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테라와다(Theravāda)의 관점에서 본 공업(共業)/김한상

실론섬 2017. 2. 22. 17:38

[보조사상 42집]

테라와다(Theravāda)의 관점에서 본 공업(共業): 

니까야와 아비담마를 중심으로

김 한 상 / 동국대학교 강사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붓다가 설한 업 이론

Ⅲ. 북방 부파들의 공업(共業)

IV. 테라와다의 입장

V. 나오는 말   

 

[국문요약]

본고의 목적은 테라와다(Theravāda)의 관점에서 공업(共業, sādhāraṇa-karma)을 

조사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불교의 핵심 사상들 가운데 하나는 업 이론(karma-

vāda)이다. 비록 불교 사상에서 차지하는 업의 중요성이 꾸준히 인식되고는 있으나, 

업 이론에 대한 모든 불교인들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불교 역사

에서 발전과 변형의 과정을 겪어왔다. 그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가 안다까(Andhakā)

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와 같은 북방 부파들이 제한 공업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업은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어떤 집단

이 공유하는 공업이고, 또 하나는 개별적으로 결과(vipāka)를 낳는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이다. 북방 부들은 이러한 집단이 축적한 공업에 의해서 기세간

(器世間, bhājana-loka)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많은 현대 불교인들은 참

여 불교(Engaged Buddhism)를 표방하면서, 업의 책임성이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

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렇게 이들은 업이 본질적으로 공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러나 공업은 초기 불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이다. 초기 불전에서 업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붓다는 업을 ‘의도(思, 

cetanā)’라고 정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업을 개인적 책임 즉 ‘자업

(自業, kammassakatā)’으로 다루었다. 이와 같이 초기 불전에서 업은 개인의 심

리현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테라와다도 모든 행동의 결과

가 전부 업보(業報, karma-vipāka)가 아니라는 근거에서 공업을 부정하고 있다.

까타왓투(Kathāvatthu)에 따르면, 한역으로 ‘과보(果報)’나 ‘이숙(異熟)’이라 

하는 빨리어 위빠까(vipāka)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과 같은 주요한 심리 

현상들처럼, 업이 만들어낸 정신적 결과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업이숙이란 개

인의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에 기세간에 사는 수많은 다른 중생들과 공유하지 못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테라와다는 북전(北傳)의 공업이 원래 의도(思, cetanā)

와 동일어인 업(業, karma)을 업보(業報, karma-vipāka)로 잘못 해석한 데서 비

롯된 것이며, 각 개인들의 유사한 업들이 어떤 주어진 상황에 참여한 다른 사람

들의 업들이 서로 모인 업을 혼동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테라와다에게 공업은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한 업의 성향을 통칭하는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일 뿐이지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a-sacca)가 아니다.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중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는 업 이론(karma-vāda)이다.1) 불교는 세계의 성립
과 개인 운명을 주관한다는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신하는 것으로서 
업 이론이 매우 중요하다.2) 불교에서 업 이론은 철저한 결정론(決定論)3)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우연론(偶然論)도 아니다. 붓다는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들을 피
하여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를 가르쳤다. 붓다는 한편으로는 삶이 그 어떤 
절대적인 신의 계획적 의도나 조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또 
한편으로는 삶은 도덕적 인과의 법칙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전개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업 이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붓다가 자신의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주로 재가자)에게는 처음부터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를 가르치지 않고 시론(施論, dāna-kathā), 계론(戒論, sīla-kathā), 
생천론(生天論, sagga-kathā)으로 구성된 차제설(次第說, anupubbi-kathā)을 가
르쳤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붓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업과 그 과보
라는 도덕적 인과의 법칙을 알게 되어 법(法, dhamma)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궁극적 가르침인 사성제를 가르쳤을 만큼, 업 이론의 
수용 여부는 불교의 출발점이었다.4) 
1) 본고에서 ‘업(業)’으로 번역되는 원래의 말은 빨리어로 깜마(kamma)이고 산스끄리
   뜨어로는 까르마(karma)이다. (일반적으로는 후자가 더 잘 알려져 있다.) 논자는 번
   역상의 혼란을 피하고 논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차 문헌이나 이차 문헌
   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스끄리뜨어로 통일하여 기술한다.
2)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인도불교의 역사(상)?, 이호근 옮김, 서울: 민족사, 2004, 
   p.208.
3)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인간의 의지는 전적
   으로 어떠한 외적인 힘에 의하여 정해진 때와 장소에서 이루어지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는 학설이다. 이러한 결정론은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 indeterminism)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숙명론(宿命論, fatalism)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붓다 당시 육사
   외도(六師外道, cha-titthiyā)의 하나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가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사람의 행위나 운명은 모두 자연계의 운행이 정한 약속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며, 그대로 방치해 두면 수백 겁
   (劫, kappa)을 경과하여 스스로 해탈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였다. 
4)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원시불교」, 동봉 옮김, 서울: 진영사, 1988, p.73.

이와 같이 불교에서 차지하는 업 이론의 중요성은 모든 불교 전통들에서 널리 인정
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모든 불교인들이 이에 대해 일치된 이해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불교 역사에서 업 이론은 발전과 변화의 과정을 겪어왔다. 원래 단
일했던 교단이 맨 먼저 상좌부(上座部, Sthaviravād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
로 분열하고 다시 18개 내지 20개 부파들로 분열하면서 붓다가 설한 업 이론도 각 
부파의 ‘법이론(dhamma-vāda)’5)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개념들6)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업(共業, sādhāraṇa- karma)’7)이다. 
5) 법이론(dhamma-vāda)이란 존재일반을 분류하는 불교식 방법론이자 불교 존재론의 
   조감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원래 제정 러시아 말기의 동양학 연구자인 옷토 로
   젠베르크(Otto Rosenberg)(1888∼1919)가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부파 불교에서
   는 일찍부터 존재일반을 법(法, dhamma)을 기준으로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서 설
   명하였다. 이러한 법들은 크게 몇 가지 큰 범주로 구분되는데 이 범주를 위(位)라고 한
   다. 테라와다(Theravāda)는 마음(心, citta) 한 가지, 마음 작용(心所, cetasika) 52가지, 
   물질(色, rūpa) 28가지, 열반(涅槃, nibbāna) 한 가지로 모두 4위 82법(四位八十二法)
   을 설한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는 마음(心, citta) 한 가지, 마음 작
   용(心所, caitta) 46가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citta-viprayukta- saṃskāra) 14가
   지, 물질(色, rūpa) 11가지, 무위(無爲, asaṃskṛta) 세 가지로 모두 5위 75법(五位七
   十五法)을 설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도 5위 100법(五
   位百法)을 설한다. 비록 각 부파마다 모든 법의 개수를 조금씩 다르게 설정하지만, 
   이처럼 존재일반을 여러 가지 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통찰하는 것은 부파 불교의 
   공통된 특성이다.
6) 예를 들면, 부파 불교 시대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는 업을 사업(思業,
   cetanā-karma)과 사이업(思已業, cetayita-karma)으로 구분하고, 사업은 바로 의업
   (意業, manas-karma)이고 사이업은 신업(身業, kāya-karma)과 어업(語業, vākkarma)
   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물질(色, rūpa)에 속하는 무표업(無表業, avijñapati-
   karma)이라는 별도의 업의 범주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이를 논하는 것은 논
   자의 목적이 아니다. 
7) 본고에서 ‘공업(共業)’으로 번역되는 원래의 말은 빨리어로 삿다라나 깜마(sādhāraṇa
   -kamma)이고 산스끄리뜨어로는 삿다라나 까르마(sādhāraṇa-karma)이다. 앞서 말한 
   대로, 논자는 번역상의 혼란을 피하고 논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산스끄리뜨어
   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일부 현대 불교인들은 공업의 이론을 채용하여 불교의 적극적 사회 참여를 정당화
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이른바 ‘참여 불교(Engaged Buddhism)’
8)를 표방하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Thich Nhat Hanh)은 팔정도(八正道, ariyo-
aṭṭhaṅgiko-maggo)의 정명(正命, sammājiva)은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
9)이 아닌 공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10) 그는 더 나아가 한 개인
의 행위는 그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
다.11) 정승석은 공업이 불공업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생명 
복제에 대한 불교적 처방을 제시하는 업 개념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고 주장한다.12) 남궁선은 불교에서 업 이론은 연기(緣起, paṭccasamuppāda)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공업과 불공업의 두 가지 의미를 지녀야 만이 업 이론이 비로소 
이론적으로 완벽해지며, 중생들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으므로 불교의 이상인 자
아의 완성은 불공업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불교의 사회
적 실천이 저조했던 이유가 공업의 이론이 간과되어왔거나 재해석되지 못했던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13) 박경준도 업을 불공업만으로 보는 해석에 반대하고, 불교의 
사회참여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 공업의 이론을 들고 있다.14) 이와 같은 
공업 이론의 대두는 사실상 업을 개인적 책임으로만 해석하는 전통적인 업 이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오늘날의 대승 불교권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8) 참여 불교(Engaged Buddhism)라는 용어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Thich Nhat 
   Hanh)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경제적 고통과 부당함
   을 불교적 방법으로 치유하려는 운동을 말한다. 
9) 본고에서 ‘불공업(不共業)’으로 번역되는 원래의 말은 빨리어로는 아웨니까 깜마
   (āveṇika-kamma)이고 산스끄리뜨어로는 아웨니까 까르마(āveṇika-karma)이다. 
   여기서 아웨니까(āveṇika)는 ‘특별한, 예외적인, 고유의, 독자적인’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은 공업(共業)과 반대되는 개인의 업 즉 별업(別業)을 가리킨다. 하
   지만 붓다는 업의 본질을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
   로 보았기 때문에 업을 공업과 불공업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 불전
   에서는 공업(共業)과 반대되는 의미로는 전혀 쓰이지 않고 ?율장(律藏, Vinaya-
   Piṭaka)?에서 ‘독자적인 승가의 갈마(不共僧伽羯磨, āveṇika-saṅgha-kamma)’
   라는 개념으로만 쓰이고 있을 따름이다.(Vin.II, p.204)
10) Nhat Hanh, Thic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Transforming Suffering 
    into Peace, Joy, and Liberation, New York: Broadway Books, 1999, p.105. 
11) 예컨대 Thich Nhat Hanh(1999, p.105)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도축업자가 짓는 살생의 죄업은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도 
    어느 정도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12) 정승석, 「생명 복제에 대한 불교적 반성」, 동서철학연구 제 30호, 대전: 한국동서
    철학연구, 2003, pp.287-308.
13) 남궁선, 「공업사상의 연원과 사회실천적 전개」,「선문화연구」제 9집, 서울: 선
    리연구원, 2010, pp.295-328. 
14) 박경준, 「佛敎 共業說의 사회학적 함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불교학보」제 52집, 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009, pp.149-171; 그리고「불교
    사회경제사상」,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도 참조.

