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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상윳따 - 제9장 장로 품(Thera vagga. SN22:83-SN22:92)

실론섬 2014. 5. 11. 22:09

제9장 장로 품

Theraa-vagga (SN 22.83-92)

ānandasuttaㅡ (SN 22.83-아난다 경)
83. 한 때에 아난다 존자는 사왓티의 제따바나(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난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대답했다. “도반이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는 우리가 신참 비구였을 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설법을 하였습니다.”

'도반 아난다여,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물질적 요소를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감수작용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각작용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형성작용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삭별작용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예를 들면 여인이나 남자가 젊으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음 물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때 그는 집착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지 집착하지 않으면서 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를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 감수작용을 집착하기 때문에 ··· 지각작용을 집착하기 때문에 ··· 형성작용을 ··· 식별작용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생각과 분별이 있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반 아난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적 요소는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존자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존자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존자여.' '그러면 무상한 겄은 괴로움입니까,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다, 존자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도반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도반 아난다여, 이와 같이 보는 비구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작용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납니다. 싫어하여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압니다.'

“도반들이여,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는 우리가 신참 비구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교계를 하였습니다. 나는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의 설법을 듣고 법을 알고 이해하였습니다."

 

tissasuttam (SN 22.84-띳사 경)
8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의 고종사촌인 띳사 존자가 많은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제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많은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띳사 존자가 많은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어떤 비구를 불러서 말씀하셨다.“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이름으로 ‘도반 띳사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라고 띳사 비구를 불러오라.”“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는 세존께 대답한 뒤 띳사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띳사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도반 띳사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띳사 존자는 비구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띳사 존자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띳사여, 그대가 많은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요즘 저의 몸은 무겁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법들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해태와 혼침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아무런 즐거움 없이 청정범행을 닦고 있고 법들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지 못하고 바램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뜨거움을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하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감수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지 못하고 바램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뜨거움을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하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감수작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각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지 못하고 바램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뜨거움을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하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지각작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지 못하고 바램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뜨거움을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하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형성작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지 못하고 바램을 떠나지 못하고 갈증을 떠나지 못하고 뜨거움을 떠나지 못하고 갈애를 떠나지 못하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욕심을 떠나고 바램을 떠나고 갈증을 떠나고 뜨거움을 떠나고 갈애를

떠난 자의 물질적 요소는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을 떠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감수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욕심을 떠나고 바램을 떠나고 갈증을 떠나고 뜨거움을 떠나고 갈애를
떠난 자의
자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감수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각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욕심을 떠나고 바램을 떠나고 갈증을 떠나고 뜨거움을 떠나고 갈애를
떠난 자의  자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감수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성작용에 대한 탐욕을 탐욕을 떠나고 욕심을 떠나고 바램을 떠나고 갈증을 떠나고 뜨거움을 떠나고 갈애를
떠난 자의 자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형성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욕심을 떠나고 바램을 떠나고 갈증을 떠나고 뜨거움을 떠나고 갈애를
떠난 자의  자의 감수작용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고 장하구나, 띳사여. 띳사여,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을 떠난 자는 이와 같이 된다." 

 “띳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띳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띳사여, 이와 같이 보는 비구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띳사여, 예를 들면 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길을 잘 알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길을 잘 안다고 하자.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보시오, 이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이 길을 따라 잠시 가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시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깊은 밀림이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넓은 늪지대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험한 낭떠러지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잠시 가시오. 그 길을 따라 잠시 가면 넓고 큰 아름다운 평원이 나타날 것이오.’라고.
띳사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띳사여,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를 두고 한 말이고,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여래∙아라한∙정등각자를 두고 한 말이다. 두 갈래 길은 의심을 두고 한 말이고, 왼쪽 길은 여덟 가지의 삿된 길을 두고 한 말이니 삿된 견해, 삿된 사유, 삿된 언어, 삿된 행위, 삿된 생활, 삿된 정진, 삿된 마음챙김, 삿된 삼매이며, 오른쪽 길은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바른 길을 두고 한 말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깊은 밀림은 무명을 두고 한 말이고, 늪지대는 감각적 쾌락을 두고 한 말이며, 험한 낭떠러지는 절망과 분노를 두고 한 말이고, 아름다운 평원은 열반을 두고 한 말이다. 
기뻐하라, 띳사여. 즐거워하라, 띳사여. 나는 교계하기 위해서 있고 나는 보호하기 위해서 있고 나는 가르치기 위해서 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띳사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찬탄하였다.

