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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상윳따 - 제7장 대품(Maha vagga. SN12:61-SN12:70)

실론섬 2014. 5. 3. 19:10

                                    

제7장 대품
Mahā-vagga (SN 12.61-70)

 

assutavāsuttam (SN 12.61-배우지 못한 자(배움이 없는 자) 경1)

6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싸밧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존귀하신(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네 가지 근본물질(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에 대해 염오(싫어하여 떠나고)하려고도 하고, 사라지게 하려고도 하고, 해탈하려고도 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에게는 늘어나고 줄어들고 붙잡고 놓음도 있다. 그래서 거기서 배우지 못한 범부가 염오하려고도 하고, 사라지게 하려고도 하고, 해탈하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心]이라고도 정신[意]라고도 의식[識]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에 대해 염오하려 하지 않고, 사라지게 하지 않고, 해탈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이것은 오랫동안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묶인 것이고 움켜쥐는 것이고 집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염오하려 하지 않고, 사라지게 하지 않고 해탈하려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attam itipi, mano itipi, vinnanam itipi(심의식.心.意.識)'은 같은 뜻으로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경전에서 마음은 느낌이나 지각과 관련되어 언급되고, 정신은 사유나 숙고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의식은 감각적 인식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을 자아라고 간주하는 것보다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자아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은 1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2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3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4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5년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1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2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3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40년도유지되는 것으로도, 5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10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그 이상도 유지되는 것으로도 보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마음이라고도 정신이라고도 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일어날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다른 것이 생기고 다른 것이 소멸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큰 숲에서 돌아다니는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잡는다. 그것을 놓은 뒤에 다른 것을 잡고, 그것을 놓은 뒤에 다른 것을 잡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마음이라고도 정신이라고도 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일어날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연기(緣起)를 바르게 사실에 맞게 잘 사고한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이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행(형성)들이,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할 때 행들이 소멸하고, 행들이 소멸할 때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할 때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할 때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할 때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할 때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할 때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할 때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할 때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싫어하고)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지각)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식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dutiyāssutavāsuttaṃ (SN 12.62-배우지 못한 자 경2)

62.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네 가지 근본물질(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에 대해 염오(싫어하여 떠나고)하려고도 하고, 사라지게 하려고도 하고, 해탈하려고도 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에게는 늘어나고 줄어들고 붙잡고 놓음도 있다. 그래서 거기서 배우지 못한 범부가 염오하려고도 하고, 사라지게 하려고도 하고, 해탈하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마음[心]이라고도 정신[意]라고도 의식[識]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에 대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잘 염오하지 못하고, 잘 사라지게 하지 못하고, 잘 해탈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이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묶인 것이고 움켜쥐는 것이고 집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잘 염오하지 못하고, 잘 사라지게 하지 못하고, 잘 해탈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을 자아라고 간주하는 것보다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자아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은 1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2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3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4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5년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1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2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3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40년도유지되는 것으로도, 5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100년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그 이상도 유지되는 것으로도 보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마음이라고도 정신이라고도 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일어날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다른 것이 생기고 다른 것이 소멸한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연기를 철저히 이치에 맞게 사고한다.

‘이렇게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이것이 소멸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즐거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바로 이 즐거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즐거운 느낌도 소멸하고 고요해진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괴로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바로 이 괴로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괴로운 느낌도 소멸하고 고요해진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괴롭지 즐겁지도 않음을 일으킬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바로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소멸하고 고요해진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두 개의 나무토막을 맞대어 마찰하면 열이 생기고 불이 붙는다. 이 두 개의 나무토막을 따로 떼어서 놓아두면 거기서 생긴 열도 식고 가라앉는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즐거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바로 이 즐거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즐거운 느낌도 소멸하고 고요해진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괴로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바로 이 괴로움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괴로운 느낌도 소멸하고 고요해진다.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괴롭지 즐겁지도 않음을 일으킬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바로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일으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소멸하고 고요해진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형상)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지각)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식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puttamaṃsūpamasuttaṃ (SN 12.63-아들의 고기 비유 경)

63.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자양분이 첫 번째이고, 감각접촉[觸]에 의한 자양분이 두 번째이고, 마음의 의도(마음의 생각)에 의한 자양분이 세 번째이고, 의식에 의한 자양분이 네 번째이다.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자양분(食)에 의존함(ahara-thitika)이란, 곧 일체의 중생들이 네 가지 자양분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네 가지 자양분이란 곧 '덩어리진 자양분(kabalimkaro aharo)', '감촉에 의한 자양분(phasso aharo)', '마음의 생각에 의한 자양분(manosancetana aharo)',  '의식에 의한 자양분(vinnanam aharo)' 를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덩어리진 자양분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남편과 아내인 두 사람이 적은 음식만을 가지고 사막의 길을 떠날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외아들이 있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그들이 사막의 길을 떠나서 그 적은 음식이 다 떨어져 버리고 다 소비되어 버렸지만 아직 길은 남아있고 사막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남편과 아내인 두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를것이다.