본고의 목적은 테라와다(Theravāda)의 관점에서 공업의 이론을 탐구해보려는 것
이다. 이를 위해서 논자는 먼저 초기 불전15)에 근거하여 공업의 이론이 ‘붓다의 
말씀(buddha-vacana)’16)에 얼마만큼 부합되는지를 살펴보고, 북전(北傳)의 문
헌들에서 공업이 어떻게 기세간(器世間, bhājana-loka)의 성립과 소멸을 설명하
는 원리로 서술되고 있는 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까타왓투(Kathāvatthu)」
에서 테라와다와 안다까(Andhakā)17)가 공업에 대해 벌인 논박들을 통하여 테라
와다는 붓다가 설한 업 이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고, 공업의 이론을 어떻게 해석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공업의 이론은 원래 개인의 마음 작용
(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에 다름 아닌 업(業, karma)이란 용어에 그 
결과(vipāka)까지도 포함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며, 업과 동의어인 의도는 네 가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의 하나인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이라는 점에
서 테라와다에게는 오직 자업(自業, kammassakatā)19) 으로서의 업만이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a-sacca)이고 공업은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
일 따름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15) 본고에서 말하는 ‘초기 불전’은 초기불교의 문헌에 대한 약칭으로, 테라와다
    (Theravāda) 소전의 빨리 니까야(Pāli Nikāya)와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 그리고 여러 부파 소전의 한역 아함(阿含)과 율장(律藏)을 가리킨다. 
    현존하는 이러한 문헌들에는 후대에 덧붙인 내용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없지만, 이들은 모든 불교 문헌들 가운데 가장 고층(古層)에 속하기 때문
    에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일차 자료라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16) 본고에서 ‘붓다의 말씀’으로 번역한 빨리어 ‘붓다와짜나(buddha-vacana)’는 붓다
    (buddha)와 와짜나(vacana)의 합성어이다. 붓다(buddha)는 √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깨달은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역사적인 붓
    다인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를 가리킨다. 와짜나(vacana)는 √vac(말하다)
    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말씀’을 뜻한다. 그래서 붓다와짜나는 ‘붓다의 말씀’이나 
    ‘붓다의 언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테라와다 불교인들은 빨리 삼장
    (三藏, ti-piṭaka) 전체가 붓다와짜나라고 봄으로써 빨리 삼장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17) 안다까(Andhakā)는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 계통의 한 부파로 추정된다. 
    스리랑카의 고대 연대기들인「마하왐사(Mahāvaṃsa)」나「디빠왐사(Dīpavaṃsa)」
    에는 별개의 부파로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마하왐사」에서는 동산주부(東山住部, 
    Pubbaseliya), 서산주부(西山住部, Aparaseliya), 왕산부(王山部, Rājagirika), 의성
    부(義成部, Siddhārthika)가 안다까의 지파들로 언급되고 있다.(Mhv.V, 12게f) 붓다
    고사(Buddhaghosa)도「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ppakaraṇa-aṭṭhakathā)」
    에서 이 네 부파들을 통합하여 안다까라고 부르고 있다.(Kv-a, p.52) 
18) 본고에서 ‘궁극적 이치’로 번역되는 원래의 말은 빨리어로 빠라맛타(paramattha), 
    산스끄리뜨어로 빠라마르타(paramārtha)이다. 이는 parama(최고의, 최상의, 가
    장)와 attha(이치, 의미, 뜻)의 복합어이다. 그리고 parama는 para(저편에, 넘어
    서)의 최상급이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최상의 이치’나 ‘궁극적 진리’를 뜻한다. 
    ‘궁극적 용어’란 뜻의 빠라맛타와짜나(paramattha-vacana), ‘궁극적 가르침’이
    란 뜻의 빠라맛타데사나(paramattha-desanā), ‘궁극적 진리’ 나 ‘승의제(勝義
    諦)’라는 뜻의 빠라맛타삿짜(paramattha-sacca)하고도 같은 말이다. 이와 반대
    되는 개념이 ‘관습적 일상용어’라는 뜻의 보하라와짜나(vohāra-vacana), ‘인습
    적 가르침’이란 뜻의 보하라데사나(vohāra-desanā), ‘인습적 진리’나 ‘속제(俗
    諦)’라는 뜻의 삼뭇띠삿짜(sammuti-sacca)이다. 일반적으로『숫따 삐따까
    (Sutta-piṭaka)』가 대중적인 용어로 표현된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비해서,『아
    비담마 삐따까(Abhidhamma-piṭaka)』는 엄밀한 진리의 용어로 표현된 가르침
    을 담고 있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서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는 이른
    바 ‘4위 82법’으로 정리된다. 즉 마음(心, citta) 한 가지, 마음 작용(心所, cetasika) 
    52가지, 물질(色, rūpa) 28가지, 열반(涅槃, nibbāna) 한 가지로 모두 ‘4위 82법
    (四位八十二法)’을 설한다. 
19) 본고에서 ‘자업(自業)’으로 번역되는 원래의 말은 빨리어로 깜마삿까따
    (kammassakatā)이다. 이는 ‘kamma(업)와 sakatā(자기 자신임)의 복합어에 tā
    (추상명사형 어미)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업이 자기 
    자신임’이라는 뜻이다. 테라와다(Theravāda)는 업은 자신의 상속이라고 보는
    견해를 ‘업은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自業正見, kammassakatā-sammādiṭṭhi)’라
    고 부른다.

