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 제61집(2021.4), 97~120쪽
바비베까의 비-채식주의*
__고기를 먹는 행위가 살생을 야기하는가, 고기 먹기를 원하는
행위가 살생을 야기하는가?__
함형석/전남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hamhs@chonnam.ac.kr
I 서론
II 바비베카 '비-채식주의' 논의의 콘텍스트와 그 내용
III 육식은 살생을 조장하는가?
IV 결론
[요약문]
본고는 바비베까(Bhāviveka, 500-570 CE)의 저작 중관심론』(Madhy-amakahṛdayakārikā)과 그에 대한 주석 『이성의 불꽃』(Tarkajvālā)의 아홉 번 째 챕터인 「미망사장」(Mīmāṃsātattvanirṇayāvatāra)에 등장하는 비-채식주의(non-vegetarianism) 논의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6세기 중관논사인 바비베까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trikoṭiśuddha)고기에 대한 섭취를 허용하는 율장의 육식관련 규정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바비베까는 또한 육식은 필연적으로 살생을 야기하거나 조장한다는 반론자에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 육식과 살생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였을 때 발생하게 되는 불합리한 결론(prasaṅga)들을 나열하여 육식이 아니라 육식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살생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비록 바비베까가 그가 상대하였던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이 확정적이지 않음을 보여 채식주의를 불교도들의 식사규칙으로 삼을 것에 반대하고는 있지만, 그가 문제 삼지 않는 육식행위는 승려의 탁발행위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논의를 육식을 옹호하는 보편적인 논리로 확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 본고는 2021년 3월 27일 개최된 인도철학회 춘계학술대회(“인도철학과 불교에서 바라본 자연과 인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학술대회이후 김성철(금강대학교) 선생님과 방정란(大正大学) 선생님께서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번역과 관련하여 귀중한 제언을 전해주셨고, 본고는 두 분 선생님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감사드린다.
I. 서론
붓다의 일생에 관한 에피소드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식사장면을 든다면, 아마도 그것은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기 직전에 행한 우유죽 식사와 붓다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공양 받은 돼지고기 식사일 것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우유죽 식사의 경우, 불교적 사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도”(中道)라는 개념을 실천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공만식(2018, 87)이 지적하고 있듯, 싯다르타가 “수자따(Sujātā)로부터 한 그릇의 죽을 받아먹었다는 사실은 음식에 관한 고행주의적 수행 원칙을 위반한 행위였으며, 이것은 또한 붓다의 음식에 대한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우유죽을 받아먹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그는 음식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통찰을 얻어 동료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무릅쓰고 식사를 감행했던 것일까? 아쉬바고사 (*śvaghoṣa,80-150 CE)는 「붓다의 행적」(Buddhacarita)에서 싯다르타가 음식을 먹기로 결심하기 전에 했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배고픔, 목마름, 피로로 지쳐있는 자, 피로로 인해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자, 불만족스러운 자가 어떻게 마음에 의해 얻어져야 하는 결과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 평온함은 언제나 감관을 만족시키는 것으로부터 제대로 얻어진다. 만족된 감관의 상태에 의해 마음의 건강함이 얻어진다. 건강하고 안정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삼매가 발생한다. 삼매를 갖춘 마음을 가진 자에게 선정수행이 시작된다. 선정이 진전되는 것에 의해 [수행자는] 얻기 힘든 최고의 상태,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는 그 상태에 도달하게 해주는 다르마들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 길은 음식을 근본으로 한다.”라고 하는 확신이 들었다. 무한한 지력을 가진 결기에 찬 [싯다르타는] 음식을 먹기로 마음을 먹었다.1)
1) Buddhacarita 12.103-107 (Olivelle 2008, 362-364): “kṣutpipāsāśramaklāntaḥ
śramād asvasthamānasaḥ/ prāpnuyān manasāvāpyaṃ phalaṃ katham
anirvṛtaḥ// nirvṛtiḥ prāpyate samyak satatendriyatarpaṇāt/
saṃtarpitendriyatayā manaḥsvāsthyam avāpyate//
svasthaprasannamanasaḥ samādhir upapadyate/ samādhiyuktacittasya
dhyānayogaḥ pravartate// dhyānapravartanād dharmāḥ prāpyante yair
avāpyate/ durlabhaṃ śāntam ajaraṃ paraṃ tad amṛtaṃ padam// tasmād
āhāramūlo ’yam upāya iti niścayaḥ/ āhārakaraṇe dhīraḥ kṛtvāmitamatir
matim//”
싯다르타가 음식을 먹기 전 한 생각의 핵심은 한 문장의 결론에 담겨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음식을 근본으로 한” (tasmādāhāramūlo ’yam upāyaḥ). 이 늙음과 죽음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길(upāya)은 선정(dhyāna)으로 항해하는 길이고, 선정은 정신을 집중(samādhi)해야 이룰 수 있으며, 정신집중은 평온(prasanna)하고도 마음이 건강(svāsthya)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은 건강해지는가? 몸이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피로에 시달리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싯다르타는밥을 먹으면 늙고 죽지 않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유죽을 섭취하였다.
