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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시대 재가자 신행은 어떠했나/조준호

실론섬 2018. 2. 28. 14:34

초기불교시대 재가자 신행은 어떠했나

불교평론 [70호] 2017년 06월 01일 (목)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 이 글은 반야불교문화원 주최 ‘불교 신행의 전통과 현대적 과제(2017년 5월 14일 통도사 반야암)’ 학술대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인도불교의 신행과 현대적 시사점〉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 시작하는 말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그러한 믿음과 실천수행의 대상과 목표는 또한 무엇인가?


부처님 당시 재가자들의 신행생활은 주로 초기불교(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존하는 초기경전은 주로 빠알리(Pāli)의 경장(Sutta Piṭaka)과 율장(Vinaya Piṭaka), 그리고 한역 4아함(四阿含)과 초기불교 여러 부파 소속의 율장(律藏)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은 초기경전을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재가자의 실천수행 사상을 체계적으로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재가자의 기본적인 신행은 불법승 삼보를 염법(念法)의 차원으로 확립하는 사불괴정(四不壞淨)이다. 나아가 8재계와 같은 특별 정진으로 단계적으로 수행의 수준을 향상하게 한다. 이러한 재가자의 실천수행은 부처님이 얼마만큼 재가자의 실천수행을 세심하게 배려했는지를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재가자는 차제적(次第的)인 방편으로 삼론(三論)이 제시되어 재가자의 수행 단계를 향상시킨다.


부처님이 재가자에게 권하는 일차적인 수행의 목표는 작복(作福)을 통한 복락(福樂)의 성취이다. 즉 재가자의 실천수행 사상은 세속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베풂의 보시와 오계, 그리고 10선계와 8재계 등과 같은 윤리도덕을 확립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실천의 성격인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을 재가자에게도 설한다. 재가자의 신행은 기본적으로 베풂과 윤리도덕적 생활에 이어 각지(覺支)라는 ‘깨달음의 요소’로 나아갈 수 있는 고차원의 수행을 제시한다. 나아가 경전의 많은 곳에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의 가르침은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재가자에게도 바로 설해진다.


부처님은 궁극적 경지에서 100세 법랍의 출가 스님이나 재가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있을 수 없다고 설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자들도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연기법과 사성제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재가자가 출가자와 같은 길에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출가는 가정적 세속적인 집착과 속박을 여의고 바로 열반 해탈을 목표로 빠르게 갈 수 있는 반면에, 재가는 가정적 세속적인 속박 때문에 장애가 많아 더디고 힘들다고 한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 전통에 속한다.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사상으로 그러한 경지가 강조될 때 출 · 재가 경계가 구분되기보다는 경계가 애매하여 쉽게 넘나들기까지 한다. 신행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재가자 신분을 잊고서 세속의 삶에 출가자의 행을 바로 구현하려 하기도 한다. 이에 부조화와 괴리감에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초기불교 시대부터 출 · 재가의 신행은 어느 정도 구분되어 수행되어 왔다. 이 때문에 초기불교 전통의 동남아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출가 비구는 대체로 열반을 목표하는 데 반해, 재가자는 선업을 쌓아 복락을 목표하는 것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 글은 이러한 점에서 초기경전에 나타난 재가자의 실천수행 사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재가자의 신앙과 실천 수행 


1) 재가자의 의미와 조건 

초기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의 제자는 기본적으로 출가중(出家衆)과 우바새중(優婆塞衆)으로 나뉜다. 여기서 우바새중은 재가중(在家衆)을 의미한다. 출가하지 않고 가정에 있으면서 불교를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가정의 뜻이 담긴 gihī 또는 gahapati라는 말로도 재가자(在家者)는 표현된다. 출가중은 비구(bhikkhu)와 비구니(bhikkhuni)를 말하고, 재가중은 우바새(upāsaka)와 우바이(upāsika)를 말한다. 이들을 합하여 흔히 사부대중(四部大衆, cattāri parisā)이라 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바새(優婆塞)는 재가중의 남성으로 Upāsaka의 음역이고 근사남(近事男)이나 청신사(淸信士) 등으로 의역되었다. 여성인 우바이(優婆夷)는 Upāsikā의 음역으로 근사녀(近事女), 청신녀(淸信女) 등으로 의역되었다. 어원에 가장 가까운 직역은 근사남(近事男)과 근사녀(近事女)라 할 수 있다. 