‘우리들의 적은 음식이 이미 다 떨어져버리고 다 소비되어 버렸지만 아직 길은 남아있고 사막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참으로 우리는 외아들이 사랑스럽고 소중하지만 이 아이를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꿴 고기로 만들어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아직 남아있는 사막을 건너야 할 것이다. 우리 셋 모두 죽어서는 안된다. '라고. 그래서, 비구들이여, 남편과 아내인 두 사람은 외아들이 사랑스럽고 소중하지만 그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궨 고기를 먹으면서 아직 남아 있는 사막을 건널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꿴 고기를 먹으면서 ‘외아들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외아들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맛을 즐기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배부르게 먹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몸을 살 찌우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해서 음식을 먹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참으로 그들은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 음식을 먹지 않았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덩어리진 음식은 이와 같다고 봐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덩어리진 음식을 올바르게 알 때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들에 대한 탐욕이 완전하게 알아진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들에 대한 탐욕이 완전하게 알아질 때 성스러운 제자가 그 족쇄에 묶여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그런 족쇄가 없어진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에 의한 자양분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만약 소가 가죽이 벗겨진 채로(찢겨진 채로) 벽에 기대어 서 있으면 그 벽을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존재들이) 그것을 뜯어 먹을 것이다. 만약 나무 곁에 서 있으면 나무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 먹을 것이다. 만약 물을 의지해서 서 있으면 물을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 먹을 것이다. 만일 노지에 서 있으면 노지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 먹을 것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소가 가죽이 벗겨져서 어떤 것을 의지해서 서 있더라도 거기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것을 뜯어먹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에 의한 자양분은 이렇게 보아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에 의한 자양분을 올바르게 알 때 세 가지 느낌이 완전하게 알아진다. 세 가지 느낌이 완전하게 알아질 때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것이든 더 이상 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한 길이 넘는 숯불 구덩이가 있는데 불꽃이나 연기도 없이 활활 타오르는 숯불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힘 센 두 남자에 의해 각각 양 손이 붙잡힌 채로 숯불 구덩이 가까이로 끌려올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것은 그 사람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고, 소망과도 거리가 멀고, 염원과도 거리가 멀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제 나는 숯불 구덩이에 빠질 것이고 그 때문에 죽게 되거나 죽을만큼의 고통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은 단지 이렇게 보아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을 올바르게 알 때  세 가지 갈애가 완전하게 알아진다. 세 가지 갈애가 완전히 알아질 때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것이든 더 이상 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의식에 의한 자양분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죄를 지은 도둑을 붙잡아 ‘왕이시여, 이 자는 죄를 지은 도둑입니다. 왕께서 원하시는 처벌을 내리십시오.’라고 하면서 왕에게 데려 올 것이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게들, 그렇다면 그대들은 가서 아침에 백 개의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그들은 아침에 그 사람을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그리고 왕은 한 낮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게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 ‘왕이시여,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게들, 그대들은 가서 한낮에 백 개의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그들은 한낮에 그  사람을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다시 왕은 저녁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게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 ‘왕이시여,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게들, 그대들은 가서 저녁에 백 개의 창으로 찔러라.’ 그러면 그들은 저녁에 그 사람을 백 자루의 창으로 찌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하루 동안 삼백 개의 창에 찔려서 그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겠는가?” 
“세존이시여, 한 개의 창에 찔린 사람도 그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삼백 자루의 창에 찔린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비구들이여, ‘의식에 의한 자양분은 이와 같다고 봐야 한다.’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의식에 의한 자양분이 올바르게 알려지면 정신∙물질(명색)도 완전하게 알려진다. 정신∙물질이 완전히 알려질 때 성스러운 제자에게 '어떤 것이든 더 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나는말한다.”

 

atthirāgasuttaṃ (SN 12.64-탐욕(貪) 있음 경)
64.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음식이 첫 번째요, 감각접촉[觸]에 의한 자양분이 두 번째요,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이 세 번째요, 의식에 의한 자양분이 네 번째이다.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덩어리진 음식에 대한 탐욕이 있고 환희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거기에 의식이 머물고 성장한다. 의식이 머물고 성장할 때 정신∙물질이 출현한다. 정신∙물질이 출현할 때 행(형성)들이 증장한다. 행들이 증장할 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다.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슬픔과 함께하고 불행과 함께하고 절망과 함께하는 그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거기서 의식이 머물러 성장한다 : 붓다고싸는 이 구절을 '업을 가속시키고 결생(結生)을 유인하여 강력하게 함으로써 머물러 성장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감각접촉에 의한 자양분에 ···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에 ··· 비구들이여, 만약 의식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탐욕이 있고 환희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거기에 의식이 머물고 성장한다. 의식이 머물고 늘어날 때 정신∙물질이 출현한다. 정신∙물질이 출현할 때 행(형성)들이 증장한다. 행들이 증장할 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다.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슬픔과 함께하고 불행과 함께하고 절망과 함께하는 그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염색공이나 화가가 물감이나 염색 재료를 사용하여(물감이나 붉은 랙이나 심황이나 남색이나 심홍색 염료) 잘 가공된 판자나 벽이나 흰 천에 사지를 모두 다 갖춘 여인의 모습이나 남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 덩어리진 음식에 대한 탐욕이 있고 환희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거기에 의식이 머물고 늘어난다. 의식이 머물고 늘어날 때 정신∙물질이 출현한다. 정신∙물질이 출현할 때 행(형성)들이 증장한다. 행들이 증장할 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다.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슬픔과 함께하고 불행과 함께하고 절망과 함께하는 그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여기서 판자(phalaka), 벽(bhitti), 흰 천(dussapatta)은 Srp.ii.114에 따르면 각각 삼계, 즉 감가적 쾌락의 세계(欲界.kamaloka), 물질의 세계(色界.rupaloka), 비물질의 세계(無色界.arupaloka)에 해당한다. 이러한 비유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자 비유를 한 것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업력은 세상에서 다양한 존재의 태어남을 만든다. 어떠한 존재가 행복한가 또는 괴로운가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이 화가의 뛰어나거나 저열한 재능에 의존하듯이 업의 성격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약 감각접촉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 비구들이여, 만약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 비구들이여, 만약 의식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탐욕이 있고 환희가 있고 갈애가 있으면 거기에 의식이 머물고 성장한다. 의식이 머물고 늘어날 때 정신∙물질이 출현한다. 정신∙물질이 출현할 때 행(형성)들이 증장한다. 행들이 증장할 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다.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을 때, 비구들이여, 슬픔과 함께하고 불행과 함께하고 절망과 함께하는 그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덩어리진 자양분에 대한 탐욕이 없고 환희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거기서 의식이 머물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 의식이 머물지 않고 성장하지 않을 때 정신∙물질이 출현하지 않는다. 정신∙물질이 출현하지 않을 때 행들이 증장하지 않는다. 행들이 증장하지 않을 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없다.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없을 때, 비구들이여, 슬픔이 없고 불행이 없고 절망이 없는 그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감각접촉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 비구들이여, 만약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 비구들이여, 만약 의식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탐욕이 없고 환희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거기서 의식이 머물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 의식이 머물지 않고 성장하지 않을 때 정신∙물질이 출현하지 않는다. 정신∙물질이 출현하지 않을 때 행들이 증장하지 않는다. 행들이 증장하지 않을 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없다.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없을 때, 비구들이여, 슬픔이 없고 불행이 없고 절망이 없는 그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북쪽이나 남쪽이나 동쪽으로 창이 있는 뾰족지붕 강당이나 떠는 뾰족지붕 집이 있다. 태양이 떠오를 때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면 어디에 머물겠는가(비추겠는가)?”

