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한국선에서 선교차별의 전개와 그 변용

실론섬 2017. 6. 12. 16:44

[韓國禪學 제36호]

한국선에서 선교차별의 전개와 그 변용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361-A00008).>

김호귀(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목 차 

Ⅰ. 서언

Ⅱ. 선법의 태동시기에 보이는 선교차별

   1. 선법의 전래시기 선교차별의 대두

   2. 선법의 발전시기에 보이는 선교차별

   3. 선주교종에 근거한 선교융합의 전승

Ⅲ. 선법의 전승시기에 보이는 선교차별의 변용

   1. 청허휴정의 선주교종적 융합

   2. 청허휴정의 선교차별의 전개

   3. 조선후기 선주교종의 계승

Ⅳ. 결어

 

[국문 초록]

한국 선법의 태동시기에 해당하는 나말 여초의 시기에는「眞歸祖師說」을 비

롯하여 구산문의 개창자들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선교차별이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선법의 수입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수입된 선법이 뿌리내리기 위

한 부득이한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선교차별의 전통은 이후로 선법의 발전시

기에 이르러서도 지속되어 선과 교에 대한 하나의 입장으로 굳어져버렸다. 그

러나 선법의 전승시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에는 선교차별의 주장이 선주교종

의 융합이라는 모습으로 변용되었다. 그 까닭은 선법이 토착화되고 발전된 상

황에서는 더 이상 교학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학과 대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선주교종의 입장은 선교차별이면서도 선교

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교학에 근거한 선법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교입선의 입장으로 전개되었다.

 

Ⅰ. 서언

 

한국 선법의 시작은 8세기 중반에 입당하여 구법·수행했던 법랑의 전법으로

부터 간주된다. 곧 중국선종 제4조 대의도신의 문하였던 법랑이 東山法門의 

선법을 전래했다는 것은 이미 지증국사의 비문으로부터 확인되고 있다.1) 더

불어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에 걸쳐 소위 구산문이 형성되면서 각각 

나름대로 몇 가지 특색있는 선풍을 전개하였는데 선법의 측면에서 교학과는 

차별되는 입장에서 선법의 우월성을 주장한 점이 나타났다.2) 그 가운데

舌土論」,「眞歸祖師說」및 도의국사와 지원승통과 문답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내용은 모두 선과 교의 차별을 논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특색

을 보여준다.

1) 崔致遠,『智證大師寂照塔碑』, (『朝鮮金石總覽』卷上), pp.90~91. ; 김호귀,「최초기 한국선법의 
   전래와 그 성격」,『한국선학』제20호. (한국선학회, 2008. 8), pp. 119~160.
2) 한편 중국선종의 경우에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과는 달리 오히려 교학의 측면에서 선법을 
   무시하고 깔보는 교선차별의 입장도 보인다. 念常,『佛祖歷代通載』卷9, (『大正藏』49), p.549上, 
   “又謂光統律師菩提流支 數下毒害師 師遂不救 嗚呼甚哉 光統流支法門龍象 詎能爾乎 是皆立言者誤也” 
   달마대사가 교학자들로부터 6회에 걸쳐서 독약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도 그 일례이다. 契嵩,『傳法正
   宗記』卷5, (『大正藏』51, p.744上, “曰傳謂達磨六被毒藥 乃菩提流支之所致” 또한 달마의 선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소승선법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志磐,『佛祖統紀』 卷21, (『大正藏』49, 
   p.242上, 참조. 공식적으로는 남북조시대부터 형성된 중국불교 교판의 경우에 당나라 시대 화엄의 
   교판에서 선종을 頓敎로 간주하여 화엄의 圓敎보다 하위의 개념으로 분류했던 모습이 엿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澄觀,『大方廣佛華嚴經疏』卷2, (『大正藏』35), p.512中~下, “四頓敎者 但一念不生 
   卽名爲佛 不依地位漸次 而說故立爲頓 … 以四敎中皆有一絶言故 今乃開者 頓顯絶言 別爲一類 離念機故 
   卽順禪宗”

 

이와 같은 선교차별의 전통은 이후로 고려시대에는 중국 선종오가를 비롯한 

본격적인 선법의 발전과 더불어 송대에 출현된 새로운 선수행법의 전래 및 

고려에서의 선종세력의 확장으로 인하여 선과 교의 차별을 노골적으로 논하는 

문헌도 등장하였다. 또한 선사들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서 선사로서 국사에 

천거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등장하였으며, 넓은 의미의 선어록 범주에 속하는 

선문헌이 속속 출현됨으로써 한국선법에서는 선과 교의 차별을 주장하는 모습

이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는 선과 교의 차별 내지 선 우위의 선교일치로 나타난 모습과 그 특징

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보려고 한다. 첫째는 선법의 전래시기를 중

심으로 하여 선과 교의 의도적인 차별의 주장을 중심으로 선교차별의 내용과 

그 추이에 대하여 고찰한다. 이 경우 나말·여초에 해당하는 태동시기 및 고려

시대 선법의 발전시기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선법의 전승 및 계승시기에 해

당하는 고려 말기, 그리고 조선시대에 제조사 및 청허휴정이 보여주었던 선과 

교의 관계에서 禪主敎從의 입장으로 변용되어 전개되었던 선교차별에 대하여 

살펴보고, 청허 이후에 드러난 선주교종의 전승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선교차별과 선주교종은 모두 선과 교의 특수적인 관계에서 교학에 대한 

선법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면서 동시에 정법안장을 전승했다는 선법의 정통

의식에서 나오는 우월성의 강조였음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선법의 태동시기에 보이는 선교차별

 

1. 선법의 전래시기 선교차별의 대두

한국선의 역사에서 선법이 전래된 이후 몇 개의 산문이 태동되는 시기는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법랑에 

의하여 중국의 동산법문의 선법이 처음으로 전래된 이래로 소위 남종의 선법을 

전승했던 구산문의 개산조를 비롯한 기타 중국선종의 오가가 전래되는 무렵이

기도 하다. 한국선의 본격적인 전래시기에 해당하는 나말·여초의 시대에는 

중국선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선교차별의 모습이다.3)

3) 이것은 선법의 최초 도입과 전래라는 특수상황이 반영된 것에 크게 말미암은 것이었다.

 

신라불교의 교학은 선법이 초전된 8세기 중반 및 9세기 초반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래된 선법은 아직 선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이 부족했던 당시의 신라사회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하

였다. 그러한 모습은 8세기 중반에 법랑의 선법을 계승했던 신행에게서도 

“법을 아는 자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은밀하게 감추어두었는데 오직 

신행선사만은 더듬어 그것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시절인연이 불리하여 선도

가 크게 홍포되지는 못하였다.”4)는 내용이 보인다.

