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hmajālasuttaṃ, paribbājakakathā (범망경(梵網經), 유행승 이야기)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500명의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라자가하와 날란다 사이의 큰 길을 걷고 계셨다. 숩삐야 유행승도 제자인 브라흐마닷따라는 젊은 바라문과 함께 라자가하와 날란다 사이의 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숩삐야 유행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존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했다. 그러나 숩삐야 유행승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브라흐마닷따는 세존을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승가를 칭송하였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인 그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세존과 비구 승가의 뒤를 계속해서 따르고 있었다.
*주석서에서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의 의미를 여러 측면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이란 1차 경전결집에서 경을 암송한 아난다 존자를 말하여, '이와 같이'란 본경에서 설해진 것과 같은 형태대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일 기본이 되는 뜻은 '본경에서 설해진 이러한 형태의 세존의 말씀을 아난다 존자가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문 evam me suttam 은 수동태로서 '이와 같이(evam) 나에 의해서(me) 들리어졌다(suttam).'는 의미이다.
*'세존'으로 옮긴 원어는 Bhagavan의 역어이다. 원어의 의미는 '바가(bhaga)를 가진 분(-vat)이며 주격 단수로 쓰였다. 여기서 bhaga 란 '복', '행운'을 뜻하는데 베다에서부터 사용되던 말이다. 중국에서는 世尊(세존)으로 옮겼다. 세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청정도론」 VII.53 이하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비구'로 음역한 bhikkhu는 '걸식자'를 말하며 일절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서 수행이나 종교생활에만 전념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걸사(乞士)로 번역된다.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Vis.I.7)고 정의하고 주석서에서는 문맥에 따라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 ··· 도를 닦는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DA.iii.756)라고도 설명한다. 그리고 자이나교에서도 그들 수행자를 부르는 여러 술어 중의 하나로 쓰이고 있다.
*'승가'로 음역한 상가(sangha)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인 집단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좁게는 비구.비구니의 승단, 넓게는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의 사부대중의 모임을 뜻한다. 자이자교에서는 상가라는 말 대신에 무리를 뜻하는 가나(gana)라는 술어를 그들의 모임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衆(중)으로 옮겼으며 僧伽(승가)로 음역되었고 이를 줄여 일반적으로 僧(승)이라고 통용되었다.
*라자가하(Rajagaha)는 지금의 인도 비하르(Bhihar) 주의 라즈기르(Rajgir)이다. 세존 당시에 인도 중원에는 16개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강성했던 곳이 마가다와 꼬살라였다. 마가다의 수도가 바로 이 라자가하였으며 꼬살라의 수도는 사왓티였다. 16개 나라는 세존 말년에 이 두 나라로 통일이 되었고 다시 세존 열반 후에는 마가다가 인도를 통일하였다.
*날란다(Nalanda)는 훗날 날란다 대학이 생긴 곳이며 라자가하에서 20여 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사리뿟따 존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주석서에 의하면 유행승 숩삐야(Suppiya)는 산자야(Sanjaya)의 제자였다고 한다. 산자야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출가하기 이전의 스승이었으며 본서 「사문과 경」(D2)에 그의 가르침이 서술되어 있다.
2. 그러자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와 함께 암발랏티까에 있는 왕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머무셨다. 숩삐야 유행승도 제자인 젊은 바라문 브라흐마닷따와 함께 암발랏티까에 있는 왕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거기서도 숩삐야 유행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세존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했다. 그러나 숩삐야 유행승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브라흐마닷따는 세존을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승가를 칭송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인 그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머물렀다.
*주석서에 의하면 암발랏티까(ambalaṭṭhikā)는 왕의 정원(ranno uyyana)이었으며 이 정원의 정문 근처에 어린 망고나무(ambarukkha)가 있었기 때문에 암발랏티까라고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DA.i.41)
3. 그때 많은 비구들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서 강당에 함께 모여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였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중생들의 다양함이 잘 설명되고, 잘 규명된 이것에 이르기까지 숩삐야 유행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세존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숩삐야 유행승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브라흐마닷따는 세존을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승가를 칭송했습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인 그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세존과 비구 승가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읍니다."라고.
4.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이 이러 주제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강당으로 가셨다. 가셔서는 마련해드린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은 뒤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함께 모였는가? 그리고 그대들이 서로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무엇인가?"라고.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서 강당에 함께 모여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였읍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세존·아라한·정등각에 의해 중생들의 다양함이 잘 설명되고, 잘 규명된 이것에 이르기까지 숩삐야 유행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세존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숩삐야 유행승의 제자인 젊은 바라문 브라흐마닷따는 세존을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승가를 칭송했습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인 그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세존과 비구 승가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읍니다.'라고. 세존이시여, 이것이 저희들이 서로 끝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오셨습니다."
5.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법을 비방하거나, 승가를 비방할 것이다.그때 그대들은 적대감이나 불쾌감을 가져서는 안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된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법을 비방하거나 승가를 비방할 것이다. 그때 만약 그대들이 분노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대들에게 또한 그것 때문에 장애가 생길 것이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법을 비방하거나, 승가를 비방할 것이다. 그때 만약 그대들이 분노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남들이 말을 잘했는지 말을 잘못했는지를 그대들이 알 수 있겠는가?
"알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법을 비방하거나, 승가를 비방할 것이다. 그때 그대들은 거기서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거짓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없읍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찾아지지 않습니다(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6.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칭송하거나, 법을 칭송하거나, 승가를 칭송할 것이다. 그때 그대들은 즐거워해서도 안되고 기뻐해서도 안되며 의기양양해서도 안된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칭송하거나, 법을 칭송하거나, 승가를 칭송할 것이다. 그때 만약 그대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의기양양하게 되면 그대들에게 또한 그것 때문에 장애가 생길 것이다. 비구들이여, 남들이 나를 칭송하거나, 법을 칭송하거나, 승가를 칭송할 것이다. 그때 그대들은 거기서 사실인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진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있읍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찾아집니다(알려진 것입니다).'라고.
brahmajālasuttaṃ, cūḷasīlaṃ (범망경(梵網經), 짧은 계)
7. 비구들이여, 범부는 단지 작고(제한되고) 하챦은 이것, (세속적인) 계(戒)에만 국한하여 여래를 칭송하는 말을 한다. 비구들이여, 범부가 단지 작고 하챦은 계에 의해 여래를 칭송하여 말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범부로 옮긴 원어는 puthujjana이다. 주석서에서는 '개개인의(puthunam) 여러 가지 형태의 오염원(kilesa) 등을 생기게(janana) 하기 때문에 범부라 한다.(DA.i.59)'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오염원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유신견을 버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업을 형성하는 것 등을 들고 있다.(Ibid) 니까야 경전과 주석서에서는 신과 인간, 출가좌 재가를 막론하고 예류자 이상의 성자(ariya)에 들지 못한 모든 중생을 범부라고 정확하게 정의한다. 그리고 예류자부터 불환자는 유학(有學, sekha/sekkha)이라 부르고 아라한은 무학(無學, asekha/asekkha)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다시 눈먼 범부(andhaputhujjana)와 선한 범부(kalyanaputhujjana)로 나누고 있는데 무더기(蘊.온), 장소(處.처) 요소(界.계) 등을 파악하고 질문하고 배우고 호지하고 돌이켜 관찰하지 못하는 자를 눈먼 범부라 하고, 그렇지 않은 자를 선한 범부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DA.i.59)
*즉 [삼매나 지혜 등의] 더 높은 덕(guna)을 제외하고 단지 작고 하챦은 세속적인 계만을 가지고 칭송하는 것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Ibid)
8. ①'사문 고따마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피한) 자입니다. 몽둥이를 내려놓았고, 칼을 내려놓았고, 겸손하고, 자비한 마음을 갖고, 모든 생명들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며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②'사문 고따마는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준 것만울 받는 자이고, 준 것만을 받으려고 하는 자입니다. 스스로 훔치지 않는 청정한 존재로 머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③'사문 고따마는 금욕적이지 못한 삶을 버렸기 때문에 청정범행을 닦는 자입니다. 독신자가 되어(멀리 사는 자이고) 저속한 성행위를 멀리 떠났습니다(여의었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9.④'사문 고따마는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자이고, 믿을만하고, 신뢰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고, 세상을 위해 진실을 말합니다(세상을 속이지 않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⑤'사문 고따마는 이간하는 말을 하는(중상모략 하는, 험담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이간하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여기서 들은 뒤 저기서 이들을 이간하려고 저기서 말하지 않고, 저기서 들은 뒤 저들을 이간하려고 여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간된 자들을 합치고 단결을 가져오는 자입니다.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화합을 즐기고 화합을 만드는 말을 합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⑥'사문 고따마는 거친 말(욕설)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거친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유순하고(침이 튀지 않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가슴에 와 닿고, 예의 바르고, 대중들이 좋아하고, 대중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런 말을 말합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⑦'사문 고따마는 꾸며대는 말(잡담)을 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꾸며대는 말을 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적절한 때에 말하는 자이고, 진실되게 말하는 자이고, 이익이 되게 말하는 자이고, 법에 맞게 말하는 자이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입니다. 적절한 때에, 근거를 갖춘, 절제된, 유익한 말을 말합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열 가지 해로운 업의 길(十不善業道) 가운데서 '일곱 가지 근본이 되는 학습계목(satta mulasikkhapadani)"을 설하셨다. 10불선업도 가운데 마지막 세 가지인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는 제외하고, 중생들이 칭송하는 세속적인 계를 다음 단락에서 더 열거하신다. 여기서는 주제가 중생들이 붓다를 칭송하는 제한되고 세속적인 계이기 때문에, 더 높은 덕목에 해당되는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를 근원적으로 단속하는 게목은 세속 사람들의 영역이 아니라서 제외 되었다고 복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DAT.i.157)
10. ①'사문 고따마는 씨앗류와 초목류를 손상시키는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②사문 고따마는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자여서 밤에 먹는 것을 삼가고, 때 아닌 때 먹는 것을 멀리 떠났습니다.
