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불교 문헌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 -니까야를 중심으로/이필원

실론섬 2018. 8. 20. 18:38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4호(2018.3) pp. 21∼48

초기불교 문헌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

-니까야를 중심으로

이필원/동국대학교(경주) 파라미타칼리지

 

I. 이끄는 말

II. 유학과 무학의 깨달음

III. 운문경전에 나타난 깨달음

IV. 결론

 

[요약문]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깨달음의 성취’를 통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결

국 깨달음이란 고통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

보는 시각이 다르고,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의 내용도 같지 않다. 그렇기에 깨달음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을 말할 수 있는 이

유이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논할 때 bodhi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데, ‘깨달음(bodhi)’

이라는 용어만을 대상으로 하면 그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해탈, 열반, 불사, 번뇌의 완

전한 소멸, 삼명의 획득, 재생이 없다는 선언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럴 때, 깨달음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사과설을 중심으로 깨달음의 내용을

고찰하였다. 결과 예류와 일래의 깨달음은 ‘믿음의 성취’를 특징으로 하고, 불환은 믿음

의 성취를 기반으로 한 욕탐과 분노의 부정적 정서로부터의 해탈을 깨달음으로 정리하

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라한은 자아관념을 완전히 제거하고, 무명을 밝혀 완전지를 

통해 해탈한 자이며, 완전한 번뇌의 소멸을 통해 태어남을 파괴한 자이다. 따라서 무아

의 체득과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 대한 앎으로 깨달음을 정리해 보았다.

 

다음으로 운문경전 가운데 테라가타와 테리가타 그리고 Sagāthāvagga에 나타나

는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우선 테라가타와 테

리가타는 깨달음의 선언 혹은 표현을 3가지로 정리했고, 깨달음을 획득한 방법과 기연

성을 특징으로 기술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초기불교 문헌, 특히 니까야속에서 발견되는 깨달음의 양상은 과정으로

서의 깨달음은 믿음을 그 특징으로 하고, 궁극적 깨달음은 번뇌의 소멸과 재생의 단절

및 태어남의 파괴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I. 이끄는 말

 

깨달음을 의미하는 표현은 대단히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bodhi, sambodhi,

anuttara sammā-sambodhi가 이에 해당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로 이해된다. 그 외

에도 vimuttiñāṇa 등이 있다.

 

bodhi는 보통 “붓다가 소유한 앎, 최고의 또는 무한한 앎, 전지”.1) “(최고의)

앎, 깨달음, 붓다가 소유한 앎”2)이라고 정의된다. Nyanatiloka Mahathera는 “깨

달음, 계몽, 뛰어난 앎”이외에 “번뇌로 인한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것”3)으로도

설명한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토대로 bodhi란 말을 이해하면 ‘좁게는 붓다

의 지혜 혹은 앎으로, 넓게는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깨어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 Pali-Dictionary Vipassana Research Institute, bodhi s.v.
2) PTSD, bodhi s.v.
3) Buddhist Dictioanry by Nyanatiloka Mahathera, bodhi s.v.

 

깨달음의 정의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연구들을 통해 많은 부분이 해명되었

고, 제시되었다.4) 그래서 본고에서는 주제인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지를 먼저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국어사전의 정의에

서 ‘다원적’이란 의미는 “사물을 형성하는 근원이 많은. 또는 그런 것.”으로 정

의된다. 따라서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이란 ① ‘깨달음에 도달하는 다양한 양

상’ 혹은 ②‘깨달음을 나타내는 다양한 양상’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경전을 보면, 사성제, 칠각지, 사념처, 오근, 오력 등의 다양한 수행법

이 제시되어 있기에 ①의 내용은 충분히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②는 깨달

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깨달음에

대한 붓다의 기본 입장은 한 맛(ekarasa)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나타내는 표현

은 다양할 수 있지만, 깨달음의 내용이 다를 수는 없다. 그리고 단계적 관점에

서 본다면 궁극적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깨달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증오와 해오의 측면일 것이다. 해오는 과정으

로서의 깨달음을, 증오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깨

달음의 다원적 양상을 논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본 ‘깨달음의 논쟁’에서 김준호, 김한상 교수의 논문과 정준영 교수의 논문(「초기불교의 깨달음
   이해」, 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 서울 : 운주사, 2015)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본고
   에서 이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깨달음을 논할 때, ‘깨달음(bodhi)’라는 용어만을 대상으로 하면, 그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해탈, 열반, 불사, 번뇌의 완전한 소멸, 삼명의 획득, 재

생이 없다는 선언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럴 때, 깨달음의 다양한 양상을 살

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궁극적 깨달음과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나누어 기술하고, 깨달음을 성취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무엇인지에 대한 내

용을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 사과설에서 말하는 각 단계별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니까야 가운데서는 주로 운문 경전을 중

심으로 해서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분류해 보고자 한다. 특히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 나타나는 깨달음에 관련된 기술 들을 분석하고,『상윳따 니까야』

의 제 1권인 「사가타왓가」의 내용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논자가『테라가타』와『테리가타』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깨달음이

란 현장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깨달음은 개인에게 일어나는 극적인 내적 변화

이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경험한 수행자의 자기고백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의

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II. 유학과 무학의 깨달음

 

유학(sekkha, 有學)은 말 그대로 배우는 과정에 있는 학인을 말한다. 즉 수행

의 완성,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인 것이다. 이에 반해 무학(asekha, 無學)은

더이상 배워야 할 바가 없는, 수행이 완성되어 깨달음을 성취한 자를 말한다.

