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선불교에 나타난 생사관

실론섬 2017. 5. 26. 17:59

동아시아불교문화 28집

선불교에 나타난 생사관

이 병 찬/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부교수.

 

Ⅰ. 머리말

Ⅱ. 초기ㆍ부파불교의 생사관

Ⅲ. 대승불교에 나타난 생사관

Ⅳ. 선불교에 나타난 생사관

Ⅴ 맺음말

 

<국문초록>

본 연구는 초기ㆍ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 나타난 생사관을 토대로 선불교

에서 나타난 생사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초기ㆍ부파불교는 신체적인 생사

즉 오온의 취합과 이산, 壽, 煖, 識의 기준을 통해서 생사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연 특히 삼사화합에 의해서 생유(生有)가 시작되고, 삶은 연기에

의해서 유지되고, 사대의 해체의 인해서 사유(死有)로 나아간다. 초기ㆍ부파

불교의 생사는 자성적 연기관을 바탕으로 생사를 반대개념으로 파악하고 있

다.

 

반면 대승불교는 무자성적 연기관을 바탕으로 생사를 동일개념 즉 생사일

여로 파악하고 있다. 생사일여의 관점은 선불교에서 극대화된다고 할 수 있

고, 선사들의 죽음의 예는 이를 체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대승경전인

금강경은 생사의 想을 만들지 않고 무자성의 관점에서 생사를 꿈, 그림자,

허깨비, 물거품과 같이 보는 것을 제시한다.유마경에서는 생사를 불이의

관점에서 본다.열반경의 불신상주(佛身常住)와 실유불성(悉有佛性) 사상

은 붓다가 될 수 있는 잠재태라는 관점에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은 생멸은 없고, 무주 즉 생사에 머물지 않고, 대치법

으로 생멸을 다룬다.벽암록무문관의 생사관은신심명의 ‘지도무난

유염간택’(至道無難 唯嬚揀擇)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오 화

상의 “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다”는 언급과 도솔삼관(兜

率三關)은 생사를 간택할 수 없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생사

를 간택하지 않는 선사의 죽음을 화산덕보, 보화선사, 등은봉선사, 동산양개

화상의 임종장면에서 볼 수 있다.

 

Ⅰ. 머리말

 

인생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인간의 피할 수 없

는 운명 중의 하나가 죽음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

에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모든 설명들은 다른 이를 통한 간접적인 체험이

지 직접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불교는 죽음을 불가피한 현실로 철저하게 인

식하고 있다. 생로병사는 12연기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모든 괴로움의 정점

이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종교라고 할

수 있으므로, 불교가 제시하는 생사에 대한 관점은 생사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안에서도 생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

이다.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생사에 대한 일의적인 정의가

필요하지만, 불교 안에서는 상반된 정의가 존재한다. 초기ㆍ부파불교와 대

승ㆍ선불교는 생사를 반대로 보는 관점과 일여로 보는 관점을 각각 피력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연기관이라는 불교의 근본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둘의 관점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초기ㆍ불교의 생사관을 먼저 살펴보고, 대승ㆍ선불교의 생사

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 사이에 상반된 생사관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차이

점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한다. 대승불교의 생사관은금강경,유마경,

열반경을 중심으로 생사에 대한 대승불교적 해법을 검토하고자 한다. 또

한 선불교의 생사관은 혜능의육조단경」, 승찬의신심명, 선어록으로는

벽암록무문관, 선사들의 실제 죽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를 통해서 대승불교적 해법이 극대화되는 측면을 보고자 한다.

 

Ⅱ. 초기ㆍ부파불교의 생사관

 

1. 초기불교의 오온의 화합과 해체

초기불교에서 생사에 관한 불교적 사유의 원천을 볼 수 있다.1)중아함

제7권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무리가 다섯 가지 모임[五蘊]을 일으키고 생

명의 근원을 얻는 것을 생(生)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섯 가지 모임은 물질

적인 존재인 色과 정신적인 인식작용인 受, 想, 行, 識의 구성으로 인하여 모

든 존재와 모든 인식이 이루어는 것을 말한다.

1) 불교에서 생사를 다룬 논문으로는 정승석(2001), 이덕진(2001), 이종희(2005) 안옥선(2006), 김
   재성(2007), 강윤곤(2009), 김재성(2011), 허남결(2012) 등이 있다. 이들은 초기불교를 중심으
   로 생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단행본으로는 안양규(2015), 일묵(2010), 한자경 편(2011)이 있
   다. 한자경 편(2011)은 초기불교, 인도티벳불교, 선불교에서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
   다. 심혁주(2013), 심혁주(2015)는 티베트 불교에서의 죽음의 문제를 조장(鳥葬)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자세한 서지사항은 참고문헌을 참고할 수 있다. 한자경 편(2011)에서 황금연
   (2011)은 선불교의 생사관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반면, 본 논문은 선불교를 중심으로 불교
   에서의 생사관의 변화와 그 원인을 고찰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생이라는 것은 저 중생을 말하는 것이니, 각각의 중생의 類는 生한 즉 生

하고, 出한 즉 出하고, 이루어진 즉 이루어져 오음(오온)을 일으키고, 命根

을 얻는다. 이것을 生이라 이름한다.2)

2)『中阿含經』권7(『大正藏』권1, 462c) 生者,謂彼眾生、彼彼眾生種類,生則生,出則出,成
   則成,興起五陰,已得命根,是名為生。 

 

오온은 초기불교의 인간관으로서 오온을 일으키는 것을 生이라고 한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이 생명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에 의해서 오온의

다섯 가지기능 즉 물질의 기능[色], 느끼는 기능[受], 생각하는 기능[想], 의도

하는 기능[行], 아는 기능[識]이 활동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인간으로서 기

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은 실체적으로 작용하지는 않고, 단지 기

능적으로만 작용한다.

 

이러한 오온이 생명을 얻는 것은 이른바 삼사화합(三事和合)에 의해서 이

루어진다.『증일아함경』제12권에서는 生을 받고 싶어도 소중한 인연의 결

합 없이는 생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生有時에 父와 母가 한곳에 모여 잠자

리를 하더라도 전생의 識(識神, 外識) 또는 중유(香陰, 中陰身) 등이 오지 않

으면 성태(成胎)가 되지 못하고, 識(識神, 外識) 또는 중유(香陰, 中陰身)가 들

어가려 하더라도 부모가 한데 모이지 않으면 성태(成胎)가 이루어지지 못한

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어머니가 욕심이 있어서 부모가 一

處에 모여 함께 자더라도 바깥에서 識이 오지 않으면 成胎하지 못한다. 또

識이 들어가려 하더라도 부모가 한 데 모이지 않으면 成胎가 이루어지지 못

한다.3)

3)『增臺阿含經』권12(『大正藏』권2, 602c) 有三因緣識來受胎。云何為三?於是,比丘!母有欲
   意,父母共集一處,與共止宿,然復外識未應來趣,便不成胎。若復欲識來趣,父母不集,
   則非成胎。

 

‘삼사화합(三事和合)’으로 인해서 수태(受胎)가 된다. 세 가지 인연(因緣)

과 식(識)이 함께 할 때 生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과 연 즉

연기(緣起)에 의해서 生有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생이라는 삶도 오온의 형태

로 생멸하는 연기에 의해서 지속되고, 생유가 형성되는 과정 또한 연기에 의

해서 가능하다.

