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초기불교의 해오(解悟)/ 김준호

실론섬 2018. 8. 20. 13:09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4호(2018.3) pp. 1∼19

 

초기불교의 해오(解悟)

김준호/ 울산대

 

I. 시작하는 글

II. 해오(解悟)의 의미와 위상

III. 마치는 글

 

[요약문]

이 글은 선불교의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라는 깨달음의 구조를 초기불교에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이 중에서 해오를 채택하여 깨달음을 논의

한 것은 깨달음의 어원이 ‘알다’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앎/이해/사유/인식의 성격을 배제

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일상의 앎과 깨달음에 내재된 앎

의 성격 사이에는 어떤 점에서 동일과 차이가 드러나는 지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

러므로 해오(解悟)의 정의를 ‘이해를 통해 성취하는 깨달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해결

해야 할 논의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앎의 의미와 내용’, ‘앎의 수준과 능력’이 무엇인

지를 밝히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드러내는 것

이 논의의 핵심으로 보인다.

 

하나의 초점, 하나의 방향성을 의미하고 있는 관점/시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경

전의 서술은 해오의 문제를 드러내는 데 하나의 시사점이 된다고 보았다. 즉, 관점과 시

선이란 의미에서 유추되는 이해능력의 허점을 ‘그물’이라는 표현으로써 견해의 한계와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 <디가-니까야>의 범망경(梵網經)의 서술에 주목하였다. 앎/

 

이해는 관점과 시선의 형태로 감각대상을 보고 알기 때문에 ‘대상을 인지하고, 판단하

여, 해석하는 일련의 인식과정’은 실제의 경험현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온

전함의 결핍’이라는 한계를 떠안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었다.

 

일상의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과정에는 사유의 일면성과 다면성의 측면만이 아

니라, 관점과 견해에 감정이 개입되어 현실을 왜곡하는 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이는 니까야에서 선정 수행에 앞서 ‘감각기관의 수호’나 ‘싫어하여 벗

어나는 능력’(nibbida, 厭離)을 강조하는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지

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I. 시작하는 글

 

이 글은 선불교의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라는 깨달음의 구분을 초기불교

에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중에서 해오를 채택하여

깨달음을 논의한 것은 깨달음의 어원이 ‘알다’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앎/이해/

사유/인식의 성격을 우선적으로 논의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토대한

것이다.

 

빠알리어 사전에서는 깨달음의 팔리어 원어인 보디(bodhi)의 뜻을 ‘최고의

앎’(supreme knowledge), ‘이해’(enlightenment), ‘부처에 의해 달성된 앎’(the

knowledge possessed by Buddha) 등으로1) 풀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깨달음

은 ‘앎/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하나의 사실로서 확인할 수 있게 된

다. 일상적인 또는 세속적인 의미의 ‘앎/이해’와 구별되는 깨달음의 의미를 드

러내고자 ‘최고의’, ‘부처에 의해 달성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따름이

 

다. 이를 ‘부처가 이룩한 최고의 앎/이해’라는 말로 조합해보아도 깨달음은 여

전히 앎/이해라는 영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처가 성취한 깨달음을 논의할 경우, ‘이해에 의거한 깨달음의 측면/영역’을

먼저 설정할 필요가 생긴다. “초기불교의 해오”를 주제로 ‘깨달음이란 무엇인

가?’를 논할 경우 반드시 ‘이해’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1) Pali-English Dictionary (Rhys Davids & William Stede, PTS. 1986, p.491).

 

초기불교의 해오라는 주제에는 “석가모니는 무엇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을

까?”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 문제에 치중할수록 논의가 진전되지 못

하고 끝없이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깨달음의 내용 및 방법

으로 제시된 ‘연기, 사성제, 사선정, 구차제정’ 등의 의미와 가치를 먼저 면밀

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논의의 범위가 해탈/열반으로 확장

되면 논의의 폭은 끝없이 넓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산적이고 집중적인 논

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논의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는 “앎/이해와 깨달음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제한적

인 논의로 주제로 이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

 

II. 해오(解悟)의 의미와 위상

 

