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현법열반이 외도사상이라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 못하는 연꽃글을 비판함

실론섬 2014. 5. 15. 10:02

1)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 자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연꽃은 자신의 수많은 글에서 해탈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주장을 하여왔다. 그런 글에 대해서 내가 여러번 틀린 말이라고 지적하자 어느 날 부터인가 슬그머니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연꽃에게 수십번 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다. 해탈과 열반의 차이가 뭐냐? 같은 것이냐? 같으면 왜 같은 것이고 틀리면 무엇이 틀리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단한번도 해탈과 열반에 대한 자신의 확립된 생각을 밝힌 적이 없다. 즉 해탈과 열반에 대한 개념 정리가 전혀 머리속에 안되어 있고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이번에 마성스님의 현법열반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꺔냥도 안되는 재가자 주제에 출가 수행승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만약에 그의 주장이 맞다면 마성스님의 글이 잘못된 것이지만 만약에 그의 글이 틀린 것이라면 이는 향후 공개적인 참회의 글과 잘못을 자인해야 할 것이다. 마약에 그렇지 않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꽃의 외도적 사견을 추적 고발할 것이다.


2) 디가니까야에서 붓다가 지적한 가짜열반 다섯가지   

연꽃은 현법열반((ditthadhammanibbana)을 삿된 견해고 틀린 것이라고 하면서 디가 니까야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다. 그럼 붓다께서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유형을 다섯가지 나열하고 이를 62가지 사견중의 하나로 지목했는지 붓다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1)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존자여, 이 자아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충분히 즐깁니다. 존자여, 그런 까닭에 이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ditthadhamma. 현재. 금생)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입니다. 라고 천명한다.

2)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참으로 존재 합니다. 나는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초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라고 천명한다.

3)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참으로 존재 합니다. 나는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 2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라고 천명한다.

4)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참으로 존재 합니다. 나는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 3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라고 천명한다.

5)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참으로 존재 합니다. 나는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 4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라고 천명한다. 


글자를 읽을 줄 알고 눈이 있는 분들이라면 붓다께서 왜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이루었다고 천명하는 작자들을 외도라고 비난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아를 인정하고 있고 자아를 전제로 한 엉터리 열반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불교계의 병폐중의 하나인 마치 깨닫지 못했으면서 한소식 했다고 말하는 사이비들과 비견되는 것이다. 이때 사용된 용어가 "지금 여기에서"라는 말인데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다보니 이 귀절에는 현법열반이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마하시사야도가 현법열반론을 비난한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죽으면 아무것도 없으니 현재 여기에서 즐기자는 쾌락주의자들이나 단멸론자들을 비판한 것인지 교리적 용어인 현재 여기 이곳에서 열반을 획득하는 "현법열반"을 비난한게 아니다. 


위 경전의 내용으로 대부분의 불자분들은 금방 깨닫고 이해하셨으리라 믿지만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외도들이 현재 여기에서 얻었다는 열반(현법열반)과 붓다나 아라한분들이 현재 여기에서 얻은 열반(현법열반)이 어떻게 다른지 아래 글에서 좀더 살펴보자.  


3) 열반은 죽은 뒤에 실현되는가 아니면  살아서 실현되는 것인가?

붓다께서는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즉 살아서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현법열반을 이룬 것이다. 경전은 다음과 같이 현법열반을 고구정녕이 말씀하신다.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이와 같이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을 ... 싫어하여 떠나고, 싫어하여 떠나서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할일은 다했고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안음을 꿰뚫어 안다(윤회하지 않는다. 열반)


그 이외에 굳이 여러 예를 들지 않더라도 붓다의 지금 여기 이곳 현재의 법에서 가르침을 얻고 그 가르침으로 지금 여기 이곳 현재에서 열반을 얻는 것이다. 열반은 현재의 상태에서 생사로 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라한은  현법(現法)에서 해탈할 뿐이다. 불교는 열반을 두가지로 설명한다. 열반을 얻었지만 남아있는 생을 살아가는 것을 유여열반이라고 하며 이는 곧 현법열반인 것이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면 이것을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간혹 어떤 분들은 열반은 죽은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 하지만 열반은 다른말로 불사(不死)의 문을 열었다고도 표현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죽기 때문에 태어난다. 만약에 죽지 않는다면 다시 태어남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열반의 세게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 상상력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경계이다. 이부분은 "열반 세계의 존재유무"에서 충분히 밝혔기에 지면상 줄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불교의 모든 열반은 현법열반이다. 태어나기 전이나 죽어서 열반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4) 무엇이 붓다 법의 특징인가? 

