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불교의 죽음 이해

실론섬 2014. 3. 17. 12:53

불교의 죽음 이해 
김 재성(metta4u@empal.com)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대한불교조계종 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선임연구원

I. 머리말
II. 불교에서 보는 삶과 죽음
III. 업과 생사의 문제
IV. 죽음을 주제로 한 명상
V. 죽음 그 너머에 대한 불교적인 이해
VI. 맺는말

I. 머리말 

불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포함한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2600여년 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타마 붓다에 의해 제시된 가르침이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로 대표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인 고멸성제 즉 열반의 실현에 있다. 열반이란 불사(不死, amata), 적정(寂靜, santi), 무사(無死, amaccu)와 동의어이다. 불교의 목적을 이루는 일은 바로 죽음을 극복한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직결되어 있다. 

여러 가지 괴로움 가운데 죽음은 생명 있는 존재는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실존적인 문제이며, 고타마 붓다는 바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출가하여 수행을 하였다. 출가하기 전의 고타마 붓다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결심하며, 젊음, 건강, 수명에 대한 도취를 버리고,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아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권력과 세속적인 영화가 약속되어 있는 왕좌를 모두 떨쳐버리고 선(善, kusala)을 구하기 위해서 출가를 한다. 선(善)이란 최상의 행복, 안온,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타마 붓다는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대한 극복을 최대과제로 생각했으며, 출가한지 6년이 되던 35세 나이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하였다. 즉 죽음을 포함한 모든 괴로움을 극복한 것이다.

이처럼 극복해야 하는 실존적인 괴로움으로서 죽음을 초기불교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초기불교 및 상좌불교에서 죽음에 대한 명상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을 포함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초기불교의 죽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는 후지타 코타츠(藤田宏達, 1988)의 「원시불전으로 보는 죽음 原始仏典にみる死」,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 1988)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死をいかに解するか」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죽음과 죽음의 명상, 죽음의 극복에 대한 초기불교 및 상좌불교의 입장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II. 불교에서 보는 삶과 죽음

1. 태어남(生)과 죽음(死) 
초기경전에서 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는 가운데 첫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諦)에서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비구들이여, 태어남(生)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이 이런 저런 중생(衆生)의 부류에서의 태어남, 출생, 입태(入胎), 나타남[abhinibbatti, 변화해서 태어나는 존재[化生]로 顯現하는 것], 다섯 무더기들[五蘊: 色受想行識]의 생겨남, 감각기관들[六入: 眼耳鼻舌身意]의 발생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이 이런 저런 중생(衆生)의 부류에서의 죽음, 죽는 것, 파괴, 소멸, 사망, 사(死), 목숨이 다함,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의 파괴, 신체를 버림, 생명기관[命根]의 끊어짐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위의 정의에서 보면 태어남이란 인간을 포함한 생명들[衆生]의 육체[色=眼耳鼻舌身]와 정신[名=受想行識]이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죽음이란 육체와 정신의 소멸이며 생명기관[命根]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수명, 체온, 의식이 이 몸을 떠날 때, 마음이 없는 나뭇조각처럼 된다고 하여, 생명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고 없음에 따라 생사를 판단한다.

2. 죽음의 문제 
죽음은 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괴로움[死苦]의 하나이자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당면하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이다. 불교경전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많은 반성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 먼저 죽음은 위기적인 상황으로 묘사된다. 먼저 <숫타니파타> 「대품」 화살경(Salla-sutta)을 보자.

이 세상에서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까지 살지] 알 수 없고,
비참하고, 짧으며 고뇌로 얽혀있다.
태어난 존재에게 죽음을 피할 방도는 없다.
늙음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한다. 정말로 생명 있는 존재에게 이것은 정해진 이치(법)이다.
익은 과일은 떨어질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태어난 자는 항상 죽음 때문에 두려움이 있다.

「팔게송품」의 늙음경(Jarā-sutta)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아 짧구나, 인간의 목숨이여! 백 년도 못되어 죽어버린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늙어서 죽는다.