“서쪽 벽에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만약 서쪽 벽이 없다면 어디에 머물겠는가?”

“땅에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만약 땅이 없다면 어디에 머물겠는가?”

“물에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만약 물이 없다면 어디에 머물겠는가?”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비구들이여, 만약 덩어리진 자양분에 대한 탐욕이 없고 환희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

 

*여기서 햇빛(suriyarasmi)은 앞의 화가의 비유에서처럼 업의 존재로 비유되고 있다. 여기서는 태양의 빛이 닿는 서쪽 벽, 땅, 물이 각각 삼계로 비유되고 있다. Srp.ii.114에 따르면 아라한의 업, 즉 번뇌를 부순 자의 업은 햇빛처럼 아무런 장애가 없으며 어디에 나타나더라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가 몸을 가지고 있더라도 선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업을 행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단지 작용일 뿐 업보를 낳지 않는다. 이러한 아라한의 행위를 쉽게 설명하자면 새는 날아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감각접촉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 비구들이여, 만약 마음의 의도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 비구들이여, 만약 의식에 의한 자양분에 대한 탐욕이 없고 환희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거기서 의식이 머물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 의식이 머물지 않고 성장하지 않을 때 정신∙물질이 출현하지 않는다. 정신∙물질이 출현하지 않을 때 행들이 증장하지 않는다. 행들이 증장하지 않을 때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을 때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없다.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없을 때, 비구들이여, 슬픔이 없고 불행이 없고 절망이 없는 그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nagarasuttaṃ (SN 12.65-도시 경)

65.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나에게 깨닫기 이전, 바른 깨달음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참으로, 세상에서 괴로움을 겪는 이 존재는 태어나고 늙고 죽고 옮겨가고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늙음∙죽음이라는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언제나 늙음∙죽음이라는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히 알 것인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을 때 늙음∙죽음(노사.老死)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는가(생기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마음냄(여리작의.如理作意)을 통한 지혜로 완전히 알았다.

‘태어남이 있을 때 늙음∙죽음이 있으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본 경은 연기와 관련하여 의식(vinnana)까지만 나타난다. 여기서 다시 의식이 명색에 조건되어 10연기를 형성한다.  붓다고싸에 의하면 12연기에서 두 가지가 생략되고 10연기가 된 것은 이 가르침이 현세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을 때 태어남이 있고 ··· 존재가 있고 ··· 집착이 있고 ··· 갈애가 있고 ··· 느낌이 있고 ··· 감각접촉이 있고 ···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 명색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마음냄을 통한 지혜로 완전히 알았다. '의식이 있을 때 명색이 있고 의식으로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을 때 의식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마음냄을 통한 지혜로 완전히 알았다. '명색이 있을 때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의식은 되돌아간다.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명색으로부터 나아가지 못한다). 그 안에서 태어나거나, 늙거나, 죽거나, 옮겨가거나, 다시 태어난다. 즉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고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난다.'라고. 비구들이여, 나에게 ‘일어남, 일어남(원인에 의한 원인)’이라고 하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지혜[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이 생겨났다.  