4) 신행은 신라 제36대 慧恭王代에 지리산에서 교화를 폈다. 그의 전기는 지리산 斷俗寺에 세운 
   金憲貞이 찬한『神行碑』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朝鮮金石總覽』卷上. p.90, “知者不言 
   復藏于密 能撢秘藏 唯行大師 然時不利兮 道未亨也”

 

그러나 신행이 전승한 선법에 대하여 귀족의 계층에서는 어느 정도의 이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행이 전승했던 선법은 아직 깨침의 성품이 덜익은 

자들에게는 看心으로 가르쳐 이끌어주었고 이미 성품이 익은 자들에게는 갖

가지 방편으로 이끌어주어 각각 선법의 비전을 통하게 하였고 삼매의 밝은 

등불을 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佛日을 다시 밝힐 수 있었고 심법을 불러일으

킬 수 있었다.5) 또한 남종계통의 선법을 계승했던 도의선사의 경우도 마찬

가지의 상황이었다.

5) 이지관,『丹城斷俗寺信行禪師碑文』, (『역주역대고승비문』신라편), p.55, “然後還到雞林 
   倡導群蒙爲道根者 誨以看心一言 爲熟器者 示以方便多聞 通一代之秘傳 傳三昧之明燈 寔可謂
   佛日再杲自暘谷 法達更起率扶桑”

 

"처음 도의대사가 심인을 서당지장에게서 받아 귀국하여 선리를 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經敎를 숭상하고 存神의 법을 習觀하고 있었다. 때문에 

도의가 설하는 無爲任運의 종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虛說이라 하여 소중히 숭상

하지 않았다." 6)

6) 金 潁,『長興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朝鮮金石總覽』卷上, 아세아문화사, 1976), p.62, 
   “我道義儀 「義」大師者 受心印於西堂 後歸我國 說其裨「禪」理 時人雅尙經敎 與習觀存神之法 
   未臻其無爲任運之宗 以爲虛誕 不之崇重”

 

이런 상황에서 보조체징은 당시의 교학불교에 대하여 ‘공을 터득한 사람은 곧바

로 저 삿된 산을 넘지만 유위에 얽힌 사람은 영겁토록 흑암지옥의 업에 머물러 

있다. 말법시대에는 像法이 분분하여 眞宗에 부합하지 못하고 서로 편견을 가져 

물속에서 달을 찾으려고 하고 새끼줄로 바람을 묶어두려는 것과 같다.’7)고 평가

를 내리기도 하였다.

7) 金潁,『長興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朝鮮金石總覽』卷上, 아세아문화사, 1976), p.60.

 

이와 같이 선법에 대한 몰이해의 사회에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불법이었던 

선법의 전승을 성취하기 위해 애썼던 몇몇 구법승들은 당시의 교학불교와는 다른 

측면으로 선법을 홍통하고 전승하려는 것에 노력하였다. 그것은 곧 선법이 교학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차별화된 전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력은 당시에 화엄학을 비롯한 교학자들 가운데서 새로운 불교교학과 문물을 접

촉하고 추구하려는 입당구법승들의 열망에 부합되었다.8) 따라서 이들 가운데는 

특히 선과 교학의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불법 곧 선법을 전승한다는 자긍심과 

더불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교의적인 장치의 고안으로 나타났다. 그 일환

으로 등장한 것이 곧 당시 유행하던 화엄교학과 조사선법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우선 도의와 관련된 내용에서 沒蹤跡의 선법의 경우를 찾아볼 수가 있다.9)

8) 때문에 구산문의 형성시기에 입당유학승들의 경우는 국내에서 이미 화엄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다. 김방룡,「신라 諸山門의 선사상」,『한국선학』제2호, pp.118~129.
9) 天頙,『禪門寶藏錄』 卷中, (『韓國佛敎全書』6), pp.478下~479上.

 

"가령 그 종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은 있지만 그 수행은 닦음이 없는 沒修

이다. 깨침은 있지만 그 깨침은 깨침이 없는 沒證이다. 산처럼 고요하고 골짜기가 

울리는 것처럼 움직인다. 無爲의 이익은 다툼이 없이도 빼어났다. 이에 신라인의 

마음을 비워주니 고요한 이익으로 해외까지 이롭게 하고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니 

참으로 위대하도다."10)

10)『朝鮮金石總覽』卷上, (아세아문화사, 1976), p.90 ; 이지관 역주,『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문고, 1994), p.305 참조.

 

이처럼 조사선법의 沒蹤跡한 내용은 간접적으로는 서당과 백장의 영향을 수용한 

것이었지만, 입당유학승들에 의하여 초기선법의 전래부터 신라선의 특징이 되었

다.11) 이에 本有의 覺性과 無念無修의 沒蹤跡한 선법12)이 五敎 이외에 따로 

조사의 심인법을 전하였다13)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경지를 터득하는 데에는 

부득불 방편과 언설을 말미암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연의 석가가 없고 천연

의 문수가 없다고 말한다.

11) 이러한 선사상의 기본 자료는 靜 筠,『祖堂集』卷17, 20. ; 天頙,『禪門寶藏錄』의 道義와 
    智遠僧統과의 문답, 無染의 無舌土論, 梵日의 禪敎敎判 등을 통하여 이와 같은 선교차별의 
    주장에서도 나타나 있다.
12) 無念無修는 분별념이 없고 조작이 없는 妙修로서 이와 같은 本來成佛의 전통은 보리달마의 
    深信咸生同一眞性,『열반경』과『능가경』에 근거한 혜가의 심법의 覺性, 승찬의 信과 心, 
    도신의 守一不移, 홍인의 修心, 혜능의 但用此心, 남악의 但莫染汚, 마조의 道不用修, 백장의 
    體露眞常, 황벽의 大機大用, 임제의 隨處作主 立處皆眞으로 계승되는 조사선의 일반적인 전
    개였다.
13)『楞伽經』卷3, (『大正藏』16), pp.498下~499上, “大慧復白佛言 如世尊所說 … 不說一字 … 
    不說卽佛說” ;『楞伽經』卷4, (『大正藏』16), p.507上, “眞實者 離文字 …” ; p.510下, 
    “如愚見指月 …” ;『楞伽經』卷4, (『大正藏』16), p.513下. ;『首楞嚴經』卷2, (『大正藏』19), 
    p.111上. ;『圓覺經』淸淨慧菩薩章 (『大正藏』17), p.917上. ;『大品般若經』卷7, (『大正藏』8), 
    p.275中. ;『像法決疑經』, (『大正藏』85), p.1338中. ; 智顗,『摩訶止觀』 卷第五下, (『大正藏』
    46), p.61上.