 

生은 실체가 아닌 오온이 발생할 수 있는 인연이 갖추어져야만 발생할 수

있다. 부모의 정혈 뿐 만 아니라 전생의 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초기불

교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生이라면, 이

러한 인연에 의해서 소멸하는 것이 死라고 할 수 있다.증일아함경제46권

에서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저러저러한 중생들이 되풀이하면서 받은 몸

에 온기[煖]가 없어지고, 덧없이 변하여 다섯 가지 친[親]함이 나뉘며, 다섯

가지 쌓임[五陰]의 몸을 버리고, 명근이 끊어져 파괴되는 것이다.4)

4)『增臺阿含經』권46(『大正藏』권2, 797c) 云何為死?所謂彼彼眾生, 展轉受形, 身體無熅, 無常
   變易, 五親分張, 捨五陰身, 命根斷壞, 是謂為死。

 

죽음은 모든 살아 있는 무리들이 윤회하면서 받은 몸에 따뜻함이 없어지

고, 변화하여 오온이 나눠지고, 오온의 몸을 버리고, 생명의 근원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地水火風이라는 땅의 요소(地界, 뼈나 골

격), 물의 요소(水界, 혈액이나 침, 고름 등의 액체나 수분), 불의 요소(火界,

몸의 따뜻한 기운), 바람의 요소(風界, 공기와 산소를 들이마시는 호흡)의 四

大가 흩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색(色)은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변하는 것

은 인연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고,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生老病死나

生住異滅의 변화 속에서 보존되지 않는다.

 

죽음은 삶 동안에 기능하던 오온이 지수화풍이라는 요소로 해체되는 과정

이다. 인간으로 기능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다섯 기능으로서 오온이 정지

되는 것을 말한다. 연기의 법칙 하에서 작용하던 요소들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는다. 특히 근원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사대(四大)로 해체된다. 따라서

초기불교에 나타난 생사의 기본적인 개념은 인연으로부터 발생한 오온의 화

합과 해체가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초기불교의 생사는 기본적으로 연기의 법칙 하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고 할 수 있다. 생사의 관점도 철저하게 붓다의 기본적인 교의인 연기의 법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즉 생사관은 연기관의 하위체계라고 할 수 있다. 초기불

교에서 생사는 반대 개념으로 해석되고 있다. 생은 오온은 화합하여 인간으

로서 기능을 하는 것이고, 사는 오온이 해체되어 인간으로서 기능하지 못하

는 것을 말한다. 생과 사를 오온을 중심으로 인간의 기능의 유무로 설명하는 

측면에서 생사는 반대개념으로 등장한다. 초기불교에서도 생사는 연기관의

하위체계에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만, 반대개념으로서 존재한다. 반대개념이라고 해서 연관되어

있고, 상호의존하기 때문이다. 생사가 반대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은 생사를

구별되는 특징으로 하는, 즉 생사가 각각의 자성을 가지고 있는 자성적 연기

관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2. 부파불교의 수(壽), 난(煖), 식(識)

초기불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전개하고 있는 부파불교는 초기불교의 생

사관이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부파불교에 나타난 生은 오온이 인

연에 따라 화합하고 명근(命根)을 얻는 것이다.구사론에서 명근의 본체는

곧 수(壽) 즉 수명(壽命)으로, 따뜻한 기운(煖)과 식(識)을 능히 유지케 하는

것이다.5) 수(壽), 난(煖), 식(識)의 요소는 生의 지표로 작용하며 수(壽)는 특

별한 法으로 煖과 識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즉 煖과 識을 지니고서 相續하

여 머무르게 하는 원인이 壽이다.6)

5)「阿毘達磨俱舍論」권5(『大正藏』권29, 204c) 命根體即壽 能持煖及識。
6)「阿毘達磨俱舍論」권5(『大正藏』권29, 26a) 謂有別法能持煖識說名為壽。

 

명근의 근본(體)은 곧 수(壽; 목숨)이니 난(煖; 따뜻함)과 인식(識)을 능히
가지고 있다. 논에서는 명근의 체(體)는 목숨이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것이 명근이냐 하면, 삼계의 목숨이라고 한다.7)
7)「阿毘達磨俱舍論」권5(『大正藏』권29, 26a) 命根體即壽 能持煖及識 論曰。命體即壽。故對法
   言。云何命根。謂三界壽。

 

壽가 煖과 識을 지니고, 煖과 識이 다시 이 壽를 유지하고 있다. 이 壽는 業

에 따라서 유지할 수 있는데 업이 이끄는 바를 따라서 상속하면서 전전하기

때문에 이 셋은 항상 사라짐이 없다. 또 壽의 體는 三界의 업으로 이끄는 세

력을 말한다. 三界의 業이 이끄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세력이 상속하여 결정

되며 머무를 때를 따라서 어느 정도의 시간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이 세력을 

壽의 體라고 한다. 마치 곡식의 종자 등이 익을 때까지의 세력과 같으며, 또

화살을 쏘아서 맞출 때까지의 세력과 같다.8) 여기에서 업은 壽 즉 생명을 유

지하고 상속하고 전전하게 하는 것이다. 업이 생사의 원동력으로 등장한다.

업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형성되고, 업의 과보도 또한 연기의 법칙에 의해

서 받게 된다. 업의 생성과 받음으로 인해서 생사가 이끌어져 나가는 것이다.

세 가지 즉 수(壽; 목숨)와 난(煖; 따뜻함)과 인식(識)은 삶의 지표 역할을 한

다. 난(煖)은 신체적인 생명의 유지라면, 식(識)은 정신적인 생명의 유지라고

할 수 있고, 이 둘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을 수(壽)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

에 있어서 업의 역할을 하는 것이 壽라고 할 수 있는데, 수에 의해서 어디로

상속할지, 어느 정도 기간 동안 머물지가 결정된다. 상좌부불교에서 壽는 생

명기능(jīvitindriya, 命根)을 말한다.9) 이러한 생명기능과 함께 나머지 기능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8)「阿毘達磨俱舍論」권5(『大正藏』권29, 26b) 是則此三應常無謝。既爾此壽應業能持。隨業所
   引相續轉故。若爾何緣不許唯業。能持煖識而須壽耶。理不應然。勿一切識從始至終恒異
   熟故。既爾應言業能持煖煖復持識。何須此壽。
9) 대림스님ㆍ각묵스님 공동 번역 및 주해,「아비담마 길라잡이」, 초기불전연구원, 2002, p.193.

 

아비달마발지론에서는 어떠한 유정이 유정의 衆同分 즉 유정으로서의

보편성으로부터 이전하고 괴멸하며, 壽와 煖과 命根을 버리며, 모든 蘊을 파

기하고, 신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死라고 한다. 오온이 인연에 따라 화합하

여 얻은 命根을 파기하고 없어진 것을 死라고 한다.