 

*Srp.ii.125에 따르면, 여기서 되돌아오는 의식이란 재생의식(patisandhivinnana)과 통찰지(vipassananana)를 말한다.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오고 통찰지는 대상으로부터 되돌아온다. 그것은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한, 이와 같이 태어나고 늙어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뜻이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없을 때 늙음∙죽음[老死]이 없고 무엇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이 소멸하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마음냄을 통한 지혜로 완전히 알았다.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고 태어남이 소멸할 때 늙음∙죽음이 소멸한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없을 때 태어남이 없고 ··· 존재가 없고 ··· 집착이 없고 ··· 갈애가 없고 ··· 느낌이 없고 ··· 감각접촉이 없고 ··· 여섯 감각장소가 없고 ··· 명색이 없고 무엇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하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마음냄을 통한 지혜로 완전히 알았다. '의식이 없을 때 명색이 없고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한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없을 때 의식(識)이 없고 무엇이 소멸할 때 의식(識)이 소멸하는가’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마음냄을 통한 지혜로 완전히 알았다.  

‘명색(名色)이 없을 때 의식이 없고, 명색이 소멸할 때 의식이 소멸한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참으로 깨달음을 위한 길을 증득하였다. 즉 명색이 소멸할 때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한다. 명색이 소멸할 때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할 때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라고. 비구들이여, 나에게 ‘소멸, 소멸’이라는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지혜[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큰 숲 속을 돌아다니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도로를 발견할 것이다. 그는 그 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그는 그 길을 따라가다가 공원을 갖추고 숲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이 있고 아름다운 예전의 사람들이 살았던 옛 도시와 옛 수도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그 사람은 왕이나 왕의 대신에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이다. 

‘왕이시여, 아셔야 합니다. 저는 큰 숲 속을 돌아다니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그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던 저는 공원을 갖추고 숲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이 있고 아름다운 예전의 사람들이 살았던 옛 도시와 옛 수도를 발견하였는습니다. 왕이시여, 그 도시를 다시 건설하십시오.’라고.
그러면, 비구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이 그 도시를 다시 건설할 것이다. 그 도시는 나중에 번창하고, 부유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대중들로 가득하고, 성장과 풍족함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나는 예전의 정등각들이 다닌던 옛 성과 옛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예전의 정등각들이 다니던 옛길과 옛 거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예전의 정등각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따라갔다. 그 길을 따라 가면서 늙음∙죽음을 완전히 알았고, 늙음∙죽음의 일어남을 완전히 알았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완전히 알았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알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갔다. 그 길을 따라가면서 태어남을 완전히 알았고 ··· 존재를 완전히 알았고 ···착을 완전히 알았고 ··· 갈애를 완전히 알았고 ··· 느낌을 완전히 알았고 ··· 감각접촉을 완전히 알았고 ··· 여섯 감각장소를 완전히 알았고 ··· 명색(정신∙물질)을 완전히 알았고··· 의식을 완전히 알았고··· 나는 그 길을 따라갔다. 그 길을 따라 가면서 행들을 완전히 알았고, 행들의 일어남을 완전히 알았고, 행들의 소멸을 완전히 알았고, 행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알았다. 그 길을 완전히 안 뒤에 나는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에게 설하였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여 청정범행은 잘 유지되고, 번창하고,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신과 인간들에게 잘 알려졌다(설명되었다).”

 

sammasasuttaṃ (SN 12.66-숙고(사유) 경)
6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꾸루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존귀하신(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안으로 숙고해야 한다(성찰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안으로 숙고를 합니다.”라고.

“그렇다면, 비구여, 그대는 어떻게 안으로 숙고를 하는가?”

그러자 그 비구는 대답을 하였다. 그 비구가 설명을 하였지만 그 설명은 세존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 

 

*'sammasati'는 접촉하다, 만지다, 쓰다듬다'의 뜻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의미로는 '숙고하다, 고려하다, 성찰하다'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연기적인 조건에 대한 내적인 관찰을 뜻하고, 연기에 대한 성찰의 뜻으로 쓰인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안으로 숙고에 대해 말씀하실 적절한 시기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 세존께서 설해 주실 바로 적절한 시기입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고 비구들은 그것을 듣고 잘 간직할 것입니다.”라고.

“그렇다면, 아난다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안으로 숙고를 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다양하고 다른 종류의) 괴로움과 늙음∙죽음(노사.老死)이 생겨난다. 이런 괴로움은 무엇이 인연이고(조건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무엇이 있을 때 늙음∙죽음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는가?’라고. 
숙고하는 그는 이렇게 안다.

‘이 세상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괴로움과 늙음∙죽음이 생겨난다. 이런 괴로움은 재생의 조건이 인연이고, 재생의 조건 때문에 자라나고, 재생의 조건에서 생기고, 재생의 조건이 기원이다. 재생의 조건이 있을 때 늙음∙죽음이 있고, 재생의 조건이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다.’라고.
그는 늙음∙죽음을 완전히 알고, 늙음∙죽음의 자라남을 완전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을 완전히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안다. 이렇게 닦는 자는 법에 따라 닦는 자이다. 이런 비구는,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늙음∙죽음을 소멸하기 위한 길을 온전히 바르게 닦는 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숙고하는 비구는 안으로 숙고한다.

‘그러면 이런 재생의 조건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 때문에 자라나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기원인가? 무엇이 있을 때 재생의 조건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재생의 조건이 없는가?’라고. 숙고하는 그는 이렇게 안다. 