불교도가 된다는 것은 출가든 재가든 기본적으로 모두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法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오계(五戒)를 수지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특히 재가의 경우 최소한 삼보에 귀의가 먼저 요구되고, 오계의 수지까지를 그 범위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삼보에 대한 맹세는 교단이 정비되어 가면서 좀 더 의례적으로 발전하여 간다. 예를 들면, 증일아함의 한 경전이나 빠알리 경전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의 《쿳다까빠타경(Khuddakapātha)》 그리고 율장을 보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지금부터는 우바새들에게 오계(五戒 : pañca sila)와 삼귀의(三歸依)를 줄 것을 비구들에게 허락한다. 만일 비구로서 청신사 · 청신녀에게 계율을 주려고 할 때는 팔을 드러내어 합장시키고 자기 성명을 일컫게 한 뒤에 ‘불 · 법 · 승에 귀의하나이다’라고 두 번 세 번 부르게 한다. 


여기서 불교도가 되려는 기본 의식이 부처님 또는 그 제자들 앞에서 ‘팔을 드러내어 합장하고 자기 이름을 소리 내어 밝히는 것’이 요구되는 것은 일종의 증명과 맹세의 자세로서 다시 더욱 확고하게 하는 것으로, 스스로 세 번 반복하여 복창시켜 다짐하게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오계를 받고자 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맹세하는 의식으로 전개된다. 즉 오계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이를 증명하는 계사(戒師)인 부처님이나 그 제자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여야 한다. 


저 ○○○는 이미 삼보에 귀의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우바새 · 우바이로 살겠습니다. 


이처럼 우바새 즉 재가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가 요구되고 다음으로 오계(pañca sila) 수지가 필수적인 절차이다. 오계를 동시에 모두 지킬 것인가 아니면 ‘오계의 분수(分受)’가 허용되었는가도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삼귀의와 함께 오계를 동시에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반하는 것인데, 초기경전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다. 즉 증일아함에 오계를 전부 받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받는 분수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의 율장 가운데 하나인 《마하승기율》에서도 ‘일분행(一分行) · 소분행(小分行) · 다분행(多分行) · 만분행(滿分行) 그리고 수순행(隨順行)의 우바새가 그리고 이후 대승의 《대지도론》에서도 이를 이어받아 ‘오계의 분수’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우바새의 조건을 좀 더 탄력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전거가 될 수 있다.


재가불자가 실천해야 할 또 다른 계로서 십선계(十善戒) 또는 십선업도(十善業道)가 업(業)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경전의 많은 곳에서 재가자에게 시설된다. 이는 선악의 업에 따라 선악의 과보를 초래하는 원인을 3가지 신체적 행위[身業], 4가지 언어적 행위[口業], 3가지 마음의 활동[意業]으로 다시 분류한 다음의 10가지를 말한다. 


신행: ① 불살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邪淫) 

구행: ④ 불망어(不妄語) ⑤ 불기어(不綺語) ⑥ 불악구(不惡口) ⑦ 불양설(不兩舌) 

의행: ⑧ 불탐욕(不貪欲) ⑨ 부진에(不瞋恚) ⑩ 불사견(不邪見) 


이 십선계의 신행과 구행을 이루는 7가지는 오계 가운데 불음주계를 제외한 네 가지 계율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업보설과 관련하여 음주(飮酒) 자체는 다른 살생이나 투도, 사음과 망어와 같이 나쁜 업으로 나쁜 과보를 초래하는 것으로 바로 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술이나 음주 행위 자체가 선악(善惡)으로 규정될 수 없기에 그에 따른 일방적인 과보의 규정도 할 수 없다는 대단히 합리적인 초기불교의 업보설 때문이다. 이는 음주 자체가 윤리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과다한 음주로 인하여 다른 계를 파하는 비윤리적인 행위로 발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도시 생활에서 재가자의 음주 문제와 관련하여 오계 제정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주변에서 절에도 나오고 상당한 불교적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지만 수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를 ‘불음주계’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양심적인 고백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불교도라는 ‘종파적인 결집’이 요청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계율 해석과 적용에 탄력성을 보임으로써 수용의 폭을 한층 넓히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2) 재가자의 신행생활의 기본자세


부처님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종교적 철학적 혼란을 겪고 있는 케사푸타 재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진리탐구의 기본자세를 제시한다. 


