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경전만 바꾸었다고 초기불교 믿는 것인가?

실론섬 2014. 4. 30. 12:55

아비담마 불교(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불교의 발전사를 크게 나누어 보면 "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 - 밀교"등의 순서대로 나열해 볼 수 있습니다. 


부파불교는 웨살리 십사논쟁으로 대중부와 상좌부가 최초 분열을 한 이후에 계속하여 분열을 거듭하여 20개 부파로 나뉘어진 불교를 말 합니다. 부파불교는 흔히들 아비담마 불교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깊이를 더했으며 사상적으로는 넓게 지평을 열었다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파불교인들은 중생들을 도외시 한채 승원등에서 홀로 깨달음을 축구하거나 또는 날밤을 세워가면서 머리카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냇듯이 번쇄한 논쟁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러한 끝모를 논쟁은 결과적으로 전문 수행승이나 학자들조차도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하고 번쇄함이 지나쳐서 결국에는 간단한 의식등으로 불교를 간소화 한 밀교와 그리고 대승불교로 부터 엄청난 비난과 비판에 직면 합니다.


인도에서 기원전후로 발생한 대승불교 운동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약에 붓다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기존의 빠알리어 니까야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대승경전"을 편찬하였습니다.  또한 대승인들은 출가승 불교, 나홀로 깨달음 불교, 중생을 도외시 한 불교등을 비난하고 부파불교인들을 소승(작은 탈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대승(큰 탈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다불사상(수많은 부처님을 경전에 묘사)과 불교의 최고 가치라고 여겨졌던 아라한을 비판하고 그 대신에 "보살사상"을 내세운 것입니다.


물론 대승인들도 끝내는 번쇄한 철학적 논쟁과 그리고 부처님을 형상화하고 신격화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난에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당시 부파불교인들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이다"라고 내세웠던 "보살사상"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부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인도 대륙에서 불교는 모두 소멸되었지만 그토록 번쇄한 철학적 논쟁으로 날밤을 세웠던 부파불교는 끝내 메마른 교리의 사막에 말라 죽었고 대신에 대승불교는 중앙 아시아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운후 중국으로 건너가서 한국과 일본등지로 전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왜 나는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로 전환하였는가? 

현재 스스로가 초기불교라고 자칭하는 많은 한국불자들이 초기불교로 전환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한국불교(선불교)가 보여주는 중생들을 도외시 한채 산속에서 홀로 화두들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습이나 기복불교등에서 대해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식상하거나 실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후대에 창작된 대승경전에 대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유나 어찌되었거나 초기불교로 전환을 하고 대승경전 대신에 빠알리어 니까야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붓다의 원음이 무엇인가?"라든가 또는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이 핵심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라는 한 인간의 인격과 그분의 일생을 통하여 진정한 불타관을 확립하고 나도 붓다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내 삶을 바꾸고 내 가치관을 바꾸고 내 인생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주된 요인일 것입니다.


만약에 초기불교 한다고 하면서 부파불교인들처럼 번쇄한 논쟁이나 즐기고 또는 출가승 불교를 옹호하거나 또는 대승불교처럼 붓다를 마치 신으로 생각하고 기복불교나 산속불교 간화선 불교에서 벗어나질 못한다면 이것은 애초에 길을 잘못 접어든 것이고 초기불교로 전환한 목적에도 부합되지 않는 일 입니다.


한국에서 초기불교는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도입되고 길을 가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에 초기불교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인터넷의 발달과 그리고 정보교류등의 자유로움과 또한 미얀마등지로 수행을 떠난 스님들이 되돌아 온 후에 위파사나 선원을 개설하면서라고 생각 합니다. 다시말씀드려서 교리와 수행위주의 불교가 들어왔을 뿐 실제로 붓다의 가르침을 세간사에서 어떻게 펼치고 있느냐는 전혀 소외되어 버렸습니다. 더우기 실제로 빠알리어 니까야를 보존하고 있고 붓다시절의 불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스리랑카에 와서 직접 수행하고 피부로 느끼면서 배운 것을 전하는 분들이 극히 소수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묘하게도 한국에서 초기불교는 크게 길을 벗어나고 있으며 지금도 오히려 그것이 더 심화되는듯 합니다. 초기불교라고 하면 그저 아비담마 길라잡이니 청정도론이니 또는 위파사나 수행등을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쇄한 논쟁과 희론으로 세월을 보내거나 또는 나홀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방법론적으로 간화선 대신에 위파사나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이건 오래전 부파 불교나 오늘날 한국불교가 추구하는 길과 조금도 달라 보이질 않습니다. 뭔가 크게 잘못되어도 잘못된 것 같습니다.


