를 통해서 제기되었다.
그것은 곧, 깨달음을 진지하게 추구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행정진한 수행자-출가자든 재가자이든-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문제를 말한다. 이러한 문제제기가 사실상 초기 인도불교 내에서 제기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확실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로 말미암아 체계화된 것이 바로 사과설四果說 혹은 사향사과설四向四果說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자들의 계위를 나타낸 체계인 것이다. 이 체계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즉 아라한 과위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수행자들에 대한 배려와 재가자들에 대한 깨달음의 약속이 배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래는 사과설 가운데 제2과에 속하는 성자의 과위이다. 빠-리어로는 sakadāgāmin(Sk. sakṛdāgāmin)이고, 한역으로는 一來라고 하며 음사하여 斯多含이라고도 한다. 그 의미는 ‘한 번만 돌아오는 자’라고 하는 의미이다. ‘돌아오는’ 장소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사는 욕계(Kāma- dhātu)를 말한다.
사과四果는 주지하듯이, 아라한을 정점으로 하는 성자의 계위를 나타낸 시스템이다. 따라서 일래의 의미는 한 번만 인간계에 돌아와 수행하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일래는 많은 학자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불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라든가, 예류과로부터 아라한과까지를 연결 짓기 위해서 일부러 만들어 두 번째 계위로 삼았다고 하는 등의 평가가 그것이다. 즉 일래라고 하는 성자의 계위는 성자의 계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요구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평가이다.
특히 ‘一来について(일래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한 일본의 真野龍海(1972)의 경우, 우빠니샤드의 기술 내용을 조사한 결과, 일래는 불교 이전의 우빠니샤드에 등장하는 생천사상生天思想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일래의 의미와 성립문제를 둘러싼 종래의 연구를 검토하고, 니까-야에 나오는 일래의 개념 내용을 조사, 그 형성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일래와 일종一種, 가가家家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찰하고자 한다.
2. 일래의 개념형성
2.1. 니까-야에 나타난 일래의 개념
일래라고 하는 개념이 언제 형성되어서, 사향사과의 체계 속으로 들어갔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환과不還果라고 하는 개념이 형성된 후, 일래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것이 선학들의 연구 결과이다.1)
1) 藤田宏達(1959 : 469). 이들은 일래가 사과(四果) 가운데 가장 늦게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 왜 예류과預流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 사이에 일래 혹은 불환이라고 하는 계위가 필요했을까에 대해서는 三友健容(1979 : 66)의 주장이 눈길을 끈다. 그는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하여 번뇌가 남은 채로 목숨이 끝난 사람도 살아 있을 동안의 수행에 의해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기별(예언)의 필요성이 생기고, 더욱이 교단이 확장됨에 따라서 발심 후, 바로 생명이 다하는 자, 도중에 물러나는 자, 근기가 둔한 자, 혹은 재가자에 대한 배려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이들의 목숨이 끝났을 때의 기별 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이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아라한이 되기 전에, 사망한 수행자 혹은 재가자에 대한 배려로써 불환과 일래가 고안되었기 때문에, 사과四果 가운데 특히 이질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다2)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은 예류와 아라한을 제외한 두 과果는 결국 아라한과를 얻지 못하고 생을 다하는 수행자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출가 수행자 못지않게 열심히 수행에 전념한 재가자에 대한 배려로서 설정된 과위果位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3)
2) 真野龍海(1972 : 347)
3) 예류 역시 아라한과를 얻지 못하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일래와 불환과는 발상에서 차이가 난다.
즉 예류란 발상은 삼계-욕계・색계・무색계-에 근거하지 않지만, 일래와 불환은 삼계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藤田宏達(1959)와 真野龍海(1972)의 논문이 이 점에 잘 지적하고 있다.
일래의 원어에 대해서 真野龍海(1972)는 우빠니샤드를 근거로 하여 “일一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래來 즉 ‘돌아온다’는 것에 방점이 있다.4)”고 한다. 이 견해를 염두에 두고 일래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4) 真野龍海(1972:344)는 Bṛhad 1.5.2에 나오는 “yad ahareva juhoti, tad ahaḥ punarmṛtyum
apajayati evaṃ vidvān”이라는 문장과 이 문장에 대한 주석에 주목하여, 일래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찾고 있다.
