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파다의 첫번째와 두번째 귀절을 살펴보자. 그만큼 선언적 의미가 큰 것이다.
담마파바 1번 게송
Manopubbangama dhamma 마음은 그들에(제법) 앞서가고 (제법은 마음에 지배되고)
manosettha manomaya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을 주인으로 삼고)
manasa ce padutthena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bhasati va karoti va 만약 사람이 더렵혀진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cato nam dukkhamanveti 그에게는 반드시 괴로움(Dhkkha)이 뒤따른다 (그에게 괴로움이 따르는 것은)
cakkamva vahato padam 마치 수레를 끄는 소나 말의 발에 수레바퀴가 뒤따름과 같다.(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1번 게송은 아라한이었지만 봉사인 짝쿠빨라 비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벌레를 밝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동료 비구들이 의심하자 이에 대해서 붓다께서는 짝쿠빨라 비구가 봉사가 된 과보와 그 행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짝쿠빨라가 의도적으로 벌레를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듯이,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또한 벌레들이 거기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니라. 그는 이미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자이니라.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고의로 생명을 해치겠느냐?또 설사 그가 벌레를 밝아 죽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계행에는 아무런 손상됨이 없는 것이다."
담마파다 2번 게송
Manopubbangama dhamma 마음은 그들에 앞서가고 (제법은 마음에 지배되며)
mano settha manomaya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을 주인으로 삼고)
manasa ce pasannena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bahsati va karoti va 만약 사람이 청정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tato nam sukhamanveti 그에게는 반드시 행복이 뒤따른다 (그에게 즐거움이 따를 것은)
chayava anapayint 마치 그림자가 몸을 뒤따름과 같다. (그림자가 형태를 따라 떠나지 않음과 같다)
2번 게송의 인연담을 보면 붓다에 귀의한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난 맛타꾼달리의 이야기이다. 상당히 긴 인연담이지만 결론은 다음과 같은 선행선과를 말하고 있다.
" 사람의 마음은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느니라. 착한 행동이거나 또는 악한 행동이거나 간에 그 행동에는 언제나 마음(의도된 마음)이 앞서가는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일으켜 행동한 결과는 그 행동한 사람에게서 결코 분리되지 않고 그를 따라가느니라. 그것은 마치 그림자가 물체의 형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이 만든다
여기서 DHAMMA 라고 말하는 것은 각 번역자들이 사실/그들/제법등으로 번역하였지만 실제로는 오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 다섯가지의 모임이며 물질과 정신등 두가지로 구분을 한다.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모임중에서 마음이 네가지 모임보다 앞서간다는 것이 이 게송의 욧점이다. 즉 의도된 마음(선하거나 또는 악한 마음)에 따른 결과물이 곧 과보라는 것이다. 과보를 낳는 의도된 행위는 의도된 마음이 앞서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불교는 마음 공부이다. 다른 글에서도 심연생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올렸지만 여기서 다시 반복해 본자. 붓다는 수행을 할 때 안이비설신의나 또는 색성향미촉법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장소이고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괴로움과 즐거움이 일어나는 장소가 안이비설신이든가 아니면 색성향미촉 중의 하나라면 즉 코가 냄새를 느끼고 즐거움/괴로움이 일어나는 장소라면 코를 뜯어 내거나 냄새를 맡지 않으면 된다. 또는 눈이 괴로움이 일어나는 장소라면 눈알을 뽑아내면 된다. 냄새가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면 평생 냄새를 맡지 않으면 된다. 맛이 원인이라면 혀를 뽑아 버리면 된다. 하지만 우리들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눈코입을 뜯어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음식 먹고 소리듣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붓다께서는 그런 모든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장소가 내 몸이거나 또는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마음" 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눈도 그리고 보여지는 대상도 괴로움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어 내는 장소가 다름아닌 바로 마음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것이 눈이나 귀 그리고 그 대상이 아닌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당연히 눈코혀를 뜯어내거나 그 대상을 망치로 부수어서 없애지않고서도 얼마든지 괴로움의 소멸이 가능 한 것이다.
그럼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마노)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나마 - 루빠의 개념
정신과 물질’로 번역되는 나마-루빠(nāma-rūpa)는 두 단어가 합성어로 쓰여서 다른 개별적 존재와 ‘정신과 물질’로 구별되는 개인을 이루는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나마-루빠라고 할 때에는 개별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중국에서는 이 둘을 합쳐 명색(名色)이라고 번역했다. 오온에서 왜 정신과 물질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우리가 흔히 1) 몸만 있고 정신이 없으면 '시체'라고 한다. 2) 정신만 있고 몸이 없으면 '귀신'이라고 한다. 3) 몸과 정신이 모두다 있으면 '살아있다'라고 하듯이 존재의 명색은 별도로 구분될 수 없다.
