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49호(2016.12) pp. 255∼283
대승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자아관
김지명/동국대(경주)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수료
I. 서론
II. 아(我)의 정의
III. 긍정되는 자아와 부정되는 자아
IV. 무아에 대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견해
V. 결론
[요약]
불교학에서 자아관은 초기불교의 무아사상과 대승불교의 진아사상으로 압축할
수 있다. 무아사상은 ‘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인연 화합물이기에
고정적・불변적인 실체로서의 아(我)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붓다가 설한 무아는 오온
의 결합물인 ‘가아(假我)’를 자아로 여기는 것을 깨뜨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
이다. 이에 따라 ‘가아’와 구분하여 오온(五蘊)과 동일시되지 않는 참된 자아의 존재
인 진아(眞我)가 성립되고, 자연스레 불성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불성사상은 모
든 중생은 부처와 똑같이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든 성불할 수 있지만, 번
뇌에 가려지고 더럽혀져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대반열반경』은 ‘일체의 중
생은 모두 불성을 갖는다[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선언하고 있고, 이러한 붓다가 되
는 원인인 불성은『대반열반경』곳곳에서 자아로 정의된다.『대반열반경』에서의
아(我)는 하나의 의미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아(我), 대아(大我), 진아(眞我), 무아(無
我), 외도의 아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자아는 긍정되는 자아와 부정되는 자아
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긍정되는 자아는 진아와 부처, 불성, 여래장 등으로 표현
되는 여래성(如來性)의 나와 대열반의 근거가 되는 여덟 가지 자재함을 갖는 나[大我]
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부정되는 자아는 중생의 자아인 오음과 외도의 아뜨만
이다.『대반열반경』을 통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아는 불성이고, 이 불성은 가아
에 반대되는 진정한 자아[眞我]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때 진아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는 다른 범주에 있으므로 서로 상충되지 않으며, 외도의 아뜨만에 대
한 이해와도 또한 다른 것이다.
I. 서론
일반적으로 자아란, 심리학에서는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
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를 지칭하는 개념으
로, 철학에서는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오랫
동안 쟁점화되어 왔다.1)
1) 김경집, 「자아의 역사, 분열인가 분화인가?」, 인간연구 제9호, 2005.
불교학에서 자아관은 초기불교의 무아사상과 대승불교의 진아사상으로 압
축할 수 있다. 무아사상은 불교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무엇보다 ‘고(苦)로 부터의 해방’을 그 가르침의
목적으로 했다. 따라서 그의 모든 가르침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도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고로 부터의 해방’을 위해 고의 원인을 찾고 그 원
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하라 ··· 중략 ··· 이와 같이 수(受)・상(想)・행(行)・
식(識)도 모두 무상하다고 관하라. 이렇게 관하면 그것은 바른 관이니라.
바르게 관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
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
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비구들아, 마음이 해탈한 사
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 중략
··· ‘무상하다[無常]’고 관한 것과 같이, ‘괴로움[苦]이요, 공하며[空],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2) (밑줄 필자)
2)『雜阿含經』卷1 (『大正藏』99, 1上) “「當觀色無常。如是觀者,則為正觀。正觀者,則生厭離;厭離者,
喜貪盡;喜貪盡者,說心解脫。「如是觀受、想、行、識無常。如是觀者,則為正觀。正觀者,則生厭
離;厭離者,喜貪盡;喜貪盡者,說心解脫。「如是,比丘!心解脫者,若欲自證,則能自證:我生已
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如觀無常,苦、空、非我亦復如是。」 ”
경전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을 무상하다고 관찰
하고 괴로움이요, 공이요, 내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면 심해탈을 얻을 것
이라고 하고 있다. 즉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없앤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인연 화합물이기에 고정적・불
변적인 실체로서의 아(我)가 없다. 붓다가 설한 무아는 오온의 결합물인 ‘가아
(假我)’를 자아로 여기는 것을 깨뜨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따
라 ‘가아’와 구분하여 오온과 동일시되지 않는 참된 자아의 존재인 진아(眞我)
가 성립되고, 자연스레 불성과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불성사상은 모든 중생은 부처와 똑같이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
든 성불할 수 있지만, 번뇌에 가려지고 더럽혀져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
다. 이러한 주장은 ‘일체 중생은 여래장이다’라고 하는『여래장경』에서 최초
로 선언되었다.3) 여래장은 ‘여래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중생을 가리
켜 부른 일종의 설명이고, 따라서 중생은 속에 여래가 될 수 있는 요인을 가지
고 있으며 보다 이론적으로 그 요인은 ‘불(佛)의 인(因)’=불성(佛性)이라고 일
컬어지고 있다.4)
3)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 외, 如來藏 思想, 종고 역(서울: 경서원, 1996), p.17.
4) 앞의 책, p.17
『대반열반경』은 이러한『여래장경』을 근거로 하여 여래장설을 발전시켰
다. 여래장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불성’을 새로이 개척하고 “일체의 중생은 모
두 불성을 갖는다[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선언하고 있다.5) 이러한 붓다가 되
는 원인인 불성은 대반열반경 곳곳에서 자아로 정의된다.
5) 앞의 책, p.57.
『여래장경』은 아홉 가지 비유를 들어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짐을 표현한
다.6) 아홉 가지 비유의 공통점이라면 본래 청정한 불성은 은폐되어 있지만 진
실로 존재하고, 더러운 것에 덮여 있지만 그 본성은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다. 이후 불성사상은 크게 두 경로로 나누어 진화 발전해 간다. 하나는『부증불
감경』,『승만경』을 통해「보성론」으로 이론화해가는 경로이고, 다른 하나는
『대반열반경』에 의해 새롭게 ‘불성’이라는 개념이 부가되고 그 후『앙굴마라
경』,『대법고경』을 산출해 가는 경로이다.7)
6)『大方等如來藏經』(『大正藏』667) ;『大方廣如來藏經』(『大正藏』667).
7)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 외 7人,「여래장과 불성」, 김성철 역(서울: 씨아이알,2015), P.167.
본고는 ‘대승『대반열반경』의 자아관’에 대하여 연구한다.『대반열반경』은
아뜨만으로 인해 기피하던 ‘아(我)’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불성을 기술한다. 일
체 중생에게 불성이 내재해 있고, 이것을 진정한 자아라고 인정하는 순간 초기
불교의 무아사상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대반열반경』은 진아, 대아
등과 같이 불성으로 대치되는 ‘아’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무아와
외도의 아에 대해서도 진아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대반열반경』
을 통해 대승불교에서 무아와 진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시키고 있는지 살펴
볼 것이다.8)
8)『대반열반경』에서 ‘자아’라는 표현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에서 ‘아’ 혹은 ‘진아’
만을 논한 것이 아니라, ‘무아’와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고, 본 논문은 이를 폭넓게 연구하는 것
이기에 ‘대승『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자아관’이라 이름 붙인다.
