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붓다는 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을까

실론섬 2014. 3. 22. 18:44

왜 수행승이나 재가자들에게 술을 먹는 것을 금하였을까?

첫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미계의 십계문(十戒文) 제五에도 [곡주.과주.강한술(suramerayamajja)에 심취(沈醉)하는 것을 금하는 계(戒)가 있다. [경집(經集)]二六四에서는 [음주를 제어(制御)하는 일]을 더 없는 행복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곡주는 쌀같은 곡식으로 만든 술이요, 과주는 과일을 발효시킨 술이다. 그런데 그것을 마시는 일에 탐닉하는(anuyunjati) 것을 경계한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탐닉(耽溺) 하지 않고 적당히 마시는 것은 괜챦다는 뜻으로 해석될지 모르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마시지 말라는 적극적인 표현 대신 탐닉치 말라고 완곡히 말한 것이어서 그 표현의 뉘앙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계중 죽이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의  四계는 그런 행위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에 성립한 금계(禁戒)다. 이들을 불교에서는 특히 성계(性戒)라고 불러 왔다. 이에 대해 술에 취하지 말라는 쪽은 차계(遮戒) 라 해서 그 죄를 일단 가볍게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음주라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까닭이다. 다만 음주에는 다른 범죄가 수반되기 쉬우므로 그런 점에서 음주가 문제된 것이었다. 이것이 음주에 대한 불교의 견해이다.


잘 알려진 설화가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있다.

어느 날 두 술친구가 언제나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맛있는 안주가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안주감을 궁리하던 중 이웃집에 닭이 있음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그 닭을 훔쳐다가 삶아 먹었다. 그들이 술에 만취해 있을 무렵 이웃집 부인이 닭을 찾으러 왔다. 그들은 모르겠다고 시치미를 떼고 설상가상 그 부인을 범해 버렸다. 즉 그들은 술을 마셧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고, 살생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남녀의 도리를 어겨 오계를 완전히 범하고 만 것이었다.

붓다 시대의 도시에는 이미 술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마우리아 왕조 무렵에는 술집(panagara)이 있어서 도박의 소굴 노릇도 하고 있었다. 붓다는 술장사(majjka)가 불교신도가 되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즉 불교의 입장에서는 술을 마셔도 안되고 술을 팔아도 안되는 것이었다. 이렇게도 엄한 규정은 이미 음주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또 붓다는 음주의 계율에 대해 음주 자체의 폐혜보다도 낭비를 경계하는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음주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도 있다. 그리고 술은 자제심을 마비시키는 작용을 한다. 자제를 강조하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볼 때 술을 삼가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건강에 나쁜것도 상식에 속한다. 우리가 술을 먹고 자제심을 잃어버리고 행한 행동을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두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것이 주된 이유이다.

(1)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러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리 말라.
(Tasmatihananda attadipa viharatha attasarana anannasarna, dhammadipa dhammasarana anannasarana)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간에 대한 탐욕.근심을 초월하여 알아차리고 마음새기는 자 되어 머문다.....(중략) 아난다여, 여래가 입멸한 다음일지라도 누구든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수행과 정진을 하는 비구들은 남들보다 수승한 자가 될 것이다.(대반열반경)"

여기서 살펴보면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는 것은 사념처 수행을 하는 자를 말한다. 사념처 수행이란 "깨어있어 알아차리고 꿰뚫어 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 정신이 혼미하거나 흐리멍텅하여 사념처 수행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런 자신을 섬으로 삼고 귀의처로 머물수는 없을 것이다.  

(2) " 비구들이여,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제행은(형성된 것들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방일하지 않고(appamadena.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께서 남긴 최후의 말씀이었다." 
(Athakho bhagava bhikkhu amantesi - 'handa dani, bhikkhave amantayamivo vayadhamma sankhara appamadena samadethati. Ayam tathagatassa pacchima vaca"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붓다께서 최후이 유훈으로 남기신 말 중에 불방일(appamadena)하라고 했다는 점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다라는 뜻의 불방일의 원어는 appamada 인데 부정접두사 a 와 pamada 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방일 즉 게으름이라는 pamada의 원래 뜻은 어떤 자극에 의해 정신이 마비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특히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 반대의 단어인 appamada는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단순히 무언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또렷이 각성한 상태를 appamda라고 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마지막 유훈에 불방일하라고 한 것은 결국 "깨어 있는 자"가 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붓다의 최후의 가르침은 무상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거기서 벗어난 세계로의 추구의 두가지 핵심사항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불방일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지만 불방일은 단순히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늘 깨어 있는 상태의 수행 즉 사념처 수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순간 순간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방심하지 않고 꿰뚫어 관찰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띠 사마타 위파사나등등의 수행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는 "깨어 있음" 이다. 제행무상을 관(觀)하는 것은 스스로가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고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음주는 '깨어 있음'을 망가뜨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주된 음식이다. 수행승이 곡주를 먹고 정신이 흐릿하거나 깨어 있지 않는다면 이미 수행승으로써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남방권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음주는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오계중에서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깨어 있음"이 수행승의 수행자세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이유

붓다께서 열반에 들기 위하여 살라(sala)숲에 도착하여 아난다에게 침상의 머리를 북쪽을 향하도록 마련하도록 하고 자리에 눕는 장면이 나온다. 그부분을 다시한번 살펴보자.

"세존께서는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사자가 누운 모습으로 누웠으며, 한 다리를 다른 다리위에 올려 놓으시고, 정념(正念 정념. sato)하고 정지(正知. sampajano)하셨다. "

마지막 순간까지도 붓다께서는 깨어 있는 상태로 입멸을 하셨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오랜 여행과 병으로 매우 지친 붓다께서 침상을 마련하라고 하고 몸을 누울 정도라면 기력이 다하여 정신이 혼미하고 판단력이 흐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전은 오랜 여행과 병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최후의 열반장소에 오셔서 침상에 누워셨지만 평상시와 달리 정신이 흐려있거나 혼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확하게 "깨어 있음" 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붓다처럼 위대한분 이니까 그럴수 있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말을 오늘에 되새겨 보면 수행승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항상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늘 깨어 있어서 졸지에 당하는 죽음보다는 준비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수행하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왜 수행자들이 술을 마시면 안되는지 이로서 우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