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청정도론에서 찾아 본 재가자의 수행법

실론섬 2014. 3. 17. 03:25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찾아본 재가자의 수행법 

김재성 불교와 문화 대한불교진흥원 2004 09

 

 

청정도(淸淨道)의 '청정'은 열반(涅槃)을 말합니다. 열반을 의미하는 청정에 도(道)를 합해서 청정도가 되면 그 의미는 '청정에 이르는 길', '열반에 이르는 방편(方便)'을 말합니다. 즉 '청정한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청정에 이르는 길'인 수행법을 뜻합니다.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해 놓은 책이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위해 가르침을 펴신 단 하나의 이유이면서 목적인 '열반',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을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청정도론』인 것입니다.

 

이 책은 기원 5세기, 지금부터 1500년 전에 인도 출신의 붓다고사(Buddhaghosa)라는 스님이 스리랑카로 건너와서 지은 최초의 서적입니다. 붓다고사라는 스님의 법명의 유래는 스님이 말씀하시면 마치 부처님의 음성과 같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붓다고사는 '불음'(佛音, 부처님의 목소리) 또는 깨달음의 소리라고 해서 각음(覺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은 빨리어로 지어진 주석문헌으로 경율론 삼장을 해석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정리한 것입니다. 

 

청정에 이르는 길

 

책의 내용은 청정이라고 하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절에 가서 예불을 올릴 때, 5분향례를 합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할 때 앞의 계정혜 세 가지를 통해서 해탈에 이른다는 가르침이 예불의식을 통해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정도론』은 총 23장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1, 2장은 계(戒)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고,

3장부터 13장까지는 정(定)이 설명되어 있고,

14장부터 23장까지는 혜(慧)에 대한 설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정혜를 순서대로 닦아 나갈 때 열반이라고 하는 청정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청정도론』의 간단한 윤곽입니다.

 

계정혜, 삼학을 통해서 불자들이 수행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불교기초교리에 나오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이고 자주 듣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실제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삼학의 의미

 

삼학의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계는 계율이라고도 하는데 계와 율은 실제로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먼저 율은 출가한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지켜야 하는 승단의 규율을 말합니다. 승단이라고 하는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서 지켜야만 하는 규율인 것이죠. 따라서 타율적인 규범을 말합니다. 이러한 율을 깨면 승단에 의해서 제재를 받습니다. 사회에서 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율은 살생, 도둑질, 거짓말(큰 거짓말), 음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기면 승단에서 쫓겨납니다. 사회로 보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면서 감금된 상태, 추방됩니다.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남방불교에서는 포살(보름에 한 번 하는)때 율의 조항을 외우고, 그동안 율을 어긴 것이 있으면 스스로 참회하고 거기에 대한 적당한 제재를 받습니다. 학교로 말하면 한 달 동안 정학을 당하기도 하고, 한 달 동안 독방살이를 하기도 합니다. 잘못의 경중에 따라서 승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도 박탈당하지요. 이처럼 율에 의해서 엄격하게 출가집단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계와 율의 차이점

 

율 속에 계(戒)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는 무엇일까요? 계란 자율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적 규범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재가제자들에게는 율은 없고 계만 있습니다. 반면에 스님들은 율 속에 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계는 오계[五戒 : 殺盜淫妄酒(살도음망주)] 라고 되어 있어 항상 지켜야 하는 규범입니다. 계는 마음으로 지킵니다. 설령 내가 길을 지나가다 모르고 개미를 죽일 수 있잖아요. 이것은 고의적으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계를 깬 것이 아닙니다. 동기와 의지에 따라서 계를 지키고 계를 파하기도 하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로 지켜야 하는 계입니다. 남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계입니다.

 

그렇다면 계를 깼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순간 참회하고 다시 계를 지키려고 하면 됩니다. 부처님께 절하면서 삼보에 귀의하고 부처님께 자기 마음으로 맹세를 하면서 '다섯 가지를 다시 지키겠습니다.' 하면 되는 것이죠. 이 오계를 일상생활 속에서 철저히 지키고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불살생(不殺生)은, 특히 여름에 모기를 잡는 것이나 집에 바퀴벌레 보이면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불투도(不偸盜), 도둑질 역시 사소한 남의 물건이라도 취하면 안 되는 것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볼펜 한 자루, 연필 한 자루도 남의 것을 취하면 안 되고, 땅에 떨어진 물건조차도 내 것으로 취하면 도둑질에 해당합니다. 남의 물건을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라 주어지지 않은 물건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가 돈이 떨어져 있으면 경찰서에 가져다주든지, 그냥 두고 가는 것이 계를 지키는 사람의 행동인 것입니다.