③사문 고따마는 춤, 노래, 음악, 연극의 관람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④사문 고따마는 화환, 향, 화장품, 몸에 지니는 것, 장식품, 꾸민 상태를 버렸기 때문에 화한, 향, 화장품, 몸에 지니는 것, 꾸민 상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⑤사문 고따마는 높고 큰 침상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⑥사문 고따마는 금과 은을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⑦사문 고따마는 요리하지 않은 날곡식을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⑧사문 고따마는 요리하지 않은 고기를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⑨사문 고따마는 여인이나 여자아이(동녀)를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⑩사문 고따마는 하인과 하녀를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⑪사문 고따마는 염소와 (숫)양을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⑫사문 고따마는 닭과 돼지를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⑬사문 고따마는 코끼리와 소와 말과 암말을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⑭사문 고따마는 농토나 토지(밭이나 땅)를 받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⑮사문 고따마는 (남의) 심부름꾼이나 전령으로 가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⑯사문 고따마는 상행위(사고 파는 것)를 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⑰사문 고따마는 저울을 속이고 금속을 속이고 치수를 속이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⑱사문 고따마는 뇌물을 주고 속이고 사기를 치고 모든 정직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⑲사문 고따마는 상해, 살상, 포박, 노상강도, 약탈, 폭행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brahmajālasuttaṃ, majjhimasīlaṃ (범망경(梵網經), 중간 길이의 계)
11. ①'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재가자들이 신심으로 가져온 음식으로 살면서), 예를 들면, 뿌리로 번식하는 것, 줄기로 번식하는 것, 마디로 번식하는 것, 싹으로 번식하는 것, 종자로 번식하는 것이 다섯번째인, 씨앗과 초목을 손상시키는 행위를 하면서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씨앗과 초목을 손상시키는 이런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12. ②'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 음식을 축적하고, 마실 것을 축적히고, 옷을 축적히고, 탈 것을 축적하고, 침구와 좌구를 축적하고, 향을 축적하고, 재산을 축적하는 등 축적하는 것을 즐기는 행위를 하면서 머뭅니다(그 축적한 것을 즐기는데 빠져 머문다). 사문 고따마는 축적하는 것을 즐기는 이런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13. ③'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춤, 노래, 연주, 연극, 낭송, 손으로 소리 내는 음악, 마술 공연, 북치며 하는 공연, 예술품 전람회, 쇠공놀이, 대나무 피리 공연, 곡예사의 묘기, 코끼리 싸움, 말싸움, 황소싸움, 물소싸움, 염소싸움, 숫양싸움, 닭싸움, 마차싸움, 봉 싸움, 주먹싸움, 레슬링, 모의전투, 군대의 행진, 군대의 집합, 열병식 등 관람하는 행위를 하면서 머뭅니다(구경거리를 보는데 빠져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관람하는 이런 행위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14. ④'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8목 체스장기, 10목 체스장기, 허공 판 체스장기(허공에 판이 있는 양 가정하고 하는 체스장기), 돌차기 놀이, 쌓기 놀이, 주사위 놀이, 자치기, 손에 물감을 묻혀 그림 그리는 놀이, 공 놀이, 풀피리 불기 놀이, 장난감 쟁기질 놀이, 재주 넘기 놀이, 야자 잎으로 만든 팔랑개비 놀이, 야자 잎으로 만든 장난감 용기놀이, 장난감 수레놀이, 장난감 활쏘기 놀이, 허공이나 등뒤에 쓴 글자 맞히기 놀이, 생각 맞히기 놀이, 말 흉내 내는 놀이 등 도박이나 방일한 머묾에 빠져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도박이나 방일한 머묾에 빠지는 이런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15. ⑤'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긴 의자, 소파, 긴 털이 달린 깔개, 여러 가지 색의 모직 덮개, 흰색 모직 덮개, 꽃무늬의 모직 덮개, 솜을 채운 침대요, 사자나 호랑이 모습을 수놓은 침대보, 양쪽에 술 장식이 달린 덮개, 한쪽에만 술 장식이 달린 모직 덮개, 보석이 박힌 덮개, 비단 덮개, 춤추는 소녀들이 사용하던 양탄자, 코끼리 깔개, 말의 깔래, 마차의 깔개, 치타 가죽 깔개, 영양가죽으로 만든 고급 침구, 차양이 있는 것, 양쪽에 붉은 베게가 있는 것 등 높고 큰 침상을 사용하면서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높고 큰 침상을 사용하는 이런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16. ⑥'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몸에 향가루 바르기, 기름으로 안마하기, 향수로 목욕하기, 머리감기, 거울보기, 속눈썹 검게 칠하기, 화환과 향과 화장품으로 치장하고, 얼굴에 분칠하고, 얼굴에 기름 바르기, 화장, 팔찌, 머리띠, 장식용 지팡이, 장식한 약통, 긴 칼, 일산, 수놓은 신발, 터번, 보석으로 장식한 관모, 야크꼬리로 만든 불자(拂子), 긴 술로 장식한 흰옷 등 치장하고 꾸미는 일에 빠져(몰두하며)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치장하고 꾸미는 이런 이런 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17. ⑦'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왕에 대한 이야기, 도둑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상에 대한 이야기, 화환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족에 대한 이야기, 탈것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성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나라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거리에 대한 이야기, 우물에 대한 이야기,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 잡다한 이야기,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대한 이야기,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이렇다는 이야기 등 하챦은 이야기를 하면서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이러한 하챦은 이야기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처럼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는 말을 한다."
