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무명(無明)과 공(空) -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통찰/조준호

실론섬 2017. 3. 1. 12:11

[불교학연구 24호]

무명(無明)과 공(空)*

─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통찰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혹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KRF-2008-411-J04401)

조준호/고려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Ⅱ. 욕망의 기본이해

   1. 왜 욕망이 문제인가

   2. 욕망 용어의 용례

   3. 욕망의 경향성과 대상 그리고 종류

Ⅲ. 제법분별(諸法分別)과 욕망의 공성(空性)

   1. 욕망의 발생구조

   2. 욕망의 발달구조

   3. 욕망의 비실재성의 통찰

Ⅳ. 마치는 말

 

[요약문]

불교전반에서 욕망 발생구조와 본질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법체계

는 오온법(五蘊法)·십이처법(十二處法)·십팔계법(十八界法)이

다. 다시 이러한 법에 육육법은 바탕해 있고 십이연기법(十二緣起

法)과 사성제법(四聖諦法)으로 확장되어 설명된다. 이 가운데 십팔

계법은 인식활동과 전개의 기초로 어떻게 욕망이 발생하는가의 과

정을 보여주는 육육법(六六法)으로 불교욕망론의 골격을 제시한다.

이처럼 불교의 중심체계는 욕망의 이해와 욕망의 극복에 놓여있다.

오온·십이처·십팔계가 욕망의 발생구조와 본질에 대한 논의에 초

점이 모아져 있다면 12연기와 사성제는 ‘욕망에 대한 투철한 이해와

이러한 이해에 기초한 극복’에 초점이 있다. 하지만 불교는 어떤 범

주의 욕망이든 무상(無常)과 고(苦) 그리고 무아(無我)를 떠나있

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고(苦)로부터 인간 해방을 위해서는 이

러한 존재의 비실재성을 통찰하는 일이 강조된다. 욕망하는 자아의

무상성(無常性)과 무아성(無我性)이라는 비실재성을 철견하는 것

으로 욕망하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다시말해, 실천적

인 문제에서 공성(空性 : 무실체성)의 자각과 함께 욕망의 허망성을 

체득하여 욕망으로 비롯되는 고통을 극복할 것을 말한다. 이처럼 본

고는 불교의 실천철학적 중심주제인 욕망의 기원과 과정을 밝히고 

다시 이러한 욕망의 무상성을 어떻게 체득하는가하는 문제를 체계

적으로 살펴보았다.

 

1. 들어가는 말

 

불교 욕망론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국내외 학계에서 어느 정도 진척

되어왔다. 국외의 경우 불교 욕망이 중심쟁점이 된 것은 1978~1980

년에 걸쳐 미국 학계에서 A. L. Herman, J. Visvader 그리고 W. Alt 

등이 불교 욕망의 역설 문제를 중심으로 논쟁을 하였다. 이같은 쟁론

은 화와이 대학에서 출간하는 Philosophy East & West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1)

1) A. L. Herman, “A Solution to the Paradox of Desire in Buddhism.”, Philosophy East
   & West , vol. 29. 1, Honolulu :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79 ; W. Alt, “There is
   a no Paradox of Desire in Buddhism.”, Philosophy East & West , vol. 30. 4, Honolulu
   :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80 ; A. L. Herman, “Ah, but there is a Paradox of
   Desire in Buddhism.”, Philosophy East & West , vol. 30.4, Honolulu :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80 ; J. Visvader, “Reply to Wayne Alt’s ‘There is no Paradox of Desire
   in Buddhism.’”, Philosophy East & West , vol. 30. 4, Honolulu :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80.

 

최근에 이러한 쟁론을 의식하고 초기불교전적에 나타난 욕망에 대한 

논의를 David Webster가 진척시키고 있다.2) 그 외에도 불교 욕망론

이 다른 주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1992년에 박경준이 미국 학계에서 쟁론을 벌인 불

교 욕망의 역설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3) 나아가 허우성

은 불교 욕망의 학제간 연구를 처음으로 시도하고 있다.4) 더욱 최근

에는 불교욕망론을 중심으로 서양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생물학과 

관련하여 기획된 결과물을 볼 수 있다.5)

2) David Webster, The Philosophy of Desire in the Buddhist Pali Canon, London and New 
   York : RoutledgeCurzon, 2005.
3) 박경준,「涅槃과 ‘欲望의 逆說’ 문제」, 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編, 
  『韓國佛敎文化思想史 卷下』(서울: 伽山佛敎文化振興院, 1992)
4) 이강수, 황필호 외,『欲望論: 哲學的·宗敎的 解釋』(서울: 경서원, 1995)
5) 정준영, 한자경 외,『욕망: 삶의 동력인가 괴로움의 뿌리인가』(서울: 운주사, 2008)

 

이 외에도 욕망이 불교의 중심주제인 만큼 국내에서도 여러 관점으로 

다루어져 왔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가 기존연구와 차별성을 갖고자

하는 점은 불교의 기본 법상(法相)6)의 체계 속에서 욕망의 기원과 발

생구조와 발달 구조 등을 인식론적으로 밝히고 그러한 욕망이 갖는 비

실재성의 통찰과 극복이 어떻게 실천철학적 입장에서 제시되고 있는

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6) 국내에서 법상(法相)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체계의 선구적 연구는 고익진 교수의 『아
   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90)를 들 수 있다.

 

Ⅱ. 욕망의 기본이해

 

1. 왜 욕망이 문제인가

초기불교 이래 불교경전에서 욕망(欲望)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는 대단

히 많다.7) 예를 들면, chanda(欲), rāga와 lobha(貪 또는 貪欲/欲貪), 

taṇhā(渴愛 또는 愛), pīya(愛), abhijjha(愛慾), ālaya(愛慾), kāma(欲

樂), icchā(渴望), upaddhi /upādāna(取: 강한 욕망의集積) 그리고 

gedhi,8) āsā, esanā, pipāsā 등이다.9) 또한 이러한 용어들과 복합어

로서 kāmataṇhā(愛欲)나 kāmacchanda(愛欲)로도 나타난다. 이들 용

어는 서로 간 의미와 개념의 차이가 있으며, 맥락에 따라서는 또한 긍

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또는 중립적이거나 긍정과 부정을 같이 나타

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제

대로 선행되지 않았을 때, 불교의 욕망에 대한 오해가 다분히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일체의 욕망을 금기시하고 부정

하는 입장으로만 이해하는 경우라든지, 또는 ‘불교는 욕망을 완전히 

없애라고 한다는데 수행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냐’, 따라서 욕망을 극

복하려는 욕망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하는 

것 등이다.10)

7) 원래 욕망(欲望)이란 말은 영어의 desire를 번역하기 위한 근대의 신조어이지만 이미
   한자문화권에서는 이에 상응한 말로 욕(欲)이라는 말이 사용되어져왔다. 다시 산스끄
   리뜨의 불교전적이 한역되는 과정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욕망 개념에 관한 여러 용
   어들이 복합어로 나타난 듯하다. 예를 들면, 욕구(欲求), 욕념(欲念), 욕원(欲願), 욕
   탐(欲貪), 탐욕(貪欲), 탐애(貪愛), 탐구(貪求), 욕락(欲樂), 탐착(貪着), 욕수(欲受),
   욕애(欲愛), 애욕(愛欲), 욕상(欲想), 욕법(欲法), 욕사(欲事), 욕애(欲愛), 욕취(欲
   取) 등이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두 무엇을 바라고 원한다는 의미가 바탕 되어 있다.
8) 탐욕을 의미하는 이 말의 산스끄리뜨는 gṛdhi로서 같은 인도 유럽어족의 영어 greed와
   어원적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9) 욕망을 나타내는 20여 가지 이상의 주요 용어에 대한 분석은 David Webster의 앞의 책
   pp. 97-142에 잘 나타나있다.
10) 앞에서 언급한 A. L. Herman이 주장하는 불교욕망의 역설이 바로 이러한 점이다. 이에 
    대해 W. Alt 와 J. Visvader는 불교욕망의 역설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다시 David 
    Webster는 그의 저서에서 W. Alt 의 반론에 가세하여 A. L. Herman의 주장은 “욕망의 
    성격을 매우 단순화시킨 이해에 따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David Webster, 앞의 책, 
    p. 3).