 

불사음(不邪淫),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은 자기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불망어(不忘語), 거짓말은 안하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거짓말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에 해당하니까 쉽지 않습니다.

 

불음주(不飮酒,) 완전한 음주도 지키기 어려운 계입니다. 음주가 갖고 있는 문제는 음주를 한 다음에 일어나는 2차적인 마음의 게으름, 방종함 등이 문제가 되겠지요.

 

다섯 가지 계를 집에서 지키려고 하면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 다섯 가지 계는 깨뜨린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 계의 정신입니다. 다시 지켜야겠다고 마음먹고, 또 지키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에 가서 오계를 자주 받고, 부처님께 늘 지키겠다고 스스로 마음먹는 것이 계의 정신입니다. 계는 스스로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울타리이기 때문에 그 울타리를 내 잘못으로 망가뜨렸다고 해서 다 쓰러뜨리면 도둑이나 외부사람들이 쉽게 들어오겠지요. 한쪽 귀퉁이 울타리가 무너졌으면 다시 고쳐서 이어 놓으면 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계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설령 깨뜨렸다고 해도 참회하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계의 정신입니다. 

 

계와 업의 과보

 

계를 깬 것은 자기한테 나쁜 업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그 나쁜 업(惡業)의 과보(果報)는 자기가 받습니다. 그런데 그 과보를 받을 때 우리는 결과로서 받으면서 또다시 악업을 짓습니다. 그러면 악업, 나쁜 행위에 대한 결과는 계속 이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행위에 대한 결과를 받으면서 마음으로 이젠 나쁜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악업은 단절됩니다.

 

업은 마음의 의지작용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업은 마음으로 짓고, 말로 하고, 행동으로 합니다. 오계를 열 가지로 펼치면 십선계(十善戒) 또는 십선업(十善業)이 되는데, 그 열 가지 중에서 말(語)로 짓는 업이 네 가지나 됩니다. 절에서 기도할 때 항상 독송하는 『천수경』에 십악참회(十惡懺悔)가 나오는데, 그 십악참회를 짓지 않는 것이 십선업입니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의도적인 행위를 좋게 만드는 것, 이것이 십선업이고, 이것을 나쁘게 짓는 것이 십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천상에서 태어나고 싶으면 십선업을 닦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부처님이 재가 수행자들이 닦아야 할 덕목으로 강조한 가르침입니다. 사실 『청정도론』은 재가자가 이해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청정도론』과 초기경전 가운데에서 재가자를 위한 법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는 보시(施),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계(戒)를 스스로 지켜라.

셋째는 마음을 닦으라(修)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재가자의 실천 항목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면서 남방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베풀라는 것은 탐욕을 덜어 내라는 가르침이고, 계를 지키는 것은 탐심과 진심에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살생(不殺生)은 화나는 마음, 진심(瞋心), 분노(忿怒)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탐심(貪心)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가운데 욕망과 분노를 계로써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탐심과 진심을 계로써 막아 준 다음에 마음의 향상을 이루기 위해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계정혜 삼학의 선정과 지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닦을 수 있는 수행법으로서 자비관(慈悲觀)을 제시하셨습니다. '자비'할 때 자(慈)와 비(悲) 중에서 자관만 하셔도 좋습니다. 자관의 수행을 닦아서 마음을 안정시킬 수만 있어도 천상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수행(修行)의 세 가지 측면을 어렵게 생각지 마시고 행동으로 옮겨 보는 겁니다.

 

보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죠. 내가 가진 재물을 나눠 주는 것은 가장 쉽고 낮은 단계의 보시인데도 우리는 그것조차 잘 못합니다.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고 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인데, 큰 보시입니다. 재물을 나눠 주는 것보다 더 큰 보시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최상의 보시는 법(法)보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눠 주는 것이죠. 법보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가자들은법에 대한 보시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애써 모은 재물을 승단에 보시하거나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법에 대해서도 조금씩 나누려고 애를 쓴다면 세 가지 보시가 갖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를 실천하기 전에 하기 쉬운, 1차적으로 해야 하는 재가자의 실천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계(五戒)를 자발적으로, 즉 마음으로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밀린다왕문경』에서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라는 인도 스님과 대화하는 내용 중에 계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바로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잘못 중에 어떤 것이 더 과보가 큽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법적인 형량으로 보면 고의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지은 죄가 더 무겁겠지요. 그런데 불교적으로 보면 모르고 지은 죄가 과보가 더 크다고 합니다. 모르고 지은 잘못은 그것이 잘못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잘못한 줄 알고 지은 죄의 과보는 마음에 잘못되었다는 것이 남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싹이 튼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 줄 분명하게 아는 것은 계를 지키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 됩니다.