초기불전에서 해오(解悟)에 대응할 수 있는 말로는 ‘보기(dassana), 견해

(diṭṭhi), 이치에 따라 생각을 전개함(yoniso manasikāro, 如理作意), 제대로 알다

(pajānāti), 온전한 앎(sampajāna), 지혜(paññā/ñāṇa), 보다/관찰하다(passati/pacca-

vekkhati)등이 해당될 것이다. 또한 생각이나 사유를 의미하는 일련의 용어들

이(paṭisañcikkhati/cinti/vittaka/vicāra) 나타나는 문맥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오의 내용과 성격은 이 용어들이 등장하는 경문에서, 지견(智

見, ñāṇa-dassana)에 의거하여 자신을 향상시켜가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

/해탈/열반에 이르는 지점을 적절하게 포착하는 만큼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논의의 초점을 잡는 데는 이보다 먼저 공유되어야 할 것

이 있다. 곧, 해오解悟를 말할 때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지점을 제대로 드러내

는 것이다. 문제의 소재를 또렷이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 앎과 깨달음 사이

해오(解悟)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단어가 연결되어 있다. ‘이해’와 ‘깨달음’

이 그것이다. 따라서 해오를 말할 경우 이해와 깨달음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시선이 핵심이 된다. 이해라는 단어에도 두 가지 말이 붙어 있다. ‘[어떤 것에

내재되어 있는] 특정한 결/무늬/양식/양상/법칙성’[理]과 ‘[특정한 것/사실/사

건/상황/양상/의미와 가치 등을] 풀이/설명/앎’[解]이다. ‘이해(理解)’를 이렇게

풀어내는 것이2) 적절하다면, ‘이해’라는 말을 쓰는 순간 ‘앎[解]’과 ‘앎의 내용

[理]’ 둘이 동시에 거론되는 셈이다.

2) 이를테면 이해의 뜻을 ‘사리事理를 분별하여 앎’ 또는 ‘[말이나 글의 뜻을] 깨쳐 앎’으로 정의하거
   나(동아 새국어사전, 1990), 조금 더 풀어서 ‘진리나 이치를 터득하여 훤히 안다’ 또는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안다’로 정의하는(동아 새국어사전, 2004) 용례에 토대하여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

 

깨달음의 뜻을 사전적 정의로 풀어보든 해오에서 이해[解]의 뜻을 또 그렇

게 풀어보든, 두 경우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어가 바로 ‘앎’이라는 것은 부정

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서 논의의 초점을 ‘앎’으로 맞추는 것이

기본적인 접근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오의 정의를 ‘이해를 통해 성취

하는 깨달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해결해야 할 논의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앎의 의미와 내용’, ‘앎의 수준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드러내는 것이 논의의 핵심으로

보인다.

 

해오의 의미를 논의하기 위해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

다’라는 주장을 일단 세워두고 ‘사이’의 뜻에 내재된 의미를 몇 가지 단계를 거

쳐 검토하면서 논의의 초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앎과 깨달음 사이에는 수준차이가 있다고 전제해보자. 이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앎과 깨달음은 동일하지 않다’를3) 생각해보는 일에 해당한다

앞서 빠알리어 사전에 서술된 ‘최고의 앎’이라는 정의도 ‘최고의’란 수식어를

덧붙임으로써‘앎과 깨달음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메우려는 하나의 해석

일 뿐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나의 의미를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언어로

담아내야 하는 사전의 특성상 ‘최고의’라는 수식어를 채택한 사정을 감안할

수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 언어

를 확보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3) 최근 현응의 “깨달음은 이해다”라는 주장은 이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훤히, 제대로, 있는 그대로, 잘, 꿰뚫어, 완전한, 온전한’이라는 수식어를 덧

붙이는 경우는4)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게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나아

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럴듯한 수식어를 덧붙이면 언어적으로

는 수준의 차이가 생기겠지만, 그 언어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내용물을 확인하

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에 담겨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물의 파악에는 늘 그것을 보려는 이에 따라 각각의 해석

이 생겨나고, 의미/가치 있음의 영역은 또 그만큼 제각각 존재할 것이기 때문

이다. 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먼저 공유할 필요가 있다.