이와 같은 음식섭취를 근본으로 하여 자신의 목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데, 그것을 내가 왜 두려워하는가?” …
“나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극도로 야윈 몸으로 그런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 나는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으리라.’
악기웻사나여, 그런 나는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었다.”2)
2) 「맛지마니까야: 중간 길이로 설하신 경 2」 (대림스님 2012, 181).
이 인용문에서 싯다르타는 마치 극단적 고행주의와 감각적 욕망 추구 사이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며 느끼는 두려움을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상태를 “행복”(sukha)이라 표현하는 그에게는 두려운 감정 보다 오히려 설렘이 느껴지는 듯하다. 싯다르타가 그 설렘의 감정 속에서 내린 음식을 섭취하기로 한 결심은 “생존”에의 필요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 음식을 적극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음식에 대한 자신감은 식사를 통해 발생하는 힘이 감각적 과잉과도 윤리적 파탄과도 상관없는 상태로 자신을 이끌 것이라는 확신에 기반하고 있다.
자신을 공양하기 위해 생명체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혹은 그러한 사실이 의심되지 않는다면 승려는 그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trikoṭiśuddha) 고기를 섭취할 수 있다는 율장의 규정은 초기 승가에서 육식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들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대승열반경」 그리고 「능가경」과 같은 일군의 대승경전들은 이와 같은 조건적으로 육식을 허용한 승단의 식사규칙을 비판하고 재해석하여 ‘채식주의’ 혹은 ‘전면적인 육식 금지 규칙’을 불교 전통에 도입한다.3)
3) Ruegg(1980), 시모다(2018[1997]), 495-529, Ham(2019)등의 연구를 참조할 것.
본고는 이와 같은 채식주의적 경향성을 지니고 있는 대승경전들의 주장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채식주의를 승단의 식사규칙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했던 6세기의 논사 바비베까(Bhāviveka,500-570)의 주장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비-채식주의”라 불릴 수 있는 바비베까의 논의의 맥락과 내용을 살펴본 후, 육식이 결과적으로 살생을 야기한다는 비-불교 혹은 불교 채식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에 대한 바비베까의 의견을 고찰해본다. 이를 통해, 그의 의견이 음식은 배고픔을 없애는 ‘수단’(upāya)일 뿐이고, 음식의 섭취는 살생과 같은 ‘해로운 법’(不善法)과도 관련이 없다고 하는 붓다의 태도에 공명하고 있음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Ⅱ. 바비베까 ‘비-채식주의’ 논의의 콘텍스트와 그 내용
바비베까의 채식주의 관련 논의는 그의 주저 「중관심론」(Madhyamakahṛdaya; MHK)의 아홉 번째 챕터인 「미망사장」
(Mīmāṃsātattvanirṇayāvatāra)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총 16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미망사장」 가운데 7개의 게송(MHK9.132-138)을 구성한다. 「미망사장」은 바라문들의 성전인 베다(Veda)를 옹호하는 ‘베다의 저자 부재’(vedāpauruṣeyatva)나 ‘언어의 영원성’(śabdanityatva)와 같은 미망사학파(Mīmāṃsā) 특유의 학설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지만, 과반수인 93개의 게송(MHK9.59-151)이 미망사학파와 관련 없는 듯한 창조신의 문제, 식물의 지각성, 종교적 목욕과 업의 관계 등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어 과연 해당 챕터가 미망사학파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챕터이다. 하지만 미망사학파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논의들도 뿌라나(purāṇa) 문헌군 그리고 「마하바라따」(Mahābhārata) 등의 소위 ‘다섯 번째 베다’(the fifth Veda)라 불리는 문헌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미망사장」을 하나의 챕터로 이해할 경우, 이는 미망사학파를 필두로 베다를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바라문들을 그 비판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바비베까는 「미망사장」의 고행주의의 무용성을 논하는 섹션(MHK 9.127-138)에서 채식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우선 브라흐마(Brahmā)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를 비판한 뒤(127-128), 음식과 물의 섭취를 중단하는 행위가 수행자로 하여금 천상에 이를 수 있게 해주지 않음을 논하고(129),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에 단식이 어떠한 복덕도 발생시키지 않음을 지적한다(130-131). 이와 같이 바라문들의 고행방식을 비판하는 바비베까의 논조는 132번 게송에서 급작스럽게 불교도들의 육식을 변호하는 수세적인 자세로 전환되는데, 「중관심론」에 대한 자주인 「이성의 불꽃」(Tarkajvālā)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은 다음과 같은 반론자의 비판을 마주하면서 이루어진다.
