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불교는 허망한 해탈론이 아니라 행복론이 정답이다

실론섬 2014. 3. 29. 15:40

1. 불교의 행복론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복리와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일겁을 머물러 주소서. 부디 선서께서는 일겁을 머물러 주소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일겁을 더 머물러 주소서.]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신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신과 인간의 행복과 복지와 이익을 위하여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Sabbapapassa akranam       일체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kusalassa upasampada       착한 공덕을 힘껏 행하며

sacittapariyodapanam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etam buddhana sasanam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 이외에도 행복과 관련된 문구는 경전 곳곳에 발견된다. 앞전 글에서도 올렸지만 특히 재가자들과의 대화에서는 자비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난 보시와 그에 따른 공덕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불교라는 큰 바다에 서면 맨 먼저 자비 보시 공덕에 따른 행복론을 접하게 된다. 다시말해서 이쪽 강가에서 험한 물살을 건너 저쪽 강가로 건너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자비가 없는 마음으로 수행한다고 아라한이 될까? 보시하는 자비심 없는 마음에서 수행한다고 해탈이 올까? 보시와 자비에 의한 평온한 마음 없이 마음이 청정해 질까? 절대로 아니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게 더 쉽다. 


그럼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빈곤한 비유를 하자면 1) 세속적 행복 2) 비세속적 행복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세간적 행복이란 욕망 탐욕 갈애 갈망 즉 모든 감각적 쾌락의 충족일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남녀간의 애정 충족이나 음식을 먹고난 뒤의 포만감에서도 우리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세속적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행복은 갈증날 때 시원한 물 대신 음료수를 마시면 더욱더 갈증이 나듯 만족을 모른채 끊임없는 이기적인 탐욕심을 키운다. 활활 불꽃이 탈 연료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이런 탐욕은 끝이 없다.


하지만 비세속적 행복이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을 감소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비세속적 행복이란 자신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도와줌으로써 나의 행복감을 키우는 것이다. 타인을 돕고 보시를 한다는 것은 곧 나의 욕심을 그만큼 들어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욕심을 버릴 때 나의 것을 포기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보시와 자비라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고 오늘도 경험한 것이겠지만, 나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 어려운 이웃을 도우고 전철 안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길거리의 거지에게 적선하고 사찰의 불전함에 돈을 넣고 스님에게 용돈에 보태시라고 돈을 드린 후에 집에 돌아와 가만히 누워서 하루의 일과를 정리할 때, 내가 베푼 선행으로 인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 오르는 희열과 행복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희열이 내 여자친구에게 선물 사주고 얻어지는 욕망충족과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면 그는 이미 불교인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과연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행위가 바로 보시이며 자비이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욕망을 집착을 버리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그것에서 떠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욕망이 줄어든 만큼 행복이 그 공간을 채우는 것 그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인 것이다.


2. 허망한 해탈론 

재가불자 주제에 끝임없이 불교의 해탈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해탈을 위한 수행의 가르침을 설한 경전 문구를 끊임없이 나열한다. 이것도 모자라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무조건 출가해야 한다고 까지 말한다. 출가해서 해탈을 얻기 위한 것이 불교의 목표일 뿐 행복론 타령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한가지 큰 오해를 하고 있다. 즉 불교의 행복론이 도대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는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저 세속적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것만이 행복인줄 알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비세속적 행복을 말하는 것을 들어 본적도 그들이 올린 글을 읽어 본적도 없다는게 오늘날 한국 재가자들의 허망한 해탈론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용수보살은 그의 대지도론에서 [세속적 진리 없이는 진실은 설해지지 않으며 그 진실 없이는 열반은 오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속적 진리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간사 인생살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인생살이에서 얻어지는 진실이란 무엇인가하면 바로 보시와 자비인 것이다. 보시와 자비라는 진실없이 해탈은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보시나 자비심을 내기 위해서는 일단 내 마음이 청정해야 하고 욕심이 없어야 하고 탐욕을 줄여야 한다. 이러한 수행이 곧 해탈로 가는 수행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경전에도 나와 있지만 해탈론을 부르짖는 자들은 일층도 짓지 않고 이층부터 지을려고 하거나 또는 나귀에서 젖을 짤려는 대표적인 어리석음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전을 엄격하게 따진다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가르침으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가 비구계를 지키면서 세간사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출가자들이 중새들처럼 섹스하면서 수행할 수도 없다. 출가자는 의식주를 재가자에게 의지해야 하지만 재가자들은 거지가 아닐바에야 의식주를 남에게 의존할 수 없다. 


출가도 안하면서 출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 그는 왜 출가하지 않는가? 군대도 안 가본 민간인이 모병관인 경우를 봤는가? 출가를 독려할려면 스스로부터 출가를 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정말 불교가 출가승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 자신부터가 비구계를 지키면서 세간사를 살아야 한다. 그럼 그 말을 반쯤을 믿어 줄 것이다.


3. 시건방진 재가자들

최근 한국불교에서 묘한 풍조가 있다. 즉 대부분의 스님들이 대승불교이다 보니 사실 초기불교가 출가자들 보다는 재가자들에게 더 빨리 알려지고 널리 공부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대승경전과 초기경전은 여러가지로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다보니 초기경전의 귀절로 무조건적으로 대승불교를 비난할려고 하는 경향이 심각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재가자 주제에 감히 출가자들을 가르칠려고 드는 것이다. 물론 불교계가 재가자들의 비난을 받고 그리고 출가자들의 행태가 불교를 훼손하는 행위가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찰에 갈 때 부처님 뵈러 가지 스님 뵈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스님들을 비난하는 것과 대승불교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며 이는 엄격한 구분을 하여야 한다. 나 스스로도 한국불교를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그렇다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 식으로 함부로 초기경전 귀절 베껴와서 한국불교를 무분별하게 비난한 적은 없다. 대승불교의 교리는 그 나름대로 배울점이 많으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초기경전 못지않다. 사상적으로 철학적으로도 초기경전보다 훨씬 더 지평이 넓다. 이는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다만 그러한 것을 한갓 세치 혀에 올려서 희론이나 장난의 대상으로 삼는게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