일래를 의미하는 sakadāgāmin은 sakid+āgāmin으로 되어 있는 복합어이다. 그 의미는 앞서 밝혔듯이 ‘한 번만 돌아오는 자’이다. sakid는 부사로써, ‘한 번만’이란 의미를 나타내고, āgāmin은 어근 ā√gam에서 파생된 말로, ‘돌아오는 자’라고 하는 의미이다. 따라서 sakid는 āgāmin을 형용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횟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빠니샤드와 같이, ‘오다來’에 의미의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후의 말은 거의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즉 이 복합어는 예류와 불환과는 달리, 앞의 말은 ‘횟수’를 뒤의 말은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횟수’를 강조한 것은 아마도 예류과의 B패턴5)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최대 7회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된다’라고 하는 ‘7회’를 ‘1회’로 단축하게 되면 일래가 된다.6)
5) 예류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A는 ‘세 가지 결박三結의 소멸로부터 예류가 되어
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② 결정된 자가 되고, ③ 최고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된다.’. B는 ‘세 가지 결박의 소멸로부터 최대 7회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된다.
최대 7회 천계와 인간계를 유전流轉하고, 윤회하고 나서 괴로움의 끝을 만든다.’ 본문에서
말하는 B패턴이란 후자를 말한다. (이필원 2008 : 50)
6) 三友健容(1979 : 66)는 ‘이 일래설은 극칠반유極七返有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즉 당시 사람들은 7을 하나의 단락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藤田宏達(1959 : 469)는 ‘일래[자]라는 것은 나중에 다룰 것이지만 극칠반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예류와 관련하면서, 불환에서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래에 관해서는 운문문헌으로써는 Udāna(이후 Ud)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Ud : 56~79에 걸쳐서 3번 확인되는데, 2회(p.56)는 사향사과의 항목을 열거할 때, 일래향一來向과 일래과一來果라는 표현이 보일 뿐으로, 마지막(p.79)은 우바이가 예류과・일래과・불환과를 얻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사향사과가 완전히 성립한 이후의 것으로, 결코 일래의 원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래의 경우, 다른 계위와 비교해 보면, 고층의 운문문헌 중에서 그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그 성립은 가장 마지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니까-야에서 일래는 어떻게 기술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아-난다여, 세상을 떠난 수닷따(Sudatta) 우바새는 삼결三結을 끊고, 탐진치를 엷게 하여 일래자가 되었다. 그는 오직 한 번만(sakid eva) 이 세상에 돌아오고 나서, 고통의 마지막을 만들 것이다.。
(SN.V, p.357)
Sudatto Ānanda upāsako kālakato tiṇṇaṃ saṃyojanānam parikkhayā rāga-dosa-
mohānaṃ tanuttā sakadāgāmī sakid eva imaṃ lokam āgantvā dukkhassantaṃ karissati
존자여, 세존은 다른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각각에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이 사람이 배운대로 따르면서 세 가지 결박三結을 끊고, 탐진치를 엷게 하여 일래자 될 것이다’ 라고. ‘[그리고] 그는 오직 한 번만 이 세상에 돌아오고 나서 고통의 마지막을 만들 것이다’라고.。
(DN.III, p.107)
jānāti bhante bhagavā para-puggalaṃ paccattaṃ yonisomanasikārā ayaṃ puggalo yathānusiññhaṃ
tathā paṭipajjamāno, tiṇṇaṃ samayojanānaṃ parikkhayā rāga-dosa-mohānaṃ tanuttā sakadāgamī
bhavissati / sakid eva imam lokaṃ āgantvā dukkhass' antaṃ karissatīti / 여기에서는 사과四果가
차제설법次第説法으로 설해지고 있다.
위의 용례는 일래자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여기에서 일래를 이해하기 위해서 주의해야할 점은 ‘sakid eva imaṃ lokaṃ’이라고 하는 구절이다. 즉 ‘sakid eva(오직 한 번만)’와 ‘imaṃ lokaṃ(이 세상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일래를 이해하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imaṃ loka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선 ‘이 세계에(lokaṃ)’라고 하는 표현 중 ‘세계’는 어느 세계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설하고 있는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래인 사람은 도솔천에 몸을 나타냈다. (AN.III, p.348;AN.V, p.138)
sakadāgāmī satto Tusitaṃ kāyaṃ upapanno.