 

불교에서 세간적인 차원이든 출세간적인 차원이든 욕망의 목적과 

결과는 기본적으로 즐거움의 추구와 충족으로 본다. 이는 욕락(欲樂) 

또는 오욕락(五欲樂)이나 이욕락(離欲樂)이라는 말의 용례에서도 나

타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즐거움의 추구와 충족을 무조건

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부정하는 금욕의 입장은 아니다. 가치적인 면

에서 궁극적으로 고통으로 귀결되는 욕망을 조절하고 자제할 것을 

주문하지 그렇지 않는 경우는 적극 권장된다. 예를 들면, 복락(福樂)

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괴로움이 아닌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가치로서 욕망의 행위는 다름아닌 ‘복행(福行: puññābhisaṅkhāra)’

이라는 말로 두루 나타난다.11) 특히 출가자가 아닌 일반인에 있어

서는 긍정적으로 추구해야 할 욕망은 복락의 욕망이다.

11) DN ⅱ, p. 217 ; SN ⅱ. p. 80 등.

 

더 나아가 세간적인 차원을 넘어 선정 수행의 결과도 또한 ‘즐거움’

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경전에서 ‘일체의 욕망을 지멸’한 열반의 상

태를 역설적으로 ‘최상락(最上樂)이라 하고, 이러한 열반의 경지 이

전까지의 초선에서 상수멸정이라는 구차제정을 ‘더 없는 즐거움’

(sukham abhikkantatara)12)이라는 말로 선정수행을 설명한다.13) 

찬가지로 네 가지 종류의 즐거움(四種樂)이 열거되는데 이욕락(離

欲樂), 원리락(遠離樂), 적멸락(寂滅樂) 그리고 보리락(菩提樂)이

그것이다.14) 이외에도 열반락(涅槃樂)이나 현법락주(現法樂住)라

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세간적인 복락추구의 욕망은 물론

출세간차원의 열반 성취도 무엇인가를 바라고 원하고 추구한 결과라

는 점에서 욕망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다.15) 실제로 경전에서 열반

성취 이전까지를 욕망을 의미하는 chanda(欲)라는 말이 사용한다.16)

12) 한역 잡아함 17권 485경에서는 ‘至福’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복(福)은 낙(樂)을 설명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13) 한역 잡아함 17권 485경 ; SN ⅳ. p. 223 그리고 Majjhima Nikāya의 59경.
14) SN ⅳ, p. 228.
15) 이러한 점에서 좋은 가치의 욕망 추구 행위로 praṇidhāna(願)와 수행 정진(精進)의
    말로 vāyama, viriya 그리고 padhāna 등을 들 수 있다.
16) SN ⅴ. pp.271-272.

 

이처럼 욕망의 목적과 결과를 중심으로, 다시 욕망을 볼 때 불교에

서는 욕망을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

만 어떤 욕망 행위가 일시적으로 즐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괴로

움으로 전환 또는 환원되는 성격[惡業 /惡行]이라면 절제와 지멸이

강조된다. 반면에 고통으로 전환되지 않는 좋은 결과[善果]의 인연으

로서의 욕망 행위[善業 / 善行]의 실현은 적극 권장되고, 그 결과로서

얻어지는 즐거움 또한 부정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면에

서 불교가 일차적으로 이욕(離欲)과 절욕(絶欲)의 대상으로서 강조

했던 욕망은 바로 고통으로 전환되는 성격의 욕망의 범위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불교는 궁극적으로 세간적인 차원의 욕망추구보다는 출세간 

차원의 욕망추구와 욕망지멸로 이끌고 있다. 인과(因果)라는 한계를 

가진 조건적인 욕망의 복락은 넘어서야 한다고 한다.17) 세간적인 

차원[行/有爲]의 욕망추구와 그 과보(果報)는 조건성에 놓인 것으로 

안정적이지 않다는 한계성을 가진 반면에 조건성에서 벗어난 무위

의 열반은 안정적이라는 것이다.18) 이러한 이유 때문에 12연기 설

명에서 “만약 무명(無明)에 있는 사람으로 복행(福行)을 계획하면 

그의 식(識)은 복으로 나아가 갖추어진다.”라고 하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과의 한계에 있는 욕망추구는 근본적으로 무명(無明)에 조

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7) SN ⅱ, p. 83.
18) SN ⅱ, p. 82 ; 대응 경전은『大正藏』2, p. 83b.

 

이러한 맥락에서 무위와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이나 붓다는 복이나 

비복행(非福行)의 개념에서조차 넘어서 있다.19) 아라한이나 붓다

와 같이 열반과 무위를 성취한 존재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일체의 욕망을 완전히 지멸한 존재로 규정한다.

19) Sn 520, 547, 636, 790 게.

 

궁극적으로 불교에서 왜 욕망을 가장 문제 삼는가에 대한 이유는 불

교가 일체의 인간고(人間苦)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20)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는 지향점에서 인간 괴로움의 조건을 기본

적으로 욕망과 무명(無明)으로 본다. 때문에 불교사상의 커다란 비중

은 욕망의 발생구조와 과정 그리고 그 본질을 밝히는데 초점이 맞추

어져 있다. 욕망과 무명이 있는 한 궁극적으로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고통의 지멸은 바로 욕망의 완전지멸을 의미한다. 부

연하면, 불교는 세계를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두 범주로 구분하

여 설명할 때 조건적인 욕락이나 복락의 범위는 유위에 해당되고 욕

망이라는 조건을 떠난 범위를 무위라한다.

20) 출세간적 입장에서 Th 1의 93게송에서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는 고를 추구하는 자이
    다.”라고까지 단정한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는 지향점에서 복락추구

의 욕망을 긍정하고 권장하는 것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욕

망의 조건성을 떠난 무위의 실현으로 욕망의 완전한 지멸을 말한다

는 양면성이 있다.

 

2. 욕망 용어의 용례

이러한 범위를 중심으로 불교의 본격적인 욕망론을 살펴보기 위

해서는 먼저 욕망에 관해 쓰인 주요용어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21)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용어는 kāma(欲樂),

rāga(貪 또는 貪欲/欲貪), taṇhā(渴愛 또는 愛) 그리고 chanda(欲)

이다.22) 본고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을 편의상 ‘욕망(desire)’이라는

말로 일괄하여 논의한다.23)

21) David Webster의 앞의 책 pp. 97-142에서는 rāga, lobha, taṇhā, icchā, apekkhā,
    abhijjha, ālaya, kāma, chanda, upādāna, āsā, esanā, kilesa, pipāsā 등 20여 가지 
    이상의 용어들이 논의된다.
22) 초기불교경전의 게송에 나타나는 욕망 개념을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글은 김준
    호,「초기불교의 욕망론과 선(禪) -『 숫타니파타』와『 담마파다』를 중심으로 - 」,
   『 동서철학연구』제36호, (충남: 한국동서철학연구회, 2005), pp. 202-205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kāma, rāga, taṇhā의 용어상에 있어 개념의 차이를 잘 정리하고 있
    다. 본고에서는 주어진 주제에 따라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였지만 앞으로 경
    증(經證)과 이증(理證)에 따른 개념간의 차이를 심도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23) 하지만 설명 상에 있어 원어 제시가 필요할 경우에는 예외로 둔다. 실제로 한문번역
    에서도 번역자에 따라 다르지만 같은 경전에서도 용어 상의 구별없이 옮겨진 예를 볼 
    수 있다. 현대 한글 번역에 있어서도 한문 경전이 되었든 빠알리나 산스끄리뜨가 되었
    든 ‘욕망’이라는 말로 구별없이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영어권
    의 불교경전의 번역에서도 desire라는 말이 일괄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먼저를 kāma를 살펴보면, 그 의미하는 바는 1차적으로 안(眼)·이(耳)·