칼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대하면 그대들의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칼라마인들이여 조심하라. 계시(啓示)된 가르침(anusasava)이나 (계시 성전에 따른) 성자들의 가르침(paramparā)에 의지해서도 안 되고, 옛날부터 전승되는 말이나 경전에 담긴 가르침이라고 해서도 안 되며, 일반 논리의 사유나 특수 논리의 사유라 할지라도 의지해서는 안 되며, 또한 나타난 대상에 대한 세밀한 분별이라고 해서도 안 되며, 나아가 사변적인 견해의 환희심이나, 또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전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종교가(수행자나 성직자)이니까 또는 우리의 스승이니까’ 하는 생각 때문에 무조건 따르지도 말라. 


이와 같이 부처님이 비판적으로 검토한 당시의 진리 인식의 방법은 10가지이다. 이 경전은 출가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독단적인 종교 가르침이 아닌 매우 개방적인 진리추구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계시(啓示)된 가르침이나 (계시 성전에 따른) 성자들의 가르침”의 원어는 ‘anusasava’와 ‘paramparā’이다.


anusasava는 어원적으로 《베다》 또는 바라문 종교의 《쉬루띠(śruti, 天啓聖典)》와 관련 있어 《상가라와 숫따(Saṅgārava Sutta)》 등에서는 바라문의 세 가지 베다[三明]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paramparā는 어원적으로 ‘after the other’로 베다를 전승하며 시설되는 신학적 또는 성자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짱끼 숫따(Caṅki Sutta)》 등에서 범천을 추종하는 바라문들을 마치 맹인들이 줄 서는 것에 비유하는 데에 paramparā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불교학계는 이 점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또 다른 단독 논문으로 연구가 필요한 논의점에 해당된다.


이처럼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 바라문은 계시(啓示)된 《베다》의 도그마[anusasava]를 강요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일반 사문들은 자신들이 심사숙고한 사유체계[takkahetu /nayahetu]를 사람들에게 강변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은 앞의 인용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러한 양 진영의 입장 모두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다시 초기경전의 곳곳에서 믿음(saddhā), 취향(ruci), 계시(anussava), 나타난 대상에 대한 세밀한 분별(ākāraparivitakka), 어떤 사변적 견해에 따른 환희심(diṭṭhinijjhānakkhanti)도 또한 참된 진리 인식의 길이 아니라고 정리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진리탐구 자세는 현재의 재가 불교인에게도 기본자세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재가자의 10가지 진리탐구의 자세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종교가(수행자나 성직자)이니까 또는 우리의 스승이니까 하는 생각 때문에 무조건 따르지도 말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정한 수행자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경전의 여러 곳에서 깨닫지 못한 재가자가 진정한 수행자와 성인을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언급할 흥미로운 방법은, 보이는 형상만으로 판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방법은 함께 지내보는 방법이라고 한다. 잠깐이 아닌 일정 기간 함께하면서 행을 보고 참된 수행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믿음(saddhā)은 오근(五根)과 오력(五力)에서 알 수 있듯이 5분의 1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불교라는 종교의 뿌리와 힘을 유지시키는 다섯 요소 중 하나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불교 또한 깊은 뿌리의 믿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유신종교에서 믿음이 시작이고 끝인 경우와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조차도 끝까지 증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해를 통한 확신을 의미한다. 때문에 외국의 종교학자들 중에는 불교의 이러한 믿음을 faith나 belief가 아닌 confidence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아래 설명될 사증상심(四增上心)과 사불괴정(四不壞淨)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이와 함께 부처님은 《과환경(過患經)》에서 재가자에게 법을 믿지 않고 출가 스님을 믿게 되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길 수 있다고 주의를 당부한다. 


첫째, 자신이 믿었던 출가 스님이 계(戒)를 범하고 율(律)을 어겨 중들에게 버림을 받을 경우 ‘이 스님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대중 스님들은 그를 버리고 천대한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절[塔寺]에 가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둘째, 자신이 믿었던 출가 스님이 계를 범하거나 율을 어겨서 대중 스님들이 그를 칭찬하지 않을 경우 ‘이 스님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지금 대중 스님들은 칭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절에 가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셋째, 자신이 믿었던 출가 스님이 다른 지방으로 떠나버린 경우 ‘내가 공경하는 스님이 없으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절에 갈 일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넷째, 자신이 믿었던 출가 스님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간 경우 ‘내가 공경하는 스님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절에 갈 일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다섯째, 자신이 믿는 출가 스님이 일생을 마칠 경우 ‘내가 공경하는 스님이 일생을 마쳤으니,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절에 가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경우를 허물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유로 “절에 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는 까닭에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출가 스님을 믿어 생길 수 있는 다섯 가지 허물이라 한다. 이 같은 가르침은 믿음과 귀의의 대상으로 승보와 그러한 공동체의 구성원인 출가 스님과의 개념적인 구분을 또한 보여준다. 삼보 가운데 승보[saṁgha]는 어원에서 나타나듯이 개개의 스님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4인 이상의 공동체 개념으로서 승가이다. 열반이라는 고귀한 이상을 공동목표로 함께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공동체는 그 자체로서 고귀하고 성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가치가 있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귀의의 대상으로는 사향사과(四向四果)에 있는 수행자 공동체를 한정한 범위이다. 이는 이후에 설명되는 사증상심의 승보를 설명하는 내용에서도 증명된다. 