불교학에서 자아에 관련된 연구로는, 크게 무아와 진아에 관한 연구로 나눌
수 있겠다. 무아에 관하여 비아와 무아 논쟁, 무아와 윤회의 주체에 관한 연구
는 활발히 진행된 편이다.9) 또한 무아와 아뜨만에 관한 연구도 무아설이 아뜨
만을 부정했다고 보는 설10)과 붓다는 그릇된 아뜨만관을 부정했다는 설11)로
나뉜다. 이에 반해 진아와 관련하여 여래장 혹은 불성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편이다. 다만, 여래장 사상에서 자아개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연구한 김성철
의 「여래장사상에서 자아와 무아」 (인도철학37집,2013), 진아는 무아의 중
국화된 표현이라고 판단한 김종욱의 「무아에서 진아까지 –불교 무아 개념의
형성과 전개-」(범한철학43집,2006) 등이 자아개념에 불성을 도입한 연구로
주목할 만하다.
9)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自我と無我」, (東京: 平樂寺書店, 1968) ; 윤호진,「무아 윤회문제의 연구」,
(서울: 민족사, 1992); 정승석,「윤회의 자아와 무아」, (서울: 장경각, 1992); 김진,「칸트와 불교」,
(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0); 한자경,「불교의 무아론」,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 정승
석, 「원시불교에서 비아와 무아의 문제」, 한국불교학 제17집, 1992; 정승석, 「원시불교에서 非我
의 의미」, 인도철학 제3집, 1992.
10) Rahula Walpo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ter, 1967; Malalasekera G. P., The
Buddha and his Teachings, The Buddhist Council of Ceylon, 1957; Nyanaponika Thera, Buddhist
Dictionar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3.
11) Rhys Davids, C.A.F., Outlines of Buddhism, South Asia Books, 1934.; Humphries C., Buddhism
Middlesex: Penguin Books, 1974; Radhakrishnan S., Indian Philosophy,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29; 안양규, 「무아(無我) 가르침의 진의」, 불교문화연구제10집, (경주: 불교사회문화연구
원, 2009).
『대반열반경』의 현존하는 대본 텍스트는 4본이 있다. 법현 역의『대반니원
경』6권, 담무참 역의『대반열반경』40권(북본), 헤엄・혜관・사령운 등에 의한
40권본의 재치본(再治本)『대반열반경』36권(남본), 야나발다라 역의『대반열
반경후분』2권 등이 있다.12) 여기서는 40권북본과 36권남본을 주로 사용한다.
12) 김성철 역, 앞의 책, p.294.
Ⅱ장에서는『대반열반경』에서 나타나는 아(我)의 종류와 그 의미차이를 정
리한다. 아는 대아(大我), 진아(眞我), 무아(無我), 외도아(外道我)등으로 사용되
는 용례를 살핀다. Ⅲ장에서는『대반열반경』에서 아의 여러 용례에서 구분되
어 나타나는 두 가지 입장, 즉 긍정되는 자아와 부정되는 자아를 구별하여 살
펴본다. Ⅳ장에서는 초기불교의 무아에 대한『대반열반경』의 견해를 살펴봄
으로써 진아와 무아가 대치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알아본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본고는『대반열반경』에서 자칫 모순되게 보이는
무아와 진아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이해하고, 나아가 최종적으로 대
승불교의 자아관을 정립할 것이다.
II. 아(我)의 정의
대체로 불교에서는 자아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이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緣起)에 바탕을 두고 모든 존재가 성
립한다고 하는 불교의 기본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자아’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의미에서 ‘주체’ ‘사물의 본체’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면서
모든 것에 본체라고 해야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성립한
다.13) 이는 무아의 의미가 단순히 ‘자신이라고 할 만한 것의 없음’만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본체라고 할 만한 것의 없음’으로 확장됨을 의미한
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논지가 일체법의 주체성까지 확장된 것으로, 불교에
서 자아에 관한 논의가 어색함은 여기에도 기인한다.
13) 카나쿠라 엔쇼(金倉圓照),「인도철학의 자아사상」, 문을식 역(서울: 여래, 2994), p.13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붓다가 무아를 설한 이유이다. 붓다의 관심은
‘자아’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온을 나라고 여겨 집착하고 그로 인해 괴
로움에 빠지는 중생에게 있었다. 즉 무아를 설할 때 ‘아’의 주체는 ‘오온’임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자아에 관한 논의는 무아의 아(我)에서 시야를 넓혀 진
행될 필요가 있다.
『대반열반경』은 일체의 세 가지 특징 즉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무아
(無我)이다’라고 관찰한 것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여래는 상주(常住)하고, 열반
은 항상하고, 즐거움이고, 나이며, 깨끗하다(常樂我淨)는 4가지 덕을 구비하고
있다고 설한다.『대반열반경』은 여래의 상주를 붓다의 입멸이라는 사건을 이
용하여 주장한다. 붓다의 육신은 멸하지만 법신인 여래는 나지도 않고 멸하지
도 않는 항상한 존재이기에 ‘입멸하지 않는다, 상주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당연히 주목해야할 사항은 ‘아’에 대한 긍정이다.『대반열반경』
은 그때까지 불교에서 꺼려왔던 ‘자아’개념을 도입하고, ‘여래는 아뜨만
(ātman) 상주(常住)/자재(自在)이다’라고 선언한다.14) 이러한『대반열반경』의
배경은 아(我)에 대한 여러 용례로 나타난다.『대반열반경』에서의 ‘아’는 하나
의 의미만을 나타내지 않으며 아(我), 대아(大我), 진아(眞我), 무아(無我), 외도
의 아로 다양하게 쓰인다. 이러한 아의 용례들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은 무아에
관한 논쟁, 불성과 진아, 아뜨만과 진아에 관한 논의를 명확하게 하는데 바탕
이 된다. 나아가 이런 아에 대한 명확한 의미 파악이 선행되어야 자아관에 관
한 바른 정립이 가능하다.
14) 김성철 역, 앞의 책, p.174.
아래는 대반열반경에서 쓰인 ‘아’에 관한 대표적인 용례를 추려낸 것이다.
① 나[我]란 것은 곧 불(佛)란 뜻이고, 항상하다는 것은 법신이란 뜻이고,
즐겁다는 것은 열반이란 뜻이고, 깨끗하다는 것은 법이란 뜻이니라.15)
15)『大般涅槃經』卷2(『大正藏』375, 617上), “我者,即是佛義;常者是法身義;樂者是涅槃義;
②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이른다. 열반에는 내가 없지만 크
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 하느니라.16)
16)『大般涅槃經』卷21(『大正藏』375, 502下), “有大我故,名大涅槃。涅槃無我,大自在故,名為大我。”
③ 오늘 여래가 설하는 참 나[眞我]는 이름이 불성이다.17)
17)『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53下), “ 今日如來所說真我名曰佛性.”