비(鼻)·설(舌)·신(身)의 같은 다섯 감각기관과 그 감각대상을 조건으

로 일어나는 욕망을 말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감각적 욕망’이라 옮

길 수 있다. 이에 반해 taṇhā와 rāga는 kāma보다는 훨씬 깊이 잠재하

면서 넓게 작용하는 쾌락추구의 욕망을 의미한다. taṇhā는 한역으로 주

로 애(愛)와 갈애(渴愛)로 옮겨졌으며, rāga는 탐(貪)으로 옮겨졌다. 따

라서 taṇhā의 경우 유전연기(流轉緣起)의 12연기 가운데 여덟 번째 항

목으로 제시되고 환멸연기(還滅緣起)의 사성제에서는 두 번째 집성제

(集聖諦)의 내용으로 제시된다. 여기서는 세 종류의 갈애 중 첫 번째로 

kāma와 taṇhā의 복합어인 kāmataṇhā(欲愛)라는 말도 사용되며 한역

으로는 욕애(欲愛)로 옮겨졌다. taṇhā는 어원적으로 ‘갈증’을 의미하는 

말로 영어로 thirst나 lust, craving 등으로 옮겨지는데 이는 한역의 갈

애와 의미 상 통한다. rāga는 탐진치(貪瞋癡) 삼독 가운데 첫 번째인 탐

에 해당되는 말이다. 어원적으로 ‘색깔’이나 ‘물든 것’을 의미하여 colour

나 hue, dye로 옮겨지기도 하지만 lust와 attachment로도 또한 많이 옮

겨진다. rāga는 다시 불을 의미하는 aggi와 합성어로 ‘탐욕의 불’을

의미하는 rāgaggi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chanda는 impulse, will,

wish, intention, desire-to-do 등으로 영역되며 rāga라는 말과 복

합어로 chandarāga(exiting desire)나 kāmacchanda(excitement

of sexual pleasure)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처럼 rāga는 염색을

의미하는 어원을 갖는데, 그것은 탐진치 삼독(三毒)의 탐의 원어로

서 깊이 물들어있는 중독성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중독(中

毒)의 독(毒)이라는 말이 더해졌으며 모든 욕망을 대표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는 이유이다. 탐(rāga)은 동사형인 rajjati가 kāma와 함

께 쓰여 ‘성행위의 중독 또는 물들음’에 대한 말로 이미 초기경전에

나타난다.24) 그렇기에 궁극적인 경지인 열반을 설명할 때 탐진치 삼

독의 제거로 정의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taṇhā의 경우

는 12연기와 사성제에 제시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제거해야 되는

욕망으로 나타나지만 어원적으로도 영역의 thirst나 한역 갈애에서

알 수 있듯이 만족할 수 없는 타오르는 욕망을 말한다. 실제로 인도

의 살인적인 더위를 경험해 보면 왜 붓다가 인간고의 근원적인 욕망

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taṇhā는 해소되

지 않는 갈증의 욕망을 의미한다. 이처럼 kāma보다는 taṇhā와 rāga

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말보다

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말이지만 taṇhā와 rāga의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ālaya라는 말이다. 영역으로 lust, clinging, desire 그리고

attachment로 옮겨지며 후에 대승에서 제8아뢰야식을 의미하는 말

로 발전하였다는 중요성이 있다. 욕망에 따른 염오(染汚)의 심층의

식으로 대승의 욕망론을 설명한데 전문용어이다.

24) Sn 141게.

 

다음은 욕(欲)으로 한역된 chanda이다. chanda는 불교 욕망론과 관

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큰 용어이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

인 욕망 그리고 가치중립적인 욕망 모두를 나타내는 가장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 교학에 있어 인간 행위의 가치

를 kusala(善)와 akusala(非善/惡) 그리고 avyākatacitta(無記: 非善

非惡)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 설명할 때 chanda는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된다.25) 이에 반해 taṇhā와 rāga 등 욕망을 나타내는 다른 용

어들은 akusala(非善/惡)에만 배당된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의 욕

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선욕(善欲 : kusalacchanda/k-

usaladhammacchanda)이라 하여 선과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과 감

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渴愛 : taṇhā]과 구분한다.26) 이처

럼 chanda는 지멸의 대상으로 부정적적인 의미도 있지만 8정도와 

같은 불교수행 전반을 닦는데도 마찬가지로 ‘chanda의 성취’(chanda

-sampadā)로 설명된다.27) 실제로 경전에서 열반 성취 이전까지를 

욕망을 의미하는 chanda(欲)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다음과 같다. 

한 바라문이 아난존자에게 무엇을 위해 세존의 지도하에 범행(梵行)

을 닦느냐는 질문에 ‘욕(欲 : chanda)을 끊기 위해서 범행을 닦는다’고

답변한다. 이에 다시 욕을 끊는 길이 있느냐는 질문에 ‘욕(欲)에 의

해 욕이 제거된다’28)고 답하자 이는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다고 의

문을 제기하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어

느 수행처에 가려는 욕이 생겨 그 수행처에 도착하면 다시 그러한 수

행처에 도착하려는 욕이 계속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묻는

다. 바라문은 수행처에 도착하면 목적지에 이르려는 욕망은 그친다

고 답변하자 마찬가지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욕도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게 되면 그러한 성취하려고하는 욕망도 소멸되는 것

으로 설명한다.29)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외학계에서 욕망

의 역설문제가 논의될 때 박경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W. Alt가 제시

한 역설에 대한 해결의 논리구조와 일치한다.30) 또한 이같은 설명은

흥미롭게도 최근에 욕망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다루고 있는 윌리엄

B. 어빈(William B. Irvine)의 두 종류의 욕망 구조와 흡사하다. 어

빈은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인 ‘종국적 욕망(terminal desire)’과 이를

이루기 위한 ‘도구적 욕망(instrumental desire)’으로 나눈다.31) 예를

들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은 종국적 욕망이고, 이를 위해

자동차 키를 찾아 차를 몰고 식당에 가려는 욕망은 도구적 욕망이라

는 설명이 그것이다. 그래서 식당에 도달하면 도구적 욕망은 그친다

고 한다.

25) 참고, Mathieu Boisvert, The Five Aggregates : Understanding Theravada Psychology 
    and Soteriology, p. 107.
26) 가장 이른 쓰임새는 이미 AN ⅲ, p. 441에 나타난다 ; 이러한 선욕의 응용적 논의는 
    정기문,「불교의 욕망관과 경제문제의 인식」,《불교평론》 Vol.3 no.4 (통권9) (서
    울 : 불교평론사, 2001.12), pp. 272-274를 참고.
27) SN ⅴ, pp. 30, 33, 34, 37.
28) SN ⅴ, p. 272 : “chandena ca chandaṃ pajahissatī.”
29) SN ⅴ. pp. 271-272.
30) W. Alt, “There is a no Paradox of Desire in Buddhism.”, Philosophy East & West , vol.
30. 4, Honolulu :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80, p. 527 ; 박경준,「 涅槃과 ‘欲望의
    逆說’ 문제」, 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編,『 韓國佛敎文化思想史 卷
    下』(서울: 伽山佛敎文化振興院, 1992)
31) William B. Irvine, on Desire: Why We Want What We Want : 한국어 번역은 윌리엄 B.
    어빈(윤희기 역)『, 욕망의 발견』(서울 : 까치, 2008), pp. 75-88.