 

무엇을 死라고 하는가? 이러저러한 유정이 이러저러한 유정의 衆同分으

로부터 移轉하고 壞沒하며, 壽(목숨)와 煖(따뜻함)과 命根(생명기능)을 버

리며, 모든 蘊을 파기하고, 신체가 죽어 없어지는 것, 이것을 死라고 한

다.10)

10)「阿毘達磨發智論」권2(『大正藏』권26, 921b) 云何死。答彼彼有情。從彼彼有情眾同分。
    移轉壞沒。捨壽暖命根。滅棄諸蘊。身殞喪。是謂死。

 

구사론에서는 ‘壽, 煖, 識, 이 세 가지 법이 몸을 버릴 때엔 버려진 몸은

자빠지고 엎어져서 나무와 같아 아무 감각이 없다.’고 한다.11) 이러한 壽가

다하는 원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壽命을 얻는 異熟의 業力이 다했기 때

문이고, 둘째 富貴와 安樂의 果報를 얻는 業力이 다했기 때문이고, 셋째 얻고

자 하는 두 가지 業 즉 二業이 함께 다했기 때문이고, 넷째 능히 橫厄의 일을

피하거나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12)

12)「阿毘達磨俱舍論」권5(『大正藏』권29, 26b-c) 有壽盡故死非福盡故死廣作四句。第一句者 感
    壽異熟業力盡故。第二句者。感富樂果業力盡故。第三句者。能感二種業俱盡故。第四句
    者。不能避脫抂橫緣故。

 

대비비바사론에서는 이러한 죽음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時死와 非時死

의 구분, 그 각각에 대해서 두 가지 경우로 해서 네 종류의 죽음이 있다. 첫째

는 壽가 다하여 죽은 것으로 재물이 다한 까닭이 아니다. 예를 들어 수명이

짧고 재물이 많은 업의 경우, 그것은 재물이 다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것과 같다. 둘째는 재물이 다한 까닭이지 수명이 다한 것

이 아닌 경우이다. 예를 들어 수명이 길고 재물이 적은 업의 경우, 그것은 재

물이 다한 까닭으로 죽은 것이지 수명이 다한 탓으로 죽은 것이 아닌 것과 같

다. 셋째는 수명이 다하고 재산이 다한 까닭으로 죽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

명이 짧고 재물이 적은 업의 경우, 그것은 이후에 수명이 다해서 죽은 것이고

재산이 다해서 죽은 것이다. 넷째는 수명이 다한 것도 아니고 재산이 다해서

도 아니다. 예를 들어 수명이 길고 재물이 많은 업의 경우, 비록 이후에 재물

과 수명이 모두 다하지 않았으나 惡緣을 만나 때가 아닌데도 죽는 것과 같

다.13)

13)「阿毘達磨大毘婆沙論」권20(『大正藏』권27, 103b) 有四種死。一壽盡故死非財盡故。如有一
    類有短壽業及多財業。彼於後時壽盡故死非財盡故。二財盡故死非壽盡故。如有一類有少
    財業及長壽業。彼於後時財盡故死非壽盡故。三壽盡故死及財盡故。如有一類有短壽業及
    少財業。彼於後時壽盡故死及財盡故。四非壽盡故死亦非財盡故。如有一類有長壽業及多
    財業。彼於後時雖財與壽二俱未盡。而遇惡緣非時而死。

 

그리고 생명을 마치는 단계에서 의식이 최후로 소멸하는 신체부위에 차이

가 있다. 갑작스레 생명을 마치는 자는 의식과 신근(身根)이 문득 함께 소멸

한다. 그러나 만약 서서히 죽는 자로서 하계와 인(人)과 천(天)으로 가는 자는

각기 순서대로 발과 배꼽과 마음에서 의식이 소멸한다. 악취에 떨어지는 자

의 의식은 최후로 발에서 소멸한다. 만약 인취로 나아가는 자라면 의식은 배

꼽에서 소멸하며, 만약 하늘로 왕생하는 자라면 의식은 마음 즉 심장에서 소

멸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不生] 아라한은 그들의 最後心 역시 심장

에서 소멸한다.

 

부파불교에서는 壽·煖·識을 생사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煖·識

이 있기 위해서는 수 즉 목숨이 있어야 하므로 수를 煖·識의 우위에 둔다.

그리고 수는 업을 원동력으로 한다. 또한 목숨이 다하는 원인과 목숨이 끝나

는 위치를 제시한다. 이러한 논의는 초기불교의 생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

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생사를 오온이라는 인간

기능의 작용여부에 초점을 두고 구분하는 반면, 부파불교에서는 목숨에 초점

을 두고 생사를 구분한다. 그러나 부파불교도 초기불교와 마찬가지로 생사

를 반대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ㆍ부파불교의 생사관은 생사를 구분되는 각각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

는 자성적 연기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연기관 자체는 대승불교에서

도 이어지고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무자성에 기반한 연기를 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생사관과 대승불교의 생사관은 차이가 난다

고 할 수 있다. 초기ㆍ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모두 연기관에 기반한 생사관을

펼치고 있지만, 자성을 기반하느냐, 무자성에 기반하느냐에 따라서 생사관은

다른 맥락에서 논의된다.

 

Ⅲ. 대승불교에 나타난 생사관

 

1. 금강경의 즉비

초기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반야경계통의 경전 가운데금강경과 不二사

상을 대표하는유마경그리고 불성사상을 대표하고 있는열반경을 바탕

으로 대승불교의 생사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생사관은 선불교의 생사

관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초기ㆍ부파불교에서 생사는 반대개념으로

서로 구분된다. 연기의 법칙 하에서 구분된다. 이때의 연기는 12지연기로, 각

각의 연기의 각지(各支)는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분의 근

거는 自性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자성에 의해서 다르마(dharma)가 구분

된다. 12지연기에서 生老病死는 구분되는 연기의 지분이다. 그러나 대승불

교는 이러한 자성의 구분을 부정한다. 다르마가 생멸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르마가 자성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생멸이 궁극적으

로 가면, 생멸 사이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찰라생찰라멸을 지속한다.

그러므로 다르마 즉 法은 無自性이 된다. 이러한 다르마의 무자성을 볼 수 있

는 인식능력이 般若가 된다.

 

금강경은 즉비(卽非)의 논리를 통해서 무자성과 반야의 입장을 표현하

고 있다.14) 卽非의 논리에서 A를 A라고 할 때, 언어적 표현에 의한 想의 작용

이 포함되는 후자의 A는 전자의 A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즉 문자적으로는

전자와 후자는 ‘A’로 동일하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이미 둘은 차이가 나므로,

둘을 다르다고 한 것이다. 언어의 작용에 의해서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미 다른 것이다.금강경은 ‘A는 A가 아니다’는 명제를 통해서 想을 없애

려고 하고, 언어가 실체시되는 것을 거부한다.금강경은 想에 의해서 법이

실체화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14) 定方晟,『金剛般若經』のパラドックス ,「金剛般若經の思想的硏究」, 東京: 春秋社, 1999,
    pp.101-103.