*하챦은 이야기의 원어는 tiracchakatha 이다. 여기서는 모두 27가지 하챦은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청정도론」등의 주석서에는 모두 32가지 하챦은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청정도론 복주석서」(Pm)에 의하면 27가지에다가 산, 강, 섬에 대한 이야기와 천상과 해탈에 대한 것도 하챦은 이야기에 포함시켜서 모두 32가지라고 한다. 즉 말로만 해탈을 논하는 것도 하챦은 이야기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18. ⑧'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잘못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닦는 자이다.', '나는 일관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한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논파되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다(나는 그대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했다). 말을 취소하라(그대는 패했다).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명해 보라.' 라는 등 말다툼하는 말을 하면서 머뭅니다(논쟁에 몰두하면서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말다툼하는 이런 말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19. ⑨'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왕, 대신, 왕족, 바라문, 장자, 젊은이들의 '여기에 가시오, 저기에 가시오, 이것을 저기로 가지고 가고, 저것을 여기로 가지고 오시오.'라는 등의 심부름이나 전령을 하면서 머뭅니다. 사문 고따마는 심부름이나 전령을 하는 이런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20. ⑩'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계략하고(기만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불평하고), 암시를 주고, 비방하고, 이득으로 이득을 추구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이러한 계략과 쓸데없는 말을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brahmajālasuttaṃ, mahāsīlaṃ (범망경(梵網經), 긴 계)
21. ①'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몸과 얼굴의 특징으로 예언하기, 예감이나 징조로 예언하기, 벼락이나 하늘의 조짐에 따라 점치기, 해몽, 관상, 쥐가 파먹은 옷의 흔적에 따라서 점치기, 불의 봉헌, 주걱 헌공, 벼 헌공, 쌀가루 헌공, 쌀 헌공, 버터 헌공, 기름 헌공, 입으로 하는 헌공, 피의 헌공, 손금 보기, 집터 보기, 대지 보기, 묘지의 귀신 퇴치, 악령 퇴치, 흙집에 사는 자의 주술, 뱀 부리는 기술, 독극물 제조술, 전갈 부리는 기술, 쥐 부리는 기술, 새 부리는 기술, 까마귀 부리는 기술, 수명 예언하기, 화살 피하기, 동물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 능력 등 하천한 지식(기술)을 통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하천한 지식으로 번역된 원어는 tiracchana-vijja이다. vijja는 일반적으로 전문지식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것과 비교되는 용어로 sippa가 있는데 이것은 전문기술이라는 의미이다. vijja는 넓은 의미로 여러 학문분야나 여러 직업의 전문지식을 말한다. 여기서는 하천한(tiracchana)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여러 가지 점치기, 예언, 주술등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나쁜 생계수단들이 언급되고 있다. 출가자는 이러한 하천한 지식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되며 탁발(걸식)로 생계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2. ②'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보석의 특징, 옷감의 특징, 지팡이의 특징, 칼의 특징, 긴 칼의 특징, 화살의 특징, 활의 특징, 다른 무기의 특징, 귀걸이의 특징, 여자의 특징, 남자의 특징, 소년의 특징, 소녀의 특징, 남녀 노비의 특징, 코끼리의 특징, 말의 특징, 물소의 특징, 황소의 특징, 암소의 특징, 염소의 특징, 양의 특징, 닭의 특징, 메추리의 특징, 큰 도마뱀의 특징, 귀걸이의 특징, 거북이의 특징, 사슴의 특징 등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23. ③'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왕들의 진격이 있을 것이다. 왕들의 퇴각이 있을 것이다. 우리 편에 속한 왕들의 공격이 있을 것이고, 상대편에 속한 왕들의 후퇴가 있을 것이다. 상대편에 속한 왕들의 공격이 있을 것이고, 우리 편에 속한 왕들의 후퇴가 있을 것이다. 우리 편에 속한 왕들이 승리할 것이고, 상대편에 속한 왕들이 패배할 것이다. 상대편에 속한 왕들이 승리할 것이고, 우리 편에 속한 왕들이 패배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편이 승리할 것이고, 이편의 패배가 있을 것이다.'라는 등 하천한 지식을 통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24. ④'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월식이 있을 것이다. 일식이 있을 것이다. 행성의 합삭(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들어가 일직선을 이루는 때)이 있을 것이다. 해와 달이 올바른 궤도로 운행할 것이다. 해와 달이 잘못된 궤도로 운행할 것이다. 유성이 떨어질 것이다. 짙은 노을이 낄 것이다.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천둥이 칠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뜨거나 지거나 흐리거나 깨끗해질 것이다. 월식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일식은 저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행성의 합삭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올바른 궤도로 운행함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잘못된 궤도로 운행함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유성이 떨어짐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짙은 노을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지진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천둥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의 뜨고 지고 흐리고 깨끗함도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는 등 하천한 지식을 통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25. ⑤'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비가 내릴 것이다, 가뭄이 들 것이다, 풍년이 들 것이다, 흉년이 들 것이다, 민심이 안정될 것이다, 민심이 흉흉할 것이다, 질병이 들 것이다, 건강하게 될 것이다,'라거나 계산법, 암산법, 셈법, 시작(詩作)법, 처세술 등 하천한 지식을 통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26. ⑥'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결혼할 때 신부 집에 들어가는 날 또는 떠나는 날을 택일하고, 약혼 날, 규제, 행위나 모일 시간을 알려주는 점성술, 불행이나 행운을 가져오게 하는 주문, 낙태를 주문하고, 귀머거리나 벙어리가 되도록 주문을 외우고, 제물을 토하게 하기 위해 주문을 외우고, 거울에(신을 모셔와서) 물어보는 점을 치고, 소녀의 몸에 (신을 모셔와서) 물어보는 점을 치고, 신에게 물어보는 점을 치고, 태양을 숭배하고, 대범천을 숭배하고, 입에서 불을 내뿜고, 행운의 여신을 부르는 것 등 하천한 지식을 통한 삿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27. ⑦'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신의 축복을 비는 의식, 귀신을 쫓는 의식, 흙집에 들어가서 주문을 외우는 의식, 정력을 왕성하게 하는 의식, 성불구자가 되게 하는 의식, 집 지을 땅을 마련하는 의식, 집 지을 땅을 신성하게 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의식을 위해 입을 씻고 목욕재계하고 불에 제사를 지낸다. 구토제, 설사제, 거담제와 점액 제거제를 주고, 귀약과 안약과 코약과 연고와 연고 제거제를 주고, 안과, 외과, 어린아이를 치료하는 기술을 행하고,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정화제와 필수적인 약용식물을 처방하는 등 하천한 지식을 통한 삿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문 고따마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범부는 여래를 칭송하여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범부가 단지 작고 하챦은 계에 의해 여래를 칭송하여 말하는 것이다.
brahmajālasuttaṃ, pubbantakappikā (범망경(梵網經), 과거의 겁들에 속한 것들)
28. 비구들이여,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 있다. 그것은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것인데(드러낸 것인데),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온하고(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온하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인(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은 무엇인가?
29. 비구들이여, 과거의 겁들에 속한 것들로부터 과거에 대해 추측하고(모색하고), 과거에 대해 18가지 경우로(이유로) 다양하게 해석하여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과거에 겁들에 속한 것들로부터 과거에 대해 추측하고, 과거에 대해 18가지 경우로 다양하게 해석하여 선언하는가?
*여기서는 갈애(tanha)와 견해(ditthi, 사견)에 의한 두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추측(kappa)이란 두 가지 추측(모색)이니 갈애에 의한 추측과 견해에 의한 추측이다.(Nd1.97)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갈애와 견해를 통해서 과거의 무더기들을 거듭해서 추측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해서 과거를 추측함이라 한다고 그 뜻을 알아야 한다."(DA.i.103)
30. 비구들이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자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영속론자인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영속하는) 자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영속론자'로 옮긴 원어는 sassatavada인데 주석서는 '영원함을 설하는 자들(sassato vado etesma)'으로 설명하고 있다.(DA.i.104) 그리고 주석서는 vada를 ditthin(견해를 가진 자)으로 설명하며 이하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된다고 밝히고 있다.(Ibid)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sassatam attanan ca lokan ca)'이란 [오온]에 대해서 자아라거나 세상이라고 거머쥔 뒤 그것을 영원하고(영속하고) 죽지 않고 견고하다고 천명하는 것이다."(Ibid)
31.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닦음)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바른 주의. 여리작의)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존재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계),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수출하는) 겁(세계), 수많은 이루어지는(팽창하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생산함이 없음(vanjha)'이란 새끼를 가지지 못하는 가축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식물 등과 같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ajanaka)는 뜻이다."(DA.i.105) 생산함이 있다는 것은 결국 소멸함이 있다는 뜻이므로 영원(영속)의 개념과 어긋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자나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의 원어는 kutattha이다. 이 단어의 산스끄리뜨 kutastha는 힌두교의 성전 바가왓기따(Bhagavadgita)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자아 이론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라서 인용한다. "세상에는 이들 두 인간(purusa)이 있다.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은 멸하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kutastha)은 멸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최상의 인간이 있다. 이것을 궁극의 자아(paramatma)라고 불린다."(BG xv.16-17)
이런 나는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유전하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을 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이 영원한 자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32. 그러면 두 번째로,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한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세계), 두 번의 무너지고이루어지는 겁, 세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네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다섯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열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을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거기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 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한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세계), 두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세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네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다섯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열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을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거기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이런 나는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유전하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을 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이 영원한 자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두 번째 경우이다.
33. 그러면 세 번째로,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열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세계), 스무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서른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마흔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을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거기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열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세계), 스무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서른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 마흔 번의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을 '이러이러한 곳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이러이러한 곳에 태어났다. 거기에서 나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에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한다.
이런 나는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유전하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을 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이 영원한 자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세 번째 경우이다.
34. 그러면 네 번째로,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자아와 세상을 선언(천명)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논리에 능한 자, 조사하는(해석하는) 자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조사를 동반하여(수반하여)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자아와 세상은 생산함이 없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옮겨가고(유전하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논리에 능한 자(논리가)'로 옮긴 원어는 takki이고, '조사하는자'로 옮긴 원어는 vimamsi이다.