 

yamakasuttaṃ (SN 22.85-야마까 경)
85. 한 때에 사리뿟따 존자는 사왓티의 제따와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야마까라는 비구에게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안다.'라는 삿된(악한) 견해가 생겼다.

 

*이 비구의 견해는 일반적인 단멸(uccheda-ditthi)과는 다르다. 야마까 존자는 보통의 중생들은 윤회를 거듭하지만 아라한은 단멸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그가 '형성된 것들(행.sankhara)은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형성된 것들의 전개는 더 이상 전개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삿된 견해가 아니고, 가르침과 조화가 되는 지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중생(satta)'이 단멸하고 소멸한다.'고 했기 때문에 삿된 견해가 생긴 것이다.(SA.ii.310)  

 

많은 비구들이 야마까 비구에게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안다.'라는 삿된 견해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러자 그 비구들은 야마까 존자에게 갔다. 가서는 야마까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들은 야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야마까여, 그대에게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안다.'라는 삿된 견해가 생긴 것이 사실입니까?”

“도반들이여,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압니다.”    

“도반 야마까여,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세존께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그 비구들로부터 말을 듣고도 야마까 존자는 그 삿된 견해를 더욱더 고집스럽게 집착하여 말했다.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 비구들은 야마까 존자를 그 삿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리뿟따 존자가 머물고 있는 거처로 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마까라는 비구에게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안다.'라는 삿된 견해가 생겼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 연민을 일으켜 야마까 존자에게 가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으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사리뿟따 존자는 저녁 무렵에 삼매에서 일어나 야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야마까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야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야마까여, 그대에게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삿된 견해가 생긴 것이 사실입니까?”

“도반이여,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압니다."  

 

“도반 야마까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적 요소는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감수작용은 항상합니까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 식별작용은 항상합니까, 무상합니까?" "무상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므로 ··· 이렇게 보는 ··· 다음에는 현재 상태가 되지 않는다.'라고 압니다."

 

“도반 야마까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적 요소를 여래라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 "감수작용을 여래라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여래라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적 요소 안에 여래가 있다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물질적 요소로부터 다른 곳에 여래가 있다고 간주합니까(여래는 물질적 요소와 다르다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 "감수작용 안에 ··· 감수작용으로부터 다른 곳에 ··· 지각작용 안에 ··· 지각작용으로부터 다른 곳에 ··· 형성작용들 안에 ··· 형성작용들로부터 다른 곳에 ··· 식별작용 안에 여래가 있다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식별작용으로부터 다른 곳에 여래가 있다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적 요소와 감수작용과 지각작용과 형성작용들과 식별작용을 [오온이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라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적 요소를 가지지 않고, 감수작용을 가지지 않고, 지각작용을 가지지 않고, 형성작용들을 가지지 않고, 식별작용을 가지지 않은 것을 여래라고 간주합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도반 야마까여, 그대에게 지금∙여기의 진실하고 믿을만한 여래가 발견되지 않은 이런 경우에 그대가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단멸하고, 사라진다.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합니까?”

“도반 사리뿟따여, 이전에 현명하지 못한 저에게 삿된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리뿟따 존자의 이 설법을 듣고서 그 삿된 견해는 버려졌습니다. 저에게 법이 이해되었습니다.”

 

“도반 야마까여, 만약 그대에게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무나면 이렇게 질문받은 그대는, 도반 야마까여, 무엇이라고 설명하겠습니까?”