4) ‘알다’(jānāti)를 의미하는 단어들에 ‘pa-, pari-, vi-, ā-, abhi-’ 등의 접두어를 결합시켜 향상되어가는
   변화과정을 표현하거나 향상의 결과로 주어지는 어떤 경지를 표현하려는 경전의 글귀들도 바로
   이러한 간격을 메우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보다’(dassati, passati) 계열의 단어에
   도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12)연기, 사성제, 오온, 십이처 등을 아는 것’이라고 정

의해보면 어떨까? 실제로 이 서술은 “고타마는 무엇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는

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의 하나이다.5) 이처럼 깨달음의 내용을 연기(緣

起) 및 사성제(四聖諦), 오온/십이처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초기불교

의 깨달음을 해오(解悟)적 측면에서 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사선(四禪)・삼명(三明) 또는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의 수행을 성취한 

결과 도달하게 되는 어떤 특정한 경지로 깨달음을 파악하는 경우는 증오(證悟)

적 입장을 취하는 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5) 이를테면, 사제설(四諦說)을 깨달았다는 설과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깨달음으로써 붓다가 되었다
   는 설 그리고 사선(四禪)・삼명(三明)을 통해 깨달았다는 설(平川彰, 인도불교의 역사上, 이호근
   역, 민족사, 1989, pp.45~46)로 정리하거나, 사제와 십이연기와 같은 이법(理法)의 체달(體達)에 의
   했다는 것,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에 포함시킬 수 있는 도행(道行)의 수습(修習)에 의했
   다는 것,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사대(四大) 혹은 수(受)와 같은 물질적・정신적 현상의 올바른
   관찰에 의해 성도했다는 연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 (金龍煥, 「원시불교에 있어서 法思想의 전개」,
   人文論叢제37집(부산: 부산대 출판부, 1988), pp.158-159

 

연기 및 사성제, 오온/십이처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주장에는 깨달음의

이지적 측면을 중시하는 관점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 주장에 의거하여 앎과 깨

달음의 사이를 말할 수 있으려면 연기, 사성제, 오온, 십이처가 각각 무엇이고,

또 이들을 어떻게 알아야 제대로 아는 것인지가 논증되어야 하는 선결과제를

떠안게 된다. 게다가 충분히 논증되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 체달(體達), 올바

른 관찰’ 등의 서술을 ‘안다’라는 말로 등치해도 좋은가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앎과 깨달음 사이를 설명해주는 충분한 해법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사선・삼명 또는 삼십칠보리분법의 수행을 성취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증오(證悟)적 시각에도 동일한 논법이 적용 가능하다. 곧, 사선 등의 수

행법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내장되어 있기에 깨달음의 성취가 가능한 것인지

를 되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오와 증오 어느 쪽을 중시하더라

도 깨달음의 의미는 전통적인 교학의 용어를 우리말로 풀지 않고 그대로 나열

하는 방법으로는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2. 해오의 길, 증오의 길

1) 해오와 증오

해오와 증오의 관련성을 살펴보면서 해오의 의미와 성격을 다시 드러내보

자. 해오에는 이해라는 특성이 있고 증오에는 특별한 체험의 영역을 필수로 하

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한다면, 해오는 부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내장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교(敎)에 해당하고 증오는 특정의 명상 수

행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체험이 포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선(禪)에 배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팔정도에서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한 견해’(正見)와 ‘바르고 적절

하며 온전한 사유’(正思惟)는 해오에 해당하고,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하도록 

노력하여 나아감’(正精進),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하게 주의력을 일으킴’(正

念), ‘바르고 적절하며 온전하게 집중된 마음상태’(正定)는 증오에 해당한다고

보자. 이 전제가 타당하다면, 팔정도를 구성하는 각 요소가 순서 그대로 기초

에서 시작하여 완성으로 이어지는 직선형의 구조가 아니라 서로 맞물리고 보

완하는 원형의 융합구조라는 점을 인정하는 한 해오와 증오 사이에는 처음부

터 선후관계나 비교우위관계를 설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

서 어느 쪽이 중요하다고 보아야 할까? <앙굿따라-니까야> 「쭌다(Cunda)」경

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가늠할 수 있다.

 

“도반들이여, 여기 법에 열중하는(dhammayogā) 비구들은 선을 닦는

(jhāyī) 비구들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선을 닦는 자들이다. 우리

는 선정하는 자들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무엇

을 선정하고, 도대체 어떻게 선정하는가?’라고. 이 경우에는 법에 열중하

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선정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

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여기 선을 닦는 비구들은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을 비난합니

다. 이들은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자들

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경솔하고 거들먹거리고 촐랑대고 수다스럽고 산

만하게 말하고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muṭṭhassati) 분명하게 알아차

림이 없고(asampajānā) 집중되지 못하며(asamāhitā) 마음이 산란하고 감

각기능이 제어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무슨 법에 열중하

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법에 열중하고, 도대체 어떻게 법에 열중하는

가?’라고. 이 경우에는 선정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6)

6) A6:46, AN.III, pp.355-356.