 

2. 선법의 발전시기에 보이는 선교차별

선법의 수입시기에 드러난 이와 같은 선교의 관계에서 9산문을 비롯한 다양한 

산문을 통하여 점차 전법이 뿌리내리면서 선법의 측면에서는 교학과는 우월하

게 차별된다는 관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런 시기의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하여 진정천책은 다양한 문헌을 수집하여『선문보장록』이라는 책을 통하여 

선법의 위상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선교차별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우선 

「진귀조사설」의 경우에는 선교차별이면서, 동시에 선법 가운데서도 조사선법

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으로 대표된다.『선문보장록』에는 범일이 진성왕에게 

답하여 선·교의 뜻을 판별해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명주 굴산사의 범일국사는 진성대왕이 하문하신 선과 교의 뜻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본사이신 석가모니께서는 태어나신 이후에 설법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먼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7보씩 걷고나서 천상천하유아

독존이라 말했습니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성을 벗어나 설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별빛을 보고 깨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깨친 법이 궁극의 경지가 아님

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십 개월 동안 조사이신 진귀대사를 찾아 유행하였

습니다. 이로써 비로소 궁극의 뜻을 전승받았는데 그것이 곧 교외별전의 선입니다."14)

14) 天頙,『禪門寶藏錄』, (『韓國佛敎全書』4), p.474上, “我本師釋迦 出胎說法 各行七步云 
    惟(唯)我獨存 後踰城往雪山中 因星悟道 旣知是法 猶未臻極 遊行數十月 尋訪祖師 眞歸大師 
    始傳得玄極之旨 是乃敎外別傳也 故聖柱和尙(無染) 常扣楞伽經 知非祖宗 捨了却入唐傳心 
    道允和尙 披究華嚴經 乃曰 圓頓之旨 豈如心印之法 亦入唐傳心 此乃非其根未能信之別旨耳” 
    기타『조당집』17 ;『삼국유사』권3 참조.

 

이것은 석가모니 여래가 진귀조사에게 심인을 받았다는 것인데 석가여래와

진귀조사라는 여래와 조사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조사선의 

권위야말로 어떤 선풍보다도 우선이었고 보편적이었으며 부처님을 대신할 

정도였는데 그와 같은 조사의 개념을 진귀조사라는 인물에 투영한 것이다. 

여래의 설법과 조사의 직설적·현실적인 교화수단을 비교한 것으로 여기에서 

비교대상에 해당하는 여래선은 교학을 상징하기도 한다. 때문에 석가라는 

여래와 진귀라는 조사를 등장시켜 그 접화수단의 차이를 비유한 것으로 조

사선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15) 한편『無舌土論』에 의거하자면 무

염은 직접적으로 선교의 차별을 설명하고 있다.

15) 이 점은 선교차별을 넘어서 선법 내에서도 접화방식의 경우에 조사선의 방식이 여래선의 
    방식보다 우월하다는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곧 도의시대 이후에 중국선종의 경우 소위 
    남종의 돈오적인 전통방식을 계승한 임제종의 흥륭으로 인하여 義理禪의 전통보다 格外禪의 
    전통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때문에 중국선의 전통을 강하게 수용했던 한국선의 
    경우에 임제종지만을 정통으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방계로 간주하는 주장은 태고보우 및 나옹
    혜근의 어록을 비롯하여 청허휴정을 거쳐 환성지안과 백파긍선 등의 저술에서도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묻는다 : 유설과 무설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한다 : 앙산혜적은 “有舌은 불토를 말한 

것이므로 應機門이다. 無舌은 선을 말한 것이므로 正傳門이다.”고 말했다. 

묻는다 : 응기문이란 무엇입니까. 답한다 : 선지식이 눈썹을 치켜뜨거나 눈동자를 굴

리는 것으로 법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응기문이다. 때문에 이것을 유설이라 하는데 

하물며 언어이겠는가.(해동무염국사무설토론)"16)

16) 天頙,『禪門寶藏錄』卷上, (『韓國佛敎全書』), pp.473中~474上, “問 有舌無舌 其義云何 
    答 仰山云 有舌土者 卽是佛土 是故應機門 無舌土者 卽是禪 是故正傳門 問 如何是 應機門 
    答 知識楊眉動目而示法 此皆爲應機門 故有舌 況語言也 海東無染國師無舌土論”

 

여기에서 교학은 혀가 있다는 것으로 설법을 의미하는 유설이고, 선법은 침묵을 

의미하는 것으로 혀가 없다는 무설로 대비되어 있다. 따라서 유설은 49년 동안 

설법을 해온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유하고 무설은 상대적으로 말을 아끼는 것으

로 보리달마의 침묵에 비유하였다. 이것을 유설의 경우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을 시설하는 應機門, 언설을 통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言說門, 청정과 더러

움을 분별하는 淨穢門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설의 경우는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충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에서 正傳門, 언설을 초월하여 이심전심하는 無說門, 

청정과 더러움의 분별조차 초월한 不淨不穢門이라 하였다. 또한 무염국사의 질

문에 답변한 법성선사의 설명에도 선과 교의 차별의식은 농후하게 드러나 있다.17) 

여기에서 제시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선과 교의 차이에 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

다. 용상에 앉아 있는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정사에 임한다. 그

러나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모든 관리들은 각자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이에 신하들이 교학에 비유된다면 왕은 선에 비유된 것이

다.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17) 天頙,『禪門寶藏錄』卷上, (『韓國佛敎全書』45), p.474上, “無染國師 問法性禪師 敎禪何別 
    答百僚阿衡 各能其職 帝王拱默廟堂之上 萬姓以安無染國師行狀” 그러나 淸虛休靜,『禪敎釋』, 
    (『韓國佛敎全書』7), p.656上~中.에 의하면 문성대왕의 질문에 무염국사가 답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성주화상께서는 항상 능가경을 공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사의 종지가 

아님을 알고서 능가경을 그만두고 마침내 입당하여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리고 

도윤화상께서는 화엄경을 공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화엄의 원돈의 가르침이 어

찌 심인의 선법과 같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역시 입당하여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능가경과 화엄경의 경우처럼 교학은 근본이 되지도 못하고 믿을 수 있는 교외별지도 

아닙니다.(해동칠대록)18)

18) 天頙,『禪門寶藏錄』, (『韓國佛敎全書』4), p.474上, “我本師釋迦 出胎說法 各行七步云 
    惟(唯)我獨存 後踰城往雪山中 因星悟道 旣知是法 猶未臻極 遊行數十月 尋訪祖師 眞歸大師 
    始傳得玄極之旨 是乃敎外別傳也 故聖柱和尙(無染) 常扣楞伽經 知非祖宗 捨了却入唐傳心 
    道允和尙 披究華嚴經 乃曰 圓頓之旨 豈如心印之法 亦入唐傳心 此乃非其根未能信之別旨耳” 
    기타『조당집』17 및『삼국유사』권3 참조.