“도반이여, 만약 저에게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하면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도반이여, 물질적 요소는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인 것은 사라졌고 소멸되었습니다.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 식별작용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인 것은 사라졌고 소멸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도반이여, 이렇게 질문받은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설명할 것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도반 야마까여. 도반 야마까여, 그렇다면 이 의미를 더욱 잘 알기 위해 그대에게 비유를 말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 야마까여,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 그를 호위무사들이 잘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로움을 바라지 않고 이익을 바라지 않고 유가안온을 바라지 않고 목숨을 빼앗기를 바라는 어떤 사람이 누가 되었든 생길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사람은 큰 재물과 큰 재산을 가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다. 그런 그를 호위무사들이 잘 보호하고 있다. 이 사람을 힘을 사용해서 목숨을 빼앗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그의 측근이 되어서 목숨을 빼앗는 것이 어떨까!’라고.
그는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다가가서 ‘존자시여, 그대를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그를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고, 그는 장자나 그의 아들을 섬길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자고, 어떤 일이든 순종하고,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사랑스럽게 말하면서 그를 섬길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그를 측근으로 여기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로 대하고 그에게 큰 신뢰를 가질 것입니다. 그때, 도반이여, 그 사람에게 ‘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나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혼자 있을 때 날카로운 칼로 그의 목숨을 빼앗을 것입니다.

 

도반 야마까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다가가서 ‘존자이시여, 그대를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말할 때도 그는 단지 죽일 의도를 가진 자였는데, '나에게 죽일 의도가 있다.'라고 죽일 의도가 있는 것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자고, 어떤 일이든 순종하고,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사랑스럽게 말하면서 그를 섬길 때도 그는 단지 죽일 의도를 가진 자였는데, '나에게 죽일 의도가 있다.'라고 죽일 의도가 있는 것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혼자 있을 때 날카로운 칼로 목숨을 빼앗을 때도 그는 단지 죽일 의도를 가진 자였는데 '나에게 죽일 의도가 있다.'라고 죽일 의도가 있는 것이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반이여.” 

“이처럼, 도반이여,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무지한 범부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 보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물질적 요소를 나(我)로 간주합니다(관찰합니다).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간주하거나,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있다고 간주하거나, 혹은 물질적 요소 안에 내가 있다고 간주합니다.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나(我)로 간주합니다.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간주하거나,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있다고 간주하거나, 혹은 식별작용 안에 내가 있다고 간주합니다.   

 

그는 무상한 물질적 요소를 '무상한 물질적 요소'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지 못합니다. 무상한 감수작용을 ‘무상한 감수작용'이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상한 지각작용을 ‘무상한 지각작용'이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상한 형성작용들을 ‘무상한 형성작용들'이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상한 식별작용을 ‘무상한 식별작용'이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지 못합니다.

 

괴로움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괴로움인 감수작용을 ··· 괴로움인 지각작용을 ··· 괴로움인 형성작용들을 ··· 괴로움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아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아인 감수작용을 ··· 무아인 지각작용을 ··· 무아인 형성작용들을 ··· 무아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유위(有爲)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유위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유위인 감수작용을 ··· 유위인 지각작용을 ··· 유위인 형성작용들을 ··· 유위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유위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살해하는 것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살해하는 것이다(살인자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살해하는 것인 감수작용을 ··· 살해하는 것인 지각작용을 ··· 살해하는 것인 형성작용들을 ··· 살해하는 것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살해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는 물질적 요소를 가까이하고(다가가고), 붙잡고, ‘나의 자아다.’라고 확고히 합니다(고집합니다).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가까이하고, 붙잡고, ‘나의 자아다.’라고 확고히 합니다. 그가 가까이 하고 붙잡은 이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은 오랜 세월 손해와 괴로움으로 이끕니다.