초기불교의 성자의 계위를 이에 배대해서 보면, 예류, 일래, 불환은 유학에 해

당하고 아라한은 무학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들 성자의 위(位)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가에 대한 내용보다는

번뇌를 얼마만큼 지멸(止滅)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때 번뇌를 10결(十結,

dasasaṃyojanāni)이라고 한다. saṃyojana는 족쇄, 속박이란 의미로 번뇌를 의미

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들 번뇌와 성자의 계위를 논의의 편의를 위해 우선

간단하게 표로 정리해 본다.

 

<표 1> 10결의 내용 및 성자의 계위

                          번뇌                                                                       제거 상태              성자

오하분결(五下分結)    유신견(sakkāya-diṭṭhi, 有身見)

pañcimāni                   의심(vicikicchā, 疑)                                       완전제거               예류

orambhāgiyāni            계금취견(sīlabbata-parāmāsa, 戒禁取見)                          

saṃyojāni                   욕탐(kāma-chanda, 欲貪)                            욕탐과 분노가

                                                                                                        옅어지면                일래

                                    분노(byāpāda, 瞋恚)                                   욕탐과 분노를

                                                                                                        제거하면                불환

오상분결(五上分結)    색탐(rūpa-rāga, 色貪)                                  완전제거                아라한

pañcimāni                   무색탐(arūpa-rāga, 無色貪)

uddhambhāgiyāni       만(māna, 慢)

saṃyojāni                   도거(uddhacca, 掉擧)

                                    무명(avijjā, 無明                                                                                      

 

이상의 표를 통해, 이른바 삼결(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을 끊으면 예류성자

(sotāpanna, 진리의 흐름에 든 자)가 되고, 욕탐과 분노를 엷게 하면 일래성자

(sakadāgāmi)가 된다.5) 이 욕탐과 분노를 완전히 제거하면 불환자(anāgāmī)가

된다. 불환자는 욕계에 대한 욕망을 없앴기에 욕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

란 의미이다. 아라한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탐욕을 모두 버렸기에 삼계를 벗

어난 존재, 즉 윤회의 속박을 완전히 끊어버린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명이란 번뇌가 또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그럼,

무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자.

5) SN. V, p.357에는 삼결을 끊고, 탐, 진, 치를 엷게 하면(rāga-dosa-mohānaṃ tanuttā) 일래자가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SN. III, avijjāsutta에는 무엇이 무명인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붓다의 답변이

기술되어 있다. 붓다는 오온 각각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하고

소멸로 이끄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6) 

는 SN.III. Khemakasutta7)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쉽다. 케마까존자가 

병이 들어 있을 때 닷사까라는 존자를 통해 장로스님들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케마까 존자는 오온에 대해서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혹은 ‘나의 것’

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번뇌를 부순 아라한은 아니라고 말한다. 케마까 존자

는 부연설명하면서, “나는 오취온과 관련해서 ‘나’라는 것을 뿌리 뽑지는 못했

지만, 오취온과 관련해서 어느 것 하나라도 ‘나’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즉 이는 무아를 완전히 체득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그래서 존자는 “어떤 성제자는 오하분별을 끊었다고 해도, 오취온 가운데 미

세하게 발견되는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을 아직 끊지 못

한 자가 있다.”라고 말한다.

6) SN. III, p.162ff.
7) SN. III, p.128ff.

 

한편 SN.V, Dutiyadhāraṇasutta에서는 무엇이 무명인가에 대해 붓다는 사성

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8)

8) SN. V, p.429.

 

SN. IV, Avijjāpahānasutta에서는 6근, 6경, 6식을 각각 무상하다고 알고 보면

무명이 제거되고 명지가 일어난다고 설명된다.9)

9) SN. IV, p.30. 

 

SN. V, Avijjāsutta에서는 무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사리뿟따 존자는 4

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울러 사리뿟따 존자는

8정도가 무명을 버리는 방법이라고 제시하고 있다.10)

10) SN. IV. p.256

 

또한 무명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AN. I, Bālavaggo에서는 사마타을 수행하면 마

음이 닦아지고, 마음을 닦으면 탐욕이 버려지고(rāgo so pahīyati), 위빠사나를 수

행하면, 지혜가 닦아지고, 지혜가 닦아지면 무명이 버려진다.(avijjā sā pahīyati)

는 내용이 나온다. 즉 무명을 버리는 방법으로 위빠사나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무명은 다른 말로 어리석음이라고도 한다.11) 따라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는 어리석음인 무명을 밝혀 명지(vijjā)로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이상의 내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1) AN. I, Sāḷhasutta, p.193에는 ‘어리석음(moho)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명이 그 의미라는 설명이
    나온다.(avijjhāti kho ahaṃ, sāḷhā, etamatthaṃ vadāmi)

 

<표 2> 무명의 내용 및 제거 방법

무명의 내용                                                         무명의 제거 방법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알지 못하는 것 ∙            ˚자아관념의 완전한 해체

무아를 체득하지 못하는 것                              ˚사성제에 대한 바른 앎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                                  ˚팔정도의 수행

6근, 6경, 6식을 무상하다고 알지 못하는 것    ˚위빠사나의 수행을 통한 지혜의 계발

                                                                        ˚무상관의 수행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유학과 무학의 깨달음에 대해 논의해 보자.

 

1. 유학의 깨달음

우선 유학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위를 설명하는 여러 문장들 가운데, 깨달

음이란 단어가 나오는 문장의 예를 살펴보기로 한다.