[반론자가] 여기서 말한다. 불교도들은 “이와 같이 우리는 법에 머문다”고 생각하면서 남들을 욕하고 저주한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 고기를 먹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지각있는 중생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서는 고기를 구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비심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동물을 사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 짓는 자들이다.4)
4) Tarkajvālā D309a1-2: “'dir smras pa. sangs rgyas pa ni 'di ltar bdag nyid
chos la gnas pa yin no snyam du sems shing, gzhan la kha zer zhing
dmod par byed kyang, rang nyid sha za ba la 'bad pa cher byed par
grags la. sems can srog ma bcad par ni sha rnyed par mi 'gyur bas, des
na snying rje dang bral ba yin pa'i phyir, ri dwags1 kyi rngon pa la sogs
pa bzhin du sdig pa byed pa nyid yin no zhe na.” (1 dags에서 교정)
본 반론이 제기되는 맥락을 고려할 때 반론자의 주장은 「마하바라따」에 기반하고 있으며,5) 이 후 논의를 살펴보면, 바비베까는 특히 Alsdorf(2010, 34)가 “아힘사와 채식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상세한 논의가 위치하고 있다”고 특정한 「마하바라따」 13권114-117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5) 인용문에 제시된 반론자의 의견을 소개하기 직전 바비베까는 고행주의과
관련된 「마하바라따」의 모순된 진술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비판한다. cf.
Tarkajvālā D308a5: “[고행을 통해 복덕이 쌓인다는 당신의 주장은 당신이
따르는] 「마하바라따」등의 경전에 다음과 같이 앞뒤가 모순된 채 제시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도 옳지 않다.”(rgyas byed la sogs pa’i lung las ’di ltar
snga phyi ’gal ba yang yod pas rigs pa ma yin te.)
위 반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육식과 살생 간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일곱 개의 게송에서 바비베까는 그 주장을 포함한 채식주의자들의 다양한 반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MHK 9.132: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고기를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체액 등으로 변할[뿐]이기 때문이다. 탁발한 음식[을 먹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6)
MHK 9.133: 고기를 먹는 것은 악행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7) 배고픔을 없애주는 원인일[뿐]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얻게 된 음식처럼.8)
MHK 9.134: 고기가 불결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면, [당신의] 몸을 한 번 생각해보라. 그것은 정액에 기인하고 [자궁 속에서] 길러진 것이기 때문이다.9) 똥을 먹고사는 벌레처럼.10)
MHK 9.135: 정액에서 생겨났다는 이유로 생선 [먹는 것]이 비난 받는 것은 [당신이] 버터와 우유 등을 [사용한다는] 이유 때문에 결정적이지 않다.11)
MHK 9.136: [살생이] 그것(=육식) 때문에 일어났기에 고기를 먹는 자는 생명을 해치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당신과 같이] 사슴 가죽을 입고 있는 자들[의 사례들] 때문에, 그 이유는 결정적이지 않다.12)
MHK 9.137: 고기를 먹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 [먹을] 때에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진주와 공작새의 꼬리털, 혹은 곡식과 물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3)
MHK 9.138: 육식은 성욕의 원인이 아니다. 그것은 분별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풀[만] 먹는 소의 예에서 보듯, 그것(=육식) 없이도 그것(=성욕)은 발생하기 때문이다.14)
6) MHKK 9.132: “trikoṭiśuddhaṃ yan māṃsaṃ na tad bhakṣitam enase/
rasādipariṇāmitvād bhaikṣānnaṃ na yathainase//”
7) 이는 MHK 9.133 전반게에 대한 티벳역(“gang yang sha ni zos pa yis/ sdig
pa’i rgyur ni mi ’gyur te/”)과 Tarkajvālā의 설명(“de zos bas sdig pa’i
rgyur mi ’gyur zhes bya ba ni chos so.”; D309a7)을 따라 번역한 것이다.
산스크리트 텍스트를 그대로 번역한다면, Lindtner (2001b, 46)과 같이: “악한
의도에서 고기를 먹는 것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It is not from an evil
motive that one is inclined to eat meat …)라고 번역해야 한다.