 

도반이여, 거룩한 이를 알아 보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가르침을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 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훌륭한 스승의가르침을 배워서, 물질적 요소를 나(我)로 간주하지 않습니다(관찰하지 않습니다). 나를 물질적 요소를 지닌 자로 간주하지 않고, 혹은 나에게 물질적 요소가 있다고 간주하지 않고, 혹은 물질적 요소 안에 내가 있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나(我)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나를 식별작용을 지닌 자로 간주하지 않고, 혹은 나에게 식별작용이 있다고 간주하지 않고, 혹은 식별작용 안에 내가 있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상한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무상한 감수작용을 ··· 무상한 지각작용을 ··· 무상한 형성작용들을 ··· 무상한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무상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괴로움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괴로움인 감수작용을 ··· 괴로움인 지각작용을 ··· 괴로움인 형성작용들을 ··· 괴로움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무아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무아인 감수작용을 ··· 무아인 지각작용을 ··· 무아인 형성작용들을 ··· 무아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무아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유위(有爲)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유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유위인 감수작용을 ··· 유위인 지각작용을 ··· 유위인 형성작용들을 ··· 유위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유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살해하는 것인 물질적 요소를 ‘물질적 요소는 살해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살해하는 것인 감수작용을 ··· 살해하는 것인지각작용을 ··· 살해하는 것인 형성작용들을 ··· 살해하는 것인 식별작용을 '식별작용은 살해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립니다.

 

그는 물질적 요소를 가까이 하지 않고, 붙잡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확고히 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을 ··· 지각작용을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가까이 하지 않고, 붙잡지 않고 ‘나의 자아다.’라고 확고히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하지 않고 붙잡지 않은 이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은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으로 이끕니다." 

“이렇게, 도반 사리뿟따여, 이처럼 연민하고 이로움을 원하여 말하고 가르치는 동료수행자인 존자들에게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한 사리뿟따 존자의 이 설법을 듣고서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습니다.”

 

anurādhasuttam (SN 22.86-아누루다 경)  
8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의 큰 숲에 있는 뾰족지붕 강당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 속의 오두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아누라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누라다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누라다여, 위없는 분이며,  최상의 사람이며, 궁극에 도달한 그분(으뜸가는 사람이고 최상의 사람이고 최상의 성취할 바를 성취한) 여래는 묘사되고 있는 이런 네 가지 경우에 대해 선언합니까?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도반들이여, 위없는 분이며 최상의 사람이며 궁극에 도달한 그분 여래는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묘사되고 있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와는 다른 경우를 선언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일 것이다. 또는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장로일 것이다.”라고.

그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다는 말로써 경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외도 유행승들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서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며, (고따마 존자가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을까?'라고.

그러자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 속의 오두막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저에게 왔습니다. 와서는 저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습니다. 한 곁에 앉은 외도 유행승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 아누라다여, 위없는 분이며,  최상의 사람이며, 궁극에 도달한 그분(으뜸가는 사람이고 최상의 사람이고 최상의 성취할 바를 성취한) 여래는 묘사되고 있는 이런 네 가지 경우에 대해 선언합니까?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세[존이시여,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위 없는 분이며 최상의 사람이며 궁극에 도달한 그분 여래는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묘사되고 있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와는 다른 경우에 대해 선언합니다.’라고. 세존이시여, 이렇게 말하자 그 외도 유행승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일 것이다. 또는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장로일 것이다.’ 라고. 세존이시여, 그러자 그 외도 유행승들은 저에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은 자라는 말로써 경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 저에게 외도 유행승들이 떠나간 지 오래지 않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며,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을까?'라고.”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감수작용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 식별작용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누라다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은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 그것이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형성작용들이건 간에 ··· 그것이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이것은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아누라다여, 이렇게 보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감수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성작용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떠난다. 탐욕의 떠남으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가 되지 않는다.’라고 안다."

 

“아누라다여, 그대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를 여래라고 그대는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적 요소로부터 다른 곳에 여래가 있다고 간주하는가(여래는 물질적 요소와 다르다고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감수작용을 ··· 감수작용으로부터 다른 곳에 ··· 지각작용을 ··· 지각작용으로부터 다른 곳에 ··· 형성작용들을 ··· 형성작용들로부터 다른 곳에 ··· 식별작용을 여래라고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식별작용으로부터 다른 곳에 여래가 있다고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그대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와 감수작용과 식별작용과 형성작용과 식별작용이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라고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그대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도 아니고(물질적 요소를 가지지 않는 것), 감수작용도 아니고, 지각작용도 아니고, 형성작용들도 아니고, 식별작용도 아닌 것이 여래라고 간주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누라다여, 지금∙여기에 그대에게 진실로부터 견고함으로부터(믿음으로부터) 여래가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대에게 '도반이여, 위없는 분이시며 최상의 사람이며 궁극에 도달한 그분 여래는 묘사되고 있는 이런 경우 즉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네 가지와 다른  경우에 대해 선언한다.’라는 설명이 적절한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누라다여. 아누라다여,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치고 선언할 뿐이다.”