 

불교에서 최고선(最高善)에 이르려면 모든 욕망을 극복해야 함을 

설한다. 따라서 욕망극복의 수많은 방법과 수행도가 제시되어 있

다. 하지만 욕망극복을 위한 노력도 또다른 욕망이라 할 때 종국적 

욕망으로 제시되는 것은 열반과 해탈에 대한 욕망이다. 열반과 해

탈에 대한 욕망은 일체의 욕망이 그친 상태를 말한다. 이처럼 세속

적 욕망을 포함한 일체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처방전으로 해탈

에 대한 욕망이 제시되는 것은 마치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

어선다’는 이치와 같다. 다시 욕망으로 욕망을 제거하고 소멸한다

한다는 사상이 좀 더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 사상으로 전개된 것은 

대승의 원(願) 사상이다. 발원(發願)과 서원(誓願)은 개인적 수준의 

욕망이 아닌 다른 존재나 또는 공동의 이익과 정신적 향상을 가져

다주는 일을 성취하기 위한 간절한 원망(願望)으로서 욕망이다. 서

원(誓願)이라는 말에서 보여주듯 맹서할 정도의 강렬한 욕망이다.

 

3. 욕망의 경향성과 대상 그리고 종류

불교는 욕망이야말로 삶을 이끌어가고 지배하는 힘으로 본다.32)

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또는 가치중립적이든 간에 모두에 해

당한다. 범주적인 세계구분에 따르면 인간이 처한 세계는 욕망이 지

배하는 세계로서 욕계(欲界)이고, 욕망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

에서 욕유(欲有)이며 그리고 욕망이 있는 한 계속해서 욕망으로 인

한 탄생을 갖는다하여 욕생(欲生)이라 규정한다.33) 때문에 욕망은

선천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kāmarāga(欲貪)의 anusaya라는

말을 통해 그러한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욕망을 설명한다. anusaya

는 한역으로 수면(隨眠)이나 사(使)로 그리고 영역으로는 latent

deposition, dormant deposition, tendency, predisposition 등으

로 옮겨졌다. 현재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잠재의식의 힘이나 심층

의 경향성을 말한다. 한역 사(使)는 심층의 경향성, 즉 욕망의 부림

에 처해 있는 인간현실을 나타낸다. 여러 종류의 anusaya가 설명되

지만 욕망과 관련한 구체적인 용어는 ‘kāmarāga(欲貪)의 anusaya’

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개인적 행동양식을 보

이는 것은 바로 제각기 다른 수면(隨眠 : anusaya)의 내용 때문이

다. 이처럼 수면은 과거의 집적(集積)으로서 개개인의 의식과 행

위를 제약하며 한정하는 잠재의식이다. 개개인의 심층에 잠재한 욕

망의 수준과 내용에 따라 저절로 그렇게 드러나는 세계상(世界像)

을 말한다. 한역 사(使)는 인간이 이러한 욕망의 부림[kamarāgaanusaya(

欲貪隨眠)]에 처해있는 상황을 나타내는 역어이다. 다

시 anusaya는 상속심(相續心: citta-santāna)으로 존재지속심(存

在持續心 : bhavaṅgacitta)이라 설명된다. 유식불교에서는 아뢰야

식(ālāyavijñāna)이라 한다. 이러한 욕망의 잠재성 성향은 갓 태어

난지 얼마되지 않은 천진무구하게 보이는 갓난아기에게 있다고 한

다.34) 이는 불교는 욕망이 이미 선천적인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하

지만 개개인에 있어 언제부터 수면(隨眠)이 기원하는가는 알 수 없

다고 하지만35) 아라한이나 붓다와 같이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면 소

멸된다고 한다. 즉 지금까지의 열반성취의 욕망은 열반을 얻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설명된다.36) 따라서 열반을 성취하지 못한 

떠한 존재는 모두 욕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2) 이 같은 맥락의 강조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의 화살’(taṇha
    -salla)을 맞은 상태이고, (Th 1, 223, 514. 448 게송)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
    에 의해 끌려 다니며, 어떠한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가?” 라는 질문에 
    ”욕망[渴愛]이 세상을 이끌고 욕망에 의해 끌려 다니며 욕망이라는 하나의 법이 모
    든 것을 지배한다.“(SN ⅰ. p. 39) ; “세상은 욕망(icchā)의 화살이 꿰뚫고 있고, 세
    상은 욕망의 연기에 휩싸여 있다. 세상은 욕망[渴愛]에 묶여있다“(SN ⅰ. p. 40) 라
    고 한다.
33) 가치적인 세계구분으로 삼계(三界)는 욕계를 포함한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
    가 있다.
34) MN ⅰ, 432 f.
35) SN ⅱ, p. 178.
36) SN ⅴ. p. 273.

 

이러한 다양한 욕망의 세계와 관련하여 먼저 감각적 욕망의 구체적

인 대상은 “농토, 금, 소, 말, 하인, 친척, 여자 등으로” 나타나는 경

우37)도 있지만 욕망을 범주적으로 오욕(五欲)·육애(六愛)· 삼애(三

愛) 등의 종류로 제시되기도 한다. 오욕은 시각적 욕망, 청각적 욕망, 

후각적 욕망, 미각적 욕망, 촉각적 욕망으로 모두 감각기관에 기초

한 감각적 욕망이다. 이에 육애는 여섯 번째인 의근(意根)과 법(法)

이 추가되는 것으로 인간욕망의 총체적인 상황(色愛, 聲愛, 香愛, 

味愛, 觸愛, 法愛)이 성립된다. 이는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서로 관

계하여 일어나는 욕망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인식주관인 육근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의식[意]의 육근(六根)이고 

이에 상응하는 대상을 각각 색깔/ 형상[色]·소리[聲]·냄새

[香]· 맛[味] 그리고·감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이다. 이러한

육근과 육경이 인연하여 보고[見]·듣고[聞]·맡고[嗅]·맛보고[味]·

접촉하고[觸]·아는[知] 욕망의 범위를 분석적이고 범주적으로 설명

한다. 여기서 색애(色愛)에서 촉애(觸愛)까지 순서는 인체구조상

높은 순서부터 배열이지만 인식 수준이나 정도 그리고 욕망의 수준

과 범위를 또한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

게 있어 시각적 정보가 차지하는 범위가 다른 감각기관보다 더 크

고 그 다음으로 청각 등이라는 것이다. 경전에서 욕망 문제와 관련

해서도 시각적 욕망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

다. 이와 함께 욕망의 인식주관인 육근(六根)과 그 대상이 되는 육

경(六境)의 관계에 있어 다섯 번째까지인 몸과 감촉까지는 각각의

기관과 대상이라는 한정이 있는 반면에 마지막 여섯 번째는 앞의 다

섯의 활동에 모두 관여한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눈은 시각대상만

을 기능상으로 한정하여 작용하지 청각 대상 등에는 관여할 수 없다

는 것인데 반해 마지막 의식은 다섯 감각기관을 조정하고 제어하는

관할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근(意根)의 감각기관이

다른 오근이 구체적으로 특정한 장소를 갖는 데 반해 특정기관을 명

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근이 ‘가슴‘인가 ’두뇌’인가 하

는 논쟁이 있어왔다. 의근의 대상을 법(法)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현

대학자들은 일체의 현상을 의미하는 말로 받아들인다. 이는 개념이

나 이론 그리고 관념 등의 일체의 정신적 형성물까지 포함하는 개념

이다. 따라서 법애(法愛)라는 것은 개념이나 이론 그리고 관념 등에

대한 욕망을 말하는 것으로 그러한 욕망의 집착수준이 강화된 것을

법집(法執)이라고 한다.

37) Sn 769게.

 

다음으로 삼애는 애욕(欲愛: 성적 욕망을 위시한 감각적 욕망)·유애

(有愛 :생존을 지속시키려는 욕망)38) 그리고 무유애(無有愛 : 비생

존욕, 생존을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욕망)39)이다. 이는 십이연기와 

사성제의 집성제에서 인간고(人間苦)의 원인적이며 조건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갈애라는 욕망을 세 가지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제시된다. 