 

3결의 소멸로부터, 예류가 되어, 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②

결정된 자가 되고, ③ 최고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된다.(DN.III,

p.132 ; MN.I, p.226 ; SN.V, p.357, AN. IV, p.12 등)

 

결정된 자(niyato)란 법(dhamma) 혹은 도(magga)의 방법에 의해 결정된 자란

의미이다.12) 법, 혹은 도란 붓다의 가르침, 구체적인 수행법을 의미하는 것으

로 이해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 혹은 구체적인 수행법을 통해 얻는 것은 결

국 열반이기에, 이를 폭넓게 이해하면 열반의 성취가 결정된 자를 의미한다고

도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깨달음(sambodhi)을 목적으로 하는 자란

말 그대로 궁극적 깨달음의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문장을

통해 예류자의 깨달음은 궁극에 이르지 못한 과정에 놓인 깨달음임을 알 수 있

다. 과정의 깨달음이란 믿음의 성취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류를 설명

하는 다양한 방식 가운데, 4예류지(sotāpattiyaṅga)가 있다. 4예류지는 두 가지

패턴으로 설명이 되는데, 그 중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12) Niyatoti dhammaniyāmena niyato. 제 6차결집본 Saṃyutta Nikāya, Mahāvagga-aṭṭhakathā, p.82에서
    나온다.

 

성제자는 붓다에 대해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구족한다. ... 진리에 대해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구족한다. .... 상가에 대해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구족한다. ... 성자에 의해 칭찬되는 계를 구족한다. ... 이들 4예류지를 구

족한다. ... 지옥・축생・아귀의 소멸로부터 예류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

지 않는 자가 되고, 결정된 자가 되고, 최고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자

가 된다.(SN.II, pp.69~70 ; SN.V, p.343 등)

 

4예류지는 무너지지 않는 믿음[不壞의 믿음, aveccapasāda]과 계의 구족

(sīlehi samannāgato)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예류자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경의 내용을 비교해서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3> 삼결과 4불괴정의 관계

                             삼결의 대치                                            

삼결                     믿음[네 가지 불괴의 믿음]

의심                     붓다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믿음

유신견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믿음

계금취견              상가에 대한 무너니지 않는 믿음

                             계의 구족                                                          

 

그래서 예류자의 깨달음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의 성취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이는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없음의 또 다

른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3)

13) 예류의 깨달음인 믿음은 단순한 믿음과는 다르다. 일단 예류는 ‘견을 성취한 자(diṭṭhisampanno)’
    이기에 어떤 것을 영원한 것, 혹은 실체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원인과 원인에 의
    해 발생한 현상들을 잘 이해하는 자(sudiṭṭho)로 설명된다.(AN.III, p.439) 따라서 맹목적인 믿음과
    는 구별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일래를 살펴보자. 일래를 표현하는 정형적인 표현은 “삼결(三結)

을 끊고 탐진치를 엷게 하여 일래자가 되었다. 그는 오직 한 번만(sakideva)이

세상에 돌아오고 나서, 고통의 마지막을 만들 것이다.”14)이다. 일래자가 예류

자와 다른 점은 탐진치를 엷게 했다는 점 뿐이다. 따라서 일래자의 깨달음은

예류자의 깨달음과 동일한 믿음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4) SN.V,p.357.

 

다음으로 유학의 마지막인 불환자를 살펴보자. 불환자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경전의 내용을 먼저 소개해 본다.

 

비구들이여, 욕망의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떠나고, 존재의 속박에 의해

묶인 자는 돌아오지 않는[불환]자가 되고, 이 상태에 돌아오지 않는

다.(It. p.95)

 

‘이것이 고통이고, 이것이 고통의 발생이다.’라는 것이 한 가지 관찰이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고, 이것이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것이 두

가지 관찰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종[의 관찰법을] 바르고, 게으르지 않

고, 열심히, 전념해서 머무는 비구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의 과보 가운데, 어느

하나의 과보가 기대된다. 현세에 있을 때 최고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혹은 집

착의 남음이 있으면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이다.(Sn. p.140)

 

해탈한 7명의 비구들이 무번천(avihā, 無煩天)에 태어났다. 탐욕과 분노

를 완전히 끊은 그들은 [욕계의] 세상에 대한 집착을 건넜다.(SN.I, p.35)

 

욕망의 대상의 속박을 떠나는 것은 욕계를 벗어났다는 의미이고, 존재의 속

박에 묶였다는 것은 색계 이상의 하늘나라에 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Sn.의 내용에서 말하는 ‘집착의 남음이 있다’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의

미한다.15)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성제에 대한 바른 관찰이란 점

이다. 그리고 번뇌의 관점에서는 오하분결을 끊은 존재이다. 오하분결의 핵심

은 ‘욕계의 탐욕과 분노를 끊었다’데에 있다. 마지막으로 불환자를 설명하면

서, ‘해탈한(vimuttā)’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15) SN.III. Khemakasutta의 내용을 참조하라.

 

이상의 내용을 통해 불환자는 미세한 자아에 대한 집착을 지녔지만, 욕계에

대한 탐욕과 분노로부터 해탈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예류와 일래자를 설명할

때, 해탈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불환자에게 해탈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은 주요한 번뇌인 욕탐과 분노를 끊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불환자

의 깨달음은 욕탐과 분노로부터의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16)

16) “논쟁의 가담자들은 합리적인 논변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했지만 그 이면에 자리하는 탐욕
    과 분노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 점을 간파했던 붓다는 진리 추구의 여정에서 심리적・정서적 안정
    mental stability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힌 연후라야 비로소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임승택, 「심리적 세계의 이해」, 마음과 철학, 서울 : 서울대
    학교출판문화원, 2015, p.4) 다소 맥락은 다를 수 있지만 불환자의 깨달음은 자신을 괴롭히던 욕망
    과 분노라는 정서적 불건전함으로부터의 해탈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2. 무학의 깨달음

무학(asekha, 無學)은 말 그대로,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는,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수행의 완성은 오상분결이란 번뇌의 단절로 성취된다. 10결의 특징

을 먼저 분석해 보면, 무학의 깨달음이 갖는 특징을 대체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표 4> 번뇌의 분류