이 용례에 의하면, 일래자는 사후에 도솔천이라고 하는 하늘나라에 태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용례에는 도솔천에 태어나서 그 후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즉 도솔천에 태어나서, 거기에서 아라한이 되는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서 다시 죽어서 인간 세상에 돌아오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도솔천Tusita라고 하는 표현을 통해서 일래자가 태어나는 세계에 대해서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도솔천은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욕계Kāmadhātu에 속하는 하늘나라이다. 따라서 일래자가 태어나는 세계는 욕계부터 가능하다는 것이 되며, 반드시 인간세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니까-야에서 이 이상의 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므로, 니까-야 보다는 시대가 조금 늦은, 주석서와 빠-리 논서 등의 내용을 참조하면서, ‘imaṃ lokaṃ’의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 보도록 한다.
2.2. ‘imaṃ lokaṃ’을 통해 살펴본 일래의 의미
‘imaṃ lokaṃ’은 일래과를 얻은 사람이 사후에 가는 장소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을 해석하면 ‘이 세상에’라고 하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그렇다고 하면 일래의 의미를 살펴보는데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10)
10) 레디 사야도(Ledi Sayadaw)역시 일래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서 imaṃ lokaṃ이라고
하는 표현에 주목하고 있다. Bhikkhu Bodhi(1993 : 361) 참조.
그 이유는 일래자는 불교의 두 번째 계위에 해당하는 성자이긴 하지만, 생사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imaṃ lokaṃ’인 것이다. 그런데 일래자의 경우는 앞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한 번만 윤회를 하면 아라한과를 얻어 다시는 생사 윤회를 받지 않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일래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서, 일래자가 사후에 다시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는 장소가 문제시 되는 것이다.11)
11) 三友健容(1979 : 63)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류도 아라한도 현세에서의 상태임에 반해,
일래과・불환과는 사후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예류 혹은 아라한이 된 수행자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몸을 받는 것으로 설해지고 있다. 예류의 경우(AN.I : 233, 235 등 ; Bhikkhu Bodhi,
1993 : 359) 아라한과를 얻어 마지막 몸을 받는 장소는 인간계로 한정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아라한과를 얻은 수행자의 경우는 당연히 이 세상이 마지막 몸을 받는 장소임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편 예류과를 얻은 사람의 사후에는 두 가지 패턴으로 그 모습을 읽어낼 수가 있다. 즉 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② 최대 7회 하늘나라와 인간세계를 유전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예류과를 얻은 사람은 이른바 인간 세계와 하늘나라를 윤회하면서 수행을 거듭하여 아라한이 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불환과를 얻은 사람은 욕계欲界, 즉 욕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세계(인간계를 포함하는) 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적어도 색계色界 이상의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12) 아라한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존재임으로 사후의 상태가 문제시되지 않는다.
12) SN. I : 35에는 “해탈한 7 명의 비구들이 무번천無煩天(avihā)에 태어났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리고 SN. I : 149에는 브라흐만 Tudu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브라흐만 뚜두는 붇다에 의해서
anāgāmī, 즉 불환자가 되었다고 선언된 수행자로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으로부터
불환자는 적어도 색계이상의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환과를 얻은
사람의 사후 문제는 본 논문의 주제가 아님으로 더 이상의 자세한 고찰한 생략한다.
이러한 삼과三果의 사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선 MN의 주석서인 Papañcasūdanī에 나오는 5종류의 일래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오직 한 번만 이 세상에 돌아오고 나서’란 1회만 이 인간세계에 재생의 힘에 의해서 돌아오고 나서[란 의미이다]. ① 어떤 자는 여기에서 일래과(sakadāgāmimagga)가 되어서, 바로 여기에서 반열반한다. 그는 비록 여기에서 [반열반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② 여기에서 [일래]과가 되어서, 모든 신들 가운데 태어나서 거기에서 반열반한다. ③ 어떤 자는 신의 세계에서 [일래]과가 되어서, 거기에서 반열반한다. ④ 어떤 자는 신의 세계에서 [일래]과가 되어서, 인간 세계에 태어나서 [인간세계에서] 반열반한다. ⑤ 어떤 자는 여기에서 [일래]과가 되어서, 신의 세계에서 태어난다. 그곳에서 수명이 [있는] 동안 존재하고, 다시 여기에 태어나서 반열반한다." (Ps.I, p.163)
Sakid eva imaṃ lokaṃ āgantvā ti ekavāraṃ yeva imaṃ manussalokaṃ paṭisandhivasena āgantvā. Yo pi
hi idha sakadāgāmimaggaṃ bhāvetvā idh’ eva parinibbāti, so pi idha na gahito, yo pi idha maggaṃ
bhāvetvā devesu uppajjitvā tatth’ eva parinibbāti, yo pi devaloke maggaṃ bhāvetvā tatth’ eva
parinibbāti, yo pi devaloke maggaṃ bhāvetvā idha manussaloke nibbattitvā parinibbāti. Yo pana idha
maggaṃ bhāvetvā devaloke nibbatto, tattha yāvatāyukaṃ ṭhatvā puna idh’ eva uppajjitvā parinibbāti.
