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불상의 발전과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불상의 모습

실론섬 2014. 3. 16. 13:09

1) 경전에서 찾아본 불상조성의 기원

<증일아함경> 권28에는 불상의 조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33천에 올라가 그 곳에 계신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3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따라서 지상에서 오랫동안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자 부처님을 너무 사모하던 우전 왕은 근심 끝에 병으로 자리를 눕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가 건의하여 나라 안의 뛰어난 장인들을 모아, 이른바 우두전단(최상질의 전단)으로 높이 5척의 부처님 형상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 나라의 파사익 왕도 황금불상을 만들게 하여 인도에서 처음으로 2구의 불상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천상의 부처님은 장인이 신력으로 불상을 만들어 내자 하늘과 땅을 잇는 삼연(三連)의 계단으로 여러 천인(天人)들을 거느리고 지상에 내려오니, 그 곳에 모여 있던 여러 나라의 왕들이 부처님ㅅ다을 맞이하였다. 그 때 우전 왕은 자신이 만든 전단 불상을 가지고 부처님께 나아가니, 이에 부처님은 그 불상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오는 세상에 큰 불사를 할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나의 제자를 그대에게 부탁하노라. 만일 어떤 중생이 나의 형상을 조성하고 갖가지로 공양하면 그 사람은 후세에 반드시 염불 삼매를 얻으리라. 그 공덕은 향하사 겁(恒河沙劫)동안 생사의 죄를 소멸할 것이다.” 하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혹은 일곱 가지 보배로나

놋쇠나 구리쇠나 퉁쇠나

무쇠나 나무나 흑이나

혹은 납이나 주석이나

혹은 비단이나 종이에

불상을 조성하되

손수 짓거나 남을 시켜 지은 이

모두가 이미 부처를 이루었고

아이들이 장난삼아

꽃이나 돌이나 흙이나

혹은 손끝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그리면

그들은 차츰차츰 공덕을 쌓아

대비심을 갖추어

마침내는 모두가 부처를 이루리라.”


이 경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불상의 출현은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지극정성으로 예배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불상을 조성하면 어떤 공덕이 있을까?  <우전왕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전 왕이 부처님께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면 어떤 복을 받나이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은 세세생생에 나쁜 길에 태어나지 않고 하늘이나 인간에서 복을 받아 쾌락하고, 몸이 금빛이며 용모가 단정하여 여러 사람들의 공덕을 받을 것이니라. 만일 인간으로 태어나면 항상 제왕, 대신, 장자, 현선인의 가문에 나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이요, 만일 제왕이 되면 어느 제왕보다 거룩할 것이다. 만일 하늘의 왕이 되면 모든 천왕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함을 누리다가 무수한 겁을 지낸 뒤에는 부처를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2) 대승불교와 불상조성

인도에서 인간의 형상을 닮은 불상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쿠산왕조의 지배를 받던 간다라 지방에서 1-2세기부터라는게 정설이다. 대승불교의 신봉국인었던 쿠산왕조의 3대 카니슈카왕은 불상조성에 더욱 앞장서고 발전시켜 이를 동북 아시아에 널리 알리는데 힘을 썼다. 참고로 불교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는데 쿠산왕조의 카니슈카왕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그리고 지금의 카시미르 지방이 쿠산왕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통하여 비로소 대승불교가 중앙 아시아로 널리 전파되어 훗날 대승불교를 크게 꽃피우게 된 것이다.


불상에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양식이 있다. 


(1) 간다라 양식 


잘알다시피 간다라 미술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곳이다. 머리는 고수머리가 아니고 장발의 곱습머리로 처리를 하고 눈이 깊고 코가 오똑하여 서양사람을 닮아 있다. 의복도 몸에 달라붙는 형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현을 했다. 그리스등의 신을 조각한 것과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2) 마투라 양식

불교인들에게는 마투라 양식의 불상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도인들에게는 힌두신중의 하나인 크리슈나 신의 탄생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라문 자이나교등등의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확실하게 간다라 불상과는 모든게 달라 보인다. 인도인인 트라비다족을 꼭 닮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인도인의 전통적인 강인한 남성상(크게 뜬 눈, 두터운 입술과 목둘레, 옷과 머리 모양등)에 미의식을 잘 가미하였다.


(3) 굽타양식

4-5세경부터 조성된 불상 양식으로 굽타왕조시대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굽타양식이라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불상 표현을 이루었다. 건강한 체구에 균형잡힌 신체 비례, 그리고 

몸에 꼭 달라붙는 법의는 불법 자체가 불상에 응결되어진 것 같은 신성함을 보여준다.


3)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불상은 아우카나(Aukana) 불상이다.

아우카나 불상은 스리랑카의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책자나 홍보물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다. 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높이 15M의 불상은 화강암 재질로 되어 있다. 코에서 물을 흘리면 똑바로 두발 사이에 떨어지도록 균형있게 세웠졌다. 더욱 놀라운 것을 16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느 한 부분 떨어져 나간 것이나 금이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플론나루와 또는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불상이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아우카나 불상이다. 이 불상을 본떠서 사찰의 곳곳에 같은 모양의 불상이 있고 그리고 큰 길가나 유명한 장소에도 널리 조성되어 있다.