다시 삼애라는 범주로서 욕애(欲愛 : 감각적 세계로터 인연하는 욕

망)·색애(色愛 : 물질의 세계로부터 인연하는 욕망)·무색애(無色愛 : 

물질세계를 넘어선 세계로부터 인연하는 욕망)이 있다.40)

38) 이를 쇼펜하우어의 ‘살려고 하는 의지’와 비견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참고, 和辻哲
    郞,『원시불교의 실천철학』, 안승준 옮김(서울: 불교시대사, 1993), p. 208.
39) 이에 무유애에 대한 해석상의 논란으로 인해 제시되는 말 가운데 하나는 무유애를 
    ‘번영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프로이드의 ‘사(死)의 본능’(thanatos)와 비
    교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40) 잡아함 298경.

 

Ⅲ. 제법분별(諸法分別)과 욕망의 공성(空性)

 

1. 욕망의 발생구조

불교는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현실세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의 나와 아무런 상관없이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는 여기 있는 나와 그리고 나와 만나는 모든 

것들이 화합해서 만들어내는 장(場)을 ‘일체법(一切法)’ 또는 ‘제법

(諸法)’이라 이름한다.41) 기본적인 법의 체계에서 일체법은 오온법

(五蘊法)·십이처법(十二處法)·십팔계법(十八界法)이다. 오온법

은 인간 존재의 일체로서, 십이처법은 인간 존재의 인식주관과 인식

객관으로서 일체이고, 십팔계법은 오온, 십이처를 바탕으로 전개되

는 의식의 세계로서 일체를 말한다. 다시 일체법은 ‘제법분별(諸法

分別)’하여 인간존재와 세계존재를 분석하고 해체하여 설명하는 방

식을 띤다. 이러한 분석과 해체는 욕망하는 존재세계의 공성(空性)

또는 비실재성을 보여주려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욕망문제를 중

심으로 일체법의 의미를 다시한번 검토해 본다. 이는 이후 전개될

논의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 발

생의 구조적 기초 또는 인식론적 기초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의미

를 갖는다.

41) 잡아함경 권 13. 321(『大正藏』2, 91b)

 

1) 오온법(五蘊法)

오온은 오취온(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a)이라고 설해진다.

오온의 온(蘊 : khandha)은 ‘모임’, ‘다발’ 의 의미로 인간존재는 색

(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모임이나 다발이라는

의미이다. 색은 물질현상 일반을 나타내며 수·상·행·식은 정신

현상의 일반을 뜻한다. 각각의 오온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색은 인

간의 육체를 포함해 경험되는 일체의 물질현상이라면 수는 괴로움

과 즐거움 등을 느끼는 감수(感受)이며, 상은 앞의 감수작용에 따라

표상작용 또는 개념화시키는 인식작용이고, 행은 일체의 의지적 작

용을 그리고 식은 대상을 총체적으로 분별하는 지각작용을 말한다. 

오온은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로 인간존재의 일체를 범주적으로 포

괄하여 설명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각각의 오온은 “과거의 것이

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안에 있는 것이거나 밖에 

있는 것이거나, 거친 것이거나 가는 것이거나,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거나 가까이 있는 것이거나 그 일체”를 말

한다라고 설명한다.42) 그리고 다시 이러한 오온을 오취온이라하는 

것은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서 욕망[貪]과 성냄과 어리석음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큰 번뇌의 마음이 생기는 존재상태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43) 계속해서 욕망하는 존재로서 욕망의 적집체(積集體)

라는 의미로 인간존재를 오취온(五取蘊)이라 하는지는 다음과 같

이 설명된다. 즉 인간이 ”눈[眼]으로 좋아하는 빛깔[色]을 보고는 

마음으로 기억하고, 빛깔을 사랑[愛]하며, 욕망[欲]과 상응(相應)

하고, 마음으로 즐기며[樂], 그 근본을 더듬어 보는데, 그 근본은 

곧 과거이다”라고 하여 삼세 가운데 먼저 과거와 관련하여 욕망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44) 계속해서 “그의 식(識)은 과거

에 대해 욕망하고[欲] 물들고[染] 집착[着]”하며 발전해가는 단계

와 구조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미래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게 

되기를 마음으로 그것을 즐기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는 “식

(識)이 현재에 대해서 욕망하기에 물들고 집착”하는 것으로 시점

과 관련해 과거와 같이 눈[眼]으로, 마음으로 욕망하고 물들고 집

착”하는 것과 같은 발전 구조를 말한다. 여기서 욕망의 발생과 함

“마음으로 즐기며[樂]”라는 표현은 욕망이 원인적인 행위로서 

추구하는 목표와 결과는 쾌락[樂]임을 여주고 있다. 다시 “식

(識)이 욕망하고[欲] 물들고[染] 집착[着]하기 때문에 곧 그것을 

즐긴다”는 표현은 의식에 욕망이 잠재의식화되어 계속적인 집착

을 유발시키는 존재상황을 설명하고 있다.45) 인간은 이렇게 의

식에 욕망이 계속적으로 잠재의식화되는 과정에서 집착 수준이 

더욱 높아져 실체론(實體論)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형성시킨다.46)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와 인간존재를 변치않는 불변의 그 

어떤 존재로 상정하는 다양한 인간론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과 인간관은 주관과 객관, 육체와 정신이 따로 

립된 실재(實在)처럼 간주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욕망과 집착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붓다에 의해 오온법이 제시된 목적은 

실체론(實體論)적 자아관념을 파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망의 대상이나 욕망하는 자아를 실체적으로 받아 들이는 관념은 

두 의식이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47)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존재를 오온으로 분석하고 해체하여 

욕망과 집착 수준을 경감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지멸하게 한다. 

다음의 경전은 그러한 목적을 잘 나타내는데 다음과 같다.

42) 잡아함 권 2. 55(『大正藏』2, 99b)
43) 잡아함 권 2. 55(『大正藏』2, 99b)
44) 중아함 제14. 157(『大正藏』1, 679c-678b)
45)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같이 잠재의식화된 욕망은 오온이나 오취온의 설명에서
    는 생략되었지만 한역으로 수면(隨眠)이나 사(使)로 옮겨진 anusaya 개념을 통해 드
    러난다.
46) MN ⅰ, p. 136-7에 의하면 인간이 왜 실체론적 개념을 설정하는가에 대해 붓다는 존
    재를 지속시키고자하는 생존욕, 다시말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통찰한다. 즉
    죽음과 함께 절멸될 것이다라는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설명한다.
47) SN ⅲ. pp. 162, 171.

 

색은 무상(無常)하다. 모든 색을 생성시키는 인(因)과 연(緣)도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에 의해 생긴 색들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겠느냐? 수·상·행도 마찬가지이며, 식 또한 무상하다. 모든 식

을 생성시키는 인과 연도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에 

의해 생긴 식들이 어떻게 영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비구들아, 색은 

무상하고, 수·상·행·식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我]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我所]도 

아니다.48)

48) 잡아함 권 1.11(『大正藏』2. 2a)

 

색을 위시한 오온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고 하는 무상성(無

性)에 기초하는 생멸의 관계성을 말한다. 다만 원인[因]과 조건[緣]

에 의해 오온은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인연도 무상하다

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무상한 이치는 괴로움이고 또한 그 어떠

한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도 상주불변하는 실체적 요소가 없다는 것

이다. 이것이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인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

개고(一切皆苦) 그리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원문에 의하면 

무상하므로 고(苦)이고, 무상하고 고이기에 무아(無我)라는 논리를 

보여준다. 삼법인은 세계와 인간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여실한 속성

을 보여주는 진리로 취급된다. 위의 인용경전에서는 무아를 논증하

고 실체론적 자아관[有我見]을 비판하기 위해 아(我)와 아소(我所)