여기에서 sakadāgāmimagga란 표현은 ‘일래향一来向’이 아니라 ‘일래과一来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반열반에 들어가는 사람은 ‘일래의 과위를 성취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一来向者’가 아니라 ‘일래의
과위를 이미 성취한 자一来果者’이기 때문이다.
또, Puggala-Paññatti (이하, Pp)의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sakid-eva란 오직 1회만[이라는 의미이다]. 이 세계에 돌아오고 나서(imaṃ lokaṃ āgantvā)란 이것에 의해서 다섯 가지의 일래자 가운데 네 가지가 회피되고, 한 가지가 취해진다[라는 의미이다]. ①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일래과를 얻어서, 여기에서 반열반한다. ②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일래과를] 얻고, 신의 세계에서 반열반한다. ③ 어떤 사람은 신의 세계에서 [일래과를] 얻고, 거기에서 반열반한다. ④ 어떤 사람은 신의 세계에서 [일래과를] 얻고, 여기에 태어나서, 반열반한다. 이들 네 가지는 여기에서 취하지 않는다. ⑤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일래과를] 얻고, 신의 세계에서 수명이 [있는] 한 존재하고, 다시 여기에 태어나서, 반열반하다."
(Ppk.I, pp.97~198.)
Sakid-evāti ekavāraṃ yeva. Imaṇ lokaṃ āgantvā ti iminā pañcasu sakadāgāmīsu cattāro vajjetvā eko
va gahito. Ekacco hi idha sakadāgāmiphalaṃ patvā idh’ eva parinibbāti, ekacco idha patvā devaloke
parinibbāti, ekacco devaloke patvā tatth’ eva parinibbāti, ekacco devaloke patvā idhūpapajjitvā
parinibbāti. Ime cattāro pi idha na gahitā. Yo pana idha patvā devaloke yāvatāyukaṃ vasitvā puna
idhūpapajjitvā parinibbāyati, ayaṃ eko va idha gahito ti veditabbo.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M은 인간계, D는 천계를 의미)
일래가 되는 장소 반열반하는 장소
① M M
② M D
③ D D
④ D M
⑤ M D(중간단계로서) M
Ps.와 Ppk에 나오는 다섯 종류의 일래 가운데 다섯 번째의 일래만이 두 번의 생을 받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일래가 되는 장소는 인간계일수도 있고 천계일 수도 있으며, 반열반 하는 장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Ppk.의 설명을 보면, 다섯 번째 일래를 제외한 네 가지 일래의 형태는 회피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오직 ‘imaṃ lokaṃ āgantvā(이 세상에 돌아오고 나서)’에 해당하는 일래는 다섯 번째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래의 ‘일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하나의 전제를 확인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즉 M → D(혹은 M)를 한 번으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M → D → M을 한 번으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제 3의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이다. 15) 여기서 우리의 관점은 M에 두어야 한다. 즉 어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일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면, 그 수행자는 우리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일래가 되는 것은 논외로 하자는 것이다.16)
15) 레디 사야도(Bhikkhu Bodhi, 1993 : 361)는 일래자가 돌아오는 imaṃ lokaṃ에 대한 주석서들에
나타난 두 가지 설명이 서로 상충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첫째는 인간계로 돌아온다는 것이고, 둘째는
범천에서 욕계로 돌아온다는 설명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설명 방식을 달리 표현하면 ‘색계천에서
욕계로 돌아온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욕계는 다시 욕계의 하늘나라와 인간계로 설명될 수 있다.