"그는 논리한다고 해서 논리가이다. 논리하고 사유한 뒤에(takketva vitakketva) 견해를 취하는 자(ditthigahi)를 두고 한 말이다. 조사한다고 해서 조사가이다. 조사란 재고(tulana) 선택하고(ruccana) 결정하는 것(khamana)이다. 마치 사람이 장대로 물을 재어 본 뒤에 건너는 것처럼 재어서 선택하여 결정한 뒤에 견해를 취한다. 그가 바로 조사가라고 알아야 한다."(DA.i.106)
*주석서는 [남들로부터] 들은 것을 [바탕한] 논리가(anussutika), [전]생을 기억하는 것을 [바탕한] 논리가(jatissaratakkika), 체험한 것을 [바탕한] 논리가(labhitakkika). 순수한 논리가(suddhatakkika)의 네 가지 논리가를 들고 있다.(DA.i.106)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이 영원한 자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네 번째 경우이다.
35. 비구들이여,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네 가지 경우로 영원한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비구들이여, 영원한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 사문·바라문이라면 누구든지 이 네 가지 경우거나 이들 가운데 어떤 경우에 의한다(이 네 가지 중 한 가지 방법으로 한다). 이것 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36.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것을 넘어선 다른 것)'에 대해서 주석서는 계(sila)와 삼매(samadhi)와 일체지지(一切知智, sabbannutannana)를 들고 있다.(DA.i.108) 복주석서에 의하면 여기서 지혜(통찰지) 대신에 일체지지를 언급한 것은 이 문맥에서 적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외도들의 견해는 육신통의 네 번째인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숙명통)만을 의지한 것이지만 세존은 십력(十力, dasabala) 등의 지혜를 구족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숙명통을 넘어선 다른 것들도 구족하셨음을 보이기 위해서 일체지지라고 주석서에서는 설명했다는 것이다.(DAT.i.195)
*주석서에서는 계와 삼매와 일체지지를 알지만 '내가(여래) 그것을 안다.'라고 갈애와 견해와 자만으로써 집착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DA.i.108)
*'스스로'로 옮긴 원어는 paccattam eva이다. 주석서에서 "자신에 의해서 자신의 안에서(attanava attano abbhantare)"(DA.ii.527)라고 설명하고 있다. 완전한 평화인 열반의 실현은 자기 내면에서 자기 스스로 실현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부사이다.
*'완전한 평화'로 옮긴 원어는 nibbuti인데 이 단어의 뜻은 '불어서 꺼짐, 소멸, 가라앉음,' 등의 뜻이며 열반(nibbana)과 같은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주석서에서 "오염원이 가라앉음(kilesa-vupasama)"(MA.ii.401) 혹은 "오염원의 적멸(kilesa-nibbana)"(DA.iii.830)으로 설명하고 있듯이 열반을 뜻하는 술어이다. 한편 아비담마에서는 ①탐욕 ②성냄 ③어리석음 ④자만 ⑤사견 ⑥의심 ⑦해태 ⑧들뜸 ⑨뉘우칠줄 아는 힘이 없음 ⑩부끄러운줄 아는 힘이 없음의 열가지 오염원을 들고 있다.
*'분명하게 안다.'로 옮긴 원어는 vidita인데 경전에서는 '직접 체험하여 안다, 체득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vidita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즐겁거나 괴로운 것을 생생하게 '겪는다, 체험한다, 느낀다.'는 의미이다.
*"무명(avijja)이 일어남, 갈애(tanha)가 일어남, 업(kamma)이 일어남, 감각접촉(phassa)이 일어남이라는 조건을 보고, 태어나는 특징(nibbatti-lakkhana)을 보는 이러한 다섯 가지를 통해서 느낌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여실하게) 보게 된다."(Ps.i.178;DA.1.108)
"무명이 소멸함, 갈애가 소멸함, 업이 소멸한, 감각접촉이 소멸함이라는 조건을 보고, 변하는 특징(viparinama-lakkhana) 을 보는 이러한 다섯 가지를 통해서 느낌의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Ps.i.178-179;DA.i.109)
*"느낌의 조건으로 생긴 육체적 즐거움(sukha)과 정신적 즐거움(somanassa)이 느낌의 맛(달콤함)이다."(S.iv.222;DA.i.109)
*"느낌의 무상함(anicca), 괴로움(dukkha), 변하기 마련인 법(viparinama-dhamma)이 느낌의 위험이다."(DA.i.109)
*"느낌에 대한 열렬한 욕망(chandaraga)을 다스리고(vinaya) 열려한 욕망을 제거하는 것(pahana)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DA.i.109)
37.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brahmajālasuttaṃ, ekaccasassatavado (범망경(梵網經), 일부영속 일부비영속론자들)
38. 비구들이여, 네 가지 경우로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일부는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경우로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일부영속과 일부비영속론자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중생(satta)에 대한 일부영속 일부 비영속론자들과 상카라에 대한 일부영속 일부 비영속론자들이다.(DA.i.109).
여기서는 특정한 세상에서 이곳에 온 자들이고 그 세상에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신이 자기를 창조한 것이라 믿고 그렇게 주장하는 견해를 3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그 세상에 먼저 있었던 신은 영속한다고 주장하고 그 다음에 거기에 태어난 신들은 영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절대자설과 창조설에 대한 붓다의 분명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붓다는 그들의 말이 결코 틀렸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본 것에 한해서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특정 싯점까지일 뿐 그 이전은 알지 못하는 경우에 속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편향된 견해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것은 견해의 그물에 걸려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39. 비구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무너지는(수축하는) 때가 있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중생들은 광음천에 태어나게 된다. 마음으로 이루어진(의성.意成) 그들은, 희열(喜.기쁨)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대부분의(yebhuyyena)'라는 것은 범천보다 위의 세상(uparibrahmaloka)이나 무색계(arupa)에 태어난 자들을 제외한 신들을 두고 한 말이다."(DA.i.110) 주석서(DA.i.380 등)에서는 禪을 닦아서 도달하는 색계와 무색계를 범천의 세상(brahma-loka)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수승한 신들은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광음천(Abhassara)는 색계 2선천의 세 번째 천상이다.
*"禪에 든 마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루어졌다(manomaya)고 한다."(DA.i.110)
40. 비구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다시 이루어지는(팽창하는) 때가 있다. 이루어지는 세상에 비어 있는(텅 빈) 범천의 하늘 궁전이 나타난다. 그때 어떤 중생이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수명이 다하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공덕이 다하여) 광음천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비어 있는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비어 있는(sunna) 범천의 궁전(brahmavimana)이란 아직 태어난 중생들이 아무도 없는 자연적으로 생긴 곳이기 때문에 비어 있는 범중천(brahmakayika)이 세상(bhumi)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곳을 만들었거나 만들게 한 자는 아무도 없다. 청정도론(XX.29)에서 설명한 대로 업을 조건한 온도에서 생긴 보배로 된 곳(ratana-bhumi)이다."(DA.i.110) 즉 이 범천의 궁전은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업을 조건한 온도에서 생긴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업, 마음, 온도, 영양분에서 생긴다고 한다.
41. 거기서 오랫동안 혼자 머무는 그에게 싫증과 동요(초조함)가 생긴다. '다른 중생들도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그때 다른 중생들도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 광음천(光音天)의 무리로부터 떨어르 중생의 동료로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들도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동요(paritassana)'이란 혼란스러움과 안절부절 못함을 뜻한다. 이것은 네 가지가 있다. 동요에 의한 동요, 갈애에 의한 동요, 사견에 의한 동요, 지혜에 의한 동요이다. ... 여기서는 갈애에 의한 동요와 사견에 의한 동요를 말한다."(DA.i.111)
42. 그때, 비구들이여, 첫 번째로 태어난 그 중생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범천인 나는, 대범천,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나에 의해 이 중생들은 창조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나에게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중생들도 여기에 왔으면!'이라고.이렇게 나의 마음의 지향(염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중생들이 여기에 왔다(여기에 생겨났다).'라고.
*창조자라는 것은 그곳에 먼저 태어나서 홀로 머묾에 싫증이 나고 동요하던 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다.
나중에 태어난 그 중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범천인 이 존자는 대범천,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이다. 범천인 이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 먼저 존재하고 있는 이 존자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다.'라고.
43. 거기서, 비구들이여, 먼저 태어난 그 중생은 수명이 더 길고, 용모가 더 뛰어나고, 더 큰 위력을 가졌다. 그리고 나중에 태어난 중생들은 수명이 더 짧고, 용모가 더 못하고, 더 작은 위력을 가졌다.
44.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죽어서) 지금 상태[今生.금생)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이곳에) 온 자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더 이전의 존재상태]을 기억하지는 못한다(바로 그 전생의 삶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범천인 그 존자는 대범천,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이다.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는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의 상태로 왔다(이곳에 태어났다).' 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45. 그러면 두 번째로,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비구들이여,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유희로 타락해 버린 자) 신들이 있다. 오랜 세월(장시간)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무는 그들에게 마음챙김은 잊어진다(그들은 오랜 세월 웃고 유희하는데 빠져 지냈기 때문에 마음챙김을 놓아버렸다). 마음챙김의 혼란 때문에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다(마음챙김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되었다).