오하분결   의심(vicikicchā, 疑)      

                 유신견(sakkāya-diṭṭhi, 有身見)                      견해          바른 견해의 성취

                  계금취견(sīlabbata-parāmāsa, 戒禁取見)                                  

                  분노(byāpāda, 瞋恚)                                    분노

                  욕탐(kāma-chanda, 欲貪)                                                  

오상분결   색탐(rūpa-rāga, 色貪)                                  탐욕          미세한 자아관념의

                  무색탐(arūpa-rāga, 無色貪)                                           제거및 탐진치 제거

                    만(māna, 慢)                                                                           자아와 관련17)           

                 도거(uddhacca, 掉擧)

                무명(avijjā, 無明)                                         무명                                                      

17) Sn.799게송에서는 만을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종류는 sama(동등
    함), hīna(열등함), visesin(뛰어남)의 세 가지이다. 그 외에 Sn.842, 855, 860, 918 등에서도 확인된다.
    SN. I, p.14에는 “교만을 버린 자에게는 속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만이
    자아관념이라는 속박을 일으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AN. I, p.281에는 아누룻다 존자와 사리
    뿟따 존자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경전에서 자만과 도거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무학은 미세한 자아관념을 이루는 만과 도거, 욕

탐과 색탐과 무색탐을 완전히 제거한 자이며, 무명을 밝혀 알아야 할 바를 모

두 안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학인 아라한과를 성취한 수행자는 재생의 

파괴와 완전한 해탈을 선언하게 된다.

 

태어남은 파괴되었고, 범행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바는 마쳤으며, 더

이상 이러한 상태로 이끌리지 않는다.18)

18) Vin. I, pp.14, 35, 184 ; DN. I, pp.84, 177, 203 ; SN. I, p.140 ; II, pp.51, 82, 95 등

 

번뇌를 멸하고, 이미 수행을 완성하고, 해야할 바를 마쳤으며, 무거운 짐

을 내려놓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헤맴의 생존의 속박을 끊어, 완전

지에 의해 해탈되었다.19)

19) DN.III, pp.83, 97, 133 ; MN.I, pp.4, 5, 235 ; SN.I, p.171 ; III, pp.161, 193 ; AN.I, p.144 ; III, 
    pp.359, 376 등.

 

나에게는 智와 見이 생겼다. 나의 마음의 해탈은 부동이고, 이것은 최후

의 태어남이며, 이제 재생은 없다.20)

20) SN.II, pp.171, 172 ; III, pp.28, 29 ; IV, pp.8, 9 10 ; V, pp.204, 423 ; AN.I, p.259 등.

 

나의 해탈은 부동이고, 이것은 최후의 태어남이고, 이제 재생은 없다.21)

21) MN.I, p.167 ; III, p.162. 등

 

깨달음이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위의 용례는 깨달음에 대한 또 다

른 표현들이다. 결국 깨달음의 또 다른 표현이란, 태어남의 파괴, 범행의 완성,

해야 할 바를 마침, 번뇌의 소멸, 완전지에 의한 해탈, 부동의 심해탈22), 재생의

없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23) 그리고 [표 4]에서 보듯이, 아라한의 깨달음은 무

명의 소멸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아날라요는 “깨달음은 지혜의 개발

을 통한 무지(avijjā)의 소멸을 필요로 한다24)고 하여, 무지의 소멸을 깨달음으

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아라한의 깨달음은 무아의 체득과 번뇌를 완전히 소

멸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앎25)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22) SN. I, p.120. Godhikasutta에서는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 때 존자 고디까
    는 ....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cetovimuttiṃ) 얻었다(phusi). 그 때 존자 고디까는 그 일시적인 마음
    의 해탈로부터 물러났다.(cetovimuttiyā parihāyi).” 이는 명백히 심해탈에는 일시적인 심해탈과 부
    동의 심해탈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라한의 깨달음은 부동의 심해탈만이 해당됨을 알 수 있다.
23) 정준영은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열반의 상태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정준영, 앞의
    책, p.90)고 말하고 있는데, 열반 이외에도 다양한 표현들로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4) 아날라요 스님 저, Satipaṭṭḥāna-깨달음에 이르는 알아차림 명상수행, 서울 : 명상상담연구원, 
    2014(이필원, 강향숙, 류현정 공역), p.186.
25) vimuttasmiṃ vimuttam iti ñāṇam hoti([온갖 번뇌로부터] 해탈했을 때, ‘[자신이] 해탈했다’라는 智가
    있다.)에 대한 표현이다. 이 내용은 니까야 여기저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MN.I, p.38 ; AN.I, p.167 ; DN.I, p.84, SN.II, p.95 등)

 

III. 운문경전에 나타난 깨달음26)

26) 荒牧典俊(「SN MārasaṃyuttaIの成立について」, 印度学仏教学研究 第48号, 1982, p.3)와 並川孝儀
    (ゴータマ․ブッダ考, 東京, 大蔵出版. 2005, p.10)의 연구에 따르면 불교 문헌은 크게 3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제1층은 숫따니빠따 가운데 제4장과 제5장이 해당되며, 제2층은 상윳따 니카
    야의 제1장인 Devatāsaṃyutta와 제4장인 Mārasaṃyutta, 그리고 담마빠다의 Taṇhāvagga와
    Brāhmaṇavagga이며, 제3층은 Theragāthā와 Therīgāthā가 해당된다고 한다. 