 

이러한 논리를 生死에 대입하면, 生을 生이라고 하면 生이 아니고, 死를 死

라고 하면 死가 아니게 된다. 초기ㆍ부파불교에서 生死를 분명하게 구분하

는 것과는 달리 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이는 生死의 문제가 궁극

으로 추구하는 열반과 윤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금강경?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중

생도 완전히 열반에 든 자가 없다”라고 한다.15) 열반에 들어도 열반에 든 것

이 아니라는 것은 윤회에 있어서도 윤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와 동일한 구조

를 가지고 있다.

15)『金剛般若波羅蜜經』권1(『大正藏』권8, 749a) 若非有想非無想。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
    之。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四相을 다루면서 “나라는 모습에 집착하고, 남이라는 모습에 집착하며, 나

와 남들이 어울려 생겨나는 우리 중생이라는 모습에 집착하고, 또는 이들 모

두의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이는 보살이 아니라고 한

다.”16) 여기에서 수자상(壽者相)은 목숨이라는 것도 하나의 상이라고 이야기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하나의 실재로서 존재하던 生死가금강경에서는 하

나의 想이 된다. 이러한 想을 버릴 것을 권고하는 것이금강경이라면, 생사

의 문제 또한 하나의 想일뿐이고, 궁극으로는 척파해야 할 것이다.17) 혜능의

금강경주석에 따르면 “생멸하는 모습은 같더라도 범부와 성현의 생멸은

다르다. 사대(四大)를 잘못 인정하여 나의 몸으로 삼고, 육근(六根)을 잘못 인

정하여 나의 존재로 삼고, 육진(六塵)을 잘못 인정하여 쾌락으로 삼는다. 마

음으로 알고 눈으로 보는 것에 망념 아닌 것이 없으니 모든 망념이 일어남에

온갖 번뇌가 벌어진다.”18) 이처럼 生死의 문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想의 문

제로 된다.

16) 원순 옮김,「육조 스님 금강경」, 서울: 법공양, 2010, p.39
17) 각묵스님 역해,「금강경 역해」, 서울: 불광출판사, 2001, p.65.
18) 원순 옮김,「육조 스님 금강경」, 서울: 법공양, 2010, p.27, p.296; 在凡夫聖賢之所以生滅則殊
    ... 亡認四大 以爲我身 亡認六親 以爲我有 亡認聲色 以爲快樂 亡認塵勞 以爲富貴 心目知
    見 無所不妄 諸妄旣起 煩惱萬差.

 

또한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은 生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집착하

는 모든 현실이 꿈과 같고, 그림자나 허깨비와 물거품 같고, 아침이슬 번개처

럼 사라지는 것 이와 같은 그 실상을 보아야 한다.”19) 이는 生死를 포함한 모

든 유위법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生死는 구

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허깨비, 물거품, 아침이슬, 번개와 같이 지속성

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공간의 안밖,

시간의 전후가 분명하지 않은 존재이다. 生死의 문제도 이렇게 보아야 한다

는 것이다.

19) 원순 옮김,「육조 스님 금강경」, 서울: 법공양, 2010, p.288;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亦露亦如
    電 應作如是觀.

 

2. 유마경의 불이

이러한 無自性의 기조는유마경에서 生死가 不二라는 표현으로 이어지

고 있다. 이는금강경유마경모두 대승불교의 기반이 되는 無自性ㆍ

空의 기초 위에 있기 때문이다. ?유마경?의 사상은 ‘不二法’으로 요약할 수 있

다. 不二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출가와 재가

가 둘이 아니며, 번뇌와 지혜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며, 시

간과 공간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일원론(一元論)적 관점을 말한다. 삼라만상

의 모든 만물이 서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나 본질적인 면에서

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유는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가진 상의상관성(相依相

關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이 홀로 독자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연에 의해 생성된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

다. 즉 무자성적 연기가 적용된다.

 

유마경은 생과 사 역시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으로 파악한다.유마경

에서 33인의 선지식은 불이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면서 불이법을 각

자의 견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들 선지식은 33가지의 ‘불이법문’을 제시한

다.

 

‘생과 멸’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이해하는 것, 아(我; 나)와 아소(我所; 나를 있

게 한 바의 것), ‘수(受; 법을 취하는 것)와 불수(不受; 법을 취하지 않는 것),

깨끗함과 더러움, 시동(是動; 미혹한 마음의 움직임)과 시념(是念; 아상을 갖

는 것), 일상(一相; 하나의 상)과 무상(無相; 상 없음), 보살심과 성문심, 선

(善)과 불선(不善), 죄와 복, 유루(有漏; 번뇌가 있는 것)와 무루(無漏; 번뇌가

없는 것), 유위와 무위, 세간과 출세간, 생사와 열반, 진(盡; 다 하는 것)과 부

진(不盡; 다하지 않는 것), 아(我)와 무아(無我), 명(明)과 무명(無明), 색(色)과

색공(色空), 사종(四種)의 이(異)와 공종(空宗)의 이(異), 눈과 색깔, 보시와

회향일체지, 공(空)과 무상(無相), 불(佛), 법(法), 중(衆), 몸과 몸의 소멸, 신

(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 복행과 죄행, 나를 내세우는 것으로부터 나와

나 아닌 것, 모든 대상을 둘이 아니라고 한다. 암흑과 광명, 열반을 좋아하는

것과 세간을 좋아하지 않는 것, 정도(正道)와 비도(非道), 실(實)과 부실(不實)

등을 둘로 보지 않는 것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불이법문 가운데 ‘생멸불이’는 가장 먼저 제시되고 있다.유마경에서 모

든 반대되는 개념은 더 이상 不二가 아니게 된다. 윤회와 열반, 생사도 또한 

무자성ㆍ공에 의해서 일원적으로 하나이지, 둘이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심

무애(心無礙) 보살이 설하는 몸과 몸의 소멸의 불이법은 다음과 같다.

몸과 몸의 소멸을 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몸은 그 자체로서 몸의 소멸

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개아(個我)라는 그릇된 관념

으로 파악한다거나 맹신하지 않게 되면 이것은 몸이다, 몸은 소멸하는 것이

다라고 쉽사리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단정도 없고 양자 간

의 분별도 사라지고 망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몸은 소멸을 본성으로 한다

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는 도

리를 아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20)

20) 박용길 옮김,『유마경』, 서울: 민족사, 1993, p.155. 心無礙菩薩曰: 身、身滅為二。身即是
    身滅。所以者何?見身實相者, 不起見身及見滅身, 身與滅身無二無分別, 於其中不驚、不
    懼者, 是為入不二法門。
    위의 원문은 구마라즙의 번역이고 현장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復有菩薩名無礙眼, 作如是
    言: 是薩迦耶及薩迦耶滅分別為二。若諸菩薩知薩迦耶即薩迦耶滅, 如是了知, 畢竟不起薩
    迦耶見, 於薩迦耶薩迦耶滅, 即無分別、無異分別。證得此二究竟滅性, 無所猜疑、無驚、無
    懼, 是為悟入不二法門。

 

몸을 개아로 파악하는 그릇된 관념의 분별이 사라지고, 관념의 망상에서

벗어날 때 살가야견(薩迦耶見, sātkaya)이라는 유신견(有身見)은 소멸된다.