 

마하쭌다 존자의 설법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 경문을 보면, 교법의 의미를 파

악하는 데 열중하는 있는 수행자 그룹과 선정을 닦는 수행자 그룹 사이에서 서

로가 자신들의 방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의 노선을 비난하고 있는 장면

이 나온다. 해오의 입장에 서 있는 수행자들이 상대편을 비판하는 요점은 ‘선

정을 닦는 길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로 보충하여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비난 속에는 선을 닦는 그룹에서 자신들의 수행 길에는 ‘특별

한 체험’이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논리적으로 알 수가 없다는 점을 반영한 것

으로 생각된다. 증오의 입장에 서 있는 수행자들은 상대편들에게서 발견되는

행동거지와 마음상태가 평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들어 수행 길이 아니라

고 비난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문에서 상대방의 수행 길을 비난하는 이유를 검토해보면, 이른바 교/

선, 돈/점, 해오/증오가 대립구도를 형성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상대 비판의

논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합리주의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라는 평행선

의 연원을 확인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용한 경문에 이어지는 서술에

서는 대립을 지양하고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불사(不死, amataṃ)의 경지(dhātuṃ)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 심오한 뜻을 지

닌 글귀를(gambhīraṃ atthapadaṃ) 지혜로써 꿰뚫어 보는 이러한 경이로

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르면, ‘불사의 경지’로 표현된 ‘초인적인 마음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측면에서 증오의 길을 존중해야 하며, 핵심을 짚어내기 어려운 교의(敎義)의

의미를 밝혀주는 탁월한 이해능력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해오의 길을 존중하

고 있어서 상호존중 및 소통의 필요성을 지향하고 있는 태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가敎家들이] 너무 가볍다.”거나 “[선가禪家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날선 비판 대신에, “[선가禪家들이 체험한 경지가] 무척

경이롭다.”거나 “[교가敎家들의 해석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존중의 정신

을 강조하는 설법은 매우 이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도 어렵다. 실제의 현장

에서는 그러한 상호존중 및 화해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에 가까

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禪)과 교(敎), 혹은 증오(證悟)와 해오(解悟) 중에

서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서 다른 쪽의 입장과 차별을 지으려는 태도가 보통

이며, 대개의 경우 그러한 차별의 모습은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일방적인 무시/

배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쉬울 것이다.

 

인용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곳은 특별한 경지에 도달한 체험의 영역과 경문

의 의미를 꿰뚫어보는 이해의 영역이 차이로써 존중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본

다. ‘특별한 경지에 도달한 체험의 영역’이 증오(證悟)의 측면이고, ‘경문의 의

미를 꿰뚫어보는 이해의 영역’이 해오(解悟)의 성격에 속하는 것임은 분명하

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체험의 의미와 경문의 의미를 밝혀내는 노력만큼 깨

달음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체험의 영역

이든 이해의 영역이든 그러한 특정의 체험과 이해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

를 제시할 과제가 양쪽에게 모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기존의 통념에 얽매이

지 않고, 교학의 용어로 교학을 치장하려는 태도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의 언어

/일상의 언어로 깨달음의 의미를 풀어보려는 시도7)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

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7) 이에 대해서는 “모르던 사실을 궁리 끝에 알게 되는 것으로 기존의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과정이
   수반되며 … 새로운 차원으로의 정신적 도약이 있어야 한다”라고 지적한 임승택의 설명(붓다와
   명상, p.99)이나, “앎을 규정하는 인식틀 자체를 아는 것/인식틀에의 매임을 벗어나는 앎 … 장애
   밖의 시선으로 장애를 발견/장애 내용을 확인하여 장애를 제거”라는 한자경의 설정(깨달음, 궁
   극인가 과정인가 「서문」, pp.19-22), 그리고 “개인적/사회적 삶의 오염과 상처들이 치유해야 할
   문제들이라면, 그 문제들을 불교적으로 치유하는 해법을 확보하여 그 해법의 효력만큼 문제를 풀
   어낸 것이 깨달음이다.”(박태원, 「깨달음 담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 불교평론제66호, p.160)
   등이 참고가 된다.