 

vakkalisuttaṃ (SN 22.87-왁깔리 경)
8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왁깔리 존자는 도자기 굽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십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왁칼리 존자(ayasma Vakkali)는 사왓티의 바라문 가문 출신이다. 그는 세 가지 베다에 능통했는데 처음 세존을 뵈자 그분에게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 가까이 있기 위해서 출가하였다고 하며, 먹고 씻고 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세존만을 생각하였다고 한다.(AA.i.250) 세존께서 왁깔리 존자에게 말씀하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yo kho dhammam passati so mam passati; yo mam passati sodhammam passati)"는 말씀은 널리 알려진 가르침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에서 "신심 깊은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세존께서 칭찬하고 계신다. 
*주석서는 존자는 안거를 마치고 세존을 뵈러 가는 중이었는데 이 도시에서 중병에 걸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들것에 싫은 뒤 오기공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집은 작업장이고 거주하는 집은 아니었다라고 한다.(SA.ii.313)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왁깔리 존자에게로 가셨다.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이며 일어날려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가만히 있거라, 왁깔리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 겠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왁깔리여, 그대는 참을만한가? 그대는 회복될 것 같은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고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저에게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아질 뿐입니다.”
“왁깔리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왁깔리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왁깔리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몸은 이제 세존을 친견하러 갈만한 힘마저도 없습니다.”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서 없어질 이 몸을 봐서 무엇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왁깔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왁깔리여, 이와 같이 보는 비구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꿑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법을 설하시고 격려하시고 분발하게 하시고 기쁘게 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독수리봉 산으로 가시었다.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세존께서 나가신지 오래되지 않아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이리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옮겨다 주십시오.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집 안에서 임종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째 들어서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옮겨다 놓았다.

 

*'독수리 봉 산'으로 옮긴 원어는 Gijjhakuta pabbata이다. 주석서에서는 "독수리(gijjha)들이 그곳의 봉우리(kuta)들에 살았다고 해서, 혹은 그곳의 봉우리가 독수리를 닮았다고 해서 독수리봉이다."(DA.ii.516)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독수리봉은 라자가하를 에워싸고 있는 다섯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세존께서는 그날 밤을 독수리봉 산에서 머무셨다. 그날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난 뒤에 한 쪽에 섰다. 한 쪽에 서서 한 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사람으로 해탈할 것입니다.”

두 신은 세존께 이렇개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린 뒤 존경의 의미로 세존의 오른쪽으로 돌아 거기서 사라졌다.