‘재생의 조건은 갈애가 인연이고, 갈애 때문에 자라나고, 갈애에서 생기고, 갈애가 기원이다. 갈애가 있을 때 재생의 조건이 있고, 갈애가 없을 때 재생의 조건이 없다.’라고. 그는 재생의 조건을 완전히 알고, 재생의 조건의 자라남을 완전히 알고, 재생의 조건의 소멸을 완전히 알고, 재생의 조건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안다. 이렇게 닦는 자는 법에 따라 닦는 자이다. 이런 비구는,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재생의 조건을 소멸하기 위한 길을 온전히 바르게 닦는 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숙고하는 비구는 안으로 숙고를 한다.

‘그러면 이런 갈애는 생길 때 어디에서 생기고, 이런 갈애는 자리 잡을 때 어디에서 자리를 잡는가?’라고.
숙고하는 그는 이렇게 안다. 

‘세상에서 사랑스럽고(마음을 끌고) 즐거운 것이 있으면 이런 갈애는 생길 때 여기에서 생기고, 이런 갈애는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무엇이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인가? 시각작용(안.眼)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이런 갈애는 생길 때 여기에서 생기고, 이런 갈애는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 청각작용(이.耳)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 후각작용(비.鼻)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 미각작용(설.舌)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 촉각작용(신.身)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 의식작용(의.意)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이런 갈애는 생길 때 여기에서 생기고, 이런 갈애는 자리 잡을 때 여기에서 자리 잡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항상(상.常)이라고 보았고, 행복(락.樂)이라고 보았고, 자아라고 보았고, 병 없음이라고 보았고, 안온(安穩)이라고 보았던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자라게 했다. 갈애를 자라게 했던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자라게 했다. 재생의 조건을 자라게 했던 그들은 괴로움을 자라게 했다. 괴로움을 자라게 했던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괴로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항상(상.常)이라고 볼 것이고, 행복(락.樂)이라고 볼 것이고, 자아라고 볼 것이고, 병 없음이라고 볼 것이고, 안온(安穩)이라고 볼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자라나게 할 것이다. 갈애를 자라나게 할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자라나게 할 것이다. 재생의 조건을 자라나게 할 그들은 괴로움을 자라나게 할 것이다. 괴로움을 자라나게 할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괴로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항상(상.常)이라고 보고, 행복(락.樂)이라고 보고, 자아라고 보고, 병 없음이라고 보고, 안온(安穩)이라고 보는 현재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자라나게 한다. 갈애를 자라게 하는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자라게 한다. 재생의 조건을 자라게 하는 그들은 괴로움을 자라게 한다. 괴로움을 자라게 하는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괴로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좋은 색깔과 좋은 냄새와 좋은 맛을 가진 마실 것이 담긴 잔이 있는데, 독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위에 시달리고 지쳐있고 심한 갈증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목마른 사람이 올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벗이여, 이것은 좋은 색깔과 좋은 냄새와 좋은 맛을 가진 마실 것이 담긴 잔인데, 독이 섞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원한다면 마셔도 좋습니다. 그대가 그것을 마시면 색깔이나 냄새나 맛도 좋을 것이인입니다. 그러나 마시고 나면 그것 때문에 죽게 되거나 죽음만큼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는 마실 것이 담긴 잔을 서둘러서 숙고하지도 않고 마실 것이다. 잔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 때문에 죽게 되거나 죽음만큼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항상(상.常)이라고 보고, 행복(락.樂)이라고 보고, 자아라고 보고, 병 없음이라고 보고, 안온이라고 보는 현재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자라나게 한다. 갈애를 자라게 하는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자라게 한다. 재생의 조건을 자라게 하는 그들은 괴로움을 자라게 한다. 괴로움을 자라게 하는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괴로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이라고 보았고, 괴로움이라고 보았고, 무아라고 보았고, 병이라고 보았고, 두려움이라고 보았던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제거하였다. 갈애를 제거하였던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였고,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였던 그들은 괴로움을 제거하였다. 괴로움을 제거하였던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이라고 볼 것이고, 괴로움이라고 볼 것이고, 무아라고 볼 것이고, 병이라고 볼 것이고, 두려움이라고 볼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제거할 것이다. 갈애를 제거할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제거 할 것이고, 재생의 조건을 제거할 그들은 괴로움을 제거할 것이다. 괴로움을 제거할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이라고 보고, 괴로움이라고 보고, 무아라고 보고, 병이라고 보고, 두려움이라고 보는 현재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제거한다. 갈애를 제거하는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고,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는 그들은 괴로움을 제거한다. 괴로움을 제거하는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좋은 색깔과 좋은 냄새와 좋은 맛을 가진 마실 것이 담긴 잔이 있는데, 독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위에 시달리고 지쳐있고 심한 갈증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목마른 사람이 올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벗이여, 이것은 좋은 색깔과 좋은 냄새와 좋은 맛을 가진 마실 것이 담긴 잔인데, 독이 섞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원한다면 마셔도 좋습니다. 그대가 그것을 마시면 색깔이나 냄새나 맛도 좋을 것이인입니다. 그러나 마시고 나면 그것 때문에 죽게 되거나 죽음만큼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러나, 비구들이여, 그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나는 이 갈증을 물로 해소하거나 우유로 해소하거나 구운 소금으로 해소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이것을 마시지 않아야겠다. 그것이 나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다.’라고. 그는 마실 것이 담긴 그 잔을 숙고하여 마시지 않을 것이다. 잔을 거부할 것이다. 그는 그것 때문에 죽거나 죽음만큼의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이라고 보았고, 괴로움이라고 보았고, 무아라고 보았고, 병이라고 보았고, 두려움이라고 보았던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누구든지 갈애를 제거하였다. 갈애를 제거하였던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였고,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였던 그들은 괴로움을 제거하였다. 괴로움을 제거하였던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볼 것이고, 괴로움이라고 볼 것이고, 무아(無我)라고 볼 것이고, 병이라고 볼 것이고, 두려움이라고 볼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보고, 괴로움이라고 보고, 무아(無我)라고 보고, 병이라고 보고, 두려움이라고 보는 현재의 사문이나 바라문은 누구든지 갈애를 제거한다. 갈애를 제거하는 그들은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고, 재생의 조건을 제거하는 그들은 괴로움을 제거한다. 괴로움을 제거하는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근심∙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naḷakalāpīsuttaṃ (SN 12.67-갈대 묶음 경)
67. 한 때에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꼿티까 존자가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마하꼿티까 존자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꼿티까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리뿟따여, 늙음∙죽음(노사.老死)은 스스가 만드는 것입니까, 늙음∙죽음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늙음∙죽음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늙음∙죽음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원인없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도반 꼿티까여, 늙음∙죽음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늙음∙죽음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늙음∙죽음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늙음∙죽음은 스스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습니다.

