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님에게... 제가 곧바로 답장을 드린다고 하다고 미적거리다 보니 몇일이 지났습니다. 비록 짧은 지식이지만 제 나름대로 아는 범위내에서 답장을 써 보았습니다. 미진한 부분이 있더라도 용서 하십시요. 제가 아직은 말로만 알지 실제 그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다 보니까 제대로 설명이 안된 부분도 있을 것 입니다.
4세기경에 씌여진 마하왕사(Mahavamsa)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글은 제가 수시로 카페에도 올리고 여러분들의 편지에도 인용했던 귀절 입니다. [이교도들은 황색가사가 지니는 잇점 때문에 그것을 입었으며, 그들이 자긴의 견해를 주장할 때면 언제나 그것을 붓다의 교설이라는 이름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편의와 욕망에 따라 행동 하였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귀절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붓다가 걸어 갔던 길과 동일한 높이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붓다를 신격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격화 하여 우상숭배를 하듯 하는 것은 매불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님이 우려 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오나 제 입장을 설명 드림으로써 님의 진심어린 우려에 답을 드릴까 합니다. 저는 자주 불교를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불교 안에 있으면서 한국불교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그 수준을 의심케 한다. 또한 그것은비겁함이고 이율배반적 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불교의 문제는 누가 지적해야 하는지요? 이교도들이 해야 하는지요? 다른 외국 사람들이 지적해야 하는지요? 이제는 누군가가 나서야 할 때 라고 봅니다.
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던 할머니 시대의 불교가 아니고 이제는 대부분의 불자들의 학력도 높아졌고 그리고 글도 읽고 경전의 내용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이든 다른 불교국가이든 비불설들이 횡행했던 시절이 몇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럴때 마다 위대한 스승님들이 앞장서서 정법을 외쳤고 순교도 하셨습니다. 물론 깨친 불자들이 그 뒤를 따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지금 한국 불교는 정법의 가르침이 바로 서느냐 이대로 비법이 횡행하느냐 기로에 놓여 있다고 늘 생각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법으로의 회귀는 이 시대 우리 불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무라고 생각 합니다. 수행승 옷을 입고 붓다를 입에 담는다고 모두다 붓다가 말씀하신 붓다의 제자는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붓다의 제자는 특히 승복을 입은 수행승은 붓다의 말씀에 충실하고 붓다가 가르쳐 주신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불교도들은 붓다를 입에 담으며 매불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돌팔매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를 타락 시키고 호도하며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을 정법이라고 부르짖는 그들은 어떻게 보면 타종교인들이 불교를 왜곡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짓는다고 봅니다.
불교도들이 그런 자들에게 돌 팔매질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니 관용이니 치우침이니 하는 구름잡는 이야기는 자비심 넘치는 불교도라서 그런게 아니고 솔직히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서 이지요. 불교도로써 떳떳하게 나설 용기나 지혜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뒤로 숨으면서 자기변명인 것 입니다. 관용이 지나치면 방종이고 타락으로 흐르게 되는 것 입니다.
이곳 스리랑카는 수행승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거나 매불행위를 하면 일반 신도들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물론 종단차원에서도 일체의 용서란 없습니다. 승복 자체를 입는 것을 허용치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처럼 불교가 혼탁하지 않습니다. 불교계 자체가 정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지요. 똑같은 죄를 지어도 수행승이 짓는 죄는 재가 신도들이 짓는 죄보다 몇배더 중하게 업보가 온다고 합니다.
또한 붓다가 말씀하신 수행승이란 계율을 지키고 붓다가 앞서 간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출가자들을 지적하신 것이지 결코 무늬만 수행승인 사람들을 두고 말씀한게 아닙니다. 더욱이 삼보의 불.법.승. 에서 [승]이란 모든 출가자들을 말하는게 절대로 아닙니다. 흔히들 사향사과.팔부성인등으로 설명이 되는 분들을 이야기 하는 것 입니다.
한국불교는 스님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승]이라는 원래의 개념을 많이 왜곡하여 무조건 승복만 입으면 삼보중의 하나인 [승]으로써 대접 받을려고 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지금은 불자들도 많이들 깨우침을 얻어서 이제는 [승]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분들이 많습니다. 불.법.승. 은 삼보이며 서로 서로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땡중이 설마 [승] 에 포함 되겠습니까? 그럼 그들이 부처님과 가르침(법)과 동격이라는 의미인데... ^^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근본불교의 경전을 보면 깨달음의 순서를 아홉가지로(구차제정) 구분하여 놓았고 비상비비상처(비유상비무상처) 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 상수멸정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이를 굉장히 잘못되게 설명하고 설법을 하는 것을 여러번 느꼈습니다. 물론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선불교 입장에서 설명도 하고 뒤섞다 보니까 그런 오류가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명상의 주제를 들고 선정에 들면 매우 높은 정신적인 집중과 성취를 얻게 됩니다. 즉 비상비비상처의 단계에 접어 들게 되지요. 그러나 이 정신적인 성취가 아무리 높고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진리의 깨달음과 속박으로부터 해탈을 가져다 줄수도 없고 가져다 주지도 않습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당시 유명했던 요가 명상 수행자(칼리마와 라마풋타) 두분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두사람은 비상비비상처(비유상비무상처) 라는 최고의 경지까지 도달했던 사람들이며, 붓다도 비상비비상처의 단계에 도달 했었지만 최고의 진리와 속박에서 해탈로 가는 길을 보질 못했습니다. 즉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결코 서로의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 즉 연기성을 파악 하기에는 불충분 했던 것 입니다.