이로 인해서 생멸이 없다는 불이(不二)로 나아가게 된다. 이를 설하는 보살

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의 몸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유신견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생사에 대해서 걸림이 없게(無礙) 된다. 몸의 생멸과 생

사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태어남과 죽음의 순간과 같은 순간을 분기점으로

일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멸이라는 것이 실재 사태에

서는 구분될 수 없는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마경에서 사용하는 논법인 불이법이 단순하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는 양비론(兩非論)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한 구분 자체가 사물을 있는 그

대로 파악하지 못하므로, 둘 가운데 하나로 이야기하는 것은 실재에 들어맞

지 않다는 것이다.유마경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不二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無自性ㆍ空을 표현하고 있다면,금강경에서는 동일한 개념이라

고 상(想)이 작용하면 다른 개념이 된다는 방식으로 無自性ㆍ空을 표현하고

있다.

 

유마거사는 “없어지고 생겨날 수 있는 법이 조금이라도 없다는 것을 알았

다면 어찌하여 그대는 ‘어디에서 죽어서 이 땅에 태어났는가?’라고 묻습니

까?”라면서 사리불에게 대답한다. “환상 속에서 나타나는 남녀에게 삶과 죽

음이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죽는다는 것은 곧 제행이 끊어지는 모습이

고, 생겨난다고 하면 곧 제행이 이어지는 모습인데 보살은 비록 죽더라도 온

갖 선법을 행하는 모습을 끊지 않고, 보살은 비록 태어나더라도 온갖 악법을

행하는 모습을 이어 가지는 않는다고 한다.21) 여기에서『유마경』의 불생불

멸(不生不滅)의 논리와 生死를 幻과 같이 보는 것은『금강경』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21) 김태완,『유마경』, 경기: 침묵의 향기, 2014, pp.373-374; 若諸法無沒生相,云何問言:
    汝於何沒而來生此 於意云何?譬如幻師, 幻作男女, 寧沒生耶? 舍利弗言: 無沒生也。
    汝豈不聞佛說諸法如幻相乎? 答曰: 如是!若一切法如幻相者!云何問言:汝於何沒
    而來生此?舍利弗!沒者為虛誑法, 敗壞之相;生者為虛誑法, 相續之相。菩薩雖沒, 不盡
    善本;雖生, 不長諸惡。 

 

3. 열반경의 불성

열반경은 붓다가 육체적인 입멸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붓다의 열반의

성취는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고 하면서, 열반의 성취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

다.열반경은 열반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붓다의 본성 즉 佛性을 드러내

고 있다. 이러한 불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으며, 이를 계발할 것을 독려

하여, 이를 계발할 경우에 인간은 붓다가 된다는 것이열반경의 불성사상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인간은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가능성으로서 불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태를 계발하는

것이 불성사상의 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경은 이러한 사상을 불신상주(佛身常住)와 실유불성(悉有佛性)으

로 표현하고 있다. 붓다의 몸(佛身)은 항상 이 세상에 머물고 있고, 모든 중생

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 즉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가 죽음을

당면한 상황에서도 붓다는 항상 있다고 하는 것이고, 또한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은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佛身은 단순히 육체적인 모습이 아니다. 이는 붓다의 法身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고감도 없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생주멸(生住滅) 가운데 生滅은 없

고, 住만 있는 것이다. 生滅에서 住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실유불성이다. 이러한 실유불성은 모든 인간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불신상주가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열반경은 이미 佛을 주인공으로 붓다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四法印

가운데 涅槃寂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체개고, 제행무상이 세속의

모습이라면, 제법무아와 열반적정은 승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법무

아가 반야에 의해서 무자성을 통찰하는 것이라면, 열반적정은 불신과 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열반경』「사자후보살품에서 불성은 第一義空이고, 空과 不空을 보지 않

고, 상락아정, 대열반이고, 지혜이지만, 空과 不空을 보며, 무상ㆍ무락ㆍ무아

ㆍ무정을 보니 생사라고 한다.22) 일체중생은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무상ㆍ

무락ㆍ무아ㆍ무정이라고 한다. 일반 중생의 경우 전도된 삶을 살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한 것으로, 즐겁지 않은 것을 즐거운 것으로 본다.

常樂我淨에서 我는 초기불교에서 無我의 我가 아니라 붓다를 가리키는 말이

다. 불성, 불신에서 이야기하는 佛이 곧 我이다. 이러한 我의 특징은 常樂淨

이다.

22) 佛性者名第一義空, 第一義空名為智慧。所言空者, 不見空與不空。智者見空及與不空、常
    與無常、苦之與樂、我與無我。空者一生死, 不空者謂大涅槃;乃至無我者即是生死, 我者
    謂大涅槃。

 

열반경의 불성사상은 생사문제에 대한 대승불교의 또 하나의 해답이 된

다.금강경에서 생사의 문제를 물거품처럼 보라고 하는 것으로 해결했고,

유마경에서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으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반경은 붓다에게는 죽음이 없고, 모든 중생은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중생에게도 잠재태로서 불신상주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으

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는 붓다와 중생이 잠재태에서는 구별되

지 않는 즉 무자성이라는 주장이다.

 

Ⅳ. 선불교에 나타난 생사관

 

1. 혜능의 유훈

대승불교에는 크게 두 가지 사상적 흐름 즉 반야사상의 흐름과 불성사상의

흐름이 있다.금강경에서 반야사상을 볼 수 있었고,유마경에서 不二사상

을 볼 수 있고,열반경에서 불신상주사상과 실유불성사상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상의 흐름은 선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육조단경에서 통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야사상과 불성사상의 융합이육조단경의 핵심을 이루

기 때문이다.23) 혜능대사(慧能大師, 638-713)의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

法寶壇經)에는 生死에 대한 견해가 혜능대사의 유훈에 잘 드러나고 있다.

23) 정유진, 혜능이 선학에 준 功過 ,「佛敎學報」, Vol.41, 2004, p.93.

 

그대들은 잘들 있어라. 이제 그대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속

의 인정에 따라서 슬피 울거나 눈물을 보이지 말라. 사람들의 조문을 받거

나 몸에 상복을 걸치는 자는 내 제자가 아닐뿐더러 또한 정법도 아니다. 무

릇 자기의 본심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라. 거기에는 동(動)도 없고 정(靜)

도 없으며,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으며, 감(去)도 없고, 옴(來)도 없으며,

옳음(是)도 없고 그름(非)도 없으며, 머무름(住)도 없고 가는 것(往)도 없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미혹하여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이제 다시금 그대들에게 부촉하여 그대들로 하여금 견성토록 하겠다. 내가

떠난 후에 내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내 가르침을 벗어나면 설령 내가 세상에 살아 있다손 치더라도 또한

아무런 이익도 없다.24)

24)「六祖大師法寶壇經」권1(『大正藏』권48, 345a) 汝等好住。吾滅度後 莫作世情悲泣雨淚。
    受人弔問 身著孝服。非吾弟子。亦非正法 但識自本心 見自本性。無動無淨無生無滅 無去無
    來 無是無非 無住無往。恐汝等心迷 不会吾意 今再囑汝 令汝見性 吾滅度後 依此修行 如吾
    在日 若違吾敎 縱吾在世但 亦無有益。김호귀 역(2010) p.212

 

‘내가 떠난 후에’도 ‘내가 살아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라는 것은 삶과 죽

음 그 어떤 것에도 무게 중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다. 그렇게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연속선 안에 있는

것이기에 지금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항상 해왔던 것처럼 하면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법성(法性)에는 본래부터 생멸거래(生滅去來)가 없다.’25)는 것이

다. 이는 혜능의 대법(對法)에 대한 가르침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일체

법을 설하는 경우에 결코 자성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면서26) 19가지의 對의

자성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생과 멸의 對를 설명한다. 생(生)으로 물으면, 멸

(滅)로 대답하라(生與滅對)고 한다.27)

25) 김호귀 역,「육조대사법보단경」, 경기: 한국학술정보(주), 2010, p.193.
26) 김호귀 역,「육조대사법보단경」, 경기: 한국학술정보(주), 2010, p.184; 說一切法 莫離自性
27) 김호귀 역,「육조대사법보단경」, 경기: 한국학술정보(주), 2010, p.184; 自性起用十九對 ... 
    生與滅對.