 

사실 계를 저절로 지킬 수는 없습니다. 계정혜 삼학은 그래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데도 기본적인 지혜가 없으면 지키기 힘듭니다. 『밀린다왕문경』에 나오는 얘기처럼 잘못을 잘못인 줄 모르고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따라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법문도 듣고, 부처님 가르침도 보고, 무엇이 정말로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지, 무엇이 청정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고 도움이 되는지 그 기준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청정에 이르는 기준은 삼독심을 버림

 

그 기준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짓거나, 말을 하거나, 행동을 했을 때 우리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있고, 반면에 불편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면 마음이 불편해 지겠죠? 화나면 불편해지겠죠? 어리석음에 빠지면 불편해지겠죠?' 부처님께서는 살다 보면 욕심부리고, 화내고, 어리석음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때 마음이 불편해지고,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을 스스로 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교에서 버리는 것과 받아들이는 기준이 분명합니다. 바로 탐진치가 기준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버려야 되는 뿌리이고 탐욕이 없음, 성냄이 없음, 어리석음이 없음은 받아들여야 할 것의 뿌리입니다. 앞의 것은 불선(不善)의 뿌리이고, 뒤의 것은 선(善)의 뿌리입니다. 좋지 않는 것과 좋은 것의 기준은 탐진치가 있고 없음입니다. 탐진치는 우리를 청정하게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때이며 번뇌입니다. 번뇌를 『청정도론』(대림 스님 역, 2004)에서는 오염원이라고 번역했는데, 탐진치는 바로 오염원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탐진치를 버린 상태는 오염원에서 벗어난 상태이며, 열반입니다. 이 열반으로 가까이 가는 것의 선의 뿌리가 됩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탐심과 진심을 막는 일을 도와줍니다. 어리석음까지 뿌리뽑으려면 선정의 힘을 바탕으로 한 지혜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청정도론』에 전해지고 있는 수행 방법의 차제입니다. 부처님이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마지막에 수행을 하라고 말씀 하셨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수행은 스님들처럼 하루에 10시간씩 혹은 14시간씩 집중적인 수행을 하라는 말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 재가자들이 생계를 놓고 수행에 전념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절에서 참선하는 방법이나 기도하는 방법, 수행하는 방법을 배운 재가불자들이라도 매일매일 30분에서 1시간씩 정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살면서 돈 버는 일이 바쁘고, 돈 번 것을 모으고, 쓰기 바쁘기 때문에 정신적 향상의 길은 거의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때가 묻는지, 벗어나는지, 이런 것은 관심을 두고 살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앉아서 하루에 다섯 시간씩 좌선하고, 다섯 시간씩 행선하고 '네 마음을 보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재가자와 출가가의 공통 수행법, 자비희사

 

부처님께서 재가자들에게 또 출가자나 깨달은 사람에게까지 중요하게 강조하신 수행법이 있습니다. 바로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에게 자비희사를 닦으라고 늘 강조하셨고, 부처님의 외아들인 라훌라가 사미 시절이었을 때 자비관에 대해 직접 설하신 경전도 남아있습니다. 라훌라 존자는 열아홉 살 때 아라한이 되었는데 아라한이 되기 전의 가르침과 아라한이 된 후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전에 남아 있습니다. 라훌라 존자의 스승은 사리불이었지만 부처님은 사미인 라훌라에게 항상 자비희사를 닦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희사를 닦으면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자(慈)심을 닦으면 분노에서 벗어나고,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비(悲)심을 닦으면 남을 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납니다. 남을 측은하게 생각하면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희(喜)심을 닦으면 불쾌감에서 벗어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게 불쾌함입니다. 남이 잘 됐을 때 배가 아픈 마음이 사라지고 오히려 마음으로 기뻐해줍니다.