명상 수행은 결코 불교에서만 주장하고 있는 수행법이 아닙니다. 붓다 이전에 인도에서는 이미 요가에서 이러한 명상 수행이 정립되어 있었고 비상비비상처의 단계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나 천주교등의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 비상비비상처의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실 비상비비상처의 단계만 해도 보통의 중생들은 엄두도 못내는 최상의 단계인 것만은 분명 합니다. 절대적인 고요와 적정으로 이한 대단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며 또한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 단계이지요.
붓다는 이 두사람에게서 완전한 평화와 해탈을 가져다 줄 최상의 진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두 요가 수행자를 떠나서 마침내 극한의 고행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진리를 찾는데 부족함을 깨닫고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을 가져댜 줄 명상법을 찾아 자신의 가장 깊숙한 마음의 구석을 탐색 했습니다.
마침내 붓다는 통찰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게 해 주는, 다시 말하면 조건지워져 있는 모든 사물들의 특성인 무상.괴로움.무아를 볼수 있는 진정한 지혜를 계발 할 수 있었습니다. 무지의 두터운 벽을 허물고 사성제의 진리를 마침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지요. 비파사나(vipassana. 통찰. 觀. 바르게 본다) 의 지혜를 마침내 이루신 것 입니다.
모든 불교의 진리는 바르게 본다, 즉 사물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입니다. 불교의 진리는 vipassana 의 혜안으로만이 제대로 보이는 것 입니다. 붓다가 모든 불교의 진리를 발견한 것은 바로 이 vapassana 를 통해서 입니다. 즉 선정의 계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통찰(vipassana) 을 계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팔정도의 첫번째 항목인 올바른 견해를 얻기 위한 수단인 것 입니다. 물론 높은 단계의 선정이 없이는 통찰도 없습니다. 두가지는 늘 함께 합니다. 하지만 선정만을 강조해서 어느 단계를 획득 했다면 결코 올바른 불교의 지혜를 가졌다고 볼 수 없고 열반에도 이르지 못 합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아, 두 가지는 지혜와 함께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적정과 통찰이다. 적정이 계발되었을 때 마음도 계발 된다. 계발된 마음을 통해서 욕망이 제거된다. 통찰이 계발 되었을 때 지혜도 계발된다. 계발된 통찰에 의해 무지가 제거 된다".
바른 통찰로 무지가 제거 되었을 때 마침내 수행자는 다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해탈의 문을 열게 됩니다. 제행무상 (모든 조건 지어져 있는 것들은 무상하고) 일체개고 (모든 조건 지어져 있는 것들은 괴로움이다) 제법무아 (모든 존재의 요소들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통찰이란 즉 오온을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라고 이해하려는 지혜 입니다.
따라서 명상의 모든 주제들과 목적은 바로 통찰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며 명상에 따른 통찰의 계발로 인하여 네 단계의 깨달음의 과정과 열가지 족쇄를 부수는 과정을 밝으며 마침내 마지막에 무지(무명)를 불교적인 지혜를 갖춘 통찰로써 제거함으로써 해탈의 문을 열게 됩니다.
아라한은 이렇게 탄생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 합니다. " 생은 다 했고, 청정한 삶을 살았으며, 해야 할 일은 이미 다했고, 이제 다른 생은 없다(즉 더이상의 윤회는 없다는 뜻)".
이러한 근본불교의 비파사나 수행이 간화선과 무엇이 다른지 각자 헤아려 볼 일 입니다. 선정은 높지만 지혜는 없는게 간화선은 아닌지...??? 또한 마지막 선정의 단계에 올라 갔다 하더라도 결국은 진리를 바로 볼 수 있는 통찰의 지혜를 얻지 못했다면 결국은 해탈의 문을 열지 못했다고 해야 겠지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문구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성철 스님의 법어 입니다. 이것을 남방불교 식으로 해석을 해 보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통찰 한다는 말) 즉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은 곧 사물의 본질인 무상을 본다는 말 입니다. 무상이기 때문에 일체개고(苦) 입니다. 그리고 제법 무아 이지요.
글이 길어지지만 無我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제 의견을 드릴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無我 를 한자의 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내가 없다... 그럼 이 편지를 쓰는 나는 누군일까요..?? 이글을 읽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요..? 영원 불멸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없다. 찰라적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연기에 의한 오온의 집합체)이라는 뜻을 바르게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늘 건가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실론섬 합장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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