*이 신들은 본경에서 언급하듯이 놀이에 빠진 신들이다. 본서 제2권 「큰 모임 경」(D20)에도 언급되고 있는 신들인데 사대왕천의 영역에 속한다고 한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에 의하면 그들은 천상의 정원에서 유희에 빠져서 먹고 마시는 것조차 잊어 버려 마치 화환이 시들듯이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들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때문에(attasancetanahetu) 죽는다고 한다.(AA.iii.147)
46.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신)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신 존자들은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하지 않다(유희로 타락하지 않은 그분 신들은 오랜 세월 웃고 휴희하는데 빠져 지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물지 않는다. 오랜 세월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물지 않는 그들에게 마음챙김은 잊어지지 않는다. 마음챙김이 혼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그들은 오랜 세월 웃고 유희하는데 빠져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을 놓아버리지 않았다. 마음챙김을 놓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들은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놀이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우리는 오랜 세월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문다. 오랜 세월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집착하는 성질을 갖춰 머무는 우리에게 마음챙김은 잊어진다. 마음챙김의 혼란 때문에 이렇게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 상태로 왔다(이곳에 태어났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두 번째 경우이다.
47. 그러면 세 번째로,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비구들이여, '마음(의.意)에 의한 결점이 가득한 신들이 있다(마음이 타락해버린 신들이 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분노로] 서로 간에 바라본다. 오랜 세월 서로간에 바라보는 그들은 서로의 마음들을 불쾌하게 한다(서로의 마음을 타락하게 하였다). 그들은 서로 간에 불쾌한 그 마음들 때문에 몸도 피로하고 마음도 피로하다.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들은 사대왕천의 신들인데 축제에서 마차를 타고 가다가 서로 분노(kodha)하여 경쟁하고 다투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DA.i.114).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에 의하면 이 신들은 지나치게 남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AA.iii.147)
48.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지금 상태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그 이전의 존재상태[전생]을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신 존자들은 불쾌한(거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서로 간에 바라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서로 간에 바라보지 않는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다. 서로 간에 불쾌하지 않은 그 마음들 때문에 몸도 피로하지 않고, 마음도 피로하지 않다. 그 신들은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들은 영원히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거친 마음을 가진 우리는 오랜 세월 서로 간에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서로 간에 바라보는 우리는 서로의 마음들을 불쾌하게 했다. 그런 우리는 서로 간의 불쾌한 마음들 때문에 몸들도 피로했고, 마음들도 피로했다. 이렇게 그 무리로부터 떨어진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수명이 짧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지금의 상태로 왔다.'라고.
이것이,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세 번째 경우이다.
49. 그러면 네 번째로,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논리에 능한 자, 조사하는(해석하는) 자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조사를 동반하여(수반하여)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렇게 말한다. '눈이라고도, 귀라고도, 코라고도, 혀라 고도, 몸이라 고도 불리는 이 자아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심(心)이라거나, 의(意)라거나, 식(識)이라고 불리는 이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이고, 영원히 그렇게 소있다.'라고.
이것이,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네 번째 경우이다.
**"논리에 능한 자(takkivada, 논리가)는 이러한 눈 등이 부서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마음은 각각 앞의 마음(citta)이 각각 뒤의 마음에게 조건이 되어 주고 멸하면서 [끊임없이 상속하기] 때문에 그는 눈 등이 부서지는 것(bheda) 보다도 더 강하게(즉 더 잘 부서짐을 뜻함-DAT.i.208) 부서지는 마음의 부서짐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마치 새가 한 나무를 버리고 다른 나무에 내려앉듯이 자기 자신(attabhava)이 부서지면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간다고 움켜쥐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DA.i.114)
50. 비구들이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네가지 경우로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이 네 가지 경우거나 이들 가운데 어떤 경우에 의한다. 이 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51.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52.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brahmajālasuttaṃ, antanantavado (범망경(梵網經),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들)
53. 비구들이여, 4가지 기반에 의해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한 4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가?
54.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을 닦아서 삼매를 얻는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유한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에 머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 기울임을 닦아서 삼매를 얻는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 유한하다는 인식을 가져 세상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라고 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가 되어 세상은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선언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55. 그러면 두 번째로,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무엇에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을 닦아서 삼매를 얻는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에 머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은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을 닦아서 마음이 삼매를 얻는다. 나는 마음이 그 삼매에 들어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라고 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가 되어 세상은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선언하는 두 번째 경우이다.
56. 그러면 세 번째로,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무엇에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을 닦아서 삼매를 얻는다. 그는 마음이 그 삼매에 들어 위아래로는 유한하고 옆으로는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져 세상에 머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은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역시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을 닦아서 삼매를 얻는다. 나는 마음이 그 삼매에 들어 위아래로는 유한하고 옆으로는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져 세상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라고 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가 되어 세상은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선언하는 세 번째 경우이다.
57. 그러면 네 번째로,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무엇에 때문에, 무엇과 관련하여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논리에 능한 자, 조사하는(해석하는) 자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조사를 동반하여(수반하여)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은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역시 거짓이다. 이 세상은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하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역시 거짓이다. 이 세상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가 되어 세상이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천명하는 네 번째 경우이다.
58.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4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무한한 세상을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4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유한함과 무한함에 속하고 유한하고 유한한 세상의 선언들에게는 여기의 밖은 없다(이것 이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59.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60.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brahmajālasuttaṃ, amaravikkhepavado (범망경(梵網經), 애매모호한 자들)
61. 비구들이여, 4가지 기반에 의해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한 4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애매모호함에 속하고(애매모호한 자가 되어),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가?
*원어는 amaravikkhepika이다. 일반 불교개론서에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회의론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아마라위케삐카를 설명한다.
끝남이 없다고 해서 아마라(amara)이다. 이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나에게는 이러하다는 것이 없다는 식으로 삿된 견해를 가진 자의 끝이 없는 견해와 주장을 말한다. 여러 곳으로 던짐이 위케빠이다. 끝이 없는 견해와 주장으로 이리저리 던진다고 해서 아마라위케빠(애매모호하게 늘어놓음)이다, 이런 것을 가진 자들이 애매모호한 자들(amaravikkhepika)이다.
다른 설명은 이러하다. '아마라는 어떤 물고기이다. 이것은 물속에서 매끄럽게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며 가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다. 그와 같이 이런 주장도 이리저리 치달리기 때문에 거머쥐지 못한다.'라고 해서 아마라위케빠(애매모호하게 늘어놓음)라 한다. 이런 것을 가진 자들이 애매모호한 자들(amaravikkhepika)이다. (DA.i.115)
62.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이것은 유익함(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不善.무익함)이다.'라고 있는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도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설명하거나,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설명한다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것이고, 곤혹스러운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된다.'라고. 이처럼 그는 거짓말을 두려워하고 거짓말을 혐오하여,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아서,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라고도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는 첫 번째 경우이다.
*'곤혹스러운 것'으로 옮긴 원어는 vighata인데 주석서에서는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후회가 생겨(vippatisaruppatti) 괴롭다는 뜻이다."(DA.1.115)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첫 번째 경우는 자기 자신이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혐오하지만, 모른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애매모호하게 말을 늘어놓는 경우이다.
63. 그러면 두 번째로, 그 사문-바라문들은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하여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이것은 선함(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이것은 선하지 않음(不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도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설명하거나,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열의나 욕망이나 성냄이나 아니면 적개심을 가져올 것이다. 나에게 열의나 욕망이나 성냄이나 적개심을 가져오는 것은 나에게 집착이 될 것이다. 나에게 집착이 되는 것은 두려운 것이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된다.'라고. 이처럼 그는 집착을 두려워하고 집착을 혐오하여,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아서,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라고도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애매모호함 속하고,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는 두 번째 경우이다.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그것이 유익함인지 해로움인지 꿰뚫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유익한 것에 대해 유익하다고 대답하고, 해로운 것에 대해 해로운 것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박식한 자가 그것을 보고 대답을 잘했다고 하면 나와 같은 현자가 없다고 열의와 욕망이 일어난다. 유익한 것에 대해 해로운 것이라고 대답하고, 해로운 것에 대해 유익한 것이라고 대답할 때 박식한 자가 대답을 잘못했다고 하면 나는 이 정도도 모른다고 하면서 성냄과 적개심이 일어난다. 여기서는 열의(chanda)는 약한 욕망이고, 욕망(raga)은 강한 욕망이다. 또한 성냄(dosa)은 약하게 화냄(khoda)이고, 적개심(patgha)은 강하게 화냄이다."(DA.i.116)
*두 번째는 집착(취착((upadana)를 두려워하여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경우이다. 주석서에서는 열의와 욕망(chanda-raga)의 둘은 집착이고 성냄과 적개심(dosa-patigha)의 둘은 곤혹스러운 것(vighata)이라고 설명을 한 뒤 그러나 이 모두는 강하게 움켜쥐면 집착이고 없애려고 하면 곤혹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한다.(DA.i.116-117)
64. 그러면 세 번째로, 그 사문·바라문들은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하여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이것은 선함(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하고,'이것은 선하지 않음(不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도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설명하거나,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학식있는 사문·바라문들은 영리하고, 다른 자들의 교리에 능통하고, (화살로) 머리털을 쪼갤 수 있는 능숙한 궁수처럼 요점을 지적하고 이 유익함과 해로움에 대해 그들은 지속적으로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여 내가 말한 설명 가운데서 허점을 발견하여 나늘 논파해 버릴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물어 나를 논파하면, 나는 그들에게 대꾸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지 못하면 그것은 나에게 곤혹스러운 것이고, 곤혹스러운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된다. 이처럼 그는 계속된 질문을 두려워하고 계속된 질문을 혐오하여,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아서,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라고도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는 세 번째 경우이다.