 

1. Theragāthā, Therīgāthā에 나타난 깨달음의 순간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는 잘알려진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 붓다의 직제

자들이 읊은 깨달음의 노래들이다. 그런만큼 깨달음에 대한 직접적 표현들을

현장성 있게 접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필자의

관점에서 게송들 가운데 깨달음과 직접적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 게송들을 살

펴보고, 내용상 몇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1) 윤회의 파괴와 재생의 단절

게송들마다 다소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윤회가 파괴되었고 따라서 재생

하지 않는다는 선언의 게송이 있다. 이들 게송을 소개하고, 게송에서 무엇을

통해 윤회를 파괴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깨달음을 살펴보는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kadhammasavanīyatthera]

모든 번뇌들은 타버렸고, 일체의 존재들은 제거되었네. 생의 윤회는 완

전히 파괴되었고, 이제 다시 재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네.(Thera-g. 67G)

 

[Samitiguttatthera]

이전의 다른 생에서 나에 의해 행해진 악[행],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경험

해야 하리. [하지만] 또 다른 [재생의] 일은 알려지지 않는다네.(Thera-g. 81G)27)

27) ‘vatthu aññaṃ na vijjatīti tassa kammassa vipaccanokāso añño khandhappabando natthi... 라고 
    주석서에서는 설명되고 있다. 즉 “그의 행위의 이숙의 기회, 그리고 다른 [오]온의 연속은 없다.”는 의미
    이다. 결국 현생에서 재생으로 연결될 업을 짓지 않아, 재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Paviṭṭhatthera]

28)들은 있는 그대로 보여졌고, 일체의 존재들은 소멸되었네. 생의 윤

회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제 다시 재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네.(Thera-g. 67G)

28) tattha khandhāti pañcupādānakkhandhā...

.

[Sāmidatthatthera]

오온은 완전히 이해되었고(pariññātā), 잘려진 뿌리가 확립되었네. 생의

윤회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제 다시 재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네.(Thera-g. 90G)

 

[Nadīkassapattehra]

견해의 정글을 뛰어다니면서, 집착 때문에 현혹되었네.

무지한 자, 어리석은 자(aviddasu)는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으로 생각했다네(maññisaṃ). (342G)

 

나에 의해서 삿된 견해가 버려지고, 모든 존재의 상태들은 파괴되었으

니. 나는 공양할 만한 불에 헌신할 것이네. 나는 여래를 경배하리.(343G)

 

나에 의해서 모든 어리석음(mohā)이 제거되었고, 모든 존재에 대한 갈애

가 파괴되었다네.

태어남의 윤회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더이상 재생은 존재하지 않으리.(344G)

 

위 다섯 개의 게송 가운데 에카담마사와니야 장로와 나디까삿빠장로는 번

뇌의 제거 및파괴를 통해 윤회의 파괴및 재생의 단절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하

고 있다. 빠위따 장로와 사미닷타 장로는 오온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통해 윤

회의 파괴와 재생이 단절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는 오온의 가르침을 통해 무아

를 체득했음을 보여준다. 사미띠굿따 장로는 과거의 업을 현재 모두 수용하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재생의 단절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단순하게 업

의 기계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업의 수용을 통해 업을 제거하는 것

은 자이나교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지혜의 개발을 통한

깨달음의 성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표현이 ‘재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

식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9)

29) 이와 관련한 경문은 AN. IV, p382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날라요 스님, 앞의 책, p.186 각주 59를
    참조하라.

 

2) 번뇌의 소멸에 대한 선언

또 다른 패턴은 모든 번뇌의 소멸을 통해 평온, 열반을 성취했음을 선언하는

게송들이다.30)

30) 정준영의 다음의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초기불교 안에서는 해탈의 의미가 가장 다
    양하게 나타났고 깨달음 그리고 열반의 순으로 그 의미가 명료해졌다. 초기불교에서 설명하는 깨
    달음은 열반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깨달음은 번뇌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의미한다.”(정준
    영, 앞의 책, p.94)

 

[Rakkhitatthera]

나의 모든 탐욕(sabbo rāgo)은 포기되었고, 모든 성냄은 뿌리뽑혔고, 나의

모든 어리석음은 사라졌다네. 나는 [번뇌의 불이] 꺼졌으며, 평온해졌다네.(Thera-g. 79G)

 

[Pārāpariyatthera]

여섯 접촉의 기관들을(chaphassāyatane) 버리고서, [감각의] 문이 수호되

고, 잘 제어되었고, 죄의 뿌리를 제거하고서, 나에 의해서 모든 번뇌의 소

멸(āsavakkhayo)이 성취되었네.(Thera-g. 116G)

 

[Isidattatthera]

오온은 완전히 이해되었고(pariññātā), 잘려진 뿌리가 확립되었네. 고통

의 소멸이 획득되었고, 나에 의해 모든 번뇌의 소멸이 성취되었네.(Thera-g. 120G)

 

[Uttaratthera]

나에 의해 [오]온들이 완전히 이해되었고, 갈애는 나에 의해 완전히 제거

되었다네, 나의 [칠]각지들은 수행되었고, 나에 의해 모든 번뇌의 소멸이

성취되었네.(Thera-g. 161G)

 

[Migasiratthera]

정등각자의 가르침속에 나는 출가한 이래, 나는 해탈하면서 위로 올라갔

고, 욕계를 초월했네. 범천이 보고 있는 동안, 거기에서(tato)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네. 모든 족쇄(saṃyojana)의 소멸로부터, ‘나의 해탈은 부동이

다(akuppā me vimutti)’라고 [알았네.](Thera-g. 181~182G)

 

장로들이 번뇌를 소멸한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먼저 락키따 장로는 탐진치

의 소멸을 통해 번뇌의 완전한 절멸을 선언하고 있고, 빠라빠리야 장로는 육근

의 제어를 통해 죄의 근원을 제거하여 번뇌의 완전한 소멸이 성취되었음을 선

언한다. 이시닷따 장로는 오온을 완전히 이해함을 통해 고통의 소멸을 획득하

고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31) 웃따라 장로는 오온의 완전한

이해를 통해 갈애를 제거하고, 칠각지의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를 소멸시켰음

을 말하고 있다. 번뇌를 제거하는 방식은 육근의 제어, 오온에 대한 완전한 앎,

칠각지의 수행을 언급해 볼 수 있겠다.