8) MHKK 9.133: “na māṃsabhakṣaṇaṃ bhoktum bhujyate pāpakāraṇāt1/
kṣutpratīkārahetutvād yadṛcchāgatabhaktavat//”(1 ’pāpakāraṇāt에서 교정.
MHKL 역시 이를 “’pāpakāraṇāt”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문두에 “na”가 있기
때문에, 그 경우 본 문장을“악하지 않은 의도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아니다”라 해석해야 한다. 가와사키는 티벳역에 근거하여 “’”(avagraha)를
삽입한다고 하였지만, 티벳역(위의 각주 참조)에도 한 번의 부정(mi
’gyur)만이 표시되어 있다.)
9) cf. Tarkajvālā D309b6-7: “이 몸은 불결한 정액에 기반하고 똥과 구토로
이루어진 액체에 덮여 있다가 자궁 속에서 태어난다.” (mi gtsang ba’i khu
bas nye bar rten cing phyi sa dang ngan skyugs kyi dangs mas g.yogs
nas mngal gyi nang nas byung ba’i lus ’di …)
10) MHKK 9.134: “aśucitvād abhakṣyaṃ cen māṃsaṃ kāyo ’pi cintyatām/
bījasthānād upastambhād aśuciviṭkṛmir1 yathā//” (1 aśuciviṭkrimir에서
교정. cf. MHKL aśucir viṭkṛmir.)
11) MHKK 9.135: “śukrādisambhavād eva matsyamāṃsaṃ vigarhitam/ taṃ
ghṛtakṣīrādihetoḥ1 syād evaṃ vyabhicāritā//” (1 ghṛtakṣīrādir hetoḥ에서
교정. cf. MHKL dhṛtakṣīrādihetoḥ.)
12) MHKK 9.136: “māṃsādaḥ prāṇighātī cet tannimittatvato mataḥ/
ajinādidharair hetoḥ syād evaṃ vyabhicāritā//”
13) MHKK 9.137: “na māṃsabhakṣaṇaṃ duṣṭaṃ tadānīṃ prāṇyaduḥkhanāt/
muktābarhikalāpāditaṇḍulāmbūpayogavat1//” (1 muktābarhikalāpādi
taṇḍulāmbūpayogavat에서 교정. cf. MHKL
muktābarhikalāpāditaṇḍulāmbūpayogavat.)
14) MHKK 9.138: “saṃkalpajatvād rāgasya na hetur māṃsabhakṣaṇam/ tad
vināpi1 tadupatter gavām iva tṛṇāśinām//” (1 tadvināpi에서 교정.)
이와 같은 바비베까의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은 기본적으로 무차별적인 육식을 정당화하는 논의가 아니다. 바비베까는 상대방의 주장이 불합리함을 지적하고 있을 뿐, 육식의 긍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식으로, 혹은 채식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식으로 불교도들의 육식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비베까의 채식(혹은 육식)관련 논의는 “육식주의” 혹은 “반-채식주의”(anti-vegetarianism)라기보다는, 반론자가 음식을 고기와 채소로 나눈 뒤 고기의 섭취를 금지시키기 위해 혹은 비난하기 위해 제기하는 주장에는 논리적인 무리가 따른다는 점을 단순히 확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비-채식주의”(non-vegetarianism)라 할 수 있다. 그는 고기가 불결하다는 반론자에 대해 그것이 청결한 음식이라 대응하지 않고 그것을 섭취하는 인간의 신체 역시 고기만큼이나 불결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가죽 옷을 입는 자가 과연 고기 먹는 자를 비판할 자격이 있냐는 식으로 육식을 옹호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제시하는 주장을 어떠한 이유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를 논증하는데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주장과 관계없이 육식에 대해 바비베까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비베까가 ‘비-채식주의’ 논의를 시작하면서 선언하고 있다시피,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고기를 섭취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논의를 마무리 지으며 바비베까가 주석서인 「이성의 불꽃」에서 인용하고 있는 두 게송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보거나 듣거나 의심하는 것으로 어떤 이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고기를 그 사람이 먹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을 먹어야 한다.15)
15) Tarkajvālā D311a2: “mthong dang thos dang dogs pa yis/ gang gi ched
du byas shes pa’i/ sha de de yis bza’ mi bya/ de las gzhan gang yin des
bza’/”
맛에 대한 탐착, 살생, 그리고 잔인하게 굴려는 의도가 없이 고기를 먹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 [다른] 미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16)
16) Tarkajvālā D311a2-3: “ro chag ’tshol dang gsod pa dang/ snying rje med
pa’i bsam spangs nas/ sha ni zos par gyur na yang/ skyon bcas ma yin
zas mchog bzhin/”
바비베까가 인용한 이 두 게송은 육식에 대한 그의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한 행위의 윤리적인 성격을 겉으로 드러나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촉발시킨 의도에서 찾는 불교의 기본적인 태도에 준하여 바비베까는 생명체를 괴롭히거나 죽이려는 의도 혹은 한 생명체의 맛에 집착하여 그것을 먹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고기를 섭취한 것이 아니라면 육식을 악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섭취하는 고기가 자신을 위해서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자신을 위해 생명체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 수 없었다면, 고기 음식을 장만하기위해 벌어졌을 살생의 악업이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Ⅲ. 육식은 살생을 조장하는가?