 

이들은 모두 교학을 공부하고 난 이후에 비로소 궁극적인 선법을 통하여 깨침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내용들이다. 심지어는 선법의 내부

에서도 다시 자상한 설명을 가하여 드러내는 소위 교학적인 여래선법보다도 단

도직입적인 조사선법의 우위를 강조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12, 13세기 고려 중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선의 입장에

서는 문자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교의 입장에서는 문자에만 집착하여 선의 가르

침을 경시하였다. 이에 지눌은 문자에 집착하여 경전을 열람한다면 대장경을 모

두 읽더라도 헛수고라는 말로써 교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언제나 눕지 않고서 

참선하더라도 마음을 관찰하지 않으면 헛수고라는 말로써 선가의 잘못을 지적

하였다.19) 그리고 지눌은 선과 교를 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한 끝에 이통

현의『신화엄경론』을 통해서 선교불이를 주장하였다.

19) 김방룡,『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보고사, 2006) pp.23~24.

 

"부처[세존]가 입으로 설한 것은 곧 교가 되었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승한 것은 

곧 선이 되었다. 불조의 마음과 입은 결코 어긋나지 않는데 어찌 근원을 궁구하

지 않고서 각각 배운 것을 통하여 함부로 논쟁을 일으켜서 세월을 헛되게 보내

는가."20)

20) 知訥,『華嚴論節要』, (『普照全書』, (보조사상연구원, 1989), p.174, “尊說之於口 卽爲敎 
    祖師傳之於心 卽爲禪 佛祖心口 必不相違 豈可不窮根源 而各安所習 妄興諍論 虛喪天日耶”

 

이처럼 지눌은 당시의 선과 교가 각각의 소견으로만 배척하는 모습에 통탄하고 

그 회통을 위하여 그 이론적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결

국 지눌의 경우도 선과 교의 회통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한편 진각혜심은 한국선에서 본격적인 어록의 시대를 열었던 사람으로서 그 어

록에는 다양한 경전의 인용이 들어있다. 그렇지만 인용된 경론의 내용은 교학을 

근거로만 활용했을 뿐이지 철저하게 간화선의 안목으로 다듬어서 화두로 활용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일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혜심은 귀를 통해서 듣는 

바다와 같이 호한한 경전의 공부와 수미산과 같은 거대한 가르침을 간경할지라

도 직접적으로 깨침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말한다.21) 나아가서 혜심은 

철저하게 간화일문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知解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塗壁化主

의 청으로 상당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21) 慧諶,『眞覺國師語錄』, (『韓國佛敎全書』6), p.13中, “直使耳裏着得香水海 眼裏着得須彌山 
    有甚用處”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빛난다. 이 간화문에 들어와서는 지해를 

남겨두지 말라. 무릇 지와 해는 모두 분별식정에 속한다. 때문에 분별의 입장

에서 思·念하는 것은 깨침「道」에서 어긋나고 만다. 나는 깨침「道」이라는 

한 글자를 듣기 좋아하지 않는다. 문이 이미 활짝 열려있으므로 그대는 곧바

로 들어오라." 22)

22) 慧諶,『眞覺國師語錄』, (『韓國佛敎全書』6), p.11上,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 
    蓋爲知底解底 盡屬於情 思之念之 大乖於道 道之一字 吾不喜聞 門已八開 君須直入”

 

看話頭의 방식에서 이처럼 혜심은 지해를 교학으로 간주하고 나아가서 감정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얽매이면 깨침에 크게 어긋난다고 말한다. 이

로써 혜심은 알려거든 곧 완전히 알고 그 이해에 장애가 생기게 하지 말라고 

한다. 혜심은 특히 이렇게 지해와 관련된 선을 義通禪이라 하여 배격한다. 곧 

문자의 정보를 축적하는 것은 화두를 타파하는 일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3. 선주교종에 근거한 선교융합의 전승

고려 중기에 다져지기 시작한 선법의 발전은 고려 말기에는 더욱더 진척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기존의 임제선법의 전승 뿐만 아니라 새롭게 원나라를 통하여 

수입된 임제선법과 더불어 크게 부각되었다. 나아가서 임제선법에 대한 정통성

의 의식은 석가모니로부터 전승된 정법안장에 대한 정통으로서 달마 선법의 

正傳이라는 우월의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와 같은 바탕에서 이 시기에 크게 

활약하였던 백운 및 태고 등을 통하여 임제선법에 의거한 선주교종의 입장에서 

전개된 선교차별적인 전통은 지속되었다.

 

백운경한(1299~1374)은 간화선을 수행의 정통으로 수입하여 펼치면서도 중국

의 오가의 가풍을 두루 절충하여 임제종풍을 중심으로 하여 제종파의 섭수를 

꿈꾸었는데 그것이 마침내는 조계종풍의 강조로 표명되었다. 이에 부처를 밖의 

대상이 아닌 자심에서 추구해야 한다는 이전의 선사상적인 굴레를 벗어나서 자

심에서 깨침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 마음마저도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 그래서 진정한 설법은 경전에 있는 그대로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

의 내용을 터득하는 것으로부터 경전을 자유로이 활용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례로 불·법·승의 삼보를 있다고 하는 것도 삼보를 비방하는 것이고 없다고 

하는 것도 삼보를 비방하는 것이라 하였다. 삼보가 있다고 보는 경우 執著謗이

고, 없다고 보는 것은 虛妄謗이며, 삼보가 생겼다고 보는 경우 增益謗이고, 사

라졌다고 보는 것은 損減謗이라 하였다.23) 참으로 화두를 참구하듯이 불법에 

대하여 설법하고 드러내는데 있어 離四句絶百非하는 정신으로 분별심을 벗어

난 직관의 방식을 강조하였다.

23) 景閑,『白雲和尙語錄』卷上, (『韓國佛敎全書』6), p.657下, “說衆生有佛性 亦謗佛法僧 
    說衆生無佛性 亦謗佛法僧 若言有佛性 名執着謗 若言無佛性 名虛妄謗 如云說佛性有 則增益謗 
    說佛性無 則損減謗 說佛性亦有亦無 則相違謗 說佛性非有非無 則戱論謗” 참조.

 

"만약 깨침이 언구에 있다면 삼승·십이분교에 어찌 언어가 없었겠는가. 무슨 

까닭에 세존은 갈등의 굴레를 투과하고 다만 꽃을 들어보였고, 또한 달마조

사는 서래하여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교외별전하였는가. 또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지 않은가. 아난이 가섭에게 ‘세존께서 전하신 금란가사 이외

에 별도로 전하신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가섭이 아난을 부르자 아난이 

‘예.’ 하고 답하였다. 이에 가섭은 문 앞에 있는 찰간대를 꺾어버리라고 말했

다. 가섭이 아난을 부른 도리가 분명하고 아난이 답한 도리가 진리였다. 이것

이야말로 교외별전의 소식이었다." 24)

24) 景閑,『白雲和尙語錄』卷上, (『韓國佛敎全書』6), p.650中, “此事若在言句上 三乘十二分敎 
    豈是無言語 何故世尊 葛藤窠透 但拈花 祖師西來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敎外別傳 
    不見阿難問迦葉 世尊傳金襴外 別傳何法 迦葉召阿難 阿難應諾 迦葉云 倒却門前刹竿着 
    喚處分明應處眞 此是敎外別傳底消息”