만이 언급되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세부적으로는 네 개 그리고 20 항

목까지 나열된다. 여기서 실체적론적 자아관을 분석하여 비판적으

로 검토하고 있는 네 개만을 소개하면 첫째, 내 것이다 둘째, 나의 것

이다 셋째, 내안에 오온이 있다 넷째, 오온안에 내가 있다라는 것이

다. 부연하면 ‘나’는 실체론적 자아를 의미하고, ‘나의 것’[我所]은 대

상을 실체론적 자아에 연장된 소유로 보아 자아와 동일시하는 태도

를, ‘내안에 오온이 있다’는 실체론적 자아속에 현상적 자아가 있음

을, 그리고 ‘오온안에 내가 있다’는 반대로 현상적 자아 속에 실체적

자아가 내재해 있다는 사고방식을 각각 의미한다. 이를 오온무아(五

蘊無我)라고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제법공상(諸法空相)이라 표현한

다. 따라서 무아의 무실체성은 공성(空性)과 동의어이다. 무상설과

무아설에 의하면 모든 존재에 있어 실체는 없고 다만 존재를 성립시

키는 여러가지 원인이나 조건이라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욕

망하는 자아나 그 대상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오온

의 무실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다.

 

색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하며, 끊지 못하고, 욕망을 떠나지 못

하면[不離欲] 괴로움을 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에 대해

서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하며, 끊지 못하고, 욕망을 떠나지 못하면 괴로

움을 끊을 수 없다.49)

49) 잡아함 권 1. 3(『大正藏』2, 1b) ; SN ⅲ. pp. 26-27.

 

이렇게 오온의 무상성과 무실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은 욕망을 떠

나지 못하는 것[不離欲]과 동일선상에서 열거된다. 다시말하면, 이는 

무상성과 무실체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욕망을 떠나지 못하면 괴로움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은 

강한 욕망과 집착 때문에 인간과 그 대상 세계를 조작과 왜곡으로 나

아가 고통의 현실을 초래한다는 것을 말한다.

 

2) 십이처법(十二處法)·십팔계법(十八界法)

오온법이 욕망으로 연기(緣起)하는 인간 존재를 보여주려 했다

면, 다시 이러한 오온법을 기초하여 인간존재의 주관과 객관이 맞

물려 전개되는 욕망의 세계를 밝히고자하는 것이 십이처법(十二處

法)·십팔계법(十八界法)의 목적이다. 오온이 실체론적 유아관(有

我觀)을 부정하고 있지만 연기론적인 의미의 ‘나’ 또는 인간 존재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온의 존재는 영원한 실재가 아니지만, 오온의 

현상적인 작용으로서 인간존재는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6근 6경 그

리고 12처, 18계를 통해서 ‘연기론적 의미의 나’의 구조가 분석적으

로 고찰된다. 십이처(十二處 : dvādasa āyatana)란 인식주관과 인식

객관인 눈[眼]과 빛깔[色]·귀[耳]와 소리[聲]·코[鼻]와 냄새[香]·혀

[舌]와 맛[味]·몸[身]과 부딪쳐짐[觸]·뜻[意]과 법[法]과 같은 12가

를 말한다. 경전에서 이를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으로서 일체로서 

이를 부정하고 따로 또는 다른 일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다만 말

만 있을 뿐이니 물어보면 알지 못하여 그 의혹만 더할 것이다”라고 

한다.50) 이유는 참으로 있는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으로 십이처의

처(處 : āyatana)는 인식의 장(場)을 의미하는 말로 이러한 12가지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을 넘어 의식 밖에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을

수 있는 실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모든 존재는 인간

의식이 관여할 때만이 존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50) 잡아함경 권 13. 321(『大正藏』 2, 91b)

 

이처럼 십이처법은 인간을 객관과 주관세계와 같은 12가지로 해

체 분석하여, 그 가운데에는 오온법과 같이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

다는 무상성과 무아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십팔계법(十八界法)은 십이처의 육근(六根)과 육경(六

境)이 연기하여 육식(六識)이 성립하는 열여덟 계(界:dhātu)를 말

한다. 십팔계법은 인간존재의 인식세계의 범주와 기초를 열여덟의

영역으로 설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눈과 색이 인연하여 시각적 범주

의 식이 있게 된다는 것 등이다. 비유적인 설명에 있어 “두 손이 합해

서 서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눈과 색을 인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한다.51) 이때 눈의 의식의 발생은 마

치 양손의 부딪침이란 조건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이 가운데는 소

리라는 실재나 실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십팔

계를 기초로 전개되는 이후 인간의 모든 감각과 감정이나 표상 그리

고 의지적 행위, 다시 말해 접촉[觸]·느낌[受]·생각[想]· 의도[思]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닌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말

해, 욕망하는 인간의 모든 정신적 행위는 십팔계라는 무상성과 무실

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실체가 빈 공성(空性)이

라는 말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는데 십팔계를 설명하고 있는 경전에

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 잡아함경 권 11. 273(『大正藏』 2. 72c)

 

모든 행(行)은 허깨비와 같고 불꽃과 같으며 잠깐 동안에 다 썩는 것으

로서 진실로 오고 진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구여, 공(空)한 

모든 행에 대해서 마땅히 알고 마땅히 기뻐하며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공한 모든 행은 항상 머무르고 변하거나 바뀌는 법이 아니다. 공(空)에

는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느니라.52)

52) 잡아함경 권 11. 273(『大正藏』 2. 72c)

 

이 경구는 그대로 대승의 공(空)사상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눈과 색 등이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오고 가는 것이 있어

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성이 없는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올 때 오는 것이나 곳이 있을 수 없고 갈 때도 가는 것이나 곳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공성(空性) 사상을 설명하는『중론』의 

팔부중도(八不中道) 가운데 불래불거(不來不去) 중도의 초기불교적 

근거로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다른 경전은 다음과 같이 

욕망의 비실재성을 말한다.

 

어떤 것이 가장 공(空)한 법인가? 저 눈은 생길 때에는 곧 생기지만 그 

오는 곳을 볼 수 없고, 멸할 때에는 곧 멸하지만 그 멸하는 곳을 볼 수 

없다. …… 귀·코·혀·몸·뜻이라는 법도 또한 그와 같으니, 즉 생길 때에

는 곧 생기지만 그 오는 곳을 알 수 없고, 멸할 때에는 곧 생기지만

멸하는 곳을 알 수 없다.53)

53) 증일아함경 권 30. 7(『大正藏』 2, 713c-714a)

 

다시 이러한 비실재성은 가호법(假號法)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다

음과 같이 반복적으로 설명한다.

 

임시로 이름이 붙여진 법[假號法]이란 이것이 생기면 곧 생기고 이것이

멸하면 곧 멸하는 것이다. 이 6입도 지은 사람이 없고, 또한 명색과 6입

도 부모로 말미암아 있기는 하지만 태에 들어간 자는 없다. 이것들은 인

연으로 있는 것이요, 이 또한 임시로 붙여진 이름이며, 반드시 앞의 대

상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있는 것이다.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구할 때 앞의 대상이 있는 뒤에야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불은 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또 나무를 떠나 생

기는 것도 아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나무를 쪼개어 불을 찾더라도 불

을 얻지는 못하리니, 그것은 모두 인연이 모인 뒤에야 불이 있기 때문이

다.54)

54) 앞의 책.

