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깨달음은 목적이 아니라 행복에 이르는 수단

실론섬 2014. 3. 18. 00:51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실로 불교는 부처님의 ‘보리수 아래서의 정각’에서 비롯된 종교다.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중생 모두가 똑같이 ‘체험’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완전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문제는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이에 도달할 것인가다. 따라서 ‘깨달음’에 대한 논의의 촛점은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동국대 윤영해 교수는 ‘세계와 인간의 참모습을 바로 알고, 무취착의 삶을 사는 것이 불교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윤박사의 기고를 싣는다.


‘깨달음’은 ‘깨닫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흥미롭게도 이는 자동사이면서 동시에 타동사다. 자동사는 그 움직임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말하고 타동사는 그것이 타자를 향하는 경우를 말한다.

 

‘깨닫다’라는 타동사가 지향하는 대상은 세계와 인간의 참모습과 행복으로 가는 길로서의 ‘진리’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기의 진리[緣起法],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세 가지 진리의 기치[三法印]이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이며, 처음으로 설파한 진리이며, 일생 내내 가르친 진리이며, 결국 우리가 깨달아야할 대상으로서의 진리이다.

 

깨달음은 지극히 높고 어렵다는 선입견과 달리 이를 압축적으로 해명하면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 인간의 현존은 궁극적으로 괴롭다. 행복한 순간도 많지만 영원하지는 못해 결국은 괴로움으로 끝난다. 그런데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 이유는 ‘세계[法界]와 인간[五蘊]의 참모습[實相]’을 ‘모르고 착각[無明]’하여, 그것을 ‘소유하려거나 영원케 하려는[取着]’ 헛된 노력[業]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은 본성적으로 결코 소유할 수도 영원케 할 수도 없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타오르는 촛불처럼, 그림자처럼, 찰나찰나 변하기 때문이며 자성[無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든 인간이든 모든 존재는 순간순간 변하면서 흘러가는 요소들의 ‘연속적 흐름[相續, samtana]’의 현상으로서 아무런 자성이 없다. 이런 흐름 속에는 항존하거나 자존적인 실체는 결코 없기 때문에, 도무지 취착할 수 없다. 이를 모르고 취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취착하려드는 망상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다. - 이것이 ‘세계와 인간의 참모습’으로서의 진리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불교의 깨달음은 소유할 수 없음[無取着]과 실체 없음[無我]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이다. 적어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이란 이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한편 ‘깨달음’의 자동사로서의 의미는 그 행위의 영향이 자신에게 미쳐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 진리를 깨달으면, 세계와 인간의 참모습을 확고하게 발견하면, 취착[取着]하는 어리석음은 즉각 사라진다.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과 취착의 어리석음이 사라지면 바로 마음의 자유와 평안이 이루어진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마음상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결코 신비화시키지 않았다. 세계와 인간의 본성[性]이 찰나찰나 연속하는 요소들의 집합적 흐름일 뿐 무자성임을 알면[見], 그로써 누구든 나의 것과 나에 대한 갈망[tanha, 渴愛]을 풀고 마음의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반이고 해탈이다. 깨달았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마음의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 그것의 더도 덜도 아니다.

 

깨달음이란 육체적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영생을 누리거나 초월적 능력으로 기적을 행사하거나 하는 신비적 무엇이 아니다. 깨달은 이에게 주어진 이 이외의 찬사들은 존숭하는 이를 향한 절제할 수 없는 헌사(獻辭)일 뿐이다. 깨달음이란 죽음 앞에서마저 완전한 자유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변화된 확고부동한 마음의 상태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이는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은 이며, 그 길을 감으로써 완전하게 행복한 이다. 깨달은 이는 완전히, 궁극적으로 행복하다.

 

부처님이 제시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법은 아주 분명하다. 그분이 제시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세계와 인간의 참모습을 통찰하는 일이다. 히브리 사람들이 초월자가 들려주는 진리를 소리로 ‘들으려’ 했다면, 그리스 로마인들은 진정한 실재를 형상으로 ‘그려’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계와 인간의 참모습을 ‘통찰[觀]’함으로써 진리를 찾았다.