세존께서는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왁깔리 비구에게 가라.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라.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천신의 말을 들으시오. 도반 왁깔리여, 어젯밤에 두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독수리봉 산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서서 한 천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천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반드시 원만하게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한 뒤 왁깔리 비구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왁깔리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왁깔리여, 세존의 말씀과 두 천신의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자 왁깔리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오시오, 도반들이여. 나를 침상에서 내려 주십시오. 나와 같은 자가 어떻게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존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왁깔리 존자를 침상에서 내려놓았다.
“도반이여, 어젯밤에 두 명의 천신들이 밤이 깊었을 때 온 제따 숲을 밝히면서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습니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서서 한 천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는 해탈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러자 다른 천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는 원만하게 해탈한 자로 해탈할 것입니다.’라고. 도반 왁깔리여, 세존께서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존재로 다시 이끌림]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도반들이여,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를 숙여 존경을 표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세존의 발에 머리를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왁깔리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적인 요소는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지닌 것에 대해서 제 자신이 탐욕이나 욕심이나 바람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지닌 것에 대해서 제 자신이 탐욕이나 욕심이나 바람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 식별작용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지닌 것에 대해서 제 자신이 탐욕이나 욕심이나 바람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비구들은 왁깔리 존자에게 대답한 뒤 돌아갔다.
그리고 왁깔리 존자는 비구들이 돌아간 지 오래지 않아서 칼을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왁깔리 비구가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왁깔리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적인 요소는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지닌 것에 대해서 제 자신이 탐욕이나 욕심이나 바램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는 법을 지닌 것에 대해서 제 자신이 탐욕이나 욕심이나 바램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자. 거기서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가 칼을 사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가 침상 위에서 육신이 거꾸로 된 채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각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각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은 사악한 마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식별작용(의식)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라고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의 식별작용(의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좋은 가문의 아들 왁깔리는 식별작용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assajisuttam (SN 22.88-앗사지 경)  
8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앗사지 존자는 깟사빠까 숲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고있었다. 그리고 앗사지 존자는 간병하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했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세존께 가십시오. 가서는 나의 이름으로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은 앗사지 존자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 비구는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연민을 일으키시어 왁깔리 비구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시고 왁깔리 존자에게로 가셨다. 앗사지 존자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몸을 움직이며 일어날려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만 가만히 있거라, 앗사지여. 침상에서 움직이지 말라. 여기에 마련된 자리가 있구나. 나는 앉아야 겠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뒤 세존께서는 앗사지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앗사지여, 그대는 참을만한가? 그대는 회복될 것 같은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고 알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저에게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아질 뿐입니다.”

“앗사지여, 그대는 후회할 일이 있는가? 그대는 자책할 일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후회할 일이 적지 않고 자책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앗사지여, 그러면 그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앗사지여, 만일 계행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자책하는가?”

“세존이시여, 전에 제가 병으로 아팠을 때는 몸의 작용을 계속적으로 고요하게 하면서 제4선에 들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런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앗사지여, 삼매를 닦음의 중심으로 여기고 삼매를 사문의 결실이라 여기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삼매에 들지 못하면 그들에게 ‘우리는 쇠퇴하지 않기를.’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앗사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 요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감수작용은 ···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은 ··· 식별작용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앗사지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철저히 알아차려야 한다.

 

앗사지여, 이와 같이 보는 비구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식별작용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梵行)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라고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집착할만 것이 못된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즐거워할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집착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즐거워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집착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 그것이 즐거워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안다.
만일, 앗사지여,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만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것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

 

앗사지여,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앗사지여,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철저히 안다. 
“예를 들면, 앗사지여, 기름을 조건으로 심지를 조건하여 기름 등불이 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등불에 시시때때로 기름을 부어넣지 않고 심지를 올려주지 않으면 그 기름 등불은 꺼질 것이다. 
앗사지여, 그와 같이 비구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는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철저히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몸이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거워할만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철저히 안다.” 

 

khemakasuttaṃ (SN 22.89-케마까 경)
8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렀다. 그 무렵 케마까 존자는 도자기 굽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중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로 비구들은 저녁 무렵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다사까 존자를 불러서 말했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참을만 합니까? 그대는 회복될 것 같습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참을만 합니까? 그대는 회복될 것 같습니까?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습니까? 더 심해지지 않고 낫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도반이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아질 뿐입니다.”
그러자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참을만하지 않고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괴로움 느낌이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을 알아질 뿐입니다.’라고.”


그러자 장로 비구들은 다사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을 설하셨습니다. 즉 물질적 요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감수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지각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형성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식별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입니다. 그런데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까?’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까?’라고”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나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 다사까여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나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 케마까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그런데 만약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케마까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그런데 케마까 존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케마까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라고.”
“도반이여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그런데 나는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은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들 가운데 그 어느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유학(sekha)과 아라한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유락은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는 20가지 유신견은 극복하였지만 아직 "오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관심)'등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무학인 아라한은 모든 잘못된 생각의 근본 뿌리인 무명을 모두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는 관념이 남아있지 않다.(SAT.ii.220)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케마까 비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설하셨습니다. ··· 나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라고.”