 

Ⅱ. 붓다가 설한 업 이론

업(業)의 원어인 빨리어 깜마(kamma)와 산스끄리뜨어 까르마(karma)는 ‘하다’, 
‘만들다’, ‘행하다’를 뜻하는 어원 √kar에서 나왔으므로 글자 그대로 ‘행위’를 뜻
한다. 이러한 어원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리그웨다(Ṛgveda)? 시대에 업은 제
사나 제식행위를 뜻했고 도덕적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기 우빠니
샤드(Upaniṣad) 시대부터 선악의 행위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한다는 생
각이 점차 확립되기 시작했다. 붓다는 인도의 사회적 통념인 업 이론을 수용하
여 자신의 사상 체계 내에서 이를 완벽하게 설명하고 체계화시켰다. 초기 불교
에서 업이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 즉 쩨따나(cetanā)’20)에 붙이
는 이름이며, 그것과 관련되어 드러나는 몸의 업(身業, kāya-kamma), 말의 업
(口業, vacī-kamma), 마음의 업(意業, mano-kamma)을 말한다.21) 이점은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 붓다가 다음과 같이 업을 정의한
데서 잘 나타난다.
20) 본고에서 ‘의도’로 번역되는 빨리어와 산스끄리뜨어 쩨따나(cetanā)는 √cit(생각
    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서 마음(cetas)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상태를 말한
    다. 쩨따나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노력이 개입된 사고 작용이기 때문에 초기 
    불교에서는 행위(業, karma) 그 자체로 정의되고, 테라와다도 이를 그대로 따르
    고 있다.
21) 그러나 업(業, kamma)이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행위의 결과를 가리킬 때 사용되
    기도 하는데, 행위의 결과를 가리키는 경우 좀 더 정확한 표현은 업이숙(業異熟, 
    kamma-vipāka), 업과(業果, kamma-phala) 혹은 업보(業報)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이다. 의도를 통해서 사람은 몸, 말, 
뜻을 통하여 업을 짓게 된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AN.III, p.415.)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업이란 순수하게 개인의 마음 작용인 ‘쩨따
시까(cetasika)’의 하나이며, 세 가지 업의 본질은 모두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思, cetanā)’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의도야말로 행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업을 의도와 동일하게 보는 것은 결국 업을 마음
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마음의 욕구, 성향, 목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
신적인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23) 후술하겠지만, 공업의 이론은 이와 같이 본
래 순수한 마음 작용인 의도(思, cetanā)에 지나지 않는 업이라는 용어에 그 
결과(vipāka)까지도 포함시킨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23) Bodhi, Bhikkhu, The Noble Eightfold Path: The Way to the End of Suffering,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2006, p.13.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초기 불전에서 업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
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24) 이는『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
의 제 135번째 경인「쭐라깜마위방가 숫따(Cūlakammavibhaṅga-sutta)」에서 
확인된다. 이 경에서 또데야의 아들(Todeyya-putta)인 수바 바라문 학도(Subha
-māṇava)는 붓다를 만나서 왜 중생들 가운데는 수명이 짧은 사람들도 있고 수
명이 긴 사람들도 있고, 병약한 사람들도 있고 건강한 사람들도 있으며, 못생긴 
사람들도 있고 잘 생긴 사람들도 있으며, 세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세력이 있
는 사람들도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도 있고 부유한 사람들도 있으며, 낮은 가문
의 사람들도 있고 높은 가문의 사람들도 있으며, 지혜가 없는 사람들도 있고 지
혜를 갖춘 사람들도 있는 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24)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는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 업 가운데 
    앞의 두 가지의 본질을 각각 물질적인 형색과 음성으로 보는데 비해서 테라와다
    (Theravāda)는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 나타나는 붓다의 교
    설(AN.III, p.415)에 의거하여 모든 업은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가 그 본질이라고 본다. 

바라문 학도여, 중생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
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업이 중생을 구분지어서 
천박하고 고귀하게 만든다.
Kammassakā, māṇ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Kammaṁ satte vibhajati yadidaṁ hīnappaṇītatāyāti. 
25) MN.III, pp.203-206;『中阿含經』卷44 (『大正藏』1, 704c25), “彼眾生者, 
    因自行業, 因業得報, 緣業, 依業,業處, 眾生隨其高下處妙不妙。”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술이 보인다.

비구들이여, 중생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
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어떤 업을 지으면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된다. 
Kammassakā bhikkhave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yaṃ kammaṃ karonti kalyāṇaṃ vā pāpakaṃ vā, tassa 
dāyādā bhavanti.(AN.V, p.288.)

이와 같이 초기 불전들에서 업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자업(自業)’ 즉 ‘깜맛사까따(kammassakatā)’이다.『맛지마 
니까야』의 제 130번째 경인「데와두따 숫따(Devadūta-sutta)」에서 지옥
의 왕 야마(Yama)는 자신 앞에 끌려나온 죽은 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악업은 어머니가 지은 것도 아니요 아버지가 지은 것도 아니며, 
형제나 자매나 친구나 친지와 친척들이 지은 것도 아니며, 사문과 바라문들이나 
천인들이 지은 것도 아니다. 그대 스스로 악업을 지었고 오직 그대가 그 과보를 
받을 것이다. 
Taṁ kho pana te etaṁ pāpaṁ kammaṁ n’eva mātarā na pitarā kataṁ na bhātarā 
kataṁ na bhaginiyā kataṁ na mittā-maccehi kataṁ na ñātisālohitehi kataṁ na 
samaṇabrāhmaṇehi kataṁ na devatāhi kataṁ; tayā v’etaṁ pāpaṁ kammaṁ 
kataṁ; tvañ ñeva etassa vipākaṁ paṭisaṁvedissasīti.
(MN.III, pp.179-180. 다음도 참조: AN.I, pp.138-142.) 

여기서도 업과 그 과보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에서 붓다는 자기의 행위는 자신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하며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양도하거나 남과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을 설하고 있다. 

씨앗은 뿌리는 대로 열매 맺나니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선이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악이 있으리. 그대 이제 씨앗을 뿌렸으니 오직 그대만이 그 열매를 경험
하리라.
yādisaṃ vappate bījaṃ, tādisaṃ harate phalaṃ, kalyāṇakārī kalyāṇaṃ, pāpakārī 
ca pāpakaṃ, pavuttaṃ vappate bījaṃ, phalaṃ paccanubhossasī ti. 
28) SN.I, p.227; ?雜阿含經? 卷40 (?大正藏?2, 295a29), “隨行殖種子, 隨類果報生。”

여기서 우리는 붓다가 말한 “그대 이제 씨앗을 뿌렸으니 오직 그대만이 그 열매를 
경험하리라(pavuttaṃ vappate bījaṃ, phalaṃ paccanubhossasī ti).”라는 문장을 
주목해야 한다. 이 문장은 붓다가 공업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확고부동한 성전(聖
典)29)의 근거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와 같이 초기 불교의 업 이론은 기본적
으로 ‘자업(自業, kammassakatā)’ 또는 부파 불교의 용어로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이라고 할 수 있다.
29)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성전(聖典) 즉 캐논(canon)은 기본적으로『숫따 삐따까
    (Sutta-piṭaka)』,『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아비담마 삐따까
    (Abhidhamma- piṭaka)』의 삼장(三藏, ti-piṭaka)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K.R. 
    Norman(1997, pp.131-148) 참조.