욕계의 다른 형식은 일래자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본문의 Ps.와 Ppk.의 분류에
적용하면 세 번째와 네 번째 일래자의 형식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16) D → D(or M)의 형식은 논외로 한다는 것이지만, 하늘나라에서 일래가 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중심으로 일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의미이다.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경전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될 것이다. 위에서 두 가지는 모두 논서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근거로서 Anguttara-Nikāya의 경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비구들이여, 나에 대해서 완벽[한 신뢰]를 얻은 사람은 누구라도, 그들은 모두 견(見)을 구족한다. 견을 구족한 그들 다섯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완벽함(아라한성)이 [획득된다]. [한편] 다섯 종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몸을] 버리고 완벽함(아라한성)이 [획득된다]. 이 세상에서 완벽함(아라한성)이 [획득되는] 이들 다섯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극칠반생(極七返生), 가가(家家), 일종(一種), 일래(一来), 그리고 현세에서 아라한이 되는 자, 이들 다섯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완벽함(아라한성)이 [획득된다].(AN.V, pp.19~120)
Ye keci bhikkhave mayi niṭṭhaṃ gatā, sabbe te diṭṭhisampannā, tesaṃ diṭṭhisampannānaṃ pañcannaṃ
idha niṭṭhā, pañcannaṃ idha vihāya niṭṭhā, katamesaṃ pañcannaṃ idha niṭṭhā? sattakkhattuparamassa
kolaṅkolassa ekabījissa sakadāgāmissa, yo ca diṭṭheva dhamme arahā, imesaṃ pañcannaṃ idha
niṭṭhā,
위 용례에 나오는 ‘이 세상에서’의 원어는 ‘idha’이다. 이 ‘idha’는 문맥상 ‘imaṃ lokaṃ’과 같은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환자를 제외한 모든 성인들이 아라한성을 획득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idha, 즉 인간세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태어남을 이 세상에서(idha) 맞이하는 사람들은 불환을 제외한 수행자들이다.
따라서 일래가 되는 것과 반열반에 드는 장소로는 ‘idha’, 즉 바로 ‘인간세계’로 설정하는 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보다 가까운 해석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①과 ⑤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①과 ⑤는 윤회의 횟수에서 차이가 난다. ①은 말 그대로 한 번이요, ⑤는 두 번이 된다. 일래의 언어적 의미에 비추어 보면, 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Pp에서는 다섯 가지 가운데 오직 다섯 번째의 일래만을 취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왜 M → D → M이 일래의 본래적 형태로 제시된 것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真野龍海(1972 : 344)의 논문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우빠니샤드에 있는 ‘재사再死’(punar-mṛtyu)는 실질상, 일래에 통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고, 다시 그곳에서 죽어서, 즉 재사해서, 다시 한 번 인간계에 돌아오는 것을 어느 쪽(일래나 우빠니샤드의 재사-필자) 말이나 똑같이 의미하기 때문이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M → D → M이 불교의 일래나 우빠니샤드의 재사에 공통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idha) 돌아오고서(āgantvā)’라는 말에서 āgantvā가 의미하는 것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갔다 오다’란 의미가 될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죽어 천계로 갔다가, 다시 인간계로 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래의 과위를 얻은 자가 천계로 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천계가 욕계이든 색계이든 일래의 과위로서는 모두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해하면, Ppk에서 다섯 번째만을 일래의 의미로 취하고 나머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일래는 이 세상에서 일래가 된 후 천계에 태어나 살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와서 반열반한다는 것이 그 본래적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용례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면, 일래과를 얻은 수행자는 태어남은 2회-즉 천계와 인간계-이지만, 일래라고 명명된 이유는 일래가 된 후 반열반하기 위해 인간계에 태어나는 횟수가 1회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일래(一来)와 일종(ekabījin), 가가(kolaṃkola)와의 관계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래는 윤회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과설로 성자의 계위가 체계화된 내용은 아라한과를 제외하고는 윤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범부와 비교해 보면 윤회의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반드시 반열반이 약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구분된다.
성자의 계위를 이해하기 쉽게 표로 정리해 보도록 하자.
【표 1】사향사과의 전개
범부 ---------------------------------------- →아라한
예류향.예류. 일래향.일래. 불환향.불래. 아라한향
(예류 이상은 성인의 단계)
위의 표는 범부로부터 아라한에 이르는 과정을 사향사과의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범부 가운데 발심을 통해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순간 예류향이 된다.18) 그러나 예류향자는 성자가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자는 예류과를 획득한 수행자부터 시작된다.19)
18) 니까-야에 나타나는 예류의 古형태로 여겨지는 사예류지四預流支의 설명을 보면, 삼보에 대한 불괴의
믿음(aveccappasāda)을 구족하는 것만으로 지옥・축생・아귀의 소멸로부터 예류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된다(SN.II, p.69~70 ; SN.V, p.343, 396~398)고 한다. 물론 예류향이란 개념이
이 때에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어떤 상태를 예류향으로 보아야 할지는 의문이지만, 굳이
예류향을 말해 본다면 삼보에 대한 불괴의 믿음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구사론」을 비롯한 논서의 이해와는 다르기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니까-야에 한정해서 이러한 견해를 적용하고자 한다.