 

여기에서 백운은 선의 종지를 통하여 교학을 상징하는 삼승·십이분교 및 찰간대 

등을 초월한 의미의 체험에 대하여 설법하고 있다. 백운은 임제정종을 계승하는 

방식은 긍정하면서도 조사선에 대한 새로운 수용방식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간화선의 발전에도 근본적인 조사선의 입장으로 회귀시켰던 것이다.25) 백운은 

바로 이런 점에서 교학을 수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교학은 선법의 기초

적인 토대라는 입장에서 그 통합적인 조계선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25) 근본적인 조사선은 당대에 오가종파가 형성되기 이전의 순수한 선심의 발양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가 그대로 수행이요 깨침이며 진리라는 즉심에 근거한 불심을 말한다. 이것이 때로는 
    平常心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無事禪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公案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기타의 
    機關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태고보우(1301~1382)는 원융부의 수장이 되어 당시까지의 구산선문을 조계

이라는 하나의 종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완의 결과로 끝나 버렸

다. 태고의 가르침은 자성미타의 염불선을 가르치는가 하면, 잡화삼매의 화엄

선과 호법교화와 보은우세를 위한 원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조사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임제선을 수용한 태고보우는 우선 그의 삶

속에서 조사선의 정신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실천하였다. 그의 선관은 

화두를 궁극까지 참구함으로써 깨침을 추구하고 경험하였다. 그는 깨침의 경

험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눈밝은 선사에게 참문하여 구경의 인가를 받지 않으

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경우 인가의 강조는 교학적인 언설을 

초월하여 선법의 방식에 근거한 이심전심의 심법이었다.

 

보우에게 있어서 경전의 이해는 선과의 대립관계이거나 또는 일여라는 입장이 

아니다. 오직 교는 중하근기를 위한 방편이며, 나아가서는 미묘한 심지를 터득

하기 위한 하나의 전단계였다. 교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편

으로 간주하여 捨敎入禪의 입장이었다.26)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화엄을 비롯

한 갖가지 경전에 의거하여 선풍을 진작시켰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곧 화엄

선을 조사선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으로 화엄삼매를 일종의 공안이라는 차원에

서 원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27) 이로써 태고는 교학을 선법의 보조적인 

입장으로 간주하여 충분히 그것을 활용하고 또한 접화의 수단으로 널리 활용

할 수가 있었다.

26)『조계종사 - 고중세편』,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2004) pp.246~247.
27) 普愚,『太古和尙語錄』卷上, (『韓國佛敎全書』6), p.683下, “三昧三昧 明遮那法 體現圓成 
    好也好也 三昧多好 好也三昧 三昧三昧 成頓現華藏世界海 華藏世界重重無盡”

 

한편 양주 회암사에서 공민왕의 명으로 工夫選場이 실시되었을 때 51세 였던 

환암혼수(1320~1392)는 선교양종의 대덕들이 대거 참여했던 공부선에 응시

하였다. 당시에 나옹혜근이 감독관으로 있어 入門三句의 一著語를 던졌다. 이

에 혼수만이 入門句와 當門句와 門內句의 삼구법문에 대하여 명쾌한 답변을 

하여 인정을 받았다. 그 때 나옹이 제시한 입문삼구의 질문에 대하여 입문삼

구에 대한 혼수의 입장은 분명하였다.28) 분별의 삼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삼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방법이다. 삼구를 부정함으로

써 삼구는 이제 나옹이 제시한 질문의 틀로부터 벗어나서 삼구 자체를 대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구가 질문이 아니라 혼수의 견해가 되어버렸을 때 혼

수는 삼구의 문 앞에 도달하고 문으로 들어가며 문 안에 이미 들어가 있다. 

곧 자신이 입문구요 당문구며 문리구가 되어버렸다. 그것이야말로 나옹이 

질문으로 제시한 삼구이고 혼수가 답변으로 제시한 삼구로서 교학의 언설

삼구를 초월하여 혼수 자신의 자성삼구에 계합하는 것이었다.

28) 慧勤,『懶翁和尙語錄』, (『韓國佛敎全書』6), p.722上, “行到說不到 未是能行 說到行不到 
    未是能說 直饒說到行到 摠是門外事 入門一句作麽生 學者皆無語而退 入門三句 入門句分明道 
    當門句作麽生 門裏句作麽生”

 

이러한 무렵에 벽송지엄(1464~1534)은『화엄경』을 통하여 교학을 다졌고,『대혜

어록』을 탐독하여 狗子無佛性話를 통하여 의심을 해결하였고,『고봉원묘선사어록』

을 읽고 “颺在無事甲裏他方”의 대목에 이르러 크게 깨우쳤다. 이후에 다시『선원제

전집도서』와『법집별행록절요』 등을 통해 교학을 다졌으며,『서장』과 『선요』 

등을 통하여 선법을 다져갔다. 이 밖에도 11세기 말엽 송대에 공진이 찬술한『조원

통록』24권을 4권으로 촬요하여 6세 때 백운산 만수사에서『祖源通錄撮要』를 간

행하면서 그 발문을 붙였다.29) 이처럼 교학에 밝았던 지엄은 당시에 초학자들에게 

불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심어주기 위하여 기본적인 개념을 비롯하여 벽송 자신의 

견해를 곁들여 짤막하게『訓蒙要鈔』라는 강요서를 저술하였다. 특히 유식에 관한 

기본 적인 개념을 비롯하여 불교의 우주관 및 십이연기, 나아가서 교상판석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을 가하였다.30) 그러면서도 지엄은 정작 몇 수 되지는 않지만『碧松

堂埜老頌』이라는 시집을 통해서 엿볼 수가 있듯이31) 벽송 자신의 선지를 게송으로 

표현하여 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29) 이『조원통록촬요』는 석가모니로부터 중국과 신라와 고려의 조사들에 대한 기록으로 전등사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특히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나옹혜근에 대해서는 말법시대에 불교의 정법안장을 
    부흥시킬 인물로 석가모니의 후신으로까지 칭송하고, 그 법계를 중요시하여 또 다른 측면에서 
    법계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30) 김호귀,『인물 한국선종사』, (한국학술정보, 2010), pp.210~248.
31) 智嚴,『碧松堂埜老頌』, (『韓國佛敎全書』7), pp.384上~385上.은 도합 18題 20首로 이루어진 
    21수의 짧은 글이다. 여기에서 벽송당은 깨침의 소식과 같은 離言絶慮의 내용을 문자로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언어문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실상이 담긴 경물을 묘사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이것은 ‘문자를 떠난 문자’로서 선시 일반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格外句의 이해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주호찬,「벽송 지엄의 벽송당야로송」,    

    『한국선학』14, (한국선학회, 2006. 8). 