 

Ⅲ. 북방 부파들의 공업(共業)

앞서 살펴 본 대로, 붓다는 업을 철저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보았지만 부파 불교 시
대에 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업이 공동의 책임으로 확장되어 해석
된다. 이것이 이른바 ‘공업(共業)’이다. 테라와다의 관점에서 공업을 조사하기 위해
서는 먼저 공업의 개념부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30) 공업은 산스
끄리뜨어 ‘삿다라나 까르마(sādhāraṇa- karma)’의 한역어이다. 삿다라나
(sādhāraṇa)의 사전적 의미는 ‘동일한 지주나 기초를 갖거나 의지하는’, ‘많은 또
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거나 적용되는’, ‘모두에게 공통되는’ 등이다.31) 이 공업에 
상대되는 말로는 개별적인 업이라는 뜻의 ‘별업(別業)’ 또는 공통되지 않는 업이라
는 의미의 ‘불공업(不共業)’이 주로 쓰인다. 물론 별업과 불공업은 오직 북전(北傳)
의 문헌들에서만 나오는 말로 테라와다의 자업(自業, kammassakatā)에 해당한다. 
북전의 문헌들 가운데서는「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32)에서 공업이라
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3) 
30) 테라와다는 공업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남전(南傳)의 문헌들에는 공업에 
    대한 정의가 매우 불충분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북전(北傳)의 문헌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31) Monier Monier-Williams, A Sanskrit-English Dictiona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899, p.1202.
32) A.K.Warder(2004, p.215)는「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현존하는 
    가장 오랜 아비다르마 문헌으로 보고 있다. 그 소속 부파에 대해서 Erich
    Frauwallner(1995, p.97)와 A.K. Warder(2004, p.214)는 법장부(法藏部, 
    Dharmaguptaka)로 보고 있으며, Nakamura Hajime(1987, p.108)는 소속 부파가 
    불분명하기는 해도 아쇼까(Aśoka) 왕 사후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에 의해 
    편집되고 증광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Étienne Lamotte(1988, pp.522-523)
    는 독자부의 주요 교리인 보특가라론(補特伽羅論, pudgala-vāda)이 부정되고 오
    히려 무아(無我, anattā)가 제창되고 있는 점을 들어 이 논서가 독자부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33) 박경준(2009, p.158)은 공업이「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처음 사용된 것 같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논자는「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을 현존하는 가장 오랜 아비다르마 문헌으로 보는 A.K.Warder(2004, p.215)의 설에 
    따라서 이 문헌에서 공업이란 용어가 처음 나타난다고 보고 싶다.

"무엇을 공업계라고 하는가. 법이 업을 따라 변하면 공업이 일어나, 함께 머물고 함께 
사라지는 것을 공업계라고 한다. 무엇을 불공업계라고 하는가. 법이 업을 따라 변하지 
않으면 공업이 일어나지 않으니, 함께 머물지도 않고 함께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것을 
불공업계라고 한다."
34)「舍利弗阿毘曇論」卷7 (『大正藏』28, 576b6-8), “云何共業界。若法隨業轉共業
    生共住共滅。是名共業界。云何不共業界。若法不隨業轉不共業生不共住不共滅。
    是名不共業界。”

이러한 설명을 보면 초기의 공업은 원래 중생들이 함께 업을 짓고 그 과보를 함께 
받는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북전의 문헌들에서 공업은 주로 기
세간(器世間, bhājana- loka)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비가 내리는 현상이나 
지옥등이 모든 중생이 짓는 공업의 증상과(增上果, adhi-phala)에 의한다고 설명
되고 있으며,35) 중생은 별업(別業) 즉 불공업으로 생겨나고, 기세간은 공업으로 
생겨난다고 설명되고 있다.36) 뿐만 아니라 중생들이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 
업을 짓는 내용에 따라 중생들이 머물 세계의 성립과 파괴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35)「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9 (『大正藏』27, 41b, 106c, 692c)
36)「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9 (『大正藏』27, 41b4-5), “중생은 각각의 별업에 의해 
    생기고, 기세간은 공업에 의해 생긴다. 자재천 등의 삿된 원인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然有情數各別業生。非有情數共業所生。非自在等邪因所生。)”

[문] 무슨 이유로 모든 세계가 함께 무너지지도, 함께 성립되지도 않는가?
[답] 모든 중생들의 업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들이 이곳에서 공업을 증장하면 
세계가 곧 성립되고, 공업이 다하면 세계가 곧 무너진다. 또 중생들이 저곳에서 
정업을 증장하면 이 세계가 곧 무너지고, 정업이 줄어들면 이 세계가 곧 성립된다. 
37)「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134 (『大正藏』27, 292c15-19), “問何故一切世界不俱壞俱成。
    答以諸有情業不等故。謂有情類。於此處所共業增長世界便成。共業若盡世界便壞。
    又有情類。於彼處所淨業若增此界便壞淨業若減此界便成。”

또한 중생들의 행위는 증상연(增上緣, adhi-pratyaya)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의 행위와 영향을 주고받는데, 그렇게 작용하는 힘을 증상력(增上力, adhi-pati)
이라고 한다.38) 와수반두(世親, Vasubandhu)가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39)의 
입장에서 설일체유부의 교리를 집대성한「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도 
중생들이 사는 기세간은 중생들이 함께 지은 공업으로 인한 힘을 지닌 바람으로 시작
되며, 이 공업의 소멸은 불, 물, 바람의 세 가지 재앙들을 통해서 기세간의 소멸을 가
져온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들이 거주하는 기세간은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중
생들이 함께 지은 공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38)「大乘阿毘達磨集論」卷4 (『大正藏』31, 679b27-29), “또 어떤 업은 모든 유정
    으로 하여금 차츰 차츰 증상하게 한다. 이런 업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이 서로
    가 서로에게 증상연이 된다고 말한다. 그들이 상호간에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역
    시 공업이라 한다(或復有業。令諸有情展轉增上。由此業力說諸有情更互相望為
    增上緣。以彼互有增上力故。亦名共業。).”
39)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는 초기 18부파들 가운데 하나로 B.C 2세기경 인도에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며 등장한 부파이다. 
    아비다르마(Abhidharma)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이라 
    주장하는 경(經, sūtra)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경량부라고 일컫는다. 경량부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안에서 설일체유부의 
    몇 가지 교의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표방하고 있는 비유자(譬喩者, Darṣṭāntika)
    가 그 선구자일 것이라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특히 꾸마라라따(鳩摩邏
    羅, Kumāralāta)와 그의 제자 슈리라따(室利羅多, Śrīlāta),「성실론(成實論)」의 저
    자 하리와르만(訶梨跋摩, Harivarman) 등이 이러한 계통에 속하며 이들이 나중에 와
    수반두(世親, Vasubandhu)가「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지을 무렵부터 
    경량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부파는 설일체유부의 과거·현재·
    미래는 실재한다고 하는 삼세실유(三世實有)에 대항하여 현재만의 실재를 주장했다. 
    또한 마음(心, citta)과 마음 작용(心所, caitta)의 실재로 구분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통일된 의식 작용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 부파는 처음부터 대승 불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후대에 유식(唯識, vijñapti-mātratā)을 내세운 유가
    행파(瑜伽行派, Yogācāra)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대승 불교로 발전하는 과도
    기적 부파로 그 성격이 규정된다. 

