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초기경전으로 본 수행과 깨달음

실론섬 2014. 3. 20. 18:50

팔정도 닦아야 진정한 불자의 삶 

각묵 스님 특강 ‘초기경전으로 본 수행과 깨달음’  

사성제 꿰뚫어 아는 것이 깨달음 

팔정도, 중도이자 수행의 키포인트 

볼교핵심 모르고 화두 들면 안돼

 

이날 법회에서 각묵 스님은 불교의 핵심을 이해한 뒤 수행을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다.

“깨달음은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

물음은 더 깊이 들어간다. 역시 답하는 이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불교적 답은 무엇입니까?”

가느다란 목소리의 대답이 나왔지만 각묵 스님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각묵 스님이 원하는 답은 초기경전에 근거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당시 널리 통용됐던 인도 언어인 빠알리어로 기록된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초기경전. 이들 질문에 대한 초기경전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조계종 중앙신도회 불교인재개발원 주최로 8월 18일 조계사 극락전에서 열린 각묵 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초청 ‘초기경전으로 본 수행과 깨달음’ 특강 법회 내용을 요약한다.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깨달을 것인가.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초기경전에서는 깨달음을 사성제, 팔정도, 연기, 오온의 무상/고/무아의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사성제이다. 사성제(四聖諦)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께달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숫타니파타> 558번째 게송에 “나는 알아야할 바를 알았고, 닥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알아야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고성제(苦聖諦)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다는 것은 도성제(道聖諦)를 말한다. 버려야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집성제(集聖諦)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꿰뚫어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 깨달음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나?


부처님의 최초 설법을 담은 <초전법륜경> 등에 보면 부처님은 중도(中道)를 깨달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중도와 함께 어김없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팔정도다. 중도를 한마디로 말하면 팔정도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설법하신 것도 팔정도다.

 

팔정도(팔정도)란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 한 제자가 ‘어떤 것이 진정한 수문집단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불교 승가가 진정한 사문집단이다. 왜냐하면 팔정도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초기경전에서 깨달음이란 사성제를 꿰뚫어 안 것이고, 팔정도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철견한 것이다. 중도는 사성제의 마지막인 도성제이기도 하다. 도성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 수단이며, 여덟 가지가 있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이 팔정도라는 것이다. 사성제에는 팔정도가 도성제로 포함이 되고,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이다.


팔정도야말로 수행의 핵심이다. 화두를 들고 있다고 해서 수행이 아니다. 사성제나 팔정도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없이 하는 수행은 ‘수행 테크닉’만 키울 뿐이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한다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오온(五蘊)이다. 오온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로, 현상세계 전체의 구성요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모두가 무아(無我)다. 오온으로 나 자신을 해체해서 보면 무상(無常)이 보이고 고(苦)가 보이고 무아(無我)가 보인다는 것이다. 즉, 너도 오온이고 나도 오온이다. 불교공부 30년 해서 오온이라는 답이 안 나온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법회 때마다 외는 <반야심경>의 핵심도 바로 오온이다. 모든 것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무상이 드러난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그리고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찰나적인 것이어서 내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실상을 나타낸 삼법인(三法印)이다.


무상을 통해서 해탈하면 무상(無相)해탈, 고를 꿰뚫어봐서 실현되는 해탈을 (바라는 것이 없다는) 무원(無願)해탈, 무아라고 꿰뚫어 안 것을 공해탈이라고 한다. 무상 고 무아는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과 연결된다.


▷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고 해야 한다. 불교는 부처되는 가르침이다. 모든 불자들이 항상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깨달음이 무엇인가이다. 이상에서 정리했듯이 부처님은 초기경전을 통해서 깨달음을 다음의 넷으로 정의하고 계신다. 그것은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 중도를 아는 것, 12연기를 아는 것,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아는 것의 넷이다.


이러한 불교의 핵심에 대한 이해 없이 깨달음을 마치 로또복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한국불교에는 없지 않다. 복권 하나 사놓고 인생역전이라는 희망 속에 일주일을 기다린다. 마찬가지로 화두 하나 받아놓고 복권 보관해놓듯 장롱 속에 밀어 넣고 ‘나에게도 화두가 있다’고 뿌듯해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로또처럼 탁 터져서 화두를 타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건 수행이 아니다. 불교의 핵심에 대한 이해없이 한 방에 화두 깨치면 된다는 식의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 없는 그 어떤 수행도 의미가 없다. 이렇게 하면 평생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수행의 핵심은 팔정도다. 계율을 지키는 것도 팔정도의 정어, 정업, 정명에 해당하므로 팔정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를 닦는 것이다. 도란 다름 아닌 팔정도다. 팔정도를 닦는 삶이 진정한 불자의 삶이자 사성제를 완성시키는 삶이요, 중도와 연기를 실현하고 오온의 무상과 고와 무아를 실현하는 길이다.

 


정리=한명우 기자(mwhan@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