 

여기에서 “지은 사람이 없고”나 “태에 들어간 자는 없다” 등의 표

현은 ‘행위는 있으되 행위의 주체자는 없다’는 불교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즉 작용으로서 ‘욕망’은 있지만 ‘욕망의 주체’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욕망의 발달구조

여기까지 일체법으로서 오온·십이처·십팔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

는데 사실 내용적으로 깊이 들어다 보면 세 개의 법은 거의 동일

한 인식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5 → 12 → 18로 확장하여 인간

의 인식발생 구조와 범주를 더욱 세부적으로 파악하도록 하는 것임

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마지막 십팔계법은 이후 인식활동과 전개

에 있어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어떻게 

욕망이 발생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법이 육육법(六六法)

이다. 육육법은 십팔계의 육근(六根)·육경(六境)·육식(六識)을 바탕으

로 해서 다시 육촉(六觸)이 일어나고, 다시 육촉을 조건으로 육수(六

受)가 일어나고, 육수를 조건으로 욕망의 육애(六愛)가 일어나는 ‘욕

망의 발달구조와 과정’을 보여주는데 다음과 같다.

 

종종(種種)의 계(界)를 연하여 종종의 촉(觸)이 생기고, 종종의 촉을 

연하여 종종의 수(受)가 생기고, 종종의 수를 연하여 종종의 욕망[(愛]

이 생긴다. 어떤 것이 종종의 계(界)인가? 십팔계를 말한다. 안계(眼界)·

색계(色界)·안식계(眼識界), 내지 의계(意界)·법계(法界)·의식계(意識

界) 이것을 종종의 계라고 부른다. 어떤 것을 종종의 계를 연하여 

종종의 촉이 생기고,. 종종의 촉을 연하여 종종의 수가 생기고, 종종의 

수를 연하여 종종의 욕망이 생긴다고 하는가?

 

안계(眼界)를 연하여 안촉(眼觸)이 생긴다. 안촉을 연하여 안계가 생기

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안계를 연하여 안촉이 생길 뿐이다. 안촉을 연하

여 안수(眼受)가 생기는 것이지 안수를 연하여 안촉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안촉을 연하여 안수가 생길 뿐이다. 안수를 연하여 눈의

욕망[眼愛] 생긴다. 눈의 욕망을 연하여 안수가 생기지는 않는다. 단지

안수를 연하여 눈의 욕망이 생길뿐이다. 이와 같이 이·비·설·신·

의계를 연하여 의촉(意觸)이 생긴다. 의촉을 연하여 의계(意界)가 생

기지는 않는다. 다만 의계를 연하여 의촉이 생길 뿐이다. 그러므로 비

구여 종종의 애를 연하여 종종의 수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종종의 촉을

연하여 종종의 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종종의 계를 연하여 종종

의 촉이 생기고, 종종의 촉을 연하여 종종의 수가 생기고, 종종의 수를

연하여 종종의 눈의 욕망이 생긴다.55)

55) 잡아함경 권 16. 452(『大正藏』 2, 116a) ; 같은 아함 제13. 304의『 육육경(六六經)』
    에서 육육법이라는 법상의 이름이 나온다.

 

인용문에 따라 육육법(六六法)을 정리하면 다시 다음과 같이 도

식화할 수 있다.

 

십팔계(十八界 : 6근(根) + 6경(境) + 6식(識)) → 6촉(觸) → 6

수(受) → 6애(愛)의 욕망

 

경전은 촉(觸: phassa)56)을 설명하는데 있어 삼사화합촉(三事和

合觸)이라 한다.57) 따라서 십팔계의 육근(六根)·육경(六境)·육

식(六識)이 서로 화합하는 장 자체가 촉(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감각기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 3가지가 함께 할 때 일어나는 일

종의 감각현상이다. 이를 조건으로 다음의 감각[受]과 지각이 생성될 

수 있는 조건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촉을 조건으로 일어난 감수작용인 

수(受 : vedanā)58)는 반드시 촉을 조건으로 성립한다는 것으로 수를 

연하여 촉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촉을 조건으로 일어난 수(受)

는 일차적으로 괴로운 느낌[苦受]와 즐거운 느낌[樂受] 그리고 괴롭

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과 같은 세 가지 기본감정으로 

분류한다. 여기에는 즐거운 것이면 추구하려고 시도하고 괴로운 것이

라면 피하려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이라면 적극적인 마음

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단계에 있어 즐거운 느낌이면 욕망을 적

극적으로 추구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만 괴로운 느낌이라면

거부하려하거나 또는 슬퍼하거나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56) 육근의 상대가 되는 육경의 촉(phoṭṭhabba)은 한자로는 같이 쓰이나 원어는 다르다.
57) MN ⅰ. pp. 111f.
58) 수(受)에 대한 영역은 주로 feeling(느낌)이나 sensation(감각)이라 옮겨진다.

 

인간은 순간순간 계속되는 촉과 수를 통해서 존재감을 느낀다. 하지

만 이러한 감수작용을 중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중지시킨 

최정점의 선정인 상수멸정(想受滅定)은 다름아닌 표상작용 또는 개

념화시키는 인식작용인 상(想)과 함께 수의 정지를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높은 수행의 경지에서는 괴롭고 즐거운 느낌과 같은 데에는 

초연해진 상태가 된 것을 말할 것이다. 이로써 수를 조건으로 일어나

는 강렬한 욕망 또한 일어날 조건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욕망[愛 : taṇhā]은 감수작용인 수(受)에 인연한다. 다시 여섯 범주의 

욕망[六愛]으로 분류한다. 육애(六愛)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욕망

의 총체적인 상황으로 물질적 범주의 욕망[色愛], 청각적 범주의 욕망

[聲愛], 후각적 범주의 욕망[香愛], 미각적 범주의 욕망[味愛], 촉

각적 범주의 욕망[觸愛] 그리고 일체 현상에 대한 욕망59)[法愛]을 말한

다. 사람마다 시각적 범주의 욕망이 우세하거나 또는 강한 집착을 보

이거나 청각 또는 후각이나 미각 등으로 개인차 또한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이러한 각각의 욕망 또한 무상(無常)과 고(苦) 그리고 무아(無我)

를 떠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섯 욕망을 염리(厭離)하는 것으

로 욕망으로부터 떠나 궁극적인 해탈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60)

59) 법의 원어인 dharma/dhamma의 의미는 교의, 교법, 질서, 이법, 의무, 권리, 도리, 도
    덕, 선행, 진상, 진리, 교설, 본성, 본질, 요소, 사물, 사건, 존재 등 20여 가지 이상이다.
    이러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말로 ‘현상’을 사용해 본다.
60) SN ⅱ. p. 251 : “시각적 범주의 욕망[色愛]은 영원한가 무상(無常)한가? 세존이여, 무
    상합니다.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여, 괴로운 것
    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자아이
    다’라는 것은 옳은가 옳지 않는가? 세존이여, 옳지 않습니다… (중략) … 성스러운 제
    자는 이러한 여섯 욕망[六愛]을 염리(厭離)한다. 염리하여 욕망으로부터 떠나고, 욕망
    을 떠나서 해탈한다.”

 

이처럼 육육법은 인간의 고락(苦樂)이 어디서 연유하는가, 인간

의 욕망이 어디서 연유하는가를 알게 해 준다. 즉 촉을 통해 수(受)

와 욕망이 존재화 된다는 것이다. 십팔계 때문에 촉과 수 그리고 욕

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때 수와 애 등이 촉을 조건으로 없던 것

이 새로 생긴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러한 느낌과 욕망의 잠

재적인 성향이 촉을 조건으로 활성화된다는 의미이다.

 

불교전반에서 욕망 발생구조와 본질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법체계

는 오온법(五蘊法)·십이처법(十二處法)·십팔계법(十八界法)이

다. 육육법은 이러한 일체법에 바탕해 있고 다시 일체법은 십이연기

법(十二緣起法)과 사성제(四聖諦)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포섭할 수 있는 법으로서의 사

성제이다. 처음 2제와 나중 2제는 각각 유전연기(流轉緣起)와 유전

의 환멸(還滅)로 나누어 설명된다. 유전연기는 무명(無明)과 욕망

[渴愛]으로 유전하는 인간존재의 조건과 상황을 밝히는 것이고, 환

멸은 이러한 생명의 실상을 직시하여 무명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는 길을 밝히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유전연기는 12연기법

(十二緣起法)으로 사성제 따로 독자적으로 설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무욕망의 질곡에 악순환하는 존재의 구조를 밝히는데 중점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의 중심체계는 욕망의 이

해와 욕망의 극복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욕망의 발생구조와 본질이 주로 오온·십이처·십팔계에서 다루어

졌다면 12연기와 사성제는 ‘욕망에 대한 투철한 이해’와 ‘이러한 

이해에 기초한 극복’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3. 욕망의 비실재성의 통찰

욕망의 세계관적 기원 문제에 있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시된다.