④ 여래가 불법 가운데는 무아(無我)라고 말하였으니, 중생을 조복시키
기 위한 것이었다. 때를 아는 까닭에 무아라고 하였다가 인연이 있어
서 또 자아가 있다고 설하였다.18)
18)『大般涅槃經』卷2(『大正藏』375, 618中), “如來於佛法中唱言無我,為調眾生故、為知時故,
如是無我。有因緣故,亦說有我。”
⑤ 외도들이 말하는 나는, 벌레가 나뭇잎을 먹어 글자를 이룬 것 같으니라.19) (밑줄 필자)
19)『大般涅槃經』卷2(『大正藏』375, 618中), “是諸外道所言我者,如蟲食木偶成字耳。”
『대반열반경』에는 열반의 4가지 덕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말한다. ①은
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때의 아는 불(佛)을 뜻한다. 이외에도 불성, 여래장으
로 쓰여서 긍정적이고 완전한 자아를 표현한다.
② 대열반은 ‘큰 나[大我]’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대반열반경』은 열반과
대열반을 구분한다. ‘범부나 성문들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속박을 끊어 안락
함을 얻으면 열반이라 이름하지만, 번뇌의 습기가 있기 때문에 대열반이라 할
수 없다.’20) 반면에 대열반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여래가 얻는 열
반이라고 정의한다. 2승의 열반은 무상, 고, 무아의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지고,
여래의 대열반은 8가지 자재함을 갖춘 대아를 깨달아 이루어진다.
20)『大般涅槃經』卷2(『大正藏』375, 746上), “善男子!若凡夫人及以聲聞——或因世俗、或因聖道——
斷欲界結則得安樂,如是安樂亦名涅槃,不得名為大涅槃也。能斷初禪乃至能斷非想非非想處結則得安樂,
如是安樂亦名涅槃,不得名為大涅槃也。何以故?還生煩惱,有習氣故。”
③ 진아(眞我)는 불성을 이른다. 참 나를 뜻하는 진아(眞我)도 역시 무아와 대
비되는 의미로 쓰인다. 우선 무아의 비밀을 이해하고 나서 진아를 얻을 수 있
다. 또한 이러한 진아의 실상은 역시 불성임을 나타낸다.
④ 무아(無我)는 방편설이다. 불교의 기본 교리인 삼특상(무상, 고, 무아) 중
에 하나인 무아는 표면적으로 대승불교의 진아와 반대되는 듯 보이고 이로 인
해 많은 논란을 야기한다. 하지만『대반열반경』은 무아가 중생을 조복시키기
위해 설한 방편설이였음을 밝히고 있다. 중생에게 진아를 설명하기에 시기적
으로 적절치 않아 무아를 설했다는 것이다.
⑤ 마지막으로 외도가 말하는 아 즉 아뜨만은 어떠한가? 외도의 아뜨만은
진아 개념과 역시 적잖은 혼돈을 일으킨다. 이에 대해『대반열반경』은 진아와
아뜨만은 그 모양만 같을 뿐이라고 말한다. 벌레가 나뭇잎을 먹어 만든 글자의
뜻을 벌레는 알지 못하듯이, 외도는 아뜨만을 말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5가지 아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로 의미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아
(我), 대아(大我), 진아(眞我)의 긍정되는 의미이고, 둘째는 무아(無我)의 아와 외
도(外道)의 아로 부정되는 의미이다. 전자의 긍정되는 의미의 ‘아’는 여래, 불
성, 여래장 등의 의미가 내포된 것이고, 무아와 외도아는 이와는 다르게 우리
가 버리고 분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III. 긍정되는 자아와 부정되는 자아
앞장에서 대반열반경은 불성으로 여겨지는 긍정적 자아와 버려야 할 것
인 부정적 자아로서 자아가 서술됨을 보았다. 이에 긍정적 자아와 부정적 자아
의 세부 의미에 대해서 살펴본다.
1. 긍정되는 자아
『대반열반경』에서 긍정되는 자아는 진아와 부처, 불성, 여래장 등으로 표현
되는 여래성(如來性)의 나와 여덟 가지 자재함을 갖는 나[大我]로 구분하여 설
명할 수 있다.
1) 진아(眞我)
① 5음의 모양은 즉 만들어진 것이니, 만들어진 것은 모래나 돌과 같아서
뚫을 수 있고 깨뜨릴 수 있다. [하지만] 불성인 진아는 금강륜과 같아
서, 깨뜨릴 수 없느니라.21)
21)『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49下) “五陰之相即是起作,起作之相猶如石沙,可穿、可壞。
佛性真我譬如金剛,不可毀壞。”
② 오늘 여래가 말하는 진아는 이름이 불성이니, 이러한 불성은 나의 불
법 중에서 훌륭한 칼과 같으니라.22)
22)『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53下) “今日如來所說真我名曰佛性,如是佛性我佛法中譬如淨刀。”
③ 중생도 그러하여, 천안(天眼)이 없고, 번뇌 속에 있어서 여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아의 비밀을 설하
였다. 왜냐하면 천안이 없는 자는 진아를 알지 못하여 제멋대로 나를
헤아리기 때문이다.23)
23)『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56下) “眾生亦爾,無有天眼,在煩惱中而不自見有如來性。
是故我說無我密教。所以者何?無天眼者不知真我。橫計我故”
④ 무상함을 죽이면 항상한 열반을 얻고, 괴로움을 죽이면 즐거움을 얻
고, 공함을 죽이면 참됨을 얻고 무아를 죽이면 진아를 얻는다.24)
24)『大般涅槃經』卷18(『大正藏』375, 727下) “殺無常者得常涅槃,殺苦得樂,殺空得實,
殺於無我而得真我。”
⑤ 무아법 가운데 진아가 있다.25)
25)『大般涅槃經』卷34(『大正藏』375, 838上) “無我法中有真我”
⑥ 색은 무아이고, 색을 멸하면 해탈진아의 색[解脫眞我之色]을 얻으며,
수・상・행・식도 그와 같으니라.26) (밑줄 필자)
26)『大般涅槃經』卷35(『大正藏』375, 838中) “色是無我,因滅是色獲得解脫真我之色;受、想、行、
識亦復如是。”
『대반열반경』에서 참 나 즉 진아에 대한 구절은 대략 위의 여섯 구절과 같
다. 진아는 ③④⑤에서 무아와 대비된다. 중생은 여래의 성품이 있으나 번뇌
때문에 지혜의 눈[天眼]이 가려져 진아를 보지 못한다[③]. 이런 중생에게 방편
으로 설한 것이 무아이다. 하지만 이런 무아도 때가 되면 넘어서야 진아를 발
견할 수 있다[④⑤].