31) 번뇌의 소멸은 161G 등도 참조하라.

 

3) 삼명의 획득과 붓다의 가르침의 실현

삼명은 천안, 숙명, 누진을 말한다. 여기서 강조점은 번뇌의 소멸인 누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또 다

른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Nāgasamālatthera]

나는 탁발을 위해 [도시로] 들어갔다. 가면서 [화려하게] 장식된 좋은 옷

을 [입은] 그[무희]를 보았네. 마치 던져진 죽음의 올가미를 [보는 것]처럼.(Thera-g. 268G)

 

그로부터 나에게 작의[manasīkaro]가 올바르게 일어났다네. 재난[이라는

생각]이 명백해졌네. 혐오[의 마음이] 확립되었다네.(Thera-g. 269G)

 

그로부터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네. 보라, 가르침의 훌륭한 진리성을

(dhammasudhammataṃ). [나에게] 삼명이 획득되었고, 붓다의 가르침은

실현되었네.(Thera-g. 270G)32)

32) Meghiyatthera의 66G에서도 ‘삼명을 얻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현되었다.’는 게송이 나온다.
    Dhammasavatthera의 107G과 120세에 출가한 그의 부친의 108G에서도 ‘삼명을 얻고, 부처님의 가
    르침이 실현되었다.’는 선언이 이루어진다. vacchagottatthera의 112G, Yasatthera의 117G도 동일하
    다. Paccyatthera 224cd. 뒤이어 나오는 바구(Bhagu)존자의 273~274G, Candanatthera의 301~302G,
    Rājadattatthera의 318~319G, Sappadāsatthera의 409~410G, Sundarasamuddatthera의 464~
    465G도 동일하다.

 

[Rāhulatthera]

나의 모든 루(漏, 번뇌)들은 절멸되었고, 재생(punabbhavo)은 존재하지

않는다네. 나는 존경받을 만한 자[arahā], 공양받을 만한 자, 삼명[을 갖

춘] 자, 불사를 본 자라네.(Thera-g. 296G)

 

[Mettikātherī]

대의(saṅghāṭi)를 내려 놓고서, 그리고 발우를 엎어놓고서 나는 바위 위에

앉았네. 그 때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네. 삼명이 획득되었고, 붓다의 가르

침은 실현되었네.33)(Therī-g. 30G)

33) Aḍḍhakāsitherī, 26G도 동일하다.

 

라훌라 존자의 경우 삼명의 획득만 언급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불사는 대표적으로 궁극적인 깨달음을 나타내는 표현

이기도 하다. AN의 다음의 내용은 불사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분명히 보여주

고 있다.

 

아누룻다여, 그대는 ‘나는 세상에서 청정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눈

으로 천의 세계를 봅니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자만입니다. 아누룻다여,

그대는 ‘나는 힘써 정진하기 때문에 퇴전하지 않고, 사띠를 확립하여 잃

어버리지 않으며, 몸은 평안하여 격정이 없고, 마음은 집중되어 통일되

어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흥분입니다. 아누룻다여, 그대는 ‘그래

서 나는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였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것

은 회한입니다. 존자 아누룻다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생각을 버리고 이

러한 세 가지 생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고, 불사의 세계(amatāya

dhātuyā)로 마음을 집중하십시오.34)

34) AN. I, p.281. 전재성 역, 앙굿따라니까야 3,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p.358.

 

4)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Soṇakoḷivisatthera]

갈애의 소멸에 열중하는 자, 마음이 어리석지 않은 자는 [12]처의 발생을

보고서, 완전하게 마음이 해탈되었네.(sammā cittaṃ vimuccati) (641G)

 

[Mahākassapatthera]

위대한 성자(mahāmuni), 위대한 지자(mahāñāṇī)께서는 사념처를 목

(gīvā)으로 가진 자이며, 믿음을 손으로 가진 자이며, 지혜(paññā)를 머리

로 가진 자이네. 그는 늘 평안하다네.(1090G)

 

[Mahāpajāpatigotamītherī]

“[나는] 모든 고통을 꿰뚫어 알았고(pariññātaṃ), 원인인 갈애를 부수어

버렸다네.(visositā)

 

여덞 갈래의 길[팔정도, aṭṭhaṅgiko maggo]이 수행되었고, 나에 의해 [갈

애의] 소멸이 체득되었네.(nirodho phusito)”(Therī-g. 158G)35)

35) Vijayātherī는 사성제, 오력, [칠]각지, 팔정도를 최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uttamatthassa pattiyā)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171G). Kisāgotamītherī역시 사성제와 팔정도를 말한다.(215G).
    Sundarītherī(321G)의 게송에서도 바라문인 수자타(Sujāta)가 사성제의 가르침을 듣고 3일만에 삼
    명을 성취했음을 말하고 있다.