3) 재가자의 일반적인 신행생활


(1) 사증상심(四增上心)의 염법(念法) 수행


중아함의 《우바새경(優婆塞經》은 그 경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가불자를 위한 기본 가르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경은 많은 경전에 산재해 있는 재가자에 대한 기본적인 교설의 요점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경전인데, 재가자는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제자’로 언급되면서 오법(五法)과 사증상심(四增上心)을 실천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오법은 오계를 지켜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사증상심이란 ‘네 가지 뛰어난 마음’을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서 삼보의 염(念, anussati)에 계(戒)의 염을 더한 것이다. 여기서 삼보의 염이란 다름 아닌 불 · 법 · 승의 성질과 가치 그리고 덕성 등을 ‘깊이 되새겨 내면화하는 행법’을 말한다. 이는 신 중심의 종교가 입으로 신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며 기도하고 숭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신앙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증상심(增上心)이란 초기불교 경전에서 삼학 가운데 정학(定學)의 다른 말인 증상심학(增上心學, adhicittasampadā)의 동의어이다. adhicitta 즉 증상심이란 ‘진리 통찰을 위한 탁월하고 뛰어난 마음’이라는 의미로 붓다[佛陀]의 본질과 가치 그리고 덕성 등을 ‘깊이 되새겨 내면화하는 선정 수행법’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본질과 가치 그리고 덕성을 깊이 되새겨 내면화하는 선정 수행이 바로 삼보의 염(念, anussati) 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기불교 이후 아비달마 불교나 인도 대승불교는 부파나 종파를 떠나 기본적으로, 염불(念佛) 등은 당연히 선정 수행의 범위에서 논의된다. 이는 동아시아 정토종에서 말하는 신앙의례나 구칭(口稱)과 송불(誦佛) 수준이 아니고 일본의 타력적인 기도법이나 통속불교의 기복의례도 아니었다. 


그러한 점에서 사증상심에서 불보(佛寶)의 염이란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중심으로 부처님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특징을 되새겨보는 것인데 다음과 같다. 


“여래는 세존(世尊)이시며, 아라한(阿羅漢)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시며[正遍知], 지혜와 덕행을 잘 갖추신 분이시며[明行足], 잘 가신 분이시며[善逝],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시며[世間解], 위없는 분이시며[無上士], 인간을 잘 이끄시는 분이시며[調御丈夫], 신들과 인간들의 스승이시며[天人師], 깨달으신 분[佛世尊]입니다.” 


둘째, 법보의 염이란 마찬가지로 불법의 특징과 가치 그리고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 잘 설하신 가르침이며, 현생(現生)에서 바로 (결과를) 볼 수 있는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해 있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고 검증해 보라고 할 수 있는 가르침이며, 목적하는 바대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가르침이며, 지혜로운 이라면 각자가 성취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셋째, 승보의 염이란 공동체의 특징과 가치 그리고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잘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올바르게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지혜롭게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바른 방법으로 수행하는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이며, 네 쌍의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이룬 여덟 부류의 성스러운 수행자들의 모임이며, 이것이 실로 성스러운 제자들의 모임으로 공양을 올릴 가치가 있고, 대접할 가치가 있으며, 보시를 드릴 가치가 있고, 예경을 올릴 가치가 있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공덕의 복밭[福田]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인 계증상심은 오계 등의 불교의 윤리도덕적인 실천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재가자의 신행은 오법과 사증상심이 보여주는 것처럼 뛰어난 마음[增上心]의 염(念)으로 삼보와 계의 가치를 깊이 되새겨 내면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수행은 “가고, 오고, 서고, 앉고, 눕고 그리고 일할 때”에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바로 대승에서 말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비롯한 모든 관찰 대상을 끊임없이 염염상속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증상심이 일행삼매와 비교되는 수행으로서 재가자 수행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다시 재가자가 불퇴의 믿음 단계에 이르는 것을 사불괴정(四不壞淨)이라 한다. 즉 사불괴정은 사증상심의 불 · 법 · 승 삼보와 계에 대한 염법 수행을 통해 청정한 믿음이 확립되어 더 이상 물러남이나 흔들림이 없는 경지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영어의 confidence라는 말이 왜 적합한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증상심의 염은 궁극적으로 선(善)하지 않은 세계를 다하고 예류과(豫流果)를 얻어 끝내는 괴로움의 끝과 정각(正覺)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2) 팔재계(八齋戒)의 수행