19) 사향사과설은 사과설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藤田宏達(1959 : 77 note 1)의 견해를
따르면, 본래 성자의 계위는 사과, 즉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만이다. 이들 네 부류의
수행자가 바로 성자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각 과를 지향하는 수행자를
‘向, paṭipanna’으로 설정한 것이기에, 예류향은 성자의 계위에 해당하지 않게 된다. 향과 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필원(2008 : 39~42)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 가운데 본 항목에서 다룰 일종一種과 가가家家는 예류과를 의미하는 또 다른 호칭으로서 알려져 있다.20)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일래과의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들을 일래과(사다함)로 보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水野弘元과 Nathan Katz이다.
20) 이필원(2008 : 54ff)
水野弘元(1997 : 150)은 “사다함斯陀含은 일래라고 말해지는 것처럼, 본래는 인간세계로의 윤회가 1회만 남아서, 지금 1회 윤회를 하면 반드시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성자를 가리키지만, 후대에는 3회 혹은 1회(3회를 삼생가가三生家家, 2회를 이생가가二生家家, 1회를 일종 혹은 일간一間이라고 한다) 인간계와 천계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여러 종류의 사다함이 설해지고...”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p.153(각주 5)에서는 “家家(kolaṃkola), 一種(ekabīja or ekavici, 一間), 七種不還 등의 말은 원시불교에서는 보이지 않으나,21) 부파불교에서는 설해지고 있는데, 빠-리불교에서도「인시설론人施設論」(Puggala-Paññatti)에 이 말이 나오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21)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 부분은 명확한 오류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AN와 SN에서 각각 일종과
가가에 대한 기술이 보인다.
또 Nathan Katz(1982 : 88)는 “일래과는 단지 한 번의 태어남이 남아 있다. 그 점에서 특별한 용어로서 ekavījī라고도 불린다.”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구사론倶舎論」의 내용을 보면, 가가는 일래향一来向으로, 일간(일종, ekavīci)는 불환향不還向으로 설명하고 있다.22) 따라서「구사론」의 설명은 水野弘元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 桜部健・小谷信千代(1999 : 224)
한편 니까-야에서는 삼결三結을 끊어서 일종, 혹은 가가가 된다고 설하고 있을 뿐으로,23) 일종과 가가를 예류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경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Anguttara-Nikāya에서 일종과 일래를 예류와 더불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상좌부 논서인 Puggala-Paññatti 에서는 일종과 가가를 예류과의 성자와 관련해서 명확히 정의하고 있다. 이들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한다.
23)AN.V, p.120 ; SN.V, p.205.
"그는 삼결을 끊고서 극칠반생이 된다. 최고로 일곱 번 천계와 인간계를 윤전하고서, 윤회하고서 고통의 끝을 만든다. 그는 삼결三結을 끊고서 가가家家가 된다. 두 번 혹은 세 번 좋은 가문을 유전하고서 윤회하고서 고통의 끝은 만든다. 그는 삼결을 끊고서 일종一種이 된다. 오직 한번 만 인간의 존재를 일으키고서 고통의 끝을 만든다. 그는 삼결을 끊고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엷음으로부터 일래자가 된다. 오직 한번만 이 세상에 오고서 고통의 끝을 만든다." (AN. I, p.233)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attakkhattuparamo hoti sattakkhattuparamaṃ deve ca mānuse ca
sandhāvitvā saṃsāritvā dukkhassa antaṃ karoti.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kolaṅkolo hoti
dve vā tīṇi vā kulāni sandhāvitvā saṃsāritvā dukkhassa antaṃ karoti.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hayā ekabījī hoti ekaṃ yeva mānusakaṃ bhavaṃ nibbattetvā dukkhassa antaṃ karoti. s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hayā rāgadosamohānaṃ tanuttā sakadāgāmī hoti sakid eva imaṃ lokaṃ āgantvā
dukkhassa antaṃ karoti.
"누가 가가家家(kolaṃkolo)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삼결三結을 끊고서, 예류과가 되어 악취悪趣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결정된 자가 되고, 최고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된다. 그는 2회, 혹은 3회 양가良家에 유전하고 윤회하여, 고통의 마지막을 짓는다. 이 사람이 가가家家(kolaṃkolo)라고 말해진다.