인생은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이며, 결국은 늙어서 죽는다고 하는 자각은 삶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생존기간이 길지 않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얻기 어려운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눈먼 거북이[盲龜遇木]>의 비유는 인간으로 태어난 삶의 소중한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 이 이야기는 <중간길이의 가르침>(中部)에 나오며, 한역 <잡아함경>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있는 판자를 큰 바다에 던졌다고 하자. 그것을 동풍이 서쪽으로 옮기고, 서풍이 동쪽으로 옮긴다. 북풍이 남쪽으로 옮기고, 남풍이 북쪽으로 옮긴다. 거기에 눈먼 거북이가 있어, 백년에 한 번 씩 바다 속에서 떠오른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눈먼 거북이는 그 구멍이 있는 판자에 목을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만일 가능하다고 한다면 언젠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일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눈먼 거북이 구멍이 있는 판자에 목을 넣는 것은 오히려 빠른 것이다. 그것보다 한 번 악처(惡處: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진 중생이 인간의 상태를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나는 말한다. 그 것은 그들에게 법에 맞는 행위(dhamma-cariyā 法行), 바른 행위(sama-cariyā 正行), 좋은 행위(kusala-cariyā, 善行), 공덕이 되는 행위(punna-cariyā 功德行)가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좋지 않은 행위 때문에 한 번 악처에 떨어진 중생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주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비유가 전해주는 가르침에 따라 현재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들은 얻기 어려운 귀중한 삶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인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절박함을 강조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난 삶의 가치를 자각시켜 소중한 인생의 여정을 수행을 통해서 향상시킬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죽음에 대한 명상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III. 업과 생사의 문제 

불교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함께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개념이 ‘업’이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거나 힘든 경험을 하면, ‘전생의 업보’라거나 ‘무슨 업이 두텁기에’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처럼 과거 생에 지은 업의 과보로 현생에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겪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불교에서 업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초기경전에 나타난 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면서 불교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에서 업을 의미하는 용어는 깜마 kamma(범어: karma)이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업이란 몸, 입, 마음(身口意)의 세 가지 행위[三業]를 말하며, 세 가지 행위 가운데 의지를 의미하는 마음의 행위[意業]가 몸과 입의 행위의 바탕이 된다.  

비구들이여, 내가 업[kamma]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의지[cetanā, 思]를 말한다. 의지를 지니고, 사람들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행동한다. 비구들이여, 지옥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행위가 있고, 축생계에서 받아야 할 행위가 있으며, 아귀 세계에서 받아야 할 행위가 있고, 인간계에서 받아야 할 행위가 있으며, 천상에서 받아야 할 행위가 있다. 비구들이여, 행위의 결과[果報]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현세에서 받는 것, 바로 다음 생에서 받는 것, 미래 생에서 받는 것이 그 세 가지이다.

위 경전에 의하면 업이란 ‘의지’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즉 능동적인 의지가 바로 업이다. 그러한 능동적인 의지에 의해 몸, 입으로 행동을 하게 되면, 그에 따른 결과로서의 업보가 있다. 즉 업보는 업에 의해 정해지는 결과이며, 존재들의 다양한 생존 양식에서 현세 또는 내생에 그 결과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붓다는 자신을 업을 주장하는 자(kamma-vādī, 업론자)이며 행위를 주장하는 자(kiriya-vādī, 행위론자)라고 하였다. 업론과 행위론이란, 업을 주장하는 입장과 행위를 주장하는 입장을 말하며, 인간의 삶은 자신의 업과 행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입장이다.

업론과 행위론은 인간의 행위는 원인도 결과도 없다고 하는 무작용론(akiriya-vaada)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다. 그리고 선악의 업 또는 행위에 대하여 그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인도의 유물론자들의 도덕부정설, 유물론적 업보 부정론 등의 무인론(無因論)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업론과 행위론의 입장에서 붓다는 무인론은 물론 숙명론도 비판하고 있다.