바비베까의 육식관은 일견 육식문제를 순전히 개인적인 ‘업-짓기’(karman)의 관점에서만 바라봄으로써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논의는 육식을 하는 한 개인이 고기를 먹음으로써 악업을 짓게 되는지 아닌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식하는 자가 자신이 먹는 고기가 자신을 위해 희생된 생명체의 육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살생의 과보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초기불교의 육식관을 지지하는 행위는 상당히 납득하기 힘든 의견이다. 고기를 소비하는 행위가 고기를 유통시키는 시장을 형성시키며, 고기 매매량의 증가는 대규모의 살생을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류의 유통을 위해 생명체를 죽이는 행위로부터 발생하는 윤리적 책임이 소비자에게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바비베까의 반론자가 애초에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살생 없이 고기를 구할 수 없기에 불교도들의 육식은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하바라따」는 고기의 유통망 속에서 도살자, 소비자, 취식자 모두 살생의 악업을 짓는다고 선언한다.
소비자는 돈으로 죽이고, 취식자는 먹어서 죽이고, 도살자는 묶고때려서 죽인다. 이것이 세 종류의 살생이다.17)
17) Mahābhārata 13.116.38: “dhanena krāyako hanti khādakaś
copabhogataḥ/ ghātako vandhabandhābhyām ity eṣa trividho vadhaḥ//”
육식을 금지하는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능가경」은 더 나아가 대부분의 살생이 육식 때문에 발생하며 이에 따라 육식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하마띠여! 만약 그 누구도 어떠한 방식으로도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다면, [먹기 위한] 이유로 [동물들을] 죽이지 않게 될 것이다. 마하마띠여! 참으로 죄 없는 생명들이 대부분 돈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있구나. 그 외의 다른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18)
18) Lāṅkāvatārasūtra 252:15-254:1: “yadi ca mahāmate māṃsaṃ na
kathaṃcana kecana bhakṣayeyuḥ, na tannidānaṃ ghāteran. mūlyahetor
hi mahāmate prāyaḥ prāṇino niraparādhino vadhyante, svalpād
anyahetoḥ.”
세 가지 「능가경」 한역 경전 가운데 하나인 「入楞伽經」은 해당 부분을 다음과 같이 풀어써서 위의 인용문에서는 표면화되지 않은 논리를 드러내 보인다: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곳곳을 찾아가 [고기를] 산다.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자들은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판매하기에 [그들은 고기를] 사는 사람들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고기를] 사는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막아버린다.”19)
19) 「入楞伽經」(T671) 563b5-7: “由人食肉, 若無可食, 處處求買. 爲財利者, 殺以販
賣. 爲買者殺. 是故買者與殺無異. 是故食肉能障聖道.”
고기를 먹는 행위는 고기를 구매하는 행위를 야기하고, 고기를 구매하는 행위는 고기를 판매하는 행위를 발생시키며, 결국 고기를 매매하는 행위는 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촉발시키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자는, 아니 더 나아가 육류 유통망 속의 모든 행위자들은 생명을 살해하는 것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을 똑같이 져야 한다는 논리는20) 너무나 자명해 보여서 바비베까가 이에 대해 “사슴 가죽 옷을 입는 자들은 그런 주장을 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대응한 것은 너무나 안일한 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설령 사슴 가죽 옷을 입는 고행주의적 바라문들이 살생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는 해도, 육식을 하는 본인 역시 육류 유통망 속의 한 행위자로서 살생과정에 연루되어 있다는 그들의 지적은 여전히타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0) 「마누법전」은 육식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살생의 죄를 묻고 있다. cf.