 

Ⅲ. 선법의 전승시기에 보이는 선교차별의 변용

 

1. 청허휴정의 선주교종적 융합

한국의 선종사에서 기존의 선교차별의 전통에 대하여 청허의 경우에는 두 가지 

측면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선교차별을 주장하

지는 않았던 입장인데, 청허의 나이 40대 중반에 저술된 『선가귀감』에는 그와 

같은 청허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청허는 기존의 선교차별에 대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하면서 결국 선과 교에 대하여 선 우위의 입장으로 회통하려는 입장이

었다. 다음은 청허의 이와 같은 선교융합의 태도는 그의 만년에 저술된『선교석』

과『선교결』에서는 사뭇 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禪主敎從의 융합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만년에는 노골적으로 선교차별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청허휴정의 저술에 나타난 선사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모든 불교에 

대하여 교학과 선의 입장을 통합적인 입장으로 제시하려는 태도였는데 그 하

나가 선과 교에 대한 관점으로 나타났다. 선과 교는 우열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당나라 시대 규봉종밀의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

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은 반드시 상호간

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32)는 말에 근거하여 선교일치를 주장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청허휴정도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33)는 입장을 인용하여 그 일치에 동조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선의 중심적인 

입장에서 교학을 평가하였다. 우선『도서』의 말을 인용하여 선과 교의 관계

를 “세존의 삼처전심은 선지가 되었고, 평생의 설법은 교문이 되었다. 때문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 말한다.”34)고 간주한다.

32) 宗密,『禪源諸詮集都序』卷上之一, (『大正藏』48), p.400中, “經是佛語 禪是佛意 諸佛心口必不相違”
33) 淸虛休靜,『禪家龜鑑』, (『韓國佛敎全書』7), p.634中, “禪是佛心 敎是佛語”
34) 淸虛休靜,『禪家龜鑑』, (『韓國佛敎全書』7), p.635中, “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爲敎門 
    故曰禪是佛心 敎是佛語”

 

이처럼 선교가 모두 부처님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전제하면서도 사실은 사람

에 따라서 선과 교가 나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이런 까닭에 어떤 사람이 언설에 집착하면 염화미소도 모두 교의 자취가 되고, 

마음을 깨치면 세간에서 미주알고주알 지껄이는 말이 모두 교외별전의 선지가 

된다.”35)고 말한다.

35) 淸虛休靜, 『禪家龜鑑』, (『韓國佛敎全書』7), p.635中~下, “是故若人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곧 선과 교의 깊고 옅음을 피력하여 교문에서는 오직 一心法을 전하고 선문에

서는 오직 見性法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불의 설법인 경전의 경우는 

먼저 제법을 분별하고 나중에 필경공을 설하였지만, 조사가 내보인 삼구의 경

우는 의지에서 자취를 제거하고 심원에서 도리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 자취

는 조사가 내보인 언설의 가르침이고, 의지는 선수행자가 지니고 있는 깨치려

는 마음이다. 이것을 비유하여 “제불은 활처럼 설하고 조사는 활줄처럼 설한다. 

부처가 설한 무애법은 바야흐로 일미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일미의 흔적마저 

초월해야 비로소 조사가 내보인 일심이 드러난다.”36)고 말한다.

36) 淸虛休靜,『禪家龜鑑』, (『韓國佛敎全書』7), p.636上,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청허휴정은 상근기를 지닌 지혜로운 자는 이 말에 한정되지 않지만 중하근기를 

지닌 자는 꼭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교리의 경우는 불변과 

수연과 돈오와 점수로서 선·후가 있다. 그러나 선법의 경우는 찰나에 불변과 

수연과 성·상과 체·용이 들어 있어서 원래 동시다. 때문에 명안종사는 법에 의

거하고 언설을 초월하여 직지일념으로 견성성불할 뿐이다. 교의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청허휴정은 선과 교는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점에서는 동일할지라도 선문과 교문을 통해 공부하는 사람의 수준과 

그 행위 및 자취에는 분명히 차별을 인정하고 있었다.

 

2. 청허휴정의 선교차별의 전개

이처럼 청허휴정은 선 우위의 선교차별의 입장이면서도 선교일치라는 테마를 

바탕으로 하여 교학과 선법의 상호간에 융통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것마저

도 궁극적으로는 선교차별을 위한 제스처였을 뿐으로 선주교종의 또 다른 포

석이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해동에 선법이 전래된 이후로 선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입장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선문보장록』에서도 그랬듯

이 청허의 경우도 선과 교학의 차이점 내지 선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곧 선문에서 내세우는 심인의 입장은 수행을 시작한다는 것과 깨침을 터득한

다는 것조차도 초월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당대의 선종

에서 소위 남종과 북종의 정통논쟁에서 의도적인 돈·점의 차별화를 강조했던 

하택신회의 주장을 보는 듯하다. 비교적 교학의 입장에 충실했던 북종에서의 

수행과 깨침에 대한 입장은 곧『화엄경』과『법화경』과『사익경』과『유마

경』과『기신론』을 바탕으로 한『대승무생방편문』의 오방편에 제시되어 

있었다.37)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지 그와 같은 입장을 일괄적으로 교학으로 

대치시켜 놓았을 뿐이다.

37)『大乘無生方便門』, (『大正藏』85), pp.1273中~1277下 참조.

 

『선교석』에서는 선과 교의 차별에 대하여 대조시키면서 분별하여 설명한 

것이다. 청허는 옛적의 글에서 인용하여 선과 교의 차별을 17가지 주제에 

의거하여 선교차별을 설명하면서 간혹 주제에 대한 문답형식을 취하여 구체

적인 해설을 가하여38) 선교차별의 전승을 수용하고 있다. 가령 위에서 언급

한 것에 대해서만 보더라도「진귀조사설」의 경우,39) 성주화상이『능가경』

을 읽다가 유학하고, 도윤화상이 『화엄경』을 읽다가 유학했다는 경우,40) 

무염국사와 문성대왕의 문답41) 등이 그대로 수용되어 있다.

38) 淸虛休靜,『禪敎釋』, (『韓國佛敎全書』7), pp.654中~656中.
39) 淸虛休靜,『禪敎釋』, (『韓國佛敎全書』7), p.654下.
40) 淸虛休靜,『禪敎釋』, (『韓國佛敎全書』7), p.656上.
41) 淸虛休靜,『禪敎釋』, (『韓國佛敎全書』7), p.656上.『선문보장록』의 무염과 법성의 대화가 
   『선교석』에서는 무염과 문성대왕의 문답으로 바뀌어 있다.

 

한편『선교결』의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청허의 나이 70대 후반에 저술된 것

으로서 선과 교의 차별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점에서는『선교석』의 경우와 

같은 입장이지만 선과 교의 각각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禪旨를 잘못 이해하여 돈점문을 正脈이라 간주하고 

원돈문을 宗乘으로 간주하는 자세를 질책하면서 교외별전의 바른 도리를 터

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선과 교의 각각의 특징에 대하여 선은 부처님

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말 없음으로부터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 있음으로부터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은 교라는 말로 대변하고 

있다.42)

42) 淸虛休靜,『禪敎訣』, (『韓國佛敎全書』7), pp.657中~658上.