 

박태원의 의견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얻는다. 그에 따르면, 일상어로써 깨달

음의 의미를 온전하게 풀어내려는 시도는 ‘청년싯닷타가 붓다가 될 수 있었던

조건들에 관한 탐구’를 검토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 붓다의 네 가지 

성공요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글에서는 고타마의 수행과정을 종교화

된 시선으로만 바라볼 경우의 문제점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곧 붓다라는 특별

한 초인의 전설만을 강조하여, 깨달음이라는 사건을 저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

는 것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의 실존과는 접속하기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고타마 싯닷타의 어떤 선택과 성취가 붓다로의

변환을 가능하게 했는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8) 강조하고 있다.

8) 박태원, 「고타마 싯닷타는 어떻게 붓다가 되었나?」, 철학논총제88집 제2호(경산: 새한철학회,
   2017), pp.89-90 참조.

 

그의 관점에 따르면, 고타마 싯닷타가 붓다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성공요

인은 ‘이해/언어와 탈(脫)이해/탈(脫)언어의 차이 및 관계에 대한 개안’이다. 이

해/언어가 해오의 영역이고, 탈(脫)이해/탈(脫)언어는 증오의 영역에 해당시킬

수 있을 것인데, 이 두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어는 ‘언어’이다. 곧, 언어에

토대한 인간의 인지능력이9) 자신의 바깥을 향하여 전개되는 과정, 곧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이해능력/사유능력 확보의 길에서 ‘언어’는 중심을 이루고 있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언어는 바로 앎/이해/사유/해오/교(敎)의 영

역에 해당하는 핵심어라고 말할 수 있다.

9) 박태원은 이를 ‘언어인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태원, 위의 논문, pp.93-96 참조.

 

언어는 개념적 사유를 확대재생산하며 자신의 바깥에 있는 세계를 자기 방

식대로 이해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욕망

의 무한증폭의 길이 경쟁/폭력/배제의 가치를 따르게 함으로써 인간의 행복을

근원적으로 장애하고 있다는 진단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른바 언어에 토대한

인간의 사유능력은 배타적 욕망충족의 길과 공존적 욕망극복의 길 중에서 하

나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2) 해오의 한계와 그 너머

초기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해오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은 사성제가 제공하

는 관점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불안/불만족/

문제거리’[苦]가 ‘발생하는 원인과 조건들’[集]을 찾아내어 ‘온전한 해결’[滅]

을 ‘가능케 하는 방법의 확보와 실행’[道]이라는 발상에서 해오의 의미 한 자락

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멸도(滅道)를 ‘문제해결능력의 길’이라고 명

명하면, 고집(苦集)은 ‘상황판단능력’으로 부를 수 있으므로, 일상에서 경험하

는 대상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앎/이해

가 해오와 연결되는 지점에 해당되는 것이다. 문제해결능력에는 팔정도의 등

장에 따라 해오와 증오의 영역이 겹쳐 있지만, 상황판단능력은 문제점으로 드

러나는 원인과 조건을 알고 이해한다는 해오의 특성을 추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다시 ‘특정한 사실/사건/상황을 발생시킨 조건’[緣起]에 대한 이

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상에서 문제점이 발

생할 경우 상황판단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적절하게 가동시키는 길, 해오의

의미와 위상은 여기에서 우선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앞의 논의로 돌아가자. 언어에 토대한 인간의 사유능력을 욕망의 무한

증폭의 길을 가는 데 쓰느냐 아니면 배타적 욕망증폭을 위한 몸부림에서 자발

적으로 풀려나는 길을 가는 데 쓰느냐 하는 것은 두 갈래 사유의 길이라고 부

를 수 있을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제19경의 제목이 바로 두 갈래 사유의 경(Dvedhāvitakka-

sutta)이다. 이 경에서 붓다는 과거에 자신의 수행과정이라고 하면서 제자

들에게 설법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이 회고 장면에서 붓다는 ‘감각적 욕망

에 대한 사유’(kāmavitakka)가10) 나와 남을 해치고, 지혜를 억누르며, 열반을 멀

리하게 한다는 것을 성찰했던 경험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사유가 문제를 일으

키는 과정을 성찰하는 길을 통해 정반대의 길, 즉 “내가 하루 밤낮이라도 그러

한 것을 사유하고(anuvitakkeyyaṁ) 숙고하면(anuvicāreyyaṁ), 이를 원인으로 두

려움이 없어지는 것을 본다.”라는11) 서술이 등장한다. 이 두 갈래의 사유가 제

시하는 메시지는 사유능력을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할 경우 발생

하는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12)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해오의 영역과

맞물리는 지점인 것이다.