숙명론(宿作因說 pubbekata-hetu)이란 현재의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不苦不樂) 느낌은 과거생의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 시대의 신흥 사상의 하나인 자이나교의 입장임을 맛지마니까야의 제 101경 데바다하경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입장은 업이라는 의지작용에 의해서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입장이며, 행위에 의해 삶이 결정된다고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불교의 업을 단지 숙명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업이란 만들어 진 것이며,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에 의해 개선해 갈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업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좋은 행위[善業]을 통해서 보통 사람[凡夫]들은 자기 정화의 여정인 계정혜 삼학(三學)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한다. 궁극적으로는 선업을 넘어서, 탐진치에 물들지 않는 행위를 하게 될 때, 윤회의 원인이 사라지게 된다.

초기불교는 절대적인 창조신을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업과 행위를 말하고 있다. 인간과 세계는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조건에 의해 소멸해가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도의 전통 바라문 사상 그리고 유신론적인 종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창조주인 신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과보도 창조주인 자재신(自在神)이 원인이 되어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하며, 기본적으로 인과 관계를 인정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그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의 업론의 입장과는 다르다.

인도 전통사상은 네 가지의 계급[四性]을 주장한다. 즉, 사제(바라문), 무사 또는 왕족(크샤트리야), 평민(바이샤), 노예(수드라)의 네 계급이다. 이러한 신분 계급은 완전히 세습에 의한 것이어서 개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정해진 것이라고 하고, 신의 창조에 의해 정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붓다는 사성(四性)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창조신을 부정하였다. 즉, 태생에 의해 현재의 신분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사제도 되고, 정치가도 되며, 상인도 된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농부, 기술자, 상인, 노예, 도둑, 무사, 제관, 왕 등도 모두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셨다. 이처럼 불교는 업론과 행위론의 입장에서 절대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불교의 업론의 바탕에는 조건에 의한 발생을 의미하는 연기(緣起)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현명한 사람들은 업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들이고, 연기를 보는 자이고 업과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숫타니파타 Sn 653)고 하는 경전의 말씀은 업의 가르침이 바로 연기의 가르침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건에 의한 발생을 의미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이야말로 인간은 물론 세계를 이해하는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진다고 하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불교에서는 '숙명론', '무인론(無因論)', '유신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緣起)의 입장이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길 때,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할 때, 저것이 멸한다.'와 '생겨나는 법은 그 어떤 것이라도 모두 소멸하는 법이다.'라고 표현되며, 12지연기(十二支緣起)에 의해 자세히 제시되어 있다. 12지는 어리석음(無明), 행위(行), 의식(識), 심신(名色), 여섯 감관(六入), 접촉(觸),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 존재양식(有),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이다.

늙음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괴로움의 발생 과정인 유전(流轉) 연기는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생을 조건으로 해서 노사가 있다고 하며, 괴로움의 소멸 과정인 환멸(幻滅)연기는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한다고 한다. 연기의 법칙은 붓다가 발견한 것이지 만든 것이 아니다. 붓다가 세상에 오셨거나 오시지 않았거나 영원히 존재하는 법칙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탐진치]에서 생겨난 업은 바로 괴로움의 생존인 윤회의 원인이 되어 언제라도 과보를 받게 된다. 하지만 탐진치에서 벗어난 업은 괴로움의 생존을 종식시킨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탐진치와 업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비구들이여, 탐욕[貪]에서 비롯되고, 생겨나고, 탐욕을 원인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성냄[瞋]에서 비롯되고, 생겨나고, 분노를 원인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어리석음[痴]에서 비롯되고, 생겨나고, 어리석음을 원인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 곳이 그 업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든지, 다음 생[來生]이든지, 아주 먼 후생이든지 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비구들이여, 탐욕 없음[無貪]에서 비롯되고, 생겨난 업, 탐욕 없음을 원인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분노 없음[無瞋]에서 비롯되고, 생겨난 업, 성냄 없음을 원인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어리석음 없음[無痴]에서 비롯되고, 생겨난 업, 어리석음 없음을 원인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렇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벗어남에 의해서, 마치 타라수 나무의 뿌리가 끊어져 다시는 싹이 나지 않는 것처럼, 윤회의 생존이 없어진다.

인간을 괴로움의 생존에 얽어매는 근본적인 번뇌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근거한 업을 삼가고, 탐진치에서 벗어난 업을 행할 때, 괴로움은 사라진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업 사상에 입각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다.