 

그리고 生死를 상대적으로 보는 것은 혜능의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

(無住)의 삼무(三無) 가운데 무주(無住)의 사상과도 상통하고 있다. 무상(無

相)은 대상을 분별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밖으로 대상경계를 여의는

것이다. 무념(無念)은 오직 하나만 생각할 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고, 모든 대상경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28) 무주(無住)는 생각 생각이 머

물지 않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무주는 혜능의 생사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주라는 것은 사람들의 본성이다. 즉 생각 생각이 머무르지 않으

면 전 찰나의 생각 생각과 후 찰나의 생각 생각이 상속하여 단절하지 않게 된

다.”29) 이처럼 무주는 생사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다는 것을 말하

고 있다.

28) 정유진,「돈황본 육조단경 연구」, 서울: 경서원, 2007, p.215; 無相者, 於相而離相。無念者,
    於念而不念。
29) 정유진,돈황본 육조단경 연구」, 서울: 경서원, 2007, p.215; 無住者, 為人本性, 念念不住, 前
    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絕。

 

혜능대사 이후 선불교로 나아가면서 생사는 생사일여(生死一如)로 가게

된다. 따로 生이니 死니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자성(自性)을 보

면 즉 원래의 마음인 본심(本心) 또는 자기의 마음인 자심(自心)을 보면, 생사

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둘

다 별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만큼 생사를 함께 관통하는 마음을 보아

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성(自性)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는 生이라고 하든 死라고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生死에 대한 간택심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초기ㆍ부파불교에서는 구별하는 것 즉 간택

(揀擇)이 다르마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여기서는 무간택(無

揀擇), 무택법(無擇法)이 중요한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선불교에서 생사일여

의 관점은 대승불교의 無自性ㆍ空사상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부파불교

에서 법의 분별을 보는 입장에서 죽음과 생이 찰나적으로 구분되는 것과는

반대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벽암록무문관에 나타난신심명의 유염간택

승찬의신심명은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하는 것을 꺼

리면 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30) 이는 선불교의 지향점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 불리는벽암록에서신심명은 유

일하게 이름이 인용되는 선적(禪籍)이다. 그것도 4번에 걸쳐서 인용되고 있

다. 1700 공안 가운데 100개를 뽑는데신심명의 첫 구절이 4번 등장하는 것

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벽암록의 핵심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선불교에서는 간택을 꺼리는 것을 볼 수 있

다. 생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선불교에서는 유염간택(唯嫌揀擇)의 입장에서

구분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인생에서 죽

고 살고(生死), 가고 오고(去來), 늘어나고 줄어들고(增減), 사랑스럽고 밉고

(愛憎), 검고 희고(黑白), 깨끗하고 더럽고(淨穢), 옳고 그르고(是非)가 부질

없는 분별이고 착각일 뿐이다.”31)

30) 삼조 승찬 지음, 김태완 설법,「바로 이것!」, 서울: 침묵의 향기, 2005, p.226; 至道無難 唯嬚揀擇.
31) 조오현 역해,「碧巖錄」, 서울: 불교시대사, 1997, p.188 각주.

 

벽암록제2칙에서 조주(趙州)는 ‘조금이라도 도의 경지를 말하려 한다면

바로 간택에 떨어지거나 명백에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한다.32) 57칙, 58칙, 59

칙에서 간택이 다시 등장한다.벽암록제57칙에서 조주는 한 납자가 승찬

대사의 위 구절을 인용하면서 어떤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라고 묻자,

조주는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고 대답하자, 그것도 간택이 아니

냐고 납자가 묻는다. 이에 대해서 조주는 “이 촌놈아 어떤 것이 간택이란 말

이냐?”라고 호통을 치면서33) 간택을 여전히 꺼리고 있다. 제58칙에는 제57칙

에서 질문한 납자가 조주화상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한다. “요즘 사람들은

심명의 첫 구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지요”라고 질문하자 “전에도 어

떤 사람이 같은 질문을 했는데 5년이 지났어도 잘 모르겠구나.”라고 대답한

다.34) 이는 여전히 간택을 꺼리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이다. 여전히 간택을 하고 있으므로 간택하지 않음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

란다는 말이다.벽암록제59칙에서 조주에게 “화상은 늘 ‘지극한 도는 어려

울 것이 없다. 간택을 그만두면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간택이 아닌지

요? 그렇다면 화상은 어떻게 사람을 지도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화

상은 “그렇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간택을 그만두면 되느니라.”라

고 대답한다.35) 결국에는 간택을 그만 두면 된다는 것이다.

32) 조오현 역해,「碧巖錄」, 서울: 불교시대사, 1997, p.21; 至道無難。唯嫌揀擇。纔有語言。
    是揀擇是明白。
33) 조오현 역해,「碧巖錄」, 서울: 불교시대사, 1997, p.201; 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
    如何是不揀擇。州云。天上天下唯我獨尊。僧云。此猶是揀擇。州云。田厙奴。什麽處是
    揀擇。僧無語。
34) 조오현 역해,「碧巖錄」, 서울: 불교시대사, 1997, p.203; 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
    是時人窠窟否。州云。曾有人問我。直得五年分疏不下。
35) 조오현 역해,「碧巖錄」, 서울: 불교시대사, 1997, p.207; 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
    擇。纔有語言是揀擇。和尙如何爲人。州云。何不引盡這語。僧云。某甲只念到這裏。州云。
    只這至道無難唯嫌揀擇。

 

벽암록에서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제41칙에서 조

주(趙州)는 “크게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

는 질문에 “밤에 다니지 말고 날이 밝으면 다시 오게”라고 대답한다.36) 조주

는 죽음을 간택함 없이 다루고 있다. 죽음을 특별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밤늦게 다니지 말고 밝을 때 다니라고 한다. 