"즉 모든 중생의 업의 증상력에 의해 허공에는 점차 미세한 바람이 생겨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기세간이 장차 이루어지려는 조짐이다. 그러다 바람이 점차 증가하여 
왕성해지고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풍륜, 수륜, 금륜 등이 성립한다. 그러나 처음에 
대범천의 궁전 또는 야마천의 궁전을 성립시키고 그 후에 풍륜 등을 일으키니, 
이것을 바로 외부의 기세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40)
40)「阿毘達磨俱舍論」卷12 (?大正藏?29, 856b22-26), “一切有情業增上力。
    空中漸有微細風生。是器世間將成前相。風漸增盛成立如前所說風輪水金輪等。
    然初成立大梵王宮乃至夜摩宮。後起風輪等。是謂成立外器世間。”

이와 같이 설일체유부는 중생들의 공업으로 기세간이 이루어지며 달과 태양의 운동
과 이동도 공업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리와르만(訶梨跋摩, Harivarman)이 
지은 경량부 계통의 논서인「성실론(成實論)」41) 에서도 대지, 해, 달 등과 같은 
환경의 생성이 공업에 의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42)「아비담심론경(阿毘曇心論
經)」에서는 불공업이 각 중생들의 업이 증대하여 생기는 업으로, 공업이 모든 중생
의 업이 증대하여 생기는 업으로 각각 정의되고 있다.43) 이 밖에도 유가행파(瑜伽
行派, Yogācāra)의 문헌인「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서도 증상과로 
기세간이 나타난다고 설명되고 있다.44) 남전(南傳)에서도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 계통으로 추정되는 안다까(Andhakā)라는 부파가 자연 현상들의 원
인으로 공업을 지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45) 
41)「성실론(成實論)」의 소속 부파에 대해서는 학계에 딱히 일치된 견해가 없다. 
    A.K.Warder(2004, p.215)는 다문부(多聞部, Bahusrutīya)에 속한다고 보는 
    반면, Nakamura Hajime(1987, p.113), 히라가와 아키라(2004, p.116), 카지
    야마 유이치(1994, p.27)와 같은 학자들은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에 속
    한다고 본다. 논자는 후자의 설을 따랐다.
42)「成實論」卷7 (『大正藏』32, 296c28-297a3), “묻기를, 이 중생의 수와 물질은 
    선행하는 업에 따라서 발생하는가? 답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비중생의 수와 
    물질도 역시 업을 근본으로 한다. 모든 중생은 공업의 과보가 있다. 이를 테면, 
    거처를 얻는데 업의 인연을 가지기 때문이고, 대지 등을 얻는 데에도 분명한 업
    을 연고로 해와 달 등이 있다. 그러므로 대지가 생기는 것은 모두 업을 근본으로 
    한다고 알아야 한다(問曰。是眾生數物則從先業生。答曰。不然。非眾生數物亦
    以業為本。一切眾生有共業報果。謂得住處以業因緣故。有地等以得明業因緣故
    有日月等。當知物生皆以業為本。).”
43)「阿毘曇心論經」卷2 (『大正藏』28, 839c28-29), “不共者。各各眾生業增上生。
    共者。一切眾生業增上生。”
44)「大乘阿毘達磨集論」卷15 (『大正藏』31, 765b), “증상과라는 것은 모든 중생
    들의 공업의 증상력으로 경험되는 기세간을 말한다(增上果者。謂一切有情共業
    增上力所感器世間。).”
45) Kv-a, p.100, “대지, 바다, 태양, 달 등도 모든 이들에게 공업의 과보라는 것은 
    그들의 견해이다(paṭhavīsamuddasūriyacandimādayo pi sabbesaṃ 
    sādhāraṇakammavipāko ti tesaṃ laddhi).”

공업은 이 밖에도 북전의 문헌들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더 이상의 인용
은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이러한 설명을 종합해 본다면, 공업은 같은 종류의 
업을 지은 자들이 같은 종류의 과보를 받는 업으로서, 세계의 성립과 파괴를 규
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46) 그리고 자기의 업으로 인한 과보
(vipāka)를 자신 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받게 되며,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행한 선악의 과보를 자신도 공유한다는 것이 업 이론으로서 공업의 핵
심이다.47)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북방 부파들은 기세간과 
같은 물리적 현상들을 중생들이 함께 지은 업의 결과(kamma-vipāka)로 보고,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에 지나지 않던 업을, 
그것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북전의 공업은 
업의 동기적 측면보다는 업의 결과적 측면이 강조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바
로 이 후자의 관점으로부터 공업의 이론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테라
와다의 관점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46) 박경준, 「佛敎 共業說의 사회학적 함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논의를 중심
    으로」,「불교학보」제 52집, 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009, p.159.
47) 水野弘元, 「業說について」「印度學佛敎學硏究」2卷2號, 通卷4號, 東京: 
    日本印度學佛敎學會, 1954, p.115.

 

IV. 테라와다의 입장

북방 불교의 공업(共業)에 해당하는 ‘사라나 깜마(sādhāraṇa- kamma)’나 ‘사라나 
깜마위빠까(sādhāraṇa-kammavipāka)’라는 빨리어는 고층(古層)의 빨리 니까야
(Pāli Nikāya)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ppakaraṇa
- aṭṭhakathā)」에서 테라와다인 자론사(自論師, saka-vādin)48)의 입장을 수호하
고 논쟁 상대인 타론사(他論師, para- vādin)의 입장을 반박하는 문구에서나 보이
고 있을 따름이다.49) 그리고 불공업(不共業)에 해당하는 빨리어 ‘아웨니까 깜마
(āveṇika- amma)’도 ?율장(律藏, Vinaya-Piṭaka)?에서 ‘독자적인 승가의 갈마
(āveṇika-saṅgha-kamma)’라는 개념으로나 쓰이고 있을 따름이다.50) 이를 통해 
우리는 테라와다가 참된 이치(諦義, saccikattha)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
로는 공업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논쟁 상대를 논박하기 위해서 인습적 명칭
(vohāra-vacana)으로만 그것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51) 
48) Kv-a. p.100.「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ppakaraṇa-aṭṭhakathā)」에서 
    테라와다(Theravāda)는 자신들을 자론사(自論師, saka-vādin)라 부르고, 안
    다까(Andhakā)를 타론사(他論師, para-vādin)라 부르고 있다.
49) Kv-a. p.100, “대지, 바다, 태양, 달 등도 모든 이들에게 공업의 과보라는 것은 
    그들의 견해이다(paṭhavīsamuddasūriyacandimādayo pi sabbesaṃ 
    sādhāraṇakammavipāko ti tesaṃ laddhi).”
50) Vin. II, p.204.
51) 그래서 초기 불교와 테라와다에는 불공업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업은
    ‘자업(自業, kammassakatā)’이라는 용어로 설명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논의는「까타왓투(Kathāvatthu)」의 「대지
와 업보에 대한 논의(Paṭhavī- kammavipāka-athā)」52) 이다. 여기서는 “대지는 
업보이다(paṭhavī kamma-vipāko).”53) 라는 안다까(Andhakā)의 주장에 대해서, 
테라와다는 만약 그것이 업보라면 물질(色, rūpa)인 대지(paṭhavī)가 어떻게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상응할 수 있는지를 추궁하면서, 업보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
이기 때문에 대지에 사는 수많은 다른 중생들과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52) Kv. p.349ff.
53) Kv-a. p.100.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서 ‘위빠까(vipāka)’54)라는 개념은 특수한 전문용어로서 
89종류의 마음들 가운데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에만 한정된다. 그래서 테라
와다는 일부 물질(色, rūpa)이 업에 의해서 생기는 것을 인정하면서도,55) 그것
들을 위빠까라고 결코 부르지 않는다.56) 다시 말해서, 테라와다에게 위빠까란 
업의 결과로 금생이나 내생에 받는 정신적 느낌일 뿐이다. 그래서 냐나틸로카
(Nyānatiloka)도 지적했듯이, 공업이란 개념은 업에 행위의 결과까지 포함시킨 데
서 비롯된 오해라고 할 수 있다.57) 다시 말해서, 테라와다는 위빠까를 ‘개인의 
정신’으로 보는데 비해, 북방 부파들은 이를 ‘집단의 행위의 결과인 물질’로 보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북방 부파들은 공업의 이론을 도입하였
고, 테라와다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54) 위빠까(vipāka)라는 빨리어와 산스끄리뜨어는 어원적으로 vi(분리해서)와
    √pac(익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글자 그대로 ‘다르게 익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어원적인 의미를 살려서 ‘異熟’이라고도 하고, 과일이 
    익어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果報’라고도 번역되었다. [중국 역경사에서 
    전자는 신역(新譯)이고 후자는 구역(舊譯)이다.]『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에서는 위빠까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업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업의 과보는 세 가지라고 나는 말하나
    니 그것은 금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다음 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는 시기
    가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위빠까라 한다(Tividhāhaṃ 
    bhikkhave kammānaṃ vipākaṃ vadāmiha: diṭṭh’ eva dhamme upa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Ayaṃ vuccati bhikkhave kammānaṃ vipāko).”(AN.III, p.
    415)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말로 ‘깜마 팔라(kamma-phala)’도 쓰이고 있다. 예
    를 들면, “그것은 전에 내가 남의 아내를 범한 과보였다(tass’ etaṃ 
    kammaphalaṃ yathā pi gantvāna paradāraṃ).”와 같이 쓰이고 있다. (Thī, 
    437게) 업(業, karma) 그 자체는 의도(思, cetanā)가 본질이기 때문에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의 구별이 있으나 위빠까는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과보나 이숙은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무기(無記, avyākata)이다. 
    그리고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위빠까는 단지 업(業, karma)이 만들
    어 낸 ‘정신적 결과’들을 가리킨다. 몸에 대한 즐겁고 괴로운 느낌과 그 밖의 
    기본적인 심리 현상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 다섯 가지 감각 기
    관들과 같은 모든 물질 현상들은 ‘위빠까’라 부르지 않고 ‘깜마자(kamma-ja)’ 
    혹은 ‘깜마 사뭇타나(kamma-samuṭṭhāna)’라고 부른다.
55)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이 일어나는 원인들(rūpa-samuṭṭhāna)에
    는 네 가지가 있다. 그 네 가지들은 업(業, kamma), 마음(心, citta), 온도(utu), 
    음식(食, āhāra)이다. 이에 대해서는 Bhikkhu Bodhi(2007, pp.210-217) 참조.
56) 林 隆嗣, 「上座部の共業(sādhāraṇa-kamma) について: 聖典からブッダゴーサへ」, 
   「印度学仏教学研究」59卷 2号, 東京: 日本印度学仏教学会, 2010, p.357.
57) Nyanatiloka Mahathera, Karma and Rebirth,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59, p.17