①②에서 이런 진아는 정확히 불성을 가리킨다. 불성인 진아는 오음과 대비
되는데, 이때 오음은 뒤에 언급될 부정되는 자아 즉 무아의 ‘아’와 같다. 오음으
로 이루어진 ‘아’는 인연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소멸이 전제된다. 이와
반대로 불성인 진아는 생멸의 변화를 떠나 있어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함을 짐
작할 수 있다[①].
②의 ‘칼의 비유’는 불성을 중생의 지혜로는 섣불리 짐작할 수 없음을 말한
다. 직접 본 적이 없는 훌륭한 칼의 모양을 말만 듣고는 짐작하기 어렵듯이, 어
리석은 범부들은 진아 불성의 참 모습을 깨닫기 어려워잘못된 소견만 일으키
므로 그런 소견을 끊기 위해 여래가 일부러 무아를 설했다는 것이다.
⑥색(色)은 내가 아니고, 수(受)・상(想)・행(行)・식(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
취온(五取蘊)은 오온에 대한 취착을 말하는데, 오온의 속박 즉 오취온에서 벗
어나면 해탈의 참 나를 얻을 수 있다. 오온의 결합에 의해 거짓의 ‘나’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진아는 여래의 성품 즉 불성을 말하고, 이는 무아와 대비되어 긍정적
인 자아에 해당한다. 다만 이런 진아는 번뇌에 가리어져 중생이 쉽게 알 수 없
으므로 방편적으로 무아를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여래성(如來性)으로서의 아(我)
여래의 성품(性品)으로 표현되는 긍정적 자아의 용례는 아래와 같다.
① ‘아’는 곧 불(佛)의 뜻이다.27)
27)『大般涅槃經』卷2(『大正藏』375, 617上) “我者,即是佛義”
② 아견은 불성이요 불성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28)
28)『大般涅槃經』卷5(『大正藏』375, 635下) “我見者名為佛性。佛性者即真解脫,真解脫者即是如來。”
③ ‘아’는 여래장이라는 뜻이다.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진 것이, 곧
‘아’의 뜻이다. 본래부터 항상 무량한 번뇌가 덮여있어서, 중생이 볼
수 없다. 이 ‘아’의 뜻은, 본래부터 한량없는 번뇌에 덮였으므로, 중생
들이 보지 못하느니라.29) (밑줄 필자)
29)『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48中) “我者,即是如來藏義。一切眾生悉有佛性,即是我義。
如是我義,從本已來常為無量煩惱所覆,是故眾生不能得見。”
모두 아(我)는 곧 부처요, 불성이요, 여래장임을 말하고 있다.『대반열반경』
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은 ‘일체중생실유불성’, 즉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진
다는 것이다. 따라서『대반열반경』전체에서 불성에 관해서 많은 부분을 공들
여 설명하고 있다.
‘불성(佛性)’의 원어는 ‘buddha-dhātu’다. ‘dhātu’라는 말은 ‘구성요소’라는 의
미로서, ‘buddha-dhātu’라는 복합어는 ‘붓다의 구성요소’를 의미한다.30) 한역
의 ‘성(性)’이라는 한자는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마음’이라는
내력에서, 모든 사물 각각이 가진 ‘본질’, 나아가 모든 사물에 불변의 ‘원인’이
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1) 즉 산스크리트어 ‘buddha-dhātu’는 ‘붓다의 구성요소’
를 나타내는데, ‘불성’이라고 한역되면서 ‘붓다가 될 원인이고, 종자이고, 가능
성’32)을 뜻하게 되었다.
30) 김성철 역, 앞의 책, p.152.
31) 앞의 책, p.153.
32)「佛光大辭典」(臺灣: 佛光出版社, 1989), p.2633
‘여래장(如來藏)’의 원어는 ‘tathāgata-garbha’로 여래의 태(胎)라는 뜻이다. 이
것이 중국으로 번역되어 들어오면서 ‘담는 그릇(容れ物)’이라는 뜻의 장(藏)을
사용하여 ‘여래장’이라고 하였고, 따라서 ‘여래를 담고 있는 그릇(如来の容れ
物)이라는 뜻을 지닌다.’33) 덧붙여 여래장은 ‘일체중생의 번뇌의 몸 가운데 숨
겨진 본래 청정한 (즉 자성청정의) 여래법신’34)이다. 즉 여래장 혹은 불성은 중
생 모두가 가진 청정한 여래의 본성이지만 번뇌로 가려져 있는 것이고, 이러한
여래의 성품이 곧 자아인 것이다.
33)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불성이란 무엇인가?」, 전치수 역(서울: 여시아문, 1998), p.28.
34)「佛光大辭典」, p.2361.
그렇다면 이러한 아(我), 여래성의 아는 어떠한 특성을 지니는가? 이 또한 경
에서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것이 ‘아’인가? 만일 법이 진실하고, 참되고, 항상하
고, 주재가 있고, 의지가 있고, 성품이 변하지 아니하면, 이것을 ‘아’라고 한
다.”35) 나는 진실되고 참되어 그 자체로 온전하고, 주재가 있고 의지가 있어 세
파에 흔들리는 경지를 벗어나 있다. 또한 항상하고 성품이 변하지 않는 상주불
변의 특징을 갖는다. 불성의 7가지 특성은 ‘항상함, 나인 것, 즐거움, 깨끗함, 참
됨, 진실함, 선함’36)이다. ‘나’는 진실되고 참되고 항상한 불성의 특징을 가짐
과 동시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주재성’, 운명론에 반하여 불교의
인과응보사상의 주체가 되는 ‘의지’를 가짐을 확인할 수 있다.
35)『大般涅槃經』卷2(『大正藏』375, 618中) “何者是我?若法是實、是真、是常、是主、是依,性不變易,
是名為我。”
36)『大般涅槃經』卷32(『大正藏』375, 818上) “如是佛性則有七事:一、常,二、我,三、樂,四、淨,
五、真,六、實,七、善。”
3) 대아(大我)
『대반열반경』에서 긍정되는 자아는 대열반의 근거로써 8가지 자재함을 갖
는 대아(大我)도 등장한다. 앞서 보았듯이『대반열반경』에서 대열반과 열반은
구분된다. 대열반은 순타의 공양으로 인한 여래의 부재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
가 된다. 즉 여래는 언제나 불생불멸의 상태로 상주하고 있으므로 사실은 열반
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열반은 ‘대아(大我)’가 있음으로 가능하다.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대아’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이른
다. 열반에는 ‘아’가 없지만 [대열반은] 크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37)
이러한 ‘대아’는 8가지 자재함38)을 갖는다. 자재함의 세부내용은 아래와 같다.