 

소나꼴리위사 장로는 12처의 관을 통해 온전한 심해탈을 성취했고, 마하까

사빠 장로는 사념처와 믿음과 지혜로 붓다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곧 사념처,

믿음, 지혜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해탈도임을 명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마

하빠자빠띠고따미 장로니의 경우는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 갈애를 소멸시

켰음을 노래하고 있다. Cālātherī와 Upacālātherī역시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

을 듣고 삼명을 획득하고, 붓다의 가르침이 실현되었음을 선언하게 된다.36)

36) Therī-g. 186~187G. ; 193~194G. Sāmaññakānitthera도 “불사의 획득을 위해 바르고 올곧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팔정도]을 닦는 사람은”(Thera-g. 35cd)이라고 해서, 팔정도가 불사를 획득하는 방법
    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 외에 Jentātherī는 7각지를 열반으로 이끄는 방법(maggā nibbainapattiyā)이

라고 읊고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을 붓다의 가르침대로 닦아서 최후신(antimoyaṃ

samussayo)을 성취했음을 붓다에게 사뢰는 장면이 나온다.37) Uttamātherī는 5

온, 12처, 18계의 가르침을 듣고 커다란 어둠(tamokhandha)을 깨뜨렸다는 게송

을 읊는다.38)

37) Therī-g. 22G ; 45G 
38) Therī-g. 44G. ; 69G ; 103G ; 170G

 

이상의 내용을 보면, 5온, 12, 18계의 가르침이 해탈도임이 명백해진다. 이들

법체계들은 분명 무아의 체득과 관련된 가르침들이다. 따라서 오온 등을 분명

하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아날라요는 “오

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떠나지 못하면, 고통으로부터의 완전

한 자유는 불가능하다” 39)고 말한다.

39) 아날라요 스님 저, 앞의 책, p.222. 아날라요는 이 책에서 오온에 관한 평정/무관심은 직접적으로
    깨달음으로 이끈다고 하며, 오온의 참된 본성에 대한 통찰력으로 깨달음에 이른 다양한 경증을 제
    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MN.III 20에는 오온의 가르침을 통해 60명의 비구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고, SN.III 68에는 붓다의 초전법륜을 통해 다섯 비구가 깨닫는데, 이 때 오온무아의 가르침
    이 설해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Th 87, 90, 120, 161, 369, 440 등의 게송을 소개하고 있다.

 

5) 깨달음의 기연성

기연(機緣)이란 깨달음의 인연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우연한 기회에 예기치 않게 깨달음이 찾아오는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임제선사와 정상좌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임제선사를 찾은

정(定)상좌가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사가 상좌를

멱살을 잡고 손으로 뺨을 한 대 후려치고는 바로 밀쳐버렸다. 정상좌가 멍하니

서 있자,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말했다. ‘정상좌, 선사께왜절을 올리지 않는가?’

정상좌가 임제선사께절을 하려는 그 순간 크게 깨달았다.40) 이와 같은 일화는

선불교전통에서는 매우 흔하다. 바로 이러한 기연성과 관련된 게송이 테라

가타와 테리가타에서도 적지 않다.

40) 원오극근, 벽암록, 서울 : 한국선문화연구원, 2006(정성본 역해), p.201

 

[Vītasokatthera]

‘나는 나의 머리를 깍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발사가 다가왔다.

그래서 거울을 들고서, 나는 [나의] 몸을 살펴보았다.

몸이 헛되게 보였다. [그 순간] 어둠과 무지가 사라졌다. 모든 옷들이 잘

렸고, 더 이상 재생은 존재하지 않는다.(Thera-g. 169G)41)

41) sabbe coḷā samucchinnā에서 옷의 의미인 coḷā는 번뇌를 의미한다. coḷā viyāti vā “coḷā”ti 
    laddhanāmā kilesā samucchinnā.

 

[Usabhatthera]

코끼리 등에서 내리자, 그 때 나는 염리심(saṃvegaṃ, 厭離心)을 얻었다.

우쭐하던 나는 그 때 고요해졌고, 나에 의해 온갖 번뇌의 소멸(āsavakkhayo)이

획득되었다.(Thera-g. 198cd)

코끼리목에 앉은 채 탁발을 하러 마을로 들어갔다가 코끼리에서 내리자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Sumaṅgalamātātherī]

‘치익치익’하는 [김빠지는 소리를 듣고] 나는 탐욕과 성냄을 완전히 버렸네.

저 나무 밑에 가서, ‘아, 행복하구나’라고 나는 행복한 선정에 들었네.(24G)

 

[Mettikātherī]

대의(saṅghāṭi)를 내려 놓고서, 그리고 발우를 엎어놓고서 나는 바위 위에

앉았네. 그 때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네. 삼명이 획득되었고, 붓다의 가르

침은 실현되었네.(Therī-g. 30G)

 

위따소까 장로는 몸의 무상함을 느끼는 순간 깨닫고, 우사바 장로는 코끼리

를 타고 탁발을 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코끼리에서 내리는 순간 깨닫는다.

그리고 수망갈라마따 장로니는 김빠지는 소리를 듣고는 깨달았다.42) 멧띠까

장로니는 바위에 걸터 앉으면서 깨닫게 된다.

42) 성적 욕망에 대한 욕구 때문에 괴로워하던(kāmarāgena aṭṭitā) Sīhātherī는 7년(satta vassāni)이나 헤
    매다가, 자살하기 위해 나무에 목을 매는 순간(pakkhipiṃ pāsaṃ gīvāyaṃ) 해탈을 성취한다.
    (Therī-g. 77~81G).

 

이러한 깨달음이 기연성은 수행이 무르익을 때로 익은 수행자에게 나타나

는 일종의 돈오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모든 깨달음을 성취한 수행

자는 이러한 경험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앞서 살펴본 무학의 깨달음의

선언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나의 마음은 부

동의 해탈을 얻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실현되었다.’ 등의 표현도 사실은 깨달

음의 기연성을 나타내는 표현들일 것이다.

 

2. SN. I, Sagāthāvagga의 내용

Sagāthāvagga는 상윳따니까야 제1권으로, 게송만을 주로 모은 경전이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와는 달리 악마 마라와의 대화나 코살라의 빠세나

디왕과의 대화 등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이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 가운데 먼저 깨달음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문부터

살펴보자.