10) 경문에 따르면, 두 갈래 사유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kāmavitakka), 분노
    에 대한 사유(byāpādavitakka), 폭력에 대한 사유(vihiṃsāvitakka) 세 가지이다. 본문의 논술에서는
    편의상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kāmavitakka) 하나만을 들었다. - MN.Ⅰ,pp.114-115 참조.
11) MN.Ⅰ, p.116 ; 중아함경 제102 「念經」(大正藏 권1, p.589b).
12) 교학의 용어에 대입하면 사성제의 집제에 해당할 것이다.

 

두 갈래의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해능력/사유능력을 한쪽으

로 발휘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유익함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넘어서는 또 다른 근거를 찾을 수는 없을까?

 

관점(觀點)이란 말에서 하나의 시사점을 얻는다. ‘[보기는] 보되, [한] 점을

볼 뿐’이라는 뜻에 감추어진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의] 초

점을 [통해] 본다.’는 말로 풀어보아도 여전히 무게가 느껴진다. 하나의 선도

아니고, 면도 아니고, 게다가 입체적으로 본다는 선언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어떤 사실이나 문제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자신에

게 보이는 하나의 점을 펼쳐보는 일에 불과하다. 또는 이런 기준으로 보니까

잘 보이더라는 하나의 기술이나 경험을 터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선언이

되기도 한다.

 

시선(視線)이란 말에서 또 하나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보기는] 보되, [하

나의] 선을 볼 뿐’이라는 뜻에서 동일한 맥락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은 ‘방향’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위쪽이든 아

래쪽이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할 때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특정

한 방향성에 가치를 두어보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선이

바뀌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과 같은 주장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방향성을 또렷이 보여준다. 거꾸로 말하면 특

정한 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방향성만 제시할 뿐이라는 숨은 전제도 따라오게

된다.

 

관점과 시선이란 의미에서 유추되는 이해능력의 허점을 곰곰이 생각해보

면, <디가-니까야>의 제1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에서 왜 ‘그물’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견해의 한계와 위험성을 그토록 지적하고 있는지를 수긍하

게 된다. 곧 앎/이해는 관점과 시선의 형태로 감각대상을 보고 알기 때문에 ‘대

상을 인지하고, 판단하여, 해석하는 일련의 인식과정’은 ‘온전함의 결핍’이라

는 한계를 떠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앎/이해에 내재된 한계가 일면성에 있다면, 앎/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여

양면성 또는 다면성의 길로 확장시켜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대상의 성격에 따라 충분할 경우도 있겠지만, 만약 지금/여기 눈앞에 나

타난 대상이 복잡성과 변화무쌍함을 내장하고 있다면 앎/이해의 능력은 다시

무력함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이

지적하고 있듯, 물고기의 자유로운삶은 그물의 종류에 따라 제한되기도 하고,

보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범망경」의 전체 주체는 62견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정견(正見)

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서술의 순서를 따라가면서 그 구조

를 분석해보면 이 경전에서 제시하려는 뜻은 단순하지가 않다. 곧, 다른 종교

인이 삼보를 비방했을 때 적대감/분노/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있는 상황이 발

생한다면 첫 번째로 드러나는 문제는 감정에 휩싸인 마음상태 때문에 그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고 지적하

고 있기 때문이다.13) ‘사실을 사실대로 이해함’을 놓치는 지점을 강조하고 있

는 것, 이 경전 서술의 첫 번째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3) 경전의 서술에서 잘 드러나듯이, 다른 종교인이 삼보를 찬탄하는 경우에도 마음이 고양되어 다른
    종교인이 찬탄하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논지로
    적용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서술의 핵심어는 ‘여래를 사실 그대로 바르게 말하는 자

라고 할 수 있는 그 법들은 무엇인가’에 있다. 여기에는 ‘보기 힘들고, 깨닫기

힘들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14) 등의 주목할 만한 수식어가 덧붙여져

있고, 이 경전의 전체 주제로 알려져 있는 62견의 문제점 분석은 이어지는 서

술에서 등장한다. 부처의 법과 차별되는 지점을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마

지막 서술 단계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은 62견의 문제점이 감각접촉을 조건으