인간은 자신의 업의 상속자임을 잘 이해하고, 지금 이 순간 어떤 업을 짓고 있는가를 잘 알아차려 탐진치에 물들지 않은 행위를 하도록 노력해 나가는 것이 선업에 의한, 그리고 선업을 넘어서는 자유에의 길이다.

죽은 조상을 위해 행하는 선행의 의미 
업은 스스로 짓고 스스로 그 결과를 받는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하지만 특별하게 죽은 자신의 부모나 조상을 지정해서 행하는 자손들의 선한 행위의 결과가 그들의 부모나 조상과 연결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붓다 시대에 핑갈라왕의 장군이었던 난다카는 베풂 등의 선행의 공덕을 믿지 않는 허무주의자였다. 그는 이 사견에 빠진 채 죽었으며, 죽은 후에는 아귀(餓鬼)가 되었다. 그의 딸이 승단의 스님들에게 음식을 올리면서 그 공덕을 아버지와 나누기를 기원하였다. 그러자 아귀가 된 난다카 장군은 천상의 음료수와 음식을 얻게 된다. 그 후, 그 음식이 자신과 공덕을 나누고자 마음을 일으킨 딸의 보시에 의한 것임을 알고, 보시 등의 선행에는 좋은 결과가 있다는 업의 법칙을 받아들인다.

아귀는 강한 욕망을 지니고,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했던 사람이 죽으면 태어나게 되는 존재이다. 베풂의 결과를 부정하고, 죽은 후의 삶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들은 배고픔과 갈증의 고통에 괴로움을 받는 아귀가 된다. 그 아귀가 된 존재는 자신을 위해 지정해서 행하는 보시 등의 행위의 결과를 받아 천상에 가기도 하고, 잠시 동안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임종시에 보이는 다섯 가지 환상과 49재 의식 
보통 사람은 죽을 때 다섯 가지 환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지옥에 떨어질 사람은 불덩어리 환상을 보고, 아귀계에 떨어질 사람은 사방에서 어두움과 음침한 것을 보며, 축생계에 태어날 사람은 다른 동물의 환상을 보고, 인간계에 태어날 사람은 죽은 친척의 환상을 본다. 천상계에 태어날 사람은 천국의 환상을 본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다섯 가지 환상이다.’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어떤 환상이 나타나는지 알아서 경전이나 법문을 통해 천상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것이 불교적인 임종의 방법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죽기 전부터 죽은 후 49일까지 깨달음이나 좋은 내생을 위해 행하는 의식은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중심 내용은 죽은 자가 완전하게 다음 생에 환생하거나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중간계에 머무는 동안 깨달음에 가까이 가도록 인도해주는 법문을 7일에 한 번씩 7번 들려주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행하는 49제 의식도 기본적으로는 티벳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티벳에서는 49일 동안 시신을 모셔놓은 방에서 직접 시신에게 법문을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절에서 제사의식의 형태로 음식을 차려놓고 망자를 위한 경전을 읽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

IV. 불교의 죽음을 주제로 한 명상법 

불교는 생노병사의 실존적인 괴로움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집착[五取蘊]의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이 가운데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열반임을 앞서 간단히 말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바로 죽음을 극복한 열반을 위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수행법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죽은 시체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부정관(不淨觀)과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念死 또는 死念) 그리고 죽음을 상기(想起)하는 수행(死想)이다.

1. 부정관 (asubha [bhāvanā]) 
부정관은 탐욕의 성향이 있는 사람(貪行, rāga-carita)의 탐욕 또는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수행이다. 외적으로는 타인의 육체(시체)가 부패하여 백골로 변해가는 9가지 모습(九想) 혹은 10가지 모습(十想)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난 후 상기(想起)하는 방법과 내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31가지 또는 32가지)를 상기(想起)하면서 부정(不淨)하다고 생각하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부정관 수행의 목적이다.

