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密多經)을 줄인 말이다. 흔히들 금강을 가장 견고한 물건인 다이아몬드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불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인드라'라는 신이 가지고 있는 바지라(바지라(跋折羅,Vajra. 지상에 떨어지는 천둥번개)로 보는게 옳을 것 같다. 어찌됐든 반야가 번뇌를 번개처럼 단칼에 절단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 경전은 공(空)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경전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공사상(空思想)이다. 금강경은 우선먼저 아상(我相. 나라는 관념), 중생상(衆生相. 중생이라는 관념), 수자상(壽者相. 목숨이 있는 자(者)라는 관념), 인상(人相. 개아(個我)라는 관념)을 버리고 포기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금강경은 곳곳에 부정의 논리(부정법을 사용)로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했다고 해도 사실은 아무도 구제하지 않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보살에게 중생이라는 관념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보시도 같은 논리를 편다. 누구를 도울 경우 그에게 내가 그 일을 한다는 생각, 누구에게 베푼다는 생각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보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부처님. 보살에게 적용하게 되면 부처님. 보살이 아니기에 부처님. 보살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만약 스스로가 부처님이나 보살이다라고 하는 관념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도 보살도 아닌 까닭이다.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묻는다.
[사리불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더없이 바른 깨달음이라 해서 깨달은 따위의 법이 무엇이든 있을 것인가. 여래가 설한 법들이 무엇이든 있을 것인가]
사리불은 이렇게 대답한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제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여래께서 더없이 바른 깨달음이라 해서 깨달으신 따위의 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래가 설하신 법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無所設).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부처님께서 아무것도 설법한 것이 없다라고 한다면 비상식적인 것으로 들릴수도 있다. 그러나 금강경이 주장하고자 하는 진리에 의하며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은 스스로가 법을 설한다는 의식이나, 누구에게 설법한다는 의식이나, 어떤 내용을 설법한다는 의식을 떠나서 설법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스스로까지도 부정을 하는 진정한 공(空)의 입장을 표명한다. 즉 이러한 무집착은 불교에 대한 집착마저 버려야 하며, 불교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가 된다고 철저하게 무집착을 추구를 한다.
이런 논리를 세간사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이란 신분을 잊고, 교사가 교육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군인이 군인의 의무를 하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행태를 진정한 무집착이고 초월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무집착은 반드시 국회의원이나 교사나 군인등이 자신의 위치나 의무를 잊어 버리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회의원이나 교사나 군인이나 모두다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바 일을 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권력욕과 명예욕과 재물욕에서 해방되라는 것이다. 즉 국회의원, 교사, 군인이라는 의식이나 관념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러한 장애나 탐욕등이 없어질 것이기에 오히려 보다 훌륭한 국회의원, 교사, 군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무집착의 초월은 대립을 안으로 포용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그 대립을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상생의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세간사는 무엇이나 돈이나 명예욕등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집착에서 벗어나고 네가지의 상(相)의 관념에서 벗어 날 수만 있다면 [무소설 無所設]이라는 금강경의 말씀이 보다더 우리에게 큰 경종으로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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