37)『大般涅槃經』卷21(『大正藏』375, 746中) “云何復名為大涅槃?有大我故,名大涅槃。涅槃無我,
大自在故,名為大我。”
38) ‘8자재’가 외도인 자이나교나 와이세시까 학파에서 설해진 것이고,「섭대승론」에서 8자재아를
부정한 데에 반하여,『대반열반경』은 이를 긍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菊池 康源, 「大般涅
槃經における“我”」, 駒沢大学大学院仏教学研究会年報 通号30 (東京: 駒沢大学大学院仏教学研究会,
1997), p.67.
①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나타낸다.
② 한 티끌 같은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다.
③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지만 가볍고 무거움이 없다.
④ 한량없는 마음이 있어 다른 세계도 모두 볼 수 있다.
⑤ 근이 자재하여 하나의 근으로 6가지를 알기도 하고, 6가지 근으로 모
두를 모르기도 한다.
⑥ 온갖 법을 얻었지만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
⑦ 말씀이 자재하여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하여도 무량한 그 뜻을 다하지
못한다.
⑧ 모든 곳에 두루함이 허공과 같아 볼 수 없지만 자재함으로써 모든 이
들이 보게 한다.39)
39)『大般涅槃經』卷21(『大正藏』375, 746中-下)에서 참조.
‘대아’는 그 몸이 자재하다. 한 몸이기도 하고 여러 몸이 되기도 하고 삼천대
천세계에 가득하기도 하지만 그 무게에 있어 가볍고 무거움을 가늠할 수 없다
[①②③]. 또한 그 두루함이 허공과도 같아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동시에 모
든 이들이 볼 수도 있게 한다[⑧]. ‘대아’는 능력이 자재하다. 다른 세계를 모두
볼 수 있고, 6근을 자유자재하게 사용할 수 있다[④⑤]. 또 그 말씀이 자재하여
무량한 뜻을 세간에서 가늠할 수 없다[⑦]. ‘대아’는 이렇듯 자재하여 온갖 법
을 얻었지만 결코 얻었다는 생각이 없어 걸림이 없다[⑥].
대열반과 불성은 그 성품이 상락아정으로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이때 불성의 아(我)는 여래성이 강조된 것이고, 대열반의 아[大我]는 자
재함이 부각된 것이다. 이들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으로 언급된 구절은 아래
와 같다.
선남자여, 어떤 비구가 말하기를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어 금강 같은
몸을 얻으며, 그지없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며 몸과 마음이
걸림이 없어, 여덟 가지 자재함을 얻으니, 이러한 비구는 쌍으로 선 사라
나무를 장엄할 것이니라.40)
40)『大般涅槃經』卷21(『大正藏』375, 791中) “善男子!若有比丘能說眾生悉有佛性,得金剛身,
無有邊際,常、樂、我、淨,身心無礙,得八自在,如是比丘則能莊嚴娑羅雙樹。”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므로 대열반의 항상한 몸을 가지고, 이러한 상락
아정의 성품으로 걸림없는 대아의 자재함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진
아 혹은 대아로 지칭되는 대승불교의 자아관은 불성이자 대열반이고 이러한
‘아’는 8가지 자재함을 가지며, 여래 법신의 상주불변의 항상함이 그 정체성이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2. 부정되는 자아
초기불교의 무아사상에서의 아와 외도의 아뜨만에 대한 이해는 진아와는
다르며,『대반열반경』에서 부정되고 있다. 이러한 삿된 아(我)에 대한 집착이
진아에 이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 중생의 자아
초기 불교에서 ‘나’는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며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
오온(五蘊)이란 오음과 같은 말로 색(色, 물질), 수(受, 감각), 상(想, 표상), 행(行,
의지작용), 식(識, 사유분별)의 다섯 가지의 모음을 말한다.『잡아함경』 「금경」41)
에서 이 오온의 결합은 거문고의 소리에 비유되기도 한다. 거문고의 아름다운
소리는 거문고의 여러 요소들과 연주자의 인연화합을 통해 나는 것이지만, 이
것들은 곧 없어지고 만다. 이처럼 오온의 결합을 통해 ‘나’를 이루지만 이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41)『雜阿含經』卷43(『大正藏』99, 312中-下)에서 참조.
“중생의 ‘아’라는 것은 곧5음이니, [오]음을 떠나서는 다시 다른 ‘아’가 없느
니라.”42) 이 구절에서 중생의 나는 오음임을 언급하고 있다. 즉 중생이 말하는
나는 오음의 결합에 불과하며 오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는 무아설을 그대로 언급하고 있다.
42)『大般涅槃經』卷30(『大正藏』375, 802下) “眾生我者,即是五陰,離陰之外更無別我。”
또한 오음의 각각도 또한 ‘아’가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
만일 색(色)이 ‘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인가? 색은 진실
로 ‘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 중략 … 만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면, 마
땅히 ‘아’가 없음을 알 것이다. ‘아’가 없으므로 무상하다 이름하고, 무상
하므로 괴롭다 하고, 괴로우므로 공하다 하고, 공하므로 뒤바뀌었다 하
며, 뒤바뀌었으므로, 모든 중생이 생사에서 헤매나니,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도 이와 같으니라.43)
43)『大般涅槃經』卷28(『大正藏』375, 789下) “若言色是我者,是亦不然。何以故?色實非我。
… 중략 … 若不能得隨意作者,當知必定無有我也。以無我故名為無常;無常故苦;苦故為空;
空故顛倒;以顛倒故,一切眾生輪轉生死。受、想、行、識亦復如是。”
‘아’라고 하는 것은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기에 오온의 화합물 뿐 아니라 그
온의 각각도 ‘아’가 아님, 궁극적 실체는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더불어 해당 인
용문 중에서 ‘아’에 대한 부정으로 무아(無我)와 비아(非我)가 함께 쓰였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색은 진실로 아가 아니다[色實非我]’는 구절은 ‘비아
설’을 촉발한 무아상경(無我相經)의 구절인 ‘색은 아가 아니다. … 중략… 수・
상・행・식 역시 아가 아니다’44)와 일치한다. 이 구절만 보면 비아론은 단지 색・
수・상・행・식이 자아가 아니라는 결론에만 그치고, 어떤 형태의 자아도 존재
하지 않는다는 무아론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에, 불교에서 진정한 자아의 존재
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45) 다만 인용문에서는 무아도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비아인지 무아인지를 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44) 정승석,「윤회의 자아와 무아」(서울: 장경각, 1999), p.20에서 재인용.
45) 한자경, 앞의 책, p.24
비아이든 무아이든 ‘아’라고 일컬어지는 오음의 결합은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부정되는 자아에 해당한다. 오음에 대한『대반열반경』의 설
명은 아래와 같다.
①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법을 탐하게 하고 선한 법은 여의게 한다.