죽은 시체를 대상으로 하는 부정관 수행법은 <대념처경>의 신념처 가운데 <9가지 묘지에서의 관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죽어 있는 시체가 부패해서 해골이 되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비구들이여, ①묘지에 버려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된 시체가 부풀어 오르고, 검푸러지고, 썩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버려진 시신의 부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어 간다. ‘②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 매, 독수리, 개, 표범, 호랑이, 재칼 등에 의해서 먹혀지고, 갖가지 벌레에 의해서 파 먹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③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이 붙어있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④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은 없이 핏자국만 얼룩진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⑤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 있고, 살점이나 핏기가 없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⑥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여기에 손뼈, 저기에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두개골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⑦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조개껍질의 색처럼 하얗게 변해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⑧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일 년도 더되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 ⑨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뼈마저 썩어 가루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의 한 방법으로 부정관을 닦는다.

<대념처경>에서 제시된 부정관으로서의 신념처가 시신을 보면서 자신도 이러한 시신처럼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는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죽음에 대한 명상의 속성도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붓다의 출가의 동기가 된 사문유관(四門遊觀) 가운데 죽은 시체를 만나서 붓다가 느꼈던 절박감과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사문유관으로 알려져 있는 4가지 충격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피할 수 없는 실존적인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여 늙음, 병듦,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한계상황에 대해어 두려운 마음(saṃviggahadaya, Ja i 59)을 일으킨 것이며, 이 사건 가운데 죽음에 대한 인식이 가장 절박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시신을 대상으로 한 부정관은 죽음의 명상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死念, maraṇa-sati) 
죽음을 주제로 한 수행법으로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즉 사념(死念)이다. 사념은 10가지 마음챙김[十念] 가운데 하나이며 한역에서는 염사(念死)로 번역되어 있다. 초기경전에서 십념(十念)이라는 용어로 정리되어 제시된 예는 한역 <증일아함경>에서만 보이지만, 팔리 경전인 <앙구따라 니까야>에서도 10가지 항목이 2곳에서 함께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념은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앙구따라 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있다.

비구들이여, 사념을 닦으면 큰 결실,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고, 불사를 목적으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념을 닦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 명의 비구들이 자신들이 닦고 있는 사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떤 비구는 ①하루 낮 밤 동안 살 것이다(ahaṃ rattindivaṃ jīveyyaṃ)라고 하고, 그 동안에 세존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많은 수행을 하리라고 다짐하면서 사념을 닦는다고 말했다. 다른 비구는 ②하루 낮 동안 살 것이다(divasaṃ jīveyyaṃ)라고 하며, 순차로 시간의 길이가 다음과 같이 짧아지고 있다. ③한 번 탁발한 음식을 먹는 동안(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ekaṃ piṇḍapātaṃ bhunjāmi), ④4-5번 먹는 동안(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cattāro panca), ⑤한 번 먹는 동안(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ekaṃ ālopaṃ saṃkhāditvā), ⑥숨을 들이 마시고 내 쉬며, 내쉬고 나서 들이마시는 동안에 살 것이다(a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assasitvā vā passasāmi passasitvā vā assasāmi)라고 6명의 비구가 차례로 사념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6종류의 사념을 닦는 방식에 대해서 붓다는 ①-④까지의 방식은 「게으름에 머물고 있으며,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한 사념을 둔하게 닦는 것」이라고 하는 반면 ⑤-⑥의 방식으로 사념을 닦는 것에 대해서는 「게으르지 않음에 머무는 것이며, 모든 번뇌의 소멸을 위한 사념을 민첩하게 닦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목숨은 하루가 아니라 한 끼의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보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동안이나 한 번 호흡을 하는 동안에도 죽음에 대해서 잊지 않고 붓다의 가르침을 많이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죽음에 대해서 잊지 않고 마음을 챙기는 수행인 사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념을 닦으면 모든 번뇌가 소멸하고 죽음이 없는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은 엄격하게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면서 수행해 나갈 때, 죽음을 초월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청정도론>의 사념(死念) 또는 사수념(死隨念) 
초기경전에서는 사념을 닦고 어떤 과정을 밟아 불사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팔리 주석 문헌인 <청정도론>에 의하면 사념을 닦으면 욕계의 선정인 근접삼매만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죽음이라는 명상 주제는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고 또 절박함을 일깨우기 때문에 본삼매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근접삼매에만 도달한다.