누가 일종一種(ekavījī)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삼결을 끊고서, 예류과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결정된 자가 되고, 최고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된다. 그는 오직 1회 인간의 존재를 일으켜서, 고통의 마지막을 짓는다. 이 사람이 일종一種(ekavījī)이라고 말해진다." (Pp, p.16)
Katamo ca puggalo kolaṅkolo? Idh’ ekacco puggalo tiṇṇaṃ saññ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ho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 : so dve vā tīṇi vā kulāni sandhāvitvā saṃsaritvā dukkhass’ antaṃ karoti : ayaṃ vuccati puggalo kolaṅkolo. 39. Katamo ca puggalo ekavījī? Idh’ ekacco puggalo
tiṇṇaṃ saññ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ho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 : so
etaṃ yeva mānussakaṃ bhavaṃ nibbattetvā dukkhass’ antaṃ karoti : ayaṃ vuccati puggalo ekabījī.
이상과 같이, AN와 Pp에서는 일종과 가가가 모두 삼결을 끊고서 성취되는 과위果位로 기술되어 있다.26) 다만 윤회하는 횟수가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위의 【표 1】에 적용해서 보면, 일종과 가가는 세 가지 번뇌(삼결)을 끊었기 때문에 예류과를 획득한 수행자임과 동시에 일래향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예류과와 일래과의 사이, 즉 일래향에 위치해야 함을 알 수 있다.
27) 그런데 이 두 문헌에서는 어떠한 이유로 윤회의 횟수가 달라지는 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26) Kv, p.241을 보더라도, 예류(sotaapanno), 극칠반생(sattakkhattu- pasamo), 가가, 일종은
공통적으로 붇다에 대한 불괴不壞의 믿음에 의해서(aveccappa- saadena) 성취됨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이들 네 부류의 수행자가 동일한 원인에 의함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7) 水野弘元(1997 : 150)이 어떠한 근거로 가가와 일종을 일래로 보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같은 책의
각주 5(p.153)에서 ?구사론?을 참조하라고 할 뿐이다. 水野弘元이 제시한 ?구사론?(T29 : 123c)의
가가와 일종에 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斷欲三四品 三二生家家 斷至五二向 斷六一來果” 즉
욕계의 번뇌 중 3품과 4품을 끊으면 3생가가, 2생가가가 되고, 욕계 번뇌의 5품을 끊으면 일래향이
되며, 6품을 끊게 되면 일래과가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구사론?을 보더라도, 水野弘元의 설은
부정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가를 일래의 이명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구사론」
(T29 : 124a)에서 일종(일간)을 불환향으로 기술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斷七或八品 一生
名一間 此即第三向 斷九不還果” 즉 욕계 번뇌 가운데 7품과 8품을 끊으면, 한 번의 생만을 받는
일간이 되고, 이는 곧 세 번째 향인 불환향이 된다는 것이다. 9품을 끊어야만 불환과가 된다.
이러한「구사론」의 입장은 본문의 빠-리 상좌부의 해석 전통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경우 일래과로 인정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일래과一來果의 정의와는 상충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28) 일종이 한 번의 윤회만을 통해 반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해도, 일종은 일래가 되기 위한 조건인 탐진치 삼독이 엷게 된다고 하는 기술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29)
28) 이러한 이유로 藤田宏達(1959)는 일래라고 하는 관념이 왜 형성되었는지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래라고 하는 발상이 단지 아라한이 삼독을 멸한 상태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아라한의 경지에 다가간다는 발상에 근거한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p.76)
사실 가가, 일종, 일래의 구분의 근거가 경전상에서도, 그리고 논서상에서도 명확하지 않은 것은
일래라고 하는 발상 자체에 합리적인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29) Nathan Katz(1982 : 88)는 AN. I, p.233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일래향(the magga of the sakadāgāmī)는
삼결(three fetters)을 완전히 끊고, 다 음의 두 가지인 욕탐(kāmarāgo)과 성냄(vyāpādo), 혹은 탐진치
(rāgadosamohā)에 대해서 현전한 진전이 있을 때 시작된다. 이 점에서 그는 최대 7번의 태어남이
있다고 말해진다. 일래과(the fruition of the sakadāgāmī)는 단지 한 번의 탄생이 남아 있을 때
일어나는데, 그 때 그는 또 다른 특별한 용어로 일종(ekabījī)라고 불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Katz는 일래향을 삼결을 완전히 끊고 욕탐과 성냄에 대해서 진전이 있을 때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타당하다. 일래과와 일래향이 구분되는 것은 욕탐과 성냄 혹은 탐진치의
극복정도에 의해서 구분되는데, 이는 ?구사론?과 같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일래향을 극칠반생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지적하고 있는 일래향의 내용은 오히려