② 여러 가지 번뇌로 무장하여 어리석을 사람들을 해쳐 생사에 떨어지게 한다.
③ 자비한 마음없이 선과 악을 함께 해친다.
④ 모든 번뇌로 해치려는 마음을 항상 품는다.
⑤ 오음에 살해당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⑥ 삼계의 범부 중생을 모두 해친다.
⑦ 오음은 간 데마다 있음으로 도피할 수가 없다.46)
46)『大般涅槃經』卷23(『大正藏』374, 400下-500上)에서 참조.
위에서 오음이 가지는 부정적인 의미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오음은 번뇌
를 가진다[②④]. 또한 선한 법을 멀리하게 한다[①③]. 오음에 대한 관찰을 소
홀히 하여 오음에게 종식당할 경우의 과보는 지옥이며[⑤], 이러한 오음은 당
연히 범부 중생을 해롭게 하지만[⑥], 이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움을 말하고 있
다[⑦].
그러나 이러한 오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또한『대반열반경』은
제시 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8정도, 6바라밀, 4무량심을 방편삼아 해탈하
면 오음을 벗어날 수 있다”47)는 것이다. 즉 해탈・열반의 길을 통해 오음에서 벗
어나 진아를 만나는 대열반의 길로 갈 수 있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47)『大般涅槃經』卷23(『大正藏』374, 500上) “有智之人以善方便得脫五陰。善方便者,即八聖道、
六波羅蜜、四無量心。”
2) 외도(外道)의 자아
진아와 대비되어 부정되는 자아는 오음의 결합인 무아의 ‘아’외에도 외도의
‘아’가 있다. 외도의 ‘아’ 즉 아뜨만은 상주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한 것이기에
상주불변의 진아와 유사해 보인다. 이와 관련한 문답이『대반열반경』에 여럿
등장한다. 이에 붓다의 대답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외도의 ‘아’와 진아는 그 모양만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벌레가 나뭇잎에 우연히 쓴글자처럼, 외도의 아뜨만은 보이는 모습이
진아와 같아 보일 뿐 외도는 진아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
다는 것이다.
둘째는 외도의 ‘아’는 사실은 없는 것 즉 무아이고, 여래의 항상하고 즐겁고
깨끗하고 공한 ‘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외도가 주장하는 ‘아’는 ‘보는 것’
이다.
만일 구담이 ‘아’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아’가 있나니, 나라고 하는 것
은 보는 것을 ‘아’라고 이름합니다. 구담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창문 안
[向中]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러하니, 창문은 눈에 비유하
고 보는 것은 나에게 비유합니다.48)
48)『大般涅槃經』卷28(『大正藏』375, 798中) “若瞿曇有我,我亦有我。所言我者,見者名我。瞿曇!
譬如有人向中見物,我亦如是,向喻於眼,見者喻我。”
즉 안근과 보는 것을 분리시켜, ‘보는 것’이 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위의 ‘창
문에서 밖을 보는 사람’의 비유는 와이세시까(Vaiśeṣika)의 구의법강요와
『밀린다왕문경』에도 등장한다.49) 또한 ‘보는 것’을 ‘아’라고 여기는 것은『우빠
니샤드(Upaniṣad)』의 아뜨만의 설명과 상통한다.
49) 카나쿠라 엔쇼(金倉圓照), 앞의 책, p.150 참조
“그[아뜨만]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자,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자, 생각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자, 식별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자이다. 그를
제외하고는 보는 자가 없고, 그를 제외하고는 듣는 자가 없고, 그를 제외
하고는 생각하는 자가 없으며, 그를 제외하고는 식별하는 자가 없다. 그
것이 너의 아뜨만이요, 내부의 제어자요, 영생하는 자이다. 이 밖의 것은
고통이다.”50)
50) “adṛṣṭo drạṣṭāśrutaḥ śrotāmato mantāvijńato vijńātā/ nānyo‘to’sti drạṣṭā nānyo‘to’sti śrotā nānyo‘to’sti
mantā nānyo‘to’sti vijńātā/ eṣa ta ātmāntaryāmy amṛtaḥ/ ato’nyad ārtam”, Bṛhadāraṇ yaka-upaniṣad
3.7.23 ; 정승석, 「영혼에 관한 인도 철학의 세 가지 관점」, 가톨릭신학과 사상 제67호 (서울: 신
학과사상학회, 2011), p.187에서 재인용.
하지만 ‘아’가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화합을 통해 본다고 하는 것이
붓다의 대답이다.
빛이 있고 밝음이 있고 마음이 있고 눈이 있어서, 이 넷이 화합하는 것을
본다고 이름하고, 이 가운데는 참으로 보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없건
만, 중생들이 뒤바뀌어서 보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과 있다고 말하나니,
이런 이치로 모든 중생들은 보는 바가 뒤바뀌었고, 부처님과 보살은 보
는 바가 진실하다.51)
51)『大般涅槃經』卷28(『大正藏』375, 789中) “有色、有明、有心、有眼,是四和合故名為見,是中實無見
者、受者。眾生顛倒,言有見者及以受者。以是義故,一切眾生所見顛倒,諸佛、菩薩所見真實。”
“눈과 물질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것이 촉(觸)이
다. 촉과 함께 수(受)・상(想)・사(思)가 생긴다.”52)는 설명은 이미 초기불교『잡
아함경』에서 설해진 것이다. 인연이 화합하여 본다고 이르는 것으로 보는 것,
느끼는 것의 실체가 있어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52)『雜阿含經』卷12(『大正藏』99, 72下) “緣眼、色,生眼識,三事和合觸,觸俱生受、想、思。”
이렇기 때문에 외도의 법에는 반드시 ‘아’가 없는 것이요, 만일 ‘아’가 있
다고 말하면 이는 곧 여래니라. 왜냐 하면 몸이 끝없는 까닭이며, 의심이
없는 까닭이니,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므로 항상하다 이름하고, 나지
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므로 즐겁다 하고, 번뇌의 때가 없으므로 깨끗하
다 하고, 열 가지 모양이 없으므로 공하다 하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하고 즐겁고 ‘아’이고 깨끗하고 공하여 온갖 모양이 없느니라.53)
53)『大般涅槃經』卷28(『大正藏』375, 790上) “以是義故,外道法中定無有我。若言我者,則是如來。何以
故?身無邊故、無疑網故。不作、不受,故名為常;不生、不滅,故名為樂;無煩惱垢,故名為淨;無
有十相,故名為空。是故,如來常、樂、我、淨、空、無諸相。”
즉 외도가 말하는 ‘아’의 실체는 없으며, 오직 여래라고 하는 ‘아’가 있을 뿐
이다. 이 ‘아’는 업을 짓지도 않고 과보를 받지도 않으므로 항상하고, 불생불멸
함으로 즐겁고, 번뇌가 없어 깨끗하고, 따라서 갖가지 다른 모양을 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진아 불성은 세간의 ‘아’에 대한 이해를 뛰어넘는다는 설명이다.