Manusmṛti 5.51 (Olivelle 2005:567): “허가하는 자, 도축하는 자, 도살하는
자, 사고 파는 자, 요리하는 자, 서빙하는 자, 먹는 자, 이들 모두가 살생하는
자들이다.” (anumantā viśasitā nihantā krayavikrayī/ saṃskartā
copahartā ca khādakaś ceti ghātakāḥ//)
「이성의 불꽃」은 해당 게송(MHK 9.136)의 기본적인 의미를 풀이한 뒤, 육식과 살생을 인과관계로만 이해할 경우 많은 난점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 경고하고는 열 한 개의 게송을 덧붙이고 있다. 이들 게송은 산스크리트 본에는 실려 있지 않아 가와사키(Kawasaki 1992b)가 “Extra Tibetan verses”라고 부르는 게송들이며, 대응하는 산스크리트 텍스트도 없거니와 주석이 전혀 부가되어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21) 하지만 필자에게 이해가 되는 몇몇 게송들만을 살펴보아도 바비베까가 이야기하는 육식과 살생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경우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결론”(thal ’gyur, prasaṅga)들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21) 가와사키(川崎 1985, 183-184)는 본 게송들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시범적으로 모든 게송을 일역하고 있다. Schmithausen(2020)
pp. 155-156 역시 본 게송군의 난해함을 지적하고 그 가운데 몇몇 게송들
(Extra Tibetan verses 57, 60, 61, 62, 63)을 독역하고 있다. 필자가 아래 제
시하고 있는 번역들 역시 확정적이지 않다. 다만, 필자의 번역이 본 게송들에
대한 하나의 이해를 제시하여 보다 정확한 이해의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필
자가 원고를 작성하는 도중 Schmithausen(2020)을 보내주신 카타오카(片岡
啓, Kyushu University) 교수께 감사드린다.
1. 정원, 우물, 연못. 그곳에서 육신을 가진 자가 죽게 되면, [그것이 죽는] 행위자의 감관 영역이기 때문에, 그곳에 이 [죽음의] 잘못이 있게 된다.22)
22) MHKK Extra Tib. 60: “kun dga’ ra ba khron pa rdzing/ der ni lus can shi
gyur na/ byed pa’i skye mched yin pa’i phyir/ de la skyon ’di yod par
’gyur//”
2. 죽임당하는 자가 있어 죽임이 있다. [죽임당하는 자가] 없다면, [그것은 죽임이] 아니다. 따라서 죽임당하는 자와 죽이는 자 둘 다 똑같이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23)
23) MHKK Extra Tib. 61: “gsad bya yod pas gsod yod kyi1/ gang phyir med na
ma yin no/ des na gsad bya gsod pa gnyis/ sdig pa mnyam par ’thob2
par ’gyur//” (1 kyis에서 교정, cf. Tarkajvālā D310a6; 2 thob에서 교정, cf.
D310a6)
이 두 게송에서 바비베까는 한 사건을 구성하는 모든 조건이 사건 발생에 책임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견지하였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들을 보여준다. 만약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모든 조건들에게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죽음이 일어나는 장소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 두 게송은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반론자가 살생의 조건으로 상정하는 육식의 사례에 확장한다.
3. 보기, 듣기, 들기, 만지기, 기억하기 등의 행위를 고기에 대해서 하게 된다 하더라도, [행위자는 살생이라는] 악행과 관련되게 될 것이다.24)
24) MHKK Extra Tib. 62: “mthong dang thos dang bsnams pa dang/ reg dang
dran pa nyid dang ni/ sha la1 byas na’ang chos min ’brel/ ’di lta bur ni
’gyur ba yin//” (1 las에서 교정, cf. Tarkajvālā D310a7)
4.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밝게 비춰주는 태양과 [고기 먹는 자가] 태어나게 해준 조상들,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고기 먹는 자를] 보호해주는 왕. 이들 모두가 [살생이라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이다.25)
25) MHKK Extra Tib. 63: “gsal bar byed pa’i nyi ma dang/ skye ba’i rgyu yi
pha dag dang/ skyong bar byed pa’i mi bdag rnams/ de rnams sdig pa’i
byed po nyid//”
바비베까는 우선 먹는 행위가 고기와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이듯 고기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보고 듣는 것과 같은 다른 행위들 역시 고기와 관계 맺는 방식이고, 반론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살생과 관련되어 있다고 결론내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고기를 먹는 행위가 살생의 악업을 짓는 행위와 마찬가지라면, 육식의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는 태양, 조상, 그리고 왕도 살생에 동참하고 있다고 간주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바비베까의 논의는 일견 말도 안되는 궤변처럼 들리며, 중관논사(Mādhyamika)로서 ‘육식’과 ‘살생’에 연루되어 있는 윤리적 책임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취하는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26) 하지만 다음의 게송을 보면, 바비베까가 육식과 살생 간의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에 따르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제시하는 까닭은 단순히 육식과 살생 간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 읽힌다.