 

상당 부분이 기존의 『선문보장록』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서 선문의 

특징으로서 교외별전의 도리를 언급하고 그 증거로 三處傳心을 비롯하여 달마의 

廓然無聖, 그리고 중국선종에서 전승되어 온 다양한 공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

가서 교학의 圓頓門의 경우는 理路, 意路, 心路, 語路를 통하여 見·聞·信·解하는 

것을 귀중하게 간주하지만, 선의 徑截門의 경우는 沒理路, 沒意路, 沒心路, 沒語

路의 경지에서 번뇌의 칠통을 타파하는 것마저도 귀중하게 간주하지 않는 다는 

점을 들어 그 차별을 설명한다.

 

결국 선문에서 귀중하게 간주하는 것은 경절문의 활구를 통하여 남을 가르쳐서

깨우치고 자신도 스스로 깨우쳐서 本分宗師의 안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은 이전에 청허휴정이 『선가귀감』을 통해서 주장했던 선교일치의 

주장도 결국은 명목상으로는 선주교종의 융합을 주장한 것이었지만 실지로는 

선교차별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조선후기 선주교종의 계승

浮休善修(1543~1615)는 무자화두를 통한 선지를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부휴의 

수행과 사상의 이면에는 늘상 교학을 바탕으로 한 좌선의 수행으로 일관하였다. 곧 

그의 일생에서 불 수 있듯이 교학적인 바탕에 근거한 선사상의 추구였다. 이것은 

부휴가 곧 널리 대장경을 열람하고 난 이후에 선법에 매진한 보편적인 수행자의 

공부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교학의 바탕에 근거한 선법의 수행이었다.43)

43) 김호귀, 『인물 한국선종사』, (한국학술정보, 2010), p.316.

 

부휴는 스승이었던 영관의 학문방법에 대하여 선지를 깊이 이해하고 선지식을 가

르침을 높이 받들어 선법의 가풍을 높이 드날리는 것으로 흠모하였다. 이것은 먼

저 바른 안목을 터득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결과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자세를 나

타낸 것으로 격외선의 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법에 대한 이해가 필수

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와 선에 대한 구분은 무엇이 우위라는 것을 강조하는 차별을 위한 구분

이 아니라 명확한 안목을 구비하는 입장을 각각 교와 선의 측면으로 분류한 것이

었다. 그것은 불법수행의 길잡이인 교학을 통하지 않고서 선법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눈이 없이 길을 가는 것처럼 헛수고만 할 뿐이고 더욱이 위험천만한 것으로 

잘못 사교에 치우칠 염려가 있고, 또한 見性成佛하는 선법을 체험하지 않고 교학

에만 머물러 있으면 불법의 진수를 터득하지 못하여 끝내 열반의 길에 나아가지 

못한다고 경계하였다. 이것은 선법과 교학에 대한 부휴의 정통적인 입장을 드러내 

준 것이기도 하다.

 

한편 喚醒志安(1644~1729)은 선종오가에 대한 일종의 강요서로서『禪門五宗綱要』
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일찍이 송대에 회암지소의 『인천안목』을 바탕으로 하고, 
나아가서 진정천책의『禪門綱要集』의 내용을 보충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환
성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북해함월이 쓴 “나 함월이 환성
스승의 지위에 기대어 拂柄을 잡은 것은 밖으로 드러낼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단지 종풍을 辨驗하려는 것뿐이다. 만약 本源에 투철한 자가 있다면 이와 같은 갈등
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44)”는「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44) 喚醒志安,『禪門五宗綱要』, (『韓國佛敎全書』9), p.459中, “踞師位執拂柄者 外是則無以辨驗宗風矣 
    若有箇漢 透徹本源 則伊麽葛藤也無着處”

 

한편 無竟子秀(1664~1737)는 『禪敎代辨』에서 기존의 『禪家金屑錄』을 근거로 

하여 선과 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교의 언구는 비록 비슷할지라도 그 자취는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차이가 있다. 

선록을 살펴보면 원돈의 해인과 선의 심인은 비록 비슷할지라도 비슷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원돈의 입장인 해인의 경우에 처음에는 인과의 도리가 있다고 설하지만 

나중에는 인과가 없다는 경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의 입장인 심인의 

경우에 그와는 달리 인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과가 없다는 흔적마저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45)

45) 無竟子秀,『禪敎代辨』, (『韓國佛敎全書』9), p.441上, “禪敎言句所說 雖相似 其旨趣 則大地逈隔 
    又按竪 禪錄 圓頓海印 與禪心印 相似而不相似也 何也 海印者 始說有因果之處 終歸忘因果之地 
    心印則不 然 非但無因無果 亦無無因果之痕點”

 

또『진각대사망정록』을 근거로 하여 ‘대승원교·대승돈교·대승시교의 삼교

에서 말한 바도 역시 선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말한다.46) 

기타『불조진심선격초』와 『순정록』의 말을 통하여 교가의 걸림없는 법은 

바야흐로 일미로 돌아가지만 그 일미의 흔적마저 불식시켜주는 것이 곧 선가

에서 일심을 관찰토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7)

46) 無竟子秀,『禪敎代辨』, (『韓國佛敎全書』9), p.441中 참조.
47) 無竟子秀,『禪敎代辨』, (『韓國佛敎全書』9), p.441中~下 참조.

 

이후에 白坡亘璇(1767~1852)은 환성의 임제종지의 선리를 자유롭게 활용하

여 간화선법의 주창을 강조했던 언변의 마술사였다. 곧 제일구에서 그 도리를 

깨치고 수용한다면 삼세제불과 일대조사의 스승이 될만한 대장부가 된다고 

하였다. 제이구는 제일구를 드러내고 파악케 하며 실천케 하는 방편과 본분의 

기능을 함께 활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백파에게서는 방편과 진실이 두루 드러

나고 실행되어 여러 가지 교의가 등장한다.48)

48) 그것은 “교종의 판석에 화엄종의 교판도 있고 천태종의 교판도 있듯이 선종의 판석에는 임제종을 
    비롯한 5종의 판석이 있다. 백파의 집안은 이미 교학으로서 화엄의 종가로 이름을 날렸고 이제 
    임제종의 선판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신규탁 옮김,『선문수경』동국대출판부, 2012. p.17)는 
    말처럼 비록 교학의 판석을 흉내냈지만 그 궁극은 선종의 불립문자를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임제삼구를 활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임제의 삼구에 대하여 백파긍선은 제일구의 성격을 祖師禪에 비유하고, 제이구

는 如來禪에 비유하며, 제삼구는 義理禪에 비유하였다. 백파는 본분과 신훈을 

두루 보편적으로 제시하여 신훈만 있고 본분이 없는 경우를 의리선으로 보았고, 

본분만을 여실하게 드러내면 조사선이라 보았으며, 본분에 신훈을 아울러 제시

하는 것을 여래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본분진여를 개시하고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서 갖가지 방편을 세웠다는 것이다.49)