성인 아닌 사람이 ‘아’에 대하여 크고 작은 모양을 억측할 때에 피(稗)54)의
씨 같다, 쌀 같다, 콩 같다, 엄지손가락 같다 하여, 가지각색 허망한 생각을
내지만 허망하게 생각하는 모양은 참되지 않다. 세상의 아상을 뛰어넘는
것[出世我相]을 불성이라 하니 이렇게 ‘아’를 생각함이 최선이다.55)
55)『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4, 408下) “非聖之人,橫計於我大小諸相,猶如稗子、或如米豆,乃至母
指,如是種種妄生憶想,妄想之想,無有真實。出世我相名為佛性,如是計我,是名最善。”
경전은 불성의 모습은 여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성문・연각의 경지
에서도 알아챌 수 없다고 자주 반복한다. 같은 맥락에서 불성에 대한 여러 가
지 허망한 생각들은 모두 옳지 않다. 불성은 중생의 생각으로는 짐작하기 어렵
다. 따라서 불성의 바른 모양은 세간의 아상을 뛰어넘음으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위의 비유에서 불성의 모양을 짐작하는 데 있어 피의 씨, 쌀, 콩, 엄지손가락
등이 쓰인다. 씨, 쌀, 콩의 비유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을 설명하는 찬도가
『우빠니샤드(Chāndogya-upaniṣad)』의 유명한 교설에 등장한다.
이것이 심장 안에 있는 나의 아뜨만으로서, 쌀알보다 혹은 보리알보다
혹은 겨자씨보다 혹은 수수보다 혹은 수수의 핵보다도 작다. [그러나] 심
장 안에 있는 나의 그 아뜨만은 대지보다도 크고, 하늘과 땅의 중간보다
도 크고, 하늘보다도 크고, 이러한 세계들보다도 크다. 56)
56) “eṣa ma ātmā antarhṛdaye’ṇīyān vrīher vā yavād vā sarṣapād vā śyāmākād vā śyāmākataṇḍulādvā/ eṣa
maātmā antarhṛdaye jyāyān pṛthivyā jyāyān antarikṣāj jyāyān divo jyāyān ebhyolokebhyah“, ̣
Chāndogyaupaniṣad3.14.3.; 정승석, 앞의 논문, p.170에서 재인용.
또한 엄지손가락의 비유도『까타까 우빠니샤드(Kāthaka-upaniṣd)』에 언급
된다.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뿌루샤가 아뜨만의 중앙에 과거와 미래의 지
배자로 있다.” 57) 즉 경전에서 외도가 존재의 실체로 상정한 ‘아’ 즉 아뜨만의
모습은 불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빠니샤드의 해당 비유를 들어 명백히 밝히
고 있다. 이는 외도의 아뜨만이 진아와는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진아
는 세간에서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까지 밝히고 있다. 또한 외도
아와 진아를 ‘세간’과 ‘출세간’의 교상(敎相)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아’에 관한 표현이나 발상이 지극히 ‘우빠니샤드=베단따’적임을 경에서도 인
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58)
57) Kāthaka-upaniṣd Ⅳ.12 ; 카나쿠라 엔쇼(金倉圓照), 앞의 책, p.57에서 재인용.
58) 高崎直道,「如來藏思想の形成: イント大乘佛敎思想硏究」 (東京: 春秋社, 1974), p.148.
정리하자면, 불성은 여래가 아니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외도들이
‘아’에 관하여 자신들이 생각하는 아의 모양을 상정하지만 이것은 모두 옳지 않
다. 진아는 세간의 이해를 넘어선 모습(出世我相)으로 우리의 망상으로는 짐작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6식을 멸하는 것이 항상한 아’59)이기에 아의 모습을 임
의로 상정하고 이것이 진아라고 하는 것은 진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59)『大般涅槃經』卷39(『大正藏』374, 596上) “滅內外入所生六識,名之為常。以是常故,名之為我”
IV. 무아에 대한 대반열반경의 견해
대승불교의 자아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가장 유념하여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초기불교의 무아와 대승불교의 진아의 관계이다.『대반열반경』은 초기
불교 무아설의 ‘아’를 오온의 결합으로 보고 부정하였고, 불성으로 대치되는
자아 혹은 참 나[眞我]는 긍정하였다. 이러한 불성과 무아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무아에서 진아로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살피고 그 의구심을 해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세존이시여, 25유에 나[我]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
남자야, 나라는 것은 여래장이라는 뜻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
진 것이 곧 ‘아’란 것이다. 이 ‘아’란 것이 본래부터 한량없는 번뇌에 덮였
으므로 중생들이 보지 못한다.60)
60)『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48中) “「世尊!二十五有,有我不耶?」 佛言:「善男子!我者,即是
如來藏義。一切眾生悉有佛性,即是我義。如是我義從本已來常為無量煩惱所覆,是故眾生不能得見。”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나는 여래장이자 불성이고, 이 불성은 자아로서 모든
중생이 갖는다. 하지만 우리는 상주불변의 청정하고 즐거움인 불성을 잘알아
채지 못한다. 해서『대반열반경』에서는 “불성이 이렇게 깊고 아득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니 부처님만이 보는 것이요,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미칠 수 없느니
라.”61)라고 하여 성문・연각조차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61)『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53上) “善男子!所有佛性如是甚深、難得知見,唯佛能知,
非諸聲聞、緣覺所及。”
이러한 이유는 번뇌에 있다. 번뇌에 덮힌 불성에 관한 비유는『대반열반경』
곳곳에 등장한다. ‘집 마당에 묻힌 순금 독의 비유’62)는 가난한 여인의 집안에
순금 독이 묻혀있는데 그것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다른 이의 말을 듣고
는 순금독을 파내었다는 것으로, 그 순금독은 불성을 말한다. ‘미간에 박힌 구
슬의 비유’63)는 양미간에 금강주가 있던 장사는 그 구슬이 몸에 들어간 줄 모
르고 없어진 줄알았다. 그러나 의사가 비춰주는 거울을 보고서야 구슬이 있음
을 알게 된다. 이 때 의사는 선지식에 해당한다. ‘구름이 가린 해의 비유’64)는
구름과 안개가 해와 달을 가린다하여 실제로 해와 달이 없어진 것은 아닌데,
중생이 보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모두 번뇌가 지혜의 눈을 가리었기 때문에
중생이 불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불성은 모든 중생에게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아가 진아 보다
먼저 설해진 이유가 있다.
62)『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48下)에서 참조.
63)『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49上)에서 참조.
64)『大般涅槃經』卷25(『大正藏』375, 514上)에서 참조.