26) Schmithausen(2020), p. 157 참조.
5. [가죽] 옷을 만드는 등의 행위를 하고 [고기를] 먹는 것도 이성적이지 않다. [살생의] 잘못이 두 배가 되기 때문이다. [가죽옷을 만들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27)
27) MHKK Extra Tib. 64: “gos byed pa yi ltar byas nas1/ zas kyi bya ba’ang
mi rigs te/ gang phyir skyon ni gnyis ’byung ba/ ma zos pa la ma yin
te/” (1 na에서 교정, cf. Tarkajvālā D310b1)
6. 만약 [살생에 대한] 다른 원인이 가진 [윤리적] 잘못을 당신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른 [원인]에 의해 살생을 하게 되는 악행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28)
28) MHKK Extra Tib. 66: “gal te gzhan gyi rgyu mtshan gyi/ skyon de khyod
ni mi ’dod na/ gzhan gyis bsad par gyur pa yi/ sdig de spyod pa1 ga la
’ong/” (1 la에서 교정, cf. Tarkajvālā D310b2)
7. [육식은 고기 먹는 자에게] 비-악업을 부여하기에, 즉, [악업을] 주지 않기에 [고기 먹는 자]에게는 악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고기 등[의 섭취]를 허락하는 것은 잘못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29)
29) MHKK Extra Tib. 67: “gang phyir mi sdig gnang mi sbyin/ des na sdig de
yod ma yin/ de phyir sha sogs rjes gnang ba/ skyon me par ni gzung
bar bya/”
바비베까는 첫 번째 게송에서 고기를 먹는 행위가 살생으로 간주된다면, 동물을 죽여 그 동물의 사체를 가죽 옷을 만드는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살생이라는 악행을 몇 번씩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함을 지적하여 고기를 먹는 행위와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별개의 행위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이후 두번째 게송에서 그는 육식 이외의, 예를 들면, 가죽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살생의 원인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사슴가죽 옷을 입는 반론자의 비판 자격을 묻는 산스크리트 게송(MHK 9.136)과 같은 의미를 표현을 달리하여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즉, “다른 원인에 의해 살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라고 하는 질문은 수사적인 반문으로서, 가죽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다른 원인도 육식과 마찬가지로 살생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다시 말해, 반론자도 살생의 악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식의 피장파장의 논리를 구사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다음 게송을 읽어보면 바비베까가 반론자에게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바는 육식이 살생의 원인으로 상정될 수 없다는사실이다. 반론자가 바라문들이 가죽옷을 입는 것을 살생을 저지르는 것으로 여기지 않듯이, 불교도들의 육식을 살생의 악업을 짓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비베까의 대답이 육식이 고기의 수요를 발생시키고, 그 수요가 공급자로 하여금 동물들을 죽이도록 하기에 결국 고기를 먹는 행위가 살생을 저지르는 것과 다름없다는 논리를 무력화하여 불교도들의 육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필자의 소견으로는 바비베까가 성공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모범적인” 불교도들이 고기를 먹음으로써 살생을 저지르지 않고 있다는 점을 항변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고기 유통망에서 승려를 제외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성의 불꽃」에 인용된 바비베까의 ‘비-채식주의’ 논의의 마지막 게송을 인용해본다.
맛에 대한 탐착, 살생, 그리고 잔인하게 굴려는 의도가 없이 고기를 먹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 [다른] 미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비베까가 말하는 육식은 승려의 걸식이다. 승려의 걸식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려는 의도가 없이, 생명체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없이, 살아있는 개체의 살코기의 맛에 집착함이 없이, “우연히”(yadṛccha-) 자신의 발우에 “들어온”(-āgata) 음식을 먹는 행위이다. 그렇게 우연히 자신의 그릇에 들어온 고깃덩어리를 먹는 행위가 살생과 동일한 것이라면, 고기와 맺을 수 있는 다른 행동양식, 즉, 고기를 만지거나, 들거나, 생각하는 행위 모두가 살생을 저지르는 것이라 생각되어야 한다. 고기를 만지는 행위가 살생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고기를 먹는 행위도 살생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살생을 촉발하는 행위는 고기를 먹는 행위가 아니다. 살생은 고기맛에 집착하는 행위 또는 생명체를 죽이거나 괴롭히려고 마음먹는 행위, 즉 탐, 진, 치 삼독30)이 촉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해본다면, 바비베까는 「중관심론」「미망사장」의 ‘비-채식주의 논의’를 통해 육식과 살생간의 논리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보이고자하였고, 고기를 먹는 것과 살생을 인과적으로 연결시킨다면, 살생은 고기를 먹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고기의 맛에 집착하는 마음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30) 바비베까가 말하는 “맛에 대한 탐착, 살생에의 의도, 괴롭히려는 마음” 각각
은 삼독인 탐, 진, 치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삼독과 각각의 항목
을 바비베까가 명시적으로 연결짓고 있지는 않다.