재가자의 조건으로 이처럼 삼귀의에 이어 5계 수지를 확립하고 더 발전하는 신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매달 포살(布薩, uposa-tha)을 행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포살은 음역이고 의역으로 재(齋)가 있다. 원래 포살일은 출가비구가 매월 2회인 데 반해 재가자는 4회라는 특징이 있다. 날짜로는 8, 14, 15, 23, 29 그리고 30일로 되어 있어 육재일(六齋日)이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여덟 가지 계에 따른 청정한 생활을 한다는 의미에서 8재계(八齋戒)라고도 한다. ‘재가자의 특별 정진일’과 같은 8재계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의 5계에 다음 세 가지 계목이 더해진 것이다. 


6. 불비시식(不非時食): 제때가 아닌 때(정오 이후)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7. 불착화환불도향유(不着花環不塗香油): 꽃이나 향을 몸에 장식하거나 바르지 않는다. 

8. 와지부상(臥地敷床): 다리가 있는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이처럼 재가자의 포살일은 출가자의 수행 생활로 향하는 그래서 오계가 좀 더 확대된 특별 정진의 날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날수로는 6일처럼 보이는 것은 14, 15일과 29, 30일 때문인데, 실제로는 한 달에 4일 정도이다. 왜냐하면, 인도의 역법상 보름을 기준으로 할 때 14, 15일과 29, 30일 가운데 달에 따라 한 날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포살일에 8재계를 지키는 것은 많은 이들을 이익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경전의 여러 곳에서 대단히 큰 공덕의 복업사로 권장한다. 그 과보로는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물론 열반의 성취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8재계를 실천하는 사람은 마치 내(부처님이나 아라한)가 수행하는 것과 같다.”라 할 정도로 강조되었다. 그래서 이날만큼은 5계 이상의 계율을 수지하는 것으로 출가자와 같은 청정한 삶을 지내보도록 하자는 데에 뜻이 있기에, 한역에서도 그 의미를 살려 포살은 장정(長淨) · 정주(淨住)라고도 옮겼다. 출가 스님처럼 정오 이후에는 음식을 들지 않는 단식 때문에 수아(守餓)라 하며 하룻낮과 하룻밤의 계이기에 이른 아침에 8재계를 받아 다음 날 아침까지 지켜야 한다. 또한 근주(近住) · 공주(共住)라 함은 출가 스님 가까이 여러 대중이 함께 절에서 머물며 설법을 듣거나 좌선을 하며 지내기 때문이다. 현재 초기불교 전통을 따르는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 재가자들이 포살일이 되면 가까운 사찰에 가서 계를 받고 설법을 듣는 등 특별한 하루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데 근거한다.


8재계는 재일의 이른 아침에 받는데 계사 앞에서 오계 수지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밝히고 여덟 가지 계를 차례로 지킬 것을 맹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전에서 수계작법의 대상이 출가 스님뿐만이 아니라 우바새와 우바이가 포함된 4부 대중이라는 것이다. 우바새와 우바이도 다른 우바새와 우바이에게 8재계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재가자의 위치가 상당히 높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8재계는 그 근본취지를 살려, 주 5일제가 정착된 현재의 생활 방식에 맞추어 재가자가 한 달에 4번 정도 한적한 도심 주변 사찰이나 산중 사찰에서 사부대중이 함께 수행에 집중하는 특별 수행일로 복원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팔재계를 참고하여 우리 현실에 맞게 복원해야 할 것이다. 


