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에는 상불경보살품(常佛輕菩薩品)이 있다. 상불경보살은 누구나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여, 나는 당신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경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다 보살행을 닦아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어법도 그렇지만 경전도 도처에 부정문으로 진리를 설파한다. 따라서 경전에서 "경시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존경한다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면 된다. 즉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언젠가는 부처가 될 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보면 된다.
상불경보살은 언제나 이 말을 되풀이했으므로 [상불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런 상불경보살의 언행에 대해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사람이란 자기를 높이 평가해 주기를 바라고는 있어도 그 정도가 지나칠때에는 도리어 경멸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모든 사람은 부처가 될 성품을 지녔으며, 대승의 보살들이 또한 모든 사람들을 성불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보살행을 펼치고 있는 이상 누구나 언젠가는 성불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상불경보살의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도리혀 화를 내며 반발했다.
[나를 존경한다니 무엇을 존경한단 말인가? 더구나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하니 이는 나를 비꼬우고 얏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래서 그들은 상불경보살을 향해서 돌맹이등을 마구 던졌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성내지 않고 그 말을 되풀이 했다.
상불경보살의 보살행은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름]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철학은 [너와 나]라는 관계를 중요시 한다. 나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상대인 너, 그러한 너로부터 오는 부르는 소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자기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누군가와 마주 대할 때 그 상대로부터 끝없이 어떤 부름을 받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부름소리는 아무리 거부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온다. 그리고 본래의 자기를 되돌아 보게 한다.
화엄경에는 [초발심이 곧 성불]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처음으로 불도를 찾고자 발심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인연으로 자기 자신안에 부처님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종자가 과거세로부터 지금까지 줄곳 이어져 와서 그 종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발심이라는 것이 성립된다. 그러니까 발심이란 곧 성불이라는 말이 성립이 된다.
불교에서 볼 때 부름의 소리는 부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의 입장에서 볼 때 부처님에게서 직접 듣는게 아니라 너라는 상대방을 통해서 온다고 보는게 옳다. 문제는 그 목소리를 만날 때마다 감동하면서 자기를 반성하고 그 소리에 대답하고자 하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만약에 우리가 부처님의 부름소리에 청정한 믿음을 낸다면 부처와 나 사이의 먼 거리가 일시에 없어지고, 부처와 나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상불경보살은 오늘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나는 너를 존경한다. 너는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몸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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