 

부처님이 제시한 통찰의 방법은 그것을 집중적으로 거론한 〈대념처경(大念處經)〉 등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위빠싸나(vipassana: 관법).싸띠(satipattana: 마음챙김).사마타(samatha: 마음집중)이며, 쁘라즈냐(prajna: 지혜)다.


 

세계와 인간 등 일체 존재는 자성이 없으며 그래서 결코 취착[取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투철한 통찰의 집중과 반복, 즉 일체 존재는 소유할 수도 영원케 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집중된 통찰의 반복이 부처님이 가르친 가장 직접적인 수행법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지혜며, 우리는 이 지혜로 깨닫는다.

 

물론 이것들이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전부는 아니다. 사실 그간 불교라는 이름으로 고안된 수행법들은 모두 깨달음을 위한 방법일 수 있다. 통찰을 통한 지혜뿐만 아니라 지계(持戒)도 예배도 기도도 만트라(mantra: 眞言)나 무드라(mudra: 手印)도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깨달음을 위한 불교 수행의 특징은 수행자의 품성과 능력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는 불교사가 성취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다. 병에 따라 약이 다양한 것처럼 수행자에 따라 깨달음을 성취하는 수행법은 다양하다. 이처럼 시대와 사회에 따라 가장 적합한 수행법은 새롭게 고려되어야 한다. 아니,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다만 ‘오래 전에 이미 제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했던 방법이지만 요즈음에는 이를 깨달음을 위한 수행법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뿐’이라고 해야 옳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표현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불교’를 글자 그대로 ‘깨달음의 가르침’ 혹은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으로 읽는 것은 사실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불교’를 이렇게만 읽는다면 문제가 있다. 불교를 ‘붓다, 즉 깨달으신 분의 가르침’으로 읽었으면 좋겠다. ‘불교’를 굳이 이렇게 읽고 싶은 것은 그분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이 깨달음에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그분의 궁극적 목적도 아니었고 우리들의 궁극적 목적이어서도 안 된다. 아니 깨달음은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어야 한다. 깨달음은 고통을 이기고 행복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때의 그 행복이란 나 개인만의 행복이 아니라 세계의 행복이어야 한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그것은 깨닫고 난 뒤에 한 일이 더 많았던 그분을 생각해보면 너무도 자명하다. 만일 그분의 목적을 굳이 ‘깨달음’이라고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그분 한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라 세계의 깨달음, 우리 모두의 깨달음이라야 한다. 자신의 깨달음은 세계의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었을 뿐이다.

 

깨달음의 수행이란 달리 말하자면 무취착과 무아의 실천이다. 앞서 말한 대로 통찰의 수행이란 무취착과 무아의 진리를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이란 말은 아무래도 마음보다는 몸과 가깝다. 수행이란 무취착심, 무아‘심(心)’ 보다는 무취착행 무아‘행(行)’과 가깝다. 무취착과 무아를 몸으로 행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수행법이다. 무취착행과 무아행, 즉 내 것 없음과 나 없음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비행이다.

 

필자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자비행으로 안다. 그간의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온전한 자비는 깨달음을 성취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상하가 그렇게 명시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자비는 결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자비가 깨달음의 수행법이 될 가능성은 무취착행과 무아행의 실천이 자비행이라는 자체논리 외에도, 대승 혹은 보살행이라는 말마디를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대승 보살행에서 깨달음은 자기의 깨달음이 아니고 세상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보살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자비를 위해서 미루어지고 유보된다. 깨닫고 나서야 자비행으로 나서려 한다면 어느 누구 몇 사람이나 자비를 실천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을 위해 일생을 화두 하나로 좌복 위에서 보내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대신에 자비행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결코 한 순간도 손해 볼 일이 없다.

 

깨달음 목적주의는 반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을 ‘믿는다’. 우리는 부처님을 ‘믿기에’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더라도 궁극적 목적이 자비임을 믿는다. 깨달음의 사회화란 깨닫고 나서 그것을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비행의 실천을 통해서 나와 세상이 함께 깨달아가는 것으로 알아듣고 싶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깨달음의 종교이기보다는 자비의 종교다. 그것을 새롭게 선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시대적 과제라고 믿는다.

 

윤영해/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