로 발생하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견해들의 문제

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경전의 서술이 마무리된다. 여기에

서 드러나는 부처의 메시지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해/사유의 능력을 온전하게 가동하여 ‘어디까지나 현실

속에서 발생한 경험현상을 실제 그대로 이해/사유하여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

하고 그것을 해결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4) DN.Ⅰ,p.12 “Atthi bhikkhave aññ’ eva dhammā gambhīrā duddasā duranubodhā santā 
    paṇītā atakkāvacara nipuṇā paṇḍita-vedanīyā …”.

 

범망경에 서술된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

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15)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는 뜻을

새겨보면 해오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곧,

앎/이해에 내재된 한계에는 정서적 장애의 측면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

이다. 또한 이 구절은 계율(戒律), 삼매(三昧), 숙명통(宿命通) 등을 닦아 이미 특

정의 경지를 체험한 여타의 수행자들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 다음에 나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래의 깨달음이 특정의 경지를 체득한 여타의

수행자와 어떤 점에서 차별되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

이다.

15) DN.Ⅰ,p.17 “… vedanānaṃ samudayañ ca atthagamañ ca assādañ ca ādīnavañ ca nissaraṇañ ca
    yathā-bhūtaṃ viditvā …”

 

이에 따르면, 지적 장애가 관점과 시선이라는 일면성에 제한된 것이라면 양

면성 및 다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통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겠지만, 느

낌에서 발생하는 감정/정서/충동은 또 하나의 무기력을 경험하게 만든다는 측

면에서 지적 장애의 새로운국면을 제기하고 있다. 경문에서 느낌의 발생과 소

멸을 그대로 아는 것과 그 느낌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맛, 재난, 벗어남’ 등을

제대로 아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느낌에서 발생하는

감정/정서/충동의 전개는 앎/이해/판단의 능력이 발휘되는 속도를 훨씬 능가

하는 순간발생의 속성이 매우 강렬하여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진단으로 비쳐

지기 때문이다.

 

관점과 시선으로 대상의 변화무쌍한 조건에 일일이 대처하기 어렵듯이, 특

정한 감각대상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굴곡은 매우 커서 그것이 발생하는 조건

과 경로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정체험으로써

마음이 이와 같은 감정의 굴곡을 감당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능력을 확보하는

길이 필요하게 된다. 바로 증오(證悟)가 요청되는 영역이다. 니까야에서 선정

수행에 앞서 ‘감각기관의 수호’나 ‘싫어하여 벗어나는 능력’(nibbida, 厭離)을

강조하는16)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16) 이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한 논술이 필요하겠지만, 증오에 대한 논의는 문제제기만으로 그친다.

 

III. 마치는 글

 

해오로써 깨달음을 논의하는 데는 이해/사유/인식의 영역에 해당하는 개념

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가 된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검토

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고 깨달음의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

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첫번째는 앎과 깨달음의 사이를 문제 삼았다. 그것은 깨달음이 어원적으로

‘앎’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간주한 데서 나온 발상이다.

두 번째는 선불교의 해오라는 용어를 빌어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을 논의한

것은 일상의 ‘앎/이해/인식/사유’에 내재된 문제점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맛

지마-니까야의 「두 갈래 사유의 경」과 디가-니까야의 「범망경」의 서술을 토대

로 하여 ‘앎/이해/인식/사유’ 행위가 ‘관점/시선/견해’의 결과로 나타나는 과정

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은 이유는 여기에서 연유한다. 관

점/시선에 내재된 문제점은 특정한 하나의 견해를 채택하게 될 때 그것이 실제

의 경험현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순간에 있다는 측면을 드러내었다. 이

를 통해 깨달음은 현실경험의 너머의 그 무엇을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현상을 통해 그 경험현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초

기불교의 깨달음의 성격을 말할 수 있다는 점도 제시하였다.

 

세 번째는 일상의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과정에는 사유의 일면성과 다

면성의 측면만이 아니라, 관점과 견해에 감정이 개입되어 현실을 왜곡하는 순

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이는 니까야에서 선정 수행에 앞

서 ‘감각기관의 수호’나 ‘싫어하여 벗어나는 능력’(nibbida, 厭離)을 강조하는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