다시「까타왓투」의 「대지와 업이숙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 보자. 논쟁은 과보
의 공유나 집단 행위라는 화제로 옮겨간다. 테라와다가 지적하는 타론사의 문제
점들이나 모순점들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58)
58) 논술의 편의와 논지의 원활한 전개를 위하여 원전의 내용은 본문에 인용하지 
    않고 각주로 처리한다.

첫째, 테라와다는 과보의 분할, 양도, 공유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대
지는 확대, 축소, 분양, 분단되어 부동산으로 매매되곤 하지만, 선업과 불선업의 
결과인 과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59) 
59) Kv. p.351.

둘째, 테라와다는 세계의 생성에서 대지가 먼저 완성되고, 그 뒤에 거기에서 태어
나는 중생이 업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면, 업보의 순서가 뒤바뀌고 모순이 생
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60) 
60) Kv. p.351.

셋째, 테라와다는 모든 중생의 업이 모인 결과로서 대지가 있다면 대지라는 장소에 
재생할 중생은 자신의 과보를 받지 않게 되며, 대지에 태어나지 않고 반열반(般涅
槃, pari- nibbāna)하는 중생이 있으면, 그는 받아야 할 업보를 남긴 채 반열반하게 
된다는 모순점을 들고 있다.61) 
61) Kv. p.352.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에 드는 자와 공업에 의한 기세간(器世間, 
    bhājana-loka)이라는 관념의 모순에 대한 논의는 북전(北傳)의「아비달마대비바사
    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도 나온다.「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22 (『大正藏』27, 
    106c26ff)

넷째, 테라와다는 중생 전체의 업의 결과가 아니라 전륜성왕(轉輪聖王, cakkavatti-
rāja) 혼자의 업보로서 대지가 생겼다고 한다면, 거기에 살고 있는 많은 중생이 그것
을 수용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62) 
62) Kv. p.352.

「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ppakaraṇa-aṭṭhakathā)」에서는 “대지, 바다, 태양, 
달 등도 모든 이들에게 공업의 과보라는 것은 그들의 견해이다63) (paṭhavīsamu-
ddasūriyacandimādayo pi sabbesaṃ sādhāraṇakammavipāko ti tesaṃ laddhi).”
라고 설명하면서 세계64) 즉 기세간의 성립과 전개와 소멸을 중생들의 공업으로 돌
리는 안다까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63) Kv-a. p.100.
64) 북전(北傳)의 기세간(器世間, bhājana-loka)에 해당하는 남전(南傳)의 용어는 
    그보다 훨씬 더 범용적인 ‘로까(loka)’이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근 √lok(보다)
    에서 파생된 명사로 간주하여 그 일차적인 의미는 ‘눈에 들어오는 시계(視界)이다. 
    하지만 테라와다는 이를 어근 √ruj/luj(무너지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아 ‘무너지
    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빨리 니까야(Pāli Nikāya)에 나오는 어원적 해석으로는 
    “파괴된다고 해서 세간이라고 한다(lujjatīti kho tasmā loko ti vuccati).”이다. 
    (SN.IV, p.52) 한역 불전에도 “危脆敗壞。是名世間。”이라고 나오고 있다. [『雜
    阿含經』卷9 (『大正藏』2, 56b14-15)] 이 세계는「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에서 다음의 세 가지 세간(三世間, tayo-lokā)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Vism, p.204). 
    첫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 satta-loka)으로 모든 중생을 뜻한다. 그러니까 각각의 
    중생은 바로 각각 자신들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공간세간(空
    間世間, okāsa-loka)으로 중생들이 거주하는 장소 즉 환경 세계를 뜻한다. 우주계
    (cakkavāḷa-loka)라고 표현되기도 하며, (Spk.I, p.116) 북전에서 말하는 기세간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행세간(行世間, saṅkhāra-loka)으로 오취온(五取蘊, 
    pancupādānakkhandā)을 뜻한다.(Mp.III, p.87; Vism, p.204) 

붓다는 모든 업보가 금생이나 전생의 업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고 역설했다.65)
만약 모든 업보가 금생이나 전생의 업에 의한 결과라면, 불교의 업 이론은 철저
하게 ‘결정론(決定論)’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는 이러한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에 입각하여 대지나 산과 같은 자연 현상 즉 기세간은 중
생들의 공업의 결과가 아니라 계절에 의해 생긴 것(utu-ja), 즉 자연의 순환 속
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66)일 뿐이라고 해명한다. 이점은『밀린다빤
하(Milindapañha)』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65) 비록 붓다가 중생들은 자신이 지은 업이숙(業異熟, karma-vipāka)을 피할 수 
    없음을 누누이 강조하긴 했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즉 업의 법칙이 
    유연성이 없이 기계적으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고 결과가 이루어지는 테두리 
    안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경감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금생
    에서 선업(kusala-karma)을 많이 짓는다면 그로 인해 이전에 지은 악업(pāpa
    -karma)이 과보를 맺는 것을 피하거나 악업의 영향력이 감소될 수 있다. 반대
    로 악업을 많이 짓는다면 이전에 지은 선업은 과보를 맺지 못하거나 선업의 영
    향력이 감소될 수 있다. 붓다는 이를 갠지스 강에 넣은 소금의 비유를 들어 설
    명하였다.(AN.I, p.249ff) 만약 행위가 항상 그에 상응하는 동일한 크기로만 
    과보를 낳는다면, 그래서 그러한 업의 과보가 경감되거나 해소되는 것이 불가
    능하다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 이유는 소진
    되지 않는 과거 업의 과보가 지속적으로 불선업(akusala-karma)을 분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소금물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이 행한 악업을 
    소진시키고 경감할 수 있는 길은 지금부터 선업을 행하는 길 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불교학자 Peter Harvey(2000, pp.23-31)도 초기 불전 
    속의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 업과 윤회가 숙명론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며 
    이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예컨대, 업과 이에 따른 윤
    회의 삶은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나타나기
    도 하며 악행에 대한 참회를 통해 그 업이 없어질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
    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가장 유리한 지위인 만큼 그것의 의미를 깊이 자각하고 자애(慈,
    mettā)나 연민(悲, karuṇā)을 베풀어 선업을 쌓을 것을 강조한다.
66) 테라와다는 이를 ‘계절의 법칙(utu-niyāma)’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온도, 계절 
    등과 같은 물리적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다.(As. p.854)