초기경전에서 십념으로 제시된 수행법은 <청정도론>에서는 十隨念(dasa-anussati)으로 정리되었다.

1. 불(佛)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佛隨念, buddhānussati)
2. 법(法)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法隨念, dhammānussati)
3. 승(僧)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僧隨念, sanghānussati)
4. 계(戒)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戒隨念, sīlānussati)
5. 보시(捨)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捨隨念, cāgānussati)
6. 천신(天神)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 (天隨念, devatānussati)
7. 죽음(死)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 (死隨念, maraṇānussati)
8. 몸(身)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身至念, kāyagatāsati)
9. 호흡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 (出入息念, ānāpānasati)
10. 평온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寂止隨念. upasamānussati).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8장 <반복적인 마음챙김에 대한 해설(anussatikammaṭṭhāna-niddesa)>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죽음이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기능이 끊어진 것이라 불리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죽음이 올 것이고, 생명기능이 끊어질 것이다.”혹은 “죽음”, “죽음” 하면서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 비구는 항상 게으르지 않고, 모든 존재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생각[想]얻는다. 그리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무상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며 따라서 괴로움에 대한 생각과 무아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 두려움도 몽매함도 없이 죽는다. 만약 이 생에서 불사(不死)를 얻지 못했다면 죽은 후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모든 것에 유익한 명상 주제(一切處業處, sabbatthaka-kammaṭṭāna)’로 3가지를 제시한다. 모든 것에 유익한 명상 주제는 수행자의 특정한 근기나 기질에 상관없이 누구나 닦아야할 수행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 내용은 자애명상(mettā),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maraṇasati), 부정관(asubhasannā)이다.

4. 죽음에 대한 상(死想; asubhasannā) 
죽음에 대한 상기는 5상(想), 7상, 9상, 10상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어 있다. 5법 또는 5상(想)으로 부정수관(不淨隨觀), 음식에 대해 싫어하는 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모든 행에 대한 무상상(無常想), 죽음에 대한 상(死想)이 제시되며,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혐오상(嫌惡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이 제시되는 예도 있다. 7상(想)으로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무상상(無常想), 무상에 대한 고상(苦想), 고에 대한 무아상(無我想)이 제시된 예가 있다. 9상(想)으로는 부정상(不淨想), 사상(死想), 식염상(食厭想), 모든 세간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상(想), 무상상(無常想), 무상에 대한 고상(苦想), 고에 대한 무아상(無我想), 사단상(捨斷想), 이욕상(離欲想)이 제시되어 있다. 10(想)으로는 위의 9상(想)에 멸상(滅想)이 추가된 예가 있다.

이처럼 선정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된 여러 가지 상(想)은 바로 각각 대치하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제시된 명상수행이다. 위에서 보는 경우와 같이 죽음에 대한 상(想)은 부정상, 무상상과 함께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죽음에 대한 상(想)이 어떤 수행인지 설명된 곳은 없다. 다만 <앙구따라 니카야>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만일 죽음에 대한 상(想)을 쌓은 마음으로 가득차서 머물고 있는 비구의 마음이 생명에 대한 욕구에 빠지지 않고, 싫어하고, 돌아서고, 나아가지 않고, 평정 또는 싫어하는 생각이 계속된다면,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나는 죽음에 대한 상을 닦았다. 나는 이전과 이후의 구별이 있다. 나는 수행의 결과를 얻었다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그는 정지(正知)있는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상을 자주 닦으면 큰 결실,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고, 불사(不死)를 목적으로 한다.