 

“이리 오시오, 도반 다사까여. 그대는 케마까 비구에게 가십시오. 가서는 케마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물질적 요소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라고."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다사까 존자는 장로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케마까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장로 비구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는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 나에게는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것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라고."

“도반 다사까여,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왜 그대가 이런 일로 왔다갔다해야 합니까? 도반이여, 지팡이를 주십시오. 내가 장로 비구들에게 직접 가겠습니다.”  

 

그러자 케마까 존자는 지팡이를 짚고 장로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장로 비구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케마까 존자에게 장로 비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적 요소를 두고(물질적 요소에 대해)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물질적 요소를 떠나서(물질적 요소와 다른 곳에서) ‘나는 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까?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 말합니까? 도반 케마까여, 그대가 ‘나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것은무엇입니까?”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적 요소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두고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비록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얻음이(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있지만 나는 [이들 가운데 그 어느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향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꽃잎의 냄새다.'라거나, '줄기의 냄새다.'라거나, '꽃가루의 냄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도반이여, 바르게 말하는 자는 '꽃의 향기가.'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적 요소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적 요소를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감수작용을 두고 ··· 지각작용을 두고 ··· 형성작용들을 두고 ··· 식별작용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식별작용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비록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턷음이 나에게는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는 간주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이렇게 물질적 요소가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감수작용이 있고 ··· 이렇게 지각작용이 있고 ··· 이렇게 형성작용들이 있고 ··· 이렇게 식별작용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사라짐이 있다.’라고.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그에게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나는 있다.’라는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도 뿌리 뽑힙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더럽고 때가 묻은 천이 있습니다.주인이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러면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비벼서 맑은 물에서 씻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천은 청정하고 깨끗하게 되었지만 (미세한 )소금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뿌리 뽑히지 않았습니다. 세탁업자가 이런 천을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주인은 그 천을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에 넣습니다. 그러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소금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도 제거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이렇게 물질적 요소가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물질적 요소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감수작용이 있고 ··· 이렇게 지각작용이 있고 ··· 이렇게 형성작용들이 있고 ··· 이렇게 식별작용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식별작용의 사라짐이 있다.’라고.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보면서 그에게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나는 있다.’라는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집착과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도 뿌리 뽑힙니다."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케마까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케마까 존자를 귀챦게 하려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가르침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케마까 존자는 그분 세존의 가르침을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였습니다.”

케마까 존자의 말을 들은 장로 비구들은 이렇게 즐거워하면서 케마까 존자의 말을 기뻐했다. 그리고 이 상세한 설명이 말해졌을 때 60명의 장로 비구들과 케마까 존자는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channasuttaṃ (SN 22.90-찬나 경)
90. 한 때에 많은 장로 비구들이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무렵 찬나 존자는 저녁 무렵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열쇠를 가지고 이 승원 저 승원으로 찾아 다니며 이렇게 말했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주십시오.”라고.

 

*주석서에 의하면 찬나 존자(ayasma Channa)는 세존께서 출가하실 때 말을 몰던 마부였다. 그도 뒤따라 출가하였지만 그는 세존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내세워 지나친 자만과 오만이 생겨서 다른 비구들을 험달하며 지내뿐 수행에는 힘쓰지 않았다고 한다.(SA.ii.317)   
세존께서 반열반하실 때 찬나 존자를 언급하시면서 그에게 일종의 집단 따돌림인 최고의 처벌(brahma-danda)를 주라고 말씀하셨다.(D16) 율장에 의하면 찬나 비구는 이 처벌을 받고 정신을 차리고 자만심과 방만한 생활을 버리고 홀로 머물며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Vin.ii.292) 
본경은 찬나에게 이러한 최고의 처벌이 내려진 후에 생긴 일화를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자 장로 비구들은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찬나여,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감수작용은 무상하고, 지각작용은 무상하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식별작용은 무상합니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감수작용은 무아이고, 지각작용은 무아이고, 형성작용들은 무아이고, 식별작용은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작용들(형성된 것들.제행무상(諸行無常)은 무상이고,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제법무아.諸法無我). 