 

*마하꼿티까 존자(Mahakotthika)는 사왓티의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다를 공부하였으나 세존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였다. 그는 아라한으로 무애해를 얻은 자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송되었다.  그는 분석적 지혜가 뛰어나 대표적으로 MN118을 비롯하여 여러 경에서 교리문답에 나타난다.   

 

도반 사리뿟따여, 태어남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태어남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태어남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태어남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입니까?"

"도반 꼿티까여, 태어남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남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남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태어남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존재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 집착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 갈애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 느낌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 감각접촉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 여섯 감각장소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 명색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명색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명색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명색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입니까?"

"도반 꼿티까여, 명색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명색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명색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의식(識)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까, 의식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의식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의식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입니까 ?”

“도반 꼿티까여, 의식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의식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식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도반 꼿티까여, 명색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명색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명색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습니다.라고.

 

우리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도반 꼿티까여, 의식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의식은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식은 스스로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습니다.’라고.

도반 사리뿟따여, 이것에 대해 이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도반들이여, 이제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내가 하려는 말의 뜻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를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습니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고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합니다. 도반들이여, 만약 이 두 개의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내면 다른 하나도 쓰러질 것입니다. 만일 다른 하나를 빼내면 다른 하나도 쓰러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명색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합니다. 명색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합니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합니다.”

 

“경이롭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놀랍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사리뿟따 존자는 참으로 좋은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사리뿟따 존자가 한 말을 다음의 36가지 경우로 기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도반이여, 만약 비구가 늙음∙죽음의 염오(싫어하여 떠나고)와 사라짐과 소멸을 위하여 법을 설하면 그를 '법을 설하는 비구'라고 부르기에 적절합니다. 만약 비구가 늙음∙죽음의 염오와 사라짐과 소멸을 위하여 닦으면 그를 '출세간 법(열반)으로 이끄는 법을 닦는 비구'라고 부르기에 적절합니다. 만약 비구가 늙음∙죽음의 염오와 사라짐과 소멸로부터 집착없이 해탈하면 그를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 비구'라고 부르기에 적절합니다. 만약 태어남의 ··· 만약 존재의 ··· 만약 집착의 ··· 만약 갈애의 ··· 만약 느낌의 ··· 만약 감각접촉의 ··· 만약 여섯 감각장소의 ··· 만약 명색의 ··· 만약 의식의 ···만약 행들의 ··· 만약 비구가 무명의 염오와 사라짐과 소멸을 위하여 법을 설하면 그를 '법을 설하는 비구'라고 부르기에 적절합니다. 만약 비구가 무명의 염오와 사라짐과 소멸을 위하여 닦으면 그를 '출세간 법으로 이끄는 법을 닦는 비구'라고 부르기에 적절합니다. 만약 비구가 무명의 염오와 사라짐과 소멸로부터 집착 없이 해탈하면 그를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 비구'라고 부르기에 적절합니다."

 

kosambisuttam (SN 12.68-꼬삼비 경)  
68. 한 때에 무실라 존자와 사윗타 존자와 나라다 존자와 아난다 존자는꼬삼비에서 고시따 승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사윗타 존자가 무실라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시따 승원(ghositarama)은 고시따 장자가 지은 승원이다. 세존께서는 꼬삼비를 방문할 때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이 승원에는 법과 계율에 정통한 비구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은 첫 번째 승단분열의 이유가 되었던 논쟁을 일으킨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윗타(Savittha) 장로는 본 경 이외에도 AN.I.118에서 사리뿟따와 대화를 나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세 종류의 성자 가운데 몸으로 깨우친 자(kayasakkhi)이나, 견해로 성취한 자(ditthippatto)보다 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avimutto)를 보다 훌륭하고 탁월한 자로 판단했다. 사윗타 장로는 믿음으로 해탈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이 세 부류 성자의 우열을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무실라(Musila)장로는 본 경에만 나오고 주석서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유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이렇게 그대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는 (체험적인)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유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알고 또한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나는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행들을(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여기서 나열되는 믿음(saddha), 개인적으로 좋아함(취향.ruci), 전승(anussava), 상태에 대한 고찰(akaraparivitakka), 견해에 대한 이해(ditthinjjhanakkhanti)는 Srp.ii.122에 따르면, '믿음'은 타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좋아함'은 개인 선호에 의해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전승'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상태에 대한 고찰'은 고찰하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견해에 대한 이해'는 사유하여 이해한 뒤에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paccattam eva nanam 은 각자의 앎(지혜)이라는 뜻인데 이는 내적이고 체험적인 지혜를 말한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유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그대는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유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존재가 소멸하기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집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집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집착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집착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명색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명색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 소멸한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무실라여, 그렇다면 무실라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

이렇게 말하자 무실라 존자는 침묵하였다.