36) 조오현 역해,「碧巖錄」, 서울: 불교시대사, 1997, p.150; 擧。趙州問投子。大死底人卻活時如
    何。投子云。不許夜行。投明須到。

 

벽암록제55칙에서는 선사가 직접 죽음을 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도오

(道吾) 화상이 점원(漸源) 스님과 함께 한 상가에 이르러 조문을 할 때였다.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말했다.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도오 화상이 말

했다. “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다.”라고 한다. 다시 점원

스님이 “왜 말할 수 없습니까?”라고 묻자, 도오 화상은 “말하지 못하지, 말하

지 못해!”라고 한다.37) 도오 화상은 말하면 빗나간다[開口卽錯]는 것을 알고

있다. 생사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

기서도 여전히 생사를 간택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37) 조오현 역해,「碧巖錄」(서울, 불교시대사, 1997), p.193; 擧。道吾與漸源至一家弔慰。源拍棺
    云。生邪死邪。吾云。生也不道。死也不道。源云。爲什麽不道。吾云。不道不道。

 

무문관제46칙에서는 “백척간두에 앉아만 있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었다

고 해도 아직 진짜 대오한 것이 아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가 시방세

계에 전신(全身)을 드러내야 한다.”38) 이는 크게 한 번 죽어야 한다는 의미이

다.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自性이 문제가 된다. 이는 선불교의 공

부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다음 칙인무문관제47칙에서 볼 수 있다.

도솔 화상은 세 개의 관문을 만들었다. 제방을 행각하며 눈 밝은 스승을 찾아

수행하는 것은 오직 見性하기 위해서이다. ① 지금 이 순간, 그대의 自性은

어디 있는가? ② 自性에 눈뜨면 비로소 生死를 해탈한다. 죽음에 임하여 어떻

게 生死를 해탈하겠는가? ③ 생사를 해탈하면 곧 바로 가야할 곳을 안다. 사

대가 흩어지면 어디로 가는가?39) 도솔삼관(兜率三關)이라고 불리는 이 문답

은 자성, 해탈, 거처를 순차적으로 묻는다. 이는 선어록에서의 생사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自性에 눈뜨면 비로소 生死를 해탈한다.’ 生死의 문제를

自性에 눈뜨는 것으로 해결한다. 죽음에 임하여 어떻게 생사를 해탈하겠는

지, 사대가 흩어지면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

이 문제인가? 自性에 눈뜨는 것, 自性이 문제이다. 자성을 보는 것 즉 見性이

문제이다. 自性이 문제이지, 生死가 문제가 아니다. 生死는 수레이고, 自性은

소이다. 自性을 보면 또는 소를 때리면, 수레는 가게 된다. 自性에 눈뜨면, 사

대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칙에서 볼 수 있다.무문관

48칙에서 건봉화상에게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오직 한 길로 열반에 이른다

고 합니다. 도대체 그 ‘한 길’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건봉은 주장자

를 들어올려 허공에 선 하나를 긋고 “여기에 있다.”라고 한다.40) 사대가 어디

로 가는가에 대해서, 여기 있다는 대답을 한다. 사대가 어디를 가고 말고 하

는 것이 아니다. 생사는 거래(去來)가 아니라 여기이다. 

38) 石霜和尚云。百尺竿頭如何進步。又古德云。百尺竿頭坐底人。雖然得入。未為真。百尺
     竿頭須進步十方世界現全身。
39) 兜率悅和尚。設三關問學者 撥草參玄只圖見性。即今上人性在甚處 識得自性。方脫生死。
     眼光落時。作麼生脫 脫得生死。便知去處。四大分離。向甚處去。
40) 乾峯和尚因僧問。十方薄伽梵。一路涅槃門。未審路頭在甚麼處。峯拈起拄杖。劃一劃
    云。在者裏。

 

선어록 특히벽암록무문관에서는 생사의 문제는신심명에서 나

오는 ‘간택하지 않음’에서부터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존재와 비존재를 간택하

지 않음을 바탕으로 生死의 문제에 대해서도 간택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

러한 生死를 간택하지 않음은 선불교의 근원적인 사상과 맞닿아 있다.신심

의 유염간택(唯嫌揀擇)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무문관에서는 生死가 문

제가 아니라 自性이 문제가 되고, 見性이 문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간

택하지 않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이 해결되면 生死의

문제도 해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선사들이 생사를 간택하지 않

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3. 선사들이 보여주는 죽음

임제종 황룡파의 화산덕보(禾山德普, 1025-1091)는 左右에 일러 말씀하시

기를 “제방(諸方)의 존숙(尊宿)이 돌아가셨다. 총림(叢林)에서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나는 무리들을 위해서 실없는 말을 하겠다. 내가 이제 죽을 것

이니 너희들은 먼저 제사를 지내라. 이에 우두머리를 쫓아 제사에 힘써라.”

대중들이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언제 돌아가십니까” 선사께서 말씀하기를

“너희 무리들이 제사를 마치면 곧 갈 것이다.” 주무시는 전각에 휘장을 치고 

선사께서 앉으시니 제문(祭文)을 독송하였다. 꿇어앉아 상식(上食)을 올리니

선사께서 여여하게 드셨다. 문중의 제자들이 아래에서 엄숙히 힘썼다. 날이

바뀌니 명년원일(明年元日)에 제사를 마쳤다. 말씀하시기를 “날이 밝고 눈이

그치면 가겠다”고 하셨다. 때에 이르러 홀연히 눈이 그치고 맑아지니 선사께

서는 향을 사르고 천화(遷化)하셨다.41) 화산덕보 선사는 생사에 선후가 없음

을 보여주고 있다. 제사를 먼저 지내는 모습에서 생사가 시간적인 선후관계

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41)「五等全書」권37(「卍續藏」권82, p.42b) 謂左右曰。諸方尊宿死。叢林必祭。吾以為徒虗
    設。吾若死。汝曹當先祭。乃令從今辦祭。眾問。和尚幾時遷化。師曰。汝輩祭絕即行。
    於是幃寢堂坐師中。致祭讀文。跪揖上食。師飫餐自如。自門弟子下及莊力。日次為之。
    明年元日祭絕。曰明日雪晴乃行。至時晴忽雪。雪止。師坐焚香而化。화산덕보 선사에 관
    한 논의는 아래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황금연 생사가 일여하니, 죽음이란 낡은 옷 벗는 것
    일 뿐,「죽음, 삶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서울: 운주사, 2011, pp.200-201.

 

스스로 관에 들어가 입적한 보화선사(普化禪師, ?-861)가 장차 입적하고자

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하나의 승복[直裰]을 주시오.”라고 구걸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갖다 주었지만, 받지 않았다. 임제선사는 사람

을 시켜 관을 하나 보냈다. 보화선사는 임제선사의 하인아이에게 그것을 문

득 받아 왔다. 이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일 동문(東門)에 나가 죽겠

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쫓아 성을 나갔으나 선사께서는 화내며 소

리지르시기를 “오늘은 죽기에 적당하지 않으니 까마귀가 푸르다. 다음날에

남문(南門)에서 천화(遷化)하겠다.” 사람들은 역시 그렇게 따랐다. 다시 말씀

하시기를 “다음날에 서문(西門) 밖이 길한 방향이다.”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드물어졌다. 4일째 되는 날 스스로 관을 짊어지고 북문(北門) 밖으로 방울을

울리며 관 안으로 들어가 입적하셨다. 고을의 사람들이 성 밖으로 달려 나가

관을 열어보았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고 오직 허공 가운데에 방울 소리만 점

점 멀어져 가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42) 보화선사는 죽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남문, 남문, 서문, 북문을 옮겨다닌다. 누구에

게나 어떤 문을 통해서든 올 수 있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은 맞이해야 하는

것을 스스로 관에 들어가면서 보여주고 있다. 