그것은 현재 이곳 여기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하라는 현법열반에 대한 것이다.


1.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 

2. 시간(때)을 기다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3. 와서 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

4. 지금 여기 현재에서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5. 지혜있는 사람이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과거를 좇지 말고 미래를 원치 말라. 지난간 것은 이미 버려진 것들이다.

또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현재의 사항을 각자의 처지에서 잘 관찰하여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그 경지를 확대시켜 가라. 오직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라. 누가 내일

죽음이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 형성된 것들은 변해가고 소멸하기 마련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 너희들의 수행을 완성하라.


타종교나 일부 대승불교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특히 정토종의 극락왕생이나 일부 보살사상은 내세의 성불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붓다의 친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붓다의 법은 현재 여기 이곳에서 열반으로 잘 인도하는 현법열반을 가르친다. 이것이 빠알리 경전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붓다 법의 특징이다.


5) 마성스님이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밝힌 현법열반이 잘못된 것인가?

그런데 불교에서는 노동의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노동의 종교적 의미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따. 에릭 포름(Eric Formm)은 "인간은 '생존의 욕구'와 '초생존의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 욕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보다 숭고한 종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종교적 이상을 땀 흘리는 노동의 현장에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 열반은 이 세상을 떠나 저 멀리 피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노동은 경제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뛰어넘어 종교적 의미로까지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기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무엇인가, 마성스님. 불교닷컴 2014.05.07)


기고문에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라는 표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현법열반(現法涅槃)' 열반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현법열반은 부처님의 62가지 삿된견해 중의 하나로 간주 하였기 때문이다.... 현법열반은 '지금 여기에서 열반'이라는 뜻이 된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현법열반론이다. 하지만 현법열반론은 삿된 견해라는 사실이다. 왜 사견(邪見)인가? ... 과연 스님은 현법열반에 대하여 정화갛게 알고 말한 것일까? 아니면 몰라서 한 말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스님이 표현한 현법열반론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현법열반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디가 니까야에서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성스님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이다" 라고 천명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연꽃이라는 외도의 망발)


다시 말하지만 디가니까야에서 설명한 5가지 엉터리 열반론은 그 문맥상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이라는 문장에서 "지금 여기에서 열반" 이라는 문맥을 번역하다 보니 그것을 "현법열반"이라고 했을 뿐이지 실제로 "지금 여기에서 올바른 열반을 얻은" 그러한 올바른 현법열반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즉 연꽃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마치 동물이 아무곳에나 배설물을 내 갈기듯 뱉어 낸 외도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 자신 스스로 디가 니까야의 잘못된 열반을 나열한 것과 붓다의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서 말씀하신 마성스님 현법열반을 철저하게 삿되게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연꽃이라는 작자의 정신상태 

왜 이런식으로 경전을 자기 멋대로 볼까? 그것은 붓다께서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작자들에게 엄중하게 훈계하셨듯이 그의 정신 상태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은 가짜 귀걸이 처럼

금칠을 한 동전처럼

어떤 작자들은 꾸미고 돌아 다니니

그들은 안으로 더럽고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입니다


현자처럼 으시대는 얼간이들은

자기가 아는 범위내에서 오직 말로만 지껄이고 다니네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 자기 입을 벌려 대기만하고

무엇이 자기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네


6) 붓다의 현법열반을 비난한 자

불교의 열반은 모두다 현재의 붓다의 법에서 열반을 이룬 현법열반이다. 따라서 현법열반의 올바른 교리적 뜻도 제대로 모른채 자기가 아는 깜냥으로 붕어처럼 입만 벙긋 거린 자는 결과적으로 마성스님뿐만 아니라 붓다까지도 비난을 한게 된다. 이런 삿된 견해를 움켜쥐고 있는 자들의 다음 태어날 곳은 어디인지, 다음 생애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고 하셨듯이 우리 모든 참된 불자는 연꽃같이 삿된 견해를 움켜쥔 외도가 되어 스스로의 공덕을 망치고 다음 생이 악처로 인도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다.