*세 번째는 현자(지자)들 즉 남들이 계속해서 질문하고 따지는 것(anuyoga)을 두려워하여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경우이다.
65. 그러면 네 번째로, 그 사문-바라문들은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하여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멍청하고 대단히 어리석다.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다.
①만일 그대가 '저 세상이 있습니까?'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
②만일 그대가 '저 세상이 없습니까?'라고 ···
③만일 그대가 '저 세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라고 ···
④만일 그대가 '저 세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고 ···
⑤'화생(化生)은 있습니까?'라고 ···
⑥'화생(化生)은 없습니까?'라고 ···
⑦'화생(化生)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라고 ···
⑧'화생(化生)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고 ···
⑨'잘 지은 업과 잘못 지은 업의 결실(果)과 과보(果熟)는 있습니까?'라고 ···
⑩'잘 지은 업과 잘못 지은 업의 결실(果)과 과보(果熟)는 없습니까?'라고 ···
⑪'잘 지은 업과 잘못 지은 업의 결실(果)과 과보(果熟)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까?'라고 ···
⑫'잘 지은 업과 잘못 지은 업의 결실(果)과 과보(果熟)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까?'라고 ···
⑬'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합니까?'라고 ···
⑭'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까?'라고 ···
⑮'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까?'라고 ···
⑯만일 그대가 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라고 ···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는 네 번째 경우이다."
*화생(化生)으로 번역한 원문은 opapatika 이다. upa(위로)+vpada(가다)의 명사형으로 문자 그대로 '그 위로 가서 바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태등의 탱나는 곳을 빌리지 않고 그대로 다음생을 받는 것을 뜻한다. 천상의 신들과 지옥 중생과 아귀등이 화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복주석서에서는 이 네 번째 경우를 두고 멍청하고 특히 대단히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앞의 세 경우도 선법·불선법등의 고유성질(sabhava)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멍청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자신이 선법·불선법 등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각(avabodha)하고 있다. 그러나 이 네 번째의 경우에는 그러한 자각조차도 없기 때문에 멍청하고 대단히 어리석다고 한다.(DAT.i.214)
66.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4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애매모호함에 속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으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4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늘어 놓은 것들에게는 여기의 밖은 없다(이 4가지 중 한 가지 방법으로 한다. 이것 이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해탈한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brahmajālasuttaṃ, adhiccasamuppannavado (범망경(梵網經),우연발생론자들)
67. 비구들이여, 2가지 기반에 의해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우연히 발생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한 2 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가?
68. 비구들이여, 무상유정(無想有情)이라는 신들이 있다. 그들은 인식이 생겨나면 그 무리로부터 떨어지게 된다(죽게 된다).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죽어서) 지금 상태[今生.금생)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줄가한 그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기울임을 닦아서 삼매를 얻는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 [재생연결]의 인식이 생겨난 것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무상유정천(無想有精天,asanna-satta)는 색계의 제4선천(四禪天)의 두 번째로 광과천의 위이다. 이 무상유정천 위는 정거천이고 정거천은 불환자들이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무상유정천은 중생으로 태어나는 경지로는 색계에서 가장 높은 천상이다. 출가자의 마음이 제4선에 들어서 인식을 없애 버리려는 의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무상유정천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인식에 대해서 혐오하기 때문에 이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무상유정천에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고 오직 물질로 된 몸만이 있다(acittuppada rupamattakattabhava-DA.i.118). 그래서 마음이 없었던 경지 즉 무상유정천을 기억하는 자는 우연발생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상유정천에 태어나기 전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무상유정천과 상수멸의 경지는 유사한 점이 많지만 전자는 아직 중생의 경지이고 상수멸은 불환자와 아라한이 들 수 있는 경지이므로 이 둘은 이런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69. 그러면 두 번째로,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하여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논리에 능한 자, 조사하는(해석하는) 자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조사를 동반하여(수반하여)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바라문 존자들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 두 번째 경우이다.
70.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2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2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발생에 속하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기는 자아와 세상의 선언들에게는 여기의 밖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해탈한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71.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18 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과거dp 속하고,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에 대한 여러가지 교리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18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그 교리의 선언들에게는 여기의 밖은 없다.
72.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해탈한 자이다).
73.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brahmajālasuttaṃ, aparantakappika (DN 1.10-범망경(梵網經), 44가지 미래에 속하는 것들)
74. 비구들이여, 44가지 기반에 의해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한 44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는가?
75. 비구들이여, 16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는(사후에 자아가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한 16가지 기반에 의해 그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는가?
76. 그들은 ①'자아는 물질(色)을 가진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물질은 보통의 물질로 봐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육신도 죽지않고 다음 세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여기서 비록 '자아는 물질을 가졌다'라고 표현했지만자아는 일반적인 물질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색계 선정의 대상인 까시나의 물질(Kasina-rupa)에서 생긴 닮은 표상을 자아라고 거머쥐거나 혹은 까시나의 물질을 통해서 생긴 인식(tatta-pavattasanna)을 인식이라고 거머쥐고서 자아는 물질을 가졌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한다. 아지까와(邪命外道.사명외도.Ajivakadayo)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한다.(DA.i.119) 여기에 대해서 복주서는 다시 '물질을 가진(rupi)'을' 변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 물질을 가진 것(ruppanasilo rupi)'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덧붙이고 있다.(DAT.i.222)
* 병들지 않음(aroga)이란 항상함(nicca.常)을 말한다.(DA.i.119)
②'자아는 물질을 갖지 않는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무색계 증득(等至)의 표상(arupa-samapatti-nimitta)을 자아라고 거머쥐거나 증득의 인식(samapatti-sanna)을 자아라고 거머쥐는 것을 말하며 니간타 등(Niganthadayo)이 여기에 해당한다.(Ibid) 이것도 삼매체험을 통해서 주장하는 것이다.즉 까시나를 제거한 뒤에 전개되는 허공(空), 의식(識), 존재하지 않음(無所有) 등의 표상을 자아라거나 인식이라고 거머쥐는 경지를 말한다.
③'자아는 물질을 가지기도 하고 물질을 가지지 않기도 한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복주서에 의하면, 처음에는 색계 선정에 들어 그것의 대상인 까시나의 물질(kasina-rupa)에서 생긴 표상을 자아라고 거머쥐고, 더 나아가서 무색계 선정에 들어 무색계 선정의 대상인 허공 등 추상적인 표상을 자아라고 여기는 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DAT.i.223)
④'자아는 물질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단지 논리적인 것일 뿐(takkagaheneva)이라고 주석서는 말한다(DA.i.119)
⑤'자아는 유한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는 닮은 표상(patibhaga-nimitta)을 우주의 끝까지 확장하지 않고(avaddahetva) 단지 그 표상 자체를 세상이라고 거머쥐기 때문에 유한하다는 인식을 가져서(antasanni) 세상에 머문다(DA.i.115)
*여기서 세상의 "유한함, 무한함,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함, 우한하지도 무한하지 않음의 넷을 들고 있다. 여기서도 삼매의 힘으로 세상의 유한함과 무한함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런 관찰에는 항상 지금여기에서 삼매에 드는 관찰자 자신의 체험이 게재되어 있다. 이러한 체험을 이 법망경 3.32에서는 '느낀 것'(vedayita)라고 표현하고 있다.