42)宗鑑法林」권20(「卍續藏」권66, p.420a) 普化將入滅。謂人曰。乞與我一箇直裰。人與衣服
    皆不受。臨濟令人送一棺。師笑曰臨濟廝兒饒舌。便受之。乃辭眾曰。明日東門去死也。
    郡人相率送出城。師厲聲曰。今日葬不合青烏。明日南門遷化。人亦隨之。又曰。明日出
    西門方吉。人出漸稀。第四日自擎棺北門外振鐸入棺而逝。郡人奔走出城。揭棺視之已不
    見。惟聞空中鐸聲漸遠。莫測其由。 

 

물구나무를 서서 입적한 등은봉선사(鄧隱峰禪師)의 예도 있다. “제방(諸

方)에서 천화(遷化)하는 모습은 앉아서도 가고 누워서도 가는 것을 나는 일

찍이 보아왔다. 도리어 서서 입적한 이는 없는가?” 대중들이 말했다. “있습니

다.”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 천화한 이는 없는가?” 대

중들이 말했다.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선사께서 이에 거꾸로 서서 입적

하셨는데 그 옷은 흘러내지 않고 몸을 따라 그대로였다. 이때 대중들이 의논

하여 다비를 하고자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멀고 가까이서 그것을 보고

경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선사께는 비구니인 누이가 있었는데 이때 저쪽

에 있다가 가까이 와서는 꾸짖어 말하기를 “노형(老兄)은 옛적부터 예법을

따르지 않더니 죽어서도 다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합니까?” 하며 손으로 그것

(屍身)을 밀어뜨리니 넘어져서 마침내 다비를 하고 사리를 거두어 탑에 모셨

다.43) 등은봉선사는 죽음의 일상성을 보여주고 있다. 살았을 때 물구나무 서

는 것이 대수롭지 않듯이, 물구나무서서 죽는 것 또한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

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서 물구나무를 서나, 죽어서 물구나무를 서나 마찬가

지라는 것이다.

43)「景德傳燈錄」권8(『大正藏』권51, 259c) 諸方遷化坐去臥去吾嘗見之。還有立化也無。眾
    云。有也。師云。還有倒立者否。眾云。未嘗見有。師乃倒立而化。亭亭然其衣順體。時
    眾議舁就荼毘屹然不動。遠近瞻視驚歎無已。師有妹為尼。時在彼乃俯近而咄曰。老兄疇
    昔不循法津。死更熒惑於人。於是以手推之。僨然而踣遂就闍維。收舍利入塔。

 

동산양개화상(洞山良介和尙, 807-869)은 삭발하고, 몸을 씻고, 가사를 입

고, 대중에게 말하여 종을 치게 하고, 의젓이 앉아서 입적하려 하니 제자들이

통곡하였다. 이때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저 출가인은 마음을 사물에 의지

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수행이다. 어찌 그대들은 슬퍼하고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 있는가?” 그리고 원주를 불러 우치재(愚癡齋)를 차리라고 명하니, 원주

가 슬피 울면서 재를 차려 7일간 계속되었는데, 선사는 마지막 날에 말했다.

“출가 수행자들이 어찌 이다지도 머트러운가? 큰 길을 떠나는데 어찌 이렇게

소란하고 슬피 우는가?” 8일째 되는 날 목욕물을 데우게 하여, 목욕을 하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44) 양개화상 또한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모

습을 보이고 있다. 죽음의 때를 알고 이를 준비하는 모습은 선사의 마지막 수

행의 모습이면서, 생사일여를 보여서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4)「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大正藏』권47, 526b) 剃髮。澡身披衣。聲鐘辭眾。儼然坐化。時
    大眾號慟。移晷不止。師忽開目。謂眾云。出家人。心不附物。是真修行。勞生惜死。哀
    悲何益。復令主事辦愚癡齋。眾猶慕戀不已。延七日。食具方備。師亦隨眾。齋畢乃云。
    僧家無事。大率臨行之際。勿須喧動。遂歸丈室。端坐長往。

 

이러한 선사들의 행적은 일반적인 대중들의 관념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고 할 수 있다. 선사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볼 때 생사불이(生死不二),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관점이 확립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의

때도 가르침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대하는 선사의 이러한 태도는 생사를 간택하지 않음(生死不擇), 나아가서는

무자성ㆍ공(無自性空)의 사상이 체화되어서 극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경우에는 신체적인 생사에 주요관심을 보이고 있

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온의 취합과 이산, 壽, 煖, 識의 기준을 통해서 생사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사를 명확히 구분되는 반대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생사관은 철저하게 연기의 법칙 하에 있다. 특히 自性에 기

반한 연기관을 따르고 있다. 인연 특히 삼사화합에 의해서 生有가 시작되고,

삶은 연기에 의해서 유지되고, 사대의 해체로 인해서 死有로 나아간다. 초기

불교의 생사관은 연기관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초기불

교의 생사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기적 세계관 하에서 생사

관을 설명하고 있다. 삶의 표시, 죽음의 종류, 신체와 마음의 분리과정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초기대승경전인금강경에서는 생사의 想을 만들지 않는 것, 즉 生을 生

이라고 하면 生이 아니게 되고, 死를 死라고 하면 死가 아니게 된다. 또한 無

自性의 관점에서 生死를 꿈, 그림자, 허깨비, 물거품과 같이 보는 것을 알 수

있다.유마경에서는 生死가 不二하다는 것을 심무애보살을 통해서 알 수

있다.열반경의 불신상주(佛身常住)와 실유불성(悉有佛性) 사상은금강

유마경의 무자성, 불이사상과는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모든 중생은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붓다에게는 죽음이 없고 상주하므로, 붓다

가 될 수 있는 잠재태로서의 중생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러한 무

자성, 불성은 선불교로 이어진다.

 

선불교는 반야사상과 불성사상의 융합을 추구한다. 혜능대사의 유훈에서

도 생멸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무주의 이념에서도 생사에 머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가지 대치법 가운데서 생멸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어록의 생사관은신심명의 첫구절인 ‘지도무난 유염간택’(至道無難 唯嬚

揀擇)에서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대표적인 선어록인벽암록무문관

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벽암록제55칙에서 도오 화상의 “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다.”는 언급과무문관제47칙 도솔삼관(兜

率三關)에서 생사를 간택할 수 없다는 언급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선사들의 행적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부분은 이러한 사상을 체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산덕보, 보화선사, 등은봉선사, 동산양개화상의 임종장면

에서 선사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간택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생사관은 대승불교를 전후로 해서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

다. 생사를 반대개념으로 보는 초기ㆍ부파불교적 관점과 생사를 동일개념으

로 보는 대승ㆍ선불교적 관점이 불교 내에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생사를 연

기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두 관점 모두 동의하지만, 이 연기를 자성적

연기로 보는가, 무자성적 연기로 보는가에 따라서 둘은 관점을 달리하고 있

다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