실제 중생들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나 보시 자비등의 가르침은 흔적도 없고 오직 위파사나 사마띠 사띠 운운하면서 수행법이나 가르치고 번쇄한 교리 논쟁이나 일삼는 대신에 초기불교의 가장 큰 덕목인 자비나 보시는 온데간데도 없습니다. 대승불교인들보다 더 척박한 이웃간의 냉랭함과 보시는 아예 안하고 절에도 안 갑니다. 기독교인들보다 더 못한 엉터리 적주불자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초기불교 지양한다고 하면서 미얀마에서 배워 온 수행법이나 나열하는 적주비구가 초기불교에 너무 많습니다.


물론 간화선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에서 초기불교의 정체성을 드러낼려고 하다보니 위파사나니 사마띠니 하는 수행법을 내세우는 것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아니지만 차라리 그런것 보다는 출가승 불교에서 탈피하고 교리논쟁 안하고 그저 보시나 자비스러운 삶을 표방하는 그래서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한 길을 밝히는 것이 올바른 초기불교로 나아가는 길이니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초기불교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초기불교는 불교라는 종교의 창시자인 인간 붓다를 배우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는 불교 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45년간의 일생만을 제대로 알아도 불교는 99% 완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붓다의 일생이란 무엇인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자비와 보시의 삶 입니다. 불교에서 자비는 어느 곳에서나 제일먼저 추구되는 절대적 가치관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교리 몰라도 되고 수행이 깊지 않아도 됩니다. 나와 내 이웃의 행복과 안락과 편안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45년 생애였습니다.


부파불교의 번쇄한 교리나 아라한이 왜 대승불교인들에게 철저하게 비난받고 폄훼되었는지를 두번세번 꼽씹어 봐야 합니다. 과연 승원에 앉아서 철학적 논쟁이나 하고 사마띠니 위파사나니 하면서 나홀로 아라한 될려고 수행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인가를 스스로 반문해봐야 합니다. 그런 논쟁이나 수행할려고 초기불교 배운다면 이미 어긋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라한의 정형구에 보면 "할 일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는 두번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헤로 스스로 안다"라고 순서대로 잘 나열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할 일을 다해야 하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청정한 삶이 완성되는 것이고 세번째로 지혜로 아라한임을 아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할 일이란 바로 자비와 보시의 길이며 청정한 삶이란 자비로운 삶의 완성이며 비로소 지혜의 완성이 뒤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대승경전에서 빠알리어 니까야로 경전만 바꾸었다고 초기불자인가?

절대로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초기불자라고 자칭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초기불교의 정체성과 불타관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한채 그저 대승경전에서 초기경전으로 갈아타면 그게 초기불자인줄 착각아닌 착각을 하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이비의 길로 빠지는 지름길 입니다.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불타관이 결국 붓다도 죽이고 스스로도 죽이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경전만 바꾼다고 초기불자 아닙니다. 내 마음과 삶도 함께 바뀌어야 초기불자입니다.


붓다는 스스로 직접 와서 보라고 했다

초기불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이곳에 오셔서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빠알리어 경전 수천번을 읽는 것 보다는 한번 와 보는 것이 낫습니다. 직접 오십시오. 와서 보십시오. 그래서 스스로 초기경전 들고 있다고 그것 몇자 나불거린다고 스스로 초기불자라고 뽐내지 마십시오. 오셔서 오른쪽 무릎꿇고 절도 한번 해보고, 스님들 청식(집으로 초대하여 음식 공양을 올리는 것)도 한번 해 보시고 절에가서 법회에도 참석해 보십시오.


경전을 바꾸었으면 마음도 바꾸어야 한다.

경전만 바꾸지 마십시오. 돼지에 비단옷 입은 꼴입니다. 마음도 함께 바꾸십시오. 그래서 자비와 보시로 충만된 삶을 살아가고자 마음 먹으십시오. 중생들의 행복을 위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새삼 보시기 바랍니다. 윤회는 대나무 마디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의 마디가 튼튼해져야 다음 마디도 잘 자랍니다. 올바른 불타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초기불교다운 불타관을 세워야 올바른 초기불교 하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