⑥'자아는 무한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까시나를 우주의 끝까지 확장하여(vaddihitakasina)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진다.(DA.i.115) 까시나(kasina)는 산스끄리뜨 끄릇스나(krtsna)에 해당하는 빠알리어인데 '전체의, 모든'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이것이 사마타를 닦는 열가지 대상을 기술하는 전문용어로 정착되었다. 까시나에는 ①흙의 까시나 ②물의 까시나 ③불의 까시나 ④바람의 까시나 ⑤푸른색의 까시나 ⑥노란색의 까시나 ⑦붉은 색의 까시나 ⑧흰색의 까시나 ⑨허공의 까시나 ⑩광명의 까시나의 열 가지 까시나가 있다.
⑦'자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 닮은 표상을 위로는 확장하지 않고 옆으로만 확장하여 위아래로는 유한하고 옆으로는 무한하다는 인식을 가진다.(Ibid)
⑧'자아는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 논리와 해석을 수반하여 자신이 스스로 규명했기 때문에 ..
⑨'자아는 단일한 인식을 가진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주석서에서는 증득의 경지(samapannka)를 통해서 단일한 인식이 생긴다고 설명한다(Ibid)여기에 대해서 복주서는 "증득(samapatti)이란 여덞 가지가 있다.그 증득이 다르므로 인식도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 증득의 경지를 통해서도 자아가 여러가지 인식을 얻을(nanattasanni)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증득은 하나의 인식으로 확립되기 때문에 증득의 경지를 통해서는 단일한 인식을 얻는다(ekattasanni)고 했다(DAT.i.224)
⑩'자아는 다양한 인식을 가진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주석서에는 증득이 아닌 경지(asamapannaka)을 통해서 다양한 인식이 생긴다고 한다.(Ibid)복주서에는 증득이 다르므로 인식도 다르지만여기서는 밖의 보통의 여러가지 거친 대상을 통해서 다양한 인식이 생긴다고 설명한다.(DAT.i.224)
⑪'자아는 제한된 인식을 가진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주석서에서는 작은 까시나(parittakasina)를 통해서 생긴 인식이라고 설명한다.(DA.i.119) 작은 까시나란 아직 확장하지 않은 표상을 뜻한다.
⑫'자아는 무량한 인식을 가진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주석서에서는 큰 까시나(vipulakasina)를 통해서 생긴 인식이라고 설명한다.(DA.i.119) 큰 까시나란 확장한 표상을 말한다.
⑬'자아는 전적으로 행복한 것이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천안통을 얻어서 그 하늘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제3선에 들어 행복을 느끼는 것을 보고 자아는 전적으로 행복한 것(ekantasukhi)이라고 거머쥔다.(Ibid)
⑭'자아는 전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지옥(niraya)에 태어나서 괴로움을 겪는 중생들을 보고서 자아는 전적으로 괴로운 것이라고 거머쥔다.(Ibid)
⑮'자아는 행복한 것이기도 하고 괴로운 것이기도 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세상에 태어나서 중생들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보고서 이렇게 거머쥔다.(Ibid)
⑯'자아는 행복한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니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행복도 괴로움도 없이 오직 평온하게 머무는 광과천(Vehapphaladeva)의 범천들을 보고서 이렇게 거머쥔다.(Ibid) 광과천(廣果天)은 색계 4선천의 첫 번째 천상인데 이 천상은 다른 천상보다 그 과보가 수승하기 때문에 광과천이라 부른다고 한다.
77.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16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16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의 선언들에게는 여기의 밖은 없다(이것 이외에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78. 비구들이여, 8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선언하는 이런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한 8가지 기반에 의해 그들 사문·바라문들은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선언하는가?
79. 그들은 ①'자아는 물질(色)을 가진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②'자아는 물질을 갖지 않는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③'자아는 물질을 가지기도 하고 물질을 가지지 않기도 한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다.'라고 선언한다.
④'자아는 물질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⑤'자아는 유한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⑥'자아는 무한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⑦'자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⑧'자아는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80.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8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8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의 선언들에게는 여기의 밖은 없다(이것 이외에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81. 비구들이여, 8가지 기반에 의헤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아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아를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고 무엇에 의거한 8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아를 선언하는가?
82. 그들은 ①'자아는 물질(色)을 가진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②'자아는 물질을 갖지 않는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③'자아는 물질을 가지기도 하고 물질을 가지지 않기도 한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④'자아는 물질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⑤'자아는 유한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⑥'자아는 무한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⑦'자아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⑧'자아는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죽고난 후에도 병들지 않는다.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83.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8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8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의 선언들에게는 여기의 밖은 없다(이것 이외에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brahmajālasuttaṃ, ucchedavādo (범망경, [사후]단멸을 말하는 자)
84.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단멸을 말하는데,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존재 않음)을 선언한다. 그러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어떤 이유로, 무엇에 근거하여 단멸을 말하고,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존재 않음)을 선언하는가?
85.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존자여 물질을 가졌고, 사대(四大)로 이루어졌으며,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이 자아는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자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이런 까닭에 이 자아는 실로 철저하게 단멸합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물질적인 몸(rupa-kaya)을 두고 인간의 자아(manussattabhava)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자아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DA.i.120) 그리고 이 자아는 이 몸이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것이 첫 번째 단멸론이다. 유물론적인 사고이다.
86.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ㅈ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그대가 설한 이 자아가 실로 그렇게 철저하게 단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자여, 천상의 물질을 가졌고(천상에 있고 물질을 가졌고) 욕계에 있고 거친 음식을 먹는 다른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거기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파괴됩니다(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자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두 번째 경우는 천상의 자아(dibbattabhava)를 주장한다. 여기서 천상이란 신들의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하며 욕계에 있다는 것은 여섯 가지 욕계 천상에 태어난 것을 말한다.(Ibid) 즉 욕계 천상에 태어난 중생들이 이런 천상에서의 목숨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견해를 가지는 것이 두 번째 단멸론이다.
87.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천상의 물질을 가졌고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모든 수족을 다 갖추었고 결함이 없는 감각기능을 갖춘(구족한)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거기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파괴됩니다(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자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88.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어서고, 부딛힘에 대한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도달한 자아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자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자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부딛힘의 인식에서 부딛힘으로 옮긴 patigha는 보통 '적의' 혹은 '적대감'으로 옮기는 술어이다. 그러나 공무변처의 문맥에서 나타날 때는 '부딛힘'으로 옮긴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부딛힘 즉 접촉이 있지만 물질이 제거되면 부딛힘 즉 접촉도 없기 때문이다.
89.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무한한 의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도달한 자아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자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자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90.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식무변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아무 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도달한 자아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자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자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91.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무소유처를 완전히 넘어서서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다(수승하다)'라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도달한 자아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자아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파괴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자아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92. 참으로 비구들이여, 단멸을 말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단멸을 말하고,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모두 이 7가지 기반에 의한 것이다. 이 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brahmajālasuttaṃ, diṭṭhadhammanibbānavādo (범망경,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자)
93.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지금.여기(現法)의 열반을 말하는데(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선언하는데),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그러면 그 사문·바라문들은 어떤 이유로, 무엇에 근거하여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고,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구경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하는가?
*원어는 diṭṭhadhamma-nibbānavāda인데 한문으로는 현법열반론자(現法涅槃論者)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옮기면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풀어서 옮길 수 있다.. ‘지금 여기서’로 띄어쓰지 않고 ‘지금여기에서’로 옮긴 이유는 ‘지금 여기서’로 옮길 경우 자칫 부사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지금여기’를 합성어로 옮겼다.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diṭṭhadhammadhamma, 現法)란 눈앞에(paccakkha) [직접 보이는] 법(dhamma, 현상)을 말한다. 여기저기서 자아의 상태를 얻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DA.i.121)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복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diṭṭhadhamma)란 봄(dassana)이라는 지혜를 통해서 얻어진 법(dhamma)이다. 여기서 감각기능[根]의 대상[境]이 아닌 [선(禪)의 경지 등]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감각기능의 대상처럼 간주될 수가 있다. 그래서 지금여기를 두고 ‘눈앞에 [직접 보이는] 법’이라고 했다.”(DAṬ.i.230)
94.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존자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여된 것을 즐길 때, 이만큼 이 자아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궁극의 열반을 실현한다고 선언다).