 

대왕이여, 무릇 중생으로서 의도가 있는 자는 모두 업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불과 모든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은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땅과 산과 물
과 바람 그런 모든 것들은 계절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허공67)과 열반 이 두 
가지는 업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시절에 
의해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Ye keci mahārāja sattā sacetanā sabbe te kammajā, aggi ca sabbāni ca 
bījajātāni hetujāni, paṭhavī ca pabbatā ca udakañ-ca vāto ca sabbe te utujā, 
ākāso ca nibbānañ-ca ime dve akammajā ahetujā anutujā.(Mil. p.271.)
67) I.B.Horner(1969, p.xviii)에 따르면, 여기서 나가세나(Nāgasena)는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의 교리를 이용하여 왕에게 허공(ākāsa)과 열반
    (nibbāna)은 원인이나 업이나 시절에 의한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설일체유부의 교리에 따르면 허공과 열반은 무위(無爲, asaṁskrta)에 속하지만, 
    테라와다의 교리에 따르면 열반만이 무위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
    지만 여기서 이를 논하는 것은 논자의 목적이 아니다.

 

전술하였듯이, 붓다는『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업의 본질은 의도(思, cetanā)라
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의도는,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개인의 마음 작용 
즉 쩨따시까(cetasika)에 속한다. 그리고 쩨따시까는 ‘4위 82법(四位八十二法)’이
라는 테라와다의 법이론(dhamma-vāda)에서 네 가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의 하나이다. 이점은 바로 업이 본질적으로 단체나 집단과는 무관한 
순수한 개인의 마음 작용이면서 궁극적인 실체로서 인정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와 같이 업은 개인의 마음 작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업(自業, kammassakatā) 즉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이라고 보는 것이 
테라와다의 입장이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담마(dhamma)69)는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ha
-sacca)와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서 중심 주제는 거의 대부분 전자이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가 탐구하고 
분석하는 대상은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으로 이루어진 가화합(假和合)인 개인 
즉 자아이기 때문에 이 자아를 떠나서는 테라와다의 법이론(dhamma-vāda)이 아무
런 의미가 없다. 4위 82법이라는 테라와다의 법이론에 공업이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보다 중요하게, 테라와다는 자아나 중생이나 사람이라는 인습적 명칭
(vohāra-vacana)들이란 사실상 오온으로 이루어진 가화합인 개념(施設, paññatti)
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테라와다는 공업도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한 업의 성향을 통칭하는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70)이자 개념일 
뿐이지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a-sacca)가 아니라고 본다. 마치 개인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듯이, 공업도 단지 개인의 업이 서로 합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제임스 파울 멕 더모트(James Paul Mc Dermott)가 다음과 같이 지적
한 대로이다.
69) 담마(dhamma) 또는 다르마(dharma)의 다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와타나베 
    후미마로(2014, pp.39-61) 참조.
70)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존재에는 세간의 인습(sammuti)과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의 두 가지가 있다. 세간의 인습은 보통의 개념(施設, 
    paññatti)과 관습적 일상용어(vohāra-vacana)를 지칭한다. 이를테면 중생, 
    사람, 남자, 여자, 동물 등의 생명체와 산, 바위, 나무, 집 등의 무생물이 모두 
    세간의 인습에 포함된다. 궁극적 이치는 그와는 반대로 그 자신의 고유한 성
    질(自性, sabhāva)을 가진다. 이것은 더 이상 분해 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성
    분이며, 존재의 궁극의 단위이다. 이것을 담마(dhamma)라고 한다. 다시 말
    해서 ‘사람’, ‘남자’, ‘여자’ 등은 세간의 인습이지 궁극의 단위가 아니다. 
    ‘사람’이란 땅(地, paṭhavī), 물(水, āpo), 불(火, tejo), 바람(風, vāyo)의 네 
    가지 큰 요소(四大, cattāri-mahā-bhūtāni)들과 그에서 파생된 물질인 눈
    (眼, cakkhu), 귀(耳, sota), 코(鼻, ghāna), 혀(舌, jivhā), 몸(身, kāya) 등과,
    마음(心, citta), 그리고 이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 작용(心所, 
    cetasika)들이 한데 모여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요소들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특성(自相, 
    sabhāva-lakkhaṇa)을 가진 궁극의 단위이다. 그래서 사람이란 명칭은 개념
    (施設, paññatti)에 해당하며 사람을 구성하는 정신과 물질의 요소 등은 궁극
    적 이치(勝義, paramattha)라 부른다.

"「담마빠다 앗타까타(Dhammapada-Aṭṭhakathā)」의 위두다바왓투
(Viḍuḍabhavatthu)와 같은 예외가 드물게 있으나, 주어진 상황에 참여한 사람들
의 개인적 업의 결과와 처벌의 합류라는 의미에서만 고전 빨리 문헌들에서 ‘공
업’이 말해질 수 있다."71) 
71) McDermott, James Paul, Development in the Early Buddhist Concept of 
    Kamma/Karma,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1984, p.175.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도 지적했듯이, 이른바 국가나 국민이라고 하는 
큰 단체도 사실은 개인의 방대한 집합일 뿐이며 국민이나 국가가 행동하지는 않
는다. 결국 행동하는 것은 개인일 따름이다. 개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
로 국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72)
72) Rahula, Walpo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and Bedford: The Gordon 
    Fraser Gallery Ltd, 1959, p.87.

 