(3) 작복(作福)의 수행도


다음은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으로서 이러한 팔재계와 함께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세간적인 의미의 복락(福樂)을 위한 수행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재가자가 누릴 수 있는 네 가지 복(福)’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첫째, 소유권을 가질 수 있는 행복 

둘째, 부(富)를 누릴 수 있는 행복 

셋째, 빚이 없을 수 있는 행복 

넷째,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행복 


다른 경에서는 동아시아권의 ‘오복(五福)’에 비견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세간적인 복을 제시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드물게 성취할 수 있는, 그렇지만 ‘재가자가 원하고 좋아하는 다섯 가지’로서 첫째는 장수, 둘째는 아름다움, 셋째는 존경을 얻는 것, 넷째는 명성, 다섯째는 좋은 집에 나거나 하늘 세계에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원하지만 ‘빌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될 수 있는 실천의 수행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선도(善導)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들을 통해 재가자들의 성향에 부응하는 일반적인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경에서는 현재에서 세 가지를 가지면 재가자는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믿음이요, 둘째는 재물 그리고 셋째로는 범행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계율을 지키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가자의 신행생활에서 필수 조건으로 먼저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인간계 이상의 ‘복락(福樂)이 있는 하늘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강조한다. 이를 삼론(三論)의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 하는데 시론(施論)→계론(戒論)→생천론(生天論)이 그것이다.


이처럼 많은 경전에서 먼저 자기의 것을 남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 박애의 실천이 수행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러한 보시의 실천이 확립되었을 때 오계(五戒)로부터 시작하는 윤리도덕의 확립을 위한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재가자에게는 열반과 같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이전에 재가자들의 종교심을 고양하는 데 보시와 지계가 먼저 강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시와 지계는 훗날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덕목을 이루고 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재가자들이 실천, 수행하여 그러한 복업으로 인간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목표로 강조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같은 맥락에서 일반적인 작복의 수행으로 삼복업사(三福業事)를 설하고 있다. 즉 보시→지계→정진 수행(bhāvanā)의 차제수행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정진 수행에는 7각지(七覺支)와 전문적인 수행이 제시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전의 보시 · 지계가 강조된 맥락에서 물질적인 보시 능력이 있는 재가자를 염두한 설법으로 볼 수 있다.


재가자의 신행은 기본적으로 베풂과 윤리도덕적 생활에 이어 각지라는 ‘깨달음의 요소’로 나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이 뒤따라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경전의 많은 곳에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 ‘해탈’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을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재가자에게도 설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재가자들이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한 후 연기법과 사성제를 깨닫게 되었다고 나타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믿음에서 반야지혜에 이르는 일곱 가지 신행 덕목은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재가자의 신행 범위로 나타난다. 즉 믿음(信), 지계(持戒), 염치를 아는 양심, 책망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 열심히 배우는 것, 박애적인 보시 그리고 반야지혜가 그것이다. 초기경전에는 거사품(居士品, gahapati vagga)이 따로 묶여 품을 이루는 경우가 있는데, 그중에 한역 증일아함에 대응되는 앙굿따라 니까야에, 부처님께서 출가자들에게 하타까(Hatthaka)라는 재가자도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놀라운 공덕을 갖추었다고 칭찬하는 것으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후에 37조도품(助道品)으로 정리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 팔정도(八正道)는 바로 열반, 해탈을 이루는 가장 직접적인 실천법으로 제시된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 체계를 아우르는 중도(中道)이며 사성제(四聖諦)의 도성제 내용 그 자체로써 바로 고(苦)와 갈애(渴愛)를 제거할 수 있다는 수행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 해탈을 목표로 하는 출가 스님에게 팔정도를 시설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특별하게도 재가자를 배려해서 ‘세속 팔정도’라는 이름으로까지 시설하고 있어서 재가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까지인지를 알 수 있다.


재가 불자의 실천수행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가 《일체사경(一切事經)》이다. 자리와 이타를 구족한 재가자의 열여섯 가지 경우가 설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① 우바새는 바른 믿음(正信)을 완전히 갖추어, ② 남도 완전히 갖추도록 한다. ③ 스스로도 깨끗한 도덕적인 삶이 확립되었고, ④ 남도 확립되도록 한다. ⑤ 스스로도 보시를 행하고, ⑥ 남도 행하도록 한다. ⑦ 스스로 (절에 나가) 불교를 접하고 나아가 여러 스님을 뵙고, ⑧ 남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 ⑨ 스스로도 열심히 법을 듣고, ⑩ 남도 또한 듣게 한다. ⑪ 스스로도 법을 받아 지니고, ⑫ 남도 받아 지니게 한다. ⑬ 스스로도 이치를 관찰하고, ⑭ 남도 관찰하게 한다. ⑮ 스스로도 깊을 이치를 알아 법을 따르고 향하며 닦으면서, ⑯ 남도 깊은 이치를 알아 법을 따르고 향해 수순하여 닦게 한다. 