4) 왜 인도인들은 초기에 불상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인도의 보팔에 위치하고 있는 산치 대탑의 문과 기둥틀에 부조되어 있는 불전도등에는 당연히 붓다의 형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보리수, 빈대좌, 불족적, 법륜, 스투파등이 있을 뿐 붓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1) 당시 인도인들은 붓다를 초인적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과 (2) 붓다께서 입멸한지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붓다의 형상이 아니더라도 다른 흔적들 즉 보리수, 법륜, 스투파(탑)등으로 충분히 붓다를 연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2)번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왜냐하면 붓다사후 몇백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기억이 아직은 생생하게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승불교 자체가 붓다를 신격화 형상화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상이 조성되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힌두교에서도 많은 신들의 형상을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것에 영향을 일정부분 받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5) 무불상시대로 돌아가는게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맨처음 1)번 글에서 증일아함경에서 불상 조성의 이야기를 올려 드렸지만 이는 아마도 후대에 삽입된 부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은 빠알리 니까야에 나와 있지 않을 뿐더러 여러 불교 유적에서도 붓다 사후 초기에 붓다의 형상이 조성되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붓다 사후에 즉각적으로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4)번 글에서 대략적으로 밝혀 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말라족이 아난다 존자에게 붓다의 장례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자 전륜성왕의 장례식대로 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그리고 여래를 기념할 만한 탑을 건립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해서 사리나 유해를 담았던 관이나 화장을 하고 타고남은 재등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그런데 막상 화장을 하고 나니 사리가 나왔다. 처음에 말라족들은 이것을 다른 나라에 분배하지 않을려고 했다. 하지만 약소국 입장에서 그것을 관철 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붓다는 이러한 사후 문제를 충분히 예견하고 큰 나라에 속해 있던 사밧티나 라자가하 베살리등에서 자신이 열반에 드는 것을 피했을 것이다. 만약에 코살라 같은 나라의 수도에서 열반에 들었다면 아마도 붓다의 사리등 일체는 인도 전역의 10여개 곳으로 퍼져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약소국들이 와서 사리 분배해 달라고 했다면 해주었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붓다께서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유훈을 남긴다.


(1) "아난다여, 아마 그대들은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후에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설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2) 비구들은 서로 도반(avauso. 그대)이라는 말로 불렀던 것을 이후에는 장로비구가 신참 비구를 부를때는 이름이나 성 또는 도반이라고 부르고, 신참 비구가 장로비구를 부를때는 존자(bhante) 또는 장로(aysma.대덕)이라고 불러야 한다


(3) 필요하면 소소한 항목(소소계)은 비구모임에서 상의하여 폐지하여도 좋다.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것이 소소계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좀더 질문을 하여 명쾌하게 하지 않았다고 하여 아난다 존자는 훗날 비난을 받게되며 이후 불교는 소소계에 대한 논쟁으로 분파와 혼란을 겪는다)


(4) 찬나 비구에게 최고의 처벌을 내려야 한다(찬나 비구 이야기는 생략)


(5) 모인 비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했으나 모두다 침묵으로 일관 함. 즉 의문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붓다는 500여명의 비구들 모두가 예류자이니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식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라고 격려와 칭찬을 한다.


(6)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방일하지 말고)열심히 정진하여 너희들의 수행을 완성하여라". 이것이 여래께서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었다.


6) 불교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다.

붓다의 형상을 조성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탑을 조성하거나 경전을 신주단지 모시듯 경배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탑이 먼저 조성되고 붓다의 형상이 나중에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불교는 붓다라는 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종교이다. 즉 붓다가 없다면 가르침도 없고 불교라는 종교도 없다. 삼보가 왜 귀의처가 되는가? 붓다는 붓다십호에서도 잘 설명되어 있지만 괜히 귀의하고 경배 드리고 예경 드리는게 아니다. 우리가 불상을 조성하고 그분앞에 꽃과 향등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은 그분의 위대한 생애와 가르침을 기억하고 떠올려서 그분처럼 살아가고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자하는 목적이다. 우상숭배가 아닌것이다. 



폴론나루와에 있는 붓다앞에 경배 올리는 스님들

연꽃님은 이 불상을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상이라고 엉터리 글을 올렸습니다만

이건 폴론나루와 유적지에 있는 불상에 불과 합니다. 이 유적지는 갈 비하라(gal vihara)라고 하는데

붓다의 열반상과 좌상 그리고 아래 그림에서 팔을 교차시키고 있는 석상이 있는데

아난다 존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좌상은 높이가 4.6M이고 열반상은 길이가 7M이며 아난다 조각상은

높이가 7M입니다.


앞전 글에서도 잠시 스리랑카의 역사를 말씀드렸지만 스리랑카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에 걸쳐서 인도의 촐라인들의 공격으로 나라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때에 원래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가 점령을 당합니다.

이때 비구니 승가도 절멸해 버립니다. 이후 불교왕국은 폴론나루와로 후퇴를 하여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13세기까지 융성하였으나 다시 촐라족의 침입으로 섬의 중앙부까지 쫓겨서 내려 오게 됩니다. 이후 두번다시 아누라다푸라나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기지 못하였으며 촐라왕국의 몰락과 함께 이 지역은 역사속에 잊혀졌는데 190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발굴이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플론나루와의 불상 바로 옆에 있는 열반상이다. 옆에 서있는 석상은 아난다 존자가 붓다의 입멸을 슬퍼하는 모습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