 

그때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감수작용은 무상하고, 지각작용은 무상하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식별작용은 무상하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감수작용은 무아이고, 지각작용은 무아이고, 형성작용들은 무아이고 식별작용은 무아이다. 모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모든 법들은 무아다’라고. 그러나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작용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근거를(붙잡음)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떠남, 소멸, 열반에 대해 나의 마음은 들어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동요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다. 참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라고.

그래서 찬나 존자는 거처를 정리한 뒤에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꼬삼비에 있는 고시따 숲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찬나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한 때에 저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렀습니다. 저녁 무렵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열쇠를 가지고 이 승원 저 승원으로 찾아 다니며 장로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로 존자들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주십시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장로 비구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 찬나여,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감수작용은 ··· 식별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식별작용은 무상합니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 식별작용은 무아입니다. 모든 형성작용들은 무상이고 모든 법들은 무아입니다.’라고. 도반이여, 그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물질적 요소는 무상하고 ··· 식별작용은 무상하다. 물질적 요소는 무아이고 ··· 감수작용은 지각작용은 ··· 형성작용들은 ··· 식별작용은 무아이다. 모든 형성작용들은 무상하고 모든 법들은 무아이다.'라고. 그런데 모든 형성작용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탐욕의 떠남이고, 소멸인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모든 재생의 근거를(붙잡음)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떠남, 소멸, 열반에 대해 나의 마음은 들어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 동요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법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법을 설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도반이여, 그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에게 내가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다. 참으로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라고.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말씀을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에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도반 찬나여, 나는 찬나 존자의 말을 듣고 이치에 맞는 의문과 질문때문에 기쁩니다. 그리고 찬나 존자는 이제 스스로를 활짝 열었고 자신의 방만함을 부수었습니다. 도반 찬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 단지 그정도의 말씀으로도 ‘참으로 나는 법을 알 수 있다고 하시는구나!’라고 커다란 희열과 환희가 생겼다.

 

“도반 찬나여,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깟짜나곳따 비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 지녔습니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다.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그러나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대한 없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 세상에 대한 있음이라는 견해가 없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경향과 집착에 묶여 있다. 그런 마음의 다가가서 붙잡음에 의한 결정과 경향과 잠재성향에게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접근하지) 않고, 붙잡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다.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일어나고 있는 괴로움은 일어난다. 소멸하고 있는 괴로움은 소멸한다).’라고 회의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이런 점에서 바른 견해이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한끝이다). ‘모든 것은 없다.’라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두 번째 끝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벗어나서 여래는 그대에게 중(中)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형성작용들)이 있다. 행들을 조건으로 의식(식별작용)이 있다.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명색)이 있다.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감수작용)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있다.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기 때문에 행들이 소멸한다. 행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별작용이 소멸한다. ··· 이렇게 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도반 아난다여, 참으로 존자들은 이처럼 동료 수행자들을 연민하고 그의 이로움을 원하여 충고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분들입니다. 그리고 저를 위한 아난다 존자의 이 설법을 듣고서 저는 법을 이해했습니다.”

 

rāhulasuttaṃ (SN 22.91-라훌라 경)
91.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 무렵 라훌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
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쪽에 앉았다.한 쪽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식별작용(의식)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까?”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보의, 혹은 거칠건 미세한, 혹은 열등하건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본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보의, 혹은 거칠건 미세한, 혹은 열등하건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본다.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자에게 식별작용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dutiyarāhulasuttaṃ (SN 22.92-라훌라 경2)
92. 사왓티에서 설해짐.
한 곁에 앉은 라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우리의 마음은 식별작용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해서 ‘나’라는 생각과 ‘의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평화롭게 되고 원만하게 잘 해탈하게 됩니까?”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물질적 요소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 ··· 어떠한 감수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지각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형성작용이건 간에 ··· 어떠한 식별작용이건 간에,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혹은 내부나 외부의, 혹은 거칠거나 미세한, 혹은 열등하거나 수승한, 혹은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실하게 알아차려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마음은 식별작용을 가진 이 몸과 밖의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을 제거하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뛰어넘어 평화롭게 되고 해탈하게 된다.”

 

 

 

제9장 장로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