이는 재가자의 신행 수준과 유형 그리고 단계를 보여준다. 이타(利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자리(自利) 단계에 머물고 있는 재가자가 여러 방면에서 이타행을 실천해야 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르침은 다시 신(信), 계(戒), 시(施), 문(聞), 혜(慧)로 압축하여,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삼귀의와 오계수지 등과 관련하여 설하고 있는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信, saddha) 또는 정신(正信)이란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과 함께 정견(正見: 올바른 세계관)이 확립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빠알리에서는 여래 9호에 대한 믿음과 함께 ‘여래의 보리(菩提: 깨달음)를 믿는다’는 표현이 또한 궁극적인 정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둘째, 계는 앞에서 설명한 바처럼 오계(五戒)나 팔재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인 삶을 의미한다. 


셋째, 시(施, cāga) 또는 보시(布施)는 여기서 쓰인 빠알리의 쓰임새에 비추어보면 탐착을 여읜 사심 없는 선행, 또는 인색하지 않고 넉넉히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문(聞, suta)은 원래 ‘법을 듣는다’가 본뜻이지만, 법을 듣고 배우고 실천수행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다섯째, 혜(慧, paññā)는 모든 불교를 다 포섭할 수 있는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말한다. 


흔히 경전에서는 다섯 번째의 혜를 제외한 네 가지 덕목의 ‘완성(sampanna)’을 재가자를 대상으로 설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네 번째는 ‘문(聞, suta)’ 대신 ‘혜’를 더하여 네 가지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로써 재가자가 구족하고 완성해야 하는 신행 덕목은 삼보의 믿음에서 출발하여 불교 윤리적인 실천수행과 박애적인 베풂 그리고 불법을 배우는 실천은 물론 이로 인한 반야지혜 또한 닦아 완성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훗날 대승에서 보살이 닦아야 할 육바라밀의 내용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재가자가 닦아 완성해야 하는 신행의 범위와 정도를 분명히 잘 알 수 있다.


다시 아래 언급될 《비얏가빠자 숫따(Vyagghapajja Sutta)》 등의 많은 경전에서 재가자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서 이익(hitā)과 행복(sukha)을 가져올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한다. 먼저 현재의 삶에서 네 가지 이익과 행복이 있는 삶을 이루는 덕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산을 위해 노력하는 삶(uṭṭhānasampadā) 

둘째, 안전이 보장되는 삶(ārakkhasampadā) 

셋째, 좋은 친구를 갖는 삶(kalyāṇamittatā) 

넷째, 적절한 살림 운영의 삶(samajīvikatā) 


먼저 생산을 위한 노력하는 삶은 그 설명의 내용에서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노동하는 삶을 말한다. 두 번째의 안전이 보장되는 삶은 그러한 생산물들을 빼앗기지 않는 치안이 확립된 환경 조성의 삶을 말한다. 세 번째의 좋은 친구[善友/善知識]를 갖는 삶은 신(信), 계(戒), 시(施), 혜(慧)가 있는 사람과 사귀는 교우관계를 말한다. 선우(善友)를 갖는 것은 도(道)를 이루는 절반도 아닌 전부라고 할 정도로 부처님은 도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적절한 살림 운영의 삶은 가난하지 않게 지출과 소비를 잘하는 삶을 말한다. 다음으로 미래(내생)에 이익과 행복이 있을 4가지 법은 앞에서 설명한 신(信), 계(戒), 시(施), 혜(慧)를 말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4가지를 갖출 때 다음 생에도 마찬가지로 이익과 행복이 있는 삶이 된다는 ‘8가지 이익과 행복 덕목’을 권장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신행의 결과로 뛰어난 재가자의 다섯 가지 덕목은 믿음과 계율을 갖추고, 미신(迷信)에 있지 않고, 업보(業報)를 믿어 요행을 바라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수승함을 구하지 않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4) 재가자의 궁극적인 신행 목표


뛰어난 재가자들의 이름이 증일아함과 빠알리(Pāli) 앙굿따라 니까야에 각각 열거되고 있다. 그들은 출가 제자와 함께 성문제자(聲聞弟子, savāka)로 불린다. 그들의 신행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출가자에게 공양 드리는 재시자(財施者) 