사(捨)심을 닦으면 대립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벗어납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대립의 마음에서 벗어납니다.

 

『청정도론』에서 자심(慈心)의 열한 가지 이익에 대해서 적어 놓았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잘 닦고, 그 마음으로 살면 사는 동안에도 행복하고, 잠을 잘 때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고, 깨어나서도 편안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사랑하고 천신들이 보호하며 안색이 좋고, 마음의 집중이 잘 됩니다. 죽을 때 헤매지 않고 죽으며, 죽어서도 범천에 태어나는 등의 이익이 있습니다.


핵심은 살아서 편안하고, 죽을 때 편안하고, 죽고 나서도 편안하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자비희사의 마음은 탐심과 진심, 어리석음까지도 다스려 주기 때문입니다.

 

자심(慈心)은 나를 포함해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잘 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처님, 자비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때, 이 말은 곧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또 모두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비심(悲心)은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연민의 마음입니다. 내가 괴로우면 연민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이 가련하면 '저 사람도 힘들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통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연민의 마음입니다.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인 비심은 연민의 마음입니다.

 

희심(喜心)은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심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만약 옆 사람이 정말 잘됐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때 '정말 잘 됐구나!' 하고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마음, 내 일처럼 기뻐해 주는 것이 희심입니다. 희심은 우리가 복을 짓는 데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마음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보시할 능력이 없을 때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도 희심입니다. 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질로 하는 겁니다. 희심은 내가 보시를 안 해도 보시를 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하는 힘이있습니다.

 

사심(捨心)은 네 가지 가운데 가장 어렵습니다. '버릴 사(捨)' 자를 쓰는데 '버린다'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좋다, 나쁘다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이 있어도 당장 그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마음이 바뀌지요. 반면에 나한테 조금만 힘들게 하면 마음으로 거부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은 대립관계에 있는 마음입니다. 좋고 나쁜 것이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사심은 당장 괴롭거나 즐겁거나 하는 것이 결국 '업의 과보'라는 것을 일단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기분 좋은 과보만 받으려면 기분 좋은 선업만 짓고 살면 되는데 우리는 선업만 짓고 못 살지요. 그래서 그런 결과들이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좋고 나쁜 상황에 닥쳤을 때 지금 내게 다가오는 것이 내 업의 산물이라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 지금 내가 짓는 업이 앞으로 내 인생에 다가올 업의 원인이라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업을 이해할 수 있고,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좋고 나쁘다는 대립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좋다 혹은 나쁘다 가리는 마음, 좋은 것에 집착하고 나쁜 것을 뿌리치는 마음에서 벗어나 좋은 것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나쁜 것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평정심입니다. 사심은 지혜와 관계가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하면 대립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부처님은 재가자들이 수행할 때 자비희사를 늘 바탕에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희사는 선정 수행을 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보호해 주는데 가장 강조되는 수행법입니다. 계정혜 삼학도 그렇고 자비희사, 사무량심도 그렇고 모두 내가 가는 길이고 내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로 오면 남을 위해서 닦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선행의 결과는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을 하는 것이죠. 이 정신은 초기불교부터 근본사상에 깔려 있습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는 자리와 이타는 불교의 기본 정신입니다.

 

지금 내가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 것을 '가족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핀트가 어긋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마음의 수행을 위해서 절에 나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과 수행이 가족들에게 저절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자식들에게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는데….' 하는 말을 한다면 자식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겁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진정한 기도이고 수행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자비관)을 일으켜야 합니다. 

 

일상의 수행법

 

물론 그 모든 존재에 자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자식한테는 애착이 있지요. 그 애착 때문에 중생세간은 유지되는데 애착이 있기 때문에 욕계라고 합니다. 남녀간의 욕망이 기본 바닥에 깔려 있고 우리는 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죠. 욕계에서 제일 높은 곳은 도리천이에요. 그 밑으로 천상세계가 계속해서 나눠져 있는데 우리 마음 씀에 따라서 세계는 나누어집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우리와 똑같이 살면서도 삼계에서 마음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 욕망의 세계에서 더 이상 걸릴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삶이 우리의 삶과 다른 이유입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이 욕계의 틀 속에 갇히지 말고 수행을 마음 속에서 일으켜야 하고 자관을 닦아야 욕계의 번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자관의 수행을 하고, 모든 존재들을 위해서 자관(자비관 자애관 metta)을 하고, 그 다음에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위해서 자관을 할 수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관은 스스로에게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존재들을 위해 마음을 일으키는 거죠. 모든 존재 속에는 자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듯이 모든 존재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자관이라는 거죠. 자관을 잘 닦으면 독이나 무기나 불이나 물이나 자연재해 혹은 다른 인간에 의해서 죽지 않는답니다. 천신들이 강력하게 우리 삶을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절에 가면 신장들이 보호해 준다고 하잖아요. 사천왕은 욕계, 즉 인간세계 바로 위에 있는 사천왕천에 살고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천왕들인데 그 천신들이 보호한다는 거예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의 공덕