 

그때 나라다 존자가 사윗타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윗타여, 내가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이 질문을 해주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설명하겠습니다.”

“도반 나라다여, 그렇다면 나라다 존자는 질문을 받으십시오. 나는 나라다 존자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나라다 존자는 나에게 설명을 해 주십시오.” 


“도반 나라다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유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그대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라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고,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라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고,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고,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있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이 소멸한다.’라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한다'라고, 집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한다.’라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집착이 소멸한다.’라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한다.’라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한다.’라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한다.’라고, ‘명색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라고,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라고,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한다.’라고,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나라다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유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그대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는 앎이 있습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전승과 관계없이, 합리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유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나라다여, 그렇다면 나라다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

“도반 사윗타여,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잘 보았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도반 사왓타여, 사막의 길에 스무 길이나 되는 깊은 우물이 있는데 밧줄이 달린 물 긷는 두레박이 없습니다. 그때 더위에 시달리고 더위에 지쳐있고 심한 갈증을 느끼고 목마른 사람이 거기로 올 것입니다. 그는 그 우물을 들여다보고 ‘저기에 물이 있구나.’라고 알지만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뒤 그것을 마셔서 몸으로 직접 체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도반 사왓타여,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잘 보았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자 아난다 존자가 사윗타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윗타여, 그대는 이렇게 말하는 나라다 존자에게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도반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나라다 존자에게 좋다는 말과 유익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upayantisuttam (SN 12.69-불어남 경)  

69. 사왓티에 머물고 계셨다. ··· “비구들이여, 대양의 물이 불어나면 큰 강들의 물이 불어나고, 큰 강들의 물이 불어나면 작은 강들의 물이 불어나고, 작은 강들의 물이 불어나면, 큰 호수들의 물이 불어나고, 큰 호수들의 물이 불어나면, 작은 호수들의 물이 불어난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무명이 불어나면 형성이 불어나고, 형성이 불어나면 의식이 불어나고, 의식이 불어나면 명색이 불어나고, 명색이 불어나면 여섯 감각장소가 불어나고, 여섯 감각장소가 불어나면 감각접촉이 불어나고, 감각접촉이 불어나면 느낌이 불어나고, 느낌이 불어나면 갈애가 불어나고, 갈애가 불어나면 집착이 불어나고, 집착이 불어나면 존재가 불어나고, 존재가 불어나면 태어남이 불어나고, 태어남이 불어나면 늙음∙죽음이 불어난다. 


비구들이여, 대양의 물이 줄어들면, 큰 강들의 물이 줄어들고, 큰 강들의 물이 줄어들면 작은 강들의 물이 줄어들고, 작은 강들의 물이 줄어들면 큰 호수들의 물이 줄어들고, 큰 호수들의 물이 줄어들면 작은 호수들의 물이 줄어든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무명이 줄어들면 형성이 줄어들고, 형성이 줄어들면 의식이 줄어들고, 의식이 줄어들면 명색이 줄어들고, 명색이 줄어들면 여섯 감각장소가 줄어들고, 여섯 감각장소가 줄어들면 감각접촉이 줄어들고, 감각접촉이 줄어들면 느낌이 줄어들고, 느낌이 줄어들면 갈애가 줄어들고, 갈애가 줄어들면 집착이 줄어들고, 집착이 줄어들면 존재가 줄어들고, 존재가 줄어들면 태어남이 줄어들고, 태어남이 줄어들면 늙음∙죽음이 줄어든다.” 

 

susimasuttaṃ (SN 12.70-수시마 경)
7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에 있는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환대받고, 존경받고, 존중받고, 공경받고, 예경받으며,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으셨다. 비구 승가도 역시 존경받고, 존중받고, 공경받고, 예경받으며,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었다. 그러나 외도 유행승들은 존경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공경받지 못하고, 예경받지 못하고,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지 못했다.

 

그 당시 수시마 유행승이 많은 유행승의 대중과 함께 라자가하에 살고 있었다. 수시마 유행승의 대중들이 수시마 유행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시오, 도반이여, 그대는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으시오. 그대가 법을 철저히 배운 뒤에 우리에게 말해주시오(가르쳐 주시오). 우리도 그 법을 철저히 배운 뒤에 재가자들에게 설해줄 것이오. 그러면 우리도 존경을 받고 존중을 받고 공경을 받고 예경을 받고, 가사와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필요한 약품을 얻게 될 것이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수시마 유행승은 자신의 대중에게 대답한 뒤에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시마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범행을 닦고자 합니다.”라고.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수시마 유행승을 데리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수시마 유행승이 ‘도반 아난다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범행을 닦고자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아난다여, 수시마를 비구승가에 출가하게 하여라.”
수시마 유행승은 세존의 곁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세존의 곁에서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다. 수시마 존자는 많은 비구들이 세존의 곁에서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자 수시마 존자는 그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들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시마 존자는 그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이여, 존자들이 세존의 곁에서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 존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합니까? 즉,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까?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습니까?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습니까?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습니까?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와 같습니까?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브라흐마)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 존자들은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界)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 존자들은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중생들과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립니까?
즉 탐욕을 지닌 마음을 탐욕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탐욕을 떠난 마음을 탐욕이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고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산란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광대하지 않은 마음을 광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삼매를 얻은 마음을 삼매를 얻은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삼매를 정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 존자들은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까?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까?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그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 존자들은 인간을 넘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天眼]으로 중생들의 죽음과 삶에 관한 것을 봅니까?