49) 이에 백파는 환성지안의 선종오가에 대하여 주석하면서 각각을 삼종선으로 나누어 조사선에는 
    임제선과 운문선을 배대하고, 여래선에는 조동선·위앙선·법안선을 배대했으며, 의리선에는 
    선종오가에서 해당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에 곧 백파의 교학적인 의리선의 위상에 대한 
    입장이 드러나 있다. 白坡亘璇,『禪門五宗綱要私記』, (日本 駒澤大學圖書館所藏本 筆寫本), p.11, 
    “然卽五宗中 臨濟雲門二宗爲第一句祖師禪 曹洞潙仰法眼三宗爲第二句如來禪 第三句義理禪 不得 
    入於五宗中也”

 

이와 같은 백파의 삼구법문의 해석에 대하여 草衣意恂(1786~1866)은『禪門四辨

漫語』라는 책을 통하여 비판의 입장을 드러냈다. 초의는 백파처럼 선법 자체에 

교의를 내세워 선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곧 선은 부처의 마

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처럼 그 도리를 깨치면 삼장과 십이분교의 일체가 마음에 

녹아있는데 어찌 분별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機와 用, 體와 用, 殺과 

活 등의 관계는 불가불리한 것인데 억지로 분별한 것이므로 본래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의는 임제의 방편설을 넘어서 애초부터 임제의 본래적인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

는 점에 중점을 두고 직접적으로 선법의 본래성을 추구한 것이다. 따라서 임제의 

삼구법문에 대하여 각각 백파의 현실성을 감안한 해석과 초의의 본래성에 근거한 

해석은 선법에 대한 양면적인 주장을 드러낸 것으로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진정한 의도를 간과하고 단지 언설을 통해서 드러난 백파의『선문수경』과 

초의의『선문사변만어』에 대해서만 논하려 한다면 후대에 드러났듯이 평행선적

인 선의 논쟁은 지속될 수 밖에 없었다.50)

50)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하여 “임제삼구에 대한 백파와 초의의 사상적인 차이는 두 사람이 어떤 
    위치에서 전개하는가에 있다. 즉, 선지식으로서 접근한 것인지, 수행자로서 전개한 것인지, 그 관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백파는 수행자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을 열고자 하는 차제적인 계위를 설정하여 
    깨달음을 향하는 상입에 초점을 맞추었고, 초의는 깨달음에 상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라는 
    견해에 동조한다. 희철,『조선후기 선리논쟁 연구』, (해조음, 2012), p.197.

 

이런 점에서 초의가 제시한 선법에 대한 본래적인 입장은 언제든지 잊어서는 

안되는 本分眞如이고, 백파가 제시한 근기와 현실과 언설에 근거한 분류방식

은 늘상 提高해볼 필요가 있는 新熏悟修이다. 초의는 일체를 자연의 본래입장

에서 그대로 긍정한 선객이었다.

 

Ⅳ. 결어

 

선과 교학은 분리되어 전승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교학은 각자 

자파의 입장에서 그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하고 발전시키려는 입장에서 보자

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선과 교학에 대한 관

계에서 선교의 차별이 강조되고 변용된 모습을 고찰하는 것은 이와 같은 모습

이 크게 강조되었던 한국선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기도 하다.

 

한국선법의 태동시기에 해당하는 나말 여초의 시기에는 구산문의 개창자들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선교차별이 등장하였다. 범일의「진귀조사설」, 무염의

「무설토론」 및 범일과 진성왕의 선과 교에 대한 문답, 도의선사와 지원승통

의 문답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선법의 수입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수입된 선법이 뿌리내리기 위한 부득이한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선교

차별의 전통은 이후로 선법의 발전시기에 이르러서도 지속되어 선과 교에 대

한 하나의 입장으로 굳어져버렸다. 이후에 지눌은 선과 교의 회통을 시도하

였지만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으며, 혜심은 교학의 측면을 知解로 간주하고 

義通禪의 입장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선법의 전승시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에는 선교차별의 주장이 선주

교종의 융합이라는 모습으로 변용되었다. 그 까닭은 선법이 토착화되고 발전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교학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학과 대

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51) 때문에 선주교종의 입장은 선교차별이면

서도 선교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교학에 근거한 선법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전개되었다. 고려 말기의 백운은 離四句絶百非하는 정신

으로 분별심을 떠나 직관의 방식을 강조함으로써 선의 종지를 통하여 삼승·

십이분교 및 찰간대와 같은 교학의 입장을 초월한 의미의 체험에 대하여 설

법하고 있다. 태고보우는 경전에 대하여 선과의 대립관계이거나 또는 일여

라는 입장이 아니라 오직 교는 중하근기를 위한 방편이며, 나아가서는 미묘

한 심지를 터득하기 위한 하나의 전단계로 간주하는 捨敎入禪의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화엄을 비롯한 갖가지 경전에 의거하여 선풍을 진작

시켰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51) 이것은 마치 중국선종의 경우 남종과 북종의 정통논쟁의 과정에서 볼 수가 있다. 남종이 정통성을 
    확립한 이후에는 북종세력의 쇠퇴로 말미암아 북종과 대결이 불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남종이라는 
    용어의 사용조차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이후부터는 전등사서의 출현에 있어서도 
    더 이상 북종을 의식할 명분 및 가치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모습은 환암혼수가 보여준 나옹의 삼구법문 이해는 교학이야말로 선법을 

깨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되고 있는 일례를 보여준 것이었고, 나아가서 갖가지 

교학을 바탕으로 선법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던 벽송지엄의 전등계보의 의식의 팽

배 등이 나타나고, 조선 중기의 청허휴정의 『선가귀감』에 이르러서는 선주교

종의 견해가 농후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청허의 만년에 출현한『선교석』및『선

교결』에서는 다시 이전의 철저한 捨敎入禪의 선교차별 전통이 엿보인다. 그렇

지만 늘상 교학을 바탕으로 한 좌선의 수행으로 일관했던 부휴선수의 선교겸수

를 비롯하여, 선종오가의 교의를 집대성하여 선종의 종지를 내세웠던 환성지안

과 임제종지의 정통의식으로 무장한 백파긍선의 선과 교학의 차별의식은 어디

까지나 선주교종에 입각한 주장으로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선과 교학에 대한 의도적인 차별성, 그리고 교학에 대한 선법의 우월

의식으로 점철된 선주교종의 모습은 선법의 수입 및 정착시기를 비롯하여 선법

이 주류를 형성하여 전승되었던 한국선의 역사가 보여준 지속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불법의 正法眼藏에 대한 무한한 신뢰성을 바탕으로 하여 해동에 선법의 

정착과 전개 및 전승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보여준 선자들의 노력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