일래과이고, 더욱이 극칠반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극칠반생, 일래향, 일래에 대한 정의가
혼동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해서, 가가와 일종에 대해서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즉 예류-극칠반생極七返生-의 과위果位가 점차 분화分化해서, 가가와 일종이라고 하는 삼단계三段階의 예류과로 정립하기에 이르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다. 이러한 삼단계의 예류설은 일래의 개념 형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왜 일종과 가가에 관해서, 이렇듯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 빠-리 논서까지는 예류과를 의미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구사론?에 이르러서는 일래향과 불환향으로 그 과위가 변했던 것일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류과를 성취한 수행자가 동시에 일래향이라고 하면, 가가의 경우 2・3회의 윤회가 남게 되므로, 일래향으로 위치 지을 수 있고, 일종의 경우 단지 1회만 인간세계에 돌아오면 그것이 마지막 태어남이 되기에 일래과가 되어, 불환향으로 위치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해 두고자 하는 것은 일종과 가가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이른바 빠-리 불교와 북전 아미달마 불교를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다. 아울러 가가와 일종은 예류가 세분화됨에 따라 발생된 관념으로, 일래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다.
그리고 일래와 더불어 사과 가운데 늦게 성립했다고 하는 불환의 경우는 Sn. Dvayatānupassanāsutta(「두 가지 관찰의 경」)에 그 원형적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라한을 말하는 것인지 불환을 묘사하고 있는지 혼동될 정도로, 그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애초에 아라한과 불환의 개념이 완전히 정립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과설을 고찰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30)
30) 이 부분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불환의 성립문제를 다루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결론은 불환을
우빠니샤드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I.B.Honer(1979) 등의 설은 타당하지 않고, 오히려 불교
내적인 움직임에서 불환이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이상의 고찰을 근거로 하면, 일래의 개념은 다른 과위가 성립한 후에 가장 늦게 제2과로서 확립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31)
31) 藤田宏達(1959:469);真野龍海(1972:337)
4. 결론
고대의 인도의 종교 전통은 윤회라고 하는 사유방식에 근거하며,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 역시 그러한 토양에서 발생하고 발달한 종교이기에, 해탈을 통해 윤회의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불교 수행자가 해탈을 성취하지 못한 채, 즉 아라한이 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경우 그의 사후에 대한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하고자 하는 불교 승단 내부의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사과설(혹은 사향사과설)이다. 그 중에서 일래는 고통의 세계인 인간계에 단 한번만 돌아오게 되면, 반열반을 성취함을 약속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真野龍海(1972)가 주장했듯이 ‘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래에 방점이 있다.’고 한 이해방식보다는 ‘일과 래’가 거의 같은 비중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은 인간계에 돌아오는 횟수를 의미하며, 래는 다른 세계가 아닌 바로 인간계라고 하는 장소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가 불환이나 예류와 일래를 구분하게 하는 철학적 배경이 된다. 그렇기에 Pp에서 일래에 대한 다섯 가지 해석 가운데 오직 다섯 번째만이 긍정된 것이다.
이러한 일래의 기본적 의미를 바탕으로 본 논문은 다음의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1. 일래는 생천 사상 혹은 삼계설을 바탕으로 형성된 관념이다.
2. 일래는 이 세상에서 일래자가 되어 하늘나라에 태어난 뒤, 다시 인간계로 내려와 반열반을 성취하는 자이다. 이것이 1회 이 세상에 돌아온다고 하는 발상이 갖는 의미이다.
3. 가가와 일종을 일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경전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견해이다. 오히려 가가와 일종은 예류가 세분화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4. 예류와 불환, 그리고 아라한은 그 원초적 모습을 경전 내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일래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학들이 제기한 ‘외부에서 일래 관념이 들어왔다’고 하는 견해는 타당한 것 같다. 경전에 기술된 일래의 정의는 변함없이 후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통해 일래는 처음부터 그 의미가 확정된 채 사과설 내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까지는 가장 합리적인 이해일 것이다.
5. 가가와 일종에 대한 해석은 빠-리 전통과 북전 전통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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