나마(nama)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름이나 명칭이다.루빠(rūpa)와 반대되는 형이상학의 용어로서 개인을 이루고 있는 네 가지 비물질의 무더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물질로 번역되는 루빠(rūpa)는 오온(五蘊)의 처음인 색온(色蘊)으로 아비담마에서 28가지 물질로 나타난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몸과 마음이란 용어를 정신과 물질로 표현하는 것은 이 용어가 법의 고유한 성질(自性, sabhāva)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마(nāma)는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名蘊, nāma-khandhā)이고, 루빠(rūpa)는 물질의 무더기(色蘊, rūpa-khandha)로, 이러한 오온(五蘊)이 존재(有, bhava)를 구성하는 것이다. 12연기에서는 4번째에 해당하는 것인데, 식(識, vinnāṇa)이 있어서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을 조건으로 6가지 감각장소(六處, āyatana)가 일어난다.
감각기관으로써의 마음
‘마음’이라 번역한 마노(mano)는 과거 중국에서는 의(意)로 번역하였지만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의(意)와 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쓰는 의(意)는 마음이라는 뜻보다는 의지나 의도라는 뜻을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빨리어의 mano는 감각기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우선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각장소(處, āyatana)와 감각기능(根, indriya)과 문(門, dvāra)이다.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각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곳을 감각장소(處, āyatana)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이는 기능이 있고 귀에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감각기능(根, indriya)이라고 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 cakkhu-dvāra)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 cakkhu-āyatana)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 cakkhu-indriya)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문/감각장소/감각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마음(意, mano)이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문맥에 따라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이라고도 하고, 마음의 감각장소(意處, mano-āyatana)라고도 하고, 마음의 감각기능(意根, mano-indriya)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인 영역을 법(法, dhamma)이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대상인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미세한 물질, 마음의 작용, 열반을 들고 있다.
조금더 쉽게 설명을 해보자. 우리가 흔히들 6내외입처(여섯가지 감각기관과 대상) 라고 하는 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면 감각대상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오처(五處)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인, 식(識, vinnāṇa)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오식(五識)이다. 그리고 마음(意, mano)은 정신적 대상을 아는 감각기능(根, indriya) 혹은 감각장소(處, āyatana)이다. 즉 눈(眼, cakkhu)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色, rūpa)이라는 대상에 대한 안식(眼識, cakkhu-vinnāṇa)이 일어나고 귀(耳, sota)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聲, sadda)라는 대상에 대한 이식(耳識, sota-vinnāṇa)이 일어나듯이 마음(心, citta)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法, dhamma)에 대한 의식(意識, mano-vinnāṇa)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음은 정신적인 감각장소 혹은 기능인 것이다.
마노(마음)
상좌부 불교에서는 ‘마음’이라 번역되는 찌따(citta)와 ‘식(識)’이라 번역되는 윈냐나(vinnāṇa)를 동의어로 간주하며 사실상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한다면 찌따(citta)는 마음이나 식 등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쓰고, 윈냐나는 6개 감각기관(六根, indriya)과 6개의 감각 대상(六境, visaya)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아비담마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관련된 용어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1) 찌따(citta)는 √cit(생각하다)에서 온 술어로 경에서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 찌따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nāṇa)를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인다. 한역은 심(心)이라 하고, 영역은 mind, consciousness, state of consciousness 등이라 한다.
(2) 마노(mano)는 √man(생각하다)에서 온 술어로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능(根,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處, ā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한다. 한역은 의(意)라하고, 영역은 보통 mind라 한다.
(3) 윈냐나(vinnāṇa)는 vi(분리하여)+√jnāṇa(알다)로 분해되는 술어로 여섯 감각기능(六根) 혹은 여섯 감각장소(六處)가 그 각각의 감각대상(六境)과 부딪칠 때 일어난, 아는 마음이다. 그래서 윈냐나는 모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가지가 있다. 한역은 식(識)이라 하고, 영역은 보통 consciousness이라 한다.
(4) 쩨따시카(cetasika)는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도 마음의 작용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한역은 심소(心所)라 하고, 영역은 mental concomitant, mental factor라고 한다.
(5) 나마(nāma)는 문자적으로 ‘이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온에서 물질(色)을 제외한 느낌(受), 표상(想), 행(行), 식(識)의 4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정신을 지칭한다. 한역은 명(名)이라 하고, 영역은 mind, mentality라고 한다.
이렇게 찌따와 마노는 엄밀히 따지면 그 사용처가 분명 다르긴 하지만, 후대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찌따, 마노, 윈냐나를 같은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Dhs.10; Vbh.87 등)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찌따는 마노와 윈냐나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유식사상과 8식의 구조
여기서 복잡한 유식사상을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니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자.