둘째, 사무량심(四無量心)이나 사섭법(四攝法)과 같은 이타행의 실천자 

셋째, 성묵(聖黙)을 잘 행하고 좌선을 통해 선정(禪定)을 닦는 선정수행자 

넷째, 깊고 묘한 법을 잘 이해하고 설하는 설법자(說法者), 

다섯째, 주장에 두려움이 없고 논쟁으로 남을 이길 수 있는 논사(論師) 

여섯째, 외도(外道)까지 조복 받고 불교로 귀의시키는 포교사(布敎師) 역할 

일곱째, 게송을 잘 짓는 자 

여덟째, 신통력을 갖춘 자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부터 재가자의 신행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재가자상을 다시 점검해 볼 수 있을 잣대가 될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궁극적 경지에서 100세 법랍의 출가 스님이나 재가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한다. 하지만 출가는 가정적 세속적인 집착과 속박을 여의고 바로 열반 해탈을 목표로 하는 반면, 재가는 가정적 세속적인 속박 때문에 장애가 많다고 한다. 재가자를 ‘흰옷 입은 사람(gihīodāta vasan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부처님과 외도 간의 문답에서 재가자의 뛰어난 신행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오백 명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재가자가 욕망을 떠나지 않은 채 불교를 확신하여 게으르지 않고 의심을 떠나 의혹을 끊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 오백 명도 아니고, 그보다도 훨씬 많은 재가자가 “오하분결(五下分結)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라고도 한다.


비구 · 비구니에 대한 질의응답에 이어 같은 형식으로 재가 불자에게도 같은 문답이 행해지는데, 여기서 불설(佛說)을 통해 많은 수의 재가자들이 범행을 닦고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고 질적 전환을 마쳐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opapātikā)’가 되었다는 표현도 있는데, 이는 수행에 의한 생명의 질적 전환을 의미한다. 재가자도 열반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출가자와 재가자의 궁극적인 경지는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재가자는 욕애(欲愛)를 벗어나기 힘들어 궁극적 경지를 성취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때문에 재가자가 수행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경지는 열반의 아라한과(阿羅漢果)가 아닌 그 아래 단계인 불환과(不還果)까지라고 설하는 경전도 있다. 하지만 재가자라 할지라도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의 경지를 성취한 예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3.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부처님 당시의 재가자 신행을 초기불교 경전을 통해 오늘의 신행생활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오히려 현재의 신행생활이 그 깊이와 폭에서 못 미치거나 벗어나 있는 경우까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시 간략하게 부처님 당시의 재가자 신행에 관한 논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재가자의 기본적인 신행은 불법승 삼보의 염법(念法)으로 확고한 신심을 확립하는 것으로 사불괴정(四不壞淨)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8재계와 같은 특별 정진일이 보여주는 것처럼 재가 불자들은 단순히 부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출가 스님들의 수행을 본받고 체험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의 성취로 나아갈 수 있도록 수행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당시 재가자의 신행 수준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활발한 재가 불교의 신행을 위해서 팔재계의 제도적 복원이 필요함을 다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교의 생활화를 위해 포살 참회의 수행 방법이 개인적 차원이든 집단적 차원이든 양자에 걸쳐 새롭게 오늘에 되살려야 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 당시의 재가자는 삼론과 같은 차제적인 방편으로 신행이 단계적으로 고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재가불자의 일차적인 신행의 목표는 작복(作福)을 통한 복락(福樂)의 성취였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한 구체적인 신행 방법으로 박애적인 베풂의 삶으로서 보시와 오계와 10선계 그리고 8재계와 같은 윤리도덕을 확립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재가자 또한 출가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열반 해탈을 성취하는 데 신행의 목적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싱갈로바다경》과 《육방예경》 등 재가자 중심 경전에서 볼 수 있듯이 구체적인 세속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불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따른 불교적 재가인의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재가자는 재가자로서 어떻게 살면 세속 사회에서 성공적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은 재가자의 사회적 실천 또한 강조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재가자의 신행도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각지(覺支)라는 ‘깨달음의 요소’로 나아갈 수 있는 고차원의 수행을 제시한다. 때문에 재가자들에게도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열반’ ‘해탈’ ‘깨달음’의 가르침을 설하며 연기법과 사성제를 깨닫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의 신행은 근본적으로 의례나 의식의 형식보다는 윤리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조준호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 · 박사. BK21 불교사상연구단,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등이 있으며, 저서로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등과 역서로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