*이것은 인간들이 눈.귀.코.혀.몸으로 경험되는 세속적인 행복을 전부로 삼고 그것의 획득과 유지와 즐김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사는 것을 제일로 삼는 것과 같은 견해이다. 열바을 지복(至福, paramasukha)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 여기에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충분히 즐기는 것이야말로 구경의 열반이요 최상의 행복(지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95.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실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존자여, 감각적 쾌락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병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변하고 다른 것이 되고 그리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겨납니다. 존자여, 이 자아가 감각적인 쾌락에서 멀어지고, 선하지 않는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희열(喜.기쁨)과 행복(樂.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자아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실현한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96.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실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가 이 있는 것, 이것 때문에 이것의 거침이 알려집니다(이것 때문에 초선은 거칠다고 일컬어지기 때문입니다). 존자여, 이 자아가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자아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실현한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97.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실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희열에 속하고 마음이 고양된 것, 이것 때문에 이것의 거침이 알려집니다. 존자여, 이 자아가 희열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定知)을 지녀, 행복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행복이 머문다'라고 하는 제3선(三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자아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실현한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98.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존자여, 그런 자아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자아는 이만큼으로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한(실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나는 행복하다.'라는 마음의 생각, 이것 때문에 이것의 거침이 알려집니다. 존자여, 그래서 이 자아가 행복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에 기쁨과 슬픔(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捨念淸靜) 제4선(四禪)을 성취하여 머물 때, 존자여, 이만큼 이 자아는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성취합니다(실현한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한다.
99. 비구들이여,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그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지금여기에서의 열반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고,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모두 이 5가지 기반에 의한 것이다. 이 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100. 비구들이여, 이런 44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44가지 기반에 의하는 것이다. 이 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그 법들이다. 바르게 말하는 자는 그 법들에 의해 사실에 따라 여래의 칭송을 말해야 한다.
101. 비구들이여, 이런 62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낸다.
102.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더라도(천명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62가지 기반에 의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여기의 밖은 없다(이것 이외에 다른 경우는 없다).
103. 비구들이여, 이것에 대해 여래는 꿰뚫어 안다. '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이렇게 이끌리고,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이렇게 움켜쥐고 이렇게 집착하고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라고. 그것을 여래는 꿰뚫어 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도 여래는 꿰뚫어 안다(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꿰뚫어 아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을 때 스스로 열반(완전한 평화)이 알려진다(분명하게 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잘못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없이 해탈했다.
104.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완전한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알아 볼 수 있는) 그 법들이다. 바르게 말하는 자는 그 법들에 의해 사실에 따라 여래의 칭송을 말해야 한다.
brahmajālasuttaṃ, paritassitavipphanditavāro (범망경, 동요와 몸부림의 일으킴)
105. 거기서 비구들이여, 영속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 가지 기반에 의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느껴진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06. 거기서 비구들이여,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 가지 기반에 의해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07. 거기서 비구들이여, 유한함과 무한함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 가지 기반에 의해 세상이 유한하거나 무한한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08. 거기서 비구들이여,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 사문·바라문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을 때 4가지 기반에 의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09. 거기서 비구들이여, 원인과 조건 없는 발생(우연히 발생)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2 가지 기반에 의해 원인과 조건 없이 발생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0. 거기서 비구이여, 과거에 속하고,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18가지 기반에 의해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1.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는(사후에 자아가 인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사문·바라문들이 16가지 기반에 의해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2.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를 말하는 (자아가 인식을 가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문·바라문들이 8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3.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8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아를 선언하는 것은 자아가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고 천명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4. 거기서 비구들이여, 단멸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5. 거기서 비구들이여,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6. 거기서 비구들이여,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44가지 기반에 의해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117. 거기서 비구들이여, 62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이 과거를 모색하고(과거를 모색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은(천명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 존자들에게 경험된 것이고, 갈애에 속한 것들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다.
brahmajālasuttaṃ, phassapaccayāvāro (범망경, 감각접촉(觸(촉)을 조건으로 일으킴)
118. 거기서 비구들이여, 영속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가지 기반에 의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119. 거기서 비구들이여,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가지 기반에 의해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0. 거기서 비구들이여, 유한함과 무한함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가지 기반에 의해 유한하거나 무한한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1. 거기서 비구들이여,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 사문·바라문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을 때 4가지 기반에 의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2. 거기서 비구들이여, 원인과 조건 없는 밥ㄹ생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2가지 기반에 의해 원인과 조건 없이 발생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3. 거기서 비구들이여, 과거에 속하고,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18가지 기반에 의해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4.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16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5.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8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6.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8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아를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7. 거기서 비구들이여, 단멸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8. 거기서 비구들이여,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하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29. 거기서 비구들이여,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44가지 기반에 의해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130. 거기서 비구들이여, 62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기를 드러내는 것은 감각접촉의 조건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모든 견해가 지금여기 체험하는 것 혹은 체험한 것(vedayita)에 바탕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꿰뚫어 봐야한다. 체험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체험이란 감각기능(根)-대상(境)-의식(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에 바탕하고 있다. 삼사화합이란 다름 아니 감각접촉(phassa,觸)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혹은 과거와 미래로의 자아와 세상에 대한 견해와 교설은 모두 감각접촉을 조건한 것이다.
brahmajālasuttaṃ, netaṃ ṭhānaṃ vijjativāro (62見은 감각접촉(觸) 없이 경험될 수 없다(그런 경우의 일으킴은 없음))
131. 거기서 구들이여, 영속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가지 기반에 의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감각접촉 없이도 그런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132. 거기서 비구들이여,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가지 기반에 의해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을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33. 거기서 비구들이여, 유한함과 무한함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가지 기반에 의해 유한하거나 무한한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34. 거기서 비구들이여,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 사문·바라문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을 때 4가지 기반에 의해 어지러운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35. 거기서 비구들이여, 원인과 조건 없는 발생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2가지 기반에 의해 원인과 조건 없이 발생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36. 거기서 비구들이여, 과거에 속하고,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18가지 기반에 의해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37.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16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인식을 가진 자아를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38.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8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39. 거기서 비구들이여,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8가지 기반에 의해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아를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40. 거기서 비구들이여, 단멸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7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파괴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41. 거기서 비구들이여,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5가지 기반에 의해 존재하는 중생들의 궁극의 지금여기의 열반을 선언하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42. 거기서 비구들이여, 미래에 속하고,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44가지 기반에 의해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143. 거기서 비구들이여, 62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을 감각접촉과 다른 곳에서 경험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
brahmajālasuttaṃ, diṭṭhigatikādhiṭṭhānavaṭṭakathā (견해에 속한 결정에 의한 윤회 이야기)
144. 거기서 비구들이여, 영속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이 4가지 기반에 의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것 ···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유한함과 무한함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 사문·바라문들도 ··· 원인과 조건 없이 발생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도 ···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사후에 속하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자를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단멸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지금여기의 열반을 말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도 ··· 62가지 기반에 의해 그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드러내는 것은 모두 여섯 가지 감각장소에 거듭 닿아서 경험한다(느낀다). 그들에게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긴다(일어난다).
brahmajālasuttaṃ, vivaṭṭakathādi (윤회에서 벗어남의 이야기 등)
145. 비구들이여, 비구가 여섯 가지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감각장소(육촉처.六觸處)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맛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이것(육촉처.六觸處)이 이 모든 것들(62가지 삿된 견해)에 비해 더 높은 꿰뚫어 안다.
146. 비구들이여, 무엇이든지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는 것은 모두 62가지 기반에 의한 그물 안에 있다. 위로 오르는 자들은 그물에 걸린 채 오른다. 위로 오르는 자들은 여기서 그물에 완전히 갇힌채 오른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숙련된 어부나 어부의 제자가 미세한 구멍을 가진 그물로 작은 호수를 덮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 호수에 있는 (이 구멍보다) 큰 생명체들은 모두 이 그물 안에 있다. 위로 오르는 것들은 여기에 걸린 채 오른다. 위로 오르는 것들은 여기서 그물에 완전히 갇힌 채 오른다.'라고. 이처럼, 비구들이여, 무엇이든지 사문·바라문들이 과거에 속하고,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속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졌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는 것은 모두 62가지 기반에 의한 그물 안에 있다. 위로 오르는 자들은 여기에 걸린 채 오른다. 위로 오르는 자들은 여기서 그물에 완전히 갇힌 채 오른다.
147. 비구들이여, 여래는 존재로 이끄는 사슬이 끊어진 몸으로 남아있다. 이 몸이 남아있을 때까지 신과 사람들은 그를 본다. 몸이 무너져 생명이 다하면 신과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망고 열매들이 달려있는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가지가 끊어지면 그 가지에 달려있는 망고는 모두 떨어질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래는 존재로 이끄는 사슬이 끊어진 몸으로 남아있다(머물러 있다). 이 몸이 남아있을 때까지 신과 사람들은 그를 본다. 몸이 무너져 생명이 다하면 신과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한다.
148.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이 법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 법문을 뜻의 그물(의망.義網)이라고 받아 지녀라. 법의 그물(법망.法網)이라고도 받아 지녀라. 범천의 그물(범망.梵網)이라고도 받아 지녀라. 견해의 그물(견망.見網)이라고도 받아 지녀라.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무상전승.無上戰勝)라고도 받아 지녀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49. 그 비구들은 아주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이러한 상세한 설명이 설해졌을 때 일만의 세계가 진동하였다.
범망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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