이 경전에 의하면 죽음에 대한 상[死想]을 거듭 닦으면 생명에 대한 집착이 극복되고 분명한 앎[正知]를 얻게 되어, 궁극적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여, 불교의 궁극적 목적에 이르는 한 가지 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V. 죽음 그 너머에 대한 불교적인 이해

해탈한 사람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설명 
앞서 살펴보았듯이 불교는 죽음으로 대표되는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인 괴로움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괴로움의 소멸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이란 사건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한계상황이며, 누구나 맞이하게 된다. 외형적으로 보면 붓다를 위시한 성자가 된 제자들도 수명이 다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붓다와 해탈한 제자들의 이러한 죽음은 깨닫지 못한 보통 사람의 죽음과 구별하여 완전한 열반이라고 한다. 즉 마지막으로 육체라는 한계를 벗어버리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사후 붓다로 대표되는 해탈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즉 여래(如來)는 사후에 존재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붓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설명한 경전에 의하면, 마치 큰 바다와 같이 여래는 심오하고, 한량이 없으며, 헤아리기 어려워, 우리들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육체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죽음의 의식이 없다는 것이 보통사람들과 해탈한 사람들과의 차이이다.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의 경지를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실로 땅도 물도 불도 바람도 없는 곳, 공무변처도 없고, 식무변처도 없고, 무소유처도 없고, 비상비비상처도 없는 곳,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곳, 해도 달도 없는 곳이 있다. 그것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니다. 발을 딛고 설 곳도 없고, 나아갈 곳도 없으며, 대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끝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만일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면, 태어난 것, 생겨난 것, 만들어진 것, 형성되어진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난 것, 생겨난 것, 만들어진 것, 형성되어진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다.  

보통사람의 죽음 극복 방법 - 천상의 삶 
해탈하지 못한 보통사람 일반 재가 신자들을 위해서 붓다는 세 가지 실천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베풂[施] 과 자율적인 규범의 실천[戒] 그리고 천상[天]에 가기 위한 수행이다. 베풂을 통해 마음의 탐욕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게 되고, 자율적인 규범의 실천을 통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삼가게 되며, 천상에 가기 위한 수행을 통해 마음의 번뇌를 줄이게 된다.  

천상에 가기 위한 수행으로 제시된 대표적인 명상법으로 네 가지 한계 없는 마음을 닦는 명상(四無量心, 四梵住, catasso apamanna, brahmavihārā)을 들 수 있다. 네 가지란 자비희사를 말하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자(慈, mettā : 자애 -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마음),
② 비(悲, karuṇā : 연민 - 모든 존재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마음),
③ 희(喜, muditā : 더불어 기뻐함 - 다른 존재들의 행복이나 잘한 일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④ 사(捨, upekkhā : 평정/평온 - 모든 존재들은 각자 자신의 행위(업)의 결과를 받는다고 이해하여, 한 편으로 치우쳐 대립하지 않는 마음).

가장 먼저 제시되는 자애명상(mettā bhāvanā, Loving-kindness meditation)은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행복과 기쁨을 길러주기 위해서 마음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방사하는 명상법으로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인 향상과 성숙을 위한 정신수행에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 전통적으로 자애명상(慈觀)의 순서는 자신 - 모든 생명 있는 존재 - 한정된 존재로 진행된다.  

자신에 대한 자애명상 
자신에 대한 자애명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의 좋은 점, 잘한 점, 지금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점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며, 행복해질 가치가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본다. 자신에 대한 자애명상은 본보기로 하며, 오랫동안 하지는 않는다.  

‘내 자신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내 자신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명상
내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생명들은 행복하고 잘 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든 존재들이 잘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킨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한정된 대상에 대한 자애명상
자애명상을 통해서 강한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 자애의 느낌이 잘 일어나는 대상을 시작으로 하여 한정된 대상 향한 자애명상을 한다.

 

① 고마운 사람, 존경하는 사람, 은혜를 입은 사람이나 단체.
②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지, 친구)
③ 중립적인 사람
④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예외로 자애명상의 초보자는 죽은 사람과 이성(異性)으로 여겨지는 대상을 향해서 자애명상을 하지 않는다.