유식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 원리를 관찰해 보면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가치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 세상의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마음의 인식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유심론(唯心論)적 성격은 근본불교에서부터 있었다. 초기에 육처(六處)와 십이처(十二處)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인식에 의거하여 존재를 고찰하는 설이다. 12처란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인식기관에 의거하여 여섯 개의 영역으로 구분한 설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외계의 대상이 실재한다고 보았지만 유식설에서는 외계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외계의 대상은 인식되는 대상으로써 인식되지 않았다면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식설에서의 대상은 인식되어진 대상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하고 제법의 무아(無我)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아설에 의해서 불교에서 ‘인격의 주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주체가 없으면 기억의 지속이나 업의 과보, 책임의 소재 등의 문제가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자업자득의 원칙을 강조하게 되면 자아의 자기 동일성이나 인격의 지속성이 요청된다. 그 때문에 제행무상과 무아의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인격의 지속이나 업의 과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부파불교의 커다란 과제였고 그리하여 이에 대해서 갖가지 새로운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부파불교에서 생겨난 갖가지 사상이 대승불교로 계승되어 인격의 주체 속에 잠재심, 무의식의 영역이 상정되게 되고 거기에 윤회의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상과 또한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과 유사한 여래장 사상이 확립되어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연기법에 입각하여 충분하게 반론이 되기도 한다. 또한 여래장 사상은 불교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이고 다양한 비판받고 있다.
팔식(八識)의 구조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아뢰야란 ‘간직한다’는 뜻이다. 종자를 소장하고 있는 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종자의 집합체 이외에 그 용기로서의 다른 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한다. 이 아뢰야식이라는 개념은 이미 <해심밀경>에 나타난다. 이 아뢰야식은 인간 존재의 근저에 항상 상존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으며 그 흐름은 일생동안 끊어지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생존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어떠한 행위나 행동을 하는 한 그것은 대개 선업이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 때에 아뢰야식이 업력의 소의처가 되어 그 속에 종자가 잠재하고 있다가 그에 알맞은 환경이나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모든 세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서 현상계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유가행파의 논사들은 선정 관행 중 심층적인 식의 흐름과 기능에 주목하여 종래 부파불교시대부터 탐구되던 두 가지 문제인 윤회의 주체와 번뇌와 아집의 주체 및 의근(意根)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 번뇌와 아집의 주체는 말나식의 식체(識體)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육식설(六識說)에다 아뢰야식(阿賴耶識)과 말나식(末那識)을 결합하여 팔식(八識)을 구성하였다. 팔식 가운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묶어서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하는데 이 식들은 각각 대상을 요별하고 분별한다.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킨다. 이 의식은 전오식으로는 볼 수 없고 만져볼 수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고 전오식과 함께 일어나거나 아니면 홀로 활동한다.
의식이 일어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번째는 전오식과 함께 일어나서 같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전오식과 함께 일어났지만 의식이 한눈을 팔아서 올바르게 인식되지 않은 경우이고, 두번째는 꿈을 꾸거나 망상, 공상 및 선정에 들 때와 같이 의식이 독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제8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일부러 우리가 어떤 의도적인 행위를 하고나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4종번뇌와 항상 같이하면서 업을 일으킬 때 이들에 의한 인상이나 여운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식은 제6식보다는 깊고 제8식보다는 얕은 제7말나식이라는 의식이 상정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7말나식을 일컬어 자아의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에 의하여 업을 지어서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제8아뢰야식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같이 항상 제7말나식의 집착력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럴 경우 제8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의 본래 의미는 유루법이 현행하는 사이, 곧 아집 등이 활동하는 동안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에 오르면 이 식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바왕가(Bhavanga)
초기불교는 6식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유가학파들이 8식에서 주장하는 아뢰야식과 같은 개념을 초기불교에서는 바왕가라고 한다. 바왕가(bhavaṅga)는 bhava(有, 존재)+aṅga(分, 요소, 부분)의 합성어로, 한 존재의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즉 존재를 지속시키는 마음이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하고 알시 어려운 마음으로, 의식이 없어 보이는 깊은 잠속이나 또는 기절했을 때에도 지속되는 마음이다. 이러한 바왕가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아뢰야식의 개념이 우리들에게 더 쉽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바왕가는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아주 미세하고 수동적인 마음으로 서양 심리학의 용어로는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과정(vīthi-citta)은 모두 이러한 바왕가를 거쳐서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간다. 즉 인식과정에서 특정한 대상을 대상으로 일어난 마음들은 일련의 인식과정을 거치고 난 뒤 사라진다. 그러면 바왕가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서 어떤 대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 전개될 때 까지 계속된다.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재생연결식의 대상을 대상으로 한 바왕가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왕가는 항상 강이나 흐름에 비유되며 바왕가의 흐름이란 뜻의 바왕가소따(bhavaṅga-sota), 또는 바왕가산따띠(bhavaṅga-santati)란 말이 주석서에 많이 나온다. 모든 마음은 대상 없이 일어나지 않듯이 이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도 임종직전 나타나는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jāti-nimitta) 중의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지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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