Ⅳ. 결론
불교승단의 식사규칙으로 채식주의를 도입한 대승경전들은 바비베까가 활동하였던 6세기에 이미 성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바비베까 또한 이를 숙지하고 있었다. 불교도들의 육식을 비판하는 반론자의 의견을 소개한 후, 바비베까는 「이성의 불꽃」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답변을 시작한다.
이에 대해 말해보겠다. 모든 중생을 자식처럼 여기시며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들을] 사랑하시는 큰 자비심을 갖추신 세존께서 어떻게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시겠는가? 대승의 경전에서는 전혀 허락하시지 않으신다. 「象腋經」(Hastikakṣya), 「大雲經」(Mahāmegha), 「楞伽經」(Laṅkāvatāra), 그리고 「央掘魔羅經」(Aṅgulimālīya)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육식도 금지하신다. [그러나] 성문승의 경전에 따르면 …31)
31) Tarkajvālā D309a3-4: “’di la brjod par bya ste. thugs rje chen po dang
ldan pa’i bcom ldan ’das sems can thams cad la bu gcig pa ltar dgongs
pa rus pa dang rkang pa’i gting nas brtse ba mnga’ ba de ji ltar na sha
za bar rjes su gnang ba yin? theg pa chen po’i gzhung las bcom ldan
'das kyis ma gnang ba kho na yin te. glang po’i rtsal dang sprin chen po
dang lang kar gshegs pa dang sor mo’i phreng ba la sogs pa’i mdo las
sha za ba rnam pa thams cad du bkag pa nyid yin no. nyan thos kyi
theg pa’i gzhung las ni …”
바비베까는 육식을 금지하는 대승경전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여 붓다가 그들 경전에서 육식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하지만 그 직후 성문승(Śrāvakayāna) 경전의 내용을 따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자신의 ‘비-채식주의’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바비베까는 불교도의 육식 문제에 있어 대승경전과 성문승 경전 사이에 아무런 위계도 세우지 않고 있으며, 채식주의가 육식에 비해 윤리적으로 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그의 글을 읽을 경우, 그는 마치 대승불교는 육식을 금하고 있으므로 애초에 반론자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고 육식을 허하는 성문승의 경우에도 반론자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가 문제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읽힌다. 그리고 본고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비베까는 성문승 전통의육식도 인과적으로 살생과 연결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바비베까는 그의 ‘비-채식주의’ 논의를 통해 21세기의 불교도들에게 육식의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육류는 먹어도 좋다는 율장의 규정을 의도 중심적인 불교의 윤리관과 연결시켰다. 바비베까가 직접 그 연결에 대해 사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육류를 섭취해도 좋다는 규칙과 그것이 고기의 맛에 대한 집착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병기함으로써 걸식행위에 따른 육식의 외부와 내부를 연결 짓고 있다. 바비베까는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육류의 섭취와 맛에 대한 욕망이 결여된 육식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그가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윤리적으로 문제시되지 않는 육식이란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육류의 섭취보다 더욱 한정된 고기맛에 대한 탐착에서 발로되지 않은육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비베까가 구사하는 논리를 어느 정도까지 혹은 어떠한 방식으로 현대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다양한 불교적 식사규칙들에 전제된 가치들을 확인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보다 심도 있는 고찰과 논의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본 연구의 제한된 논의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바비베까의 육식옹호의 논리가 “우리의” 육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식사방식은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고기를 섭취하는 것과 고기 맛에 대한 탐착의 부재가 동일시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항변하고 있듯, 자신의 그릇에 우연히 떨어진 고기를 먹는 것에는 고기 맛에 대한 욕심이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식당에 가는 경우는 다르다. 식당에서 나오는 고기반찬에 쓰인 고기가 먹는 나를 위해 한 생명이 도축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본적도, 들을 적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의심할 수도 없다. 그 고기는 세 가지 측면에서 청정한 고기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앞에 우연히 놓여진 고기를 무심하게 먹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고기의 맛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내 앞에 놓인 그고기는 “우연히” 놓여진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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