 

태어남[生]·존재[有]·취함[取]·욕망[愛]·느낌[受]·닿음[觸]·육입

(六入)·명색(名色)은 자기가 지은 것[自作]입니까? 남이 지은 것

[他作]입니까? 자기와 남이 지은 것[自他作]입니까? 아니면 자기

도 남도 아닌 원인이 없이 지어진 것[非自非他無因作] 입니까?61)

61) SN ⅱ, pp. 112-115 ; 잡아함경 권 12. 288 (『大正藏』2, 81a -c) ; 이외에도 DN ⅲ.
    pp. 137-138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문제를 중심으로, 그리고 SN ⅱ, pp. 19-20에서는
    고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작과 타작 등이 거론된다.

 

이같은 욕망 등의 기원 문제에 있어 자작, 타작, 자타작 그리고 비

자비타무인작에 반해 연기가 제시된다. 다시말해, 욕망의 발생기원

은 자아와 세계의 내재적인 원리[自作 : sayaṁ-kata]에 의한 것도,

외재적 원리[他作 : paraṁ-kata]에 의한 것도, 이러한 양자가 합한

자타작(自他作)이나 그렇다고 어떠한 원인도 없이 나타난다는 비자

비타무인작(非自非他無因作)도 아니라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

면 마치 하나의 갈대가 땅에 설 수 없고 다른 하나가 연달아 계기(繼

起)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하는 것처럼 욕망을 포함한 인간과 세계

또한 끊임없는 관계 선상 속(諸行)에 조건적인 생멸의 과정(無常)

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조건적으로 연기(緣起)하

고 있어 자작, 타작, 자타작, 그리고 비자비타무인작이라고 할 수 없

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작, 타작 등과 관련한 연기를 자타중도(自他

中道)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 어떠한 존재도 독립된 실재(實在)

나 실체(實體)로 간주할 수 없고 다만 조건적으로 계기하는 연기의

중도임이 강조된다.62) 불교가 욕망의 비실재성을 논의할 수 있는 철

학적 바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욕망과 무명은 인연의 조건적인 존

재로서 실재일 수도 없고 실체도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양한

각도의 중도(中道)가 제시된다. 예를 들면, 단상중도(斷常中道)는

조건적인 생멸 변화를 떠나 자아와 세계가 영원(sassata)하다고 보

는 세계관도, 영원하지 않다(nāsassata)라고 보는 세계관도 비판

된다.63) 유무 중도(有無中道)는 발생적 측면에서 ‘모든 것은 존재한

다.’라거나, 소멸적 측면만으로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려

는 것이나64) 영혼(jīva)과 육체(sarīra)를 같은 하나라는 것이나 아

니면 각각 독립된 실체로 보는 세계관이 일이중도(一異中道)로 비판, 

부정된다.65) 욕망을 포함한 어떠한 심리적 요소도 더 크게는 영혼

이든 정신이든 각각 독립된 실재일 수 없고 조건적인 계기로 존재할 

뿐이다. 이는 다시 오온무아(五蘊無我)와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시사하듯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의 대상, 일체가 임시적이고 조건적

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62) SN ⅱ, p. 77.
63) DN ⅲ. pp. 137-138.
64) SN ⅱ, p. 17 ; 잡아함의 제 34권『가전연경(迦旃延經)』
65) 잡아함 제 12권 『대공법경(大空法經)』

 

비실재성의 공성과 관련한 제법공상(諸法空相)의 다른 표현은 제

무아이다. 제법공상과 제법무아는 기본적으로 외부의 실체로서 

밖에 독립해 있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어떤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나 

내부의 실체로서 인간 내부에 독립해 있는 영원불멸할 수 있다는 그 

무엇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실재성의 통찰은 인간의 고통문

제와 관련이 있다. 즉 자아와 세계를 공성이 아닌 실재성으로 이해

하는 것은 인간의 깊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며, 실재성

의 집착은 결국 고통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으로 그러

한 신념이 파괴되어 가면 오히려 더 큰 불안과 함께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66) 근본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실존적 상황인 불안과 고통을 실

재성과 실체 관념으로 위무하고 무마시켜왔으며 어느 정도는 마비

되어 있기도 한다. 다시 욕망과 집착의 수준에 따라 실재성과 실체

관념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여 불안과 고통을 극복하려한다. 따

라서 욕망에의 집착을 나타내는 욕취(欲取 : kāmupādāna)와 함께

견취(見取 : diṭṭhupādāna)와 아취(我取 : attavādupādāna) 등이 나

열되는 이유이다.67) 여기서 견취와 아취는 바로 실체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실체론적 세계관 자체가

인간의 강한 욕망의 집적(集積)으로 욕망과 관련한 심리적인 문제

로 파악한다. 이러한 욕망과 집착에 연유한 세계관은 인간을 고통과

질곡, 그리고 부조리로 내 몰 소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66) MN ⅰ. pp. 136- 137.
67) SN ⅱ. p. 3 ; 잡아함 제 12권『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따라서, 고(苦)로부터 인간 해방을 위해서는 이러한 존재의 비실

재성을 통찰하는 일이 강조된다. 불교수행의 중심에 있는 여러 종류

의 선정(禪定)과 위빠사나는 모두 욕망하는 인간의 세계관적 인간

관적 뿌리를 여실하게 통찰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욕망하는 자아

의 무상성(無常性)과 무아성(無我性)이라는 비실재성을 철견하는

것으로 욕망하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Ⅳ. 마치는 말

 

불교는 욕망과 관련한 존재 문제를 통찰한 철학체계이다. 불교의

실천철학적 중심주제는 다름아닌 욕망의 기원과 과정을 밝히고 이

를 극복하는 문제에 있다. 왜냐하면 고통의 실존적 요인을 바로 욕

망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법(法) 체계의 전체는 욕망의 발

생구조와 본질 그리고 욕망의 무상성(無常性)을 체득하는데 초점

이 맞추어져 있다. 다시말해, 실천적인 문제에서 공성(空性 : 무실

체성)의 자각과 함께 욕망의 허망성을 체득하여 욕망으로 비롯되

는 고통을 극복할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단순하게 욕망을 죄악시하

거나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은 불교 욕망론이 그 자체로

서 실천철학적 문제를 함의하고 있음을 말한다.

 

결국 불교에 의하면 욕망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진 

존재의 잠재적 성향이다.68) 욕생(欲生)으로 와서 쉬지 않고 욕계

(欲界)를 구성해내다가 다시 욕생으로 간다. 하지만 욕망은 나라는 

주체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상세계로부터 오는 것

도 아니라고한다. 다만 주체와 대상세계 등과의 상호교섭[緣]속에 

일어난다. 마치 양 손바닥을 부딪치면 소리가 나듯이. 때문에 욕망

은 올 때 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갈 때도 가는 곳이 있을 수 없다. 

왜 욕망의 끝이 허망할 수밖에 없는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

다. 이러한 점에서 욕망은 끝없이 자기소모적이다. 다시 허망함을 

채우기 위해서 욕망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마치 바다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생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래서 괴롭다[一切皆苦]. 그리고 욕망이 

극복되어야만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다.

68) 이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욕망의 kāmarāga가 잠재적 번뇌를 의미하는 anusaya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