자애명상의 11가지 유익함. 
1.편히 잠든다. 2. 편히 잠에서 깨어난다. 3.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다. 4.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다. 5.사람 아닌 존재들[천신들과 동물들]이 사랑하게 된다. 6. 천신들이 보호한다. 7. 독극물, 무기, 물, 불 등의 외적인 위험에 의해 해를 받지 않는다. 8. 얼굴에서 빛이 난다. 9. 마음이 평온해진다. 10. 죽을 때 혼란되지 않는다. 11. 완전히 해탈한 아라한이 되지 못하고 죽으면 범천(梵天)이라는 행복한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

이처럼 자애명상은 일상생활에서의 심신의 안정은 물론, 인간관계를 개선시키며, 천신들의 보호를 받고, 죽음 이후 행복한 천상에 태어나게 한다. 마지막 범천이라는 행복한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경험하는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언급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마음에서 사랑을 기르게 되면, 죽음 이후에 더 좋은 삶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무량심의 가르침은 해탈하지 못한 보통사람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근사체험(임사체험)의 의의 
20세기에 들어와서 임사체험 또는 근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에 대한 관심과 학술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2004년도에 제작된 BBC방송의 다큐멘터리 <사후 체험, 난 죽음을 보았다(원제: The Day I Died)>는 바로 최근까지의 근사체험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와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또한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그 사람이 살았던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임사체험은 그것을 경험한 인간의 그 후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정도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임사체험 연구의 제일인자인 정신과의사 러셀 노이에스의 연구에 의하면,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자주 다음과 같은 태도 변화가 보인다고 한다. 그것은, ① 죽음에 대한 공포의 감소, ② 이전보다 강해졌다는 감각, ③ 삶의 중요성이나 숙명이라는 것에 대한 특별한 감각, ④ 신 혹은 운명에 의해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확신, ⑤ 사후에도 존재가 계속된다는 강한 신념 등이다. 또 이 연구에서는 임사체험자에게는, 삶의 소중함, 중요한 것이나 긴급한 것에 관한 우선순위의 재검토, 컨트롤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수용성 등이라는 감각이 높아지는 일도 보고되고, 이러한 변화는 그 체험을 한 개인의 심리적 신체적 건강을 향상시키는 일에도 공헌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보통사람의 경우, 죽음 이후에 삶이 지속됨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의 삶의 의미의 생각할 때 중요하다. 불교는 생사의 반복적인 연속성(윤회)의 틀 속에서 죽음을 이해하며,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VI. 맺는말 

이상 불교에서 보는 삶과 죽음, 업과 생사의 문제, 죽음을 주제로 한 명상, 죽음 그 너머에 대한 불교적인 이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지은 행위에 의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만, 이 업의 가르침은 인간의 변화가능성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능동적으로 하는 행위에 의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형성해가고, 죽은 후의 삶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업자득을 강조하면서도 죽은 가족이나 친지를 위해 지정해서 선행을 베푸는 결과를 죽은 조상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사상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수행법에는 부정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死念), 죽음에 대한 상(死想)의 세 가지가 있으며, 이 수행법들은 괴로움 생존에 대한 집착을 끊고, 죽음을 극복한 불사(不死)의 경지인 열반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불교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고통이며, 그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구원의 메시지이다.

죽음을 명상한다는 것은 한 번 호흡하는 동안이라고 죽을 수 있다는 생명의 절박함을 인식하는 것이며, 살아있는 순간의 소중함을 상기시켜,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게으르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다듬어, 궁극적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또는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청정도론>에서는 모든 것에 유익한 명상 주제(sabbatthaka-kammaṭṭāna)로 제시되어 있고, 현재 남방불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지 전에 마음을 보호하는 4 가지 명상 가운데 한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삶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덜어놓는 수행으로 보조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명상과 함께 죽은 후에 좋은 환생 즉 천상에서의 환생을 위한 명상법으로 제시된 자애명상도 보통사람들의 죽음의 극복방법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면 결국은 생명들의 사랑을 받게 되고, 그 사랑의 힘으로 행복한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물론, 천상에서의 행복한 환생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마음의 평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긍정적인 면이 많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삶은 얻기 어렵고 소중하다는 눈먼 거북의 비유(맹구우목)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극복하고 순간순간 깨어서 정진하라는 죽음에 대한 명상은 인간의 삶의 소중함과 소중한 인생에서 죽음이 오기 전에 삶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죽음으로 초래되는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때 삶의 중요성은 더욱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불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삶이 완성되며, 죽음의 명상, 자애명상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 궁극적인 죽음의 극복은 생사가 없는 경지인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