 

자관을 잘 닦은 후에는 부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이 그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하는 것이 가장 쉽지 않은 마음을 놓치지 않는 수행, 마음챙김입니다. 이것만이 확고한 디딤돌인데, 가장 어려운 단계이므로 먼저 자관을 닦고 부처님을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부처님이 갖고 계신 좋은 덕,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해서 완성시킨 덕을 떠올리는 겁니다. 바로 여래(如來) 십호(十號)에 표현되어 있는 덕입니다. 그 중에 초기불교와 남방불교는 하나의 모델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응공(應供)입니다. 아라한의 특성은 번뇌를 없앤 경지, 탐진치를 완전히 끊어 버린 성인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 순간은 바로 아라한이 된 순간이셨습니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부처로서의 덕목이 다 갖춰진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 다섯 비구가 아라한이 되어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섯 명의 붓다가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세상에는 부처님이 한 분이며, 아라한이 여섯 분 계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명호 중에서 '아라한'은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지금 초기불교나 남방불교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아라한은 어떤 점이 다를까요? 아라한은 번뇌를 없애고 스스로 내적인 문제를 해결한 경지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아라한과 다른 어떤 능력, 즉 중생들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 중생의 마음을 알고, 업을 알고, 번뇌를 압니다. 그래서 '저 중생에게는 어떤 법이 필요하겠구나!' 꿰뚫어 보십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는 바로 교화의 능력입니다.

 

부처님은 오랜 세월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선행을 닦은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법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업을 읽고, 번뇌를 읽어서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힘 있는 분이에요. 부처님은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고 청정한 길에 이르게 하는 길을 깨달은 분이시기에 부처님께 귀의하고 마음을 낸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내 삶을 아라한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굉장한 메시지입니다.

 

'당신이 갔던 길을 제가 가겠습니다.', '당신이 끊었던 번뇌를 저도 끊겠습니다.' 하는 의지를 담아서 '부처님!' 하고 부르면 그 마음이 나를 보호해 준다는 겁니다. 『청정도론』7장에는 이 염불의 공덕이 자세히 나옵니다. 

 

정념(마음챙김 sati)의 공덕

 

자관과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 그 다음에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수행이 바로 마음챙김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가, 내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놓치지 않는 마음가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알고 있는데 본래 뜻은 '자기를 섬으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등불'은 산스크리트어로 섬'을 뜻하는 말과 같거든요. '디파(diipa)' 라고 합니다.

 

섬은 홍수가 났을 때 안전한 곳이잖아요. 인도는 등불 보다는 섬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우기 때 3, 4개월 동안 하늘이 구멍 난 듯이 비가 옵니다. 모든 것들이 떠내려가요. 따라서 '법을 섬으로 삼고, 나를 섬으로 삼아라.'는 말은 법을 실천해서 자신의 번뇌를 다스려 자기 삶의 의지처를 자기로 만들어라.' 라는 말입니다. 그 핵심에는 마음챙김,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자관을 닦는 것은 일시적으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는 바탕에는 마음챙김,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이걸 사티(sati)라고 합니다. 사띠를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는 것, 그래야 계도 지킬 수 있고 ,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선정을 이룰 수 있고 지혜가 계발되는 겁니다.

 

팔정도의 7번째가 바른 마음챙김(正念)입니다. 정념을 이루면 정정을 이루게 됩니다. 마음이 대상을 포착하면 대상에 집중하게 돼 있습니다. 정념을 이루면 집중한 대상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게 됩니다. 지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염불할 때 '염(念)'자는 부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집중되고 가라앉으면 내 마음상태가 어떤지 알게 됩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집중하는 수행법입니다. 

