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업이란 무엇인가

실론섬 2014. 3. 22. 18:39


업이란 무엇인가

‘업(業)’이라고 번역되는 깜마(kamma/Sk. karmma)는 √kṛ(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래서 깜마는 광범한 행위 일반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무슨 행위든 다 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행위 중에서도 의도(cetanā)가 개입된 행위를 업이라 한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 이 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A6:63/iii.415)라고 나타나는데 업을 정 의하는 인용문으로 아주 잘 알려진 구문이다.

 

부처님과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의도적인 행위는 업이 된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경우에는 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업을 쌓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처님과 아라한도 정신과 물질(名色,nāma-rūpa)을 가지고 있는 한 그분들의 지난 생들에서 지은 업의 과보는 받아야 한다. 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이다. 모든 의도는 선한 것 이 아니면 불선한 것 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과 불선의 판단 기준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행위가 해탈과 열반에 유익한가 해로운가 하는 것 이 판단의 기준이라 하겠다. 그리고 마치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이 의도적인 행위는 그 의 도한 선과 불선의 성질에 따라 각각 고유한 특성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업의 법칙(kamma-niyāma)이다. 


언젠가 나타나는 업의 결과를 깜마위빠까(業異熟, kamma-vipāka)라 한다. 업의 과보라는 의미에서 업보(業報)라고 알려진 말이다. 업보는 업이 열매를 맺기에 적당한 조건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특정한 식의 상태나 정신적인 요인을 뜻한다. 업은 (1) 기능에 따라  (2) 과보를 생산하는 순서에 따라 (3) 성숙하는 시간에 (4) 과보를 생산할 장소에 각각 설명을 한다. 그 이외에 업의 표상(kamma nimitta) 이니 태어날 곳의 표상(gati kamma)이니 업력(kamma vega)등등 아주 복잡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서의 복잡한 이론을 우리들이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업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도덕적 인과율" 이다. 즉 우리가 신구업으로 짓는 도덕적 행위의 결과물인 선한 행동에는 선한 결과를 악한 행동에는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또한 위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업은 의도적 행위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의도적 행위가 개입되지 않거나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없는 존재에게 업은 없다. 쉽게 말해서 나무는 윤회하지 않는다. 그이외에 개미나 지렁이나 굼벵이나 기타 단세포의 존재가  과연 의도적인 생각과 행위를 할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럼 이런 존재는 무엇인가? 자연 순환계나 생태계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우주와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의 일부분일뿐 결코 업을 짓고 받는 행위의 주체자들은 아니다. 단세포인 아베마가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냐?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붓다의 업 법칙으로 보면 분명히 알 것이다. 그 아베마가 의도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는 존재인가 아닌가?

 

소금 덩어리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이전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나 업을 운명론이나 결정론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조각의 소금 덩어리가 작은 그릇의 물 속에 들어가면 그 물은 짜게 될 것이다. 같은 양의 소금이 갠지스 강에 녹는다면, 그것은 강물을 짜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한 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그릇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 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코살라국의 빠세나디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만은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다르다. 


네가지 종류의 인간

붓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네가지로 분류하여 업의 법칙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1)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인간 (2)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인간 (3)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인간 (4)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인간이다. 여러번 이것에 대해서 글을 올렸기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서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다. 간단하게 말해서 업은 숙명론이 운명론도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우리가 그 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님들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을 돌맹이에 그리고 스스로가 지은 선업을 강을 건너는 나룻배에 비유하곤 한다. 아무리 작은 돌맹이라도 물 속에 던지면 가라 앉는다. 절대로 강을 건너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리 큰 돌덩이라도 나룻배 위에 얹어 놓으면 가라안지 않고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다. 이와마찬가지로 선업의 공덕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노력하여 선업을 쌓도록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돌덩어리도 나룻배로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누군가가 가난하고 병약하고 장애자로 태어 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그 업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현생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는다고 끝인가?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휸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은 윤회계는 없으며 우리가 가보지 않은 육도의 세계는 없다" 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은 지금이 우리들 삶과 인생을 바꿀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죽고 몸이 부서져 흩어지면 언제다시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회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여러번 글을 올려 놓았다. 장애자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그 어느 누구이든 우리들은 윤회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즉 우리가 신구의로 행하는 도덕적/윤리적 결과에 대해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윤회에서 무엇을 배울것인가? 다시 글을 내가 올리는 방에 올려 놓도록 하겠다.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