시기상에 차이는 있지만, 무아와 진아가 모두 설해지게 된 것에 대해『대반
열반경』의 설명은 크게 두 가지 입장에서 나누어 볼 수 있다. 무아와 아는 다르
지 않다는 것, 각각의 시기에 따른 법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선남자야, ‘아’와 ‘무아’의 성품과 모양이 둘이 없으니 … 중략 … 모든 중
생들이 명(明)과 무명(無明)의 업인 인연으로 두 가지 모양이 생기는 것이
니, 만일 무명이 달라지면 변하여서 명이 되는 것이며, 모든 법의 선한 것
과 선하지 아니한 것도 그와 같아서 두 가지 모양이 없느니라.65)
65)『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51下) “善男子!我與無我,性相無二… 중략 …是諸眾生以明、
無明業因緣故,生於二相;若無明轉,則變為明。一切諸法善、不善等亦復如是,無有二相。”
아와 무아의 성품과 모양이 둘이 아니지만, 무명에 의해 무아를 설했으며,
지혜를 터득하고 나면 명이 되어 진아 불성을 설한다는 것이다. 즉 중생의 근
기에 따라 다르게 설했을 뿐 한 가지 말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66)
66)『大般涅槃經』卷35(『大正藏』374, 841上) “如來世尊雖名二語,為了一語故。”
무아와 진아를 각기 적절한 시기에 맞추어 설한 것임은 비유를 들어 설명된
다. 아이가 병이 들었을 때 의사는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해 준다. 아이는 그 약이
소화될 때까지 엄마의 젖을 먹으면 안 되는데, 약이 다 소화되고 나면 다시 아
이에게 젖을 빨 수 있도록 한다.67) 여래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
려고 아(我)가 없는 법을 닦으라 하였으며, 그렇게 닦고는 아(我)라는 마음을
아주 끊어 버리고 열반에 들게 하는 것’68)이다. 이 역시 근기에 맞추어 적절한
교법을 설하는 것이다. 즉 결국 무아는 진아를 설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67)『大般涅槃經』卷8(『大正藏』375, 648中)에서 참조.
68)『大般涅槃經』卷5(『大正藏』375, 635中) “又,解脫者捨嬰兒行。譬如大人捨小兒行;解脫亦爾,
除捨五陰。除捨五陰即真解脫,真解脫者即是如來。”
무아가 진아를 위한 방편설이라면, 결국 무아는 적절한 시기에 버려야 하는
법이다. 무아를 말할 때의 ‘아’가 오음의 결합을 말하는 것이고, 오음이 번뇌를
일으키는 부정되는 자아임을 앞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오음의 나를 버리는 것
이 불성의 참 나를 보는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임이 또한 명백하다.
또 해탈은 어린애의 버릇을 버림이다. 마치 어른이 어린애의 버릇을 버
리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5음(陰)을 없애버렸다. 5음을 버린 것이 참 해탈
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이다.69)
69)『大般涅槃經』卷5(『大正藏』374, 395上) “又解脫者捨嬰兒行,譬如大人,捨小兒行。解脫亦爾,
除捨五陰,除捨五陰即真解脫,真解脫者即是如來。”
V. 결론
대승불교의 자아관에 대하여 대승의『대반열반경』을 가지고 조망해 보았
다. 붓다의 가르침에 있어서 ‘무상・고・무아’는 일체를 바라보는 기본 원리이
기에 자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불편함이 있을 수도 있다. 붓다의 교설
이 비록 무아를 말했다고는 하나, 그 설법의 이유는 ‘아(我)’의 유무에 있지 않
다. 붓다가 부정하는 자아는 그 주체가 5온의 결합임에 주목해야 한다. 5온은
12처・18계와 더불어 일체제법에 대한 분류로서 불변상주하는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온의 화합물인 ‘가아(假我)’ 즉 실체 아닌 것에 집착하여 고통
에 헤매는 것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아’를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자아에 대
한 논의에 무리가 없다.
가아의 부정은 참된 자아인 진아(眞我)에 대한 연상을 가능하게 한다. 불교
에서 말하는 참된 자아란 불성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등장한다. 불성사상은 모
든 중생에게 불성 혹은 여래장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때의 불성은 진아로 풀이
되고 이를 전면에서 주장하는 경전이『대반열반경』이다.
『대반열반경』은 여러 맥락에서 자아를 논의한다. 그것들을 크게 나누면 긍
정되는 자아와 부정되는 자아 두 가지로 구분된다. 긍정되는 자아는 진아(眞
我), 대아(大我), 여래성의 ‘아(我)’에 해당한다. 진아는 무아와 대비되어 참된
자아임이 강조되고, 또한 그것은 여래의 성품을 가진 불성임이 언급된다. 대아
는 대열반의 근거가 된다. 대열반은 범부나 성문들의 열반과는 구분되어 여래
의 열반을 말한다. 대열반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대열반은 대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런 대아는 8가지의 자
재함을 특성으로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불성과 같다. 여래성의 ‘아’는 여래의
성품을 가진 나 즉 불(佛), 불성, 여래장을 의미한다. 불성은 붓다가 될 원인으
로 결국 대반열반경에서 긍정되는 자아는 불성이자, 대열반의 근거로서 진
아로 같은 맥락을 이룬다.
부정되는 자아는 중생의 자아와 외도의 자아이다. 중생의 자아는 오음을 말
한다. 오음의 결합도, 오음의 각각도 모두 자아가 아니다. 오음은 또한 번뇌로
서 중생을 괴롭게 함으로 제거 되어야하는 나이다. 외도의 자아는 그 모습이
진아와 같지만, 사실은 잘못된 허상에 불과하다. 진아는 오로지 불성뿐이며,
이 불성에 대한 범부들의 짐작은 모두 억측에 불과하다. 불성은 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출세간(出世間)의 경지에 있기 때문이다.
출세간의 경지에서 여래만이 볼 수 있는 불성은 모든 중생에게 있다. 다만
두터운 번뇌에 덮여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번뇌의 어두움에 갇힌 불성을 중생
은 쉽사리 알아챌 수 없기에 그 방편으로 무아를 먼저 설한 것이다. 무아는 중
생을 위한 방편설이고, 따라서 그 성품과 모양은 사실 하나라고『대반열반경』
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대반열반경』을 통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아는 불성이고, 이 불
성은 가아에 반대되는 진정한 자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때 진아는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는 다른 범주에 있으므로 서로 상충되지 않으며, 외도
의 아뜨만에 대한 이해와도 또한 다른 것이다.
이상 대승불교의 자아관에 대해 고찰해 보았으나, 중생의 숨겨진 불성이 드
러나 해탈 열반의 길로 가는 수행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길바란다. 이는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무아를 설하신 붓다의 가르침에 기인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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