 

내 마음을 보호하는 세 가지 수행법 - 자관, 염불, 마음챙김

 

이 풍진 세상에서 마음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관을 늘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힘들 때는 부처님을 찾으세요. 그렇게 자관하고 부처님을 찾아서 마음이 안정되면 깨어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정말로 내 마음은 어떤가, 내 몸은 어떤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에서 세세하게 일어나는 일들, 몸에서 일어나는 통증, 더위 때문에 일어나는 짜증들에 마음이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일들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지낸다면 그 일들에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는 팔풍(八風)이 있습니다. 여덟 가지 바람인데, 가장 큰 것은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괴로움과 즐거움의 바람입니다. 이런 바람이 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려면 마음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또 부는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바람이 순풍인지 혹은 역풍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르고 맞으면 순풍도 역풍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놓게 되지요. 귀에 좋은 말이라고 해서 따라가면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듣기 싫은 말이라고 배척하면 충고를 흘려버리게 됩니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청정도론』의 내용은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지혜를 여는 데 있습니다. 지혜가 열리면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 몸이란 이런 것이구나,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하면 '몸과 마음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는구나.' 하는 점을 이해하게됩니다.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조건이 있구나!' 그리고 그 조건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몸과 마음의 현상들이 끊임없이 변하고, 내가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무상하고,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내가 나라고생각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때 무상과 고,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가 열립니다.

 

이 세 가지는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체험하게 되는데,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을 보면서 자각하게 됩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가려움이나 통증, 이런 것을 보면서 무상을 그 자리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청정의 상태를 맛보게 되는 겁니다. 어떤 현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경험하게 되면 어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가느다란 촛불처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것인가, 아니면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반석과 같은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스스로 가꿀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우리들의 결단입니다. 어려우면 아주 단순한 것부터, 가장 하기 쉬운 수행법부터 하시면 됩니다.

  

함께 행복해 지는 길

 

세상살이는 탐진치 때문에 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어떻게 살아도 괴로운 세계입니다. 절에 가도 괴롭고 세속에 살아도 괴롭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넘어서는 것도 힘든데 수행을 열심히 하면서 잘 살기는 더더욱 힘이 듭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할 때 많이 힘듭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지금보다 행복해지기 위한 발판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남을 속이고 화내고 짜증부리면 괴로움은 더 큰 고통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행은 내가 불교적으로 청정에 이르는 길입니다. 지금 이 힘든 상황을 알고 그 어려움을 이겨 내고자 정진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 어렵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 백 번 반복해야 한 마디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어렵다고 어릴 때(3세에서 5세까지) 말을 배우지 않으면 언어능력은 인간의 두뇌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수행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없지만 있을 수 있는 일들을 내가 계발해 내는 일이에요. 그럴 때 삶은 비록 힘들어도 점점 행복해지는 길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청정도론』의 가르침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노력하는 삶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노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무상, 고, 무아를 체험적으로 깨닫는 것, 그래서 해탈,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정리해 놓은 『청정도론』은 부처님께서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을 정리해 놓은 참고서와 같은 책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수레의 두 바퀴

 

자관을 하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이 있습니다. 참선을 하든, 위빠사나를 하든, 기도를 하든, 염불을 하든, 절을 하든, 사경을 하든 내 마음이 빨리 안정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빨리 찾는 것이 이 삶을 덜 낭비하고 더 빨리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스승은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직접 나에게 가장 적합한 수행법을 들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복이 없습니다. 하지만 복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찾으십시오. 그리고 많이 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에게 적절한 가르침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이 헤매다가 위빠사나를 만나서 제 나름대로 '아! 이 길이다!' 라는 확신을 가졌고, 그 길을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내가 행복하니까 저 사람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나를 위하는 일이 곧 남을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함께 성숙되어 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말을 불교적으로 한다면 지혜와 자비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간다는 겁니다. 새가 두 날개로 날 수 있듯이 불교수행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날개로 같이 날아갑니다.

 

지혜는 나를 위하는 일, 자비는 남을 위하는 일, 이 두 가지는 함께 있습니다. 나를 위하는 수행 정진을 하고 남을 위하는 자관을 닦으면서 나와 남을 위하는 일이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자리와 이타가 하나라는 것이지요.

 

수행을 통해 탐진치 번뇌를 스스로 벗어버리고, 남의 탐진치 번뇌마저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초기불교 가르침이며, 『청정도론』의 마지막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청정에 이르는 길을 내 마음 안에서 갖출 수 있도록 함께 정진해 나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