 

1) 믿음의 중요성

가르침들이 잘 이해되고, 다른 가르침들에 기울지 않는 자들, 그들은 바

르게 깨닫고(sambuddhā) 완전하게 이해하고서(sammadaññā), 험난한 길

에서(visame) 평탄하게 거닌다네.(caranti)43)

43) SN.I, p.4 

 

위 경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이교의 가르침에

기울지 말고, 붓다의 가르침을 잘 이해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는 사실 믿음이 깨달음의 중요한 요소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고도 이해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경문도 있다.

 

그대들에게 불사의 문(amatassa dvārā)이 열렸으니(apārutā), 귀를 지닌 자

들은 [낡은] 믿음을 버려라.44)

44) SN.I, p.137. 

 

붓다가 범천 사함빠띠에게 선언하신 내용으로, 여기서 불사의 문은 해탈의

문, 깨달음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낡은] 믿음을 버리라는 것은 ‘다른

가르침에 기울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결국 믿음의

성취를 통해서만 불사의 문에 들어설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2) 깨달음의 방법과 번뇌의 소멸

아난다여, 여기에서 비구는 멀리 떠남에 의지하고(vivekanissitaṃ) 욕망

의 떠남에 의지하고(virāganissitaṃ), 소멸에 의지하고(nirodhanissitaṃ),

포기로 향하는(vossaggapariṇāmiṃ) 올바른 견해[正見]를 닦는다.45)

45) SN.I, p.88.

 

이후 올바른 사유(sammasaṅkhappaṃ), 올바른 말(sammāācaṃ), 올바른 행위

(sammākammantaṃ), 올바른 생활(sammāājīvaṃ), 올바른 정진(sammāvāyāmaṃ), 

올바른 알아차림(sammāsatiṃ), 올바른 집중(sammāsamādhiṃ)에 대한 내용이

동일한 방식을 기술되고 있다. 여기에서 팔정도는 명백하게 원리, 이욕, 소멸,

포기를 통해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계행과 삼매와 지혜를 닦아서, 나는 최상의 청정

을 획득했다.(SN. I, p.103.)

 

이 게송은 붓다가 악마 빠삐만에게 말씀하신 내용이다. 이 게송을 통해 깨달

음의 수단은 삼학임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계정혜 삼학을 갖추고, 사

띠를 확립하고, 선정을 즐기는 자는 일체의 슬픔을 떠나고 버려서 모든 번뇌를

끊고 최후의 몸(antimadeha)을 얻는다는 내용이 나온다.46) 결국 궁극적 깨달음

을 얻는 방식은 삼학과 사띠와 선정의 수행임을 알 수 있다.

46) SN. I, p.52, nadanasutta.

 

욕망(jālinī)과 갈망(visattikā)과 갈애(taṅhā)가 없는 자는 어디에도 이끌리

지 않는다네.

모든 집착(upadhi)을 부수었기에 깨달은 자(buddho)는 잠잔다네.47)

47) SN. I, p.107.

 

여기에서 깨달은 자란 욕망과 갈망, 갈애가 없으며, 모든 집착을 부순 자 즉

번뇌가 소멸된 자가 깨달은 자임을 알 수 있다.

 

IV. 결론

 

이상 초기경전에 나타난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에 대해 논자 나름의 관점에

서 살펴보았다. 먼저 사과설을 중심으로 깨달음의 내용을 고찰하였다.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성자계위는 10결의 번뇌와 각각 상응하는 바, 이를 토대

로 각 성인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그 특징을 정리해보고자 했다. 결과 예류와 

일래의 깨달음은 ‘믿음의 성취’를 특징으로 하고, 불환은 믿음의 성취를 기반

으로 한 욕탐과 분노의 부정적 정서로부터의 해탈을 깨달음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라한은 자아관념을 완전히 제거하고, 무명을 밝혀 완전

지를 통해 해탈한 자이며, 완전한 번뇌의 소멸을 통해 태어남을 파괴한 자이

다. 따라서 무아의 체득과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 대한 앎으로 깨달음을 정리해

보았다.

 

다음으로 3장에서는 운문경전 가운데 테라가타와 테리가타 그리고

Sagāthāvagga에 나타나는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우선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는 깨달음의 선언 혹은 표현을 3가지

로 정리했고, 깨달음을 획득한 방법과 기연성을 특징으로 기술해 보았다. 

 

깨달음의 선언                                                  깨달음의 방법                       특징

윤회의 파괴와 재생의 단절에 대한 선언          5온, 12처, 18계의 가르침     기연성

                                                                        칠각지

                                                                        사성제와 팔정도

                                                                        사념처

                                                                       믿음과 지혜

번뇌의 소멸에 대한 선언 

삼명의 획득과 붓다의 가르침이 실현되었다는 

선언                                                                                                                             

Sagāthāvagga의 경우는 믿음의 중요성과 번뇌의 소멸, 불사를 깨달음의 중

요 요소 및 선언의 내용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

으로는 삼학이 강조되고 있고, 사띠와 선정에 대한 내용이 붓다의 육성을 통해

제시되고 있음을 보았다. 용례가 하나 뿐이 제시되지 않아 아쉽지만,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초기불교 문헌, 특히 니까야속에서 발견되는 깨달음의 양상은

과정으로서의 깨달음은 믿음을 그 특징으로 하고, 궁극적 깨달음은 번뇌의 소

멸과 재생의 단절 및 태어남의 파괴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즉 ‘깨달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

가?’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깨달음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본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마지막으

로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전도선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도선언의 핵심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

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갖고서, [그들의] 이익

을 위하여, 천신과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48)에 있다고 생각된다. 결

국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60명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이 말씀이 깨달은 다

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간과된다면, 그 깨

달음은 궁극적 깨달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

48) Vin.I, p.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