V. 나오는 말

붓다가 설한 업 이론은 개인이 지은 업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자업(自業, 
kammassakatā)’으로 요약된다. 테라와다도 이러한 붓다의 말씀(buddha-
vacana)에 충실하여 업을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설일체유부와 안다까와 같은 북방 
부파들은 기세간과 같은 물리적 현상들을 중생들이 함께 지은 업의 결과(kamma
-vipāka)로 보고,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에 지나
지 않던 업을, 그것과 동일시하려는 데서 공업의 이론이 대두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공업 이론의 대두는 업을 개인적 책임으로만 해석하려는 전통적인 
업 이론의 종말을 의미하며, 나중에 대승 불교에서 아라한이라는 개인적 이상만을 
추구하던 부파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사회봉사와 중생구제를 강조하는 보살 
사상73)이 형성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승 불교의 흥기74)에 유·무형
의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대중부 계열 안다까와 설일체유부가 공업의 이론을 
주장하였던 점이나, 공업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불교의 사회적 참여나 기여를 부르
짖는 현대 불교인들 대부분이 대승 불교인들이라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75) 
73) 보살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원행(願行, praṇidhāna-cariya)이다. 원
    (願, praṇidhāna)이란 보살(菩薩, bodhisattva)이 열반을 얻기 전까지 모든 중
    생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이나 서원이다. 행(行, cariya)이란 그러한 결심이나 
    서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이다. 이러한 원과 행을 갖춘 보살의 전형이 
    바로『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등의 정토경(淨土經)들에 보이는 법장(法藏, 
    Dharmakāra)이다. 대승의 보살은 스스로 원해서 악취(惡趣, duggati)로 가며,   
    혼자만의 깨달음을 미루어 놓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이는 깨달음을 개인적인 일로 국한시키는 테라와다와 대조적이다.
74) 대승 불교의 기원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일반화하여 서술하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
    다. 첫 번째는 대승 불교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고자 시도한 것으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 서방의 헬레니즘이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 등이 있다. 두 번째는 대승 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시도한
    것으로 대중부 기원설, 대중부뿐만 아니라 설일체유부, 경량부, 법장부 등과 
    같은 다른 북방 부파들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학설, 재가 신자들의 불탑 숭배
    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 종전까지 암송되던 경이 문자화되면서 시작되었
    다고 학설 등이 있다. 아무튼 대승 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한 실정이며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75) 대승 불교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일반화하여 서술하기 쉽지 않으나 그 기본
    적인 가르침은 모든 중생은 붓다가 됨으로써 완벽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대승 불교도들은 종래 초기·부파 불교의 이상이었던 아라한(阿羅漢, arahant)
    의 깨달음은 자기만을 위한 것으로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진정
    한 깨달음은 붓다의 깨달음이라고 본다. 또한 대승 불교도들은 붓다가 되고 나
    서도 혼자서 열반에 들지 않고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여 동등한 붓다의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정신은 법장(法藏, Dharmākara)이라는 보살의 이야기
    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무량수경(無量壽經, Sukhāvatīvyūha-sūtra)』
    에 따르면,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āyus-Buddha)은 법장이라는 보살이었을 
    때 48가지 본원(本願, pūrva-praṇidhāna)를 세우고 5겁의 사유와 영겁의 수행
    을 한 결과, 이러한 원들을 이루고 스스로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에 극락정토
    (極樂淨土, sukhāvatī)를 건립하고 왕생(往生)을 원하는 중생을 맞아들여 구제
    한다는 것이다. 법장이 스스로 붓다가 되는 것을 미루고 다른 중생들과 함께 
    열반의 지복을 누린다는 본원을 세운 것은 초기·부파불교의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으로 대표되는 개인주의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자 공업(工業, 
    sādhāraṇa-karma)으로 대표되는 대승 정신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정토 신앙에서는 전통적인 초기·부파 불교의 개인주의적 수행관과 열반
    론이 철저히 배격되고 모든 중생이 함께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공업의 이론
    이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고 테라와다가 설하는 업 이론이 사회성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고 보아서
도 안 된다. 왜냐하면 테라와다는 업이 기본적으로 자업(自業, kammassakatā)의 
성질을 지닌다고 해석하긴 하지만, 개인이 짓는 선업(kusala-kamma)이나 공덕
(puñña)을 남들과 나눌 수 있음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제 288번『자따
까(Jatāka)』인「맛춧다나 자따까(Macchuddāna-Jatāka)」에는 보살(菩薩, 
bodhisatta)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남은 밥을 갠지스 강에 던지면서 그 공덕을 강
의 신(nadī-devatā)에게 돌리는 이야기가 나온다.76) 오늘날에도 테라와다 불교
권에는 신도들이 음식이나 가사를 비구들에게 공양하고 나서 비구들이 축원을 
하는 동안 손에 물을 따르는 관행이 있다. 이 물은 바다를 채우는 강의 상징으로 
선행의 공덕이 남들과 나눌 수 있을 만큼 크고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어디까지나 자업에 바탕을 두면서 그 선업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업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76) Ja.II, p.423.

또 한 가지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붓다는 개인의 업과 자연 환경을 전혀 무
관하다고 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앙굿따라 니까야』77),「악간냐 숫따
(Aggañña-sutta)」78),「짝까왓띠시하난다 숫따(Cakkavattisīhanāda-sutta)」
79) 등과 같은 초기 불전들에서도 개인의 업과 자연 환경 간의 긴밀한 상호관계
가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후대 테라와다 주석서들에서 ‘다섯 가지 자연
의 법칙(pañca-niyāma)’80) 이라는 이론으로 체계화되었다. 이와 같이 초기 
불교와 테라와다에서도 개인의 업과 그 과보는 그 자신을 넘어서 주변 환경과 
다른 중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다만 참된 이치(諦義, 
saccikattha)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에서 그것을 공업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테라와다의 기본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 개인의 행위를 그가 속
한 집단이나 단체가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할 필요는 없으며, 개인도 그가 속한 
단체나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가 지은 업을 함께 나누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불교
의 이상인 해탈(解脫, vimutti)과 열반(涅槃, nibbāna)도 결국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 개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지, 단체나 집단이 공동으로 성취하는 것은 아
닌 것처럼, 개인은 자신이 행한 특정한 몫에만 책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붓
다의 입장이었고 테라와다도 이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77)『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 따르면, 근친상간(近親相姦, 
    adhamma- rāga), 비뚤어진 탐욕(visama-lobhā), 삿된 법(micchā-
    dhamma)이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고 이 사회의 도덕이 무너져버리는 때가 
    되면, 비가 제때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비가 제때에 오지 않게 됨으로써 
    갖가지 돌림병과 병충해가 생겨나고 농사에 피해를 입게 되며 그 결과 
    식량이 부족하여 인간의 사망률이 높아지게 된다고 한다.(AN.Ⅰ, p.160)
78)『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의「악간냐 숫따(Aggañña-sutta)」에 따르면, 
    최초에 지구에 거주하던 존재들의 몸은 마음으로 만들어졌으며 빛이 나고 있었
    다. 그들은 기쁨을 먹고 살았으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그
    들은 수면 위의 달콤한 땅(rasa-paṭhavī)을 맛보고는 탐욕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그들에게서 갈애(taṇhā)가 생겨났으며,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음식을 맛
    보았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몸은 점점 더 둔탁해져 갔다. 몸에서는 빛이 사라지
    고 기쁨을 먹고 살거나 하늘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능력도 잃게 되었다고 한
    다.(DN.Ⅲ, p.80)
79)『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의「짝까왓띠시하난다 숫따(Cakkavattisīhanāda
    - sutta)」에서 붓다는 사람의 도덕성과 사회변화의 상관관계를 논하고 있다.
    (DN.Ⅲ, p.71)
80)「앗타살리니(Atthasālini)」에 의하면 우주에는 다섯 가지 자연의 법칙(pañca- 
    niyāma)이 작동하고 있는데, 이는 계절의 법칙(utu-niyāma), 종자의 법칙(bīja- 
    niyāma), 마음의 법칙(citta-niyāma), 업의 법칙(kamma-niyāma), 그리고 법의 
    법칙(dhamma-niyāma)이다.(As. p.854) 이들을 달리 해설하면 각각 물리적 
    법칙, 생물학적 법칙, 심리학적 법칙, 도덕적 법칙 그리고 인과의 법칙이 된다. 
    앞의 네 가지 법칙은 각기 고유영역 내에서만 작용하지만 마지막 인과의 법칙
    은 그 모든 영역에 걸쳐서 내부적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각 영역 간에도 작용
    한다. 따라서 물리적 환경 또는 생태계는 살아있는 유기체에 직접 영향을 끼
    치고, 유기체는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며, 마음은 도덕적 힘을 결정한다. 이들
    은 반대로도 작용하는 바, 그때그때 기능하고 있는 성질 또는 힘에 따라 그 
    결과는 해로울 수도 있고 이로울 수도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업 이론과 관련하여 테라와다와 대승이라는 주요한 두 불교 전통
들의 입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테라와다는 업을 개인적 책임으로 보는데 
반해서 대승 불교는 그 업이 주변에 미치는 파급력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승 불교가 기존의 전통 교단들을 사회봉사와 중생구제에 무관심한 소승
(小乘, Hīnayāna)이라고 폄하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테라와다의 업 이론이 단순히 개인적 문제로만 한정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업과 불공업으로 업을 구분하는 것 자체는 테라와다에게 무의미하다
고 볼 수 있다. 테라와다는 자아의 완성을 통해 사회의 완성이 이룩된다고 보는 
점에서 업의 사회적 책임에 더 역점을 두는 대승 불교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업의 법칙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점점 악업(pāpa-kamma)
을 피하고 선업(kusala-kamma)을 실천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개인들이 서로 
모임으로써 그들이 속한 단체나 집단도 선하게 변화해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