즉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열등하고 수승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추한 용모와, 즐거운 곳에 가고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립니까?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불행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진 후 죽어서 좋은 곳[善處]에 나아가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그대 존자들은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열등하고 수승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추한 용모, 즐거운 곳에 가고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 존자들은 물질[色]을 초월하여 물질이 없는[無色]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체득하여 머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여기서 존자들은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지만 이러한 법들은 증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됩니까?”

“도반 수시마여, 우리는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하였습니다.”

“나는 존자들이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내가 존자들의 이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알 수 있도록 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반 수시마여, 그대가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에 의한 해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시마 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시마 존자는 그 비구들과 함께 주고받은 대화를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수시마여, 이전에는 사실에 관한 앎(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이 있었고, 이후에는 열반에 대한 앎이 있다.”

 

*사실에 대한 지혜(dhammatthitinanam)는 한역에서는 법주지(法住智)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법의 상태, 즉 괴롭고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앎에 대한 지혜, 다시 말하면 연기법에 대한 통찰의 지혜를 말한다. 
Srp.ii.127에 따르면, 사실에 대한 지혜는 위빳사나의 지혜(vipassananana)를 말하고 열반에 대한 지혜는 위빳사나의 마지막 단계인 벗어나는 길에 대한 지혜(magganana)를 말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의 이 간략한 말씀의 상세한 뜻을 알 수 있도록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시마여, 그대가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간에 먼저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가 있고 나중에 열반에 대한 지혜가 있다.”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수시마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과거의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수시마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싫어하여 떠나고)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이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식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수시마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집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집착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명색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마여, 그대는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하는가? 즉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하는가?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이 하는가?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속에서와 같이 하는가?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이 하는가?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와 같이 하는가?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브라흐마)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발휘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마여, 그대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천상이나 인간의 소리 듣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마여, 그대는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중생들과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 차리는가? 즉 탐욕을 지닌 마음을 탐욕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탐욕을 떠난 마음을 탐욕이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는가?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고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립니까?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는가?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산란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는가?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광대하지 않은 마음을 광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는가?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는가? 삼매를 얻은 마음을 삼매를 얻은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삼매를 정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는가?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아 차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마여, 그대는 여러 전생을 기억하는가?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하는가?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 라고. 그처럼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마여, 그대는 인간을 넘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의 죽음과 삶에 관련한 것을 보는가? 즉 죽고 태어나고, 여들하고 수승(고상)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추한 용모와,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리는가?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불행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는다. 그들은 몸이 무너진 후 죽어서 좋은 곳에 나아가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그대 존자들은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열등하고 수승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추한 용모, 즐거운 곳에 가고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마여, 그대는 물질[色]을 초월하여 물질이 없는[無色]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이제, 수시마여, 이런 설명이 있지만, 이런 법들을 증득하지 못하였다. 수시마여,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러자 수시마 존자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숙여 절을 올린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제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 설해진 법과 율에서 법을 훔치기 위해서 출가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가 미래에 다시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제 자신을 단속할 수 있도록 제 잘못에 대한 참회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수시마여, 이렇게 잘 설해진 법과 율에서 법을 훔치기 위해 출가한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고 모르고 능숙하지 못해서 잘못을 저질렀다. 예를 들면, 수시마여, 죄를 지은 도둑을 붙잡아 ‘왕이시여, 이 자는 죄를 지은 도둑입니다. 왕께서 원하시는 처벌을 내리십시오.’라고 하면서 대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그렇다면 이 사람을 단단한 밧줄로 손을 뒤로 한 채 꽁꽁 묶어서 머리를 깎고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이 골목 저 골목,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남쪽 문으로 데리고 가서는 도시의 남쪽에서 머리를 잘라버려라.’라고. 그러면 왕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단단한 밧줄로 손을 뒤로 한 채 꽁꽁 묶어서 머리를 깎고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이 골목 저 골목,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남쪽 문으로 데리고 가서는 도시의 남쪽에서 머리를 자를 것이다.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수시마여, 그런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렇게 잘 설해진 법과 율에서 법을 훔치기 위해 출가한 자는 그것 때문에 더 괴로운 과보가 있고 더 고통스러운 과보가 있고, 심지어 파멸처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수시마여, 그대는 잘못을 범한 것을 잘못을 범했다고 인정하고 법답게 참회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대를 받아들인다. 수시마여, 잘못을 범한 것을 잘못을 범했다고 인정한 다음 법답게 참회하고 미래에 그러한 잘못을 단속하는 자는 성자의 율에서 향상하기 때문이다.”

 


제7장 대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